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박한빈은 다시 통화를 끝내버리더니 망설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박한빈.” “그 싸구려 동생분이 요즘 또다시 슬슬 부활하려고 하던데요?” ... 성유리는 요 며칠 쭉 침대에만 머물렀다. 매일이다시피 침대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기에 성유리는 이미 시간관념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도대체 자신이 얼마나 이 방에 갇혀있었는지 짐작조차 못 했다. 요즘 박한빈도 아침 일찍 외출하고 저녁 늦게 돌아오니 성유리는 그의 얼굴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산부인과도 가야 한다는 일을 잊어버린 줄 알았지만 어느 날 깨어보니 그가 넥타이를 풀어주고 있었다. “깼어? 마침 내가 오늘 시간이 좀 있어서 너 데리고 병원 가려고.” 박한빈이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걸자 성유리는 멍해졌다. 그는 별다른 말도 없이 성유리를 묶고 있던 넥타이를 풀더니 그녀를 안고 아래로 내려갔다.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고 자신의 몸에 닿아있는 박한빈의 손을 떼어내고 싶었지만 이를 꽉 깨물고 참아냈다. 박한빈도 그런 성유리의 표정을 발견했지만 그녀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으니 그 또한 못 본척했다. 그가 말했듯이 아무리 어리석어도 상관이 없었다. 원한다면 박한빈을 속여도 그는 늘 하던 대로 할 생각이었으니까. 박한빈이 예약한 병원은 지화 그룹 명의로 돼 있는 개인 병원이었다. 의사에게 박한빈이 미리 말을 해놓았는지 그들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성유리는 바로 검사실로 향할 수 있었다. 박한빈은 조용히 그녀의 옆을 지켰고 의사가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아이가 아주 잘 크고 있네요.” “여기 이곳에 아기가 있어요. 보이세요?” 성유리가 의사의 말에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았지만 아기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작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곧 보이지도 않는 작은 아기라는 존재가 무럭무럭 클 것이라는
병원에서 나오자 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아침을 먹으러 향했다. 성유리는 이미 며칠 동안 밖에 못 나왔으니 햇살을 맞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박한빈과의 “거리”를 좁혔고 조용히 앉아 밥만 먹었다. “요즘 진무열 씨가 또 무슨 짓을 벌이는지 알아?” 박한빈이 밥을 먹는 성유리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그 물음에 잠시 주저하던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되물었다. “방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갇혀있었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을 비꼬려는 의도가 가득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일을 벌인 시간이 고작 하루 이틀은 아닐 거야. 너 몰랐어?” “몰라요. 저도 무열이랑 연락을 안 해봐서.” “그렇군.” 박한빈은 성유리를 떠보듯 계속 물었다. “그럼 요즘 진무열 씨가 뭘 하려는지도 안 궁금해?” 성유리는 말없이 박한빈을 쳐다만 봤다. “요새 네 아버지를 꼬드겨 새로운 프로젝트에 가입시키려고 하더라. 이미 계획안 검토했는데 생각보다 잘 만들었더라고.”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릴 뿐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30퍼센트의 수익률이라... 듣기만 해도 좋아 보이지?” 그때, 성유리가 문득 박한빈에게 말했다. “이거 사기 치는 거 아니에요?”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넌 네 아버지보다는 똑똑한 사람이야.” “성 회장님은 지금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야. 진무열 씨가 회장님을 끌어들이는 게 어쩌면...”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경청하다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박한빈 씨를 해하려고 그러는걸 까요?” 그녀의 물음에 박한빈은 웃으며 성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대답했다. “응. 역시 우리 원이가 제일 총명하네.” 성유리는 그의 손이 스치는 것도 극도로 혐오스러웠지만 이를 꽉 깨물고 참았다. “나한테 공격을 하는 거야. 근데 이건 너무 티가 나서 나는 걸려들지 않을 거고. 성 회장님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까?”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이
박한빈의 시선은 한동안 유아용품점에 머무르다 결국 성유리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아직 박한빈이 운전석에 제대로 앉지도 못했지만 성유리는 보기도 싫다는 듯 몸을 휙 돌리며 창밖만 쳐다봤다. 성유리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박한빈은 보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차가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성유리가 먼저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저 안 가둬두시면 안 될까요? 걱정마세요. 저도 아이한테 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아이는 죄가 없잖아요.” “박한빈 씨가 계속 저를 감금한다면 안 아프던 곳도 아파질 것 같아서요.” 성유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박한빈과 상의를 하려는 듯 말했다. “집에 있기 싫으면 안 있어도 돼. 앞으로 매일 너랑 같이 회사로 가면 되니까.” 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마치 자신이 어떤 말을 할지 예상이라도 한 듯한 박한빈에게 성유리가 물었다. “회사의 기밀이나 중요한 서류, 혹은 문서들을 제가 훔치면 어떡하시려고요?” 