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희는 겨우 마흔을 넘긴 나이에, 늘 여유롭고 건강한 삶을 살아왔다. 은범은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더군다나, 한순간 쓰러진 게 뇌종양일 가능성이 있다니, 그는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양성인지 아닌지는 확인됐나요?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아직 확실하지 않대.” 노수철이 고개를 저었다. “수술해야 조직 검사를 정확히 할 수 있다고 하더라.” 그 말에, 은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술해야만 알 수 있다니...’부자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서로 같은 심정이었다. 노수철이 조용히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들어가서 네 엄마 좀 봐 드려라.” 잠시 숨을 고른 은범이 천천히 병실 문을 열었다. ...병실 안.강수희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날 밤, 은범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아침이 밝아올 무렵, 눈을 뜬 강수희의 컨디션은 다행히 괜찮아 보였다. 아들을 보자, 강수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은범아, 와 있었구나.” 강수희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어머니, 천천히...” 은범이 급히 손을 뻗어 어머니를 부축하고, 베개를 받쳐 주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갑자기 움직이며 안 된다고 하셨어요. 천천히 움직이셔야 해요.” 강수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 알았어. 우리 아들 말 들을게.” 곧이어, 노수철도 병실에 들어왔다. 어젯밤, 아들이 병원에 남겠다고 해서 노수철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새벽부터 불안해 일찍 나온 것이었다. “여보, 좀 어때?” “네, 괜찮아요.” 노수철은 집에서 직접 가져온 아침 식사를 건넸고, 아들을 향해 말했다. “곧 담당 의사랑 면담할 예정인데, 너도 같이 가자꾸나.” “네.” 은범은 묵묵히 수저를 들었다. 강수희의 수술 일정은 미룰 수 없어서 최대한 빨리 진행해야 했다. 노수철은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누구...?” 은범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어딘가 낯이 익긴 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얼굴을 바라봤다. “하하.” 여자애는 밝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 하진주야. 어릴 때 네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그 뚱뚱한 애, 기억 안 나?” 그제야, 은범의 기억이 스쳤다. 하씨 집안과 노씨 집안은 오래된 인연이었고, 하진주의 어머니와 강수희는 소꿉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여자애는 기억 속의 ‘통통한 꼬마’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늘씬하고 세련된 분위기였기에, 전혀 그때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었다. “아, 너구나!” 은범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다.” 진주는 밝게 웃었다. “맞아, 우리 가족이 해외로 나가고 나서는 한 번도 못 봤지.” 반가운 재회였지만, 은범에게 지금은 어머니의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그는 시계를 한 번 확인하더니, 강수희를 바라봤다. “어머니, 저 이제 회사에 가봐야 해요. 아버지가 곧 오실 테니까, 혹시 문제 있으면 바로 연락하세요.” “그래, 알겠어.” 강수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곁에 있는 진주를 슬쩍 바라봤다. “근데, 진주도 출근해야 한다더라. 너 회사 가는 길에 데려다줄 순 없겠니?” 진주는 어머니를 보러 온 것이었기에, 은범도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도 부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고마워.”“이모, 그럼 나중에 또 올게요.” “그래, 조심히 가.” 그렇게 두 사람은 병실을 나섰고, 은범은 그녀를 직장까지 태워다 준 후, 바로 회사로 향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업무를 처리한 후, 저녁 7시에 은범은 병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연아, 요즘 좀 정신이 없어서 못 보러 갔어. 아마 다음 주에는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시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도 바쁘니까 네 할 일 먼저 해. 굳이 시간 내서 올
