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박한빈은 아무 내색도 안 하고 조용히 성유리에게 다가가 넥타이를 조금 풀어줬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살짝 닿자 서로의 온기 대신 무궁무진한 한기만 느껴졌다. 성유리는 이미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손을 움츠리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넥타이만 계속 만져댔다. “산부인과 가서 검사받아 보라면서요?”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계속 물었다. “언제 갈 건데요?” 박한빈은 아무 대답 없이 성유리를 내려다보았고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진 그녀의 눈빛을 발견했다. ‘어제는 원망이 가득 찬 눈빛이었는데.’ 성유리의 물음에 박한빈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대답했다. “나중에. 요즘 내가 좀 바빠서.” “저 혼자서도...” “안 돼.”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채 듣지도 않더니 몸을 숙여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맞추며 계속 대답했다. “원이야, 너도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내가 너한테 자유를 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럼 언제까지 저를 여기에 묶어두실 건데요?” “네가 정말 진심으로 이곳에 남고 싶을 때까지.” 박한빈은 성유리의 볼을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너는 날 속이고 있잖아. 난 다 알아.” “근데 괜찮아. 너한테 일일이 따지지 않을게. 난 단지 너한테 이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을 뿐이야. 왜냐하면 넌 절대 날 속일 수 없을 테니까. 알았어?” 성유리는 어떠한 대답도 없었지만 화가 나는지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박한빈은 이런 성유리의 모습에 흥미를 느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잘 쉬고 있어. 밥도 잘 먹고. 안 그러면 난 의사를 매일 불러 진정제 투여할 거야.” “너도 잘 알 텐데? 진정제도 결국 약물이니까 아이한테 큰 영향을 미칠 거야. 태어나면 기형아일 확률도 꽤 높고.” “걱정하지 마. 기형아라고 해도 난 낳으라고 할 거고 키울 거야. 최선을 다해 열심히. 근데 엄마라는 사람이 아이한테 문제가 생기면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성유리는 어제까지만 해도 후회막심했다. 크게 분노한
박한빈은 인주 프로젝트를 박세빈에게 넘겨주는 것에 동의했다. 게다가 박한빈은 이사회에서 박세빈의 능력을 추켜세워 주는 말까지 했다. 마치 아주 사이좋은 형제처럼 말이다. 박세빈은 박한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눈치였지만 회의에서는 그저 미소만 지으며 수긍했다. 회의가 끝난 뒤, 박한빈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고 그 뒤를 박세빈이 따랐다. “이게 다 인주 프로젝트 자료들이다. 전 대표님 쪽에서 이미 받아들였어. 경험도 많으시니 무슨 문제 생기면 나 말고 전 대표님께 물어봐.” “네. 감사합니다. 형님.” 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회사에서는 박 대표님이라고 불러.” “아! 네. 알겠습니다.” 이때, 성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박한빈은 박세빈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여보세요?” “한빈아.” 수화기 너머 성시원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많이 바쁘니?” 박한빈은 성시원의 목소리를 듣고 콧방귀를 꼈다. 당연히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공손하고 열정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박한빈이 사비로 성리 그룹의 큰 “구멍”을 막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성리 그룹은 정상적으로 파산 신청도 못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돈이나 재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필경 그에게 있어 돈이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성유리와의 혼인도 성사했으니 박한빈은 그 돈을 결혼자금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성리 그룹은 이미 지화 그룹의 부속 회사로 자리를 잡았지만 성시원은 요즘 매일같이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운 자원이나 프로젝트가 있는지 물어봤다. 성시원이 말하는 새로운 자원은 요즘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는데 기술적으로 필요한 문제가 많아 잘하는 집은 고작 몇 곳밖에 없었다. 나머지들은 그저 그들을 따라가며 남은 “찌꺼기”들을 주워 먹는 정도였으니 성시원이 이때 참여를 한다면 “찌꺼기”도 차려지지 않을 게 뻔했다. 박한빈은 성시원의 속셈을 알아차렸지만 별다른 말 없이 그
말을 마친 박한빈은 다시 통화를 끝내버리더니 망설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박한빈.” “그 싸구려 동생분이 요즘 또다시 슬슬 부활하려고 하던데요?” ... 성유리는 요 며칠 쭉 침대에만 머물렀다. 매일이다시피 침대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기에 성유리는 이미 시간관념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도대체 자신이 얼마나 이 방에 갇혀있었는지 짐작조차 못 했다. 요즘 박한빈도 아침 일찍 외출하고 저녁 늦게 돌아오니 성유리는 그의 얼굴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산부인과도 가야 한다는 일을 잊어버린 줄 알았지만 어느 날 깨어보니 그가 넥타이를 풀어주고 있었다. “깼어? 마침 내가 오늘 시간이 좀 있어서 너 데리고 병원 가려고.” 박한빈이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걸자 성유리는 멍해졌다. 그는 별다른 말도 없이 성유리를 묶고 있던 넥타이를 풀더니 그녀를 안고 아래로 내려갔다.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고 자신의 몸에 닿아있는 박한빈의 손을 떼어내고 싶었지만 이를 꽉 깨물고 참아냈다. 박한빈도 그런 성유리의 표정을 발견했지만 그녀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으니 그 또한 못 본척했다. 그가 말했듯이 아무리 어리석어도 상관이 없었다. 원한다면 박한빈을 속여도 그는 늘 하던 대로 할 생각이었으니까. 박한빈이 예약한 병원은 지화 그룹 명의로 돼 있는 개인 병원이었다. 의사에게 박한빈이 미리 말을 해놓았는지 그들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성유리는 바로 검사실로 향할 수 있었다. 박한빈은 조용히 그녀의 옆을 지켰고 의사가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아이가 아주 잘 크고 있네요.” “여기 이곳에 아기가 있어요. 보이세요?” 성유리가 의사의 말에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았지만 아기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작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곧 보이지도 않는 작은 아기라는 존재가 무럭무럭 클 것이라는
