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성유리는 갑자기 이런 물음을 묻는 하늘이가 무척 당황스러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다 색칠 놀이에 필요한 색연필을 아이에게 건네주며 되물었다.“누구?”하늘이는 색연필을 건네받아 푸른 초원을 초록색으로 칠하며 말했다.“있잖아. 그... 그 남자.”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가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눈치챘다.“하늘이 아빠 말이야?”“응.”하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도 몰라. 근데 갑자기 아빠는 왜 찾는 거야?”전에 박한빈은 이곳에 자주 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하늘이도 박한빈의 존재를 굳이 신경 쓰지 않았고 가끔 마주친다 해도 피해버리거나 무서워 숨었었다.하지만 오늘, 하늘이는 갑자기 성유리에게 박한빈의 행방을 물었다.성유리는 하늘이를 뚫어져라 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아빠는 갑자기 왜 묻는 건데?”“아니야. 그냥... 물어보는 거야.”하늘이는 성유리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열심히 색칠하는 척했다.어찌나 힘을 세게 주어 색을 입혔는지 그림 종이는 이미 여러 군데 찢겨 있었고 성유리는 아이의 속내를 알아차렸다.“아빠 보고 싶어?”“아니.”하늘이는 주저하지도 않고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괜찮아.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되지.”성유리의 말에 하늘이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입을 열었다.“그럼 내가 너무 배신자 같잖아.”“배신자라니?”“내가 그러면 난 엄마를 배신한 사람이 되는 거야.”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가 그래?”“근데 그 남자는...”“엄마가 그랬잖아. 그 남자가 아니라 하늘이 아빠라고.”성유리가 단호한 목소리로 하늘이에게 계속 말했다.“만약 아빠가 아니었다면 하늘이는 이 세상에 올 수도 없었어. 그리고 하늘이 몸에는 아빠의 피가 흐르고 있어.”“그러니까 아빠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건 당연한 거야. 서로 이끌리고 끈끈하게 지내는 것도 아주 좋은 일이고. 이런 일로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어. 엄마는 절대 하늘
“왜 자리가 없겠니? 거실에 걸어두면 되지.”“그럼 이 집의 인테리어랑 너무 안 어울릴 것 같은데요.”“그게 무슨 대수라고! 우리 손녀가 직접 그려준 그림은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사.”김서영의 완강한 태도에 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그러나 김서영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하늘이를 보더니 물었다.“뭐 갖고 싶은 거 있니? 있으면 다 말해. 할머니가 사 오라고 말할 테니까.”“괜찮아요. 할머니.”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할머니, 저 이제 집에 가고 싶어요.”아이의 말에 김서영은 멍해졌다. 그러다 얼마 후, 그녀는 천천히 입을 뗐다.“집에 가고 싶다니? 지금도...”“아니요. 제 뜻은 경운시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에요. 저랑 엄마 둘이서만 사는 집.”하늘이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고 김서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성유리와 아이를 번갈아 보았다.김서영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성유리도 하늘이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성유리는 얼른 하늘이를 향해 돌아앉더니 물었다.“왜 그래? 왜 갑자기 돌아가려고?”“그럼 우리는 평생 여기서 사는 거야?”하늘이는 성유리를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계속 물었다.“민준 오빠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오빠를 못 본 지도 너무 오래됐잖아. 안 그래?”“하늘이 네 친구야? 그럼 할머니가 내일 하늘이 친구를...”말을 하던 김서영은 자신의 말이 너무 황당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이내 입을 꾹 닫았다.“할머니, 시간 있으면 언제든지 할머니 보러 올게요. 할머니도 우리 보고 싶으면 우리한테 와도 돼요.”잔뜩 당황한 성유리와는 달리 하늘이는 너무 진지하고 단호했다.결국, 김서영은 포기한 듯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럼... 병원 가서 한 번 더 검사받고 나서 다시 말하자. 저번에 의사가 언제 다시 오라고 했지?”“이번 주 금요일이요.”가만히 앉아 있던 성유리가 그제야 대답했다.“그럼 한빈이보고 데려다주라고 할까?”