할 말을 다 하고 나서 은범은 묵묵히 침묵했다. 노수철은 아내를 거들며 말했다. “그냥 얼굴 한 번 보는 거잖아. 무슨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두 집안 사이를 생각하면 너무 무례하게 구는 것도 좋지 않아.”오랜 침묵 끝에, 은범은 망설였다. “정말 얼굴만 봐도 된다는 겁니까?” “아이고...” 노수철은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너한테 강제적으로 굴 수도 없는 노릇이잖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은범은 잠시 갈등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얼굴만 볼게요. 하지만 딱 한 번뿐이에요. 기대 같은 건 하지 마세요.” “그래, 그래.” 강수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다 알아. 아들아, 고맙다.” 은범과 하진주와의 만남은 다음 날로 정해졌다. 마침 주말 밤 8시이니, 두 사람은 함께 연극을 보기로 했다. ...주말 밤. 유건은 소미를 태우고 G시에 제일 큰 극장인 ‘시네마극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유명한 연출가의 대표작이 공연되는 날이었다.그야말로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유건은 연극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소미를 위해 함께 왔다. 주말이라 극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소미는 유건과 나란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부딪혀 휘청거렸다. 유건이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았고,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괜찮아?” 소미는 황급히 귓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네, 괜찮아요.” 유건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의 발로 향했다. 은회색 하이힐이었다. 그는 미간을 좁혔다. “네 옷차림에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임신 3개월째잖아. 하이힐은 좀 위험하지 않아?” “너한테도, 배 속의 아이에게도.”“임신은 고되고도 위험한 과정이라 사소한 실수 하나로 두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단 말이야.” 소미는 순간 굳어졌고, 얼굴빛이 미묘하게 변했다.그리고 망설이며 말했다. “그러네요...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다
‘고유건이 나한테 전화를?’ ‘고유건도 이 극장에 있다고?’‘날 불러낸 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아서인가?’ ‘그렇다면, 대체 왜? 전화로만 들으면, 꽤 화가 난 것 같은데...?’ 연달아 떠오르는 의문을 안고, 은범은 하진주에게 짧게 말한 뒤 극장을 나섰다. “고 대표님...” 은범이 막 입을 떼며 인사하려는 순간, 유건의 주먹이 그대로 날아왔다. 퍽! 예상치 못한 공격에 은범은 그대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다행히 빠르게 중심을 잡아 휘청거리면서도 쓰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입가가 터졌고,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은범은 손등으로 피를 닦아내며, 황당한 눈빛으로 유건을 쳐다봤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흥!” 유건은 냉소를 흘리며, 싸늘한 눈빛으로 은범을 내려다봤다.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시연이는 알고 있어요?” 그 순간, 은범의 눈빛이 번뜩 흔들렸다. 짧지만 분명한 동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은 유건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은범의 옷깃을 단단히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노 사장, 시연이한테 진심이에요? 아니면, 그냥 장난치는 거예요?” “고 대표!” 은범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감정을 의심받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웃기지 마요. 저는 고 대표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시연이를 아끼니까, 고 대표보다 덜할 리는 없을 거예요.” 그는 피 묻은 손으로 입을 닦으며, 낮고 단호하게 덧붙였다.“고 대표도 시연이를 걱정해서 이러는 걸 테니, 오늘은 넘어가 줄게요.” “은범아!!”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가녀린 실루엣이 성급히 다가왔다. 하진주였다. 은범이 갑자기 나간 게 신경 쓰여서 몰래 따라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자마자, 은범이 맞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 것. 진주는 화가 나서 유건을 노려봤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사람을 때리다니! 우리, 신고할 수도 있다고요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아까는 미안했어.” “하하!” 진주는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연극은 끝까지 보고 가자?” “응, 그래.” 은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잔뜩 긴장했던 얼굴이 비로소 풀어졌다. ...주말, 시네마극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시연은 전혀 알지 못했다. 월요일 아침, 시연은 일찍 일어나 씻고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시연이 유건과 가정법원에 가서 서류를 제출하고 다른 서류들에 서명하기로 한 날이었다. 이미 약속된 일이었기에, 시간을 맞춰 나가려고 하는데, 주재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변호사님?” 