성유리의 물음에 박한빈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웃음에 담긴 의도를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절대 박한빈은 자신을 경쟁상대로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 아니더라도 박한빈이 보기엔 성유리가 아직 자격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에게 성유리는 지금 자신이 키우는 반려동물이나 식물로 보일 것이다. 성유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생각하다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앞으로 회사로 같이 출근하죠.” ... 전에 박한빈이 성유리를 들쳐 업고 회사로 온 다음부터 직원들은 그녀의 등장에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박한빈도 성유리를 완전히 방어하지 않는지 그녀가 소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그는 다른 사람과 업무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박세빈에 대한 조정도 이미 내려온지라 그는 요즘 전 대표와 함께 연성에서 인주 프로젝트를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제일 관건적
성유리의 힘은 많이 세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스킨십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래?” “어디 나가시려고요?” 성유리가 되물었다. “응. 건설 현장 쪽에 가보려고. 넌 지금 현장에 가면 안 될 것 같으니까 혼자 여기서 쉬고 있어.” “근데 저 너무 심심한데요. 영화라도 보고 싶어요.” 성유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이패드나 컴퓨터라도 주세요.”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없이 가만히 성유리만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눈빛은 마치 성유리의 몸을 관통하려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의 시선에 성유리가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유리에게 대답해 줬다. “그래. 노트북 가져다줄게.” 박한빈은 바로 방 밖으로 나가 노트북 하나를 성유리에게 가져다줬다. 성유리는 한눈에 그 노트북이 박한빈이 평소에 사용하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봤다. “여기서 웬만한 건 다 볼 수 있을 거야.” 박한빈은 노트북을 성유리에게 건네며 계속 말했다. “비밀번호는 똑같아. 유리 네 생일이야. 근데 너무 오래 보지는 마.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고.” “네.” 순순히 자기 말을 따르는 성유리를 박한빈은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 뒤돌아 방을 떠났다. 서훈은 이미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매일 들고 있던 노트북이 없어진 사실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박 대표님, 노트북 안 챙기십니까?” “유리한테 줬습니다. 새로운 데이터 하나 준비해 주세요.” 박한빈의 대답에 서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대표님, 그 안에는 중요한 데이터들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저도 압니다.” 박한빈은 여전히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내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박한빈은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아직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빛났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직
그러나 성유리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자세를 바꿔 잠을 청했다. 커튼까지 쳐져 있어 휴게실 안은 어두컴컴했기에 예상은 했지만 눈을 뜬 순간 성유리는 깜짝 놀랐다. “꺅!” 그녀의 비명에 그도 놀랐는지 뒤로 물러섰더니 휴게실 조명을 켜며 말했다. “나야.” 낮은 박한빈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금방 돌아왔는데 네가 너무 잘 자고 있어서 안 깨웠어.” 박한빈이 놀란 성유리를 진정시키며 계속 말했다. “배 안고파? 뭐 먹고 싶어?” 성유리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설을 꾹 참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배 안 고파요.” “케이크 하나 사 왔어.” 그녀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박한빈이 먼저 말했다. “저번이랑 같은 집에서 샀는데 이번엔 초콜릿 맛이야. 먹어볼래?” 박한빈은 주섬주섬 케이크를 꺼냈지만 성유리는 케이크를 보자 그날 밤이 떠올라 속이 메슥거렸다. 그날을 생각할 때마다 성유리는 자기 자신이 멍청하고 우스웠다. ‘박한빈 같은 사람을 철석같이 믿고 안쓰러워하다니... 내가 미쳤지.’ “별로 먹고 싶지 않은 거야?”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날 네가 케이크를 너무 잘 먹어서 좋아하는 줄 알고 샀는데 네가 안 좋아할 줄은 몰랐네.” 무슨 영문인지 성유리는 그의 말이 마치 자신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뭘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하게 성유리의 태도를 알고 싶은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성유리는 한참을 침묵하다 천천히 대답했다. “깬 지 얼마 안 돼서 케이크부터 먹으면 너무 물릴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럼 먹고 싶은 거 있어? 내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면 돼.” 성유리가 박한빈의 말에 고민하다 말했다. “쫄면이요. 먹어도 돼요?”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돼.” 그는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쫄면을 사 오라고 부탁했고 행여나 성유리 입맛에 맞지 않을까 봐 여러 곳에 들러 하나씩 사 오라는 말도 보탰다. “새
