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자리에서 유건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고상훈이 시연에게 반찬을 집어 주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먹었다. 반찬이 다 떨어지면, 반찬은 쳐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밥만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뭘 봐?” 손자가 찌푸린 얼굴로 시연을 바라보자, 고상훈이 못마땅하게 말했다. “네 마누라랑 애 좀 잘 챙겨!” 유건은 눈썹을 살짝 들었다가, 못 들은 척 넘겼다. 밤이 되어 방으로 돌아온 유건은 곧장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으려던 순간, 거울 앞에 선 시연이 조용히 아랫배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여자는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쓰다듬고 있었다.이제 곧 석 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시연의 배는 여전히 평평했다. 유건은 그녀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순간, 시연이가 입을 열었다. “곧 석 달이네.” ‘...응?’ 유건은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뭐?” 하지만 시연은 다시 말하지 않고, 그저 유건의 깊은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아이, 지우는 게 맞을까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유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문제를, 왜 나한테 묻는 거지?’ ‘나랑... 상관없는 일인데...’ 유건이 대답을 망설이자, 시연은 마치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듯 담담하게 웃었다. “내 동생, 자폐 스펙트럼 장애예요. 당신도 본 적 있죠?” 유건이 눈썹을 올렸다. “그래서?” 시연은 몇 초간 침묵했다. 여자의 눈빛엔 이전보다 더 깊은 고민이 서려 있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유전적 요인이 있어요. 물론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우리 우주는 후천적 가능성이 크다고 했지만...” 그때, 우주는 겨우 돌이었다. 하지만 시연과 우주는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새어머니의 학대와 폭력을 견뎌야 했다. 시연은 애써 동생을 보호하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주는 점점 말수가 줄었고, 점점 다른 아이들과 달라졌다. 시연은 눈
깊은 밤. 유건은 집을 나서기 전, 무심코 침실 문 앞을 지나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멈췄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린 듯, 그는 조용히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유건의 시선은 어둠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익숙한 듯 침대 쪽으로 걸어가 멈춰 섰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시연은 조용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유건은 시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눈으로 여자의 이목구비를 천천히 그려 나갔다. ‘왜...? 왜 오늘 밤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한 거지?’ ‘설마 노은범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야?’ ‘그래서 힘들어하는 거야?’ 갑자기 남자의 가슴 한구석이 거칠게 긁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건은 흠칫하며 몸을 일으켰다. 바로 등을 돌려, 침실을 나섰다. ‘그건... 둘만의 문제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점심. 시연은 임진아와 함께 식사 중이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입안 가득 음식을 넣은 진아가 말했다. “나 인턴 끝나면 학교로 돌아가려고. 석사 준비해야지. 너는?” “나?” 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진아와 시연은 상황이 달랐다. 진아의 집이 엄청난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학업을 이어가는 데 무리가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난 아마... 먼저 일부터 구해야 할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진아가 바로 반대했다. “학사 졸업장이 뭐 얼마나 큰 도움이 된다고?” 시연의 실력은 인정할 만했지만, 학벌이 중요한 건 현실이었다. 현재 의료계에서 학사 출신이 대학병원에 정규직으로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석사는 기본이고, 전문의를 따고도 펠로우 과정까지 거쳐야 겨우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아마 시연의 성적과 실력이라면 종합병원이나, 운이 좋다면 대학병원의 계약직 정도는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연은 멍하니 서 있었다. ‘진짜 재미있는 광경이네. 아직 끝난 게 아니군.'유건은 조용히 지동성과 시연을 바라보며,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때, 지동성이 갑자기 지갑을 꺼냈다. 요즘은 다들 카드만 쓰지만, 그는 여전히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세대였다. 그는 지갑에서 두툼한 지폐 뭉치를 꺼내더니, 시연에게 내밀었다. “돈이 부족해서 그러니? 아빠가 줄게. 우선 이거라도 받아 둬. 더 필요하면, 그때 또 주마.” ‘...뭐지?’ 시연은 계속 가만히 서 있었다.‘갑자기 왜 이러지?’ ‘여덟 살 이후로 단 한 번도 나를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 이제 와서 나한테 돈을 주겠다니?’ 