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정말 우연이에요.”구승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고 옆에 있던 사하나는 갑자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장성 그룹의 연 대표님 아니세요?”“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사하나 씨.”연정우는 곧 손을 내밀어 사하나와 악수를 나눴다.사하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성유리를 향해 눈으로 무언가를 묻는 듯했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사하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이를 향해 물었다.“하늘아, 아저씨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아저씨가 병원에 나 보러 왔었어요.”하늘이는 진지하게 대답하며 덧붙였다.“이모, 아까 분수 보러 간다면서요?”“맞다! 그럼 가자, 분수 보러 가자!”사하나는 곧 하늘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성유리에게 말하며 눈짓을 보냈다.“하늘이랑 분수 보러 갔다 올게요. 두 분이서 편히 얘기하세요.”이 말을 끝으로 사하나는 하늘이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하늘이도 사하나의 행동에 맞춰 자연스럽게 움직였고 두 사람은 성유리가 말릴 틈도 없이 멀리 걸어가 버렸다.혼자 남겨진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연정우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딸이 엄마를 꽤 신경 쓰는 것 같네.”연정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고 성유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으며 대답했다.“농담하지 마. 아직 세 살도 안 됐는데 뭘 알겠어?”“아이들은 이런 문제에 굉장히 민감해. 방금 날 보고 무슨 질문 했는지 알아?”“무슨 질문 했는데?”“나한테 여자친구 있냐고, 혹시 여기 데이트하러 왔냐고 하더라고.”성유리는 순간 입가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분명 사하나가 하늘이에게 이런 말을 가르쳐 준 것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자신 몰래 얼마나 많은 장난을 쳤는지 알 수 없었다.“장난으로 한 말일 거야.”성유리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연정우에게 말했다.“너무 신경 쓰지 마.”“물론 아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지. 근데 그 장난이 생각보다 꽤 적절한 것 같아서.”연정우의 말 속에는 분명한 의미가
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고, 성유리는 몇 분간 누워 있다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우려 했다.박한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었다. 그래서인지 성유리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몇 번이나 잠옷 단추를 끼우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려 했지만 잘 안되었다.곧이어 박한빈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키가 훤칠한 데다가 이목구비까지 뚜렷해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방금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그의 복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성유리가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의 눈을 피하며 여전히 단추를 잠그려 애쓰고 있었다.“내일이 바로 유정이가 퇴원하는 날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퇴원 절차를 밟아주고 집에 데려와 줘. 어머님께는 한동안 여기에 머물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어.”성유리는 단추를 만지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지금 성유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2년째 부부로 지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자, 금성 지화 그룹의 후계자 박한빈이었다.그리고 방금 그가 말한 성유정은 성유리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었다.다섯 살 때, 성유리는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고 그렇게 16년 가까이 실종됐었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성씨 가문에 돌아왔을 때, 성씨 가문에는 이미 또 다른 딸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성유정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생’이 되었다.아버지는 성유리가 실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윤청하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비슷한 나이대인 성유정을 입양했었다. 16년이 지나고 성유리가 다시 성씨 집안에 돌아오고 서로를 그리워했던 한 가족이 다시 상봉하게 되었지만, 그 후의 날들은 예상만큼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원유진은 성유정의 오랜 친구이자, 재벌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유정과 함께 자라며 박한빈과 성유정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하지만 성유리가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이었기에 원유진은 성유리에게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성유리가 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거나 민망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오히려 성유정이 먼저 말을 돌렸다.