박한빈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하고 담담했다. 마치 성유리에게 슈퍼에 가서 아무거나 하나 사 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성유리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해갔고 한참 동안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거예요?” “응. 마침 그 사람이 너한테 못되게 굴었던 적 있잖아? 이번에 겸사겸사 복수도 해주는 셈이지.”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너 설마 그 사람한테 정이라도 남은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성유리는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조금 의외일 뿐이에요.” “그래. 그런 사람은 사실 동정할 가치도 없어.” 박한빈이 대꾸하며 케이크 상자를 열었지만 성유리가 손도 대지 않자 그는 스스로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성유리가 박한빈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음, 나쁘지 않은데.” 박한빈은 다시 한 숟가락을 떠 그녀에게 건네며 물었다. “한번 먹어볼래?” 성유리는 케이크 냄새에 약간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결국 케이크를 먹으려고 입을 벌렸다. “맛있어?” 박한빈의 입가엔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성유리는 억지로 먹더니 맛을 느낄 틈도 없이 빠르게 넘겨버렸다. 그러나 박한빈이 끈질기게 맛을 물어보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박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다음에 이걸로 다시 사 줄게.” 그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이어갔다. “아참, 아침에 봤던 그 유아용품 가게 있잖아. 저녁에 한 번 들러서 구경해볼까? 필요한 것도 좀 사두고. 아직 이른 감은 있지만 앞으로 바빠질 수도 있으니까 시간 있을 때 같이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성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박한빈의 의견을 따르기도 결정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한빈은 무슨 말을 더 말하려 했지만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 소리에 성유리의 시선이 자연스레 휴대폰 화면으로
박한빈은 이런 일상이 그저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는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금성의 계절은 겨울이 되었다. 입동 날, 김서영은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에 박씨 본가로 와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말했다. 성유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김서영은 행여 그녀가 거절할까 이런 말을 보탰다. “맞다. 임신했다고 했지? 할머님도 네 임신 사실을 듣고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게다가 너희들 꽤 오랜 시간 집에 안 돌아오지 않았니?” “오고 싶지 않으면 안 와도 돼. 내가 도연제로 갈게. 할머님 마음도 내가 가서 대신 전하마.” 김서영은 겉으론 성유리를 배려하는 것 같아보였지만 사실 그녀에게 거절할 이유도, 여지도 주지 않고 있다.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고민하다 결국 김서영의 말에 따랐다. 박한빈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성유리는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네가 된다고 했어?” “네.” “알았어. 그럼 저녁에 같이 가자.” 박한빈은 대답하며 청첩장 하나를 꺼내 성유리에게 건네더니 말을 이어갔다. “금방 받은 거야. 봐봐.” 성유리는 아무 생각 없이 청첩장을 열어보았고 익숙한 누군가의 웨딩사진을 보고는 넋을 잃었다. 신랑 자리에 있는 이름은 바로 연정우. 그리고 그 옆에는 낯선 여인이 서 있었다. “정말 효자더라.” 박한빈은 창백해지는 성유리의 낯빛을 쳐다보다 말했다. “그 옆에 있는 여자가 누군지 알아?” 성유리가 대답을 차마 하지 못하자 박한빈이 하려던 말을 계속해 나갔다. “유 비서실장님 딸이야.”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청첩장을 닫아버리며 물었다. “그래서요?” “나는 그저 이 소식을 너한테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결혼식 당일에 우리 둘이 같이 참석할까?” 성유리는 어떤 대답도 없이 청첩장을 박한빈에게 다시 버리듯 건네고는 뒤를 돌았다. 박한빈은 그녀의 뒷모습과 손에 들린 청첩장을
김난희는 박한빈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서영이 몸을 일으키며 성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마침 나도 선물을 준비했어. 근데 위에 있어서 우리 둘이 같이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두 사람은 위층에 있는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김서영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성유리에게 건넸고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봉투를 받아 들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는 수표 한 장과 메모지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메모지에는 항공편 정보가 적혀 있었다. 성유리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급히 김서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건...?” “내 개인 비행기야. 티켓은 이미 예약해 뒀어.” 김서영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적지는 한성인데 거기 도착하면 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도 되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해. 내가 따로 준비해 줄게.” 김서영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또렷하게 들렸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해 멍해졌다. “떠나고 싶지 않니?” 그러자 김서영이 또다시 물었다. “이제 성리 그룹 일은 다 정리됐잖아. 여기서 너를 붙잡을 이유도 없어졌으니 가도 돼.” “하지만...” “걱정하지 마. 한빈이 쪽은 내가 알아서 할게. 네가 떠나는 걸 막지 못하게 할 거야.” 그제야 김서영의 의도를 알아챈 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뭘 하시려는 거예요?” 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다시 말했다.“저는 어머님과 박한빈 씨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저와 그 사람 사이의 일이에요. 다른 분이 끼어드는 건 바라지 않아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봉투를 김서영에게 다시 내밀었다. 김서영은 봉투를 내려다보더니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그래. 그게 네 선택이라면 내가 관여하지 않을게. 근데 명심해.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사모님.” 성유리가 그녀를