성유리는 하늘이가 박한빈과 할 말이 있어서 지금 이런 부탁을 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조용히 자리 피해줘야겠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나 박한빈을 슬쩍 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병원 앞에 마침 편의점 하나가 있어 성유리는 하늘이를 위해 우유 한 개와 작은 케이크 하나를 구매했다.성유리는 하늘이가 박한빈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아 시간을 더 벌어주려고 계산을 마치고 나서도 병원 주위를 맴돌았다.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성유리가 올라갔을 때는 하늘이와 박한빈이 이미 대화를 마친 상태였다.두 사람은 조용히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성유리는 사실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가 자신의 이목구비와 아주 닮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나란히 앉아 있는 박한빈과 하늘이를 보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확신이 들었다.특히 두 사람이 입을 오므릴 때면 복사 붙여넣기를 하는 것처럼 매우 똑같았다.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엄마.”그녀를 발견한 하늘이는 눈까지 반짝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성유리는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하늘이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물었다.“배고파?”“응. 우유는? 우유 마시고 싶어.”“여기.”성유리가 빨대까지 꽂아주자 하늘이는 우유를 건네받고는 단숨에 들이키기 시작했다.그때, 박한빈이 두 명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검사 결과 나왔대. 내가 가서 볼게.”성유리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박한빈이 멀리 떠나가자 그제야 하늘이에게 물었다.“엄마가 없을 때 무슨 말 했어?”“누구랑?”“아빠랑 말이야.”“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하늘이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고 성유리는 피식 웃으며 아이의 귀를 살짝 잡고는 다시 물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엄마가 모를 것 같아?”하늘이는 고개를 숙여 우유만 마시며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하지만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은 하늘이의 모습에 성유리는 너무도 궁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차 안에는 적막만이 흘렀고 침묵하던 하늘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엄마, 나는 하나 이모랑 더 놀고 싶어.”“응.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자고 약속했어.”“연정우 아저씨도 와?”하늘이가 물었다.아이의 말에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박한빈을 슬쩍 쳐다보았다.다른 이유에서가 아닌 행여나 박한빈이 갑자기 화를 낼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운전만 했다.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아이는 잔뜩 신나 하며 말했다.“와! 너무 좋아. 난 연정우 아저씨랑 같이 노는 게 제일 행복해.”“왜?”“왜냐하면 정우 아저씨는 잘생겼거든. 그리고 아저씨는 엄마를 잘 보호해 줄 것 같아.”하늘이의 말에 운전만 하던 박한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조롱 섞인 눈빛으로 성유리를 쳐다보았다.성유리는 그의 눈빛을 애써 못 본 체했고 시선을 하늘이에게만 고정했다....성유리는 그날 저녁, 연정우와 밥 약속이 있었다. 필경 전에 갑자기 연정우와의 약속을 취소해 버린 죄가 있으니 말이다.게다가 곧 금성을 떠날 성유리기에 오늘 밤이 아니라면 아마 만날 기회가 더는 없을 것이다.하지만 성유리는 하늘이까지 데리고 그와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세 사람이 같은 장소에 있으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저번에 놀이공원을 가려고 한 날에도 성유리는 사실 사하나와 함께 가려고 약속을 한 상태였다.사하나는 성유리가 자신과의 약속을 깨고 박한빈과 함께 놀이공원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잔뜩 화가 나 씩씩거리기도 했다.그녀는 한결같이 성유리가 얼른 박한빈과 하늘이 사이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빨리 불필요한 관계를 끊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생물학적인 아버지라는 존재는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성유리가 누누이 말한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는 말 또한 사하나는 전혀 새겨듣지 않았다.사하나는 박
“내일 몇 시 비행기예요? 전 내일 바빠서 아마 공항까지는 못 데려다줄 것 같아요.”사하나는 말을 하면서도 연정우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녀는 지금 너무나도 티 나게 연정우에게 무언의 암시를 주고 있었다.연정우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사하나의 말에 대답했다.“그래요? 유리야,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몇 시 비행기야?”성유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그럴 필요 없어. 우리가 알아서 택시 타고 갈게.”“그래도 내가 데려다줄게. 다음엔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연정우는 성유리를 조금 원망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고 옆에 있던 사하나도 맞장구를 쳐줬다.“연 대표님 말이 맞아요. 성유리 씨? 이번엔 결정을 너무 빨리 내리신 것 같아요. 저희한테 반응할 틈도 안 주시고.”성유리는 두 사람의 말에 그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그때, 연정우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하늘이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건 아저씨가 주는 선물이야.”