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된 공간인 엘리베이터에서 성유리의 목소리는 고스란히 박한빈의 귀에 들렸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입을 꾹 닫아버렸고 그녀는 그 틈을 타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박한빈과 한 걸음 떨어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는 아무것도 잡혀있지 않는 자신의 손을 쳐다보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야.” 단순하고 짧은 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성유리는 당연히 박한빈의 대답을 믿지 않았다. 필경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야말로 진심일 테니까. 박한빈의 눈에 자기는 그저 낚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성유리는 잊지 않았다. 이런 일은 한두 번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 심지어 박한빈은 전에 지석민과 있었던 일들도 꺼내 자신을 모욕한 사람이니 성유리는 이제 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띵! 이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박한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먼저 나랑 같이 나가자.” “됐어요. 저 그냥 갈래요.” 성유리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으며 대답을 이어갔다. “여기 있어도 심심해요. 이럴 바에는 집에 가서 자는 게 더 좋잖아요.” “아직 일이 좀 남아서 그래. 다 하면 같이 가자.” “싫어요. 저...” 성유리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바로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박한빈 씨! 당장 저 내려놓으세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층은 지화 그룹의 제일 위층이었다. 박한빈의 사무실을 제외한 총비서실이 있는 층이기도 하다. 박한빈이 성유리를 들쳐 업은 채로 내리자 비서실에 있던 사람들은 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유리는 그들이 보내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고 순간 저항할 힘도 생기지 않아 그대로 박한빈과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사무실 문이 닫히자 박한빈은 성유리를 소파에 강제적으로 앉히더니 그녀를 자기 몸으로 깔았다. 금방 밥을 먹은 성유리는 위가 무거운 박한빈의 몸에 깔리자 담방이라도 토할
박한빈은 성유리를 멍해서 쳐다보다가 그녀가 구토를 다 하자 물 한 잔을 따라 건네주었다. 성유리는 물을 건네받으면서도 박한빈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병원 데려다줄까?” 박한빈은 갑자기 구토하는 성유리를 보고 놀랐는지 잔뜩 긴장하며 물었다. 성유리는 물로 입을 헹구고는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근데...” 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째려보며 되물었다. “아까 저를 들쳐 업지 않으셨다면 제가 토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 안 그래요?” 박한빈은 성유리와 같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는 박한빈에게 성유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업무 더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말을 마친 성유리가 몸을 일으켜 떠날 채비를 하자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오래 안 걸릴 거야.” 성유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사무실 책상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녀는 지금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박한빈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 마음먹었다. 박한빈은 이메일 두건과 몇 개의 계획안을 검토하고는 사인을 했다. 그중 하나의 서류에 문제가 생겼는지 박한빈은 당장 사람을 불러냈다. 성유리가 아직 기다리고 있기에 마음이 급한 박한빈은 잘못을 낸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잔뜩 화를 냈고 상대는 머리를 숙인 채 고개만 끄덕였다. 박한빈은 계획안을 상대에게 휙 던져버리며 소리를 질렀다. “다시 검토하고 올려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다시 검사하겠습니다.” 그 사람은 서류를 건네받고 사무실을 빠르게 떠났고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호되게 혼나던 사람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상대는 지화 그룹 프로젝트 부의 총대표이자 인주 프로젝트를 할 때 성유리와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사람이다. 그는 성유리 앞에서 늘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기에