성유리는 사람들의 예상보다 도도하지 않았다. 적어도 대화에 있어선 상대가 무슨 말을 하던 하나하나 다 성의 있게 대답했다.누군가 다음번에 함께 전시회를 보러 가자거나 음악회를 들으러 가자고 제안하면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며 흔쾌히 응했다.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불편해하고 침묵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홍지은이었다.결국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그녀는 간단히 양해를 구한 뒤,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세면대 앞에 선 홍지은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 안의 물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그제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성유리가 왜 자신을 도와 거짓을 꾸며줬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얼마 전까지 신영지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상대는 여전히 그녀와 성유리의 관계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그래서 남편 측과의 협력도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성유리가 어떤 의도로 이 일을 했든 간에 자신이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이제 남은 건, 성유리를 얼마만큼 이용할 수 있는가 뿐이었다.홍지은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성유리였다.둘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성유리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온화하고 따뜻했다.그러나 홍지은은 순간적으로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리고는 곧바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그 질문에 성유리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뭐 하려는 거냐고요?”“왜 나를 도와서 저 사람들에게 잘 보이게 해준 거냐고.”“전 도와준 적 없어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그저 지난번 경매장에서... 너무 죄송해서 그랬던 것뿐이에요.”“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홍지은은 성유리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계속 물었다.“네가 뭐가 미안한데? 지금 박한빈 씨가 온 신경을
“사모님!”누군가의 열정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홍지은은 순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상대가 점점 가까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발 물러섰지만 상대는 이미 홍지은의 손을 잡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오셨네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요!”“저를... 왜?”홍지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직됨이 묻어 있었다.솔직히, 이런 상황이 낯설지는 않았다.예전 학창 시절에도 이런 일을 수없이 봐왔다.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친절하게’ 누군가를 특정한 장소로 데려간 뒤, 마음껏 ‘즐기는’ 광경.단지 그때는 자신이 기다리는 입장이었을 뿐 지금처럼 직접 끌려가는 입장은 아니었다.막상 위치가 바뀌니 마음속에 스며드는 건 불안감뿐이었다.사실, 오늘 초대를 받았을 때부터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경매장에서 자신과 성유리에 대한 거짓말이 탄로 난 이후, 며칠 새 단체 채팅방에서도 강제로 쫓겨난 상태였다.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들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이건 명백히 수상한 일이었다.하지만 결국 홍지은은 오기로 결정했다.어쨌든 상대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은 임산부였다. 아무리 그래도 신체적인 위해를 가할 리는 없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홍지은은 이미 룸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 있었다.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자 홍지은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홍지은 씨 오셨어요?”성유리는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다.몸에는 맞춤 제작된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다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성유리는 말하는 내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홍지은은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왜 가만히 서 계세요?”그 모습을 본 성유리는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리 와서 앉으세요.”