하늘이는 핑크색으로 정교히 포장돼 있는 선물 상자를 보고는 성유리의 눈치를 쓱 살폈다.성유리는 단번에 상자 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로고를 발견했는데 어린아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귀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이 선물을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하는 와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어머,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사하나가 먼저 뒤돌아 소리가 나는 쪽을 봤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음료를 뱉을 뻔했다.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한빈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던 안희연이었다.꽤 잘나가는 인플루언서인 안희연은 멀리서 봐도 자태가 아름다웠지만 금성에서는 내놓을 정도의 미모가 아니었다.그래서 사하나는 박한빈이 안희연이 바람을 피우는 사실을 알고 나면 당연히 그녀를 내팽개칠 줄 알았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안희연의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박한빈이었다. 그녀는 그의 팔짱을 꽉 끼고 있었는데
사하나는 그런 안희연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안희연 씨 맞으시죠? 전에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모습 본 적 있는 것 같아요.”“아, 그래요?”안희연은 그제야 사하나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환하게 웃으며 대답을 이어갔다.“사하나 씨 제 팬이신가 봐요?”‘팬? 누가? 별꼴이야. 정말!’사하나는 속으로 안희연을 몇 번이나 욕했지만 입 밖으론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그러다 감정을 추스르고는 입을 열었다.“팬은 아니고 그냥 몇 번 본 것뿐이에요. 근데 제가 알기론 남자 친구 있으시지 않았나요? 안희연 씨랑 친구라고 한 것 같은데.”“맞아요. 그렇지만 저희는 이미 헤어졌어요.”안희연은 사하나의 말을 깔끔하게 인정하며 계속 말했다.“이 시대에 연애 좀 하는 것도 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잖아요. 누구나 다 과거는 있는 법이죠. 안 그래요?”안희연은 성유리를 쓱 쳐다보며 이런 말을 했는데 마치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유리는 그저 박한빈의 과거일 뿐이라는 말을 전하려는 의도 같았다.그 모습에 겨우 화를 억누르던 사하나가 폭발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표정 관리를 못하던 사하나를 본 연정우는 먼저 술잔을 들며 말을 꺼냈다.“이제 보니 박 대표님이랑 이렇게 같이 식사하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이 기회를 빌어 제가 한 잔 따라드릴까요?”박한빈은 연정우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좋습니다.”두 사람은 그렇게 술잔에 가득 담긴 술을 단번에 마셨다.한잔, 두잔, 세잔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음주에 놀란 사하나가 낮은 소리로 성유리에게 말했다.“지금 이게 뭐 하는 거예요?”“혹시 누가 먼저 취하는지 붙어보려는 건가? 연 대표님 주량이 어떻게 돼요?”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뚫어져라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기만 했다.솔직히 말하면 성유리는 지금 두 사람이 이러는 게 너무 싫었다.
“이제 그만 마셔요. 너무 속상하니까!”성유리가 방에서 나왔을 때, 마침 사하니의 목소리를 들었다.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한 손으로 목을 꽉 잡은 채로 애써 안희연의 목소리를 따라 하고 있었다.원래부터 안희연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하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밥을 같이 먹다 보니 더더욱 안희연이라는 사람이 극도로 싫어졌다.성유리는 사하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먼저 물었다.“안희연 씨가 너한테 무슨 큰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싫어해?”“왜 싫어하냐고요?”그녀의 말에 사하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싫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저 연기하는 꼴 좀 보세요! 게다가 방금도 언니를 막 조롱하려고 했잖아요. 언니는 그저 박한빈 씨 과거 애인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밝히고 비웃은 거잖아요!”“어떻게 보면 정말 대단해요. 과거 일로 말하자면 저도 말할 게 많다고요. 전에도 막 다른 남자랑 쇼핑하고 호텔도 갔잖아요. 박한빈 씨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여자를 도대체 왜 좋아하는 거죠?”“언니, 내 생각엔 박한빈 씨가 일부로 저러는 것 같아요. 언니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저러는 게 분명해요. 그게 아니면 전 이해가 안 돼요. 좀 잇다 돌아가서 그 여자 얼굴 볼 생각만 하면 토 나온다니까요! 근데 언니는 왜 자꾸 저를 쿡쿡 찌르세요?”말문이 한번 트이기 시작한 사하나는 멈출래야 멈출 수가 없었다.그녀가 말하는 동안 성유리는 몇 번이나 끼어들려고 했지만 기회를 다 놓쳐버렸고 어쩔 수 없이 사하나의 손을 잡거나 쿡쿡 찔러야 했다.그러자 사하나는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을 한 채 미간을 찌푸리며 성유리를 쳐다보았다.성유리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뒤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하나는 순식간에 등골이 싸해졌다.뒤를 천천히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안희연이 미소 띤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전에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거나 욕을 하는 모습을 많이 봤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이
