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호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시연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변호사님?] “지시연 씨.”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합의서 한 장에만 서명하셨더라고요. 위자료 합의서에는 서명이 없어요.” [네?] 시연은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그랬나요? 제가 깜빡했나 보네요. 다 한 줄 알았는데요.] ‘이걸 까먹었다고?’ 재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통 이혼하는 여성들은 위자료 문제를 가장 신경 쓰는 법이다. 더군다나 유건이 제시한 금액은 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럼 언제 한 번 다시 오실 수 있을까요?” [급할 필요 없잖아요.]시연은 미리 답을 준비해 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가정법원 갈 때 같이 하면 되죠.]“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재호는 설명을 덧붙였다. “몇 가지 명의 이전 문제 때문에 여러 기관을 다녀야 하는데, 아마 서류 처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그때 오셔서 서명하시면 돼요.” [그럼, 다 마무리될 때까지 많이 기다려야 하나요?]“보통은 그렇죠.” 여성 입장에선 위자료를 받고 이혼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정법원엔 최대한 빨리 갈 수 없을까요?] “그건...” 재호는 난감했다.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고 대표님께 확인해 봐야 해요.” [그럼, 고 대표님께 한 번 이야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전화를 끊은 후, 재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위자료도 안 받고 이혼을 서두른다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여자네...’ ...월요일 오전 내내, 시연은 후배들의 실험 수업을 지도했다. 수업이 끝나고, 어느새 12시가 가까워졌다. 그녀는 가운을 벗고 실험실을 나섰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익숙한 얼굴들이 인사를 건넸는데, 실험 수업을 듣던 후배들이
“그래.” 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식권을 살짝 흔들었다. ‘우리가 지금은 연인이 아니긴 하지만, 매번 은범이한테 신세를 지는 것도 이상해.’은범은 시연의 성격을 잘 알기에,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내 학생 식당으로 이동했다. ...은범이 음식을 받아오는 동안, 시연은 자리를 잡았다. “자.” 트레이를 내려놓은 그는, 자기 갈비찜을 시연 앞에 밀어 놓았다. “너 다 먹어. 혹시라도 남으면 내가 먹을게.” “고마워.” 시연은 밥을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은범아, 네 집안 사정을 떠나서라도, 내 상황 잘 알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너무...” “그만.” 은범은 말을 끊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성인이고, 내가 뭘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잘 알아.”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정말 나를 보기 싫다면, 볼 때마다 한 대씩 치는 건 어때? 아니면, 신고해, 스토커라고.”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난 절대 그럴 수 없어!’ “밥이나 먹어.” 그녀가 잠시 멍하니 있는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고 귀여웠다. 은범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그나저나, 그렇게 말라도 되는 거야? 애까지 있는데, 배가 전혀 안 나왔잖아.” 그 말에, 시연은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눈물이 차오를까 봐, 고개를 푹 숙였다. ...점심을 마친 후, 은범은 시연을 임진아 집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 마침 은범의 차도 강울대학교병원 후문 쪽에 세워져 있었다. 그 시각, 유건은 고상훈을 병문안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오후 일정이 있어 바로 회사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시연과 은범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유건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늦췄다. 주지한, 정민환과 정기환은 눈을 마주쳤다. ‘이거 말려야 하나?’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유건은 말없이,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시연을 바라봤다. “은범아, 잠깐만.” 시연이
“시연이와 관련된 일?”유건은 짧은 침묵 후 담담하게 물었다. 재호는 피식 웃었다. ‘혹시 고 대표님은 알고 계실까? ‘전부인’ 얘기만 나오면, 자기 말투가 부드러워진다는 걸?’[네, 대표님. 지시연 씨가 먼저 가정법원에 가서 서명하고 싶다고 전해달랍니다. 다른 일들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순간, 유건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것 때문에 전화했던 거야?’ ‘그 여자, 이렇게까지 빨리 나랑 이혼하고 싶었던 거냐고.’ 유건의 속은 마치 쓴 약을 삼킨 듯 쓰리고 견디기 힘들었다.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이유는 하나뿐일 거야. 바로 노은범.’ ‘이제 공식적으로 정리하려는 거겠지.” ‘노은범 같은 사람이 내 가족관계증명서에 지시연의 이름이 남아 있는 걸 용납할 리 없으니까.’남자는 손에 쥔 핸드폰을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유건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로 진행해. 