“언니,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데리러 왔어. 짐은 다 챙긴 거지?”“다 챙겼어.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성유정은 평소처럼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원유진은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는 참지 않고 존댓말까지 해가며 비아냥거렸다.“사모님, 박 대표님은 어디 계신가요? 유정이가 퇴원하는데 설마 안 오셨어요?”“출근했어. 바쁜가 봐...”“정말 바쁜 거 맞아? 아니면 누군가가 바가지를 긁어대서 오고 싶어도 못 온 건 아닐지 모르겠네.”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유진아, 그만해.”그러나 원유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뭘 그만해? 듣고 양심에 찔리기라도 했을까 봐?”성유리는 원유진을 가볍게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박한빈의 번호를 찾아 원유진에게 내밀었다.“뭐 하는 거야?”성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야! 너...”원유진이 화를 내려고 하자, 성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언니랑 싸우지 마.”원유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넌 정말 착한 거니? 아니면 바보인 거니? 성유리는 네 것을 탐내고 채간 사람이야!”성유리는 원유진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정의 짐을 들어 앞장서서 병실에서 나갔다.차에 타자마자 윤청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리야, 유정이 데리러 갔어?”친딸과의 통화였지만 윤청하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색했다.“네.”“유정이는 좀 어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규
저녁 7시가 되자마자, 박한빈이 집으로 돌아왔다.성유정은 거실에 있다가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오빠, 이제 퇴근한 거야?”박한빈은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외투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말했다.“저녁 식사 준비됐어.”식사 중에 성유정은 먼저 조심스럽게 성유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오빠,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언니랑 오빠를 불편하게 하는 거라면... 사실 엄마한테도 혼자 있을 수 있다고 얘기했었거든... 그런데도 엄마가 걱정된다고...”박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편하게 지내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정말? 여기서 지내는 게 민폐가 되는 건 아니겠지?”“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정 씨가 여기 계시면 저희도 좋아요.”숙자 아주머니가 식탁에 음식을 올리며 말했다.“오랜만에 집이 북적여서 정말 좋네요!”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성유리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성유정처럼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에는 서툴렀다.숙자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집에서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은 성유리는 서둘러 밥을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난 먼저 올라가 볼게. 천천히 식사해.”“언니, 이거밖에 안 먹어?”성유정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내가 같이 올라가 줄까?”“괜찮아.”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천천히 먹어. 나는 괜찮아.”그 말만을 남기고 성유리는 식탁에서 멀어졌다. 다이닝룸을 벗어나기 전, 성유정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언니... 화난 것 같지 않아? 내가 와서 두 사람을 방해한 거야?”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과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박
성유리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팔에 힘을 주어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더 세게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거칠고 이기적이었다.성유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밖에 있는 성유정을 떠올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샤워기의 물소리 때문인지 문밖에 있던 성유정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큰 소리로 말했다.“오빠? 샤워 중이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노려보았다.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평소와 달리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조용하고 무기력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앙큼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후끈 달아올라 다시 그녀를 밀어붙였다. 마치 그 안에 쌓인 감정을 풀어내듯,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두 사람의 몸은 완벽하게 맞물렸고 성유리는 절정에 달아올라 숨이 멎을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문밖에서 성유정은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벽 쪽에 밀어붙였을 때,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그러자 문밖에서 들리던 성유정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그제야 성유리는 상황을 깨닫고 손을 꽉 쥐었다.바로 그때, 박한빈이 그녀를 들어 올렸고 그의 어깨가 성유리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했지만, 있는 힘껏 물지는 못하고 가볍게 입을 대었다가 떼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렇게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숙자 아주머니가 그녀를 깨우며 말했다.“오늘은 본가에 가는 날이
