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그저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귀 끝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참다못해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하지만 박한빈은 대답 대신 조용히 물었다.“그럼 다 기억난 거야? 우리 사이의 모든 것들.”“아니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러면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머리가 아파요. 아까 의사 부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 가서...”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불쑥 그녀의 손을 잡았다.힘이 강하지는 않았다.그런데도 그의 손가락 끝이 살짝 스치는 때, 성유리는 온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순간적으로 손을 빼려던 찰나 박한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사실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도 난 너를 여러 번 본 적이 있어.”성유리는 뜻밖의 말에 순간적으로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알아요. 학교에서 몇 번 마주쳤잖아요.”“그것뿐만이 아니라 졸업 후에도 널 본 적이 있어. 네 대학 졸업 공연도 직접 가서 봤어.”그는 느릿하게, 마치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말했다.그리고 왠지 모르게 쑥스러운 듯한 기색도 묻어 있었다.이런 이야기는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그래서인지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졸업 공연이요?”“응. 네가 연극에 출연했잖아.”그 말에 성유리는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렸다.학교 축제 때 한 번 공연했던 연극을 졸업할 때도 다시 무대에 올렸었다.물론, 성유리는 단역이었다. 대사 한마디도 없는 엑스트라.“그걸 보러 왔었다고요?”그녀는 어리둥절했다.그게 대체 뭐라고? 박한빈이 그런 공연을 일부러 보러 올 이유가 있었을까?성유리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때, 박한빈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용히 대답했다.“넌 졸업하자마자 나랑 결혼했어. 기억하지?”“알지. 그런데 그게...”성유리는 말하다가 문득 깨달았다.“설마 진짜 일부러 저 보러 오신 거예요?
“그 사람은 아니야.”성유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하지만 곧 무언가 떠오른 듯 표정이 살짝 변했다.“그런데 연정우 씨는 지금 어떻게 됐어요?”“죽었어.”박한빈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는 곧바로 화제를 되돌렸다.“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구냐고?”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물음보다 죽었다는 대답이 더 신경이 쓰였다.순간적으로 멍해진 그녀에게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유리.”이번에는 한층 낮고 어두운 톤이었다.“내가 묻고 있잖아. 도대체 누구야? 너 도대체 남자가 몇이나 되는 거야?”“뭐라고요? 지금 그게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이죠?”성유리는 황당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왜 그 사람이 남자라고 확신하세요?”“아니야?”박한빈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잠시 말을 멈춘 성유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일단 연정우 씨가 정말 죽었는지부터 제대로 말해 줘요.”“그 미친놈을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건데? 먼저 너부터 말해. 그때 널 봤다는 사람이 누구야?”“지금 제정신이세요? 전 무대 위에 있었어요. 절 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 그럼 그 사람들 다 찾아볼 건가요?”성유리가 단호하게 받아치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화가 나서였을까.병실 안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연정우가 죽었다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은 걸 보며 사실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아마도 살아 있겠지만 상태가 어떤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진심은 하나였다.연정우가 그렇게 쉽게 죽어버린다면 너무 쉬운 결말 아닌가.그가 겪어야 할 대가는 그 정도가 아닐 텐데.의사가 병실로 들어왔을 때,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박한빈은 여전히 성유리를 부축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얼음 같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의사는 자신이 들어온 타이밍이 적절한지 잠시 고민하다 결국 말을 꺼냈다.“환자 상태를 다시 한번 체크하겠습니다.”박한빈은 의사를 한 번 흘깃
성유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잊어버렸어요. 그냥 몇 번 밥만 같이 먹은 기억만 나요.”“그러니까... 진짜 남자였네?”박한빈이 다시 확인하듯 묻자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그럼 그 자식도 별거 아니었네. 널 진심으로 신경 쓴 척하면서도 네가 그때 연기한 게 단순한 하녀 역할이라는 것조차 기억 못 했잖아. 대사도 하나 없는 배역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유리는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반응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다 문득 뭔가 깨달은 듯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이거 봐요. 박한빈 씨 제대로 기억하고 계셨잖아요.”장난스러운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이 성유리에게 속아 넘어갈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 같았다.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그때부터 저 좋아했어요?”“아니.”박한빈은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고 성유리 또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그래요? 