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은 곧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말씀하셨던 거야!’ 그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래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소미 씨한테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며, 분노 속에 비난이 섞여 있었다.“흥.”고상훈이 냉소하며 말했다. “유건아, 그새 너무 커버렸구나. 장소미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날 계속 화나게 하더니, 내가 몇 번이나 병원 신세를 지게 했어. 그런데 이젠 날 잡아먹을 기세구나!” 노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내가 이런 배은망덕한 놈을 키웠으니, 내 팔자려니 해야겠지.”유건은 침묵했다.고상훈의 말은 너무나 가혹했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되짚어 보면, 장소미를 만난 후로 모든 것이 복잡해진 것도 사실이었다.“할아버지.”유건은 미간을 문지르며 낮게 말했다. “소미 씨는 아이를 가졌어요.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전 어릴 때 부모 없이 자랐어요. 제 아이만큼은 저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요.”고상훈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됐다.그는 미리 짐작했어야 했다. 불행한 유년 시절은 결국 손자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그럼 시연이는? 시연이의 아이는 불쌍하지도 않단 말이야?”“시연이는...”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도 시연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고상훈이 시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만약 할아버지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그러나 그 순간, 고상훈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내가 단순히 아이 때문에 이러는 줄 아니?” 그는 여유롭게 국을 한 모금 마시며 덤덤하게 덧붙였다.“내가 단순히 핏줄만 따지는 사람이었으면, 네가 GP그룹 대표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냐는 말이야.”한 마디가 유건의 가슴을 강하게 쳤다.“유건아.”고상훈이 식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내가 보는 건 사람이야. 예전에 널 지킨 이유와, 지금 시연이를 받아들이려
하룻밤 내내, 소미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상훈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손을 쓰진 않았다.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가혹하게 나오다니? 이유가 없을 리 없었다.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최근 변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아버지 지동성의 병.그 문제로 인해, 자신은 시연을 협박했다.‘혹시...’순간적으로 소미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쳤다.‘지시연 때문이야! 우리 지시연에게 간 기증을 요구한 것 때문이라고!’그때 소미는 시연에게 선택지가 없다고 확신했고, 결국 간을 기증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그러나 이 선택이 오히려 시연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것이다.소미가 아는 한, 고상훈은 언제나 시연을 감싸고 있었다!‘음모야! 지시연의 계략이라고! 분명 지시연이 고상훈의 사랑을 이용해, 고상훈을 부추긴 게 틀림없어!’‘나한테 복수하기 위해서!’‘그래, 틀림없어!’“하!”소미는 이를 악물며 낮게 중얼거렸다.“지시연, 절대 너한테 질 순 없어.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순 없다고. 나 자신도, 고유건도 내가 지킬 거야.”생각이 정리되자, 그녀는 곧장 행동에 나섰다. 바로 핸드폰을 꺼내 시연의 번호를 눌렀다....한편, 시연은 강울대에서 후배들에게 실험 수업을 진행 중이었다.수업이 끝난 후,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전부 장소미였다.‘또 무슨 일이야?’의아해하던 찰나, 다시 전화가 울렸다.여전히 장소미였다.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지시연.]소미는 서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우리 만나자. 시간과 장소를 보내줄 테니까...]그러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시연이 전화를 끊었다.소미는 놀란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지시연, 네가 감히 내 전화를 끊어?”반면 시연은 가볍게 비웃었다.‘나를 만나고 싶다고? 내가 소환하면 바로 달려오는 강아지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도대체 지동성과 장미리는 어떻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소미가 이렇게 낮은 자세로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그녀는 정말로 유건을 사랑하고 있었다.시연의 눈매가 반짝이며 장난기 어린 빛이 스쳤다.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시연은 무심하게 말했다. “나 지금 태산요양병원 가는 중이야.”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를 끊었다.소미가 만나고 싶어 한다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터였다.