그 말을 듣고서야 홍지은은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다가갔다.이미 누군가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두었는데 그 자리는 바로 성유리의 옆자리였다.“지난번 경매장에서는 죄송했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투와 표정을 보고 문득 이런 느낌이 들었다.마치 지금 자신이 그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시켜도 그는 망설임 없이 실행할 것만 같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저 홍지은 씨 싫어해요.”성유리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박한빈이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좋아, 그럼...”“하지만 박한빈 씨가 손대는 건 원하지 않아요.”성유리가 이런 말을 덧붙이자 박한빈은 의아해졌지만 그녀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그 말에 박한빈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멍해졌다. 그러자 성유리가 물었다.“안 돼요?”“아니. 그게 아니라... 너 화 안 난 거야?”솔직히 말해, 홍지은이 어떻게 되든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오직 성유리의 감정뿐이었다.방금 전까지는 이 일을 잊고 있던 듯한 성유리였는데 다시 언급되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박한빈은 방금 했던 말을 얼른 넘기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까 이미 홍지은 씨한테 대답했어요. 그리고... 어차피 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그리고 다른 일들은 박한빈 씨가 방금 다 설명했잖아요. 게다가 물기까지 했고.”성유리의 말이 끝났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그러니까... 과거의 일들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은 없다는 거죠.”성유리의 명확한 대답이 떨어지자 박한빈은 비로소 한숨을 푹 내쉬었다.꽉 조여 있던 감정이 풀리면서도 성유리를 감싸고 있던 팔에는 오히려 더 힘을 줬다.“숨 막혀요. 좀 놔줘요.”성유리가 숨이 막힌 듯 박한빈을 손으로 밀어냈지만 그는 대답 없이 살짝 힘을 뺄 뿐 여전히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한참을 더 버둥거리다가 결국 포기한 성유리가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아까 제 말에 아직 대답 안 했잖아요.”“무슨 말?”“홍지은 씨에 관한 일이요. 제가 직접 해결하고 싶
성유리는 고개를 숙여 박한빈의 손을 쓱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놔요.”박한빈은 그녀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아파요.”그러자 성유리가 다시 말했다.그제야 박한빈의 손아귀 힘이 조금 느슨해졌지만 여전히 성유리를 꼭 붙잡고 있었다.그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박한빈은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그의 손을 끌어올렸다.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의 팔뚝을 세게 깨물었다.꽤 강한 힘으로 팔뚝을 물고 있는 성유리지만 박한빈은 단 한 번도 아프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성유리가 좀 더 제대로 물 수 있도록 스스로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그러나 이내 성유리는 박한빈의 팔뚝을 놓아주었다.박한빈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자신의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뚝을 드러냈다.“계속 물어. 네 화가 풀릴 때까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물었다.“박한빈 씨는 제가 고작 한번 물었다고 화가 풀릴 것 같아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대체 언제 성유정이 한 짓을 알게 됐어요?”“우리가 첫 번째 이혼을 한 다음에.”박한빈이 대답에 성유리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그럼 그전까지는... 그때 유산된 게 정말 사고였다고 믿고 있었던 거네요?”박한빈은 침묵했고 성유리도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대신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박한빈이 힘을 주어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성유리는 몸을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럴수록 더욱 힘을 주었다.“그래. 나도 인정해. 난 한심한 놈이었어.”박한빈이 성유리의 귓가에서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러니까 네가 날 때리든 욕하든 뭐든 다 받아들일게.”“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내 곁에 있어. 그것만 해준다면... 나머지는 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얹고 최대한 밀어내려 할 뿐이었다.“그리고 아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성유리의 대답은 홍지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그녀는 한순간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뒤,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갔고 박한빈이 곧장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떠나기 전, 그는 단 한 번도 홍지은을 쳐다보지 않았다.하지만 홍지은은 알았다.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그러나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시궁창뿐인 인생이 여기서 훨씬 나빠진다고 한들 얼마나 더 나빠질까?그렇다고 혼자만 괴로울 수는 없었다.그러니 죽더라도 반드시 한 사람은 끌어내릴 것이다.성유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지 홍지은은 아직 모른다.세상 그 누가 행복하게 지낸다 해도 괜찮다.‘성유리는 절대 안 돼.’...