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우가 놀이공원의 티켓을 핸드폰으로 보내왔을 때, 성유리는 막 하늘이를 재우고 있었다.[아까 물어봤는데 거기 직원들이 꽤 많대. 혼자 하늘이 데리고 갔다가 문제가 생기면 바로 그 사람들을 찾아가.”연정우는 성유리가 이 시간에 아이를 재우고 있을 거라는 걸 알았는지 전화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그는 차분하고 다정한 말투로 성유리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뿐만 아니라 주의 사항도 몇 가지 더 보내줬다.성유리는 연정우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연정우는 기다렸다는 듯 금방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하늘이는 자?”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요 며칠 동안 들어왔던 목소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왜인지 모르게 잠시 머뭇거리게 되었다.잠깐 침묵한 뒤,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응. 잠들었어.”“내가 아까 보낸 거 다 봤지? 직원들이 준비는 해두겠지만 그래도 수건 두 장 정도는 챙겨 가. 그리고 하늘이가 좋아하던 수영 튜브도 잊지 말고...”“연정우.”그가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그의 말을 뚝 끊었다.가벼운 세 글자일 뿐이지만 연정우는 그대로 멈춰버리더니 뭔가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레 물었다.“왜?”“며칠 뒤에 출장 간다고 했잖아. 누구랑 가는 거야?”성유리가 물었다.“혼자 가.”“정말? 그 투자자는... 네가 아는 사람이야?”“알긴 알지. 왜?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 건데?”연정우는 웃으며 물었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나지막한 성유리의 숨소리에 연정우는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를 거뒀다. 하지만 성유리는 그때까지도 침묵하고 있었다.“무슨 일 있어?”정적을 참다못한 연정우가 먼저 물었다.“누가 뭐라고 한 거야?”“응.”성유리는 아까와 달리 재빨리 대답했지만 연정우는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얼어붙었다.“왜 내게 물어보지도 않아? 누가 그랬는지.”성유리는 침묵하는 연정우가 우습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나?”연
성유리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두 주먹을 꽉 쥐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연정우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마치 엄청나게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 웃음에는 묘한 결단력이 섞여 있는 것도 같았다.그리고 이내 진정한 연정우가 말했다.“뭘 솔직하게 말하라는 거야? 내가 솔직히 말하면 우리 관계가 더 나아질 것 같아? 내가 지금 다 털어놓으면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성유리, 자꾸 나를 이렇게 속이지 마.”그 순간, 성유리가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답이 확실해지자 꽉 쥐었던 두 손에도 힘이 풀렸다.애써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 더 말하려던 찰나, 연정우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그래. 맞아. 난 널 속였어.”“그 투자자라는 사람, 사실은 유효정 씨야. 그 사람 아버지가 해외에 남긴 자산이 있어서 이번에 그걸 함께 가져오려는 거야.”“그리고 그것도 맞아. 나 또다시 유효정 씨와 얽혀버렸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그 사람을 좋아한 적 없어. 난 유효정 씨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야. 이 모든 게 너와 하늘이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해서지.”“그게 전부야?”성유리가 물었다.“뭐라고?”“나 하나만 더 묻고 싶어.”성유리가 말을 이었다.“네 회사가 지금 이 상황까지 온 게 정말 나 때문이고 박한빈 씨 때문인 거야? 아니면 그 과정에서 네 원인도 있어?”“그거 박한빈 씨가 말한 거야?”연정우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묻자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그는 피식 웃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은 이미 성유리에게 답을 전해주고 있었다.“난 네가 어떤 상황에서도 날 선택한 줄 알았어.”망설이던 성유리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런데 알고 보니까 너는 내내 나를 속이고 있었던 거네.”“내가 뭘 속였는데? 내가 너한테 잘못해 줬어? 그리고 네가 아니었다면 박한빈 씨가 나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였겠어?”“그래. 내가 조금 극단적인 수단을 쓴 건 맞아. 하지만 이 업계에서 그렇게 깨
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고, 성유리는 몇 분간 누워 있다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우려 했다.박한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었다. 그래서인지 성유리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몇 번이나 잠옷 단추를 끼우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려 했지만 잘 안되었다.곧이어 박한빈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키가 훤칠한 데다가 이목구비까지 뚜렷해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방금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그의 복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성유리가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의 눈을 피하며 여전히 단추를 잠그려 애쓰고 있었다.