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하고 담담했다. 마치 성유리에게 슈퍼에 가서 아무거나 하나 사 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성유리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해갔고 한참 동안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거예요?” “응. 마침 그 사람이 너한테 못되게 굴었던 적 있잖아? 이번에 겸사겸사 복수도 해주는 셈이지.”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너 설마 그 사람한테 정이라도 남은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성유리는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조금 의외일 뿐이에요.” “그래. 그런 사람은 사실 동정할 가치도 없어.” 박한빈이 대꾸하며 케이크 상자를 열었지만 성유리가 손도 대지 않자 그는 스스로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성유리가 박한빈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음, 나쁘지 않은데.” 박한빈은 다시 한 숟가락을 떠 그녀에게 건네며 물었다. “한번 먹어볼래?” 성유리는 케이크 냄새에 약간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결국 케이크를 먹으려고 입을 벌렸다. “맛있어?” 박한빈의 입가엔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성유리는 억지로 먹더니 맛을 느낄 틈도 없이 빠르게 넘겨버렸다. 그러나 박한빈이 끈질기게 맛을 물어보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박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다음에 이걸로 다시 사 줄게.” 그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이어갔다. “아참, 아침에 봤던 그 유아용품 가게 있잖아. 저녁에 한 번 들러서 구경해볼까? 필요한 것도 좀 사두고. 아직 이른 감은 있지만 앞으로 바빠질 수도 있으니까 시간 있을 때 같이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성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박한빈의 의견을 따르기도 결정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한빈은 무슨 말을 더 말하려 했지만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 소리에 성유리의 시선이 자연스레 휴대폰 화면으로
박한빈은 이런 일상이 그저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는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금성의 계절은 겨울이 되었다. 입동 날, 김서영은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에 박씨 본가로 와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말했다. 성유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김서영은 행여 그녀가 거절할까 이런 말을 보탰다. “맞다. 임신했다고 했지? 할머님도 네 임신 사실을 듣고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게다가 너희들 꽤 오랜 시간 집에 안 돌아오지 않았니?” “오고 싶지 않으면 안 와도 돼. 내가 도연제로 갈게. 할머님 마음도 내가 가서 대신 전하마.” 김서영은 겉으론 성유리를 배려하는 것 같아보였지만 사실 그녀에게 거절할 이유도, 여지도 주지 않고 있다.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고민하다 결국 김서영의 말에 따랐다. 박한빈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성유리는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네가 된다고 했어?” “네.” “알았어. 그럼 저녁에 같이 가자.” 박한빈은 대답하며 청첩장 하나를 꺼내 성유리에게 건네더니 말을 이어갔다. “금방 받은 거야. 봐봐.” 성유리는 아무 생각 없이 청첩장을 열어보았고 익숙한 누군가의 웨딩사진을 보고는 넋을 잃었다. 신랑 자리에 있는 이름은 바로 연정우. 그리고 그 옆에는 낯선 여인이 서 있었다. “정말 효자더라.” 박한빈은 창백해지는 성유리의 낯빛을 쳐다보다 말했다. “그 옆에 있는 여자가 누군지 알아?” 성유리가 대답을 차마 하지 못하자 박한빈이 하려던 말을 계속해 나갔다. “유 비서실장님 딸이야.”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청첩장을 닫아버리며 물었다. “그래서요?” “나는 그저 이 소식을 너한테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결혼식 당일에 우리 둘이 같이 참석할까?” 성유리는 어떤 대답도 없이 청첩장을 박한빈에게 다시 버리듯 건네고는 뒤를 돌았다. 박한빈은 그녀의 뒷모습과 손에 들린 청첩장을
김난희는 박한빈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서영이 몸을 일으키며 성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마침 나도 선물을 준비했어. 근데 위에 있어서 우리 둘이 같이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두 사람은 위층에 있는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김서영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성유리에게 건넸고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봉투를 받아 들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는 수표 한 장과 메모지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메모지에는 항공편 정보가 적혀 있었다. 성유리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급히 김서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건...?” “내 개인 비행기야. 티켓은 이미 예약해 뒀어.” 김서영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적지는 한성인데 거기 도착하면 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도 되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해. 내가 따로 준비해 줄게.” 김서영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또렷하게 들렸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해 멍해졌다. “떠나고 싶지 않니?” 그러자 김서영이 또다시 물었다. “이제 성리 그룹 일은 다 정리됐잖아. 여기서 너를 붙잡을 이유도 없어졌으니 가도 돼.” “하지만...” “걱정하지 마. 한빈이 쪽은 내가 알아서 할게. 네가 떠나는 걸 막지 못하게 할 거야.” 그제야 김서영의 의도를 알아챈 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뭘 하시려는 거예요?” 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다시 말했다.“저는 어머님과 박한빈 씨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저와 그 사람 사이의 일이에요. 다른 분이 끼어드는 건 바라지 않아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봉투를 김서영에게 다시 내밀었다. 김서영은 봉투를 내려다보더니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그래. 그게 네 선택이라면 내가 관여하지 않을게. 근데 명심해.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사모님.” 성유리가 그녀를