시연은 가늘게 눈을 뜨며 앞으로 벌어질 일을 떠올렸다. ‘재미있겠는걸.’그리고 강울대를 나와 태산요양병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시연이 병원에 도착해 병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지동성이 있었다.지동성도 막 도착한 듯했다. 시연이와 몇 분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봉투도 아직 내려놓지 못한 상태였다.시연을 보자, 지동성은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안경을 고쳐 쓰며 시선을 피했다.“시연아, 너도 왔구나.”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반응했다.지동성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반응이었다. 아예 무시당할 줄 알았으니까.하지만 정작 우주는 보이지 않았다.“우주는?”지동성이 쇼핑백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네가 우주 병실을 바꿨다더구나. 여기 꽤 좋구나...”“우주는 수업 중이에요.”시연은 짧게 대답한 뒤, 손을 뻗어 쇼핑백을 확인했다.“어?”시연은 웃음을 머금고 지동성을 바라보았다.“이번엔 봉투가 없네요? 늘 돈을 채워서 건네던 습관이 있었는데, 이번엔 왜 안 챙기셨어요?”지동성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번엔 정말로 준비하지 못했다.“후훗.”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제가 간 이식을 거절했으니, 돈을 더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신 거겠죠?” “아, 아니야!”지동성이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창백한 얼굴로 변명하며 말했다. “네가 받을지 말지 걱정돼서 그런 거야. 아까워서가 아니라...”“하하...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는 없어요. 농담인데요.”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니,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셨어요?”지동
시연은 천천히 귤을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말해봐,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지시연.”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무릎 위의 가방을 힘껏 쥐었다.“유건 씨에 대한 일이야.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미 말한 거잖아.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인데?”소미의 호흡이 급해졌다.“나... 난 네가 유건 씨 곁을 떠나주길 바라.”귤을 벗기던 여자의 손이 잠시 멈췄다. 시연은 미소를 지었다.‘할아버지께서 나한테 다시 고씨 가문 본가로 돌아오라고 하신 걸, 장소미가 어떻게 알았을까?’소미는 망설임 없이 한숨에 말을 쏟아냈다.“너랑 유건 씨 사이에는 사랑 같은 게 없잖아. 억지로 같이 있어봤자 고통뿐일 거라고.” 여자는 귤껍질을 완전히 벗겼다.시연은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으며, 담담하게 물었다.“귤이 달다. 너도 먹을래?”소미는 조금 당황했고, 속으로 화가 났다. ‘이 상황에서 귤을 먹자는 거야?’‘지시연,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날 조롱하려고!’“고맙지만 괜찮아.”그녀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유건 씨는 할아버지를 정말 존경해. 그래서 원하지 않아도 거부하지 못하는 거야. 그런데 너는 상황이 다르잖아? 넌 유건 씨를 좋아하지도 않잖아.” “그게 뭐 어때서?”시연은 귤을 또 한 조각 입에 넣으며 태연하게 말했다.“고유건은 돈이 많잖아. 그 사람과 함께하면 우주를 ‘웰스’로 보낼 돈이 생겨.”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비웃었다.“아, 그건 됐고, 너희한테 협박이나 받으며 살라는 건가?” 소미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시연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지시연은 내가 간 이식을 강요했던 일을 언급하는 거야!” ‘역시... 이 모든 건 다 지시연의 계획이었다고!’소미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숙였다.“내가 잘못했어! 그땐 너무 다급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빠를 위해서 그랬던 거야.”“하지만
하지만 지동성은 장소미가 이 정도까지 악랄할 줄은 몰랐다.그는 큰딸을 노려보며, 단어 하나하나를 강조해 말했다.“아까 시연이한테 한 말, 나한테도 똑같이 말해봐.”소미는 입을 떼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 말을 단지 지시연을 안심시키려 한 거지, 진심이 아니었다고!’ “아빠...”그녀는 주저하며 중얼거렸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흥.”지동성의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굳이 다시 말할 필요는 없어. 난 처음부터 다 듣고 있었으니까.”그는 눈을 번뜩이며 다그쳤다.“너, 조금 전에 아빠한테 간을 주겠다고 했지? 맞으면 고개를 끄덕여.”소미는 목이 조여 오는 듯한 느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건... 그냥 해본 말일 뿐이었는데!’“말 못 하겠니?”지동성은 냉소를 띠며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그럼 행동으로 보여줘. 당장 나랑 병원에 가서 검사받고, 수술 날짜 잡자. 네가 말했잖아? 아빠 병은 오래 끌면 안 된다고.”그는 단호하게 소미를 문 쪽으로 끌고 갔다.“아, 아빠! 아빠!!”소미는 겁에 질려 발버둥 쳤다. 목소리까지 떨릴 정도였다.“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아빠도 아시잖아요?”“뭘 안다는 거야?”지동성은 무심코 시연을 흘깃 보며 비꼬듯 말했다.