시연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지동성은 직접 그녀의 손을 잡아 직접 돈을 쥐여 주려 했다. “자, 받아.” 그러나 시연은 얼굴을 굳힌 채, 손을 홱 뿌리쳤다. ‘이유가 뭐든 상관없어. 이 사람의 관심은... 전혀 받을 생각 없어.’ “필요 없어요. 가져가세요.” 그녀는 딱 잘라 말하고, 바로 몸을 돌렸다. “시연아, 가지 마!” 지동성이 시연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가 거부하자, 이번에는 강제로 돈을 손에 쥐여 주려고 했다. “이건 아빠가 주는 거야. 받아, 받아 둬.” ‘진짜 성가시네.’ 시연은 짜증이 밀려와, 힘껏 팔을 뿌리쳤다. “싫다고 했잖아요!” 휙-그 순간, 지폐 뭉치가 허공으로 흩날렸다. 오만 원권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마치 눈처럼 바닥에 쏟아졌다. “시연아, 너...” 지동성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 돈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시연은 차갑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빛은 점점 싸늘해졌고,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 순간... “지시연!” 장미리와 장소미가 이쪽을 향해 빠르게 뛰어오고 있었다. 둘의 표정은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듯 살벌했다. ‘이제야 등장하네.’ “야, 이년아!” 장미리는 다
‘재밌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유건은 아무 감정 없이 지동성과 시연을 번갈아 바라보며 속으로 여러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고 대표님, 오셨네요.” “유건 씨!” 소미는 즉시 앞으로 다가가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바쁘다면서 왜 굳이 왔어요? 안 와도 된다니까.” 유건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정도 시간은 낼 수 있어.” 그러고는 짧게 덧붙였다. “퇴원 수속은 주지한이 처리 중이야.” “그럼 가자.” 유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미와 장미리, 지동성이 자연스럽게 그의 주위를 감쌌다. 지동성 일가는 서로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병원을 나섰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건은 한 번도 시연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시연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뺨을 문지르며...“쓰읍...” ‘아프네.’ ...밤, 고씨 가문의 본가에서. 시연은 샤워하다 말고 거울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볼이 더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이거 얼음찜질해야겠어.' 그녀는 타월을 걸친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냉동실에서 얼음을 찾아 아이스팩을 만들 참이었다. 이제는 밤 10시, 집 안은 모두 잠든 듯 조용했다. 그때,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시연의 손이 잠깐 멈췄다. ‘고유건인가 보네. 아마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갈 생각인가 봐.’ 그녀의 예상대로, 유건이 조용히 거실로 들어섰고, 주방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무심코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그는 시연이 뭘 하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에 표정을 굳히며 질문을 던졌다. “너랑 장소미 사이... 그 문제, 결국 장소미 아버지 때문이야?” ‘...?’시연은 손을 멈추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하지만, 유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가슴 어딘가가 서늘하게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오늘 내가 본 게 다야.' ‘남자가 여자에게 돈을 건넨
“대체 뭐 하는 거예요?” 시연은 당황스러움에 아이스팩을 뺨에 대고 있는 손을 그대로 둔 채 유건을 올려다봤다. 유건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는 더욱 차갑게 굳어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깊고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남의 돈 받지 마. 내가 준 카드 있잖아. 너 돈 없냐?” “하?” 시연은 황당했다. ‘그렇게 열을 내더니, 고작 이런 말 하려고?’ ‘진짜 어이없네.’ 아무리 참고 또 참아도, 결국 참는 데도 한계는 있는 법. 시연은 손바닥으로 유건의 가슴을 밀치며 소리쳤다. “나가요! 당신 안 보고 싶으니까 나가라고요! 나 자야 해요!” 하지만 유건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 시연은 분이 풀리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건을 노려봤다. 그런데 유건은 시연의 눈빛에서 묘하게도 투정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시연이가 뺨에 대고 있던 아이스팩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유건의 머릿속이 번쩍였다. ‘...아... 오늘 낮에 이 사람이 장미리한테 뺨을 맞았어. 젠장...' 유건의 시선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화가 치밀어 올라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심하게 맞았어? 어디 봐.” 시연은 더 놀랐다. 그리고 황당함을 넘어서, 도무지 유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신경 쓴다고?' 그녀는 그냥 밀어내기로 했다. “나가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시연의 두 손은 오히려 유건에게 잡혀버렸다. ‘뭐야... 이 힘은?' 그녀는 순식간에 꼼짝없이 붙잡힌 채, 마치 인형처럼 무력하게 서 있었다. 유건은 한 손으로 시연의 손목을 제압한 채,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그리고 붉게 부어오른 뺨... 손자국이 선명했다. ‘젠장...' 유건의 눈빛이 깊어졌다. ‘저 정신 나간 여자가 손을 얼마나 세게 놀렸길래?’ 그런데 시연은 유건의 손길에 화가 치밀었다. ‘이제