시연은 급히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 “지금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늦지 않게 도착할 것 같아요.”[지시연 씨.] 전화기 너머에서 재호가 다소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아침 일찍 고 대표님이 전화하셔서, 오늘 가정법원에 못 간다고 하셨어요.]“뭐라고요?” 시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연락만 받았거든요.] ‘이게 뭐야?’ 시연이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아무래도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재호는 이 대답을 끝으로 전화를 뚝 끊었다. “변호사님?!” 시연은 멍하니 핸드폰을 쥔 채 서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끝에, 그녀는 주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몇 번 울리자, 지한이 전화를 받았다.그런데 첫마디부터 어딘가 어색했다. [예, 형수님.] “지한 씨.” 시연은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유건 씨, 무슨 일 있어요? 오늘 저랑 가정법원에 가기로 했는데, 못 간다고 하더라고요. 대체 왜죠?” 잠깐의 정적. 그 순간, 지한은 곁에 앉아 있는 유건을 힐끔 쳐다봤고, 결국 조용히 핸드폰을 유건에게 건넸다. 유건은 전화를
아침 시간이 한산할 거라고 생각해서, 시연은 고상훈을 뵈러 갔다. 왜냐하면 이 시간이라면 유건이 회사에 있을 확률이 높으니, 두 사람이 마주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병실 안은 고요했다. 시연은 조용히 문을 밀고 들어갔다. 고상훈은 수액을 맞은 채 침대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노인을 깨울까 봐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던 시연은, 옆에 놓인 모니터를 흘깃 보았다. 수치들은 안정적이었다. ‘다행이야.’ 그녀는 안심하고 돌아서려던 순간, 희미하게 감겨 있던 고상훈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할아버지?” 그때, 깊고 주름진 노인의 눈동자에 반가움이 스쳤다. 고상훈은 힘겹게 손을 뻗었다. “시연아.” “할아버지.” 시연은 환하게 웃으며 노인의 손을 꼭 잡았다. “저 때문에 깨신 거예요?” “고맙구나, 시연아.” 고상훈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눈가에 미세한 주름이 잡히도록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착한 시연이,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야. 유건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내 탓이야.” 그 순간, 욕실 문이 불쑥 열렸다. 척!긴 다리를 뻗으며 유건이 걸어 나왔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시연은 멍하니 서 있다가, 거의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여기 있었어요?” “하.” 유건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계속 여기 있었으면, 영영 할아버지를 안 뵈러 올 생각이었어?” “이놈아!” 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고상훈이 먼저 버럭 소리쳤다. “그게 할 소리야? 감히 또 시연이를 괴롭히려고?” 그는 힘겹게 팔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시연아, 오늘 내가 확실히 저놈을 혼내 주마!” “할아버지!” 시연은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 원만하게 정리했어요. 유건 씨가 절 힘들게 하지도 않았고요.”그 말에, 병실 안은 순간 정적에
“응.”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왜요?” 시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장소미가 고씨 가문에 순조롭게 들어가려면, 할아버지한테 그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 배 속에 있는 애가 고유건의 친자가 아니라는 걸 알면, 더 쉽게 정리될 텐데 말이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유건은 내려다보며, 마치 바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는 너랑 헤어진 것만으로도 충격받고 병상에 누우셨어. 그런데 이제 와서 네 배 속의 아이가 내 애가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더 큰 충격을 받으실 텐데, 건강이 더 악화되지 않겠어?” ‘아...'시연은 그제야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시연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여기까지 배웅해 줘서 고마워요. 이만 갈게요. 당신은 할아버지 곁에 있어 줘요.” ‘뭐?'유건의 눈이 순간 좁혀졌다. ‘고작 여기까지 왔다고, 그냥 가라는 거야?’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자.” 시연이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그제야 유건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배웅하겠다고 한 이상, 끝까지 해야 하지 않겠어?” 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가볍게 웃었다. “그래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이 정도는 별일도 아니니까.'...VIP 병동을 나와, 유건이 차를 가지러 가려 하자, 시연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괜찮아요, 난 강울대까지 걸어갈 거예요. 금방이니까요.” “그래.” 유건은 짧게 대답하고, 그녀와 함께 걸었다. 가는 내내, 시연은 한 번도 유건을 쳐다보지 않았고, 심지어 말조차 하지 않았다. 유건도 그냥 조용히 여자 옆을 걸었다. 진짜 그저 ‘배웅'하는 것처럼. “다 왔어요.” 실험동 건물 앞에서 시연이 멈춰 섰다. “여기까지