“어차피 이젠 고유건하고 결혼도 못 하게 됐잖아? 오히려 잘됐어. 나랑 병원부터 가자!” “아빠, 아빠...”소미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말했다.“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나랑 유건 씨는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우린...”“푸흡...”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시연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비록 금방 입을 다물었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남아 있었다.“아, 미안. 계속 변명해 봐.” 그녀는 손짓으로 ‘계속하라’는 제스처까지 취했다.소미는 흠칫하며 돌아보았고, 시연을 향해 살기를 띤 눈빛을 보냈다.“너! 너 일부러 나를 함정에 빠뜨린 거지?!”“응, 정답.”시연은 싱긋 웃으며, 또 하
“누나!”우주는 시연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반겼다.시연이 ‘웰스’의 자료를 보여주자, 소년의 맑은 얼굴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스쳤다.우주는 아직 ‘웰스’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정확히는 몰랐다. 하지만 누나가 기뻐하는 걸 보니,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느꼈다.“우리 우주, 정말 대단해.”시연은 귤을 까서 우주에게 건넸다. “이건 특별히 우주에게 주는 보상이야.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건 스스로 해야 해.”“응!”우주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그래, 먹어.”동생을 바라보며 시연은 새삼스레 감사함을 느꼈다.이 모든 것은 고상훈 덕분이었다.‘할아버지는 나와 우주에게 ‘제2의 생명을 준 은인’이라고 할 수 있어...’‘할아버지가 안 계셨으면, 우리 남매는 다시금 막다른 길에 몰려 미래조차 꿈꿀 수 없었을 거야.’‘그런데 이젠... 할아버지가 나한테 선택을 강요하고 있어!’ 시연은 어리석지 않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도 아니었다.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고상훈이 이 모든 걸 자신만을 위해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고상훈은 무엇보다 유건을 위해 이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사람을 보는 눈에 있어서, 고유건은 확실히 할아버지를 따라갈 수 없어.’ ‘어떻게 고유건처럼 똑똑한 사람이 지씨 집안 사람들의 본성을 모를 수 있을까?’‘장소미는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인 데다,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데...’ ‘그런데 장소미의 부모도 마찬가지야.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수준이지.’‘고유건은 왜 저런 연인과 장인, 장모를 원하는 걸까?’ ‘내가 할아버지라도, 똑같은 고민을 했을 거야.’ ‘하지만 내가 나서야 할까? 굳이 ‘구세주’ 같은 역할을 떠맡아야 할까?’‘...’시연은 태산요양병원을 나와 강울대로 돌아갔다.그러나 차에서 내린 후, 강울대로 향하지 않고, 곧장 강울대병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점심시간의 간호사실은 조용했다.지나가던 시연이 문득 멈춰 섰다.“안녕하세
“아, 아니에요. 할아버지...”시연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리고 방금 본 차트가 떠오르자, 목이 메어 나지막이 말했다. “할아버지는 오래오래 사실 거예요. 제가 외과 최고의 전문의가 되는 걸 보셔야죠. 그리고 우주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도 보셔야 해요!”“그래, 그래.”고상훈은 웃으며 다독였다. “울지 마라. 할아버지도 오래 살도록 노력할 테니.”...고상훈의 전화를 받은 유건은 한창 바쁜 와중이었다.“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오늘 시연이를 데리러 가라.]고상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몸이 불편하니 짐도 네가 챙겨주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게 해라.]“뭐라고요?”고상훈이 한번 말한 적은 있었지만, 유건은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 “시연이가... 동의했어요?”[당연하지!]고상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아이 성격 알잖냐. 싫다는데 누가 강제로 데려올 수 있겠어?]그건 맞는 말이었다.유건은 더욱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연이가 왜 동의한 걸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오후 두 시, 시연은 유건의 전화를 받았다.[나야.]시연은 핸드폰을 쥔 채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 너머로 유건의 차가 보였다.“알고 있어요.”[올라가도 돼? 괜찮겠어?]“네, 괜찮아요.”룸메이트인 임진아는 도서관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시연이 혼자였다.[그럼 올라갈게.]“네.”통화를 마쳤지만, 둘 다 ‘재결합’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서로가 알고 있었다. 이번 일에 고상훈이 큰 역할을 했다는 걸.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말이 오가면 두 사람 사이가 더 어색해질 뿐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자, 시연이 문을 열었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지만,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불과 이틀 전에 만났지만, 어쩐지 오랜만인 것 같았다.낯설고, 서먹했다.유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짐 챙길게. 넌 가만히 있어. 어디에 있는지만 말해줘.”“네, 알았어요.”시연은 그와 다툴 생각이 없었다.이사
