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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1화

Author: 임공
이호민이 나가고 방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 샤워할게요.”

시연은 원래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들어올 때 왕성애가 미리 물을 받아놨다고 말해 주었다.

“응.”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시연은 욕실로 향하려다 멈춰 섰다.

“시연아.”

그가 갑자기 불렀다.

“네?”

그녀가 돌아보았다.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왜 돌아온 거야?”

시연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유건은 별다른 감정을 표출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썩 반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솔직하게 답했다.

“할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이게 무슨 말이지?’

유건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를 위해 돌아왔다는 건 이해하겠지만, 나를 위해서라니?’

그는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를 위해서? 날 그렇게 좋아했어?”

‘내가 주는 사랑이 완벽하지 않아도 감수하겠다는 뜻인가?’

이 말은 예의도 없었고, 어딘가 다그치는 느낌까지 들었다.

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돌아온 게 당신과 장소미를 방해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고 해도, 나한테 화풀이하진 말아요.”

유건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는 절대 시연에게 화풀이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냥 너무 갑작스러웠고,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연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장소미랑 함께 있고 싶다면, 나를 문제 삼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으세요.”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장소미를 받아들이도록 만들면 되잖아요. 나한테 따지려 들지 말고요.”

‘생각해 보면, 장소미도, 고유건도 결국 같은 행동을 하고 있어.’

‘둘 다 할아버지를 설득하진 못하면서 나한테 화살을 돌리고 있으니까.’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시연은 욕실로 들어갔다.

유건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더욱 답답해졌다.

‘내가 왜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거지?’

...

샤워를 마친 시연이 욕실 문을 여는 순간, 유건이 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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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12화

    “사모님께서 신 걸 좋아하는 걸 보니, 그 아이는 분명 남자아이겠어요! 어르신께서도 기뻐하시겠네요!”왕성애가 유건을 향해 물었다.“도련님은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갑작스럽게 화제가 넘어오자, 유건의 머릿속엔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장소미 배 속에 있는 아이는...’그는 CA국에서 돌아온 후 계속 바빴고, 할아버지 문제까지 겹쳐 며칠째 소미와 연락을 하지 않았다.‘지금쯤, 장소미와 배 속의 아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그는 갑자기 마음이 뒤틀렸다.그리고 답답함을 견딜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섰다.“도련님?” 왕성애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 가세요?”“잠깐 나갔다 올게요.”유건은 시연을 흘끗 보고 말했다.“천천히 먹어. 오늘 저녁에 회식이 있어서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그래요.”시연은 짧게 대답했지만, 목구멍에 걸린 말이 내려가지 않았다.‘할아버지께서 맡긴 일을,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술집.유강석은 테이블 건너편에서 계속 술을 들이켜는 유건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도 굳이 친구를 말리지 않았고, 그냥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아내도 집으로 돌아왔는데, 너 왜 그러냐?”그가 조용히 물었다.“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 아니었어?” ‘그렇지...’유건은 짧게 트림하고, 술잔을 내려놓았다.“화장실 좀.”그러나 그는 화장실로 간 게 아니고, 담배를 피우러 간 것이었다.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유강석이 고개를 저었다.“저 녀석, 너무 도덕적인 거야.”“그보단 유년기 트라우마 때문이겠지.” 주정빈이 낮게 말했다.유건은 부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아버지가 유건을 버렸다고 한다.그리고 유건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쫓기다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오래전 일이었고, 어린 시절 유건에게 벌어진 사건이었기에, 친구들도 구체적인 사정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13화