시연이가 원하는 대로...”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시연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뿐이야.’[알겠습니다, 고 대표님.] ...밤 10시, 은범은 임진아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는 한 손에 야식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연 사람은 임진아였다. 은범은 본능적으로 안쪽을 살폈다. “시연이는?” 진아는 눈을 굴리더니, 팔짱을 꼈다. “노 사장님, 그렇게 티 나게 실망하시면, 저도 기분이 좀 나쁘네요.” 그러면서 집 안을 가리켰다. “시연이는 씻고 있어. 방금 들어갔으니까, 기다리려면 꽤 걸릴걸?” “그럼 됐어.” ‘시연이가 씻을 동안 기다리는 건 좀 웃긴 일이니, 그냥 돌아가는 게 낫겠어.’ 은범은 비닐봉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야식 좀 샀어. 같이 나눠 먹어.” “오, 굿!” 진아는 신나게 받아 들었다. “노 사장님, 고마워요!” 그리곤, 망설임 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그 순간,
강수희는 겨우 마흔을 넘긴 나이에, 늘 여유롭고 건강한 삶을 살아왔다. 은범은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더군다나, 한순간 쓰러진 게 뇌종양일 가능성이 있다니, 그는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양성인지 아닌지는 확인됐나요?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아직 확실하지 않대.” 노수철이 고개를 저었다. “수술해야 조직 검사를 정확히 할 수 있다고 하더라.” 그 말에, 은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술해야만 알 수 있다니...’부자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서로 같은 심정이었다. 노수철이 조용히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들어가서 네 엄마 좀 봐 드려라.” 잠시 숨을 고른 은범이 천천히 병실 문을 열었다. ...병실 안.강수희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날 밤, 은범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아침이 밝아올 무렵, 눈을 뜬 강수희의 컨디션은 다행히 괜찮아 보였다. 아들을 보자, 강수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은범아, 와 있었구나.” 강수희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어머니, 천천히...” 은범이 급히 손을 뻗어 어머니를 부축하고, 베개를 받쳐 주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갑자기 움직이며 안 된다고 하셨어요. 천천히 움직이셔야 해요.” 강수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 알았어. 우리 아들 말 들을게.” 곧이어, 노수철도 병실에 들어왔다. 어젯밤, 아들이 병원에 남겠다고 해서 노수철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새벽부터 불안해 일찍 나온 것이었다. “여보, 좀 어때?” “네, 괜찮아요.” 노수철은 집에서 직접 가져온 아침 식사를 건넸고, 아들을 향해 말했다. “곧 담당 의사랑 면담할 예정인데, 너도 같이 가자꾸나.” “네.” 은범은 묵묵히 수저를 들었다. 강수희의 수술 일정은 미룰 수 없어서 최대한 빨리 진행해야 했다. 노수철은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누구...?” 은범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어딘가 낯이 익긴 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얼굴을 바라봤다. “하하.” 여자애는 밝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 하진주야. 어릴 때 네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그 뚱뚱한 애, 기억 안 나?” 그제야, 은범의 기억이 스쳤다. 하씨 집안과 노씨 집안은 오래된 인연이었고, 하진주의 어머니와 강수희는 소꿉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여자애는 기억 속의 ‘통통한 꼬마’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늘씬하고 세련된 분위기였기에, 전혀 그때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었다. “아, 너구나!” 은범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다.” 진주는 밝게 웃었다. “맞아, 우리 가족이 해외로 나가고 나서는 한 번도 못 봤지.” 반가운 재회였지만, 은범에게 지금은 어머니의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그는 시계를 한 번 확인하더니, 강수희를 바라봤다. “어머니, 저 이제 회사에 가봐야 해요. 아버지가 곧 오실 테니까, 혹시 문제 있으면 바로 연락하세요.” “그래, 알겠어.” 강수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곁에 있는 진주를 슬쩍 바라봤다. “근데, 진주도 출근해야 한다더라. 너 회사 가는 길에 데려다줄 순 없겠니?” 진주는 어머니를 보러 온 것이었기에, 은범도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도 부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고마워.”“이모, 그럼 나중에 또 올게요.” “그래, 조심히 가.” 그렇게 두 사람은 병실을 나섰고, 은범은 그녀를 직장까지 태워다 준 후, 바로 회사로 향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업무를 처리한 후, 저녁 7시에 은범은 병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연아, 요즘 좀 정신이 없어서 못 보러 갔어. 아마 다음 주에는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시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도 바쁘니까 네 할 일 먼저 해. 굳이 시간 내서 올