안희연은 아주 담담한 말투로 대답하며 두 눈으로는 사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자신의 아이큐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것 같은 안희연의 발언에 사하나는 화가 나 부들부들 떨었다.‘그러니까 박한빈 씨도 이런 식으로 달랬다는 거지?’사하나는 딱 봐도 거짓말인 안희연의 설명을 박한빈이 믿었다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만약 박한빈이 안희연을 믿어준 게 사실이라면 사하나는 박한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다.‘미친놈이 아니라 바보였나?’성유리는 사하나의 손을 재빨리 잡으며 안희연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그 순간, 안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성유리 씨, 저 할 말 있어요.”“뭐라고요?”사하나가 먼저 고개를 돌려 안희연을 당장이라도 때릴 듯 째려보며 말했다.“지금 본인이 뭐라도 됐다고 착각하시나 본데 당신은 저희랑 대화를 나눌 자격도 가치도 없는 사람이에요.”“사하나 씨, 저는 성유리 씨랑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그쪽이 아니라.”“저...”사하나는 치가 떨려 당장이라도 다가가 안희연의 머리채를 잡으려 했지만 성유리가 급히 말렸다.그리고는 안희연을 바라보며 차분히 물었다.“하실 말씀이 뭐죠?” “아, 네. 곧 경운시로 돌아가신다고요?” “네.” “정말 잘됐네요.” 안희연은 더욱 밝게 웃으며 계속 말했다.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박한빈 씨를 옆에서 잘 챙길 테니까.““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성유리는 아주 차 분한 어조로 대답했다.“두 분이서 만나시든 말든, 누가 누구를 챙기든 저랑은 이제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제가 경운시로 돌아가려는 이유 또한 당신들이랑 상관없고요.”그녀의 대답에 안희연은 말문이 막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성유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하나의 손을 잡고는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사하나는 기분이 많이 좋아졌는지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맞아요! 제가 바라던 게 바로 이런 거라고요. 언니 정말 멋졌어요! 오늘에서야 저는 비로소 알 것
“저 아직 밥도 못 먹었는데 같이 가서 식사 하시겠습니까?”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그러나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윤도준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박한빈이 멀리서 가볍게 손짓을 한 뒤 그대로 성유리를 차에 태웠다.이 차는 어제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차체는 마을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온통 흙탕물로 뒤덮여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차가 한참을 달린 뒤에야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엄마가 알게 되면 어떡해요!”“걱정 마십시오. 혹시 유리 씨한테 화를 내면 제가 가서 설명할 테니까.”“아마 엄마는 분명 당신을 때릴 거예요.”박한빈은 여전히 운전대를 잡은 채 성유리를 슬쩍 바라보았다.“왜요? 걱정되십니까?”“당연히 그건 아니에요.”성유리는 즉각 반박하더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당신...”놀란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가만히 있으세요. 지금 저 운전 중이니까.”“게다가 손에 아직 상처가 있습니다.”그 말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췄다.고개를 숙여 보니 그의 흰 셔츠 아래로 여러 겹의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리고 그 아래로 스며 나온 붉은 피가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아직 안 나았어요?”성유리는 무심결에 눈썹을 찌푸렸다.“걱정 마십시오. 안 아픕니다.”박한빈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런 그를 한참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그러나 박한빈의 손이 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이상한 감각이 퍼졌다.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더니 결국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읍내로 데려간 것은 단순히 밥을 먹고 장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그녀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가 자
할머니는 마을에서 작은 땅을 갖고 있었다.예전에는 옥수수를 심었지만 몇 년 전 이웃 마을에서 계약 농사를 제안하면서 딸기로 바꿨다.그러니 지금은 딸기 씨앗을 심을 시기였다.아침부터 소란을 피운 할머니를 성유리는 억지로 집에서 쉬게 하고 자신이 대신 밭일을 맡았다.일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다 보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쪼그려 앉아 씨앗을 심던 성유리가 잠시 눈을 감고 쉬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지금 뭐 하십니까?”고개를 들어보니 박한빈이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순간 얼어붙었고 이내 허둥지둥 그의 손을 밀어냈다.그리고는 황급히 몇 걸음 물러나 박한빈과의 거리를 벌린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저... 근데 왜 여기 계세요?”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절 무서워하시는 겁니까?”“아... 아니에요!”성유리는 서둘러 부정했다.마치 그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말이다.“다만... 엄마가 당신이랑 같이 있는 걸 싫어해요.”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엄마가 화낼 거예요.”