    지씨 저택.지동성이 수저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그리고 장소미를 흘끗 보며 말했다.“오후 3시, 부속 병원에 가도록 해. 늦지 말고.”장미리는 딸을 한번 노려보고는 곧바로 웃으며 맞장구쳤다.“소미는 잘 알아들었을 거예요. 제가 같이 갈 테니, 늦을 일도 없을 거고요.” “흥.”지동성은 비웃음을 흘리고는 식탁 위의 냅킨을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다.“엄마.”소미는 초조한 듯 장미리의 팔을 붙잡았다.“나 진짜 간 이식해야 해요?”“급할 필요 없어.”장미리는 눈썹을 찌푸리며 딸의 손을 토닥였다.“간 이식이 말처럼 쉬운 줄 아니? 적합해야 수술할 수 있어. 일단 검사를 해 보는 거지, 꼭 맞는다는 보장도 없잖아?”“그렇긴 하지만...”하지만 소미는 여전히 불안했다.의사가 말하기를, 직계 자녀의 적합률이 매우 높다고 했다. 만약 진짜 적합하면, 그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나만 딸이야? 왜 하필 나야?!’“그리고...”장미리는 또 다른 걸 떠올린 듯, 딸의 배를 바라보았다.“비록 가짜지만, 고상훈 어르신은 모르시잖아. 가짜 진단서라도 준비해 놔야 해.” 고상훈은 이미 경고했다. 만약 지동성이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본인이 직접 나설 거라고.만약 그때 가서 이 모든 게 거짓이었다는 게 밝혀지면, 그야말로 지씨 집안 전체가 끝장날 수도 있을 터였다.소미도 더는 방법이 없었다.그날 이후로, 그녀는 감히 유건을 찾지 못했고, 유건 또한 그녀를 찾지 않았다.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 포기하는 것뿐이었다.소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대로 끝낼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장미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방법이 있다면, 엄마도 이러고 싶진 않지.”모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강울대병원.오후, 장미리는 장소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교통 체증을 피하려고 일찍 출발했더니, 2시 30분에 도착했다.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빨랐다.장미리는 딸을 외래 진료실 근처 긴 의자에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14화

    지동성은 듣기조차 싫다는 듯,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장미리를 바라보았다.“내가 이런 배은망덕한 자식을 키웠다니!”“아니에요, 분명 무슨 오해가 있는 거예요.”그러나 지동성은 아내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었고, 팔을 휙 뿌리치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장미리는 초조함과 분노로 발을 굴렀다.“빚쟁이 같은 것들! 소미는 대체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의식이 서서히 돌아오자, 사방이 캄캄했다.장소미는 본능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입이 테이프로 막혀 있었다.“으음... 으음...!”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뿐이었다.‘또다시 납치당한 거야?’‘왜?! 또 고상훈인가?!’하지만 소미는 이미 고상훈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더 이상 고유건을 찾지도 않았는데, 대체 그 늙은이는 언제까지 날 괴롭힐 생각이지?!’“으음! 으으음!!”그녀는 몸부림쳤다. 결국 의자째로 바닥에 쓰러지며, 커다란 소리가 났다.쾅!여자의 온몸이 아파서 눈앞이 번쩍했고,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소란이 컸던 탓인지,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희미한 빛이 비쳤다.소미가 빛을 통해 보니, 이곳은 창고처럼 보였다.그렇지만 이곳은 잘 정리된 상태였고, 폐건물처럼 보이진 않았다.그리고 바깥에서는 어렴풋이 파도 소리가 들렸다.‘여긴... 부둣가? 배 안 화물 창고인가?’“이런!”들어온 사람이 바닥에 쓰러진 소미를 보고 놀라서 다급히 달려왔다.“너, 왜 이렇게 됐어? 다치면 안 된다고 했잖아! 네 몸이 얼마나 귀한지 알기나 해?!”소미는 깜짝 놀랐다.‘뭐라고?’‘이건 무슨 뜻이지? 혹시 장기 밀매 조직인가?’‘이젠 병원에서 대놓고 납치하는 게 가능해진 건가?’‘아니, 뭔가 이상해.’그녀는 생각해 보았다.‘납치범들이 처음에 내 이름을 불렀어.’‘즉, 처음부터 나를 목표로 삼았다는 뜻이야.’“으음! 으으음!!”소미는 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가만히 있어!”여자의 소란에 다급히 들어온 두 남자가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15화