알겠어요.”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근데 저 심지어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 그냥 빈말이라도 절 좋아한다고 말해 줄 수는 없는 거예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고 살짝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솔직히 이렇게까지 말하면 박한빈도 조금은 마음이 약해질 줄 알았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가 아무 반응도 없자 결국 성유리는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몸을 숙였다.그리고 성유리의 입술을 덮쳤다.그의 키스는 처음에는 강한 벌처럼 다가왔다.박한빈은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고 성유리가 아파서 살짝 신음하자 그 틈을 타 혀끝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속으로 밀려들어 왔다.처음에는 강제적인 느낌이었지만 점점 부드러워졌다.그는 성유리의 혀를 가볍게 감싸며 유혹하듯 움직였다.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성유리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가 그렇게 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손을 뻗어
“왜?”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를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잊어버렸어요.”이 예상치 못한 대답에 박한빈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그런데 그 사이, 성유리는 벌써 자리에 눕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그러자 박한빈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아직 말 안 끝났잖아.”“다 했잖아요. 진짜로 기억 안 난다니까요.”성유리는 일부러 시치미를 뗐고 박한빈은 점점 이를 악물었다.그녀가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원래라면 계속 캐물을 테지만 시선을 돌리자 성유리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붕대가 보였다.방금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얼굴도 창백해 보였다.결국 박한빈은 조용히 손을 놓아주고 말했다.“그래. 그럼 자.”너무나 쉽게 받아들이는 박한빈의 태도에 성유리는 오히려 놀랐다.그런데 박한빈은 그녀의 이불을 살짝 정리해 주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여기 있을게.”그제야 성유리는 그의 눈 또한 충혈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턱에는 깔끔하게 밀지 못한 거친 수염 자국까지 있었다.평소라면 매일 아침 완벽하게 정리하고 나올 사람이었기에 이런 모습은 거의 처음 보는 거나 다름없었다.한참을 머뭇거리던 성유리가 조용히 물었다.“저 얼마나 잤어요?”“이틀.”박한빈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정확히는 49시간.”“그동안 계속 여기 계셨어요?”“응.”그의 대답은 담담했다. 마치 그게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성유리는 한동안 박한빈을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안 쉬어도 돼요?”“잘 때가 되면 잘 거야.”박한빈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난 괜찮으니까 너나 푹 쉬어.”한동안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성유리가 물었다.“아마 박한빈 씨는 기억 못 하고 계실 거예요. 그렇죠?”“뭘?”의아해하는 박한빈을 보며 성유리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그때 전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사람들이 저를 위해 파티를 열었어요.”방금 깨어난 몸이라 피곤했
그때, 성유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몰랐다.지난 10년 동안 깊은 산속에서 자라며 계곡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수영은커녕, 물에 몸을 담가 본 적도 없었다.그래서 물이 코와 귀로 파고드는 순간, 그녀는 극심한 질식감을 느꼈다.숨이 막히고 온몸이 얼어붙었다.비록 이 세상이 낯설었지만 그래도 성유리는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다.아니, 그렇지 않았다면 부모님은 그녀를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매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막 가족을 되찾았기에 성유리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손에 잡히는 것이 있다면 뭐든 붙잡고 싶었다.물속에서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누군가가 곧 자신을 구해줄 거라고 믿었다.부모님이 이 광경을 보고, 자신을 건져 올려 줄 것이고 이 잔인한 사람들에게 단단히 본때를 보여줄 거라고.하지만 기대했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성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아마도 몇 초, 혹은 수십 초였겠지만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늘어났다.처음에는 당황과 분노, 그다음에는 누군가 자신을 구할 거라는 확신.그러다 점점 의심과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결국,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됐다.물이 끝없이 성유리의 코와 귀로 스며들며 숨을 앗아갔다.이내 힘겹게 버둥대던 손과 발도 점점 무력하게 가라앉아 갔다.그리고 그 순간, 맑은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첨벙!누군가 물속으로 뛰어든 소리였다.애써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물 속으로 뛰어든 낯선 이가 입고 있던 하얀색 정장이 젖고 있었다.성유리는 흐려진 시야 속에서도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파티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도 마지못해 온 듯한 표정이었다.귀찮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온몸으로 냉랭함을 뿜어내고 있었다.아주 잘생긴 얼굴이었고 성유정은 그런 그를 향해 친근하게 오빠라고 불렀다.그리고 그는 유독 성유정에게만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그래서 성유리는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그 사람은 한 치의
