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사람들의 예상보다 도도하지 않았다. 적어도 대화에 있어선 상대가 무슨 말을 하던 하나하나 다 성의 있게 대답했다.누군가 다음번에 함께 전시회를 보러 가자거나 음악회를 들으러 가자고 제안하면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며 흔쾌히 응했다.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불편해하고 침묵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홍지은이었다.결국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그녀는 간단히 양해를 구한 뒤,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세면대 앞에 선 홍지은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 안의 물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그제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성유리가 왜 자신을 도와 거짓을 꾸며줬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얼마 전까지 신영지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상대는 여전히 그녀와 성유리의 관계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그래서 남편 측과의 협력도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성유리가 어떤 의도로 이 일을 했든 간에 자신이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이제 남은 건, 성유리를 얼마만큼 이용할 수 있는가 뿐이었다.홍지은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성유리였다.둘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성유리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온화하고 따뜻했다.그러나 홍지은은 순간적으로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리고는 곧바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그 질문에 성유리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뭐 하려는 거냐고요?”“왜 나를 도와서 저 사람들에게 잘 보이게 해준 거냐고.”“전 도와준 적 없어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그저 지난번 경매장에서... 너무 죄송해서 그랬던 것뿐이에요.”“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홍지은은 성유리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계속 물었다.“네가 뭐가 미안한데? 지금 박한빈 씨가 온 신경을
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고, 성유리는 몇 분간 누워 있다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우려 했다.박한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었다. 그래서인지 성유리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몇 번이나 잠옷 단추를 끼우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려 했지만 잘 안되었다.곧이어 박한빈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키가 훤칠한 데다가 이목구비까지 뚜렷해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방금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그의 복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성유리가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의 눈을 피하며 여전히 단추를 잠그려 애쓰고 있었다.“내일이 바로 유정이가 퇴원하는 날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퇴원 절차를 밟아주고 집에 데려와 줘. 어머님께는 한동안 여기에 머물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어.”성유리는 단추를 만지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지금 성유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2년째 부부로 지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자, 금성 지화 그룹의 후계자 박한빈이었다.그리고 방금 그가 말한 성유정은 성유리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었다.다섯 살 때, 성유리는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고 그렇게 16년 가까이 실종됐었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성씨 가문에 돌아왔을 때, 성씨 가문에는 이미 또 다른 딸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성유정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생’이 되었다.아버지는 성유리가 실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윤청하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비슷한 나이대인 성유정을 입양했었다. 16년이 지나고 성유리가 다시 성씨 집안에 돌아오고 서로를 그리워했던 한 가족이 다시 상봉하게 되었지만, 그 후의 날들은 예상만큼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원유진은 성유정의 오랜 친구이자, 재벌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유정과 함께 자라며 박한빈과 성유정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하지만 성유리가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이었기에 원유진은 성유리에게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성유리가 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거나 민망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오히려 성유정이 먼저 말을 돌렸다.“언니,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데리러 왔어. 짐은 다 챙긴 거지?”“다 챙겼어.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성유정은 평소처럼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원유진은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는 참지 않고 존댓말까지 해가며 비아냥거렸다.“사모님, 박 대표님은 어디 계신가요? 유정이가 퇴원하는데 설마 안 오셨어요?”“출근했어. 바쁜가 봐...”“정말 바쁜 거 맞아? 아니면 누군가가 바가지를 긁어대서 오고 싶어도 못 온 건 아닐지 모르겠네.”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유진아, 그만해.”그러나 원유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뭘 그만해? 듣고 양심에 찔리기라도 했을까 봐?”성유리는 원유진을 가볍게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박한빈의 번호를 찾아 원유진에게 내밀었다.“뭐 하는 거야?”성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야! 너...”원유진이 화를 내려고 하자, 성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언니랑 싸우지 마.”원유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넌 정말 착한 거니? 아니면 바보인 거니? 성유리는 네 것을 탐내고 채간 사람이야!”성유리는 원유진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정의 짐을 들어 앞장서서 병실에서 나갔다.차에 타자마자 윤청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리야, 유정이 데리러 갔어?”친딸과의 통화였지만 윤청하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색했다.“네.”“유정이는 좀 어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규
