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본인이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는 박한빈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성유리가 말한 대로 그는 아직 그녀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또한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하지만 오늘 재밌게 놀았으면 그만 아닌가?박한빈이 오늘 갑자기 같이 놀이공원에 가자는 제안을 한 것도 사실 연정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 옆에 남아있는 사람이 절대로 연정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오늘 일부로 연정우에게 소심하게나마 “복수”를 한 것이다.성유리 또한 그의 제안을 수락했고 오늘 세 사람은 예상 밖으로 너무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그래서 박한빈은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이렇게 함께 즐겁게 살고 싶었다.그러나 이제 보니 박한빈의 생각은 어린아이처럼 마냥 순진하기만 했다. 성유리는 오늘 그저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기 위함이었다.오직 추억 하나만 위해서였고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었다.이런 생각이 든 박한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성유리에게 물었다.“그럼 넌 누구랑 같이 있으면 즐거운데? 연 교수야?”그는 잘 알고 있다. 오늘 성유리와 하루 종일 문자를 나눈 사람이 바로 연정우라는 사실을.처음부터 박한빈은 성유리가 오늘 하늘이를 데리고 연정우와 함께 놀이공원으로 갈 계획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아이까지 함께 데리고 간다는 것은 성유리가 연정우를 하늘이의 아빠로 삼고 싶은 의미라고 박한빈은 스스로 해석했다.“전에 유효정 씨한테 납치당했던 일 잊었나?”박한빈이 물었다.“그 일도 연정우 씨가 계획한 거야. 알아? 연 교수는 유효정 씨랑 결혼하기 싫어서 너를 방패로 삼은 거라고. 유효정 씨가 너를 극도로 혐오하게 만들어놓고 만약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어.”“연 교수가 알고 있...”“저도 알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뚝 끊어버렸고 짧디짧은 그녀의 대답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알고 있으면서
성유리의 팔목을 잡고 있는 박한빈의 힘은 상당했다.그 고통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아프다는 티도 내지 않고는 박한빈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그거 아세요? 사실 그때 하늘이가 아플 때 제가 제일 먼저 생각한 사람은 바로 박한빈 씨예요.”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박한빈 씨한테 전화를 너무 걸고 싶었는데 용기나 안 났어요.”“왜냐하면 저도 박한빈 씨가 상처받은 걸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나... 제 아이한테 어떤 태도를 보일지 짐작이 안 됐어요.”“나중에야 하나 씨가 그러더라고요. 박한빈 씨가 소개팅까지 하면서 결혼할 준비를 한다고. 게다가 하늘이 상황도 알면서 신경도 안 쓰다고 있다는 말도 저한테 했어요.”“그건 다 오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말에 끼어들며 반박했다.“그때 내가 사하나 씨랑 만났을 때 난 그 사람이 현장 일에 대해 말하는 줄 알았어. 나는 절대...”“저도 알아요. 그다음은요?”성유리가 물었다.그러자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물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나중에 저희 상황을 다 알고 나서도 왜... 그렇게 모질게 구셨죠?”“하늘이가 저한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도 아시면서.”“사실 그때 만약 저희가 앉아 대화를 나눴더라면 아마... 다시 잘 될 가능성은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으셨죠.”“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박한빈 씨는 아이를 이용해 저를 협박하고 벼랑 끝까지 내모셨잖아요.”“박한빈 씨가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지 않고 계실 때, 하루하루 창백해져 가는 하늘이의 안색을 지켜만 봐야 하는 제 심정을 당신은 죽을 때까지 모르실 거예요.”“하늘이는 제 몸의 일부이고 제 피부이자 살이에요. 저랑 피를 나눈 아이가 저한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세요?”성유리는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박한빈을 조롱하듯 물었다.“아니면 혹시 그걸 아시니까 일부러 더 그랬던 건가요?”“박한빈 씨, 전에 저를 어떻게 대하셨던 전 상관이 없었어요. 심지어
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고, 성유리는 몇 분간 누워 있다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우려 했다.박한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었다. 그래서인지 성유리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몇 번이나 잠옷 단추를 끼우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려 했지만 잘 안되었다.곧이어 박한빈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키가 훤칠한 데다가 이목구비까지 뚜렷해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방금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그의 복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성유리가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의 눈을 피하며 여전히 단추를 잠그려 애쓰고 있었다.“내일이 바로 유정이가 퇴원하는 날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퇴원 절차를 밟아주고 집에 데려와 줘. 