이호민이 나가고 방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나 샤워할게요.”시연은 원래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들어올 때 왕성애가 미리 물을 받아놨다고 말해 주었다.“응.”유건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시연은 욕실로 향하려다 멈춰 섰다.“시연아.”그가 갑자기 불렀다.“네?”그녀가 돌아보았다.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돌아온 거야?”시연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유건은 별다른 감정을 표출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썩 반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그녀는 솔직하게 답했다.“할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이게 무슨 말이지?’유건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를 위해 돌아왔다는 건 이해하겠지만, 나를 위해서라니?’그는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나를 위해서? 날 그렇게 좋아했어?”‘내가 주는 사랑이 완벽하지 않아도 감수하겠다는 뜻인가?’이 말은 예의도 없었고, 어딘가 다그치는 느낌까지 들었다.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돌아온 게 당신과 장소미를 방해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고 해도, 나한테 화풀이하진 말아요.” 유건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그런 뜻이 아니라...”그는 절대 시연에게 화풀이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냥 너무 갑작스러웠고,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그러나 시연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장소미랑 함께 있고 싶다면, 나를 문제 삼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으세요.”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장소미를 받아들이도록 만들면 되잖아요. 나한테 따지려 들지 말고요.”‘생각해 보면, 장소미도, 고유건도 결국 같은 행동을 하고 있어.’‘둘 다 할아버지를 설득하진 못하면서 나한테 화살을 돌리고 있으니까.’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시연은 욕실로 들어갔다.유건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더욱 답답해졌다.‘내가 왜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거지?’ ...샤워를 마친 시연이 욕실 문을 여는 순간, 유건이 문 앞
“그럼 다행이네요.”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다행이야... 아무 일도 아니어서.’“그나저나...”오선화는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마치 일상 대화하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이제 6개월 차에 들어섰어. 곧 임신 후반기인데, 슬슬 휴식은 생각 안 해?”“휴식이요?”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그 생각은 진심으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오선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부터는 배도 더 많이 나올 거고, 몸도 훨씬 무거워질 거야. 부기도 생기고, 움직이기도 불편해지고.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도 괜찮지 않나?”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일할 수 있어요.”오선화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뭔가 걸리는 게 있어? 고 대표님이 계시니까, 병원에서도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잖아.”“네... 알고 있어요.”시연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 “저보다 선배인 선생님들도 다들 만삭까지 일하세요. 7개월까지 야간 당직도 서시고요. 저야 그에 비하면 충분히 배려받고 있는 거죠.”‘그 배려가... 전부 고유건 덕분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게다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렇게 일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출산도 더 수월하다고 하잖아요?”“그건 맞아.” 오선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나는 그냥 권유만 한 거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컨디션 안 좋을 땐 꼭 쉬어야 해, 알지?”“네. 그럴게요.”시연은 산모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교수님, 수고하세요.”“그래, 잘 가.”시연이 문을 나서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오선화는 웃음을 거두고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통화 목록을 스르륵 넘긴 오 교수의 손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바로 ‘고유건’이었다. 오선화는 깊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걸 준비했다.
