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행동은 매우 빨랐다.어찌나 빠른지 사하나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받으려던 순간 손가락이 박한빈의 차 문에 끼일 뻔했다.그러나 박한빈은 사과 한마디 없이 운전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고 지시했고 그대로 떠나버렸다.사하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박한빈의 차를 향해 소리쳤다.“박한빈, 너 미쳤어? 감정 조절도 못 하는 미친놈!”“그래! 너 같은 놈이 그런 여자한테 배신당해도 싸지.”박한빈은 사하나의 말을 당연히 듣지 않았다.사실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차에 올라탄 후, 박한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안희연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그러자 안희연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박 대표님.”“오늘 성유리를 만났어?”박한빈은 안희연 앞에서 성유리라는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던 터였다.더군다나 그녀가 금성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모습을 감췄던 터라 성유리라는 이름은 안희연에게 낯설게 들렸다.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박한빈과 관련된 여자를 떠올리며 대상을 짚어낸 후 대답했다.“아뇨. 못 만났는데요.”“오늘 백화점에 갔다며?”“네.”“누구랑 같이 갔지?”안희연은 말이 없었다.그러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계속 물었다.“안희연, 우리 계약 관계에 대해서 내가 굳이 다시 설명해 줘야 하나?”“그런 거 아니에요. 박 대표님, 제가 다 설명할게요.”박한빈은 지금 그녀의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안희연이 급히 말했다.“그래서 그 성유리라는 분이 박 대표님에게 고자질한 건가요? 그렇다면 박 대표님께 아직 미련이 있다는 뜻 아닌가요?”안희연은 박한빈이라는 사람은 잘 모르지만 남자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난 몇 년간 라이브 방송에서 수많은 남자들을 보아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박한빈의 민감한 포인트를 정확히 짚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그러자 안희연이 계속 말했다.“박 대표님, 그 여자가 뭐라고 말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하늘이는 깜짝 놀라 온몸을 성유리 품에 안겼다.아이의 눈은 박한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는 하늘이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성유리를 응시했다.“나와.”그가 입을 열자 하늘이는 성유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엄마. 가지 마.”하늘이가 박한빈을 꺼리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진정으로 박한빈을 두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하늘이가 성유리를 꼭 붙잡고 있는 손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괜찮아. 엄마가 잠깐 일 보고 올게.”“싫어!"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떼를 부렸다.성유리는 문과 아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의 굳게 다문 입술과 굳은 표정은 날카롭고 위압적이었다.하늘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성유리의 손을 세게 붙잡았다.결국, 성유리는 옆에 있던 작은 사자 인형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여기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게. 알겠지?”하늘이는 여전히 싫다는 표정을 지었지 문 앞에 서 있는 박한빈을 보며 더 큰 두려움이 생겼는지 마지못해 성유리의 손을 놓았다.“엄마, 빨리 와. 나 무서워.”“알았어. 걱정하지 마.”성유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자 곧바로 뒤돌아섰다.두 사람은 그렇게 2층 거실의 발코니에 나란히 섰고 박한빈이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오늘 어디 갔었어?”성유리는 이 시간에 박한빈이 굳이 이런 식으로 찾아와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잠시 멍하니 서 있던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 씨랑 백화점 갔어요. 왜요?” “그다음은? 너 나한테 할 말 없어?”박한빈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그의 시선은 성유리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박한빈이 왜 이러는지 깨달았고 그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알게 되셨어요
박한빈은 계속 성유리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추궁하기 시작했다.성유리는 그에게 떠밀리듯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등 뒤로 발코니의 유리문이 닿고 나서야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생각이 너무 많으신 거 아니에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제가 굳이 말하지 않은 건 그 일이 저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던 박한빈이 뚝 멈췄다.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그건 박한빈 씨와 안희연 씨 사이의 문제예요. 제가 관여하거나 평가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박한빈 씨 주변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당신 곁에 있는지는 저와 전혀 상관없고요.”그녀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이제 비켜주실래요?”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얼굴에 띠고 있던 모든 표정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 얼굴 어딘가에서 감정의 틈이나 흔적을 찾아내려는 듯 말이다.그러나 성유리에게서 보이는 표정은 아무것도 없었다.