어머님께는 한동안 여기에 머물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어.”성유리는 단추를 만지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지금 성유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2년째 부부로 지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자, 금성 지화 그룹의 후계자 박한빈이었다.그리고 방금 그가 말한 성유정은 성유리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었다.다섯 살 때, 성유리는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고 그렇게 16년 가까이 실종됐었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성씨 가문에 돌아왔을 때, 성씨 가문에는 이미 또 다른 딸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성유정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생’이 되었다.아버지는 성유리가 실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윤청하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비슷한 나이대인 성유정을 입양했었다. 16년이 지나고 성유리가 다시 성씨 집안에 돌아오고 서로를 그리워했던 한 가족이 다시 상봉하게 되었지만, 그 후의 날들은 예상만큼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원유진은 성유정의 오랜 친구이자, 재벌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유정과 함께 자라며 박한빈과 성유정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하지만 성유리가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이었기에 원유진은 성유리에게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성유리가 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거나 민망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오히려 성유정이 먼저 말을 돌렸다.“언니,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데리러 왔어. 짐은 다 챙긴 거지?”“다 챙겼어.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성유정은 평소처럼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원유진은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는 참지 않고 존댓말까지 해가며 비아냥거렸다.“사모님, 박 대표님은 어디 계신가요? 유정이가 퇴원하는데 설마 안 오셨어요?”“출근했어. 바쁜가 봐...”“정말 바쁜 거 맞아? 아니면 누군가가 바가지를 긁어대서 오고 싶어도 못 온 건 아닐지 모르겠네.”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유진아, 그만해.”그러나 원유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뭘 그만해? 듣고 양심에 찔리기라도 했을까 봐?”성유리는 원유진을 가볍게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박한빈의 번호를 찾아 원유진에게 내밀었다.“뭐 하는 거야?”성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야! 너...”원유진이 화를 내려고 하자, 성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언니랑 싸우지 마.”원유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넌 정말 착한 거니? 아니면 바보인 거니? 성유리는 네 것을 탐내고 채간 사람이야!”성유리는 원유진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정의 짐을 들어 앞장서서 병실에서 나갔다.차에 타자마자 윤청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리야, 유정이 데리러 갔어?”친딸과의 통화였지만 윤청하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색했다.“네.”“유정이는 좀 어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규
저녁 7시가 되자마자, 박한빈이 집으로 돌아왔다.성유정은 거실에 있다가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오빠, 이제 퇴근한 거야?”박한빈은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외투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말했다.“저녁 식사 준비됐어.”식사 중에 성유정은 먼저 조심스럽게 성유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오빠,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언니랑 오빠를 불편하게 하는 거라면... 사실 엄마한테도 혼자 있을 수 있다고 얘기했었거든... 그런데도 엄마가 걱정된다고...”박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편하게 지내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정말? 여기서 지내는 게 민폐가 되는 건 아니겠지?”“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정 씨가 여기 계시면 저희도 좋아요.”숙자 아주머니가 식탁에 음식을 올리며 말했다.“오랜만에 집이 북적여서 정말 좋네요!”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성유리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성유정처럼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에는 서툴렀다.숙자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집에서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은 성유리는 서둘러 밥을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난 먼저 올라가 볼게. 천천히 식사해.”“언니, 이거밖에 안 먹어?”성유정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내가 같이 올라가 줄까?”“괜찮아.”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천천히 먹어. 나는 괜찮아.”그 말만을 남기고 성유리는 식탁에서 멀어졌다. 다이닝룸을 벗어나기 전, 성유정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언니... 화난 것 같지 않아? 내가 와서 두 사람을 방해한 거야?”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과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박