“그리고 박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내가 왜 꼭 박세빈을 받아들여야 하니? 내가 이곳에 머물며 내 인생을 낭비한 이유는 한빈이가 모든 것을 물려받게 하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르신께서 박세빈을 받아들이라고 협박까지 하더라.” “내가 도대체 왜 받아들여야 해? 지금 내 미래는 망가졌고 과거는 부정당했어. 그중 일부는 박한빈 때문이고. 네 말대로 내가 걔 친어머니라는 걸 기억하고 있다면 걔는 과연 내가 누군지 기억하고 있을까?”김서영의 말이 길어질수록 눈은 점점 붉어졌고 몸도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성유리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단정하고 우아한 사람이었다. 그 많은 시간 동안 성유리는 김서영을 보며 딴 세상에 있는 사람 같다고 느꼈다. 마치 유리 진열장 속에 앉아 있는 완벽하지만 비현실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성유리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김서영 역시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는데도 김서영은 맨발로 그 유리 위를 걸어 성유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발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었고 김서영은 지금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모습을 하고 있다.성유리는 갑작스러운 김서영의 모습에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그때, 아래층에서 소란을 들은 박한빈이 서재로 올라왔다. 그는 김서영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 성유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자신의 뒤로 보호하듯 감싸더니 화가 나 있는 김서영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김서영은 성유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천천히 돌려 박한빈을 응시했다. 하지만 박한빈의 시선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로 향해있었다. 버려진 수표와 항공편 정보가 흩어져 있었고 그는 그 물건들을 보며 비웃듯 말했다. “이게 성유리에게 주려던 선물인가요? 참 열과 성을 다하셨네요.” “물론이지.” 김서영은 박한빈을 보자 정신이 든 듯 다시 평소의 우아함을 되찾았고 부드럽게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알기론 유리가 가장 원하는 게 바로 이거니까.” “그래요? 그
“어머님 상태가 이상해요.” 차에 타자마자 성유리가 먼저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성유리는 익숙한 듯 스스로 말을 다시 이어갔다. “그리고 보니까 할머님이 뭔가 알고 계신 것 같아요. 박세빈 씨 일은 절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여전히 침묵했고 그의 냉담한 태도에 성유리는 언짢아져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성유리도 지금 속으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었다. 자신도 지금 행복하지 않은 만큼 박한빈이 고통받는 것도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 전 김서영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자 마음이 많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성유리가 침묵하는 박한빈에게 뭔가 더 말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어머니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은 거지?” 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 박한빈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따지듯 물었다. “어머니가 준비해 준 모든 물건들 왜 받아들이지 않은 건데?” 요 며칠 동안 그들 사이엔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그 평온함은 마치 얼마 전의 치열했던 갈등과 증오가 단지 꿈속에서 벌어진 일 같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누구도 먼저 며칠 전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최근 성유리는 지화그룹의 사무실을 자주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그녀와 박한빈의 관계를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성유리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고 지속적인 거짓말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신도 그게 사실이라고 믿게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오늘 밤, 박한빈은 더 이상 가식적인 태도를 유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여전히 운전석에 앉아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성유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차 안은 고요했고 창밖에서 흔들리던 나뭇잎들마저 멈춰 적막을 더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조용해서 성유리는 서로의 숨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나는 네
“제가 정말 사모님의 계획대로 떠난다면 그건 박한빈 씨한테는 엄청난 배신이 되는 거 아닐까요?” “그리고 지금 박세빈 씨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빈 씨 혼자 이런 걸 감당하게 놔두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그러니까 제가 정말 떠나더라도 지금은 아닐 거예요.” 성유리는 참아왔던 말들은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쏟아냈다. 그녀의 눈은 박한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뜨겁진 않았지만 진지하고 담담했다. 박한빈은 잠시 성유리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는데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면서 눈가와 얼굴 전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표정은 박한빈의 잘생긴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성유리는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감싸더니 그대로 입을 맞췄다. 밀폐된 차 안에서 부드럽고 따스한 입맞춤은 한겨울의 추위마저 잊게 만들 정도로 따스하고 포근했다. 사실, 요즘 둘 사이가 평화롭긴 했지만 그 이상의 친밀한 행동은 없었다. 그러나 방금 성유리가 한 말이 박한빈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그 말들은 마치 따스한 햇살처럼 박한빈의 시린 가슴을 감싸주는 것 같았고 작은 구석 하나하나까지 따스함으로 채워 넣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아직 완전히 솔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자신의 곁을 떠나기를 거절한 그 순간부터 이유가 무엇이든 그건 상관없었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오직 결과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성유리는 여기에 남기로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 생각들이 박한빈의 감정을 더욱 통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성유리는 그의 감정이 전해져 오는 듯 호흡이 가빠졌고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다. 그제야 박한빈은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듯 서서히 몸을 물렸는데 여전히 성유리와 가까운 거리에서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맞댄 채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뜨거운 시선에