“내일이 바로 유정이가 퇴원하는 날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퇴원 절차를 밟아주고 집에 데려와 줘. 어머님께는 한동안 여기에 머물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어.”성유리는 단추를 만지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지금 성유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2년째 부부로 지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자, 금성 지화 그룹의 후계자 박한빈이었다.그리고 방금 그가 말한 성유정은 성유리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었다.다섯 살 때, 성유리는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고 그렇게 16년 가까이 실종됐었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성씨 가문에 돌아왔을 때, 성씨 가문에는 이미 또 다른 딸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성유정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생’이 되었다.아버지는 성유리가 실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윤청하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비슷한 나이대인 성유정을 입양했었다. 16년이 지나고 성유리가 다시 성씨 집안에 돌아오고 서로를 그리워했던 한 가족이 다시 상봉하게 되었지만, 그 후의 날들은 예상만큼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원유진은 성유정의 오랜 친구이자, 재벌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유정과 함께 자라며 박한빈과 성유정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하지만 성유리가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이었기에 원유진은 성유리에게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성유리가 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거나 민망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오히려 성유정이 먼저 말을 돌렸다.“언니,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데리러 왔어. 짐은 다 챙긴 거지?”“다 챙겼어.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성유정은 평소처럼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원유진은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는 참지 않고 존댓말까지 해가며 비아냥거렸다.“사모님, 박 대표님은 어디 계신가요? 유정이가 퇴원하는데 설마 안 오셨어요?”“출근했어. 바쁜가 봐...”“정말 바쁜 거 맞아? 아니면 누군가가 바가지를 긁어대서 오고 싶어도 못 온 건 아닐지 모르겠네.”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유진아, 그만해.”그러나 원유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뭘 그만해? 듣고 양심에 찔리기라도 했을까 봐?”성유리는 원유진을 가볍게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박한빈의 번호를 찾아 원유진에게 내밀었다.“뭐 하는 거야?”성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야! 너...”원유진이 화를 내려고 하자, 성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언니랑 싸우지 마.”원유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넌 정말 착한 거니? 아니면 바보인 거니? 성유리는 네 것을 탐내고 채간 사람이야!”성유리는 원유진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정의 짐을 들어 앞장서서 병실에서 나갔다.차에 타자마자 윤청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리야, 유정이 데리러 갔어?”친딸과의 통화였지만 윤청하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색했다.“네.”“유정이는 좀 어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규
저녁 7시가 되자마자, 박한빈이 집으로 돌아왔다.성유정은 거실에 있다가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오빠, 이제 퇴근한 거야?”박한빈은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외투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말했다.“저녁 식사 준비됐어.”식사 중에 성유정은 먼저 조심스럽게 성유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오빠,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언니랑 오빠를 불편하게 하는 거라면... 사실 엄마한테도 혼자 있을 수 있다고 얘기했었거든... 그런데도 엄마가 걱정된다고...”박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편하게 지내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정말? 여기서 지내는 게 민폐가 되는 건 아니겠지?”“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정 씨가 여기 계시면 저희도 좋아요.”숙자 아주머니가 식탁에 음식을 올리며 말했다.“오랜만에 집이 북적여서 정말 좋네요!”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성유리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성유정처럼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에는 서툴렀다.숙자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집에서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은 성유리는 서둘러 밥을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난 먼저 올라가 볼게. 천천히 식사해.”“언니, 이거밖에 안 먹어?”성유정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내가 같이 올라가 줄까?”“괜찮아.”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천천히 먹어. 나는 괜찮아.”그 말만을 남기고 성유리는 식탁에서 멀어졌다. 다이닝룸을 벗어나기 전, 성유정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언니... 화난 것 같지 않아? 내가 와서 두 사람을 방해한 거야?”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과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박