성유리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팔에 힘을 주어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더 세게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거칠고 이기적이었다.성유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밖에 있는 성유정을 떠올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샤워기의 물소리 때문인지 문밖에 있던 성유정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큰 소리로 말했다.“오빠? 샤워 중이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노려보았다.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평소와 달리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조용하고 무기력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앙큼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후끈 달아올라 다시 그녀를 밀어붙였다. 마치 그 안에 쌓인 감정을 풀어내듯,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두 사람의 몸은 완벽하게 맞물렸고 성유리는 절정에 달아올라 숨이 멎을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문밖에서 성유정은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벽 쪽에 밀어붙였을 때,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그러자 문밖에서 들리던 성유정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그제야 성유리는 상황을 깨닫고 손을 꽉 쥐었다.바로 그때, 박한빈이 그녀를 들어 올렸고 그의 어깨가 성유리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했지만, 있는 힘껏 물지는 못하고 가볍게 입을 대었다가 떼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렇게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숙자 아주머니가 그녀를 깨우며 말했다.“오늘은 본가에 가는 날이
성유정은 박한빈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다. 그래서 박씨 가문의 본가에 대해선 성유리처럼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았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김난희에게 다가갔다.“할머니!”“아이고! 우리 유정이가 왔구나!”김난희는 매우 기뻐하며 성유정을 반겼다.“얼굴은 왜 또 야위었어?”“아니에요...”성유정은 웃으며 말했다.“이것 좀 보세요. 할머니 드시라고 제가 게살 완자를 만들어 왔어요.”“유정이는 어쩜 이렇게 착해? 정말 마음이 예쁘구나!”두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손녀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김난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그러나 성유리가 다가오자, 김난희의 표정은 조금 굳어졌다.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할머니.”김난희는 성유리를 보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는 눈을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어머님...”“아줌마, 잘 지내셨어요...”김서영이 나타나자, 원래 김난희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성유정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비쳤다.“유정 씨도 왔네. 환영해.”김서영은 그녀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반가움도 비치지 않았다.김서영은 김난희를 향해 인사했다.“어머님,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김난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서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성유정이 가져온 음식을 슬쩍 본 후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님은 요즘 소화가 잘 안되셔서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 할 것 같네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서영은 김난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바로 지시했다.“정식 씨, 이 음식을 주방으로 가져가세요.”김서영은 성유정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성유정이 주위의 호감을 쉽게 사는 재주가 있었지만, 김서영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김서영은 항상 차가운 모습을 유지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거리