“왜 그러세요?” 박한빈은 차에 앉아 움직이지 않은 채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성유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녀를 쳐다본 박한빈은 갑자기 차를 돌렸다. 박한빈이 미친 듯한 속도로 운전하기 시작하자 성유리는 무언가 심각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전벨트를 단단히 잡은 채 앞만 주시했다. 박한빈은 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본가가 한바탕 소란으로 뒤덮인 모습이 보였다. 집 안에서는 도우미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거실 한가운데 서 있던 김난희는 가슴을 치며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래서 내가 저런 여자를 집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했던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째야? 이젠 우리 박씨 가문 전체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거냐!” 성유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박한빈은 그녀를 뒤로한 채 서둘러 2층으로 뛰어 올라갔고 그의 발걸음은 평소와 달리 아주 다급했다. 그런 모습은 성유리에게도 낯설었다. 곧 의사와 구급차가 도착했고 잠시 후, 박한빈은 피투성이가 된 김서영을 안고 내려왔다. 김서영의 흰색 원피스는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는데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메스꺼움에 사로잡혀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모든 것을 토해냈다. 그날은 입동 날이었다. 금성 사람들에게 입동은 한 해의 추위를 대비하기 위해 보양식을 먹고 술빚은 경단을 나눠 먹으며 가족들과 함께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하지만 그날, 김서영은 과도로 자신의 복부를 찔렀고 의사는 칼이 20cm 깊이까지 들어갔다고 말했다. 성유리는 그녀가 얼마나 강한 결심을 했기에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김서영이 찌른 곳은 복부 중에서도 자궁에 가까운 자리였다. 그녀가 방금 전, 성유리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자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잡은 성유리는 그 손이 너무 차가워 깜짝 놀랐다. 마치 한 구의 시신처럼 싸늘하게 식어있는 박한빈의 손이 성유리는 믿기지 않았다. 만약 박한빈이 지금 그녀 옆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성유리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마도 성유리의 따뜻한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아서일까, 박한빈 또한 흠칫 놀랐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먼저 가세요. 제가 여기 있으면 되니까.” “아니. 난....” 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단칼에 거절하려고 했지만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맞아. 깨어나셔서 먼저 보는 사람이 나라면 또 기분이 언짢아지실 거야. 겨우 살았는데 다시 죽고 싶어질 수도 있을 거고.”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이미 결정을 내렸는지 다시 말했다. “나랑 같이 가자. 너도 좀 쉬어야지.” “괜찮아요. 여기 있어도 잘 휴식할 수 있어요. 게다가 간병인 한 명만 남겨두고 가면 박한빈 씨도 안심이 안 되시잖아요.” 성유리의 말에 이번엔 박한빈이 침묵했고 그녀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됐어요. 이제 그만 가보세요. 무슨 일 생기면 제가 전화 드릴게요.” 결국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대로 떠나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웬일인지 머릿속이 새하얘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성유리의 말에 움직이는 로봇처럼 박한빈은 앞으로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 밖을 나오자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뭔가 떠오른 박한빈은 바로 운전대를 잡아 본가로 향했다. 저녁에 그렇게 큰 일이 있었지만 본가는 이미 깨끗하게 정돈돼 있었다. 김난희와 가사도우미들도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다 평화로워 아무 일도 없어 보였다. 박한빈은 그날 처음으로 그 집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섬뜩한 공간인지 느꼈다. 마치 누구의 생사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고요하고 평소와 다른 점이 없이 똑같은 공간이 무서워졌다. 발걸음을 뚝 멈추고 가만히 서 있던 박한빈은 다시 안으로 발길
“얼마 전 뉴스에서도 본 것 같아. 지금은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고?” 김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하나 씨는 참 의리 있는 분이고 사씨 가문의 배경도 대단하지만 하늘이는 내 손녀야. 계속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고. 아마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겠지.” “그리고 수술 후에는 분명 재활과 회복에 시간이 필요할 텐데 금성의 의료 환경은 전국 최고 수준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게 최선의 선택일 거야.” “내가 사는 집은 너도 와봤잖아. 지금은 나랑 몇몇 가정부들만 있어서 아주 조용해. 걱정하지 마. 한빈이도 그곳에 자주 오지 않으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김서영의 말은 느리고 차분했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준비한 듯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이유를 풀어내며 성유리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성유리는 잠시 김서영을 주시하다가 물었다. “왜죠?” “뭐가?” “왜 저와 제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요?” “아까 말했듯이...” 