성유리는 여전히 담담하게 박한빈과 두 눈을 마주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이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돌려 그를 지나쳐 나가려 했다.그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내가 가도 된다고 말했나?”“이 손 놔요.”성유리의 목소리는 더 이상 차분하지 않았고 어딘가 지친 듯 낮고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그러나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왜 놔야 하지? 아이 수술 끝났으니 이제 나랑은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상관없다면 왜 여기 살고 있는데?”그 말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지만 금세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그런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면 제가 죄송해요. 박 대표님.”그러자 박한빈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저와 하늘이가 여기 머무는 건 박한빈 씨 어머니의 부탁 때문이에요.”성유리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어머니는 하
박한빈은 꿈속에 나타난 연정우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번쩍 떴다.꿈 내용이 너무 소름이 끼쳐서일까, 아니면 연정우의 등장에 놀라서였을까는 몰라도 박한빈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눈을 떠서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박한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스스로를 다독인 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방에서 나가자마자 박한빈은 하늘이와 딱 마주쳤다.이미 치마까지 갈아입고 머리도 예쁘게 땋은 하늘이는 자신의 물컵을 손에 든 채로 거실 소파에 앉아 성유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인기척이 들리자 아이는 바로 뒤를 돌아보았고 박한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그리고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박한빈은 만약 예전 같았으면 그런 하늘이를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조금 망설이던 그는 하늘이한테 천천히 다가가며 먼저 말을 걸었다.“지금... 나가려는 거야?”어린아이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박한빈은 지금 아무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해도 말투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그렇기에 그가 한 질문은 마치 경찰이 죄인을 조사하는 것처럼 들렸다.하늘이는 그런 박한빈을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네.”“어디 가는데?”박한빈이 또 물었다.“저도 몰라요.”아이의 대답에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차린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가 무슨 물음을 더 물어보려고 입을 움찔거리는 그때, 성유리가 방 밖으로 나왔다.그녀는 연한 색의 티셔츠와 하얀색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전과 달리 머리는 한껏 밑으로 묶어져 있었고 화장도 연하게 했다.최근 많이 야윈 성유리는 지금 벨트를 매고 입음에도 허리는 너무 얇아 살짝 밀면 부러질 것 같았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어디 가?”성유리는 먼저 하늘이를 자신의 뒤에 세워두고는 대답했다.“아이랑 같이 밖에 가서 놀아주려고요.”“어디 가서 놀아줄 건데?”박한빈의 계속되는 물음에 성유리는 인상을 썼지만 멈칫하다 결국 순순히 대답을 이어갔다.“놀이공원이요. 근데 저희
하늘이는 박한빈을 힐끔 쳐다보다 다시 성유리를 쳐다보기를 반복했다.“회전목마.”그러던 아이는 결국 박한빈의 질문에 대답해 줬다.“회전목마만 좋아해? 후룸라이드나 바이킹은 놀아봤어? 롤러코스터는? 놀이공원에는 밤이면 공연도 하고 퍼레이드도 하는데 본 적 있어? 하늘이는 공주들이나 다른 만화 캐릭터랑 같이 사진 찍고 싶지 않아?”놀이공원에 관한 프로젝트 또한 박한빈은 해본 적이 있다. 그렇기에 한 번도 직접 놀이공원으로 향한 적은 없어도 각종 놀이기구나 시설, 공연 등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신바 좋아한다고 했지?”박한빈은 문득 하늘이가 늘 가지고 다니던 사자 인형이 떠올랐다.“거기 있는 무대에는 아마 신바도 있을 거야. 네가 원한다면 난 너를 데리고 그곳으로 갈 수도 있고.”비록 성유리는 지금 박한빈의 말이 내키지 않았지만 하늘이는 달콤한 그의 유혹에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다.아이의 친엄마인 성유리는 당연하게도 하늘이가 지금 박한빈의 말에 많이 흔들리고 또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특히 공연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난 하늘이의 눈은 전보다 더 반짝였다.필경 전에 몇 번 놀이공원으로 향했을 때, 시간이 안 맞아 한 번도 무대 위에서 하는 퍼레이드나 공연을 아이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건 하늘이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 게다가 박한빈이 말한 놀이기구들 또한 아이는 타보지 못했었다.왜냐하면 성유리가 그런 기구들을 타기를 즐기지 않기에 하늘이도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매번 포기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놀고 싶으면 내가 데리고 가줄게. 공연 완전 재밌거든? 아마 넌 본 적이 없을 거야.”하늘이가 망설이는 것을 눈치챈 박한빈은 계속해서 “미끼”를 던졌다.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봤고 그녀는 아이의 눈빛을 보고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솔직히 말하면 성유리는 내심 박한빈과 하늘이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그녀는 부녀 사이가 엄청 가까워지지는 못해도 적어