    마른 남자와 통통한 남자는 2초가량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도 안 돼!”정신을 차린 마른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진짜예요!”소미는 필사적으로 해명했다.“저는 지금 두 분 손에 잡혀 있는데, 어떻게 감히 거짓말하겠어요? 두 분, 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신 거예요?” “흥.”마른 남자가 비웃으며 비꼬았다.“네 입으로 직접 고유건 대표님한테 임신했다고 말했다며!”‘고유건?!’소미의 눈이 커졌다.즉, 이들은 유건을 미행하다가 그녀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놈들이 왜 고유건을 미행하는 거지?’‘날 납치한 것도 고유건과 관련이 있는 걸까?’그러나 지금은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고, 그녀애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안전이었다.“저는 임신 안 했어요. 맞아요, 고유건한테 임신했다고 말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소미는 체면도 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건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 사람을 붙잡으려고 한 거짓말이었어요. 임신은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뚱뚱한 남자와 마른 남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헛소리하지 마! 도망치려고 거짓말하는 거잖아?”“아니에요!”소미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임신 여부는 간단히 확인할 수 있어요. 지금 당장 병원에 가면 돼요. 피만 뽑으면 바로 결과가 나오니까요!”여자의 말에 두 남자는 순간 말을 잃었다.뚱뚱한 남자가 중얼거렸다.“거짓말 같지는 않은데.”마른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렇죠.”이를 본 소미는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두 분은 아이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요. 하지만 제 배 속에 아무것도 없다면요?”“괜히 헛수고하는 거 아닌가요? 힘들기만 할 뿐만 아니라... 고용주도 기분 나빠하지 않겠어요?”그 말이 핵심을 찔렀다.마른 남자는 이를 악물고 결정했다.“병원으로 가자!”“알았어.”그는 소미를 가리키며 경고했다.“얌전히 있어! 애가 없으면 놔주겠지만, 이상한 짓 하면 가만 안 둬!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16화

    ‘이놈들이 대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거지?’‘납치범에게 신뢰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법이야!’소미의 눈가가 뜨거워졌고, 이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갑자기 뚱뚱한 남자가 차 문을 열었다.운전하고 있는 마른 남자를 흘끗 보며 물었다. “던질까?”“응.” 마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뚱뚱한 남자가 소미를 묶고 있는 밧줄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소미는 온몸이 굳어버렸다.‘고속도로에서 이 속도로 달리는 차에서 나를 던진다고?’‘죽지 않더라도 크게 다칠 게 분명해!’‘게다가 사방에서 차들이 오가니, 잘못하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도 있어!’“자! 꺼져라!”“으윽...”예상했던 대로, 소미는 차 밖으로 내던져졌다. 낡은 헝겊 조각처럼 아무런 힘도 없이, 단숨에 멀리 튕겨 나갔다.차 안에서 뚱뚱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아! 생각도 못 했네. 고유건 같은 영리한 놈이 여자한테 속다니!”“아무리 영리해도 인간인걸. 사람이라면 다 약점이 있는 법이지.”...땅에 부딪히는 순간, 소미는 온몸으로 고통을 느꼈다. 땅에 쓸린 피부가 화끈거리고, 뼈마디는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으흑...”그녀는 온몸이 묶인 데다 입까지 막혀 있어서, 울음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낼 수 없었다.이게 과연 다행일까, 불행일까?도로에 차가 많지 않았지만, 가끔 지나가는 차량은 소미를 피해 지나칠 뿐이었다.‘누가 좀 나를 도와줄 수 없을까?’그때, 전방에서 두 개의 강한 불빛이 다가왔다.자동차 전조등이었다.소미는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차가 멈춰 섰고,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내렸다.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윤이 나는 남성용 비즈니스 구두, 정교한 마감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소미는 천천히 눈을 떴다.노은범이었다.은범은 소미를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장소미 씨?”‘시연이의 이복언니?’두 사람은 서로 친하지 않지만,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였다.“왜 이 모양이에요?”“으윽, 으윽...”그제야 은범은 소미의 입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17화