저녁 7시가 되자마자, 박한빈이 집으로 돌아왔다.성유정은 거실에 있다가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오빠, 이제 퇴근한 거야?”박한빈은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외투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말했다.“저녁 식사 준비됐어.”식사 중에 성유정은 먼저 조심스럽게 성유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오빠,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언니랑 오빠를 불편하게 하는 거라면... 사실 엄마한테도 혼자 있을 수 있다고 얘기했었거든... 그런데도 엄마가 걱정된다고...”박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편하게 지내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정말? 여기서 지내는 게 민폐가 되는 건 아니겠지?”“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정 씨가 여기 계시면 저희도 좋아요.”숙자 아주머니가 식탁에 음식을 올리며 말했다.“오랜만에 집이 북적여서 정말 좋네요!”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성유리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성유정처럼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에는 서툴렀다.숙자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집에서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은 성유리는 서둘러 밥을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난 먼저 올라가 볼게. 천천히 식사해.”“언니, 이거밖에 안 먹어?”성유정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내가 같이 올라가 줄까?”“괜찮아.”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천천히 먹어. 나는 괜찮아.”그 말만을 남기고 성유리는 식탁에서 멀어졌다. 다이닝룸을 벗어나기 전, 성유정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언니... 화난 것 같지 않아? 내가 와서 두 사람을 방해한 거야?”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과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박
성유리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팔에 힘을 주어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더 세게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거칠고 이기적이었다.성유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밖에 있는 성유정을 떠올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샤워기의 물소리 때문인지 문밖에 있던 성유정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큰 소리로 말했다.“오빠? 샤워 중이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노려보았다.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평소와 달리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조용하고 무기력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앙큼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후끈 달아올라 다시 그녀를 밀어붙였다. 마치 그 안에 쌓인 감정을 풀어내듯,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두 사람의 몸은 완벽하게 맞물렸고 성유리는 절정에 달아올라 숨이 멎을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문밖에서 성유정은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벽 쪽에 밀어붙였을 때,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그러자 문밖에서 들리던 성유정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그제야 성유리는 상황을 깨닫고 손을 꽉 쥐었다.바로 그때, 박한빈이 그녀를 들어 올렸고 그의 어깨가 성유리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했지만, 있는 힘껏 물지는 못하고 가볍게 입을 대었다가 떼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렇게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숙자 아주머니가 그녀를 깨우며 말했다.“오늘은 본가에 가는 날이
성유정은 박한빈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다. 그래서 박씨 가문의 본가에 대해선 성유리처럼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았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김난희에게 다가갔다.“할머니!”“아이고! 우리 유정이가 왔구나!”김난희는 매우 기뻐하며 성유정을 반겼다.“얼굴은 왜 또 야위었어?”“아니에요...”성유정은 웃으며 말했다.“이것 좀 보세요. 할머니 드시라고 제가 게살 완자를 만들어 왔어요.”“유정이는 어쩜 이렇게 착해? 정말 마음이 예쁘구나!”두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손녀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김난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그러나 성유리가 다가오자, 김난희의 표정은 조금 굳어졌다.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할머니.”김난희는 성유리를 보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는 눈을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어머님...”“아줌마, 잘 지내셨어요...”김서영이 나타나자, 원래 김난희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성유정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비쳤다.“유정 씨도 왔네. 환영해.”김서영은 그녀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반가움도 비치지 않았다.김서영은 김난희를 향해 인사했다.“어머님,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김난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서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성유정이 가져온 음식을 슬쩍 본 후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님은 요즘 소화가 잘 안되셔서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 할 것 같네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서영은 김난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바로 지시했다.“정식 씨, 이 음식을 주방으로 가져가세요.”김서영은 성유정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성유정이 주위의 호감을 쉽게 사는 재주가 있었지만, 김서영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김서영은 항상 차가운 모습을 유지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거리