성유정은 박한빈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다. 그래서 박씨 가문의 본가에 대해선 성유리처럼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았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김난희에게 다가갔다.“할머니!”“아이고! 우리 유정이가 왔구나!”김난희는 매우 기뻐하며 성유정을 반겼다.“얼굴은 왜 또 야위었어?”“아니에요...”성유정은 웃으며 말했다.“이것 좀 보세요. 할머니 드시라고 제가 게살 완자를 만들어 왔어요.”“유정이는 어쩜 이렇게 착해? 정말 마음이 예쁘구나!”두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손녀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김난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그러나 성유리가 다가오자, 김난희의 표정은 조금 굳어졌다.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할머니.”김난희는 성유리를 보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는 눈을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어머님...”“아줌마, 잘 지내셨어요...”김서영이 나타나자, 원래 김난희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성유정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비쳤다.“유정 씨도 왔네. 환영해.”김서영은 그녀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반가움도 비치지 않았다.김서영은 김난희를 향해 인사했다.“어머님,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김난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서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성유정이 가져온 음식을 슬쩍 본 후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님은 요즘 소화가 잘 안되셔서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 할 것 같네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서영은 김난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바로 지시했다.“정식 씨, 이 음식을 주방으로 가져가세요.”김서영은 성유정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성유정이 주위의 호감을 쉽게 사는 재주가 있었지만, 김서영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김서영은 항상 차가운 모습을 유지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거리
박한빈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본가에 도착했다. 김난희는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미소 번진 얼굴로 그를 맞이하며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얼굴 좀 봐! 또 살이 빠졌네...”김난희는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결혼 전보다 더 말라 보이잖아. 네 아내는 대체 집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그 말은 성유리를 겨냥한 것이었다.성유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성유정이 나서서 말했다.“할머니, 언니를 오해하지 마세요. 언니는 정말 바쁜 사람이에요. 곧 새 만화가 출간된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 많이 야위었더라고요.”성유정은 성유리를 변호하는 듯 말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들렸다. 그녀의 가시가 돋친 말은 성유리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김난희는 성유정의 말을 듣고 더욱 불만스러워졌다.“만화라니? 또 그 하찮은 것들 하는 거야? 너는 애가 어쩜 그렇게...”김난희가 계속 잔소리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저녁 준비는 다 됐나요?”“한빈아, 너...”김서영이 곧바로 끼어들었다.“어머님, 한빈이는 이제 다 컸으니 자기 관리도 잘 할 거예요.”그 말에 김난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불만들을 삼켰다. 그러고는 성유정을 보며 말했다.“우리 유정이는 착하고 자기 사람도 잘 챙기고... 쟤가 다시 돌아오지만 않았었어도...”김난희도 아차 싶었던지 말끝을 흐렸다. 김서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겼다.“유리야, 부모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니?”“네. 아직이요.”“유정 씨가 너희 집에서 오래 머무는 것도 불편할 테니, 이참에 아예 본가에서 머물게 하는 게 어떨까? 유정 씨도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저는...”그러나 김서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게다가 내가 요즘 괜찮은 청년 몇 명을 알아봤거든. 편한 시간 알려주면 한번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아.”“그건 너무 이른