    장미리가 말하기를 꺼리니, 은범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별거 아니라는 듯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시간, 유건과 시연은 병원에서 고상훈을 문병하고 있었다.이호민도 함께 있었고, 고상훈은 손에 달력을 들고 날짜를 살피며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다.둘이 도착하자 고상훈이 손짓했다.“잘 왔다. 결혼 날짜를 보는 중인데, 이 집사도 점을 쳐봤다더라. 다음 달 9일로 정하자꾸나.”순간, 시연은 눈이 동그래졌다.유건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다음 달 9일? 고작 2주 후인데?’“이렇게 빨리요?” 시연은 난색을 보였다.“빨라?”고상훈과 이호민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전혀 안 빠르단다!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으니, 2주면 충분하지. 걱정하지 마라.”고상훈은 달력을 이호민에게 건네며 시연의 배를 흘끗 보았다.“내 증손자가 아직 티가 나기 전에 서둘러야 해. 더 미루면 배가 불러올 테니까.”그 이유 앞에서 시연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그것뿐만이 아니야. 결혼식은 체력이 많이 드는 행사라, 배가 많이 나오면 네가 힘들까 봐서 걱정이구나.”여기까지 왔는데, 시연이 거절할 수 있을까?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할게요.”“역시 내 손녀 며느리가 가장 착하지.”고상훈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호민에게 당부했다. “바로 준비 시작해라.”“걱정 마세요, 어르신.”“다만...”고상훈은 한숨을 쉬었다.“내 몸 상태 때문에 시연이에게 미안하구나. 결혼식은 G시에서 해야 하고, 신혼여행도 당장은 힘들 테니.”“하지만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너희 둘은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괜찮겠니?”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전 괜찮아요.”‘어차피 지금은 고유건이랑 어색하니까...’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무심코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유건은 병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정확히는, 시연이 돌아온 후로 줄곧 이런 태도였다.차갑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18화

    유건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가야 해.”그리고 잠시 멈칫하더니 덧붙였다. “너한테 말하는 건,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야.” ‘할아버지는 우리 두 사람이 함께한다고 믿고 있으실 테니까.’ “기환이가 너랑 동행할 거야.”시연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이 사람이 떠나는 걸 막을 수 없어.’그녀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아무 말 없이, 그것이 곧 동의라는 듯.유건은 이를 악물었다. “고마워.”그는 차문을 열고 타더니, 곧바로 떠나버렸다.시연은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형수님.”기환이 그녀의 뒤에 섰다. “차에 타세요.”“네.” 시연은 조용히 차에 올랐다.기환이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어디로? 본가로 돌아갈 수는 없고...’‘혼자 돌아가면, 할아버지께 고유건이 나를 버렸다는 걸 알리는 거나 다름없잖아.’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 데나, 그냥 드라이브나 하고 싶어요.”“네, 알겠습니다.”기환은 룸미러로 시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저렇게 연약해 보이는데, 어떻게 저렇게 강할 수 있을까?’...병원.유건이 도착하기 전에, 노은범은 이미 떠나 있었다.그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 장소미는 이미 병실로 옮겨져 있었고, 장미리가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소미야, 많이 아프지? 아프면 참지 말고 울어도 돼.”“엄마, 으흑...”그 광경을 본 순간, 유건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고,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듯했다. “소미 씨.”소미가 고개를 들었다. 유건을 보는 순간, 눈물이 더 쏟아졌다.“유건 씨! 으아아...”유건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소미의 손을 꼭 잡았다.“유건 씨, 아기, 우리 아기...”소미는 흐느껴 울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결국, 장미리가 울면서 대신 말했다.“고 대표님, 소미가 아이를... 잃었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유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가장 걱정했던 일이, 결국 현실이 되어버렸다.납치,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319화

    유건의 눈빛이 깊고 어두웠다. ‘내가 반드시 답을 얻어야 해!’소미는 목이 메었다. “엄마 말이 사실이긴 하지만, 고상훈 어르신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이걸로도 부족하다고?” 장미리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그분 말고 또 누가 네 아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데?!” “엄마...”언성이 높아졌다.유건은 눈을 감았다가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미 씨, 푹 쉬어.”그는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지금 당장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확인해야 해!’유건이 나가자, 장미리는 긴장한 얼굴로 소미의 손을 잡았다.“이래도 괜찮겠지?”소미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건 벼랑 끝에서 내딛는 한 걸음이었다. 그녀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고유건일 거예요.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은 평생 저를 잊지 못할 거라고요.” 그 말을 듣고 장미리마저도 가슴이 떨렸다....이호민은 고상훈의 발을 씻기고 있는데, 유건이 다시 돌아왔다.게다가 유건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고상훈은 힐끗 손자를 보더니 흥미로운 듯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할아버지.”유건은 빠르게 다가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소미 씨의 아이... 할아버지가 시킨 겁니까?”“뭐?”고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그리고 이내, 노인은 피식 웃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장소미가 그렇게 말하던가?”“할아버지!”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였다. 그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저는 대답을 듣고 싶어요. 맞습니까, 아닙니까?”“도련님...”이호민은 당황하며 중재하려 했다. “어르신께 그렇게 따지듯이 묻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유건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아이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는데,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어?’‘장소미와 그 아이는 모두 내 가족인데, 할아버지가 대체 왜!!’“후후.”고상훈은 미소를 거두고 손을 흔들었다.“이 집사, 정말 눈치가 없구나. 내 목숨 따윈, 그 연예인보다 하찮지 않겠나?” 이 말은 유건의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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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45화