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성유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왜죠? 그쪽 어머니는 제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네.”“하지만 유리 씨는 제가 나쁜 놈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요?”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을 따르는 겁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의 질문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냥 혼란스러운 건지 알 수 없지만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게다가 유리 씨가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모를 텐데 말이죠.”“그럼... 그건 속이는 거잖아요.”“속이는 게 아닙니다. 그냥 말하지 않는 것뿐이지.”성유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박한빈 또한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여기
박한빈은 많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환경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더구나, 이번에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창문 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누군가를 쫓아내고 있었다.이미 백발이 성성했지만 기운만큼은 넘쳤다.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몰아내는 동안, 마을 안팎 사람들이 소란에 놀라 몰려들었고 할머니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까지 싸잡아 한바탕 호통을 쳤다.그 뒤에는 성유리가 조용히 서 있었다.마치 어미 닭에게 보호받는 병아리처럼.주변을 궁금한 듯 둘러보면서도 절대 할머니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박한빈이 그 장면을 바라보던 순간, 성유리도 마침 그의 시선을 느낀 듯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려 할머니의 손을 붙잡았다.소동이 한참 이어진 끝에, 할머니는 성유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쾅!그 문이 닫히는 소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컸다.그러고 나서야, 할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겁먹지 마라. 저런 놈이 뭐라고!”“우리 딸처럼 좋은 아가씨가 결혼할 상대를 못 찾을 것 같아? 걱정 마. 엄마가 더 좋은 사람 골라줄 테니!”“엄마... 사실 저는 결혼 서두를 생각 없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말했다.“그건 안 돼!”할머니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랐다.“여자는 크면 시집가야 하는 법이야.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으면 어쩌자는 거냐?”“게다가 내가 지금은 네 곁을 지켜주지만 언젠가는 나도 떠나야 한다. 그때 네가 혼자 남으면 누가 널 지켜주겠어?”엄마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아직 화가 덜 풀린 할머니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하지만 문밖의 사람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안녕하세요.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이번엔 또 누구야?”할머니는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단정한 흰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
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황급히 돌아섰는데 마치 얼굴에 ‘당황’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은 듯했다.할머니는 가느다란 눈을 좁히며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다녀온 거야?”“저... 밖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서 좀 보고 오느라...”“고양이?”할머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이 마을에 고양이 몇 마리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해?”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할머니도 깊이 따지지는 않았다.“얼른 자라.”그저 짧은 말만 남긴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성유리도 조용히 뒤따라 방으로 향했다.그녀의 방 창문은 길 건너편 박한빈이 머무는 집과 마주 보고 있었다.그곳의 창문에는 어제 새롭게 창호지를 발라놓아 이제 더 이상 구멍이 나 있지 않았다.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빛 조명은 성유리의 방 조명과 똑같은 따뜻한 색이었다.성유리는 그 창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누워 잠을 청했다.그렇게 밤이 지나갔다.할머니는 원래 잠이 적었기에 해가 뜨기도 전에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침구를 정리한 후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계란을 깨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분명 할머니의 것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순간 긴장했다.그래서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나섰다.그러나 마주한 사람을 보고는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아주머니, 어쩐 일이세요?”“너희 어머니 계시니? 볼 일이 있어서 왔어.”여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아마 밭에 계실 거예요. 불러올까요?”“그래, 다녀와.”