차는 빠르게 달려 이내 놀이공원에 도착했다.오늘은 평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놀이공원은 인산인해였다.하지만 박한빈이 오기 전에 미리 관계자한테 연락을 해뒀는지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직원들이 달려 나와 맞이해줬다.하늘이가 무슨 기구를 놀고 싶어 하든 다 그들만을 위한 통로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세 사람은 아예 줄을 설 필요도 없었다.성유리는 사실 이런 방식으로 아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필경 박한빈은 이제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오늘은 박한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늘이와 놀이공원에 오는 날일 것이다. 그렇기에 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이런 습관을 들이기가 싫었다.그러나 지금 하늘이는 너무도 흥분한 상태였고 오늘 같은 날씨에 밖에서 오랫동안 줄을 서는 것 또한 아이의 몸에 좋지 않기에 성유리는 꾹 참았다.놀이공원에 도착하고 제일 처음으로 박한빈은 하늘이와 함께 회전목마를 타러 향했다.그 회전목마는 중간에 분수까지 설치되어있어 어느 한 범위 안에 들어서면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하늘이는 비옷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놀이기구에서 내릴 때는 이미 앞머리가 젖어버린 상태였다.성유리는 아이의 몸에 묻은 물을 닦아내 주고 싶었지만 하늘이는 고개를 돌린 채 박한빈만 바라보며 말했다.“더 타고 싶어요!”“그래. 그러자.”박한빈은 주저도 없이 아이의 말에 동의했다.그러자 하늘이는 재빨리 성유리의 손을 잡아끌었고 박한빈은 그런 아이에게 다정히 말했다.“엄마는 힘든 것 같아. 아니면 나랑 둘이 갈래?”그의 말에 하늘이의 표정이 굳어져 버렸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기만 했다.성유리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자 하늘이는 망설임 끝에 박한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그는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엄마의 손이 아닌 처음으로 잡아보는 커다란 남자의 손에 하늘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아이는 주저하다 박한빈의 손이 아닌 그의 옷깃을 살짝 움켜잡았다.박한빈 또한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와 함께 전용 통로로 들어섰다.비록
하늘이는 오늘 노느라 유달리 지쳤는지 성유리의 품에서 오랜 시간 잠에 들어 있었다.요즘 즐거운 시간들을 보낸 하늘이는 체중 또한 나날이 늘고 있었다. 박한빈의 차에서 내릴 때, 성유리는 아이를 계속 안고 있어 팔에 감각이 없어졌다. 그러자 박한빈이 얼른 성유리에게 다가오더니 말했다.“내가 안고 올라갈게.”“괜찮아요.”성유리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박한빈은 가녀린 그녀의 팔을 쳐다보고는 다시 말했다.“너 지금 하늘이 안고 올라갈 수 있어? 아니면 그냥 깨워서 직접 걸어가라고 해.”성유리는 확실히 지금 상태로는 아이를 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깊은 잠에 들어있는 아이를 보니 차마 깨울 수가 없어 망설였다.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슬쩍 쳐다보더니 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허리를 숙여 아이를 안아 들었다.원래 박한빈은 작디작은 이런 아이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사람들이 힘들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안아보니 아이는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특히 아이가 잠에 들어 있으면 더더욱.박한빈은 조금만 힘을 준다면 하늘이가 아파서 깰까 봐 두려웠고 힘을 풀면 하늘이가 안정적인 느낌이 들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그래서 집으로 걸어가는 과정에서 박한빈의 몸은 잔뜩 긴장한 채로 뻣뻣하게 굳어있었다.그러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유리는 과연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아이를 안고 있었을까?’“하늘이 침대에 내려놓으시면 돼요.”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한빈은 그제야 정신을 다잡고 조심스레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하늘이는 너무도 피곤했는지 침대에 올려놓자마자 자세를 휙 바꾸더니 계속 잤다.박한빈은 그런 아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고 그 순간,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뭐... 다른 일 더 있으세요?”그는 자신이 꽤 오랫동안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음을 깨달았고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오늘 정말 감사했어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덕분에 하늘이도 너무 신나게 논 것 같아요.”“그래.”박한빈은 짧
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본인이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는 박한빈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성유리가 말한 대로 그는 아직 그녀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또한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하지만 오늘 재밌게 놀았으면 그만 아닌가?박한빈이 오늘 갑자기 같이 놀이공원에 가자는 제안을 한 것도 사실 연정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 옆에 남아있는 사람이 절대로 연정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오늘 일부로 연정우에게 소심하게나마 “복수”를 한 것이다.성유리 또한 그의 제안을 수락했고 오늘 세 사람은 예상 밖으로 너무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그래서 박한빈은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이렇게 함께 즐겁게 살고 싶었다.그러나 이제 보니 박한빈의 생각은 어린아이처럼 마냥 순진하기만 했다. 성유리는 오늘 그저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기 위함이었다.오직 추억 하나만 위해서였고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었다.이런 생각이 든 박한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성유리에게 물었다.