병원에서 나오자 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아침을 먹으러 향했다. 성유리는 이미 며칠 동안 밖에 못 나왔으니 햇살을 맞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박한빈과의 “거리”를 좁혔고 조용히 앉아 밥만 먹었다. “요즘 진무열 씨가 또 무슨 짓을 벌이는지 알아?” 박한빈이 밥을 먹는 성유리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그 물음에 잠시 주저하던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되물었다. “방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갇혀있었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을 비꼬려는 의도가 가득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일을 벌인 시간이 고작 하루 이틀은 아닐 거야. 너 몰랐어?” “몰라요. 저도 무열이랑 연락을 안 해봐서.” “그렇군.” 박한빈은 성유리를 떠보듯 계속 물었다. “그럼 요즘 진무열 씨가 뭘 하려는지도 안 궁금해?” 성유리는 말없이 박한빈을 쳐다만 봤다. “요새 네 아버지를 꼬드겨 새로운 프로젝트에 가입시키려고 하더라. 이미 계획안 검토했는데 생각보다 잘 만들었더라고.”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릴 뿐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30퍼센트의 수익률이라... 듣기만 해도 좋아 보이지?” 그때, 성유리가 문득 박한빈에게 말했다. “이거 사기 치는 거 아니에요?”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넌 네 아버지보다는 똑똑한 사람이야.” “성 회장님은 지금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야. 진무열 씨가 회장님을 끌어들이는 게 어쩌면...”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경청하다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박한빈 씨를 해하려고 그러는걸 까요?” 그녀의 물음에 박한빈은 웃으며 성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대답했다. “응. 역시 우리 원이가 제일 총명하네.” 성유리는 그의 손이 스치는 것도 극도로 혐오스러웠지만 이를 꽉 깨물고 참았다. “나한테 공격을 하는 거야. 근데 이건 너무 티가 나서 나는 걸려들지 않을 거고. 성 회장님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까?”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이
박한빈의 시선은 한동안 유아용품점에 머무르다 결국 성유리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아직 박한빈이 운전석에 제대로 앉지도 못했지만 성유리는 보기도 싫다는 듯 몸을 휙 돌리며 창밖만 쳐다봤다. 성유리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박한빈은 보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차가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성유리가 먼저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저 안 가둬두시면 안 될까요? 걱정마세요. 저도 아이한테 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아이는 죄가 없잖아요.” “박한빈 씨가 계속 저를 감금한다면 안 아프던 곳도 아파질 것 같아서요.” 성유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박한빈과 상의를 하려는 듯 말했다. “집에 있기 싫으면 안 있어도 돼. 앞으로 매일 너랑 같이 회사로 가면 되니까.” 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마치 자신이 어떤 말을 할지 예상이라도 한 듯한 박한빈에게 성유리가 물었다. “회사의 기밀이나 중요한 서류, 혹은 문서들을 제가 훔치면 어떡하시려고요?” 성유리의 물음에 박한빈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웃음에 담긴 의도를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절대 박한빈은 자신을 경쟁상대로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 아니더라도 박한빈이 보기엔 성유리가 아직 자격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에게 성유리는 지금 자신이 키우는 반려동물이나 식물로 보일 것이다. 성유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생각하다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앞으로 회사로 같이 출근하죠.” ... 전에 박한빈이 성유리를 들쳐 업고 회사로 온 다음부터 직원들은 그녀의 등장에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박한빈도 성유리를 완전히 방어하지 않는지 그녀가 소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그는 다른 사람과 업무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박세빈에 대한 조정도 이미 내려온지라 그는 요즘 전 대표와 함께 연성에서 인주 프로젝트를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제일 관건적
성유리의 힘은 많이 세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스킨십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래?” “어디 나가시려고요?” 성유리가 되물었다. “응. 건설 현장 쪽에 가보려고. 넌 지금 현장에 가면 안 될 것 같으니까 혼자 여기서 쉬고 있어.” “근데 저 너무 심심한데요. 영화라도 보고 싶어요.” 성유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이패드나 컴퓨터라도 주세요.”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없이 가만히 성유리만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눈빛은 마치 성유리의 몸을 관통하려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의 시선에 성유리가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유리에게 대답해 줬다. “그래. 노트북 가져다줄게.” 박한빈은 바로 방 밖으로 나가 노트북 하나를 성유리에게 가져다줬다. 성유리는 한눈에 그 노트북이 박한빈이 평소에 사용하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봤다. “여기서 웬만한 건 다 볼 수 있을 거야.” 박한빈은 노트북을 성유리에게 건네며 계속 말했다. “비밀번호는 똑같아. 유리 네 생일이야. 근데 너무 오래 보지는 마.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고.” “네.” 순순히 자기 말을 따르는 성유리를 박한빈은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 뒤돌아 방을 떠났다. 서훈은 이미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매일 들고 있던 노트북이 없어진 사실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박 대표님, 노트북 안 챙기십니까?” “유리한테 줬습니다. 새로운 데이터 하나 준비해 주세요.” 박한빈의 대답에 서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대표님, 그 안에는 중요한 데이터들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저도 압니다.” 박한빈은 여전히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내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박한빈은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아직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빛났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직