그날 오후, 은범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부사장 이지혁과 비서가 며칠 사이 벌어진 상황을 보고했다.“GP그룹이 우리와의 협약을 전면 종료했어요.”“GP그룹?”은범의 표정이 굳어졌다. ‘GP그룹... 고유건... 왜 갑자기...?’이번 협약은 처음부터 은범이 직접 유건과 만나 성사한 것이었다. 물론, 사적인 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연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일 뿐.‘우린 둘 다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들이었잖아...’은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협약은 계속 수익이 나고 있었잖아요. GP 측에서 계약 종료 사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정확히 말하지 않았어요.”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입장은 아주 확고했어요. 위약금은 예정대로 지급하겠다고 했고요. 환불 어음은 이미 발송했다고 합니다.”‘그렇게 빨리?’은범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설득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모든 절차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더 불안했다.“그래서 일단 수령하진 않았습니다. 돌아오시면 같이 상의하려고 했거든요.” “잘하셨어요.”‘보상보다 중요한 건, 이 협력이 가진 미래 가능성이었는데...’은범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고 대표님한테 직접 연락해 볼게요.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야 하니까요.”“네, 애초에 사장님께서 직접 성사한 건이니까... 사장님께서 움직이는 게 맞죠.”은범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GP그룹으로 향했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GP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한 은범은 곧장 로비 데스크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전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비 데스크 직원은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예약은 하셨을까요?”“아니요.”“죄송하지만, 고 대표님과의 면담은 반드시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그건 알지...’은범은 고개를
“고 대표님!”하은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유건 앞을 가로막았다. 눈빛엔 분노가 가득했다.“이렇게 그냥 가시면 안 되죠!”“뭐라고?”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시선엔 의아함과 경멸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시연이 말이에요.” 하은은 안쪽을 가리켰다.“시연이는 고 대표님의 아내잖아요. 근데, 아내 앞에서 애인이랑 나가는 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애인’이라는 단어가 뱉어지는 순간, 유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눈가의 웃음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지금... 누가 감히 소미 씨한테 그런 말을 해?”그 말에 하은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더 큰 화가 치밀었다.“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그리고, 장소미 씨는 또 뭐예요? 고 대표님한테 아내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거, 무슨 의미인데요? 그리고 고 대표님이 장소미 씨를 감싸면, 시연이는 뭐가 되는 건데요?!” ‘시연이를 뭐로 보는 건지, 내가 대신 물어야겠어!’하지만 유건은 피식 웃었다.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럼 지시연은 나를 뭐로 봤을까?’그러나 이런 생각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비켜.”“싫어요!”그 말에 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목소리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솔직히, 너한텐 손쓸 가치도 못 느끼겠지만... 이쯤 되면 진짜 귀찮네.”“뭐라고요?”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해졌다.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비킬 거야, 안 비킬 거야?”“하은아!”그때, 시연이 급히 달려왔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며 중간에 섰다.“이런 사람들이랑 뭐 하러 싸워? 가고 싶다잖아. 그냥 보내줘. 누가 어딜 가든, 그건 자유잖아.”그러면서 하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가서 라면이나 먹자. 아까 건 너무 불었으니까, 새로 하나 뜯어야겠어.”시연의 말투는 덤덤했고, 시선은 여전히 유건을 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유건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건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간 이식 얘기, 우주한테 물어본 적 있어?”“뭐라고요?”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걸... 저 사람이... 지금 왜 묻지?’찰나의 정적. 그리고 곧,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는 우주의 보호자예요. 우주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해요.”하지만 유건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내가 알기론, 우주는 올해로 만 14세야. 이미 법적으로 자기 결정권이 생긴 셈이지.”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만큼 분명했다.“게다가 우주는 신체 조건도 아주 좋잖아.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기증 가능 기준에 부합해.”유건의 말은 아주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논리는, 결국 ‘장소미’를 위한 것이었다.‘하... 정말 대단하다, 고유건.’시연은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장소미를 스치듯 바라봤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말이 되는구나.’“우주의 열네 살이, 일반 아이들의 열네 살과 같다고 생각해요?”시연은 미세한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주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요.”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는 톤을 낮추면서도 힘을 실어 말했다.“지나치게 독단적이네.”“우주는 똑똑한 아이야. 심리적으로 결핍이 있는 거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잖아. 만약 언젠가 지 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우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그 말에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입꼬리에 걸려 있던 억지 미소조차 사라졌다.“자책이요...?”시연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냉소가 섞인 차가운 어린 목소리로 유건을 향해 말했다.“잘 들어요. 우린 인생에서 많은 걸 후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그 ‘누군가’ 안에 지동성은 절대 포함되지 않아요.”그 말에 유건의 이