“오빠, 아까 도와줘서 고마웠어.”돌아가는 길에, 성유정은 뒷좌석에 앉아 계속 말을 이어갔다.“엄마가 내 결혼 이야기를 아줌마한테 꺼낼 줄은 정말 몰랐어. 정말 깜짝 놀랐잖아. 오빠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어쩔 줄 몰랐을 거야. 난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됐거든.”박한빈은 운전대를 잡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은 조금 무심해 보였지만, 성유정은 박한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성유리에게 말을 걸었다.“아참! 언니, 아까 아줌마랑 위층으로 올라가서 무슨 얘기 했어?”“별 얘기 아니야.”성유리는 마치 대화 자체를 피하고 싶은 듯 단호하게 답했다. 성유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래... 그렇구나. 언니, 그거 알아? 무열 오빠가 곧 귀국한대.”그 말에 성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마침 그 순간,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박한빈은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성유리는 앞으로 쏠리며 흠칫 놀란 듯해 보였다. 다행히도 안전벨트가 잡아주어 등이 다시 카시트에 닿게 되었다.박한빈은 곁눈질로 그녀를 한번 보았다.성유정은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말로는 무열 오빠도 해외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대. 두 사람은 그동안 연락은 안 했어?”“안 했어.”성유리는 눈을 내리깔고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참 안타깝네. 한때 서로의 전부였는데...”성유정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이번에는 박한빈을 힐끔 보았다.“오빠는 기억 못 하겠지? 무열 오빠는...”“알아. 진씨 집안의 혼외자잖아.”이번에는 박한빈이 빠르게 대답했다. 박한빈은 ‘혼외자’라는 단어를 쓰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성유리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성유정도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진씨 집안의... 그 아들... 예전에는 언니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절친이었지. 우리랑도 참 잘 지냈었는데... 나중에 말도 없이 해외로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정말 우연이에요.”구승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고 옆에 있던 사하나는 갑자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장성 그룹의 연 대표님 아니세요?”“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사하나 씨.”연정우는 곧 손을 내밀어 사하나와 악수를 나눴다.사하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성유리를 향해 눈으로 무언가를 묻는 듯했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사하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이를 향해 물었다.“하늘아, 아저씨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아저씨가 병원에 나 보러 왔었어요.”하늘이는 진지하게 대답하며 덧붙였다.“이모, 아까 분수 보러 간다면서요?”“맞다! 그럼 가자, 분수 보러 가자!”사하나는 곧 하늘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성유리에게 말하며 눈짓을 보냈다.“하늘이랑 분수 보러 갔다 올게요. 두 분이서 편히 얘기하세요.”이 말을 끝으로 사하나는 하늘이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하늘이도 사하나의 행동에 맞춰 자연스럽게 움직였고 두 사람은 성유리가 말릴 틈도 없이 멀리 걸어가 버렸다.혼자 남겨진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연정우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딸이 엄마를 꽤 신경 쓰는 것 같네.”연정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고 성유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으며 대답했다.“농담하지 마. 아직 세 살도 안 됐는데 뭘 알겠어?”“아이들은 이런 문제에 굉장히 민감해. 방금 날 보고 무슨 질문 했는지 알아?”“무슨 질문 했는데?”“나한테 여자친구 있냐고, 혹시 여기 데이트하러 왔냐고 하더라고.”성유리는 순간 입가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분명 사하나가 하늘이에게 이런 말을 가르쳐 준 것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자신 몰래 얼마나 많은 장난을 쳤는지 알 수 없었다.“장난으로 한 말일 거야.”성유리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연정우에게 말했다.“너무 신경 쓰지 마.”“물론 아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지. 근데 그 장난이 생각보다 꽤 적절한 것 같아서.”연정우의 말 속에는 분명한 의미가
아이들의 감정은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이다.누가 잘해주면 그 사람과 친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거리를 둔다.김서영은 언제나 친절한 태도로 하늘이를 대했다.하늘이를 볼 때마다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기에 하늘이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하지만 박한빈은 달랐다.첫 만남부터 하늘이에게 끔찍한 인상을 남겼고 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는 하늘이를 보며 웃은 적이 없었다.하늘이가 자신을 볼 때마다 박한빈은 항상 굳은 표정이었다.여기에 첫인상의 영향까지 더해져 하늘이가 그를 싫어하는 것도 당연했다.사하나는 정말 오랜만에 하늘이를 만났다. 그래서인지 오늘 두 사람은 유난히 들떠 있었다.식사를 마친 뒤 사하나는 하늘이를 데리고 게임센터로 향했다.사하나는 인형 뽑기 실력이 뛰어났다.두 사람은 가득 인형을 뽑아낸 후 그것들을 상가 입구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하늘이는 이런 일을 무척 좋아했다.하늘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인형을 나누어주는 틈을 타 사하나는 마침내 성유리에게 물을 수 있었다.“요즘 어떻게 지내요?”“뭐가?”“그러니까... 그 집에서 잘 지내고 있냐고요.”“응, 괜찮아. 하늘이도 잘 적응하고 있어.”“그럼... 한빈 씨랑 마주친 적은 없어요?”이 질문에 성유리는 잠시 멈칫했다.그러나 이제 와서 숨길 필요도 없기에 곧 고개를 끄덕였다.“봤어.”“정말요? 언제? 어디서? 어떤 태도였는데요?”사하나는 흥분한 듯 물었다.그러자 성유리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왜 그렇게 흥분해?”“나요? 흥분한 거 아닌데요? 나 흥분했어요?”사하나의 말에 웃음이 터질 뻔한 성유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오늘. 그 사람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어머님을 뵈러 왔더라고. 그래서 잠깐 얼굴을 보게 됐어.”“오늘... 잠깐, 방금 뭐라고 했어요?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다고요?”“예쁜 여자였는데 이름이 안... 뭐라고 했더라...”“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 자식 여자친구가 있다