성유리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팔에 힘을 주어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더 세게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거칠고 이기적이었다.성유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밖에 있는 성유정을 떠올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샤워기의 물소리 때문인지 문밖에 있던 성유정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큰 소리로 말했다.“오빠? 샤워 중이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노려보았다.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평소와 달리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조용하고 무기력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앙큼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후끈 달아올라 다시 그녀를 밀어붙였다. 마치 그 안에 쌓인 감정을 풀어내듯,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두 사람의 몸은 완벽하게 맞물렸고 성유리는 절정에 달아올라 숨이 멎을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문밖에서 성유정은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벽 쪽에 밀어붙였을 때,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그러자 문밖에서 들리던 성유정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그제야 성유리는 상황을 깨닫고 손을 꽉 쥐었다.바로 그때, 박한빈이 그녀를 들어 올렸고 그의 어깨가 성유리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했지만, 있는 힘껏 물지는 못하고 가볍게 입을 대었다가 떼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렇게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숙자 아주머니가 그녀를 깨우며 말했다.“오늘은 본가에 가는 날이
성유정은 박한빈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다. 그래서 박씨 가문의 본가에 대해선 성유리처럼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았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김난희에게 다가갔다.“할머니!”“아이고! 우리 유정이가 왔구나!”김난희는 매우 기뻐하며 성유정을 반겼다.“얼굴은 왜 또 야위었어?”“아니에요...”성유정은 웃으며 말했다.“이것 좀 보세요. 할머니 드시라고 제가 게살 완자를 만들어 왔어요.”“유정이는 어쩜 이렇게 착해? 정말 마음이 예쁘구나!”두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손녀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김난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그러나 성유리가 다가오자, 김난희의 표정은 조금 굳어졌다.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할머니.”김난희는 성유리를 보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는 눈을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어머님...”“아줌마, 잘 지내셨어요...”김서영이 나타나자, 원래 김난희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성유정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비쳤다.“유정 씨도 왔네. 환영해.”김서영은 그녀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반가움도 비치지 않았다.김서영은 김난희를 향해 인사했다.“어머님,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김난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서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성유정이 가져온 음식을 슬쩍 본 후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님은 요즘 소화가 잘 안되셔서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 할 것 같네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서영은 김난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바로 지시했다.“정식 씨, 이 음식을 주방으로 가져가세요.”김서영은 성유정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성유정이 주위의 호감을 쉽게 사는 재주가 있었지만, 김서영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김서영은 항상 차가운 모습을 유지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거리