하은은 눈치가 빨라서 괜히 시연에게 짐이 될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시연은 역시 장미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엄마요? 죽은 지 십몇 년 됐는데, 오늘 좀비처럼 부활이라도 한 거예요?”하은은 그제야 시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바로 무당 선생님한테 연락할게!”“얼른 해줘.”두 사람은 말 그대로 티키타카였다. 장미리의 얼굴은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지시연! 넌 진짜 싹수가 없어!”“맞아요.”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라는 사람도 죽은 거나 다름없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니, 예의 따윈 배운 적 없어요.”그녀는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무슨 용건인지는 상관없고, 지금 당장 나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엄마’라는 말 좀 들먹이지 마세요. 혹시라도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뱉는다면... 당신 입, 내가 부숴놓을 수도 있어요.”시연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서릿발 같았다.“진심이에요. 장난 아니니까, 절대 시도하지 마세요.”“너... 너 진짜...!”장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시연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말솜씨에서도, 기세에서도 밀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네 아빠... 쓰러졌어. 지금 혼수상태야.”그 말에 시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 정도라고...?’눈빛 속에 망설임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럼 그분 옆에서 간병이라도 해주셔야죠. 여긴 왜 와서 소란인데요?”“너...”“지시연!”자기 엄마가 밀리는 걸 보다 못한 소미가 나섰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진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우리가 왜 너를 찾아왔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나야 모르지.”시연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알려줘 봐. 여기엔 왜 온 건지.”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흐흑... 흐윽...]전화기 너머로 장미리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빠 비서한테 전화 왔어... 회사에서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대! 지금 병원으로 이송됐고, 나도 지금 가는 중이야! 소미야, 네가 더 가까우니까 먼저 좀 가봐!]“알겠어요, 엄마!”소미는 전화를 끊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가엔 금세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유건 씨... 우리 아빠가 또 쓰러지셨어요...”사정을 들은 유건은 곧장 몸을 일으켜, 여자의 팔을 부드럽게 받쳐주었다.“괜찮아, 지금 당장 같이 가자. 내가 함께할게.”“네... 유건 씨가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 혼자였으면 무너졌을지도 몰라요.”...장미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지동성은 응급실을 거쳐 병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이번엔 지난번보다도 훨씬 상태가 심각했다.지동성은 입원했지만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담당 교수도 장담할 수 없었다.“지금은 경과를 보셔야 합니다.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는...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흑...”병상 옆 의자에 앉은 장미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걸 어쩌면 좋아... 네 아빠, 갈수록 심해지는데... 간이식도 아직 못 받았는데...”갑자기 장미리는 고개를 번쩍 들어 유건을 바라봤다.“고 대표님, 간 이식 소식은 아직도 없는 건가요?”이전에 유건은 간 이식 대기자를 대신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직은 연락이 없습니다.”그는 도와주기로 했고, 실제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결국 ‘운’과 ‘순번’이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돈이 많다고 먼저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흐흑... 흐으...”장미리는 더욱 흐느껴 울며, 소미의 손을 꼭 붙잡았다.“소미야... 네 아빠, 의식도 없고... 이대로면... 정말 오래 못 버틸 수도 있어...”“그럴 리 없어요, 엄마. 아직 방법이 있을 거예요.”소미는