박한빈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본가에 도착했다. 김난희는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미소 번진 얼굴로 그를 맞이하며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얼굴 좀 봐! 또 살이 빠졌네...”김난희는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결혼 전보다 더 말라 보이잖아. 네 아내는 대체 집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그 말은 성유리를 겨냥한 것이었다.성유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성유정이 나서서 말했다.“할머니, 언니를 오해하지 마세요. 언니는 정말 바쁜 사람이에요. 곧 새 만화가 출간된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 많이 야위었더라고요.”성유정은 성유리를 변호하는 듯 말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들렸다. 그녀의 가시가 돋친 말은 성유리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김난희는 성유정의 말을 듣고 더욱 불만스러워졌다.“만화라니? 또 그 하찮은 것들 하는 거야? 너는 애가 어쩜 그렇게...”김난희가 계속 잔소리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저녁 준비는 다 됐나요?”“한빈아, 너...”김서영이 곧바로 끼어들었다.“어머님, 한빈이는 이제 다 컸으니 자기 관리도 잘 할 거예요.”그 말에 김난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불만들을 삼켰다. 그러고는 성유정을 보며 말했다.“우리 유정이는 착하고 자기 사람도 잘 챙기고... 쟤가 다시 돌아오지만 않았었어도...”김난희도 아차 싶었던지 말끝을 흐렸다. 김서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겼다.“유리야, 부모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니?”“네. 아직이요.”“유정 씨가 너희 집에서 오래 머무는 것도 불편할 테니, 이참에 아예 본가에서 머물게 하는 게 어떨까? 유정 씨도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저는...”그러나 김서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게다가 내가 요즘 괜찮은 청년 몇 명을 알아봤거든. 편한 시간 알려주면 한번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아.”“그건 너무 이른
“오빠, 아까 도와줘서 고마웠어.”돌아가는 길에, 성유정은 뒷좌석에 앉아 계속 말을 이어갔다.“엄마가 내 결혼 이야기를 아줌마한테 꺼낼 줄은 정말 몰랐어. 정말 깜짝 놀랐잖아. 오빠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어쩔 줄 몰랐을 거야. 난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됐거든.”박한빈은 운전대를 잡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은 조금 무심해 보였지만, 성유정은 박한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성유리에게 말을 걸었다.“아참! 언니, 아까 아줌마랑 위층으로 올라가서 무슨 얘기 했어?”“별 얘기 아니야.”성유리는 마치 대화 자체를 피하고 싶은 듯 단호하게 답했다. 성유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래... 그렇구나. 언니, 그거 알아? 무열 오빠가 곧 귀국한대.”그 말에 성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마침 그 순간,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박한빈은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성유리는 앞으로 쏠리며 흠칫 놀란 듯해 보였다. 다행히도 안전벨트가 잡아주어 등이 다시 카시트에 닿게 되었다.박한빈은 곁눈질로 그녀를 한번 보았다.성유정은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말로는 무열 오빠도 해외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대. 두 사람은 그동안 연락은 안 했어?”“안 했어.”성유리는 눈을 내리깔고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참 안타깝네. 한때 서로의 전부였는데...”성유정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이번에는 박한빈을 힐끔 보았다.“오빠는 기억 못 하겠지? 무열 오빠는...”“알아. 진씨 집안의 혼외자잖아.”이번에는 박한빈이 빠르게 대답했다. 박한빈은 ‘혼외자’라는 단어를 쓰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성유리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성유정도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진씨 집안의... 그 아들... 예전에는 언니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절친이었지. 우리랑도 참 잘 지냈었는데... 나중에 말도 없이 해외로
성유리는 사람들의 예상보다 도도하지 않았다. 적어도 대화에 있어선 상대가 무슨 말을 하던 하나하나 다 성의 있게 대답했다.누군가 다음번에 함께 전시회를 보러 가자거나 음악회를 들으러 가자고 제안하면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며 흔쾌히 응했다.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불편해하고 침묵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홍지은이었다.결국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그녀는 간단히 양해를 구한 뒤,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세면대 앞에 선 홍지은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 안의 물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그제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성유리가 왜 자신을 도와 거짓을 꾸며줬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얼마 전까지 신영지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상대는 여전히 그녀와 성유리의 관계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그래서 남편 측과의 협력도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성유리가 어떤 의도로 이 일을 했든 간에 자신이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이제 남은 건, 성유리를 얼마만큼 이용할 수 있는가 뿐이었다.홍지은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성유리였다.둘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성유리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온화하고 따뜻했다.그러나 홍지은은 순간적으로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리고는 곧바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그 질문에 성유리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뭐 하려는 거냐고요?”“왜 나를 도와서 저 사람들에게 잘 보이게 해준 거냐고.”“전 도와준 적 없어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그저 지난번 경매장에서... 너무 죄송해서 그랬던 것뿐이에요.”“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홍지은은 성유리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계속 물었다.“네가 뭐가 미안한데? 지금 박한빈 씨가 온 신경을