그러나 성유리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자세를 바꿔 잠을 청했다. 커튼까지 쳐져 있어 휴게실 안은 어두컴컴했기에 예상은 했지만 눈을 뜬 순간 성유리는 깜짝 놀랐다. “꺅!” 그녀의 비명에 그도 놀랐는지 뒤로 물러섰더니 휴게실 조명을 켜며 말했다. “나야.” 낮은 박한빈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금방 돌아왔는데 네가 너무 잘 자고 있어서 안 깨웠어.” 박한빈이 놀란 성유리를 진정시키며 계속 말했다. “배 안고파? 뭐 먹고 싶어?” 성유리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설을 꾹 참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배 안 고파요.” “케이크 하나 사 왔어.” 그녀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박한빈이 먼저 말했다. “저번이랑 같은 집에서 샀는데 이번엔 초콜릿 맛이야. 먹어볼래?” 박한빈은 주섬주섬 케이크를 꺼냈지만 성유리는 케이크를 보자 그날 밤이 떠올라 속이 메슥거렸다. 그날을 생각할 때마다 성유리는 자기 자신이 멍청하고 우스웠다. ‘박한빈 같은 사람을 철석같이 믿고 안쓰러워하다니... 내가 미쳤지.’ “별로 먹고 싶지 않은 거야?”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날 네가 케이크를 너무 잘 먹어서 좋아하는 줄 알고 샀는데 네가 안 좋아할 줄은 몰랐네.” 무슨 영문인지 성유리는 그의 말이 마치 자신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뭘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하게 성유리의 태도를 알고 싶은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성유리는 한참을 침묵하다 천천히 대답했다. “깬 지 얼마 안 돼서 케이크부터 먹으면 너무 물릴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럼 먹고 싶은 거 있어? 내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면 돼.” 성유리가 박한빈의 말에 고민하다 말했다. “쫄면이요. 먹어도 돼요?”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돼.” 그는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쫄면을 사 오라고 부탁했고 행여나 성유리 입맛에 맞지 않을까 봐 여러 곳에 들러 하나씩 사 오라는 말도 보탰다. “새
박한빈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하고 담담했다. 마치 성유리에게 슈퍼에 가서 아무거나 하나 사 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성유리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해갔고 한참 동안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거예요?” “응. 마침 그 사람이 너한테 못되게 굴었던 적 있잖아? 이번에 겸사겸사 복수도 해주는 셈이지.”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너 설마 그 사람한테 정이라도 남은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성유리는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조금 의외일 뿐이에요.” “그래. 그런 사람은 사실 동정할 가치도 없어.” 박한빈이 대꾸하며 케이크 상자를 열었지만 성유리가 손도 대지 않자 그는 스스로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성유리가 박한빈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음, 나쁘지 않은데.” 박한빈은 다시 한 숟가락을 떠 그녀에게 건네며 물었다. “한번 먹어볼래?” 성유리는 케이크 냄새에 약간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결국 케이크를 먹으려고 입을 벌렸다. “맛있어?” 박한빈의 입가엔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성유리는 억지로 먹더니 맛을 느낄 틈도 없이 빠르게 넘겨버렸다. 그러나 박한빈이 끈질기게 맛을 물어보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박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다음에 이걸로 다시 사 줄게.” 그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이어갔다. “아참, 아침에 봤던 그 유아용품 가게 있잖아. 저녁에 한 번 들러서 구경해볼까? 필요한 것도 좀 사두고. 아직 이른 감은 있지만 앞으로 바빠질 수도 있으니까 시간 있을 때 같이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성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박한빈의 의견을 따르기도 결정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한빈은 무슨 말을 더 말하려 했지만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 소리에 성유리의 시선이 자연스레 휴대폰 화면으로
“얼마 전 뉴스에서도 본 것 같아. 지금은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고?” 김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하나 씨는 참 의리 있는 분이고 사씨 가문의 배경도 대단하지만 하늘이는 내 손녀야. 계속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고. 아마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겠지.” “그리고 수술 후에는 분명 재활과 회복에 시간이 필요할 텐데 금성의 의료 환경은 전국 최고 수준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게 최선의 선택일 거야.” “내가 사는 집은 너도 와봤잖아. 지금은 나랑 몇몇 가정부들만 있어서 아주 조용해. 걱정하지 마. 한빈이도 그곳에 자주 오지 않으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김서영의 말은 느리고 차분했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준비한 듯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이유를 풀어내며 성유리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성유리는 잠시 김서영을 주시하다가 물었다. “왜죠?” “뭐가?” “왜 저와 제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요?” “아까 말했듯이...” 성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죠. 진짜 이유는... 어머니가 저와 박한빈 씨 사이를 다시 이어보려고 이러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반박할 수는 없겠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내 또래 사람들 곁에 자식들과 손주들이 둘러싸인 모습을 보면 부럽더라고.” “혼자 산 시간이 너무 길어서 아이가 곁에 있으면 훨씬 활기찰 것 같아.” “그럼 만약...