여자애는 두 손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진짜 살짝만, 살짝만 만져볼게요.”말처럼, 여자애의 손끝은 아주 조심스러웠다.“와... 아기가 있는 배는 이런 느낌이구나! 선생님, 진짜 대단해요. 엄마 되는 거, 완전 힘든 일인데...”시연은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근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누굴 찾는 건가요?”“저요?”여자애는 손을 거두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어깨에 멘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혹시 변이준 있어요? 저 보고 오라 그랬거든요.”‘이준 선배님?’“수술 들어가셨어요.”“헉, 진짜요?”여자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아싸, 잘됐다!”그 말과 동시에, 다시 가방을 어깨에 멨다.“선생님, 나중에 변이준이 오면 전해주세요. 저 왔다 갔다고, 없어서 먼저 간다고요!”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애는 벌써 휙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뒷모습이었다.“어... 네...”시연은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여기가 무슨 호랑이굴이라도 되는 건가? 저렇게까지... 도망갈 일인가?” 그래도, 궁금했다. ‘저 친구... 선배님이랑 어떤 사이지?’‘여동생일까? 닮은 구석은 없었는데...’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눈에 띄게 수려했다는 정도?’오후 2시쯤, 변이준이 수술을 마치고 내려왔다.머리는 아직 축축했지만, 얼굴은 늘 그렇듯 환했다.시연은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선배님, 의뢰하신 처방은 이미 내려놨어요. 환자도 약을 복용 중이고요.”“역시, 고마워!”이준은 환하게 웃으며,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훑었다. 그때, 시연은 문득 오전 일을 떠올렸다.“아, 맞다. 오늘 오전에 어떤 여자분이 선배님을 찾아왔었어요. 근데 안 계셔서 그냥 간다고 하시던데요?”“그냥... 갔다고?”그 말을 들은 이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하... 그 녀석, 말을 좀 듣고 살면 어디 덧나나...”이준은 수건을 손에 쥔 채, 더 이상 머리를
단 한 마디. 그 말에 시연은 마치 얼음물에 던져진 듯 몸이 굳었다. ‘맞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따갑지?’그리고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따가운 말이 그녀를 후려쳤다.“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유건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냉소가 담긴 웃음이었다.“내가 왜 양석현 교수 프로젝트에 투자했을 것 같아?” “내가 마음이 약해서? 돈이 남아돌아서? 밤에 잠이 안 와서?”순간, 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유건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아니, 다 아니야. 널 위해서였어. 널 아끼니까, 널 좋아하니까, 돈을 쓰는 것도 아깝지 않았던 거야.”그 말을 끝내고, 유건은 웃었다. 이번엔 대놓고, 조롱이 담긴 웃음이었다.“근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왜 또 돈을 써야 하지? 지금의 네가, 그럴 가치가 있나? 차라리 그 돈으로 비둘기 밥이나 주는 게 더 낫겠는데?” 시연은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유건은 한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제 가고,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 너랑 엮이는 거, 진심으로 지긋지긋해. 너랑 관련된 모든 일은 다 끝났어.”그는 돌아섰다. 단호하고 차가운 걸음이었다.“유...” 시연은 반사적으로 불러보려 했지만, 목에 걸린 그의 이름은 한 글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못 해...’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심장도, 생각도, 감정도 전부 마비된 채로.그 순간, 유건이 다시 멈춰 섰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그저 등을 보인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그래도 일부러 찾아왔고, 부부였던 정은 있으니까... 지원금은 지한이 통해서 처리하도록 할게. 하지만 이번뿐이야. 다음은 없어.”그는 그 말을 끝으로 차로 향했고, 조용히 문을 열고 올라탔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그대로 떠나버렸다.그리고 시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가을 오후의 바람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지한이 보기엔, 시연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간 듯했다. 너무 오래 기다렸으니, 그럴 법도 했다.하지만 바로 그때, 화장실에서 막 나온 시연은 멀리서 유건과 지한이 정문을 지나 계단 아래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저기 있다...!’더는 생각할 틈이 없어서 시연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유건 씨!”문 앞에서 유건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놀란 듯 고개를 돌리자, 시연이 급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여자의 걸음은 빨랐고, 숨이 찰 정도로 다급했다. 유건의 미간이 스르륵 좁혀졌다.‘저 여자... 아직도 안 갔던 거야?’“유건 씨! 잠깐만요!”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거의 뛰다시피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건은 다시 한번 얼굴을 찌푸렸다.‘배가 저렇게 불렀는데도... 뛰고 있어?’ 하지만 곧 속으로 비웃듯 생각했다.‘뛰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유건 씨...” 시연은 겨우 도착해,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잠깐이면 돼요. 몇 분이면 되는데... 시간 좀 줄 수 있어요?”맑은 눈망울이 간절히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유건은 잠시 목이 메는 듯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비웃듯 느릿하게 말했다.“신기하네. 네가 먼저 날 찾을 줄은 몰랐거든.”“그게 아니라, 나...”그러나 시연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유건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근데 난, 너한테 줄 시간이 없어. 단 1분도.”차가운 눈매, 건조한 말투. 남자의 입꼬리는 비쭉 올라갔지만, 표정엔 온기가 없었다.그러고는 단호히 돌아섰다. 그 차가운 뒷모습은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닫혀 있었다. 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췄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이런 식으로, 날 밀어내던 사람...’유건의 본모습을,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다. 시연의 몸속으로 한기 같은 게 퍼지며, 두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멍하니 유건이 차에 올라 문을 닫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