“뭐?” 유건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바로 얇은 카드 한 장이었다. 그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했다. “당신 카드예요.” 시연이 웃으며 남자의 손에 카드를 쥐여줬다. “진작 돌려주려고 했는데, 요즘엔 다 핸드폰으로 해결하잖아요. 계속 가지고 다니질 않아서... 아까도 또 깜빡할 뻔했네요. 당신이 멀리 가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시연은 그 말을 남기고 한 발짝 물러서며 남자의 품에서 벗어났다. 순간, 유건의 표정이 굳었고,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급히 뛰어나온 이유가 고작 이거 때문이야?” “네.” 시연은 숨을 가다듬으며 다소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카드를 돌려주는 것뿐이잖아요. 미안하지만, 그 안의 돈을 좀 썼는데, 아직은 갚을 능력이 없어요. 나중에 꼭 갚을게요.” ‘이게 무슨 뜻이지?’ 유건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시연이 더 이상 자신의 카드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 ‘이 여자, 조금씩 내 세계에서 멀어지고 있어.’ “그럼, 난 수업 준비하러 가볼게요.” 시연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그녀는 뒤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유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고, 손에 쥔 카드를 점점 더 단단하게 쥐었다. 딱!작은 소리와 함께, 얇은 카드가 두 동강 났다. 남자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필요 없다면, 남겨둘 이유도 없지.’ 그리고 갑자기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주재호였다. “무슨 일이야?” 재호는 순간 말을 멈췄다. ‘아니, 왜 매번 전화 받을 때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거야?’ [고 대표님, 말씀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전부인 분에 관련된 일이에요.]재호의 목소리에는 의구심과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 [자산 이전 서류요. 이제 지시연 씨 서명만 남았는데, 전화로는
“그럼 다행이네요.”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다행이야... 아무 일도 아니어서.’“그나저나...”오선화는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마치 일상 대화하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이제 6개월 차에 들어섰어. 곧 임신 후반기인데, 슬슬 휴식은 생각 안 해?”“휴식이요?”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그 생각은 진심으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오선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부터는 배도 더 많이 나올 거고, 몸도 훨씬 무거워질 거야. 부기도 생기고, 움직이기도 불편해지고.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도 괜찮지 않나?”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일할 수 있어요.”오선화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뭔가 걸리는 게 있어? 고 대표님이 계시니까, 병원에서도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잖아.”“네... 알고 있어요.”시연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 “저보다 선배인 선생님들도 다들 만삭까지 일하세요. 7개월까지 야간 당직도 서시고요. 저야 그에 비하면 충분히 배려받고 있는 거죠.”‘그 배려가... 전부 고유건 덕분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게다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렇게 일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출산도 더 수월하다고 하잖아요?”“그건 맞아.” 오선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나는 그냥 권유만 한 거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컨디션 안 좋을 땐 꼭 쉬어야 해, 알지?”“네. 그럴게요.”시연은 산모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교수님, 수고하세요.”“그래, 잘 가.”시연이 문을 나서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오선화는 웃음을 거두고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통화 목록을 스르륵 넘긴 오 교수의 손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바로 ‘고유건’이었다. 오선화는 깊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걸 준비했다.