박한빈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본가에 도착했다. 김난희는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미소 번진 얼굴로 그를 맞이하며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얼굴 좀 봐! 또 살이 빠졌네...”김난희는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결혼 전보다 더 말라 보이잖아. 네 아내는 대체 집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그 말은 성유리를 겨냥한 것이었다.성유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성유정이 나서서 말했다.“할머니, 언니를 오해하지 마세요. 언니는 정말 바쁜 사람이에요. 곧 새 만화가 출간된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 많이 야위었더라고요.”성유정은 성유리를 변호하는 듯 말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들렸다. 그녀의 가시가 돋친 말은 성유리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김난희는 성유정의 말을 듣고 더욱 불만스러워졌다.“만화라니? 또 그 하찮은 것들 하는 거야? 너는 애가 어쩜 그렇게...”김난희가 계속 잔소리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저녁 준비는 다 됐나요?”“한빈아, 너...”김서영이 곧바로 끼어들었다.“어머님, 한빈이는 이제 다 컸으니 자기 관리도 잘 할 거예요.”그 말에 김난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불만들을 삼켰다. 그러고는 성유정을 보며 말했다.“우리 유정이는 착하고 자기 사람도 잘 챙기고... 쟤가 다시 돌아오지만 않았었어도...”김난희도 아차 싶었던지 말끝을 흐렸다. 김서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겼다.“유리야, 부모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니?”“네. 아직이요.”“유정 씨가 너희 집에서 오래 머무는 것도 불편할 테니, 이참에 아예 본가에서 머물게 하는 게 어떨까? 유정 씨도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저는...”그러나 김서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게다가 내가 요즘 괜찮은 청년 몇 명을 알아봤거든. 편한 시간 알려주면 한번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아.”“그건 너무 이른
성유리의 팔목을 잡고 있는 박한빈의 힘은 상당했다.그 고통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아프다는 티도 내지 않고는 박한빈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그거 아세요? 사실 그때 하늘이가 아플 때 제가 제일 먼저 생각한 사람은 바로 박한빈 씨예요.”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박한빈 씨한테 전화를 너무 걸고 싶었는데 용기나 안 났어요.”“왜냐하면 저도 박한빈 씨가 상처받은 걸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나... 제 아이한테 어떤 태도를 보일지 짐작이 안 됐어요.”“나중에야 하나 씨가 그러더라고요. 박한빈 씨가 소개팅까지 하면서 결혼할 준비를 한다고. 게다가 하늘이 상황도 알면서 신경도 안 쓰다고 있다는 말도 저한테 했어요.”“그건 다 오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말에 끼어들며 반박했다.“그때 내가 사하나 씨랑 만났을 때 난 그 사람이 현장 일에 대해 말하는 줄 알았어. 나는 절대...”“저도 알아요. 그다음은요?”성유리가 물었다.그러자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물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나중에 저희 상황을 다 알고 나서도 왜... 그렇게 모질게 구셨죠?”“하늘이가 저한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도 아시면서.”“사실 그때 만약 저희가 앉아 대화를 나눴더라면 아마... 다시 잘 될 가능성은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으셨죠.”“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박한빈 씨는 아이를 이용해 저를 협박하고 벼랑 끝까지 내모셨잖아요.”“박한빈 씨가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지 않고 계실 때, 하루하루 창백해져 가는 하늘이의 안색을 지켜만 봐야 하는 제 심정을 당신은 죽을 때까지 모르실 거예요.”“하늘이는 제 몸의 일부이고 제 피부이자 살이에요. 저랑 피를 나눈 아이가 저한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세요?”성유리는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박한빈을 조롱하듯 물었다.“아니면 혹시 그걸 아시니까 일부러 더 그랬던 건가요?”“박한빈 씨, 전에 저를 어떻게 대하셨던 전 상관이 없었어요. 심지어
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본인이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는 박한빈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성유리가 말한 대로 그는 아직 그녀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또한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하지만 오늘 재밌게 놀았으면 그만 아닌가?박한빈이 오늘 갑자기 같이 놀이공원에 가자는 제안을 한 것도 사실 연정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 옆에 남아있는 사람이 절대로 연정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오늘 일부로 연정우에게 소심하게나마 “복수”를 한 것이다.성유리 또한 그의 제안을 수락했고 오늘 세 사람은 예상 밖으로 너무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그래서 박한빈은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이렇게 함께 즐겁게 살고 싶었다.그러나 이제 보니 박한빈의 생각은 어린아이처럼 마냥 순진하기만 했다. 성유리는 오늘 그저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기 위함이었다.오직 추억 하나만 위해서였고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었다.이런 생각이 든 박한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성유리에게 물었다.“그럼 넌 누구랑 같이 있으면 즐거운데? 연 교수야?”그는 잘 알고 있다. 오늘 성유리와 하루 종일 문자를 나눈 사람이 바로 연정우라는 사실을.처음부터 박한빈은 성유리가 오늘 하늘이를 데리고 연정우와 함께 놀이공원으로 갈 계획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아이까지 함께 데리고 간다는 것은 성유리가 연정우를 하늘이의 아빠로 삼고 싶은 의미라고 박한빈은 스스로 해석했다.“전에 유효정 씨한테 납치당했던 일 잊었나?”박한빈이 물었다.“그 일도 연정우 씨가 계획한 거야. 알아? 연 교수는 유효정 씨랑 결혼하기 싫어서 너를 방패로 삼은 거라고. 유효정 씨가 너를 극도로 혐오하게 만들어놓고 만약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어.”“연 교수가 알고 있...”“저도 알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뚝 끊어버렸고 짧디짧은 그녀의 대답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알고 있으면서