할 말을 다 하고 나서 은범은 묵묵히 침묵했다. 노수철은 아내를 거들며 말했다. “그냥 얼굴 한 번 보는 거잖아. 무슨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두 집안 사이를 생각하면 너무 무례하게 구는 것도 좋지 않아.”오랜 침묵 끝에, 은범은 망설였다. “정말 얼굴만 봐도 된다는 겁니까?” “아이고...” 노수철은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너한테 강제적으로 굴 수도 없는 노릇이잖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은범은 잠시 갈등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얼굴만 볼게요. 하지만 딱 한 번뿐이에요. 기대 같은 건 하지 마세요.” “그래, 그래.” 강수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다 알아. 아들아, 고맙다.” 은범과 하진주와의 만남은 다음 날로 정해졌다. 마침 주말 밤 8시이니, 두 사람은 함께 연극을 보기로 했다. ...주말 밤. 유건은 소미를 태우고 G시에 제일 큰 극장인 ‘시네마극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유명한 연출가의 대표작이 공연되는 날이었다.그야말로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유건은 연극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소미를 위해 함께 왔다. 주말이라 극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소미는 유건과 나란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부딪혀 휘청거렸다. 유건이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았고,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괜찮아?” 소미는 황급히 귓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네, 괜찮아요.” 유건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의 발로 향했다. 은회색 하이힐이었다. 그는 미간을 좁혔다. “네 옷차림에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임신 3개월째잖아. 하이힐은 좀 위험하지 않아?” “너한테도, 배 속의 아이에게도.”“임신은 고되고도 위험한 과정이라 사소한 실수 하나로 두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단 말이야.” 소미는 순간 굳어졌고, 얼굴빛이 미묘하게 변했다.그리고 망설이며 말했다. “그러네요...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다
‘고유건이 나한테 전화를?’ ‘고유건도 이 극장에 있다고?’‘날 불러낸 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아서인가?’ ‘그렇다면, 대체 왜? 전화로만 들으면, 꽤 화가 난 것 같은데...?’ 연달아 떠오르는 의문을 안고, 은범은 하진주에게 짧게 말한 뒤 극장을 나섰다. “고 대표님...” 은범이 막 입을 떼며 인사하려는 순간, 유건의 주먹이 그대로 날아왔다. 퍽! 예상치 못한 공격에 은범은 그대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다행히 빠르게 중심을 잡아 휘청거리면서도 쓰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입가가 터졌고,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은범은 손등으로 피를 닦아내며, 황당한 눈빛으로 유건을 쳐다봤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흥!” 유건은 냉소를 흘리며, 싸늘한 눈빛으로 은범을 내려다봤다.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시연이는 알고 있어요?” 그 순간, 은범의 눈빛이 번뜩 흔들렸다. 짧지만 분명한 동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은 유건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은범의 옷깃을 단단히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노 사장, 시연이한테 진심이에요? 아니면, 그냥 장난치는 거예요?” “고 대표!” 은범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감정을 의심받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웃기지 마요. 저는 고 대표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시연이를 아끼니까, 고 대표보다 덜할 리는 없을 거예요.” 그는 피 묻은 손으로 입을 닦으며, 낮고 단호하게 덧붙였다.“고 대표도 시연이를 걱정해서 이러는 걸 테니, 오늘은 넘어가 줄게요.” “은범아!!”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가녀린 실루엣이 성급히 다가왔다. 하진주였다. 은범이 갑자기 나간 게 신경 쓰여서 몰래 따라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자마자, 은범이 맞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 것. 진주는 화가 나서 유건을 노려봤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사람을 때리다니! 우리, 신고할 수도 있다고요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아까는 미안했어.” “하하!” 진주는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연극은 끝까지 보고 가자?” “응, 그래.” 은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잔뜩 긴장했던 얼굴이 비로소 풀어졌다. ...주말, 시네마극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시연은 전혀 알지 못했다. 월요일 아침, 시연은 일찍 일어나 씻고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시연이 유건과 가정법원에 가서 서류를 제출하고 다른 서류들에 서명하기로 한 날이었다. 이미 약속된 일이었기에, 시간을 맞춰 나가려고 하는데, 주재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변호사님?” 시연은 급히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 “지금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늦지 않게 도착할 것 같아요.”