그날 오후, 은범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부사장 이지혁과 비서가 며칠 사이 벌어진 상황을 보고했다.“GP그룹이 우리와의 협약을 전면 종료했어요.”“GP그룹?”은범의 표정이 굳어졌다. ‘GP그룹... 고유건... 왜 갑자기...?’이번 협약은 처음부터 은범이 직접 유건과 만나 성사한 것이었다. 물론, 사적인 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연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일 뿐.‘우린 둘 다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들이었잖아...’은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협약은 계속 수익이 나고 있었잖아요. GP 측에서 계약 종료 사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정확히 말하지 않았어요.”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입장은 아주 확고했어요. 위약금은 예정대로 지급하겠다고 했고요. 환불 어음은 이미 발송했다고 합니다.”‘그렇게 빨리?’은범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설득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모든 절차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더 불안했다.“그래서 일단 수령하진 않았습니다. 돌아오시면 같이 상의하려고 했거든요.” “잘하셨어요.”‘보상보다 중요한 건, 이 협력이 가진 미래 가능성이었는데...’은범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고 대표님한테 직접 연락해 볼게요.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야 하니까요.”“네, 애초에 사장님께서 직접 성사한 건이니까... 사장님께서 움직이는 게 맞죠.”은범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GP그룹으로 향했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GP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한 은범은 곧장 로비 데스크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전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비 데스크 직원은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예약은 하셨을까요?”“아니요.”“죄송하지만, 고 대표님과의 면담은 반드시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그건 알지...’은범은 고개를
“고 대표님!”하은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유건 앞을 가로막았다. 눈빛엔 분노가 가득했다.“이렇게 그냥 가시면 안 되죠!”“뭐라고?”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시선엔 의아함과 경멸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시연이 말이에요.” 하은은 안쪽을 가리켰다.“시연이는 고 대표님의 아내잖아요. 근데, 아내 앞에서 애인이랑 나가는 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애인’이라는 단어가 뱉어지는 순간, 유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눈가의 웃음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지금... 누가 감히 소미 씨한테 그런 말을 해?”그 말에 하은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더 큰 화가 치밀었다.“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그리고, 장소미 씨는 또 뭐예요? 고 대표님한테 아내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거, 무슨 의미인데요? 그리고 고 대표님이 장소미 씨를 감싸면, 시연이는 뭐가 되는 건데요?!” ‘시연이를 뭐로 보는 건지, 내가 대신 물어야겠어!’하지만 유건은 피식 웃었다.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럼 지시연은 나를 뭐로 봤을까?’그러나 이런 생각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비켜.”“싫어요!”그 말에 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목소리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솔직히, 너한텐 손쓸 가치도 못 느끼겠지만... 이쯤 되면 진짜 귀찮네.”“뭐라고요?”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해졌다.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비킬 거야, 안 비킬 거야?”“하은아!”그때, 시연이 급히 달려왔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며 중간에 섰다.“이런 사람들이랑 뭐 하러 싸워? 가고 싶다잖아. 그냥 보내줘. 누가 어딜 가든, 그건 자유잖아.”그러면서 하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가서 라면이나 먹자. 아까 건 너무 불었으니까, 새로 하나 뜯어야겠어.”시연의 말투는 덤덤했고, 시선은 여전히 유건을 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유건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건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간 이식 얘기, 우주한테 물어본 적 있어?”“뭐라고요?”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걸... 저 사람이... 지금 왜 묻지?’찰나의 정적. 그리고 곧,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는 우주의 보호자예요. 우주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해요.”하지만 유건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내가 알기론, 우주는 올해로 만 14세야. 이미 법적으로 자기 결정권이 생긴 셈이지.”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만큼 분명했다.“게다가 우주는 신체 조건도 아주 좋잖아.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기증 가능 기준에 부합해.”유건의 말은 아주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논리는, 결국 ‘장소미’를 위한 것이었다.‘하... 정말 대단하다, 고유건.’시연은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장소미를 스치듯 바라봤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말이 되는구나.’“우주의 열네 살이, 일반 아이들의 열네 살과 같다고 생각해요?”시연은 미세한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주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요.”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는 톤을 낮추면서도 힘을 실어 말했다.“지나치게 독단적이네.”“우주는 똑똑한 아이야. 심리적으로 결핍이 있는 거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잖아. 만약 언젠가 지 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우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그 말에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입꼬리에 걸려 있던 억지 미소조차 사라졌다.“자책이요...?”시연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냉소가 섞인 차가운 어린 목소리로 유건을 향해 말했다.“잘 들어요. 우린 인생에서 많은 걸 후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그 ‘누군가’ 안에 지동성은 절대 포함되지 않아요.”그 말에 유건의 이