    “느낌이 안 좋네요...!”이호민은 다급히 벽 쪽 스위치를 눌렀다.불이 켜지는 순간,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방 안은 마치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듯,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책상과 의자는 비뚤게 기울어져 있었고, 바닥엔 깨진 유리 조각과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었다.공기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극적인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이 냄새는 또 뭐예요...?” 왕성애는 인상을 구기며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창문부터 열어야겠어요!못 견디겠어요!”“전 유건 도련님부터 볼게요.” 이호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소파에 구겨진 채 누워 있는 유건이 보였다. 셔츠도 그대로, 신발도 그대로. 온몸이 술과 담배에 절여져 있었다.“도련님.” 이호민이 조심스럽게 부르며 다가갔다.“유건 도련님, 일어나보세요.”숨소리는 있었지만, 전혀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이 정도로 취했다고?’조심스레 어깨를 두드리려던 찰나, 갑자기 유건이 벌떡 일어나 그대로 욕실로 달려갔다.“윽...!”‘진짜 토하네...’이호민은 욕실로 다가가 보니, 유건은 변기에 몸을 웅크리고 술을 게워 내고 있었다.곧 물을 틀어 입을 헹구고, 세수하며 거울 앞에 섰다.“유건 도련님...”이호민이 수건을 건넸다.“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아무리 젊어도, 이렇게 몸 상하면 어르신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어요.”“할아버지한텐 말하지 마세요.”유건은 수건으로 대충 얼굴을 닦고, 그대로 빨래통에 던졌다. 이어서 욕실을 나서며 배 쪽을 살짝 짚었다.“배... 괜찮으세요?”이호민이 걱정스레 다가오며 말했다.“이럴 때일수록... 사모님을 불러보면 어떨까요? 전 두 분 사이에 큰 오해가 있다고 봐요. 얘기만 잘하면...”“지시연 얘기는 하지 마세요.”유건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게 가라앉았다.“앞으로 그 여자 이름을 한 번만 더 입에 올리면...”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끝을 세게 눌렀다.“진정한 고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이럴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44화

    ‘말도 안 돼!!’강수희는 숨을 들이켰다. 놀라움, 당혹, 불신...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떠올랐다.“시연아, 넌 우리 은범이를 그렇게 아꼈잖아. 은범이 곁을 밤새워 지키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아무 감정이 없다고?”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제가 은범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이었어요.”“그렇게 말하지 마.” 강수희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아냐... 날 원망해서 그러는 거지? 내가 너희 사이 갈라놓았던 거, 다 인정할게. 앞으로 다시 만난다면, 절대 방해 안 할게. 아니다... 아예 안 보이게 사라질게. 너만 은범이 옆에 있어 준다면...”“사모님.”시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막아섰다. “그만 말씀하세요. 저는 은범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이젠, 정말로... 아니에요.”강수희는 마치 뺨을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너희 둘, 그렇게 사랑했는데...”“그건 과거일 뿐이에요.” 시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고요.”그 말에, 강수희는 말문이 막혀 굳어버렸다. 시연은 한 박자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물론 사모님의 부탁으로 잠시 은범이 곁에 있어 줄 순 있어요. 하지만, 그건 단지 일시적인 거예요. 제가 다시 떠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때 또 무너지면, 은범이는 더 나빠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은범이는 스스로 일어나야 해요. 온 세상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떠나도 견딜 수 있어야... 그게 진짜 회복이에요.”시연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가방을 메고, 마지막으로 강수희를 바라봤다.“사모님, 전 오늘 은범이 병실에 들어가지 않을게요. 제 존재가 지금 은범이에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니까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강수희는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은 채 앉아 있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지하철에서 내리자, 시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할아버지의 전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43화