[지시연 씨.] 전화기 너머에서 재호가 다소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아침 일찍 고 대표님이 전화하셔서, 오늘 가정법원에 못 간다고 하셨어요.]“뭐라고요?” 시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연락만 받았거든요.] ‘이게 뭐야?’ 시연이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아무래도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재호는 이 대답을 끝으로 전화를 뚝 끊었다. “변호사님?!” 시연은 멍하니 핸드폰을 쥔 채 서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끝에, 그녀는 주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몇 번 울리자, 지한이 전화를 받았다.그런데 첫마디부터 어딘가 어색했다. [예, 형수님.] “지한 씨.” 시연은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유건 씨, 무슨 일 있어요? 오늘 저랑 가정법원에 가기로 했는데, 못 간다고 하더라고요. 대체 왜죠?” 잠깐의 정적. 그 순간, 지한은 곁에 앉아 있는 유건을 힐끔 쳐다봤고, 결국 조용히 핸드폰을 유건에게 건넸다. 유건은 전화를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
차가 시연 앞에 멈췄다.창문이 내려가더니, 지한이 고개를 내밀고 미소를 지었다. “형수님, 어디 가세요? 타세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시연은 유건을 흘낏 보았다.‘이상하네, 왜 조수석에 앉아 있지?’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또 유건의 차를 타면 점점 엮이게 될 것 같았다.“형수님, 얼른 타세요.” 지한은 차를 움직일 기색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내려서 직접 문 열어드려야 합니까?”“아니에요...”시연은 거절하려 했지만,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뭐야, 버스 정류장에 세우면 안 되는 거 몰라?”“그러니까! 버스가 못 지나가잖아.”“빨리 가라고!”“벤틀리네, 저런 차를 태워준다는데 안 탄다고?”“재수 없어.”점점 더 듣기 거북한 말들이 오갔다.어쩔 수 없이, 시연은 차 문을 열고 탔다.“형수님, 어디로 가면 됩니까?”차에 타자마자, 지한이 물었다.시연은 대답 대신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유건을 바라보았다.‘이거 완전 악연 아니야? 왜 자꾸 마주치는 거지?’“형수님.” 지한이 웃으며 유건을 가리켰다. “마침 형님이 차에 계시긴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어차피 아무 말도 안 할 거니까요.” 시연은 당황했다. ‘이 둘 뭐 하는 거야?’“이제 목적지 말해주실래요?”지한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형수님, 실은 우리도 친구라고 할 수 있잖아요. 제가 그저 한 번 모시고 가는 걸로 부담 갖는 건 아니시죠?”지한의 말에 시연은 결국 마지못해 답했다.“산신당으로 갈 거예요.”지한은 잠시 멈칫하더니, 본능적으로 조수석의 유건을 바라보았다.“거기서 볼일 있으세요?”“네.”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살 게 있어서요.”‘거기서 뭘 사려는 거지?’산신당은 G시보다 더 오래된 곳일지도 모른다. 사찰뿐만 아니라 재래시장도 있어, 평범한 서민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으니 말이다.분명 번잡하고 활기차지만, 고급스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한테 단 한 번도 아버지 역할을 해주지 않던 사람이,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다고?’지동성은 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다시 한번 말하마. 우주를 ‘웰스’로 보내는 돈은 이 아빠가 다 낼게.” 시연은 멍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닌데, 이해할 수 없었다.“왜요?”지동성은 한숨을 쉬며 난감한 듯 말했다.“아버지가 자식한테 돈을 주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하니?”‘이유가 필요하냐고? 그럼 그때 우주의 치료비를 끊고,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건 누구였더라?’‘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이 그 중심에 있던 거 아니었나?’ 시연은 믿을 수 없었다. 곧이어, 지동성이 말을 이었다.“시연아, 곧 다가올 아빠의 생일에 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구나.”시연은 또다시 얼어붙었다.‘오늘따라 무슨 일이 이렇게 많아?’무심결에 튀어나왔다.“무슨 뜻이에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죠?”“흠.”지동성이 가볍게 기침했다.“아빠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앞으로 몇 번이나 생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단다. 가족끼리 모여서 밥 한 끼라도 같이 먹고 싶어.” ‘뭐 이런 헛소리가 다 있어?’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냉소를 흘렸다.“아내도 있고 딸도 있잖아요. 가족이랑 매일매일 함께하잖아요?”“시연아.”지동성이 딸의 말을 끊고, 불만스럽게 고개를 저었다.“너와 우주도 아빠의 자식이야.”그는 모델 조립에 열중하고 있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아빠의 생일에 와준다면, 네가 나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게. 그때가 되면 우주의 치료비는 얼마가 되든 내가 책임지마.” ‘우주를 빌미로 협박하는 거야?’시연은 본능적으로 떠올렸다.‘로얄호텔에서의 그때도...’그녀는 경계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예요?”딸의 반응을 본 지동성도 깨달은 듯했다. 잠시 스치는 후회의 눈빛.“아빠가 뭘 할 수 있겠니? 그냥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싶은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