박한빈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본가에 도착했다. 김난희는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미소 번진 얼굴로 그를 맞이하며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얼굴 좀 봐! 또 살이 빠졌네...”김난희는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결혼 전보다 더 말라 보이잖아. 네 아내는 대체 집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그 말은 성유리를 겨냥한 것이었다.성유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성유정이 나서서 말했다.“할머니, 언니를 오해하지 마세요. 언니는 정말 바쁜 사람이에요. 곧 새 만화가 출간된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 많이 야위었더라고요.”성유정은 성유리를 변호하는 듯 말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들렸다. 그녀의 가시가 돋친 말은 성유리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김난희는 성유정의 말을 듣고 더욱 불만스러워졌다.“만화라니? 또 그 하찮은 것들 하는 거야? 너는 애가 어쩜 그렇게...”김난희가 계속 잔소리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저녁 준비는 다 됐나요?”“한빈아, 너...”김서영이 곧바로 끼어들었다.“어머님, 한빈이는 이제 다 컸으니 자기 관리도 잘 할 거예요.”그 말에 김난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불만들을 삼켰다. 그러고는 성유정을 보며 말했다.“우리 유정이는 착하고 자기 사람도 잘 챙기고... 쟤가 다시 돌아오지만 않았었어도...”김난희도 아차 싶었던지 말끝을 흐렸다. 김서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겼다.“유리야, 부모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니?”“네. 아직이요.”“유정 씨가 너희 집에서 오래 머무는 것도 불편할 테니, 이참에 아예 본가에서 머물게 하는 게 어떨까? 유정 씨도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저는...”그러나 김서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게다가 내가 요즘 괜찮은 청년 몇 명을 알아봤거든. 편한 시간 알려주면 한번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아.”“그건 너무 이른
성유리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두 주먹을 꽉 쥐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연정우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마치 엄청나게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 웃음에는 묘한 결단력이 섞여 있는 것도 같았다.그리고 이내 진정한 연정우가 말했다.“뭘 솔직하게 말하라는 거야? 내가 솔직히 말하면 우리 관계가 더 나아질 것 같아? 내가 지금 다 털어놓으면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성유리, 자꾸 나를 이렇게 속이지 마.”그 순간, 성유리가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답이 확실해지자 꽉 쥐었던 두 손에도 힘이 풀렸다.애써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 더 말하려던 찰나, 연정우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그래. 맞아. 난 널 속였어.”“그 투자자라는 사람, 사실은 유효정 씨야. 그 사람 아버지가 해외에 남긴 자산이 있어서 이번에 그걸 함께 가져오려는 거야.”“그리고 그것도 맞아. 나 또다시 유효정 씨와 얽혀버렸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그 사람을 좋아한 적 없어. 난 유효정 씨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야. 이 모든 게 너와 하늘이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해서지.”“그게 전부야?”성유리가 물었다.“뭐라고?”“나 하나만 더 묻고 싶어.”성유리가 말을 이었다.“네 회사가 지금 이 상황까지 온 게 정말 나 때문이고 박한빈 씨 때문인 거야? 아니면 그 과정에서 네 원인도 있어?”“그거 박한빈 씨가 말한 거야?”연정우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묻자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그는 피식 웃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은 이미 성유리에게 답을 전해주고 있었다.“난 네가 어떤 상황에서도 날 선택한 줄 알았어.”망설이던 성유리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런데 알고 보니까 너는 내내 나를 속이고 있었던 거네.”“내가 뭘 속였는데? 내가 너한테 잘못해 줬어? 그리고 네가 아니었다면 박한빈 씨가 나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였겠어?”“그래. 내가 조금 극단적인 수단을 쓴 건 맞아. 하지만 이 업계에서 그렇게 깨
연정우가 놀이공원의 티켓을 핸드폰으로 보내왔을 때, 성유리는 막 하늘이를 재우고 있었다.[아까 물어봤는데 거기 직원들이 꽤 많대. 혼자 하늘이 데리고 갔다가 문제가 생기면 바로 그 사람들을 찾아가.”연정우는 성유리가 이 시간에 아이를 재우고 있을 거라는 걸 알았는지 전화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그는 차분하고 다정한 말투로 성유리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뿐만 아니라 주의 사항도 몇 가지 더 보내줬다.성유리는 연정우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연정우는 기다렸다는 듯 금방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하늘이는 자?”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요 며칠 동안 들어왔던 목소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왜인지 모르게 잠시 머뭇거리게 되었다.잠깐 침묵한 뒤,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응. 잠들었어.”“내가 아까 보낸 거 다 봤지? 직원들이 준비는 해두겠지만 그래도 수건 두 장 정도는 챙겨 가. 그리고 하늘이가 좋아하던 수영 튜브도 잊지 말고...”“연정우.”그가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그의 말을 뚝 끊었다.