유건의 생각대로만 한다면, 그는 지금 당장 본가를 떠나고 싶었다. ‘단 1초라도 지시연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밖에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고, 내일 아침에는 할아버지의 아침 식사 자리에 동석해야 했다. 유건은 짜증스럽게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거칠게 두 모금 빨아들이고는 그대로 객실로 향했다. ‘다행히 본가는 늘 예비 객실을 정리해두는 습관이 있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밤 어디서 자야 할지 몰랐을 텐데.’ 소파에 몸을 던지자 눅눅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다 지시연 때문이야. 그런데 정작 저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잖아.’ ... 이른 아침, 이호민은 부부가 따로 잔 것을 눈치채고 곧바로 고상훈에게 알렸다. 고상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놔둬. 젊을 때 안 싸우고 언제 싸우겠나?” 이호민은 피식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근데 제 생각에는 도련님이 사모님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신경 쓰는 티가 확 나던데요?” “고개 숙인다고 머리카락 안 보이나?” 고상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싸우는 건 싸우는 거고, 적절한 순간엔 도와줄 필요도 있지.” “알겠습니다, 어르신. 제가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 시연은 씻고 내려와 왕성애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이모님, 할아버지 식사 준비됐을까요? 제가 가지고 올라갈게요.” “괜찮습니다.” 왕성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께서는 집사님이랑 이야기할 게 있어서 같이 드신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래요. 저는 아침식사 준비하겠습니다.” 시연이 계단 쪽으로 향하는 순간, 이호민이 식판을 들고 내려왔다. “집사님.” “사모님.” 이호민은 고상훈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젯밤, 혹시 도련님과 다투셨나요?”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어른에
어렵게 맞이한 휴일이었지만, 시연은 여전히 바빴다. 이미 맡아둔 번역 원고는 모두 마무리했고, 오늘은 편집장을 만나러 가야 했다. ‘그리고, 이제 이 아르바이트도 그만둬야겠어.’ 이제 은범의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된 이상, 시연은 은범의 마음을 끊어내기 위해 더 이상 그의 호의를 받을 수 없었다. ‘게다가, 곧 시험 준비도 해야 하고, 양 교수님 쪽 일까지 맡으면 더 바빠질 테니까.’ 편집장은 아쉬워했고, 시연이 찾아간 임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아가 신경 쓰는 부분은 좀 달랐다. “노은범 쪽은, 진짜로 아무 희망도 없는 거야?” 이 일에 대해, 진성빈이 진작에 진아에게 말해주었다. 그제야 진아도 알게 되었다. 바로 은범이 지난 몇 년간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시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 집안에서 날 받아줄 리 없어. 똑같은 아픔을 이미 한 번 겪었어. 두 번 겪고 싶진 않아.”이 말의 무게를 진아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 시절, 시연이 어떻게 버텨냈는지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진아였다. “그래, 우리 일에 집중하자. 장래의 지시연 교수님!” “헤헤, 좋아!” 하지만, 지금 공부가 우선이기 전에 해결해야 할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시연의 배 속의 아이... 여러 번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시연은 결정을 내렸다. ‘이 아이는 지우자. 아이에게 미안함은 있지만, 이대로 남겨두는 게 꼭 좋은 일일까?’ ‘건강할지 아닐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마 이 아이도, 세상에 태어나길 원하지 않을지도 몰라.’ 지금의 상황은 유건이 강제로 임신중절수술을 강요하던 그때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시연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다. 병원도 직접 알아보고, 사전 예약도 마쳤다. 오늘은 우선 검사를 받아야 하고 검사 결과는 당일 안에 바로 나온다. 시연은 진료실 앞 긴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그 시각, 병원 복도
시연이 고개를 들었는데, 정말 유건이었다. 그녀는 두 눈에 의문을 가득 담은 채 남자를 바라봤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유건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 사람 어디 있어?” ‘응?’ 시연은 더욱 당황했다. ‘그 사람? 누굴 말하는 거지?’ 주변을 살폈지만,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건의 심장은 더 격렬하게 타올랐다. “이런 일에 노은범은 안 따라왔어?” ‘아...’ 시연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유건은 시연이 임신한 아이가 은범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기요, 내 말 좀 들어봐요...” “뭘 듣는데?” 유건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시연이 무슨 말을 하든, 그의 신경을 자극할 뿐이었다. “노은범이 싫어해서 그래? 우주처럼 될까 봐? 그래서 네 몸 상태도 무시하고 억지로 지우라고 한 거야?” “아니에요...” “아니, 뭐가 아니야?” 