성유리는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장 복도 끝까지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뒤따라오던 박한빈도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지만 옆에 조용히 서서 성유리만 쳐다봤다.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은 또렷이 비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그는 발신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울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나 상대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다.연달아 몇 번을 끊었음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그렇게 주차장까지 도착했을 때, 성유리가 먼저 떠날까 봐 조바심이 난 박한빈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 상대방이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박 대표님, 저예요. 왜 말도 없이 먼저 가셨습니까? 저...”박한빈은 상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행여 핸드폰이 또다시 울릴까 봐 박한빈은 이번에 아예 전원을 꺼버
홍지은의 말에도 박한빈은 여전히 침묵했고 아까보다 더 얼굴을 찌푸렸다.눈빛에 그득히 담겨있는 혐오와 무시의 감정은 선명히 드러났지만 박한빈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바로 맞은편에 서 있던 홍지은도 당연히 그의 감정을 알아차렸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진짜예요. 박 대표님,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제 남편은...”“꺼져.”단 두 글자뿐인 박한빈의 대답에 홍지은은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사실... 신경 쓰이는 건 박한빈의 대답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었다.홍지은은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처지가 더 난감해진다는 사실을.그러나 박한빈은 홍지은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자리를 떠버렸다.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홍지은은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박한빈 씨, 계속 이러신다면... 제가 유리한테 그 일들을 다 알려줘도 제 탓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발걸음이 뚝 멈췄고 이내 고개를 돌려 홍지은을 쳐다봤다.그러자 홍지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제가 아예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그때 유정 씨가 임신했던 아이 말이에요. 박 대표님 아이 맞죠?”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홍지은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 냉랭했다.그의 눈빛에 홍지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말했다.“지금 유정 씨가 잡혀있긴 하지만 그 일들이 다 끝이 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때 유리가 잃었던 아이도... 사실 박한빈 씨는 다 알고 있었잖아요. 유정 씨가 그랬다는 걸.”홍지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의 뒤에서 물건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쿵!그 소리에 박한빈이 뒤돌아보자 성유리가 머지않은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그녀의 표정은
그리고 이내 홍지은은 자신의 자리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금성에서 제일가는 큰 인물은 박한빈은 당연하게도 가장 앞에 있는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무대 위에 전시되는 물건엔 흥미가 없어 보였다.홍지은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을 때, 박한빈도 마침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멈칫하던 그는 다정하게 성유리 귓가에 얽혀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그저 연인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박한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을 일일이 다 풀어줬다.만약 홍지은이 직접 본 게 아니라면 그녀는 꿈에서도 박한빈이 이런 일을 한다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너무 놀란 홍지은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박한빈 좀 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성유리는 퉁명스럽게 그의 손을 밀쳐냈다.그리고는 박한빈을 슬쩍 째려봤지만 그는 화를 내기도 커녕 오히려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꽤 거리가 있던 홍지은과 두 사람이기에 그녀는 박한빈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옆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기 좀 봐요. 두 사람 사이 너무 좋아 보이지 않아요? 유리가 평소에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게 혹시 박 대표님께서 쟤를 숨겨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니까요.”홍지은의 옆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금성에서 거주하는 현지 사람이 아니었고 결혼한 남자도 업계에서 중하층에 속하는 위치였다.전에 그녀는 홍지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막상 말을 거니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그렇게 홍지은의 미소와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정 사모님?”상대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이내 정연화는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홍지은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선명히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은 ‘화살’이 되어 홍지은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고 있었고 흐르는 ‘피’조차 그녀에게는 차갑게 느껴졌다.입술을 뻥긋거리