가벼운 세 글자일 뿐이지만 연정우는 그대로 멈춰버리더니 뭔가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레 물었다.“왜?”“며칠 뒤에 출장 간다고 했잖아. 누구랑 가는 거야?”성유리가 물었다.“혼자 가.”“정말? 그 투자자는... 네가 아는 사람이야?”“알긴 알지. 왜?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 건데?”연정우는 웃으며 물었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나지막한 성유리의 숨소리에 연정우는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를 거뒀다. 하지만 성유리는 그때까지도 침묵하고 있었다.“무슨 일 있어?”정적을 참다못한 연정우가 먼저 물었다.“누가 뭐라고 한 거야?”“응.”성유리는 아까와 달리 재빨리 대답했지만 연정우는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얼어붙었다.“왜 내게 물어보지도 않아? 누가 그랬는지.”성유리는 침묵하는 연정우가 우습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나?”연
성유린느 고개를 들어 유효정을 똑바로 쳐다보며 따지듯 물었다.“저 싫어하신다면서요. 근데... 왜 저한테 이런 걸 알려주시는 건데요?”“왜냐하면 전 연정우 그 사람을 유리 씨보다 더 싫어했거든요. 그때 정우 씨가 일부로 판을 짜서 저를 해친 거 알아요. 게다가 정우 씨가 신고하지만 않았어도 제 아버지한텐 그런 일이 생기기 않았을 거고요. 제가 연정우 씨를 싫어하지 않을 이유라도 있나요?”“그래서... 자산 뭐 그런 말 하신 것도 정우를 속인 거네요? 맞아요?”“네.”유효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미소 띤 얼굴로 보며 물었다.“어때요? 정우 씨한테 알려드릴 건가요?”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대답했다.“근데 전 이 모든 걸 다 유효정 씨 혼자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뭐라고요?”“유효정 씨가 그랬잖아요. 그때 유씨 가문을 고발한 건 정우라고. 그러니까 유씨 가문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는지 정우가 모를 리가 없었을 거예요.”“해외에 자산이 더 있다는 것도... 꼭 알고 있을 거고요.”“게다가 막 출소한 유효정 씨가 자산이 있다는 걸 증명하려면 전문적인 사람을 찾아가야 할 텐데 말이죠.”“정우도 이 업계에서 몇 년 동안 몸을 담그고 있었어요. 그런 정우를 속이려면 쉽지 않을 거고요. 누가 유효정 씨를 도와주고 있다면 모를까.”성유리의 목소리는 냉랭하다 못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유효정은 그런 성유리를 주시하다 더욱 환한 미소를 짓더니 물었다.“그래서요? 유리 씨 생각엔... 누가 절 도와주는 것 같은데요?”“박한빈 씨요.”성유리의 말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유효정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녀의 침묵이 곧 대답이라는 생각이 든 성유리는 바로 뒤돌아 떠나려 했다.그러나 그때, 유효정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그 자산들이 다 가짜라고 해도 정우 씨가 그걸 위해 저랑 같이 잔 건 사실이에요.”“그때 정우 씨가 틀린 선택을 했다고 하셨죠? 이제 증명됐죠? 다시 한번 그런 일이 반복된다고 해도 정우 씨는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하시죠?”유효정은 또다시 옅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사실 전 성유리 씨를 싫어했어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 질투라고 봐도 되죠.”“왜냐하면 성유리 씨는 제가 갖지 못한, 가질 수 없는 물건들을 다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에요.”“다른 건 다 둘째 치고 성유리 씨는 그 얼굴로 쉽게 가지고 싶은 물건을 다 차지하시잖아요. 정말 사람 미치게 하죠. 질투심에 눈이 멀게 하시고.”성유리는 유효정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유효정 씨도 전에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많잖아요.”이 말에 유효정은 잠시 멍해지더니 금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성유리 씨 말이 맞아요. 근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죠? 지금 저한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데.”“그렇지만 다행히 아버지가 생전에 저한테 물려주신 인맥이 좀 남아있거든요. 그리고 해외 투자자들도 몇 있고요.”유효정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성유리를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그래서 이제는... 제가 아까 드린 충고가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성유리는 그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연정우 씨가 혹시 최근에 해외로 출장 간다고 말하지 않으셨나요?”“더 이상 성유리 씨를 속이지 않을게요. 정우 씨 저랑 함께 가요.”유효정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지금 정우 씨 회사 상황이 최악이란 거 저도 알아요. 그래서 전 아버지가 남겨두신 해외 자산들을 정우 씨에게 주기로 했고요. 대가는... 제가 뭘 요구했는지 짐작이 되시죠?”그녀의 말에 성유리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지만 이내 감정을 추스르더니 바로 대답했다.“그럴 리 없어요.”“뭐가요?”“정우는 이미 전에도 한 번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젠 더는...”성유리는 아니라고 확신하며 말을 이어갔지만 유효정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그녀에게 보여줬다.사진 속에 담긴 사람은 다름 아닌 유효정과 연정우였다.하얀색 침대보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호텔 방 안이 틀림없었고 사