성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죠. 진짜 이유는... 어머니가 저와 박한빈 씨 사이를 다시 이어보려고 이러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반박할 수는 없겠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내 또래 사람들 곁에 자식들과 손주들이 둘러싸인 모습을 보면 부럽더라고.” “혼자 산 시간이 너무 길어서 아이가 곁에 있으면 훨씬 활기찰 것 같아.” “그럼 만약...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면요? 수술을 거부하시겠어요?” “그럴 리 없지.”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하늘이는 내 손녀니까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제안일 뿐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준 제안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깨어난 성유리는 먼저 하늘이를 보러 갔고 김서영은 그녀를 따라 아이의 병실까지 향했다. 하지만 성유리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경계심을 느꼈던 걸까, 김서영은 쉽게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하늘이를 처음 보는 날인데 서둘러 오느라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걸려 병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지만 결국 끝까지 들어서지 않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아직 어린아이의 티가 묻어 있었다. 김서영은 그 소리를 듣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문틈으로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이의 작은 뒷모습과 동글동글한 머리와 하얀 팔이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하늘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 같았다. 하늘이의 실물을 본 김서영의 시선은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그때, 병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성유리가 나왔다. 그녀는 방금 맞고 있던 수액 바늘을 뽑으려 했으나 사하나의 강한 만류로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는 아직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자신의 병실로 돌아온 뒤에야 성유리가 먼저 김서영에게 물었다.“이건 오늘 내가 막 받은 결과야.” 김서영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성유리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성유리는 서류에 적힌 조합 일치라는 몇 글자를 보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어 김서영을 바라보았고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자 김서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맞아, 이건 나와 아이의 조합 결과야.” “언제부터... 이렇게 준비하신 거예요?” 성유리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전에 한빈이한테 얘기 들었어. 물론 나도 한빈이의 결정에 극구 반대했지만 걔 몸은 결국 본인의 것이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그가 내린 결정을 어머니인 나조차 강요할 수 없었어.”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손녀잖아. 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이고 유리 네가 그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어. 그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하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더 깊이 성유리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대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박한빈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한빈의 침묵은 성유리의 숨통을 정확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며 모든 것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쥐락펴락하는 것이 바로 전부터 박한빈의 특기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유리를 가장 아프게 만들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걸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다. 사하나는 그녀 곁에서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미 잠들어있는 하늘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아직 너무도 작고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라면 성유리는 아이가 점점 쇠약해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성유리 씨! 유리 언니.” 사하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대답을 듣지 못한 그녀는 성유리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한없이 깊은 어둠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성유리는 끝없이 긴 길을 걷고 있었다.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눈앞은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멈춰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멈출 수 없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앞에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성유리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디에서인가 나약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졌고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 그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여전히 안개는 짙었고 그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성유리는 안개를 걷어