여자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그러더니 성유리를 한 번 훑어보곤,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별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마침 그 순간, 할머니가 밭에서 돌아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에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흠, 듣고 보니 꽤 재미있을 것 같군.”“그럼 이 일은 네게 맡길게.”“뭐라고?”“너도 알다시피 난 이미 죽은 사람이야. 그리고 사씨 가문 쪽도...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내가 직접 손을 대긴 어려워.”“예전부터 네가 한국 시장에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지금이 바로 기회 아닌가?”에릭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박한빈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이 마을 사람들은 일찍 잠드는 편이었다.지금은 사방이 조용했기에 그 작은 소리조차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왔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내려놓고 물었다.“누구십니까?”아직도 업무 모드였던 탓에 목소리에는 저절로 냉기가 서려 있었다.그랬더니 문밖에서 들리던 노크 소리가 멈췄다.하지만 대답은 없었다.불안해진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연정우 씨가 또 사람을 보낸 걸까?’그는 반사적으로 방 안을 둘러보며 무기로 쓸 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문밖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저예요.”박한빈은 순간 멍해졌다.그리고는 에릭이 뭐라고 하는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고 문 쪽으로 향했다.느슨하게 걸린 낡은 나무문을 밀어 열자 문 앞에는 성유리가 서 있었다.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 한 그릇이 들려 있었고 발치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물었다.어딘가 머뭇거리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는 이내 시선을 떨구며 덧붙였다.“저... 저녁을 드셨는지 몰라서요. 그리고 여기 불 때는 곳도 없길래... 그냥 면을 좀 끓였어요. 따뜻한 물도요.”박한빈은 그녀가 들고 있는 그릇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둔탁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마을에서는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윤도준이 일부러 사람들을 데려와 집을 정리해 준 덕분에 겨우 머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신호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다행히 박한빈은 집 안 구석구석을 돌며 신호가 잡히는 곳을 찾아냈고 마침내 에릭과의 통화를 연결할 수 있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에릭은 비꼬듯이 물었다.“난 또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네?”“실망시켜서 미안한데 난 아주 잘 살아 있었어.”박한빈이 대답했다.“난 안 좋아.”에릭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지금 회사 쪽에서 어떤 난리가 났는지 알아? 전부 나한테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 네가 전에 말했던 불편해서 직접 나서지 못한다는 말, 결국 다 핑계였잖아. 나보고 대신 뒤집어쓰라는 거였지?”“일이 끝나면 내 몫의 이익 절반을 넘기지.”박한빈이 제시한 그 금액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하지만 돈은 이미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나 다름없었다.그들이 하는 일에서 중요한 건 오직 짜릿함이었다.애초에 한 번에 일을 끝낼 수도 있었다.에릭은 심지어 축하 파티에서 마실 술까지 이미 골라 두었었다.그런데 갑자기 박한빈이이 모든 걸 멈추라고 했다.그 순간, 에릭은 마치 새벽녘 힘차게 울 준비를 하던 수탉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목을 눌린 듯한 기분이었다.숨이 막히고 무엇보다 기분이 몹시 나빴다.그때 박한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파티장에서 사고 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너를 급하게 건지러 가지 않았어도, 성유리는 애초에 위험에 빠지지 않았을 거야.”“뭐야? 지금 나한테 책임이라도 묻겠다는 거냐?”“책임을 묻겠다는 건 아냐. 다만 우리나라엔 이런 말이 있지. 한 방울의 은혜에도 샘물처럼 보답하라는 말.”“너...”“됐고, 본론부터 들어가자.”박한빈이 그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성유리를 찾았어.”“오, 그건 축하할 일이네.”그러나 에릭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기쁨도 담겨 있지 않았다.오히려 실망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그도 누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저희 또 만났네요.”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여기 사는 겁니까?”성유리는 묻는 남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여기 삽니다.”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네. 오늘 막 이사 왔거든요.”“아...”성유리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어딘가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런데 이 집, 꽤 오래됐어요. 비라도 오면 새는 곳이 있을지도 몰라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상했다. 정작 상대방의 이름조차 모르는 데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도 박한빈이 이곳에 산다는 말에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이 집과 그 남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그럼 그는 어디에 살아야 할까?성유리는 스스로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할머니는 박한한이 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 순간, 할머니의 표정이 확 변했다.