홍지은은 마치 성유리와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라는 듯 능글맞게 대꾸했다.그리고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발 빠르게 성유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한빈은 경매에 참석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유리는 미소를 지은 채 그의 곁을 지켰다.사실 그녀는 웃고는 있었지만 이미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상태였고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그래서 홍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 예전에는 이런 장소에 오는 거 별로라고 했잖아.”홍지은은 아주 자연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잡힌 손을 빼냈다.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홍지은은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보며 계속 말했다.“어머? 박 대표님도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만약 이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면 아무리 싫어도 박한빈은 몇 마디 대답은 해줬었다.그렇지만 유독 오늘따라 그는 대답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말을 건 상대가 홍지은이라서 싫었다.필경 홍지은을 볼 때면 성유리가 지나간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니까 말이다.그게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박한빈은 성유리가 홍지은을 마주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오다가다 마주친다고 하더라도.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고 홍지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녀와 함께 떠나버렸다.박한빈은 홍지은이 자신의 대답을 들을 자격도, 자기가 대답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대답을 하지 않은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제자리에 서 있던 홍지은의 반응과 표정이 어떻게 변해가던 박한빈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박 대표님!”이내 다른 사람이 박한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그는 미소 지으며 상대에게 성유리를 소개해 줬다.“여기는 제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성유리라고 하고요.”“안녕하세요. 사모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홍지은은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성유리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 번 말해봤지만 걔는 원래 이런 곳에 나오길 싫어해서요.”오늘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괜찮아요. 그래도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경매회도 곧 시작하는데 저도 박 대표 부인의 취향이 궁금하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으니까 미리 유리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두고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홍지은도 사람들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유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물어봤는데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다고 했거든요.”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현실은 완전히 뒤집혔다.왜냐하면 그날 경매장에 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올해 금성에서 열리는 첫 대형 경매 행사였다.특히 경매 목록에 포함된 한 세트의 보석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도시 내에서 일정한 신분을 가진 인사들은 전부 참석했다.사실 성유리는 처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전날 밤, 박한빈과 게임 내기를 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박한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그 조건이 바로 경매장에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다만, 박한빈도 굳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면 돼. 너 피곤해지면 바로 나가자.”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다.성유리가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홍지은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과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비록 남편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홍지은에게 자유를 허용했다.어차피 그의 사업 자원 중 상당수가 홍지은의 인맥과 네트워크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으니까.오늘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완벽한 메이크업 덕분인지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그런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