성유리의 말을 들은 사하나는 눈에 띄게 멍해졌다. 그녀는 성유리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듯했고 몇 초가 지나서야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수술을 받고 싶지가 않대.” 성유리는 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말에 사하나는 즉시 이어폰을 벗으며 외쳤다. “박한빈 씨 정말 제정신이에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병상에 누워 있던 하늘이를 깨웠다. 깨어난 하늘이는 졸린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 성유리는 급히 하늘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가 너 깨웠니? 미안해.” 하늘이는 성유리와 사하나를 다시 번갈아 보았다. 그때 이미 사하나의 얼굴은 화가 나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 엄마랑 이모 싸웠어?” 하늘이가 물었다. “아니야. 그냥 이야기한 거야. 괜찮으니까 하늘이는 다시 자면 돼.” 성유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하늘이의 뺨을 쓰다듬어줬다. 하늘이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다른 이야기를 막 하며 아이의 주의를 돌렸다.성유리가 오랜 시간 달래고 나서야 하늘이는 다시 잠들었고 그제야 사하나는 숨을 고르고 조금 진정된 상태로 말했다. “솔직히 전 전혀 놀랍지 않아요.” 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그 사람 애초부터 아버지다운 면모가 없었잖아요. 언니가 아이를 낳을 때도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인데. 그리고 지금까지 아이가 아프다고 몇 번이나 보러 왔어요?” “박한빈 씨가 예전에 적합성 검사를 받아준 것도 병원 사람들 입을 막으려고 한 거였겠죠. 검사가 적합하지 않게 나왔더라면 그는 여전히 멋진 아버지 이미지를 유지했을 거예요. 하지만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오니까 그냥 도망친 것 같아요.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이제 와서 언니가 찾아가니까 대놓고 거부하잖아요. 이런 세상에 미친 놈을 봤나! 자기 아이를 위해 수술을 거부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게 말이 돼요? 하늘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태어났을까요?” 사하나는 최대
“자기 친자식을 미워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아이가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시겠다고요?” “그래. 내가 그 말을 했었지. 하지만 분명히 말할게. 난 이 수술 못 하겠어.” 박한빈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지금 성유리에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성유리의 말이 맞다. 박한빈은 약속을 어겼고 말한 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병원 규정에 따르면 반드시 본인이 병원에 와서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결정권은 박한빈에게 있었으니 그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의 손을 강제로 잡아 서명하게 만들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성유리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박한빈이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자기 아이가 정말로 위험에 처했을 때 그걸 눈 뜨고 지켜보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정말로 그런 냉혈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이미 목구멍이 꽉 막혀버린 것 같았다. “박한빈 씨, 전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 오히려 네가 날 미워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거든.”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막지 않았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다. 이 사실 또한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 박한빈이 성유리를 미워하듯 그녀 또한 그를 미워했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성유리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몰랐기 때문에. 하늘이는 여전히 병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의사들은 희망적인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이미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 의사들 눈에는 동의서 서명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박한빈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박한빈은 자신을 억제해 왔다. 결국 버림받은 사람은 그였으니까. 버려진 사람이 다시 상대를 붙잡고 이유를 묻는 것은 실패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에 재회한 이후 그는 한 번도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국 참지 못했다. 성유리가 직접 말해주는 정답이 너무 궁금했고 진심으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유리의 과거 행동들은 박한빈에게 너무도 모순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고생하고 싶지 않다며 떠났지만 정작 그의 물건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박한빈이 그때 성유리에게 해준 선물들은 아주 많았다. 그중 단 하나만이라도 가져갔다면 평생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유리가 말한 이유는 단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한 핑계였던 걸까?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한빈은 간절하게 답을 알고 싶어 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향했고 성유리는 잠시 그의 시선을 마주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는 제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어요.” “뭐라고?” “혼자였다면 당신과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를 당신 때문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성유리는 조용히 진실을 말했다. 그건 극적이거나 박한빈이 상상했던 불가피한 사연 같은 것도 아니었고 답은 그저 이렇게 간단했다.하지만 이 간단한 답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박한빈의 마음을 꿰뚫었다.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던 박한빈의 손에 힘이 천천히 풀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성유리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하늘이는 저에게 너무도 소중해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저는 모든 걸 버릴 수 있어요.” “알겠어. 그래 보이네.” 박한빈은 여전히 피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때는 주저 없이 나를 떠나고 이혼했겠지. 지금은 나랑 잠자리를 해서라도 동의서를 얻어내려는 거고.” 성