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면요? 수술을 거부하시겠어요?” “그럴 리 없지.”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하늘이는 내 손녀니까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제안일 뿐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준 제안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깨어난 성유리는 먼저 하늘이를 보러 갔고 김서영은 그녀를 따라 아이의 병실까지 향했다. 하지만 성유리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경계심을 느꼈던 걸까, 김서영은 쉽게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하늘이를 처음 보는 날인데 서둘러 오느라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걸려 병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지만 결국 끝까지 들어서지 않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아직 어린아이의 티가 묻어 있었다. 김서영은 그 소리를 듣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문틈으로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이의 작은 뒷모습과 동글동글한 머리와 하얀 팔이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하늘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 같았다. 하늘이의 실물을 본 김서영의 시선은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그때, 병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성유리가 나왔다. 그녀는 방금 맞고 있던 수액 바늘을 뽑으려 했으나 사하나의 강한 만류로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는 아직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자신의 병실로 돌아온 뒤에야 성유리가 먼저 김서영에게 물었다.“이건 오늘 내가 막 받은 결과야.” 김서영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성유리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성유리는 서류에 적힌 조합 일치라는 몇 글자를 보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어 김서영을 바라보았고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자 김서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맞아, 이건 나와 아이의 조합 결과야.” “언제부터... 이렇게 준비하신 거예요?” 성유리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전에 한빈이한테 얘기 들었어. 물론 나도 한빈이의 결정에 극구 반대했지만 걔 몸은 결국 본인의 것이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그가 내린 결정을 어머니인 나조차 강요할 수 없었어.”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손녀잖아. 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이고 유리 네가 그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어. 그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하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더 깊이 성유리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대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박한빈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한빈의 침묵은 성유리의 숨통을 정확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며 모든 것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쥐락펴락하는 것이 바로 전부터 박한빈의 특기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유리를 가장 아프게 만들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걸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다. 사하나는 그녀 곁에서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미 잠들어있는 하늘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아직 너무도 작고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라면 성유리는 아이가 점점 쇠약해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성유리 씨! 유리 언니.” 사하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대답을 듣지 못한 그녀는 성유리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한없이 깊은 어둠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성유리는 끝없이 긴 길을 걷고 있었다.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눈앞은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멈춰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멈출 수 없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앞에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성유리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디에서인가 나약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졌고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 그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여전히 안개는 짙었고 그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성유리는 안개를 걷어