연정우의 부상은 성유리보다 더 심했다.생명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팔이 부러져 있었다.그런데 지금 상태에서는 그런 것조차 중요하지 않았다.국내에서 내려진 수배령이 이미 이곳까지 전달되었고 거기에 죠지의 죽음에 대한 죄까지 더해졌다.연정우는 알고 있었다.설령 본국으로 송환되어 사형을 선고받지 않는다 해도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 거라는 걸.감옥이라... 사실 연정우에게 낯선 곳은 아니었다.그동안 그가 직접 많은 사람들을 그곳으로 보냈으니까.하지만 설마 자신도 그곳에 갇히게 될 줄은 몰랐다.정말 우스운 일이었다.“면회. 누가 널 보러 왔다.”낯선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연정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면회요?”“그래. 나가 봐라.”연정우를 감시하는 흑인 남성은 몹시 귀찮다는 듯한 태도였다.그가 미적거리자 그 남자는 철창을 세게 두드리며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나갈 거야, 말 거야?”연정우는 입술을 단단히 다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국땅에서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과연 있을까.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설령 동일한 도시 안에 있다고 해도 자신을 보러 올 사람이 있었을까 싶었다.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걸까?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정우는 여전히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고 추앙받는 대학교수였는데.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걸어 나간 그가 마침내 마주한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그 사람을 발견한 순간, 연정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하지만 팔에 전해지는 통증이 그것이 환상이 아님을 증명했다.그녀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던 연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살아 있었구나.”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난 이미 알고 있었어.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연정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잖아.”그러자 성유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래도 살아남을 확률이 반 이상은 된다고 생각했어.”“그렇다면... 정말 나랑 같이 죽을 수도 있
“네 어머니께서 알려주셨어.”성유리의 말에 연정우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보았다.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어머니한테 말했어. 설령 어머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도 박한빈 씨가 결국 널 찾아낼 거라고.”“박한빈 씨 수단이 어떤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어. 그때가 되면 네 어머니가 원하는 평온한 삶도 불가능해질 거라고.”“하지만 만약 어머니가 내게 네가 있는 곳을 말해 준다면 적어도 지금의 생활은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연정우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문득 성유리에게 물었다.“그래서 엄마가 너한테 내 행방을 알려준 거란 말이지?”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연정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방금 전의 웃음과는 달랐다.이번에는 한층 더 담담한, 어쩌면 체념이 섞인 듯한 웃음이었다.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눈은 붉게 물들어갔고 손도 덜덜 떨렸다.성유리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러나 바로 그 순간, 연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런 말 해주려고 오늘 일부러 찾아온 건가?”그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발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 않았다.연정우는 그녀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는 다시 말했다.“성유리, 너는 나를 냉혹하다고 해도 좋아. “나를 배은망덕한 놈이라 불러도 좋아. 하지만 내가 평생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어도 너한테만큼은 아니야!”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기 시작했다.“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했어.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다 널 믿었기 때문이야!”“하지만 넌? 나한테서 그토록 많은 걸 가져가고도 아직도 부족해?!”“이제는 날 이렇게까지 짓밟아야 속이 시원해?”“감옥에서조차 편히 지낼 수 없게 하려는 거냐고!”“너...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질 수가 있어?”잔인하다는 그 단어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연정우 스스로도 믿