    “그 말... 누구한테 들으셨어요?”시연은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교수님한테...” 강수희는 급히 덧붙였다. “너도 알잖아, 우주 진료 보던 그 정신과 교수님. 그분이 직접 말했어, 네가 은범이한테 도움이 된다고.”“맞아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조용히, 천천히 손을 빼냈다.“하지만 교수님은 제가 원한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하신 거지, 제가 원치 않음에도 도와야 한다는 말씀은 안 하셨을 거예요.” 강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아이... 너무 똑똑하네.’맞는 말이었다. 심재규는 정말 그렇게 말했다. ‘시연이 원할 경우에만’이라고.하지만 아들이 스스로 생을 끊으려 했던 그날 밤은 겪은 순간부터, 강수희의 모든 이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 앞으로 치료받는 동안 은범이 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이번엔 가까스로 살릴 수 있었지만, 다음엔 어떻게 될까?또 그다음엔? 그땐 정말,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강수희는 더 이상 아들의 생명을 ‘확률’에 걸 수 없었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은, 결국 시연이 곁에 있는 것이었다.“시연아... 너랑 은범이, 한때 사랑했던 사이잖니. 정말... 정말 이렇게 외면할 수 있어?”그 한마디로, 시연을 ‘사람 생명을 외면한 냉혈한’으로 몰아붙였다.‘나를 끌어들이려는 거구나. 이 감정에, 죄책감에, 죄의식에.’하지만 시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손끝을 조용히 쥐며 입을 열었다.“제가 은범이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은범이의 상태가 좋아지고, 나아지게 된다면... 좋죠. 하지만... 그다음은요?” “다음...?”“네, 제가 언젠가 자리를 뜨게 되면요?”급격히 표정이 굳은 강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엔, 안타까움도, 체념도 섞여 있었다.“사모님, 전 결혼했어요. 그리고 은범이와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요.”“그... 그건...”강수희가 다급히 말을 덧붙이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42화

    지하는 여자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걸음을 천천히 맞추며,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기까지 했다.진아는 입을 벌렸다.‘세상에... 저렇게 다정하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저 양반.’재빨리 핸드폰을 꺼냈다.“좋았어, 이거 한 장만 박제해 두자. 다음에 또 장난치면 바로 보여줘야지.”그녀는 그 장면을 확대하여 정확히 프레임에 넣었다.찰칵- 사진을 찍고는 핸드폰을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여자 얼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나, 저 여자 어디서 봤지?’...그 시각, 시연의 집.시연은 느지막이 일어나, 진아가 남겨두고 간 국을 데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걸려 온 전화.[시연아! 은범이가 깨어났어!]“정말요?”시연의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마음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정말 다행이에요. 어때요? 상태는?”[훨씬 나아졌대. 교수님도 그러시더라, 기적 같다고.]‘진짜로... 다행이다.’그 순간, 시연의 가슴 깊이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그토록 무거웠던 짐 하나가 내려간 듯했다.[시연아, 시간 괜찮으면 병원에 들러줄래? 은범이가 널 보면 정말 기뻐할 거야.]잠시 망설였지만, 시연은 진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확인할 건 해야지.’“네, 오늘 쉬는 날이라 금방 갈게요.”[정말? 정말 고맙다!]강수희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우리 기다리고 있을게.]“네.”...병원.병실 앞. 강수희는 병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시연이 오기를 기다린 듯한 얼굴이었다.“시연아!”그리고 시연의 손을 붙잡고 친근하게 웃으며, 팔짱까지 끼는 모습. 이전과는 딴판이었다.“어제 일은 잘 해결됐지? 고 대표님이랑도... 잘 풀었어?”너무도 티 나는, 의도된 질문. 시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짧게 답했다.“문제없어요.”“그렇구나...” 강수희의 눈빛에 실망이 그대로 비쳤다. ‘생각보다... 잘 안됐구나’하는 반응이었다“그럼 들어가자. 은범이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41화