성유리의 말을 들은 사하나는 눈에 띄게 멍해졌다. 그녀는 성유리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듯했고 몇 초가 지나서야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수술을 받고 싶지가 않대.” 성유리는 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말에 사하나는 즉시 이어폰을 벗으며 외쳤다. “박한빈 씨 정말 제정신이에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병상에 누워 있던 하늘이를 깨웠다. 깨어난 하늘이는 졸린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 성유리는 급히 하늘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가 너 깨웠니? 미안해.” 하늘이는 성유리와 사하나를 다시 번갈아 보았다. 그때 이미 사하나의 얼굴은 화가 나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 엄마랑 이모 싸웠어?” 하늘이가 물었다. “아니야. 그냥 이야기한 거야. 괜찮으니까 하늘이는 다시 자면 돼.” 성유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하늘이의 뺨을 쓰다듬어줬다. 하늘이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다른 이야기를 막 하며 아이의 주의를 돌렸다.성유리가 오랜 시간 달래고 나서야 하늘이는 다시 잠들었고 그제야 사하나는 숨을 고르고 조금 진정된 상태로 말했다. “솔직히 전 전혀 놀랍지 않아요.” 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그 사람 애초부터 아버지다운 면모가 없었잖아요. 언니가 아이를 낳을 때도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인데. 그리고 지금까지 아이가 아프다고 몇 번이나 보러 왔어요?” “박한빈 씨가 예전에 적합성 검사를 받아준 것도 병원 사람들 입을 막으려고 한 거였겠죠. 검사가 적합하지 않게 나왔더라면 그는 여전히 멋진 아버지 이미지를 유지했을 거예요. 하지만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오니까 그냥 도망친 것 같아요.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이제 와서 언니가 찾아가니까 대놓고 거부하잖아요. 이런 세상에 미친 놈을 봤나! 자기 아이를 위해 수술을 거부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게 말이 돼요? 하늘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태어났을까요?” 사하나는 최대
“자기 친자식을 미워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아이가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시겠다고요?” “그래. 내가 그 말을 했었지. 하지만 분명히 말할게. 난 이 수술 못 하겠어.” 박한빈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지금 성유리에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성유리의 말이 맞다. 박한빈은 약속을 어겼고 말한 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병원 규정에 따르면 반드시 본인이 병원에 와서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결정권은 박한빈에게 있었으니 그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의 손을 강제로 잡아 서명하게 만들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성유리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박한빈이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자기 아이가 정말로 위험에 처했을 때 그걸 눈 뜨고 지켜보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정말로 그런 냉혈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이미 목구멍이 꽉 막혀버린 것 같았다. “박한빈 씨, 전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 오히려 네가 날 미워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거든.”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막지 않았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다. 이 사실 또한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 박한빈이 성유리를 미워하듯 그녀 또한 그를 미워했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성유리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몰랐기 때문에. 하늘이는 여전히 병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의사들은 희망적인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이미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 의사들 눈에는 동의서 서명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박한빈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박한빈은 자신을 억제해 왔다. 결국 버림받은 사람은 그였으니까. 버려진 사람이 다시 상대를 붙잡고 이유를 묻는 것은 실패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에 재회한 이후 그는 한 번도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국 참지 못했다. 성유리가 직접 말해주는 정답이 너무 궁금했고 진심으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유리의 과거 행동들은 박한빈에게 너무도 모순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고생하고 싶지 않다며 떠났지만 정작 그의 물건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박한빈이 그때 성유리에게 해준 선물들은 아주 많았다. 그중 단 하나만이라도 가져갔다면 평생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유리가 말한 이유는 단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한 핑계였던 걸까?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한빈은 간절하게 답을 알고 싶어 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향했고 성유리는 잠시 그의 시선을 마주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는 제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어요.” “뭐라고?” “혼자였다면 당신과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를 당신 때문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성유리는 조용히 진실을 말했다. 그건 극적이거나 박한빈이 상상했던 불가피한 사연 같은 것도 아니었고 답은 그저 이렇게 간단했다.하지만 이 간단한 답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박한빈의 마음을 꿰뚫었다.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던 박한빈의 손에 힘이 천천히 풀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성유리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하늘이는 저에게 너무도 소중해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저는 모든 걸 버릴 수 있어요.” “알겠어. 그래 보이네.” 박한빈은 여전히 피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때는 주저 없이 나를 떠나고 이혼했겠지. 지금은 나랑 잠자리를 해서라도 동의서를 얻어내려는 거고.” 성