성유리와 박한빈이 라온시를 떠나기 전에, 에릭이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그런데 그 식사는 호텔이나 다른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릭의 개인 별장에서 진행되었는데 마치 성인 사자들이 자신만의 영역을 갖듯 에릭의 별장도 그의 사적인 영역이었다.에릭이 박한빈 혼자 초대한 적이 있지만 성유리와 함께 초대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는 그가 성유리를 인정했다는 뜻이었다.박한빈은 사실 에릭의 인정 따위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가 성유리의 존재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뜻깊게 생각했다.성유리는 연정우에게 끌려갔던 일을 아직 에릭에게 따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었지만 그는 성유리에게 직접 연락을 해 초대를 했다.어쩔 수 없이 성유리는 그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초대에 기꺼이 응하며 박한빈과 함께 가기로 했다.그리고 성유리 또한 에릭의 별장에 흥미를 보이기에 박한빈도 순순히 그녀의 결정을 따랐다.별장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성유리는 경비원들이 순찰을 도는 모습을 봤다.그들은 모두 총을 들고 있었고 비록 에릭이 사전에 연락을 했지만 어떤 경비 지점에선 차량을 멈추고 확인을 거친 후에야 통과를 허락했다.“자기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누군가 자신을 암살하려 할까 봐 두려워서 저러는 거야.”성유리는 박한빈의 설명을 듣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그래도 그냥 안전을 위한 거겠죠. 여긴 위험한 곳이니까.”하지만 박한빈의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보안이 그렇게 철저하면 뭐 해? 보디가드들이 엉망이니까 너를 연정우가 납치해 갔잖아.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 같으니라고.”성유리가 그를 달래듯 조용히 말했다.“그때 연정우가 초대장을 구해서 들어온 거였어요.”박한빈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미간을 깊이 찌푸리고 있었다.성유리는 그가 여전히 그때 일을 떠올리며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그녀가 의식을 잃고 있었던 이틀 동안, 박한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러나 박한빈이 유서를 작성했다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투자를 받으려면 최소 몇 근 정도 되는 엄청난 양의 술은 마셔야 해. 그런데 넌 뭘 했지?”“전 당신 아내잖아요. 저한테 그 정도 특권도 없나요?”성유리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고 아내라는 단어도 이제는 꽤 자연스럽게 나왔다.박한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지만 눈빛 속에 감춰지지 않는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하지만 바로 그때, 그들 뒤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서연?”그 소리를 듣는 순간, 성유리는 발걸음을 뚝 멈췄고 모든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지서연이라는 이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오래전이라 성유리는 자신도 이미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혹은, 이제는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어차피 지금은 박한빈과 예전의 일을 평온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과거의 자신을 농담처럼 가볍게 흘려보낼 수도 있으니까.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유리 혼자만의 착각이었다.지금 그 이름이 다시 들려온 순간, 날카로운 기억들이 마치 조각난 유리처럼 성유리의 차분한 겉모습을 찢어버리고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 사람이 벌써 성큼성큼 다가왔다.“정말 너 맞지? 아까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그런데 진짜 너였네.”여자는 잔뜩 흥분하며 말을 이어갔다.“나 요즘도 뉴스에서 너 자주 봤어! 다들 그러더라? 너 요즘 잘나간다고. 부자 남편 만나서 유복하게 산다며?”“원래 너 찾으려고 금성까지 갈까 했었는데 연락처를 몰라서 못 갔어.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만날 줄이야!”여자는 감격한 듯 팔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예전에는 너랑 우리 단이가 같은 반 친구였잖아! 맞다, 그리고 너...”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손을 뿌리쳤다.그리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사람 잘못 보셨네요.”그 말에 여자가 순간 멍해졌지만 이내 다시 물었다.“그럴 리가 없어. 내가 널 어떻게 몰라보겠어? 네 집 예전엔...”
성유리는 손끝에 힘을 잔뜩 줬다.하지만 박한빈의 팔 근육이 워낙 단단해서 자신이 아무리 힘을 줘도 제대로 꼬집히지도 않았다.이 사실을 깨닫자 성유리는 살짝 짜증이 났다.성유리가 눈썹을 찌푸리며 박한빈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그는 곧장 그녀의 기분을 이해한 듯 말했다.“차라리 깨물어 볼래?”“됐어요.”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그렇지만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했다.그제야 박한빈은 성유리가 진짜로 신경 쓰고 있는 게 뭔지 깨달았다.“일이 잘 안 풀려?”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문 뒤, 고개를 끄덕거렸다.“아까 감독이랑 이야기했다고 했지? 무슨 얘기였어?”“대본 관련해서...”“수정해야 돼?”박한빈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다른 작가들도 있으니까 너 혼자 할 필요 없잖아.”“제작사가 새로운 배우를 끼워 넣으려고 해요. 그래서 캐릭터를 추가해야 하는데...”성유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미 대본이 충분히 꽉 차 있어서 추가하려면 거의 처음부터 다시 짜야 돼요. 그런데 감독은 일주일 안에 끝내라고 했어요.”“넌 그걸 동의한 거야?”“제가 싫다고 해도 방법이 없었어요. 저쪽이 우리 영화 최대 투자사거든요 그래서 감독도 쉽게 거절할 수 없고요.”“음... 그럼 곧 최대 투자사가 바뀌겠네.”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왜요?”“내가...”그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성유리를 힐끔 바라봤다.그런데 성유리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보며 물었다.“성유리, 너 지금 나 떠보는 거지?”“아니요? 전혀 아닌데요?”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도 그녀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아야!”갑작스러운 행동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손까지 휘저으며 외쳤다.“뭐 하는 거예요! 살살 좀 하라고요!”성유리가 두 손으로 자신을 마구 밀쳐내자 박한빈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놓아주었다.“내가 제작사에 투자하게 만들고 싶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이렇게 덫을 세우지 말고.