하늘이는 오늘 노느라 유달리 지쳤는지 성유리의 품에서 오랜 시간 잠에 들어 있었다.요즘 즐거운 시간들을 보낸 하늘이는 체중 또한 나날이 늘고 있었다. 박한빈의 차에서 내릴 때, 성유리는 아이를 계속 안고 있어 팔에 감각이 없어졌다. 그러자 박한빈이 얼른 성유리에게 다가오더니 말했다.“내가 안고 올라갈게.”“괜찮아요.”성유리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박한빈은 가녀린 그녀의 팔을 쳐다보고는 다시 말했다.“너 지금 하늘이 안고 올라갈 수 있어? 아니면 그냥 깨워서 직접 걸어가라고 해.”성유리는 확실히 지금 상태로는 아이를 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깊은 잠에 들어있는 아이를 보니 차마 깨울 수가 없어 망설였다.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슬쩍 쳐다보더니 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허리를 숙여 아이를 안아 들었다.원래 박한빈은 작디작은 이런 아이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사람들이 힘들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안아보니 아이는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특히 아이가 잠에 들어 있으면 더더욱.박한빈은 조금만 힘을 준다면 하늘이가 아파서 깰까 봐 두려웠고 힘을 풀면 하늘이가 안정적인 느낌이 들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그래서 집으로 걸어가는 과정에서 박한빈의 몸은 잔뜩 긴장한 채로 뻣뻣하게 굳어있었다.그러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유리는 과연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아이를 안고 있었을까?’“하늘이 침대에 내려놓으시면 돼요.”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한빈은 그제야 정신을 다잡고 조심스레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하늘이는 너무도 피곤했는지 침대에 올려놓자마자 자세를 휙 바꾸더니 계속 잤다.박한빈은 그런 아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고 그 순간,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뭐... 다른 일 더 있으세요?”그는 자신이 꽤 오랫동안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음을 깨달았고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오늘 정말 감사했어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덕분에 하늘이도 너무 신나게 논 것 같아요.”“그래.”박한빈은 짧
차는 빠르게 달려 이내 놀이공원에 도착했다.오늘은 평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놀이공원은 인산인해였다.하지만 박한빈이 오기 전에 미리 관계자한테 연락을 해뒀는지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직원들이 달려 나와 맞이해줬다.하늘이가 무슨 기구를 놀고 싶어 하든 다 그들만을 위한 통로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세 사람은 아예 줄을 설 필요도 없었다.성유리는 사실 이런 방식으로 아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필경 박한빈은 이제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오늘은 박한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늘이와 놀이공원에 오는 날일 것이다. 그렇기에 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이런 습관을 들이기가 싫었다.그러나 지금 하늘이는 너무도 흥분한 상태였고 오늘 같은 날씨에 밖에서 오랫동안 줄을 서는 것 또한 아이의 몸에 좋지 않기에 성유리는 꾹 참았다.놀이공원에 도착하고 제일 처음으로 박한빈은 하늘이와 함께 회전목마를 타러 향했다.그 회전목마는 중간에 분수까지 설치되어있어 어느 한 범위 안에 들어서면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하늘이는 비옷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놀이기구에서 내릴 때는 이미 앞머리가 젖어버린 상태였다.성유리는 아이의 몸에 묻은 물을 닦아내 주고 싶었지만 하늘이는 고개를 돌린 채 박한빈만 바라보며 말했다.“더 타고 싶어요!”“그래. 그러자.”박한빈은 주저도 없이 아이의 말에 동의했다.그러자 하늘이는 재빨리 성유리의 손을 잡아끌었고 박한빈은 그런 아이에게 다정히 말했다.“엄마는 힘든 것 같아. 아니면 나랑 둘이 갈래?”그의 말에 하늘이의 표정이 굳어져 버렸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기만 했다.성유리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자 하늘이는 망설임 끝에 박한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그는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엄마의 손이 아닌 처음으로 잡아보는 커다란 남자의 손에 하늘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아이는 주저하다 박한빈의 손이 아닌 그의 옷깃을 살짝 움켜잡았다.박한빈 또한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와 함께 전용 통로로 들어섰다.비록