    그날 밤.임진아는 다급히 시연이 사는 곳으로 찾아왔다.“야... 이게 뭐야? 진짜로 나온 거야?”짐이 구석구석 정리되어 있었지만,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응, 가짜로는 안 되지. 진짜로 나온 거야.”진아는 멍하니 둘러보다가 툭 내뱉었다.“근데 두 사람... 싸우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근데 매번 이러다가 또 돌아갔잖아. 이번엔 진짜야?”시연은 잠깐 말이 없다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응, 이번엔 진짜야.”그리고, 은범의 병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털어놨다.“뭐??!”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야, 그래서! 도대체 왜 그 침대에 누워 있었던 건데? 은범이가 널 안은 것도 아니고, 설마 네가 알아서 올라간 거야? 도무지 기억 안 나?”시연은 진아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기억 상실 드립은 그만. 너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지?”“하긴...” 진아는 입을 삐죽였다. ‘그럴 리가 없지. 시연이가 은범한테 그런 마음 있을 리 없어.’“그럼... 진짜로 뭔가 이상한 거 아냐?”시연은 말없이 일어났다. 안방에서 두 개의 종이봉투를 들고 나왔다.“그건 또 뭐야?”“은범이 어머니가 준 거야. 임부복.”“뭐...?”진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헐... 그 아줌마? 그 아줌마가 임부복을 챙겨줘? 몰라보게 바뀌었네... 예전엔 널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곧바로 뭔가 떠오른 듯, 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시연아... 설마... 노은범 어머니가... 널 침대에 올려놓은 거 아니야?”시연은 작게 웃었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그 안엔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그럴지도.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요즘 지나치게 친절하더라.”“세상에... 역겨워! 전엔 널 그렇게 무시하고 수치 주던 인간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다고? 자기 아들을 살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눈이 돌아간 모양이지?” 진아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외쳤다.“그래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40화

    “놔둬. 우리 고 대표, 요즘 상태 안 좋아. 그냥... 내버려둬.”...차 안.지한이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형님, 어디로 모실까요?”유건은 창밖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무심했다.“갈 데가 어디 있겠냐. 본가로 가자.”“네, 형님.”지한은 운전대를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결국 돌아가시긴 하네... 형수님 그런 식으로 떠났는데, 형님은... 아직 포기 못하셨구나.’ ...고씨 가문 본가.차에서 내리자마자, 유건은 곧장 현관을 박차고 들어갔다. 걸음은 빠르고, 눈빛은 날카로웠다.하지만 집 안은 조용했고, 시연은 없었다.유건은 믿기지 않는 듯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안방, 서재, 게스트룸, 드레스룸...어디에도 시연은 없었다.‘정말 가버린 거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와 왕성애와 이호민을 불러세웠다.“지시연, 어딨습니까?”넥타이를 세차게 잡아당기는 그의 목소리엔 급박함이 섞여 있었다. “예...?”이호민은 순간 얼이 빠졌다. “사모님요? 나가셨는데요... 도련님이 나가라고 하셨잖아요.”“내가?”“네... 저희도 다 들었어요. 기환이가 전화했을 때,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고... 그 말, 솔직히 ‘더 이상 상관 없다’는 뜻 아니었나요?”“이모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유건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제가... 그랬다고요?”왕성애가 나섰다.“네, 저도 들었는걸요.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는 게, 무슨 뜻인 줄 모르세요? 도련님, 그건 사모님을 쫓아내는 말이었다고요.” 유건은 할 말이 막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진짜... 그랬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기환이 급하게 전화했을 때, 술에 올라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그 한마디가 시연을 보낸 거였다.“됐어요. 알겠어요.”짧게 대답한 유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도련님!”이호민이 다급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39화

    “고... 고 대표님...”무대에서 내려온 댄서가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목소리는 부끄러움과 설렘이 섞여, 낮게 떨렸다.“제... 예명은 시연이에요.”뚝-순간, 공기 자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시연... 시연이라니...’유건은 천천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입꼬리는 올라갔지만, 그것이 웃음인지, 비웃음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시연이구나.”목소리는 가볍지만, 그 안에 도사린 감정은 날이 서 있었다. 유건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가까이서 본 지하는 알아챘다.“고 대표님... 감사해요. 오늘... 무대를 봐주셔서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여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술병을 들었다.“고 대표님... 어느 잔이... 쓰시던 건가요?”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같은 잔으로, 같은 술을, 같이 나누자는 은근한 제안.지하와 강석, 정빈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일 터지겠는데...’유건은 천천히 턱을 들어, 가장 가까이 있는 잔을 가리켰다. “저거.”“네, 고 대표님.”여자는 긴장한 손으로 잔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유건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탁-그대로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고... 고 대표님?”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유건은 피식 웃었고, 웃음 끝에 감도는 건 조롱과 냉기였다.“너, 누구야?”“네...?”“아무나 내 잔에 손을 얹어도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개나 소나 ‘고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상대해 줄 거라고 생각했냐고.” “저... 죄송합니다...”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야, 분명 아까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꺼져.”낮고 가라앉은 유건의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은 날카롭고 차갑게 뼛속까지 파고들었다.“네...?”“꺼지라고.”쾅!술잔이 바닥에 내던져졌고, 깨진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꺅!”여자가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38화