시연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내가 스스로 결정했어요.” “확실해?” 유건은 단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우면, 넌 평생 다시는 엄마가 되지 못할 수도 있어.” 유건의 시선이 시연의 아랫배로 향했다. “만약, 이 아이가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라면?” 시연의 온몸이 굳어버렸다. ‘...어떻게 알았지? 검사 결과는 오늘 오후에 나왔을 텐데...’ 시연이 얼어붙은 사이, 유건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자.” ...차 안, 시연은 창문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는데... 이 사람이 막으러 올 줄은 몰랐어.’ ‘이번에 못 하면, 다음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내 배도 점점 불러올 거고, 그때가 되면 더 이상 포기할 수도 없을 텐데...’ 본가에 도착한 후, 시연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문을 닫았다. 그런데, 유건은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돌려 떠나버렸
“장소미...”시연은 그녀가 화를 내도록 놔두었다.솔직히, 남자 친구가 전처와 함께 있는 걸 보고 화가 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난 네 남자 친구한테 매달린 적 없어. 정말 우연히 만난 거야.”“허!”소미는 이를 악물고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래? 그럼 하나만 더 묻자. 일부러 가정법원 가는 걸 피해서, 이혼 서류에 서명 안 하는 이유는 뭔데?!”“뭐?”시연은 놀라며 유건을 바라보았다.“소미 씨.”유건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소미의 손을 잡았다.“그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야. 내가 바빠서...”“지시연.”소미는 유건의 말을 무시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시연을 응시했다.“난 네 대답을 들어야겠어. 이혼 서류에 서명 안 한 거, 혹시 유건 씨를 못 잊어서 그런 거 아니야?”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게 박혀왔다.“장소미.”시연은 미소를 거두었다.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너는 내 남편과 불륜 관계잖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추궁하는 건데?”소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뭐?”시연은 비웃음을 흘렸다. 소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정확히 해두자. 난 아직 고유건 씨와 법적으로 혼인 관계야. 이혼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고, 네가 참견할 일 아니란 뜻이지.”“지시연...!”소미는 분노에 휩싸여 이를 악물고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유건 씨는 널 사랑한 적 없어요! 그 결혼도 강요당해서 한 거라고!”“웃기시네.”시연은 무심코 서늘한 눈빛으로 유건을 스쳐보았다. “그럼 누가 칼을 들이대서 강제로 혼인 신고하게 만든 건데?”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성인이면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지.”“고유건 씨가 어떤 이유에서든 나랑 결혼했으면, 나는 법적으로 고유건 씨의 아내인 거야. 법이 보호하는 거라고.”그녀는 지친 듯한 표정으로 소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유부남을 선택했다면, 유부남이 정식으로 이혼하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는 게 도리 아니야?”‘유부남의
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흘끗 바라보았다.유건은 즉시 기세가 꺾였고,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안 보면 신경도 안 쓰이겠지!’“얼른 가.”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은범에게 손짓했다.“시연아, 고마워.”은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하듯 말했다.“진주를 데려다주고 바로 올게. 제발 화내지 말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알겠지?”시연은 대답 대신 다시 손짓했다.“얼른 가.”“조금만 기다려!”은범은 시연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빨리 다녀와서 시연이를 만나야 해!’두 사람이 떠나고 나자, 주변은 조용해졌다.시연은 멀어지는 은범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이제 와서 아쉬운 거니?”뒤에서 나직한, 그러나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연이 은범을 보고 있다면, 유건은 그런 시연을 보고 있었다.유건은 자신도 모르게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자기 남자를 놓아주고 대단한 척이라도 하려는 건가? 너,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야.” ‘과연 그럴까?’시연은 고개를 돌려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남자를 응시했다.‘난 바보가 아니야. 고유건이 갑자기 나한테 키스한 것도, 지금 이 말을 하는 것도...’‘하진주라는 여자가 은범이랑 같이 있는 걸 나한테 보여주지 않으려 한 거야.’시연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유건 씨, 왜 그렇게 조급해해요? 혹시라도 내가 은범이랑 잘 안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건의 숨이 턱 막혔다.‘걱정하다니?’‘지금 나더러 본인이 노은범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라는 건가?’ 한동안 말이 없던 유건을 향해, 시연이 느긋하게 물었다.“‘응’이랑‘아니’중에 골라서 대답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이게 무슨...?’유건은 시연의 집요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짜증스럽게 턱을 까딱하며 짧게 대답했다.“응.”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 덧붙였다.“처음엔... 나도 너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라,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그리