이전에 그녀는 꽤 큰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득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하늘이는 이곳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처음에 김서영을 마주할 때는 다소 어색해했지만 며칠을 함께 지내다 보니 얼굴에 미소도 점점 늘었다.김서영을 볼 때마다 먼저 ‘할머니’라고 부르며 인사하기도 했다.또한 그녀는 하늘이에게 많은 장난감을 사줬다.하늘이는 모두 감사히 받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여전히 작은 사자 인형이었다.매일 그 인형과 떨어지지 않고 잠잘 때도 꼭 끌어안고 있었다.성유리가 물었다.“그거 예전에 네가 가지고 있던 인형이 아닌 거 알아?”하늘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아요. 전에 것도 정말 좋아했어요. 그런데 이건 그냥 지금 좋아하는 거예요.”단순한 말이었지만 그 속엔 또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했다.성유리는 순간 그 의미를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그때, 갑자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그 소리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하늘이는 궁금한 듯 물었다.“엄마, 도련님이 누구예요?”성유리가 대답하려던 순간 그가 이미 집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혼자가 아닌 옆에 낯선 여성과 함께 있었다.그날 마트에서 마주쳤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성유리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어차피 박한빈의 곁에는 늘 여자가 끊이지 않았으니 말이다.호기심 가득했던 하늘이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얼굴 표정이 굳어지더니 곧바로 성유리의 곁으로 달려와 그녀 뒤로 숨었다.그 순간, 김서영이 계단을 내려왔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어머니.”“안녕하세요, 어머님.”그의 옆에 있던 여성이 다가와 웃으며 인사했다.“저는 안희연이라고 합니다.”“반가워요.”김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어서 와요.”“사실 전부터 뵙고 싶었는데 한빈 씨가 어머님께서 조용한 걸 좋아하신다고 해서 방해가 될까 봐 못 왔어요.”“괜찮아요. 시간 되면 자주 놀러 오세요.”김서영은 이렇게 말하며 잠시
“감사합니다.”김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성유리는 주방에서 하늘이를 위해 간식을 준비하고 있었다.이 집에는 도우미도 있고 요리사도 있었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하늘이의 음식을 직접 만드는 걸 선호했다.새로운 환경이었지만 하늘이는 적응력이 뛰어나 아침에는 성유리와 함께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식사 때도 얌전히 먹었다.지금은 2층에서 혼자 낮잠을 자고 있었다.하늘이는 내내 조용하고 순종적이었다. 약을 먹을 때조차도 울거나 떼를 쓰는 일이 없었다.김서영은 그런 하늘이를 무척 좋아했지만 혹시 과도한 애정 표현이 하늘이를 놀라게 할까 봐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그러다 성유리가 잠시 짬을 내어 간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김서영은 참지 못하고 말을 건넸다.순간 멈칫하며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김서영을 바라보았다. 김서영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그러자 김서영이 대답했다.“하늘이를 정말 잘 키웠구나.”“저는 하늘이의 엄마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성유리가 담담히 말했다.“그리고 하늘이는 제 딸이니까 이런 말씀은 안 하셔도 돼요.”성유리는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를 분명히 선을 그었다.김서영도 성유리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겉으로는 이곳에서 살기로 동의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성유리는 상황을 역이용하려는 것이었다.그녀의 진짜 의도는 분명했다 하늘이가 더 나은 의료 혜택을 받도록 하는 동시에 자신과 박한빈 사이의 가능성은 이미 완전히 끝났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김서영은 자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이라도 시도해 봐야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뒷마당 과일이 곧 익을 것 같아요.”김서영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하늘이가 케이크 좋아하나? 나중에 과일 따서 케이크를 만들어주면 어떨까?”“하늘이는 케이크를 좋아하지만 망고는 싫어해요.”성유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딸기랑 초콜릿, 단 걸 더 좋아하죠.”“그렇군. 그럼 다음에 내가 사람을 시켜서...”“굳이 그러실