하늘이는 박한빈을 힐끔 쳐다보다 다시 성유리를 쳐다보기를 반복했다.“회전목마.”그러던 아이는 결국 박한빈의 질문에 대답해 줬다.“회전목마만 좋아해? 후룸라이드나 바이킹은 놀아봤어? 롤러코스터는? 놀이공원에는 밤이면 공연도 하고 퍼레이드도 하는데 본 적 있어? 하늘이는 공주들이나 다른 만화 캐릭터랑 같이 사진 찍고 싶지 않아?”놀이공원에 관한 프로젝트 또한 박한빈은 해본 적이 있다. 그렇기에 한 번도 직접 놀이공원으로 향한 적은 없어도 각종 놀이기구나 시설, 공연 등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신바 좋아한다고 했지?”박한빈은 문득 하늘이가 늘 가지고 다니던 사자 인형이 떠올랐다.“거기 있는 무대에는 아마 신바도 있을 거야. 네가 원한다면 난 너를 데리고 그곳으로 갈 수도 있고.”비록 성유리는 지금 박한빈의 말이 내키지 않았지만 하늘이는 달콤한 그의 유혹에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다.아이의 친엄마인 성유리는 당연하게도 하늘이가 지금 박한빈의 말에 많이 흔들리고 또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특히 공연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난 하늘이의 눈은 전보다 더 반짝였다.필경 전에 몇 번 놀이공원으로 향했을 때, 시간이 안 맞아 한 번도 무대 위에서 하는 퍼레이드나 공연을 아이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건 하늘이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 게다가 박한빈이 말한 놀이기구들 또한 아이는 타보지 못했었다.왜냐하면 성유리가 그런 기구들을 타기를 즐기지 않기에 하늘이도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매번 포기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놀고 싶으면 내가 데리고 가줄게. 공연 완전 재밌거든? 아마 넌 본 적이 없을 거야.”하늘이가 망설이는 것을 눈치챈 박한빈은 계속해서 “미끼”를 던졌다.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봤고 그녀는 아이의 눈빛을 보고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솔직히 말하면 성유리는 내심 박한빈과 하늘이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그녀는 부녀 사이가 엄청 가까워지지는 못해도 적어
박한빈은 꿈속에 나타난 연정우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번쩍 떴다.꿈 내용이 너무 소름이 끼쳐서일까, 아니면 연정우의 등장에 놀라서였을까는 몰라도 박한빈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눈을 떠서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박한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스스로를 다독인 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방에서 나가자마자 박한빈은 하늘이와 딱 마주쳤다.이미 치마까지 갈아입고 머리도 예쁘게 땋은 하늘이는 자신의 물컵을 손에 든 채로 거실 소파에 앉아 성유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인기척이 들리자 아이는 바로 뒤를 돌아보았고 박한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그리고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박한빈은 만약 예전 같았으면 그런 하늘이를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조금 망설이던 그는 하늘이한테 천천히 다가가며 먼저 말을 걸었다.“지금... 나가려는 거야?”어린아이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박한빈은 지금 아무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해도 말투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그렇기에 그가 한 질문은 마치 경찰이 죄인을 조사하는 것처럼 들렸다.하늘이는 그런 박한빈을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네.”“어디 가는데?”박한빈이 또 물었다.“저도 몰라요.”아이의 대답에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차린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가 무슨 물음을 더 물어보려고 입을 움찔거리는 그때, 성유리가 방 밖으로 나왔다.그녀는 연한 색의 티셔츠와 하얀색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전과 달리 머리는 한껏 밑으로 묶어져 있었고 화장도 연하게 했다.최근 많이 야윈 성유리는 지금 벨트를 매고 입음에도 허리는 너무 얇아 살짝 밀면 부러질 것 같았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어디 가?”성유리는 먼저 하늘이를 자신의 뒤에 세워두고는 대답했다.“아이랑 같이 밖에 가서 놀아주려고요.”“어디 가서 놀아줄 건데?”박한빈의 계속되는 물음에 성유리는 인상을 썼지만 멈칫하다 결국 순순히 대답을 이어갔다.“놀이공원이요. 근데 저희
박한빈은 계속 성유리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추궁하기 시작했다.성유리는 그에게 떠밀리듯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등 뒤로 발코니의 유리문이 닿고 나서야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생각이 너무 많으신 거 아니에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제가 굳이 말하지 않은 건 그 일이 저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던 박한빈이 뚝 멈췄다.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그건 박한빈 씨와 안희연 씨 사이의 문제예요. 제가 관여하거나 평가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박한빈 씨 주변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당신 곁에 있는지는 저와 전혀 상관없고요.”그녀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이제 비켜주실래요?”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얼굴에 띠고 있던 모든 표정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 얼굴 어딘가에서 감정의 틈이나 흔적을 찾아내려는 듯 말이다.그러나 성유리에게서 보이는 표정은 아무것도 없었다.성유리는 여전히 담담하게 박한빈과 두 눈을 마주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이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돌려 그를 지나쳐 나가려 했다.