    유건은 지하의 어깨에 팔을 걸쳤고, 약간 술에 취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야, 그거 알아? 아까 무대 위에 있던 애, 나 걔한테 걸었다? 오늘의 ‘댄스 퀸’은 무조건 걔가 될 것 같았거든. 어때, 춤 괜찮았지?” 지하는 눈을 살짝 흘기며 잔을 들었다. ‘와... 진짜 맛이 갔구나.’ “응, 잘 추더라.”“그런데 유건아...” 무언가 진지하게 말을 꺼내려던 찰나, 벌떡 일어난 유건이 무대를 향해 우렁찬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좋아!”“잘한다! 브라보!”지하는 어이가 없어 술잔을 내려놨다. ‘진짜 망가졌네, 망가졌어.’무대가 끝났고, 분위기도 한풀 꺾였다. 유건은 흥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자, 술 마시러 가자.”오늘은 일부러 룸을 잡지 않고, 메인 홀 자리에 앉았다. 유건이 일부러 ‘시끄럽고 복잡한 곳’에 머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데 가면,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질 테니까.’ 정빈은 이미 술을 채워두고 있었는데, 유건은 자리에 앉자마자 잔을 집어 단숨에 비웠다. 강석이 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때? 얘기는 좀 들어봤어?’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방법이 없어. 지금은 완전히 벽이야, 벽.’그 순간, 클럽 매니저가 다가왔다.“고 대표님, 지하 도련님, 주 대표님, 강석 도련님, 반갑습니다.” 정중히 인사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아, 그리고 고 대표님, ‘댄스 배틀’ 결과 나왔습니다. 고 대표님이 베팅하신 8번 참가자가 오늘의 ‘댄스 퀸’으로 선정되었어요.”“그래?” 유건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상금은 현금으로 환전해 드릴까요, 아니면 칩으로 보관해 드릴까요?”“필요 없어.” 유건은 손을 툭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술값에 써. 테이블이나 돌리라고.”“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매니저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런 분들한텐 돈보다 기분이지.’“그리고... 약속대로 오늘의 ‘댄스 퀸’이 술을 한 잔 따라드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537화

    “그렇게까지요...?”이호민은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바로 시연을 위해 차량을 호출했고, 기환은 말없이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다.“집사님, 이모님, 기환 씨...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시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차에 올랐다. 창문이 올라가며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가려졌고, 차는 조용히 대문을 빠져나갔다.남겨진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대문 앞, 서로 눈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다.“기환아...” 이호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게...”기환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병실에서 벌어진 일, 유건이 본 장면, 그리고 그 뒤에 생긴 오해까지... 사실대로, 차분히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이야기가 끝나자, 왕성애와 이호민은 동시에 외쳤다.“말도 안 돼! 사모님이 바람을 피워? 그건 아니지! 그럴 리 없어!”이호민의 얼굴이 붉어졌고, 왕성애는 황급히 팔짱을 풀며 어이없어했다.“사모님이 어떤 사람인데! 기환아, 정말 그 상황을 믿는 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요...” 기환도 고개를 숙였다. “저도 믿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형님이 두 눈으로 직접 보셨어요. 그 자리엔 저도 있었고요.”차 안.시연은 두 팔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차 안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해서,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추워... 정말 추워.’몸이 추운 게 아니라,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냉기가 뼈를 때렸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시연의 감정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그 말은 정말이지 두 사람 사이에 마침표를 찍는 말이었다. ‘진짜... 끝이구나.’시연의 눈가가 점점 뜨거워졌고, 감정을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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