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디저트 가게 앞을 지나던 중, 갑자기 차를 멈췄다. 성유리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했지만 처음에는 말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케이크를 건네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뗐다. “저 안 먹어요.” “조금만 먹어봐.” “게다가 이거 정말 맛있어 보이지 않아?” 박한빈은 성유리를 어린아이 달래듯 먹어보라고 연신 권했다. 성유리는 정교하고 독특한 디자인의 케이크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박한빈 씨가 드시면 저도 먹을게요.” 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보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에 대해 아는 것 중 몇 가지는 틀릴 수도 있지만, 입맛만큼은 확신이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이 디저트를 가장 싫어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가 평소에는 심지어 우유조차 잘 마시지 않는 것 또한 성유리는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먹어보라고 말을 했고 그가 절대 먹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케이크를 다시 밀어내려던 찰나, 박한빈이 느닷없이 말했다. “좋아. 네가 먹여주면 나도 먹을게.” 그의 대답에 성유리는 순간 당황했다. 그 틈을 타 박한빈은 케이크를 그녀 손에 쥐여주고는 차에 시동을 걸며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운전 중이라 먹기 불편해서.” 성유리는 그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고, 방금 그들의 대화가 초등학생처럼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묘한 복수심이 마음속에서 꿈틀댔다. “좋아요.” 그녀는 박한빈에게 먹여주기로 마음을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한빈이 산 케이크는 망고 맛의 두 층짜리 케이크로 두툼한 생크림이 얹어져 있었다. 성유리는 포장을 뜯고 식기를 꺼내 큰 한 숟갈을 떠서 신호가 빨간불로 바뀐 틈에 박한빈의 입 앞으로 마구 들이밀었다. “자, 드세요.” 박한빈은 케이크를 내려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나 질식시키려고 작정한 거 아니야? 살해 시도인가?” “보기에만 커 보
성유리가 방금 전의 놀라움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키스를 해왔고 순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살짝 열린 입술은 박한빈에게 기회를 주었는지 그의 입안에는 아직 케이크의 달콤한 향이 남아 있었다. 진한 망고 향이 성유리의 입안을 가득 채우자 그 달콤함 때문인지 그녀는 그를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가만히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한참 후에야 박한빈이 몸을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왜 가만히 있어?” 박한빈은 아주 가까이에서 성유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깊고 선명한 눈동자 안에 성유리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성유리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대답했다. “케이크 떨어질까 봐요.”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성유리의 손에 여전히 케이크가 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한빈은 분명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맛은 어때?” 박한빈이 물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물음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되물었다. “저 망고 알레르기 있는 거 몰라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한빈의 안색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움은 불과 2초 정도였고 박한빈은 곧 다시 정신을 다잡으며 말했다.“거짓말이지?” “뭐라고요?”“너한테 망고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내가 모를 리 없잖아.”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그를 속인 것이 맞았다. 원래는 박한빈의 놀란 얼굴과 미안해하는 모습을 볼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이번에는 박한빈이 오히려 성유리의 표정을 쳐다보는 쪽이 되었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잠시 쳐다보다 웃으며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무슨 말이 듣고 싶으신 거죠?” 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됐으니까 빨리 운전이나 해요. 저 집에 가서 더 잘 거예요.”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만 바라봤다. 그의
허나 지금의 박한빈은 혼자 자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심지어 성유리를 꼭 끌어안고 있어야만 잠들 수 있었다. 때때로 그녀가 한밤중에 박한빈의 팔을 밀쳐내고 침대 반대편으로 이동하면 박한빈은 곧바로 놀라 깨어났고 다시 성유리를 꼭 품에 안아야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날 밤, 박한빈은 한 번도 깨지 않고 단숨에 아침까지 쭉 잤다. 6시간 동안의 숙면은 그에게 충분했고 성유리 역시 여전히 그의 품 안에 있었다. 성유리의 잠든 얼굴은 순진하고 평온해 보였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내려앉고 입술은 꼭 다물고 있었으며 얼굴엔 잔머리 몇 가닥이 붙어 있었다. 박한빈은 손을 들어 다정다감하게 붙어있는 잔머리를 치워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어서 그의 입술은 점점 아래로 향했다. 성유리가 눈을 뜰 때쯤에는 이미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박한빈의 손은 성유리의 종아리를 잡고 있었고 그녀가 깨어난 것을 알아차린 박한빈은 살짝 웃으며 몸을 숙여 그녀에게 키스하려 했다. 그러나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 박한빈은 그녀가 무엇을 꺼리는지 알고 있었기에 가볍게 웃기만 할 뿐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귓불에 입을 맞췄다. 두 사람 사이 분위기가 더 무르익는 순간, 갑자기 아래층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저택 안의 다른 사람들은 이미 박한빈이 돌려보냈기에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이 있다면 직접 내려가 열어야 했다. 