그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내가 가도 된다고 말했나?”“이 손 놔요.”성유리의 목소리는 더 이상 차분하지 않았고 어딘가 지친 듯 낮고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그러나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왜 놔야 하지? 아이 수술 끝났으니 이제 나랑은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상관없다면 왜 여기 살고 있는데?”그 말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지만 금세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그런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면 제가 죄송해요. 박 대표님.”그러자 박한빈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저와 하늘이가 여기 머무는 건 박한빈 씨 어머니의 부탁 때문이에요.”성유리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어머니는 하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하늘이는 깜짝 놀라 온몸을 성유리 품에 안겼다.아이의 눈은 박한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는 하늘이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성유리를 응시했다.“나와.”그가 입을 열자 하늘이는 성유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엄마. 가지 마.”하늘이가 박한빈을 꺼리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진정으로 박한빈을 두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하늘이가 성유리를 꼭 붙잡고 있는 손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괜찮아. 엄마가 잠깐 일 보고 올게.”“싫어!"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떼를 부렸다.성유리는 문과 아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의 굳게 다문 입술과 굳은 표정은 날카롭고 위압적이었다.하늘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성유리의 손을 세게 붙잡았다.결국, 성유리는 옆에 있던 작은 사자 인형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여기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게. 알겠지?”하늘이는 여전히 싫다는 표정을 지었지 문 앞에 서 있는 박한빈을 보며 더 큰 두려움이 생겼는지 마지못해 성유리의 손을 놓았다.“엄마, 빨리 와. 나 무서워.”“알았어. 걱정하지 마.”성유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자 곧바로 뒤돌아섰다.두 사람은 그렇게 2층 거실의 발코니에 나란히 섰고 박한빈이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오늘 어디 갔었어?”성유리는 이 시간에 박한빈이 굳이 이런 식으로 찾아와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잠시 멍하니 서 있던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 씨랑 백화점 갔어요. 왜요?” “그다음은? 너 나한테 할 말 없어?”박한빈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그의 시선은 성유리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박한빈이 왜 이러는지 깨달았고 그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알게 되셨어요
그의 행동은 매우 빨랐다.어찌나 빠른지 사하나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받으려던 순간 손가락이 박한빈의 차 문에 끼일 뻔했다.그러나 박한빈은 사과 한마디 없이 운전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고 지시했고 그대로 떠나버렸다.사하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박한빈의 차를 향해 소리쳤다.“박한빈, 너 미쳤어? 감정 조절도 못 하는 미친놈!”“그래! 너 같은 놈이 그런 여자한테 배신당해도 싸지.”박한빈은 사하나의 말을 당연히 듣지 않았다.사실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차에 올라탄 후, 박한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안희연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그러자 안희연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박 대표님.”“오늘 성유리를 만났어?”박한빈은 안희연 앞에서 성유리라는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던 터였다.더군다나 그녀가 금성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모습을 감췄던 터라 성유리라는 이름은 안희연에게 낯설게 들렸다.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박한빈과 관련된 여자를 떠올리며 대상을 짚어낸 후 대답했다.“아뇨. 못 만났는데요.”“오늘 백화점에 갔다며?”“네.”“누구랑 같이 갔지?”안희연은 말이 없었다.그러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계속 물었다.“안희연, 우리 계약 관계에 대해서 내가 굳이 다시 설명해 줘야 하나?”“그런 거 아니에요. 박 대표님, 제가 다 설명할게요.”박한빈은 지금 그녀의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안희연이 급히 말했다.“그래서 그 성유리라는 분이 박 대표님에게 고자질한 건가요? 그렇다면 박 대표님께 아직 미련이 있다는 뜻 아닌가요?”안희연은 박한빈이라는 사람은 잘 모르지만 남자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난 몇 년간 라이브 방송에서 수많은 남자들을 보아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박한빈의 민감한 포인트를 정확히 짚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그러자 안희연이 계속 말했다.“박 대표님, 그 여자가 뭐라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