그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그리곤 반사적으로 하늘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는데 그녀의 행동에 여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잖아요? 전... 유리 씨가 절 잊은 줄 알았는데.”‘잊는다고?’성유리는 그날 끔찍했던 그 기억을 쉽게 잊을 수 없었고 심지어는 칼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던 유효정의 얼굴도, 느낌마저 생생했다.그때 성유리의 얼굴엔 꽤 큰 흉터까지 남았었지만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점점 옅어지더니 이젠 잘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유효정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보이자 성유리는 그 당시 느껴지던 고통과 두려움이 다시 떠올라 힘들었다.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저도 모르게 꽉 쥐었고 유효정은 아무렇지 않아 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따님이 너무 귀엽더라고요.”유효정은 말하며 은근슬쩍 성유리 뒤에 숨어있는 하늘이를 쳐다봤고 자신의 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성유리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성유리는 항상 어정쩡하게 굽혀져 있던 어깨까지 쫙 편 채 유효정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마치 새끼를 지키려는 암탉처럼 말이다.그 모습을 본 유효정은 깔깔거리며 크게 웃더니 조롱하듯 물었다.“아니, 지금 그게 무슨 표정이세요? 설마 제가 성유리 씨 딸까지 건드릴까 봐 그러세요? 걱정하지 마요. 여긴 탁 트인 밖이고 보는 눈도 많으니까 그런 짓은 안 할 거예요. 그리고... 전 두 번 다신 지옥 같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대체 뭐 하시려는 거죠?”성유리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유효정은 원래 하늘이를 주려고 꺼내 들었던 사탕 껍질을 까 자기 입에 넣더니 대답했다.“뭐 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3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해서 그래요.”“보니까... 잘 살고 계시는 것 같은데.”“정우 씨랑 다시 만나신다고요? 진짜 뒤끝 없는 분이셨네요. 그 사람 때문에 성유리 씨가 죽을 뻔했는데 말이죠.”성유리는 대답이 없었고 유효정은 천천히 시선을 하늘이에게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진
연정우는 성유리와 한 달 내로 장성 그룹 일을 다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었다.게다가 그는 미리 전부터 바다 위에 있는 놀이공원을 가고 싶다는 하늘이의 말에 표까지 다 예매해 둔 상태였다.하늘이는 너무도 기대가 되어 성유리에게 자신의 수영복을 사러 백화점에 가겠다고 부탁하기도 했다.하지만 약속일 이틀 전, 연정우는 갑자기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미안해.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은데.”“해외에 있는 투자자 쪽에서 나를 한 번 만나보겠다고 했어. 만약 얘기가 잘 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몰라. 그래서...”연정우의 목소리는 두 사람에 대한 미안한 감정과 죄책감이 그득히 담겨있었다.“괜찮아. 너 바쁘면 먼저 가서 일해야지. 나 혼자 하늘이랑 가도 돼.”성유리는 괜찮다는 듯 미소 띤 얼굴로 연정우에게 대답해 줬다.“그럼 내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까? 너랑 하늘이 데리고 같이 가라고? 너 혼자 애 데리고 가면 얼마나 힘들어.”“괜찮다니까. 언제는 뭐 안 이랬어?”성유리는 걱정하는 연정우를 안심시키듯 말을 이어갔다.“그래서 회사엔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거네?”기분이 좋은 듯 들뜬 말투로 묻는 성유리의 목소리를 들은 연정우는 그녀가 신경 쓰는 게 결코 돈이나 이익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성유리는 지금 진신으로 연정우의 일에 기뻐하고 그를 대신해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필경 연정우가 어떤 삶을 좋아한다고 한들 그가 장성 그룹을 위해 들였던 시간과 노력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일이 어떻게 된다고 한 대도 장성 그룹의 막은 결코 이렇게 내려가면 안 되지 않은가?연정우는 성유리의 감정에 동기화된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아마도 그렇겠지? 근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그래도 괜찮지. 적어도 희망은 남아있는 거니까.”성유리가 물었다.“그래서 어디로 출장 갈 예정인데?”“강원국. 비행기 티켓도 다 끊어뒀어.”“응. 조심히 다녀와.”“그래. 올 때 너랑 하늘이 선물도 가져올까?”“성유리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
하지만 지금, 연정우는 주동적으로 유효정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유효정은 은근히 이 상황을 즐겼고 연정우는 어느새 그녀를 회사 안까지 데리고 들어섰다.사람이 그다지 없는 곳에 다다르자 연정우는 바로 유효정의 손을 놓더니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유효정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연정우의 온기에 마음이 공허해졌는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제가 왜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죠? 저 만기출소 했어요.”그녀의 대답에 연정우는 입술을 오므리며 다시 물었다.“제 말이 지금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그럼 무슨 뜻인데요?”유효정은 연정우의 의도를 도통 모르겠다는 듯 계속 말했다.“설마... 저는 연정우 씨를 찾아오면 안 되는 사람인 거예요?”“그렇지만 잘 아시잖아요. 저희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고 옛 친구들도 저를 피해요. 아무도 저를 만나주지 않는다고요. 이 도시에서 전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어버렸죠.”“이런 상황에 연정우 씨를 찾아오지 않으면 제가 또 누구를 찾을 수 있겠어요?”