새로운 캐릭터를 추가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고 게다가 투자사에서 내건 조건도 까다로웠다.“주인공보다 비중은 적어야 하지만 캐릭터 자체는 충분히 매력적이어야 합니다.”감독이 단순히 조건만 언급했을 뿐인데도, 성유리는 이미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성유리 작가님.”감독은 마치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원작자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겠죠? 어디에 캐릭터를 끼워 넣어야 자연스러울지. 그러니까 이 작업은 당신이 맡아주세요.”감독의 말에 성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러나 감독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통보를 내렸다.“투자사에서 일주일 내로 수정된 대본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준비하세요. 그리고 임 작가님이 성 작가님 작업에 맞춰 협조해 주세요.”그 말을 끝으로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캐스팅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나갔다.회의실에 남겨진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임 작가는 성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작가님, 혹시 떠오르는 아이디어 있으세요?”성유리는 묻는 임 작가를 한 번 바라본 뒤, 고개를 저었다.“그럼 어쩌죠? 겨우 일주일인데 이 대본을...”임 작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성유리의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을 보자 예상대로 박한빈이었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임 작가에게 말했다.“일단 먼저 돌아가세요. 통화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볼게요. 필요한 부분 있으면 따로 연락할게요.”“네, 알겠습니다.”상대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성유리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으니 결국 조용히 짐을 챙겨 회의실을 나갔다.그제야 성유리는 전화를 받았다.“아직 회의실에 있어?”수화기 너머 박한빈의 목소리는 살짝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첫 두 글자만 들어도 이미 감정이 묻어나왔지만 그는 곧 스스로 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듯 어조를 차분하게 바꿨다.“네.”“그런데 내가 보낸 메시지는 왜 안 봤어?”“감독님이랑 이야기 중이었어요.”“아... 그래?”그
이런 상황은 이미 익숙했다.이제는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유가 거의 다 박한빈 때문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였을까, 이우빈이 식사 제안을 했을 때도 성유리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하지만 막상 듣고 나니 순간적으로 뭐라 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잠시 고민하던 끝에,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마 그이도 시간 없을 거예요. 여기 온 것도... 원래 업무 때문에 온 거라서요.”“아, 괜찮습니다. 어차피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되는 거니까요.”“네.”성유리는 고개만 끄덕이며 대충 상황을 넘겼다.그렇게 대화를 마쳤으면 떠날 법도 한데 이우빈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성유리는 원래 하려던 대본 수정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서 버티고 있는 이우빈이 신경 쓰여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더 할 얘기 있어요?”“아니, 없습니다.”“그럼...”“전 그냥 할 일이 없어서 여기 있는 겁니다.”이우빈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작가님이 일하는 거 보는 게 꽤 재밌기도 해서요.”성유리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갑자기 이우빈이 뭔가 떠오른 듯 물었다.“맞다, 재국 형님이 오후에 라이브 방송을 잡아놨는데 작가님도 같이하실래요?”“전 괜찮...”“이번 신작 영화 관련해서 팬들이랑 얘기할 건데 제가 대본을 보긴 했지만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거든요. 작가님은 확실히 알고 계시죠?”“저도 잘 몰라요. 그리고 저 라이브 방송 안 할 거고요.”“그렇지만...”이우빈이 뭐라고 더 말하려던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성유리는 갑자기 몸이 굳었다.마치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우빈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실례합니다, 성유리 씨 계십니까?”낯선 목소리에 성유리는 긴장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나 이우빈이 먼저 나서서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던 건 배달