표정이 잠시 굳어지더니 성유리가 이내 말했다.“나... 하지만 하늘아, 너 지금 몸도 안 좋잖아. 우리...”“알아요.”하늘이가 말을 끊었다.“내가 몸이 안 좋으면 엄마가 더 힘들어질 거잖아요.”“그러니까 엄마 걱정 마세요. 그 사람 싫어도 저 얌전히 말을 들을 거예요. 하지만 아빠라고 부르고 싶진 않아요.”하늘이의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하늘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어쨌든 그 사람은 네 아빠야. 네게 생명을 준 사람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없었다면 엄마도 하늘이를 만나지 못했을 거야.”“아빠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싫어해도 괜찮아. 하지만 그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면 안 돼. 알겠니?”...그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하늘이의 상태도 빠르게 회복되었다.거부 반응도 거의 없었고 적혈구 수치도 빠르게 상승해 수술 한 달 후 성유리는 하늘이의 퇴원 수속을 밟았다.하지만 사하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정말 거기로 이사 갈 거예요?”“응.”“왜요? 굳이 거기 갈 필요가 뭐 있어요? 금성에 살고 싶으면 우리 집에 빈집 많으니까 하늘이랑 같이 살면 되잖아요.”성유리가 웃으며 말했다.“언제까지나 네게 의지할 순 없지.”“그게 뭐 어때서요? 언니랑 하늘이 정도야 내가 먹여 살리는 데 문제없어요!”“그래도 안 돼.”성유리가 단호하게 말했다.“그리고... 이미 약속한 일이기도 하고.”그러자 사하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근데 결국 수술받은 사람도 그 여자가 아니었잖아요. 게다가 그 어르신이 이렇게까지 한 데는 분명 뭔가 속셈이 있을 거예요.”“짐은 다 챙겼니?”사하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사하나는 깜짝 놀라며 급히 뒤를 돌아봤다. 마주한 건 환히 웃고 있는 김서영의 얼굴이었다.나이로 따지자면 사하나가 그녀를 어르신이라 부르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김서영의 모습은 그 호칭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최근 몇
그 순간, 성유리는 문득 자신의 엄마가 떠올랐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이식을 해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던 엄마가 아니라 지금도 병원에 누워 있는 엄마였다.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엄마가 자신을 구하려고 몸을 던졌을 때, 과연 후폭풍을 생각했을까? 엄마는 그 결과로 지금까지 혼수상태에 빠져 있지만 만약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선택했을 것 같았다. 지금의 자신처럼. 박한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일 따위는 지금의 성유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체면이나 존엄성, 심지어 목숨마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이가 살아남기만 하면 만족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그 이후 박한빈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단지 그가 떠나기 전, 그녀에게 한 장의 종이를 던져줬던 순간만 떠올랐다. 거기엔 박한빈의 서명이 적힌 수술 동의서가 있었다. 도대체 박한빈이 언제 서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 결국 박한빈이 원했던 건 자신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과 간절히 비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일찍 이걸 원한다고 말해줬더라면 이 오랜 갈등은 불필요했을 것이다.하지만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박한빈이 동의서에 서명하자마자 병원 측에서는 즉시 수술 준비를 시작했다.수술 팀은 박한빈이 직접 섭외한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진으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수술을 집도하는 주치의는 이 수술이 마치 일반 의사가 감기를 치료하는 정도로 간단한 일이라며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술 전날 밤, 성유리는 잠에 들지 못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반면, 하늘이는 아주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내일은 그냥 조금 길게 자는 날이라고 생각해. 깨어나면 천천히 건강해질 거야. 그러면 하늘이는 다른 건강한 친구들처럼 뛰어다니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수 있게 될 거야.” 그 말이 하늘이에겐 무
“그렇다 해도 지금은 네 말만으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어. 하지만 만약 내가 이 감정서를 보여주기만 하면 어머니가 서명한 수술 동의서는 바로 무효가 될 거야.”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얼굴에서 띠고 있던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분노 또는 슬픔, 아니면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나 놀랍다는 감정. 지금 성유리에게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그저 가만히 서서 마치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이 그를 응시했다. “왜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박한빈 씨, 당신은 정말 당신의 딸이... 죽는 걸 보고 싶어요?” 이 순간, 어떤 금기 따위도 그녀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건 단 하나, 끝없는 혼란뿐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박한빈이 하는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도대체 박한빈이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왜 하늘이에게까지 이런 잔인한 짓을 하려 하는지 모든 것이 이해가 안 갔다. 비록 박한빈이 하늘이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고 과거 성유리가 한 선택을 증오한다 해도 그것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하늘이는 분명 그를 아빠라고 불러야 할 존재였다. 