하은은 눈치가 빨라서 괜히 시연에게 짐이 될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시연은 역시 장미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엄마요? 죽은 지 십몇 년 됐는데, 오늘 좀비처럼 부활이라도 한 거예요?”하은은 그제야 시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바로 무당 선생님한테 연락할게!”“얼른 해줘.”두 사람은 말 그대로 티키타카였다. 장미리의 얼굴은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지시연! 넌 진짜 싹수가 없어!”“맞아요.”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라는 사람도 죽은 거나 다름없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니, 예의 따윈 배운 적 없어요.”그녀는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무슨 용건인지는 상관없고, 지금 당장 나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엄마’라는 말 좀 들먹이지 마세요. 혹시라도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뱉는다면... 당신 입, 내가 부숴놓을 수도 있어요.”시연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서릿발 같았다.“진심이에요. 장난 아니니까, 절대 시도하지 마세요.”“너... 너 진짜...!”장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시연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말솜씨에서도, 기세에서도 밀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네 아빠... 쓰러졌어. 지금 혼수상태야.”그 말에 시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 정도라고...?’눈빛 속에 망설임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럼 그분 옆에서 간병이라도 해주셔야죠. 여긴 왜 와서 소란인데요?”“너...”“지시연!”자기 엄마가 밀리는 걸 보다 못한 소미가 나섰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진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우리가 왜 너를 찾아왔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나야 모르지.”시연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알려줘 봐. 여기엔 왜 온 건지.”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흐흑... 흐윽...]전화기 너머로 장미리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빠 비서한테 전화 왔어... 회사에서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대! 지금 병원으로 이송됐고, 나도 지금 가는 중이야! 소미야, 네가 더 가까우니까 먼저 좀 가봐!]“알겠어요, 엄마!”소미는 전화를 끊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가엔 금세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유건 씨... 우리 아빠가 또 쓰러지셨어요...”사정을 들은 유건은 곧장 몸을 일으켜, 여자의 팔을 부드럽게 받쳐주었다.“괜찮아, 지금 당장 같이 가자. 내가 함께할게.”“네... 유건 씨가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 혼자였으면 무너졌을지도 몰라요.”...장미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지동성은 응급실을 거쳐 병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이번엔 지난번보다도 훨씬 상태가 심각했다.지동성은 입원했지만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담당 교수도 장담할 수 없었다.“지금은 경과를 보셔야 합니다.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는...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흑...”병상 옆 의자에 앉은 장미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걸 어쩌면 좋아... 네 아빠, 갈수록 심해지는데... 간이식도 아직 못 받았는데...”갑자기 장미리는 고개를 번쩍 들어 유건을 바라봤다.“고 대표님, 간 이식 소식은 아직도 없는 건가요?”이전에 유건은 간 이식 대기자를 대신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직은 연락이 없습니다.”그는 도와주기로 했고, 실제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결국 ‘운’과 ‘순번’이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돈이 많다고 먼저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흐흑... 흐으...”장미리는 더욱 흐느껴 울며, 소미의 손을 꼭 붙잡았다.“소미야... 네 아빠, 의식도 없고... 이대로면... 정말 오래 못 버틸 수도 있어...”“그럴 리 없어요, 엄마. 아직 방법이 있을 거예요.”소미는