“그럼 넌 누구랑 같이 있으면 즐거운데? 연 교수야?”그는 잘 알고 있다. 오늘 성유리와 하루 종일 문자를 나눈 사람이 바로 연정우라는 사실을.처음부터 박한빈은 성유리가 오늘 하늘이를 데리고 연정우와 함께 놀이공원으로 갈 계획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아이까지 함께 데리고 간다는 것은 성유리가 연정우를 하늘이의 아빠로 삼고 싶은 의미라고 박한빈은 스스로 해석했다.“전에 유효정 씨한테 납치당했던 일 잊었나?”박한빈이 물었다.“그 일도 연정우 씨가 계획한 거야. 알아? 연 교수는 유효정 씨랑 결혼하기 싫어서 너를 방패로 삼은 거라고. 유효정 씨가 너를 극도로 혐오하게 만들어놓고 만약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어.”“연 교수가 알고 있...”“저도 알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뚝 끊어버렸고 짧디짧은 그녀의 대답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알고 있으면서
사실 오늘 성유리는 연정우와 함께 김난희의 빈소를 찾을 예정이 아니었다.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해도 성유리는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그의 전처의 신분으로 장례식을 찾는 것만으로 이미 민망한 상황인데 연정우까지 함께 간다면 박씨 가문에게 수치를 안겨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연정우는 누구한테서 성유리의 일정을 전해 들은 건지 몰래 따라왔고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연정우와 딱 마주쳐버렸다.연정우는 자신 또한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으니 성유리는 그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게다가 연정우도 아예 성유리를 만날 것을 예상치도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그녀는 받아들여야만 했다.차 안에서 연정우는 이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얘기를 꺼냈고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운전대를 잡고 있던 연정우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사실 나도 꼭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어. 그냥... 너 혼자 오면 위험할까 봐. 그리고 혹시 어색할까 봐 걱정돼서 같이 오려고 한 거였어.”연정우의 핑계는 누가 들어도 거짓이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그를 들춰내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였다.“그래서 아까 박한빈 씨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한 건데?”그러자 연정우가 다시 물었다.“별거 아니야. 그냥 흔한 말들이었어.”성유리는 아주 평온하게 대답했고 연정우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하려던 말들을 꾹 삼키기로 했다.‘이런 상태로 말하면 안 돼.’박한빈은 이미 성유리에게 있어 과거로 남은 사람이었으니 연정우는 그녀 앞에서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다.혹시나 박한빈을 잊고 살던 성유리가 자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다시 떠올릴까 봐 말이다.하지만 연정우는 쉽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많은 일을 겪은 성유리가 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성유리는 전에 마음속 깊은 곳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있다는
사실 박한빈도 안다.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이미 성유리의 입에서 직접 답을 들은 상황이니 더더욱 물을 필요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그래도 묻고 싶었다.박한빈은 지금 마치 고집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어른의 다리를 부여잡고 몇 번이나 답을 알려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한번, 또 한 번 자신이 사랑을 받았었다는 사실을 증명받고 싶었고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랐다.박한빈의 말에 박세빈은 멈칫하더니 비웃듯 웃으며 물었다.“그래서 이게 바로 형님이 저한테 연락한 이유인가요?”박한빈은 침묵했지만 박세빈은 그 침묵 속에서 정답을 알아차렸다. 정신이 나간 듯 깔깔 웃던 박세빈은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했고 이내 말을 이어갔다.“형님은 뭐인 것 같습니까? 설마 그때 성유리 씨가 형님이랑 이혼한 게 제가 협박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나요?”“박한빈 씨, 제대로 된 답을 알려드리죠. 사실 그때 저희는 아주 간단한 대화만 나눴습니다.”박세빈은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하늘이 맞죠? 제가 아이 이름을 한 번 말하니까 바로 제 의도를 알아차리더군요. 그러더니 당장 떠나겠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솔직히 말하면 다른 일도 이용해 협박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빨리 동의할 줄은 몰랐습니다.”“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형님은 성유리 씨에게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박한빈 씨, 형님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형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다 형님의 돈과 권력을 보고 접근한 것 아닌가요? 그 누구도 진심으로...”박세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전화를 끊어버렸다.답. 그토록 듣고 싶었던 정답은 박한빈이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를 점이 없었다.우스운 건 박한빈이 스스로 성유리의 선택에 대한 이유도 다 지어내고 확신했지만 그녀가 말한 것과 똑같다는 점이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을 속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그를 속일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한번 쓱 쳐다보고는 박한빈에게 물었다.