그런데 박한빈은 그런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일까? “가슴 아파?”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오히려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 “성유리, 지난 2년 넘게 나는 매일매일 그렇게 살아왔어. 네가 나를 의심하던 그때도. 내가 아프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난 그 아이가 죽길 바라는 게 아니야. 난 그저... 네가 편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말은 깊은 저주처럼 그녀의 가슴에 뜨거운 쇠붙이로 쓴 낙인처럼 새겨졌다. 결국 성유리는 몰려오는 서러움을 견디지 못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재회 후, 처음으로 박한빈 앞에서 흘린 눈물이었다. 곰곰이 떠올려보면 성유
박한빈은 바로 병실 밖에 서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는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인 차림이었다. 한층 더 마른 듯한 모습에 날카로워진 얼굴선, 그리고 길고 큰 체격이 주는 강렬한 압박감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그런 분위기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차분히 그의 앞에 다가가 섰다.박한빈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언제 내 어머니까지 찾아간 거지?”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한빈은 목소리를 더 낮게 깔며 말했다. “내 어머니가 올해 연세가 얼마인지 알기나 해?” “알아요.” “그런데도 어머니에게 그런 수술을 하게 했다고?” 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하늘이가 몇 살인지도 아세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질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살 반, 정확히는 29개월하고 7일이요.” 성유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의사 말로는 지금이 치료의 최적 시기라고 하더군요. 박 대표님, 제가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전 그저 아이가 천천히...” 성유리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원래 그녀는 그런 금기를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일이 막상 자신의 아이에게 닥치자 그녀는 그런 미신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간 동안 성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많이 신께 기도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게다가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도 못했다. 박한빈은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게 네가 내 어머니를 강제로 수술하게 만든 이유라는 건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미안해요.” 성유리는 더 이상 설명할 생각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이미 수술 동의서는 작성되었고 아무도 박한빈에게 수술을 강요할 수 없듯 그 역시 어머니가 수술을 받지 못하게 막을 권리는 없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 성유리는 뒤돌아섰다. 그런데 그 순간, 박한빈이 말했다. “만약 내가 동의서
“얼마 전 뉴스에서도 본 것 같아. 지금은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고?” 김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하나 씨는 참 의리 있는 분이고 사씨 가문의 배경도 대단하지만 하늘이는 내 손녀야. 계속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고. 아마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겠지.” “그리고 수술 후에는 분명 재활과 회복에 시간이 필요할 텐데 금성의 의료 환경은 전국 최고 수준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게 최선의 선택일 거야.” “내가 사는 집은 너도 와봤잖아. 지금은 나랑 몇몇 가정부들만 있어서 아주 조용해. 걱정하지 마. 한빈이도 그곳에 자주 오지 않으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김서영의 말은 느리고 차분했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준비한 듯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이유를 풀어내며 성유리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성유리는 잠시 김서영을 주시하다가 물었다. “왜죠?” “뭐가?” “왜 저와 제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요?” “아까 말했듯이...” 성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죠. 진짜 이유는... 어머니가 저와 박한빈 씨 사이를 다시 이어보려고 이러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반박할 수는 없겠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내 또래 사람들 곁에 자식들과 손주들이 둘러싸인 모습을 보면 부럽더라고.” “혼자 산 시간이 너무 길어서 아이가 곁에 있으면 훨씬 활기찰 것 같아.” “그럼 만약...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면요? 수술을 거부하시겠어요?” “그럴 리 없지.”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하늘이는 내 손녀니까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제안일 뿐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준 제안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