하지만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를 무시한 채 뒤돌아섰다.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당연히 그가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성유리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건 제 잘못이에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간절함이 더 묻어나 있었다.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아이는 아무 죄가 없잖아요. 제발...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성유리는 행여나 박한빈의 심기를 또 건드릴까 신중히 단어들을 선택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성유리는 이곳에서 박한빈의 시간을 조금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성유리도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은 사실 그녀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박한빈은 그녀가 무릎을 꿇고 굴욕적이게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기를 바랐다.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쳐다봐줬다. 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잡아 억지로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고 그렇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성유리의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한층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잠시 성유리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야.” 그의 말은 성유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는 한동안 마음을 다잡은 뒤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성유리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고 그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그녀의 눈빛은 박한빈이 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이 조금 담겨있
박한빈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성유리가 카드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들며 말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이번 거래 조건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보는 게 어때요?”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쳐다보았다. “이건 수술 동의서예요. 먼저 서명해 주세요.” 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 지난번 그는 자신이 약속한 적 없다고 했을 때 성유리는 반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행여나 같은 일이 반복이 되는 것이 두려운 성유리는 이번에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했다. 박한빈은 철저한 사업가였으니 결국 눈앞에 놓인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동의서 외에도 또 다른 계약서를 준비했는데 그 계약서에는 그들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계약서에 똑똑히 이런 문구를 적었다.자신이 박한빈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지만 그 조건은 하늘이가 회복되는 기간 동안에만 작용을 한다는 문구.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하늘이가 건강을 되찾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즉시 종료되며 앞으로는 아무런 관련도 없게 된다.] 계약서의 조항은 간단하지만 지나치리만큼 직설적이었다. 이 문서가 만약 언론에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둘 모두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거래의 도구로 내놓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박한빈은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조용히 서류만 주시하고 있었다. 짧은 몇 줄의 문장이었기에 그는 이미 내용을 다 읽었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바라봤다. “박 대표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제야 박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성유리는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단지 분풀이일 뿐일 거야.”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말했다. “나에게서 받은 좌절과 실망감을 이제 와서 나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제가 보기엔...” “만약 그 사람이 정말로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일을 가지고 나를 협박하진 않았을 거야.”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그의 말에 따르고 있는 것도 하늘이가 수술받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야. 이런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니 사하나, 나와 그 사람은 정말로 끝난 사이야.” ... 어느새 밤이 다시 찾아왔다.솔직히 말해서 성유리는 이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박한빈에게서 어떤 메시지가 올까 걱정했고 동시에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어쨌든 박한빈은 아직까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전날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뉴스에서는 전날 밤 박한빈이 어떤 연회에 참석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진 속 박한빈의 옆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화장이 조금 달라졌지만 성유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와 함께 마트에 갔던 여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유리에게 있어 함께 마트로 향하는 일은 꽤 친밀한 행위로 느껴졌다. 둘이 함께 살지 않는다면 마트에서 함께 필요한 물건을 고르며 자신들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일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박한빈은 항상 바빴다. 그의 옷은 계절마다 고급 맞춤 팀에서 직접 저택으로 보내졌고 생활용품 같은 사소한 물건에 시간을 쓰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낭비라는 것도 박한빈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어떤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을 하든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