문 밖.유건, 은범, 그리고 진주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가장 먼저 진주의 핸드폰이 울렸다.“엄마. 네, 이제 끝났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진주는 은범을 바라보았다.“은범아, 우리 엄마가 집에 빨리 들어오래.”하지만 은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없이 굳어 있었다.그는 무조건 시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진주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응...”은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 시연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그러나 그때, 은범의 핸드폰이 울렸다.강수희였다.“어머니.”[은범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진주를 안 데려다준 거니? 서로 친해지는 건 좋지만, 너무 늦으면 진주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은범은 진주를 한 번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강수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이제 늦었으니, 무조건 진주 데려다줘야 해. 알겠지?]이를 악물며, 은범은 짧게 대답했다.“알았어요.”전화를 끊고, 그는 진주를 향해 말했다.“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어?”진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그래도 돼?”“너랑 같이 왔잖아.”은범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너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게 맞지.”시연에게는 나중에 충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가자.”“응.”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건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빛 가득한 냉소를 띄웠다.‘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었어.’그는 긴 다리를 내디뎌 은범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비꼬는 듯한 미소.“어디 가려고?”“고 대표님...”은범이 답하려 했지만, 유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내가 있는 한, 넌 한 발짝도 못 움직여.”은범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말했다.“고 대표님, 전 친구를 집에 데려다줘야 합니다.”“헛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몇 걸음 떨어진 곳.노은범과 하진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그리고 시연과 마주쳤다.“시, 시연아.”은범은 당황해 더듬거렸다.진주는 은범을 한 번 바라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친구야?”“응, 아니... 아니야. 내가 좋아한다던 그 사람이야.”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부정했고, 더 이상 진주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시연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뜻밖의 조우에 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교수님이 여기서 회의 중이셔. 놓고 가신 자료를 가져다주러 왔어.”그녀가 유건에게 한 말과 똑같았다.“그렇구나.”은범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연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엔 허공을 잡았다.시연은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은범은 순간 멍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연아?”시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엔 명확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먼저 가볼게. 그리고 널 방해하면 안 되잖아.”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려 했다.은범은 당황했다.시연이 오해했다고 확신했다.“시연아...”“잠시만요.”진주가 갑자기 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여자의 직감은 빠르다. 이 짧은 순간에도 진주는 분위기를 감지했다.시연과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말했다.“죄송하지만, 잠깐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어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시간 없어서요. 비켜주세요.”거절이었다.진주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강단 있게 나섰다.그녀는 시연의 팔을 잡았다.“잠깐이면 돼요! 금방 끝날 말이에요.”그녀는 은범을 흘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당신이 은범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오해하신 것 같아요.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친구일 뿐이거든요.”“하고 싶으신 말, 다 하신 거예요?”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