아무 대답 없는 박한빈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성유리는 그의 침묵이 곧 수긍이라고 생각해 뒤돌아 떠나버렸다.박한빈은 전혀 주저하거나 망설이지도 않고 떠나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보던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세빈 쪽에 있던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박 대표님, 깨어났습니다.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박한빈은 그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네.”몇 초 뒤, 박한빈은 수화기 너머에서 박세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어머나, 이게 누구십니까? 한빈 형님 아니신가요?”박세빈은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나약했고 힘없어 보였다.“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형님이 아직 저 같은 동생을 기억하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박한빈은 자신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가득한 박세빈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며 말했다.“할머니 돌아가셨다.”그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는 약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박세빈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 어쩐지 전에 쓰러졌을 때 꿈에서 할머니가 나타난다 했는데...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찾아오셨나 보군요.”박한빈은 옛날 박세빈이 박씨 저택에 들어왔을 때, 김난희에게 아부하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비록 당시에도 박한빈은 박세빈이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김난희의 부고 소식에도 흔들리지 않을 줄은 몰랐다.그러나 박한빈은 굳이 이런 문제로 박세빈에게 따지고 싶지 않아 낮은 소리로 말했다.“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셨다. 아쉽게도 볼 기회가 없었지만. 3일 뒤에 장례식이 끝날 예정인데 오고 싶으면 와도 돼.”박한빈의 말에 박세빈은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꾹 닫아버렸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세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형, 지금 제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계십니까?”“최근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박세빈이 전에 너한테 찾아간 적 있지? 걔가 무슨 말을 했었어?”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성유리에게 물었다.조급해 보이는 그의 목소리와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에 성유리는 잠시 굳었다 미간을 찌푸리고는 되묻기 시작했다.“무슨 뜻이에요?”“내가 지금 묻잖아. 그때 내가 구치소에 있을 때 말이야. 박세빈이 너 찾아간 적 있지? 찾아와서 뭐라고 했는데? 협박이라도 한 거야?”“걔가 너한테 한 말 때문에 나랑 이혼하려고 했어? 혹시 나한테 영향을 끼칠까 봐? 맞아?”박한빈은 지금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성유리만 뚫어져라 보는 박한빈은 며칠 밤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마치 이 결론이어야만 당시 성유리의 선택이 이해가 된다는 듯이.박한빈은 어쩌면 박세빈이 정말 성유리를 협박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 정말 성유리가 재물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여자였다면 떠날 때 박한빈이 준 모든 물건을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늘 모순적이던 성유리의 행동이 그제야 퍼즐 조각처럼 맞아가는 것 같았기에 박한빈은 꽉 막혀있는 속이 풀리는 기분마저 들었다.마음 같아서 박한빈은 당장이라도 성유리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알려주지 않은 건지, 왜 홀로 그런 감정을 떠안고 살았는지.분명히 남편이던 자신에게 알릴 수 있었지만 왜 숨겼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답을 안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성유리가 정말 박세빈의 협박 때문에 자신을 떠난 것이 맞다면 말이다.“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침묵하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짧디짧은 한마디에 박한빈의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들이 일제히 사라져 버렸고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성유리를 쳐다보았다.“박세빈 씨가 저한테 찾아왔던 건 맞아요.”성유리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근데 저를 협박하거나 위협적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박한빈을
성유리와 박한빈에 관한 소문들이 업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연정우는 갑자기 떠오르는 샛별처럼 업계에 등장한 사람이고 성유리는 엄연한 박한빈의 전 아내였다.이런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소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퍼졌고 자연스레 그들이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연정우와 성유리 둘 다 겸손하고 관심받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인지라 업계 사람들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잘 보지 못했다.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들리는 소문이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며 웃어넘기기 일쑤였다.하지만 지금 판은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다. 