여자애는 두 손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진짜 살짝만, 살짝만 만져볼게요.”말처럼, 여자애의 손끝은 아주 조심스러웠다.“와... 아기가 있는 배는 이런 느낌이구나! 선생님, 진짜 대단해요. 엄마 되는 거, 완전 힘든 일인데...”시연은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근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누굴 찾는 건가요?”“저요?”여자애는 손을 거두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어깨에 멘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혹시 변이준 있어요? 저 보고 오라 그랬거든요.”‘이준 선배님?’“수술 들어가셨어요.”“헉, 진짜요?”여자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아싸, 잘됐다!”그 말과 동시에, 다시 가방을 어깨에 멨다.“선생님, 나중에 변이준이 오면 전해주세요. 저 왔다 갔다고, 없어서 먼저 간다고요!”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애는 벌써 휙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뒷모습이었다.“어... 네...”시연은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여기가 무슨 호랑이굴이라도 되는 건가? 저렇게까지... 도망갈 일인가?” 그래도, 궁금했다. ‘저 친구... 선배님이랑 어떤 사이지?’‘여동생일까? 닮은 구석은 없었는데...’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눈에 띄게 수려했다는 정도?’오후 2시쯤, 변이준이 수술을 마치고 내려왔다.머리는 아직 축축했지만, 얼굴은 늘 그렇듯 환했다.시연은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선배님, 의뢰하신 처방은 이미 내려놨어요. 환자도 약을 복용 중이고요.”“역시, 고마워!”이준은 환하게 웃으며,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훑었다. 그때, 시연은 문득 오전 일을 떠올렸다.“아, 맞다. 오늘 오전에 어떤 여자분이 선배님을 찾아왔었어요. 근데 안 계셔서 그냥 간다고 하시던데요?”“그냥... 갔다고?”그 말을 들은 이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하... 그 녀석, 말을 좀 듣고 살면 어디 덧나나...”이준은 수건을 손에 쥔 채, 더 이상 머리를
단 한 마디. 그 말에 시연은 마치 얼음물에 던져진 듯 몸이 굳었다. ‘맞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따갑지?’그리고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따가운 말이 그녀를 후려쳤다.“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유건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냉소가 담긴 웃음이었다.“내가 왜 양석현 교수 프로젝트에 투자했을 것 같아?” “내가 마음이 약해서? 돈이 남아돌아서? 밤에 잠이 안 와서?”순간, 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유건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아니, 다 아니야. 널 위해서였어. 널 아끼니까, 널 좋아하니까, 돈을 쓰는 것도 아깝지 않았던 거야.”그 말을 끝내고, 유건은 웃었다. 이번엔 대놓고, 조롱이 담긴 웃음이었다.“근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왜 또 돈을 써야 하지? 지금의 네가, 그럴 가치가 있나? 차라리 그 돈으로 비둘기 밥이나 주는 게 더 낫겠는데?” 시연은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유건은 한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제 가고,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 너랑 엮이는 거, 진심으로 지긋지긋해. 너랑 관련된 모든 일은 다 끝났어.”그는 돌아섰다. 단호하고 차가운 걸음이었다.“유...” 시연은 반사적으로 불러보려 했지만, 목에 걸린 그의 이름은 한 글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못 해...’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심장도, 생각도, 감정도 전부 마비된 채로.그 순간, 유건이 다시 멈춰 섰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그저 등을 보인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그래도 일부러 찾아왔고, 부부였던 정은 있으니까... 지원금은 지한이 통해서 처리하도록 할게. 하지만 이번뿐이야. 다음은 없어.”그는 그 말을 끝으로 차로 향했고, 조용히 문을 열고 올라탔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그대로 떠나버렸다.그리고 시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가을 오후의 바람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지한이 보기엔, 시연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간 듯했다. 너무 오래 기다렸으니, 그럴 법도 했다.하지만 바로 그때, 화장실에서 막 나온 시연은 멀리서 유건과 지한이 정문을 지나 계단 아래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저기 있다...!’더는 생각할 틈이 없어서 시연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유건 씨!”문 앞에서 유건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놀란 듯 고개를 돌리자, 시연이 급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여자의 걸음은 빨랐고, 숨이 찰 정도로 다급했다. 유건의 미간이 스르륵 좁혀졌다.‘저 여자... 아직도 안 갔던 거야?’“유건 씨! 잠깐만요!”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거의 뛰다시피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건은 다시 한번 얼굴을 찌푸렸다.‘배가 저렇게 불렀는데도... 뛰고 있어?’ 하지만 곧 속으로 비웃듯 생각했다.‘뛰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유건 씨...” 시연은 겨우 도착해,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잠깐이면 돼요. 몇 분이면 되는데... 시간 좀 줄 수 있어요?”맑은 눈망울이 간절히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유건은 잠시 목이 메는 듯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비웃듯 느릿하게 말했다.“신기하네. 네가 먼저 날 찾을 줄은 몰랐거든.”“그게 아니라, 나...”그러나 시연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유건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근데 난, 너한테 줄 시간이 없어. 단 1분도.”차가운 눈매, 건조한 말투. 남자의 입꼬리는 비쭉 올라갔지만, 표정엔 온기가 없었다.그러고는 단호히 돌아섰다. 그 차가운 뒷모습은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닫혀 있었다. 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췄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이런 식으로, 날 밀어내던 사람...’유건의 본모습을,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다. 시연의 몸속으로 한기 같은 게 퍼지며, 두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멍하니 유건이 차에 올라 문을 닫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