성유리는 컵을 한 번 힐끗 보기만 해도 이우빈이 뭔가를 오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자신의 상태를 굳이 설명하기도 난감했다.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점심도 안 드셨던데 뭐라도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매니저더러 시켜드리라고 할까요?”“괜찮아요. 전 그냥... 배가 별로 안 고파서 그래요.”“그래도 굶으시면 안 됩니다. 밥은 꼭 챙겨 드셔야죠.”이우빈은 굴하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면서 휴대폰 갤러리를 열어 성유리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이거 보세요, 어제 유재국 형님이 드셨던 건데 꽤 맛있어 보이지 않아요?”“죄송하지만 전... 감독님이 체중을 더 감량해야 한다고 해서 요즘 다이어트식만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추천은 못 해 드리겠어요.”“아니, 정말 괜찮아요. 지금은 별로 안 먹고 싶어서...”“그럼 그냥 시켜놓겠습니다. 입맛이 없어도 조금이라도 드셔야 하니까요.”이우빈은 성유리가 거절할 틈도 없이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리고 마치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매니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뭔가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남자는 성유리를 한 번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이우빈 씨, 유재국 씨께서 계속 찾고 계십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한 번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오랜 시간 인기 스타로 활동해 온 이우빈이 이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그렇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매니저를 향해 손을 휙 내저었다.매니저는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결국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나갔다.“자, 빨리 드셔보세요.”그리고 이우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짝 웃으며 음식을 성유리 앞에 밀어놓았다.워낙 적극적인 태도에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음식을 받아들었다.이우빈이 시킨 건 이 지역 특유의 비빔면이었다.고소한 참깨와 땅콩 소스가 올려져 있었는데 고추기름은 따로 곁들여져 있었다.“작
야시장은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였다.옆에서 스피커로 광고를 틀어대는 덕분에 원래도 시끄러운 거리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느꼈다.붐비는 인파 속에서, 진한 삶의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여자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박한빈에게는 그 말이 한 편의 사랑 고백처럼 들렸다.“나는 널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아.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어젯밤의 냉전도, 오늘 하루 내내 품고 있던 답답함도, 사실은 성유리 때문이 아니었다.박한빈은 그저 자신을 탓하고 있었을 뿐이다.뜻밖의 반응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그럼... 이제 화 안 난 거지?”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러자 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안 났어요.”사실 어젯밤 박한빈을 몰아붙이고 나서 성유리의 감정은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이곳까지 일부러 찾아온 건 그저 그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선택한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 박한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그러고는 성유리를 가만히 안아 올렸다.주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심지어 길 건너편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허리를 숙이고 성유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이제 그는 알맞은 힘과 각도를 완벽히 익혔다. 그래서 아프지 않지만 벗어나기도 쉽지 않은 포옹이었다.성유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박한빈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계속 구경 안 할 거예요?”“안 해.”그는 단호했다.성유리는 순간 당황했지만 박한빈이 곧장 자신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의도를 깨달았다.“저 아직 다 못 먹었는데요?”당황한 성유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곤 말을 얼버무렸다.“가서 마저 먹어.”“진짜 먹을 수 있게 해 줄 거예요?”성유리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자 이번엔 박한빈
음식이 다 익자 아주머니는 건져 올린 재료들을 가위로 잘게 잘라 그릇에 담고 매운 고추장과 참깨를 듬뿍 뿌려 버무렸다.성유리는 그 과정을 흥미롭게 바라보았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이내 아주머니가 음식을 내주자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들어 박한빈에게 내밀었다.“한번 드셔볼래요?”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 성유리를 뚫어져라 보던 박한빈은 입술을 달싹였다.몇 초 뒤,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천천히 입을 벌렸다.“맛있어요?”성유리가 기대에 잔뜩 찬 눈빛으로 물었다.음식이 입안에 들어오는 순간, 박한빈은 본능적으로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하지만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표정을 재빨리 고쳐 잡고 대답했다.“맛있네.”성유리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도 한입 먹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에릭 일은... 내 잘못이었어.”갑작스러운 말에 성유리는 젓가락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그때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조언해 줬어. 사실... 그냥 무책임했지.”박한빈은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그래서 오늘 확실하게 이야기했어.”“뭐라고 했는데요?”“결혼을 왜 하려는 건지 제대로 생각해 보라고 했어.”