오늘은 박한빈의 할머니, 즉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한 날이었는데 연정우와 성유리가 함께 나타난 것이다.그저 그런 형식들이 오가며 차가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던 추모회는 두 사람의 등장으로 갑자기 후끈 달아오른 것 같았다.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일제히 박한빈에게 시선을 돌렸고 다들 그의 사소한 표정 변화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사람들은 마음 같아선 앞으로 달려가 박한빈의 시선을 가로막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것 같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를 선택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향을 피우고 애도하고는 연정우와 함께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많이 비통하시겠습니다. 진심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성유리의 행동들은 마치 기계로 찍어낸 것 같았다.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고 목소리에도 전혀 파동이 없었다.박한빈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의 말을 다 들어줬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성유리는 개의치 않았고 연정우와 함께 떠나려고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박한빈이 굳게 닫았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할 말이 있어.”박한빈은 잘 안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던 사람들이 다 귀를 기울일 것이고 무슨 행동을 하던 다 지켜볼 것이라는 사실을.그리고 한 말과 행동들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라 사람들의 “심판”을 받을 것
박한빈은 결국 먼저 박세빈에게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었다.이건 최근 2년 안에 박한빈이 박세빈에게 처음으로 연락하는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박세빈이 아니었다.“박세빈 씨와 어떤 사이십니까? 가족입니까?”수화기 너머 들리는 사람의 말투에 박한빈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고 얼른 되물었다.“박세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아,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로 인해 상처감염이 꽤 심각한 상태고요.”의사로 추정되는 사람이 다급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가족이 맞으시면 빨리 여기로 오세요. 아마 다른 곳으로 데려가셔야 할 겁니다.”박세빈이 머물던 나라는 위생과 의료 설비,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곳이었다.매년 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거의 다 현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라에 홀로 살아가고 있던 박세빈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박한빈은 원래 박세빈이 그곳에서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으려 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박세빈이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 그곳에 보낸 것이 아니었으니까.하지만 오늘 집사가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고 있어 박한빈은 도대체 박세빈이 성유리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가 너무 궁금했다.심지어는 혼자 상상하고 두 사람이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려보기까지 하면서 말이다.‘그래서 그때 나를 떠나려고 한 건가?’‘그럼 왜 나중에 나한테 알려주지 않은 거지?’‘분명 잘 앉아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잖아.’박한빈은 자꾸만 드는 의문들에 대한 정답을 몰라 답답했고 하루라도 빨리 그 답을 듣고 싶었다.그는 얼른 자람시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해 먼저 박세빈을 다른 병원에 옮긴 뒤, 그가 깨어나면 제일 먼저 자기한테 말해달라고 부탁했다.박세빈이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인 박한빈은 답을 알고 싶어 점점 더 초조해졌다.김난희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날 동안, 장손인 박한빈은 빈소를 지켜야 했고 그 기간 동안 회사에도 많은 업무들이 쌓여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잠시 고민하다 결국 김난희가 내미는 서류를 건네받았다.“고맙습니다.”인사를 마친 성유리가 옆에 서 있는 하늘이에게 슬쩍 눈치를 주자 아이도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증조할머님, 감사합니다.”김난희는 두 사람의 인사에도 그저 침대에 기댄 채로 하늘이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성유리는 김난희와 할 말이 딱히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늘이도 그녀를 무서워하자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더 없어졌다.그렇기에 김난희가 버티다 못해 먼저 잠에 든 후,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원래는 김서영이 아직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줄 알았던 성유리는 방문을 나서자마자 뜻밖의 사람과 마주쳐버렸다.그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 그를 발견한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박한빈은 차분했다.성유리와 마주친 박한빈은 이내 시선을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서류에 돌렸고 망설이던 성유리는 서류를 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어르신께서 주신 주식 양도서예요. 저한테 있어도 별로 소용이 없으니까 이건 돌려드릴게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조롱하듯 물었다.