“사모님!”누군가의 열정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홍지은은 순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상대가 점점 가까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발 물러섰지만 상대는 이미 홍지은의 손을 잡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오셨네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요!”“저를... 왜?”홍지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직됨이 묻어 있었다.솔직히, 이런 상황이 낯설지는 않았다.예전 학창 시절에도 이런 일을 수없이 봐왔다.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친절하게’ 누군가를 특정한 장소로 데려간 뒤, 마음껏 ‘즐기는’ 광경.단지 그때는 자신이 기다리는 입장이었을 뿐 지금처럼 직접 끌려가는 입장은 아니었다.막상 위치가 바뀌니 마음속에 스며드는 건 불안감뿐이었다.사실, 오늘 초대를 받았을 때부터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경매장에서 자신과 성유리에 대한 거짓말이 탄로 난 이후, 며칠 새 단체 채팅방에서도 강제로 쫓겨난 상태였다.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들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이건 명백히 수상한 일이었다.하지만 결국 홍지은은 오기로 결정했다.어쨌든 상대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은 임산부였다. 아무리 그래도 신체적인 위해를 가할 리는 없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홍지은은 이미 룸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 있었다.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자 홍지은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홍지은 씨 오셨어요?”성유리는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다.몸에는 맞춤 제작된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다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성유리는 말하는 내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홍지은은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왜 가만히 서 계세요?”그 모습을 본 성유리는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리 와서 앉으세요.”그 말을 듣고서야 홍지은은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다가갔다.이미 누군가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두었는데 그 자리는 바로 성유리의 옆자리였다.“지난번 경매장에서는 죄송했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투와 표정을 보고 문득 이런 느낌이 들었다.마치 지금 자신이 그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시켜도 그는 망설임 없이 실행할 것만 같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저 홍지은 씨 싫어해요.”성유리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박한빈이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좋아, 그럼...”“하지만 박한빈 씨가 손대는 건 원하지 않아요.”성유리가 이런 말을 덧붙이자 박한빈은 의아해졌지만 그녀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그 말에 박한빈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멍해졌다. 그러자 성유리가 물었다.“안 돼요?”“아니. 그게 아니라... 너 화 안 난 거야?”솔직히 말해, 홍지은이 어떻게 되든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오직 성유리의 감정뿐이었다.방금 전까지는 이 일을 잊고 있던 듯한 성유리였는데 다시 언급되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박한빈은 방금 했던 말을 얼른 넘기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까 이미 홍지은 씨한테 대답했어요. 그리고... 어차피 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그리고 다른 일들은 박한빈 씨가 방금 다 설명했잖아요. 게다가 물기까지 했고.”성유리의 말이 끝났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그러니까... 과거의 일들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은 없다는 거죠.”성유리의 명확한 대답이 떨어지자 박한빈은 비로소 한숨을 푹 내쉬었다.꽉 조여 있던 감정이 풀리면서도 성유리를 감싸고 있던 팔에는 오히려 더 힘을 줬다.“숨 막혀요. 좀 놔줘요.”성유리가 숨이 막힌 듯 박한빈을 손으로 밀어냈지만 그는 대답 없이 살짝 힘을 뺄 뿐 여전히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한참을 더 버둥거리다가 결국 포기한 성유리가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아까 제 말에 아직 대답 안 했잖아요.”“무슨 말?”“홍지은 씨에 관한 일이요. 제가 직접 해결하고 싶
성유리는 고개를 숙여 박한빈의 손을 쓱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놔요.”박한빈은 그녀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아파요.”그러자 성유리가 다시 말했다.그제야 박한빈의 손아귀 힘이 조금 느슨해졌지만 여전히 성유리를 꼭 붙잡고 있었다.그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박한빈은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그의 손을 끌어올렸다.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의 팔뚝을 세게 깨물었다.꽤 강한 힘으로 팔뚝을 물고 있는 성유리지만 박한빈은 단 한 번도 아프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성유리가 좀 더 제대로 물 수 있도록 스스로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그러나 이내 성유리는 박한빈의 팔뚝을 놓아주었다.박한빈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자신의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뚝을 드러냈다.“계속 물어. 네 화가 풀릴 때까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물었다.