유효정은 말하며 연정우에게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갔다.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그러나 연정우는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흠칫 놀라더니 표정 또한 삽시간에 변했고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그는 마치 유효정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싫은 사람처럼 그녀를 피했고 심지어는 같이 서 있으려 하지도 않았다.연정우의 행동에 유효정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고 그 순간, 연정우가 말을 꺼냈다.“왜 감옥에 갇히셨는지 잊으셨습니까?”“저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유효정은 연정우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대답했다.“정우 씨가 절 신고했잖아요. 아니에요?”“그리고 나중에야 저도 생각 정리를 마쳤죠. 분명 제가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로 제 앞에서 성유리 씨한테 얼마나 많은 감정이 남아있는지 드러냈잖아요.”“만약 정우 씨가 정말 진심으로 성유리 씨를 사랑했다면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유효정은 지금 자신이 그와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래서 유효정은 에둘러 말하지 않기로 하고 바로 말하기 시작했다.“박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저희 집 재산이나 회사 다 뺏기고 제 부모님마저 세상을 뜨셨다는 사실을요.”“그래서 전 출소한대도 별 소용이 없었어요. 이 도시에 믿을 수 있는 사람 한 명 없기 때문이죠. 심지어 생계를 유지할 방법도 없고요.”“근데 요즘 박 대표님께서 골치가 아파하는 일이 하나 생겼다고 들었어요. 만약 제가 대표님 대신에 그 일을 해결해 주면 박 대표님께서 저한테 돈을 주실 수 있나 해서요.”박한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유효정을 쳐다보며 웃더니 물었다.“네?”“대표님께서 왜 연정우 씨를 벼랑 끝까지 내모는지 저도 잘 알아요. 성유리 때문이 아닌가요? 근데 아마 대표님은 모르실 거예요. 연정우 그 인간은... 자기 지위나 권력에는 별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러니 박 대표님이 하신 공격은 번지수를 잘못 짚으신 거죠.”“그리고 사실... 연정우 씨와 성유리 씨 사이를 갈라놓으려면 이렇게 번거롭게 하실 필요도 없어요.”박한빈은 말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저한테 기회를 주신다면 꼭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고 보장할게요. 그때가 되면 성유리 씨도 자연스레 대표님 곁으로 돌아올 거고요. 어때요?”유효정의 말은 아주 단순했다. 그녀는 지금 박한빈에게 모 아니면 도의 선택지를 던져주는 것이었다.박한빈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유효정에게 물었다.“무슨 뜻입니까? 뭘 어떻게 하실 셈이죠?”“제가 뭘 하든 그건 박 대표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니죠. 대표님께서는 그냥 제가 방금 제시한 조건에 대해... 답해주시면 돼요.”“많은 돈은 안 바라요. 100억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지금 대표님 몸값만 얼마나 되는지 잘 알아요. 이정도 돈은 박 대표님에게 있어 껌값 아닌가요? 껌값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되찾으면 좋은 거잖아요.”박한
“그리고 나도 믿어. 정말 하루아침에 회사가 부도가 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때가 와도 난 잘 살 수 있을 거야. 잘 살지 못한다고 해도 절대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거고. 특히 유리 너를 원망할 일은 죽어도 없을 거야.”연정우의 대답에 긴장감에 바짝 굳어있던 성유리는 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래서 오늘 종일 이것 때문에 걱정했어?”“응...”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도 어머니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그래도 사모님은 널 위해서 이러는 거니까.”“응. 안 그럴게.”연정우는 빠르게 대답했지만 성유리는 그의 대답이 성의 없어 보여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러자 연정우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아까 화난 건 네가... 나를 버리고 떠날까 봐 그런 거야. 그렇지만 이제 보니 오해였던 것 같네. 그러니까 너도 걱정하지 마. 어머니랑 안 싸울 테니까.”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그나마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너 지금 어딘데?”“회사. 근데 곧 집에 가려고.”“알겠어. 집에 가서 푹 쉬어.”“너도. 일찍 자.”연정우의 다정다감한 말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고 성유리는 간단한 대답만 마치고는 통화를 끝냈다.한편, 연정우도 회사를 떠나려고 주차장에 내려갔지만 평소와 달리 싸한 기분에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심호흡 한 번 하고는 바로 뒤돌아보았지만 텅 빈 주차장엔 아무도 없었다.연정우는 제 자리에서 한참 사방을 둘러보다 확실히 자기 빼고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요즘 너무 피곤해 환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여겼다.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차 문을 닫고는 바로 시동을 걸어 지하 주차장을 벗어났다. 하지만 연정우가 떠나자마자 기둥 뒤에 숨어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짧은 머리였고 모자까지 꾹 눌러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절반쯤 드러난 얼굴에는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