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휘두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이 망할 놈아! 감히 내 딸한테 손을 대?”“어서 손 안 놔! 당장 안 놓으라고!”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엄마, 진정하세요. 그냥 얘기 좀 나누고 있었던 것뿐이니까.”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윤도준을 쫓아 몇 바퀴나 뛰었는지 이미 숨이 가빠져 있었다.그런데도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박한빈을 보는 시선엔 노골적인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엄마, 우리 들어가서 밥 먹어요.”성유리가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가 아직 노려보는 와중에도 성유리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그쪽도 오늘 새로 이사 온 이웃이에요.”그 말에 할머니의 주의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성유리의 엄마라고 주장하는 할머니는 박한빈을 다시 한번 훑어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
“설아?”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렸다.“네. 엄마, 왜 그러세요?”“그건 내가 물어볼 말이지.”할머니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성유리의 밥그릇을 탁탁 두들겼다.“밥 먹는데 무슨 넋을 놓고 앉아 있어?”성유리가 그 말에 재빨리 고개를 숙여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럼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오늘 일에 대해 생각하는 거지? 그 경찰들 다 헛소리 지껄이는 거야.”“어쨌든 결혼 날짜는 이미 정해졌으니 결혼식은 먼저 치러. 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 만큼 결혼하자마자 빨리 애 낳아. 내가 돌봐줄 수 있게.”“제가 누구랑 결혼해요?”성유리가 물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복섭이지! 예물도 이미 받았는데 뭘 더 바라?”할머니의 언성이 높아지며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그 모습을 본 성유리가 재빨리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그냥... 물어본 거예요.”“네가 지금 행복에 겨워서 정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예전에 다 정해진 일 아니었니? 게다가 너랑 복섭이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결혼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어?”“제가 우섭이랑 오래 사귀었어요?”“그럼! 너희 어릴 때부터 함께 목욕도 했잖아. 몇 년이 아니라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거야!”할머니의 말이 끝나가도 성유리는 아무런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가 애써 기억을 더듬으려는 순간, 머리가 격렬하게 아파지기 시작했다.고통을 무릅쓰고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밖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마을 길이 고르지 못해 차체가 격하게 흔들리며 지나가더니 성유리와 할머니가 앉아 있는 식탁 앞으로 먼지가 고스란히 날려왔다.그러자 할머니의 얼굴이 확 붉어졌고 젓가락까지 내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눈이 안 달렸냐! 밥 먹는데 먼지를 날리다니! 망할 놈의 새끼들아!”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 모르는 할머니의 욕설은 매 한 마디가 다 아주 더러운 말들이었다.마을 누구나 아는 할머니의 억척스러움은
“할머니, 보세요. 이게 바로 박한빈 씨의 아내 사진인데 여성분이랑...”“무슨 사진? 저 남자 아내가 생긴 거랑 우리 설이랑은 무슨 상관인데? 이 애는 내 딸이야!”“알겠습니다만 의혹이 제기된 이상 검사 한번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DNA 검사라도...”“DNA는 무슨 DNA! 너희들 다 미친 거 아냐? 내 딸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왜 남의 아내가 되냐고? 설아, 따라와!”할머니는 성유리의 손을 단호히 잡아끌며 몸을 돌렸다. 윤도준이 막 말을 걸려는 순간 박한빈이 오히려 그를 제지했다.“박한빈 씨, 이건...”“저 사람들 사는 마을이 어딥니까?”박한빈이 한없이 차가운 태도로 물었다.“네?”“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세상에 닮은 사람이 둘 있는 건 흔한 일이란 말을 누구나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확신했다. 자신이 틀릴 리 없다는 것을.그녀의 눈동자 깊이 스민 습관, 손가락을 깨무는 버릇까지 모든 게 36일 전 사라진 아내와 일치했다.사실 그는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갈 수도 있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만 한다면 설령 그녀가 저항해도 가장 가까운 신분으로 법적 조치가 가능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이 선택을 하기까지 결정했던 순간은 성유리가 노파의 품으로 달려가 엄마라고 부르는 모습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어린 시절 엄마에게서 느끼지 못한 가족의 온기를 이 할머니에게서 찾고 있음을.병상에 누워 생명이 사라져가는 엄마와 달리 옆에서 챙겨주는 노파의 따스함이 지금 성유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다.만약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간다면 그녀가 무조건 자신을 혐오하고 증오할 것이라고 믿었다.게다가 성유리를 데려간 사람들 또한 잘해주는 것 같았고 그녀 스스로도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가짜라고 한들 동년의 아쉬움과 공허한 마음 한구석을 채워주고 있으니 박한빈은 어쩌면 성유리에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당연하게도 염우섭이라는 남자의 존재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