“박한빈 씨는 제가 고작 한번 물었다고 화가 풀릴 것 같아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대체 언제 성유정이 한 짓을 알게 됐어요?”“우리가 첫 번째 이혼을 한 다음에.”박한빈이 대답에 성유리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그럼 그전까지는... 그때 유산된 게 정말 사고였다고 믿고 있었던 거네요?”박한빈은 침묵했고 성유리도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대신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박한빈이 힘을 주어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성유리는 몸을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럴수록 더욱 힘을 주었다.“그래. 나도 인정해. 난 한심한 놈이었어.”박한빈이 성유리의 귓가에서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러니까 네가 날 때리든 욕하든 뭐든 다 받아들일게.”“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내 곁에 있어. 그것만 해준다면... 나머지는 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얹고 최대한 밀어내려 할 뿐이었다.“그리고 아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성유리의 대답은 홍지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그녀는 한순간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뒤,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갔고 박한빈이 곧장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떠나기 전, 그는 단 한 번도 홍지은을 쳐다보지 않았다.하지만 홍지은은 알았다.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그러나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시궁창뿐인 인생이 여기서 훨씬 나빠진다고 한들 얼마나 더 나빠질까?그렇다고 혼자만 괴로울 수는 없었다.그러니 죽더라도 반드시 한 사람은 끌어내릴 것이다.성유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지 홍지은은 아직 모른다.세상 그 누가 행복하게 지낸다 해도 괜찮다.‘성유리는 절대 안 돼.’...성유리는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장 복도 끝까지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뒤따라오던 박한빈도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지만 옆에 조용히 서서 성유리만 쳐다봤다.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은 또렷이 비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그는 발신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울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나 상대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다.연달아 몇 번을 끊었음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그렇게 주차장까지 도착했을 때, 성유리가 먼저 떠날까 봐 조바심이 난 박한빈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 상대방이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박 대표님, 저예요. 왜 말도 없이 먼저 가셨습니까? 저...”박한빈은 상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행여 핸드폰이 또다시 울릴까 봐 박한빈은 이번에 아예 전원을 꺼버
홍지은의 말에도 박한빈은 여전히 침묵했고 아까보다 더 얼굴을 찌푸렸다.눈빛에 그득히 담겨있는 혐오와 무시의 감정은 선명히 드러났지만 박한빈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바로 맞은편에 서 있던 홍지은도 당연히 그의 감정을 알아차렸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진짜예요. 박 대표님,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제 남편은...”“꺼져.”단 두 글자뿐인 박한빈의 대답에 홍지은은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사실... 신경 쓰이는 건 박한빈의 대답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었다.홍지은은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처지가 더 난감해진다는 사실을.그러나 박한빈은 홍지은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자리를 떠버렸다.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홍지은은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박한빈 씨, 계속 이러신다면... 제가 유리한테 그 일들을 다 알려줘도 제 탓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발걸음이 뚝 멈췄고 이내 고개를 돌려 홍지은을 쳐다봤다.그러자 홍지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제가 아예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그때 유정 씨가 임신했던 아이 말이에요. 박 대표님 아이 맞죠?”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홍지은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 냉랭했다.그의 눈빛에 홍지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말했다.“지금 유정 씨가 잡혀있긴 하지만 그 일들이 다 끝이 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때 유리가 잃었던 아이도... 사실 박한빈 씨는 다 알고 있었잖아요. 유정 씨가 그랬다는 걸.”홍지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의 뒤에서 물건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쿵!그 소리에 박한빈이 뒤돌아보자 성유리가 머지않은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그녀의 표정은
그리고 이내 홍지은은 자신의 자리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금성에서 제일가는 큰 인물은 박한빈은 당연하게도 가장 앞에 있는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무대 위에 전시되는 물건엔 흥미가 없어 보였다.홍지은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을 때, 박한빈도 마침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멈칫하던 그는 다정하게 성유리 귓가에 얽혀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그저 연인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박한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을 일일이 다 풀어줬다.만약 홍지은이 직접 본 게 아니라면 그녀는 꿈에서도 박한빈이 이런 일을 한다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너무 놀란 홍지은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박한빈 좀 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성유리는 퉁명스럽게 그의 손을 밀쳐냈다.