하지만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를 무시한 채 뒤돌아섰다.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당연히 그가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성유리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건 제 잘못이에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간절함이 더 묻어나 있었다.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아이는 아무 죄가 없잖아요. 제발...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성유리는 행여나 박한빈의 심기를 또 건드릴까 신중히 단어들을 선택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성유리는 이곳에서 박한빈의 시간을 조금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성유리도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은 사실 그녀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박한빈은 그녀가 무릎을 꿇고 굴욕적이게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기를 바랐다.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쳐다봐줬다. 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잡아 억지로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고 그렇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성유리의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한층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잠시 성유리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야.” 그의 말은 성유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는 한동안 마음을 다잡은 뒤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성유리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고 그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그녀의 눈빛은 박한빈이 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이 조금 담겨있
박한빈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성유리가 카드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들며 말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이번 거래 조건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보는 게 어때요?”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쳐다보았다. “이건 수술 동의서예요. 먼저 서명해 주세요.” 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 지난번 그는 자신이 약속한 적 없다고 했을 때 성유리는 반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행여나 같은 일이 반복이 되는 것이 두려운 성유리는 이번에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했다. 박한빈은 철저한 사업가였으니 결국 눈앞에 놓인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동의서 외에도 또 다른 계약서를 준비했는데 그 계약서에는 그들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계약서에 똑똑히 이런 문구를 적었다.자신이 박한빈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지만 그 조건은 하늘이가 회복되는 기간 동안에만 작용을 한다는 문구.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하늘이가 건강을 되찾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즉시 종료되며 앞으로는 아무런 관련도 없게 된다.] 계약서의 조항은 간단하지만 지나치리만큼 직설적이었다. 이 문서가 만약 언론에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둘 모두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거래의 도구로 내놓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박한빈은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조용히 서류만 주시하고 있었다. 짧은 몇 줄의 문장이었기에 그는 이미 내용을 다 읽었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바라봤다. “박 대표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제야 박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성유리는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단지 분풀이일 뿐일 거야.”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말했다. “나에게서 받은 좌절과 실망감을 이제 와서 나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제가 보기엔...” “만약 그 사람이 정말로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일을 가지고 나를 협박하진 않았을 거야.”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그의 말에 따르고 있는 것도 하늘이가 수술받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야. 이런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니 사하나, 나와 그 사람은 정말로 끝난 사이야.” ... 어느새 밤이 다시 찾아왔다.솔직히 말해서 성유리는 이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박한빈에게서 어떤 메시지가 올까 걱정했고 동시에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어쨌든 박한빈은 아직까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전날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뉴스에서는 전날 밤 박한빈이 어떤 연회에 참석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진 속 박한빈의 옆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화장이 조금 달라졌지만 성유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와 함께 마트에 갔던 여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유리에게 있어 함께 마트로 향하는 일은 꽤 친밀한 행위로 느껴졌다. 둘이 함께 살지 않는다면 마트에서 함께 필요한 물건을 고르며 자신들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일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박한빈은 항상 바빴다. 그의 옷은 계절마다 고급 맞춤 팀에서 직접 저택으로 보내졌고 생활용품 같은 사소한 물건에 시간을 쓰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낭비라는 것도 박한빈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어떤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을 하든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