박한빈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이건 결국 에릭의 감정 문제잖아. 내가 너무 간섭하는 것도 안 좋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걔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 거야.”“그래서 물어봤어. 이게 단순한 복수심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아라 씨와 결혼하고 싶은 건지.”“만약 에릭이 진심이라면 최소한 앞으로 아라 씨와 그 사람의 가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할 테니까. 그렇다면 결혼이 꼭 나쁜 선택은 아닐 수도 있잖아.”박한빈은 성유리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너도 그렇게 생각해?”그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치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성유리의 확인이 필요하다는 듯이.성유리는 그런 그를 한동안 바라보
이곳에 다시 온 건 사실 성유리에게도 몇 년 동안 처음 있은 일이었다.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곳은 사회의 발전과 함께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높이 솟은 빌딩들과 화려하게 반짝이는 불빛들.그 풍경 속에서 성유리는 마치 자신의 기억이 엉켜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아무리 큰 변화가 찾아와도 사람들의 생활 습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이 지역은 밤이 되면 산바람이 불어와 꽤 서늘했기에 매운맛과 강한 양념을 선호하는 문화는 여전했다.박한빈은 원래 매운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지만 성유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주 매운탕을 먹으러 다녔다.물론 그는 여전히 맑은 국물을 선택했지만 가끔은 매운 국물에도 도전하곤 했다.그렇지만 오늘 밤 성유리는 매운탕 집 대신 내비게이션을 따라 근처의 음식 거리로 향했다.사실 전국 어디든 이런 음식 거리에서 파는 것들은 대체로 비슷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고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 서 있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성유리는 불편해하는 박한빈의 기색을 눈치챘지만 아무렇지 않아 하며 말했다.“이 음식 거리를 지나면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요. 그리고 그 버스의 마지막 정류장이 예전에 제가 다녔던 학교고요.”그 말을 들은 박한빈은 꽉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조금이나마 풀었다.“가볼래?”그러다 문득 그가 물었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을 한 번 흘겨보며 대답했다.“이 늦은 밤에 학교엔 누가 가요? 게다가... 전 못 가요.”“왜? 누가 널 보면 곤란해?”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사람이 아니고....”주변이 워낙 시끄러워서인지 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래서 그는 몸을 숙이며 다시 물었다.“뭐라고?”성유리는 박한빈의 귀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다들 그러잖아요. 우리 학교는 원래 공동묘지였다고. 원한 맺힌 혼령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던데... 학교를 세운 뒤에도 밤이면 돌아다닌대요.”성유리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그 사람이 나보다 잘생겼어?”“그게 아니라...”“혹시 내 젊었을 때랑 좀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야?”“박한빈 씨 지금도 안 늙었어...”“그런데 왜 그 사람을 남자 주인공으로 선택한 거지? 남자 주인공은 나여야 하는 거 아니야?”성유리는 상황이 좀 꼬여버렸다고 느꼈다.어젯밤, 그들은 격렬한 말다툼을 한 데다가 심지어 따로 잠을 잤었다.그녀는 최소 며칠은 냉전 분위기가 계속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왜 대답 안 해?”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그를 한 번 보고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캐스팅은 제가 관여하는 부분이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쓴 남자 주인공이 꼭 박한빈 씨라고 말한 적도 없고요.”“그럼 네 그림이랑 내 사진을 한번 비교해 보면...”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성유리의 작품은 늘 공개되어 왔고 출판되거나 영상으로 각색될 때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박한빈 입에서 직접 그런 말이 나오니 이상하게 부끄러웠다.“그래요. 맞다고 합시다.”하지만 박한빈이 계속해서 집요하게 쳐다보자 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다시 말했다.“그래서 어쩌라고요? 각색은 각색일 뿐이에요. 설마 배우가 돼서 직접 연기라도 하겠다는 건 아니죠?”“연기는 안 해. 하지만 네가 인정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성유리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박한빈도 잠시 조용해졌다.이 대화는 이쯤에서 끝이 난 것 같았다.그렇지만 이제 그들 사이의 현실적인 문제로 다시 돌아왔다.예를 들면 성유리가 왜 여기 있는지, 왜 말도 안 하고 혼자 왔는지 같은 것.성유리는 천천히 손을 내렸고 박한빈도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그는 입술을 다물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휴대폰이 먼저 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을 살짝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엄마, 왜 내 메시지 안 봤어?”수화기 너머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성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