“이건 내가 준 것도 아닌데 갖기 싫어?”“네. 싫어요.”“그럼 돌아가서 할머님께 돌려드려.”박한빈의 태도는 아주 완강했고 성유리가 내미는 서류를 건네받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건네기를 포기해 버렸고 그와도 나눌 대화가 없었기에 하늘이의 손을 잡고 계속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박한빈한테 왜 그가 이곳에 나타난 건지도 묻지 않은 채로.하지만 그 순간, 박한빈이 뒤돌아있는 성유리에게 갑자기 물었다.“할머니가 너한테 무슨 말을 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성유리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아무 말도 안 했어요.”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보지도 않고는 대답을 이어갔다.“그렇게 걱정되시면 가서 CCTV 돌려보세요.”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뭐라 대꾸하지도 못했다. 사실 무슨 얘기를 더 하고 싶었지만 냉랭한 성유리의 말투와 목소
김난희가 있는 요양원은 성유리도 와보지 못했다.그리고 예상대로라면 이건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하늘이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요양원에 오는 것이기에 많이 신기한지 사방을 마구 둘러보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엄마, 저기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는 사람들은 왜 노인이야?”“왜냐하면 여기는 요양원이거든. 노인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야.”“그럼 저 노인들의 자식은?”“밖에서 일하고 있을 거야.”“노인들을 신경도 안 쓰고? 얼마나 외롭겠어.”하늘이의 말이 끝나자 그들에게 길을 안내하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뒤를 휙 돌아봤다.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하늘이의 손을 더욱 꼭 잡아줬고 오늘은 김서영도 두 사람과 함께였다.하지만 그녀는 굳이 김난희를 보고 싶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김난희 또한 김서영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김서영은 밖에서 성유리와 하늘이를 기다리려고 결정했다.“성유리 씨, 이쪽입니다.”길을 안내하는 사람은 아주 공손했고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성유리의 기억 속, 김난희는 늘 강하고 성격이 드센 사람이었다.아무리 연세가 지긋하고 자식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해도 김난희는 무너지지 않았고 강인함을 유지했었다.그러나 지금,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나뭇가지처럼 삐쩍 말라 있었고 하늘이는 처음 그렇게 마른 사람을 봐서 그런지 무서워 성유리 뒤로 숨어버렸다.공허한 눈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김난희는 인기척이 들리자 고개를 돌렸고 이내 성유리와 하늘이를 발견했다.그녀는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의 등장에 눈빛이 휙 변하더니 애써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입을 뗐다.“네가... 한빈이 딸이야?”하늘이는 성유리의 뒤에 숨어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결국 성유리가 하늘이를 달래며 말했다.“하늘아, 인사해야지. 네 증조할머니야.”긴장했는지 혀로 입술을 핥고만 있던 하늘이가 주춤거리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그러자 김난희는 허허 웃으며 연신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정말 좋구나.
그해, 박세빈의 일이 있은 뒤 박한빈은 김난희를 연세가 많아 홀로 생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요양원에 보내버렸다.비록 금성에서 제일 좋은 요양원이긴 하지만 사실 관리가 너무 엄격해 외부인은 마음대로 면회를 갈 수도 없었고 안에 있는 사람도 자유롭게 외출하지 못했다.그러니 김난희가 요양원에서 어떤 생활을 보내는지, 그 생활이 호화로운지 아니면 안쓰러운지 아무도 모른다.만약 집사가 갑자기 김서영이 사는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성유리는 박씨 가문에 김난희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잊었을 것이다.“사모님, 오늘 의사 선생님께서 어르신에게 찾아와 이미 진단을 다 마쳤습니다.”찾아온 손님은 아주 공손한 태도로 김서영에게 말을 이어갔다.“어르신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다른 일들에 다 흥미를 잃으셨고 그냥 누워만 계십니다. 유일한 소원이라 하면 오직 친손자를 만나는 거라고 하십니다.”“박세빈이요?”김서영이 침착한 말투로 물었다.“지금 걔는 해외에 있어서 당장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데.”“큰 도련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그 정도 시간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모님에게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큰 도련님 좀 설득해 주시죠.”“이건 저도 장담 못 해요.”집사의 부탁에 김서영은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갔다.“애초에 어르신이 우리 모자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남들은 모를 거예요. 그리고 당신도 알 리가 없고요. 하지만 저희 모자는 아직 선명히 기억하고 있어요.”“솔직히 말하면 박세빈을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해외로 보낸 것도 우리 한빈이가 넓은 아량을 베푼 거예요.”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집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그러나 이내,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굳이 작은 도련님이 돌아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어르신에게 다른 손자라도 보여주시죠?”성유리는 원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필경 이 일은 박씨 가문의 일이니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김서영에게 먼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