그리고는 박한빈을 슬쩍 째려봤지만 그는 화를 내기도 커녕 오히려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꽤 거리가 있던 홍지은과 두 사람이기에 그녀는 박한빈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옆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기 좀 봐요. 두 사람 사이 너무 좋아 보이지 않아요? 유리가 평소에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게 혹시 박 대표님께서 쟤를 숨겨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니까요.”홍지은의 옆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금성에서 거주하는 현지 사람이 아니었고 결혼한 남자도 업계에서 중하층에 속하는 위치였다.전에 그녀는 홍지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막상 말을 거니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그렇게 홍지은의 미소와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정 사모님?”상대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이내 정연화는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홍지은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선명히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은 ‘화살’이 되어 홍지은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고 있었고 흐르는 ‘피’조차 그녀에게는 차갑게 느껴졌다.입술을 뻥긋거리
홍지은은 마치 성유리와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라는 듯 능글맞게 대꾸했다.그리고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발 빠르게 성유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한빈은 경매에 참석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유리는 미소를 지은 채 그의 곁을 지켰다.사실 그녀는 웃고는 있었지만 이미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상태였고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그래서 홍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 예전에는 이런 장소에 오는 거 별로라고 했잖아.”홍지은은 아주 자연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잡힌 손을 빼냈다.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홍지은은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보며 계속 말했다.“어머? 박 대표님도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만약 이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면 아무리 싫어도 박한빈은 몇 마디 대답은 해줬었다.그렇지만 유독 오늘따라 그는 대답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말을 건 상대가 홍지은이라서 싫었다.필경 홍지은을 볼 때면 성유리가 지나간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니까 말이다.그게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박한빈은 성유리가 홍지은을 마주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오다가다 마주친다고 하더라도.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고 홍지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녀와 함께 떠나버렸다.박한빈은 홍지은이 자신의 대답을 들을 자격도, 자기가 대답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대답을 하지 않은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제자리에 서 있던 홍지은의 반응과 표정이 어떻게 변해가던 박한빈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박 대표님!”이내 다른 사람이 박한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그는 미소 지으며 상대에게 성유리를 소개해 줬다.“여기는 제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성유리라고 하고요.”“안녕하세요. 사모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홍지은은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성유리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 번 말해봤지만 걔는 원래 이런 곳에 나오길 싫어해서요.”오늘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괜찮아요. 그래도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경매회도 곧 시작하는데 저도 박 대표 부인의 취향이 궁금하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으니까 미리 유리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두고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홍지은도 사람들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유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물어봤는데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다고 했거든요.”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현실은 완전히 뒤집혔다.왜냐하면 그날 경매장에 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올해 금성에서 열리는 첫 대형 경매 행사였다.특히 경매 목록에 포함된 한 세트의 보석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도시 내에서 일정한 신분을 가진 인사들은 전부 참석했다.사실 성유리는 처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전날 밤, 박한빈과 게임 내기를 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박한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그 조건이 바로 경매장에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다만, 박한빈도 굳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면 돼. 너 피곤해지면 바로 나가자.”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다.성유리가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홍지은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과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비록 남편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홍지은에게 자유를 허용했다.어차피 그의 사업 자원 중 상당수가 홍지은의 인맥과 네트워크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으니까.오늘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완벽한 메이크업 덕분인지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그런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