그 말인즉 박한빈 혹은 성유리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초인종은 계속 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한빈의 안색이 즉시 어두워졌지만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못한 듯 성유라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자 성유리가 못 참고 박한빈을 먼저 밀치며 말했다. “안 일어나요?” 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쳐다보다가 마치 재촉하듯 계속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결국 체념한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운을 주워 입은 그는 곧바로 문 앞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낮
박한빈은 본가에서 준비해 준 차에 타기 싫었는지 직접 운전해 본가로 향했다. 물론 성유리도 함께였다. 가는 길 내내 박한빈은 평소보다 기분이 더 좋아 보였고 한 손으로 운전대를, 다른 한 손으로 성유리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성유리는 이미 그런 박한빈을 뿌리칠 힘도 남아있지 않아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차는 달리고 달려 어느덧 본가에 도착했고 그제야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박세빈 씨는 이미 지화 그룹에 들어온 상황인가요? 그럼... 박한빈 씨에게 영향 되는 일은 없을까요?” 성유리가 갑자기 이런 물음을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박한빈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영향이 없다고 말하면 믿을 거야?”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시선을 돌리며 계속 말했다. “할머니께서 소유하고 있는 주식을 개한테 줬다고 해도 아직 걔는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얻지 못했어. 그러니까 지화에 합류했다고 하더라도 큰 파장은 일으키지 못할 거야.” “그렇지만 할머님은...” “응. 만약 정말로 박세빈을 높은 자리에 앉게 한다면 확실히 일이 번거롭게 될 거야. 근데 손주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진즉에 집으로 들이지 않았을까?” 박한빈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결국 할머니 눈에 박세빈도 그저 그런 도구로 보일 뿐이지.” “도구라니요?” 박한빈은 조금 생각하다 대답했다. “나를 고통스럽게 벌을 주기 위한 도구랄까?” 말은 쉽게 내뱉고 있는 박한빈이지만 사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김난희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섞여 있었다. 박한빈은 박세빈을 눈엣가시나 라이벌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투명 인간 취급을 하고 있다. 성유리는 어젯밤 그렇게 날뛰던 박한빈이 정말로 박세빈의 외모 때문에 그런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본가에 도착한 박한빈이 먼저 차에서 내렸고 성유리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지금 박세빈은 이미 본가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밥상에 앉아 있었고 성유리를 보는 순간 옅은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성유리가 미처
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옆에 있는 성유리는 박한빈이 화가 나 이빨을 가는 소리와 선명하게 튀어나온 핏줄들을 다 보고 있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두려워하는 것이 박세빈과의 경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박세빈을 돕는 사람이 김서영이라는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유리는 문득 박한빈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손가락만 움직이던 그녀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박한빈은 이내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더니 입을 뗐다. “이미 결정을 내리셨는데 이제 와서 저한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래도 너한테 말은 해야지. 네가 대표잖아.” 김서영의 덤덤한 말투에 박한빈은 또다시 웃었다. “그래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답을 마친 박한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계속 말했다. “말씀 다 끝나셨나요? 이제 저희 가도 됩니까?” “바쁘면 너 먼저 가. 나는 유리한테 할 말이 있어서.” “유리한테 무슨 할 말이 있으십니까?” “우리 둘 사이 일이야. 그냥 몇 마디 간단하게 할 거고. 왜? 걱정되니?”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없이 입술을 꾹 닫은 채로 성유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유리도 김서영의 말에 굳이 반박할 생각은 없어 보였기에 박한빈은 순간 지기가 너무 무력하다는 생각과 서운하다는 감정이 마구 터졌다. 박한빈은 원래 자신과 맞서려는 사람이 오직 박세빈일 줄 알았지만 김난희는 지금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히고 있었다. 게다가 김서영마저 지금 박세빈 주위를 맴돌려 했기에 박한빈은 성유리마저 그럴까봐 무서웠다. “밖에서 기다릴게.” 결국 박한빈은 잠긴 목소리로 성유리에게 말하고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서영은 그런 박한빈에게 신경 쓰지도 않으며 고개를 돌려 박세빈을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로 하지 않던 박세빈은 어쩔 줄은 몰라 했다. “너도 먼저 회사로 가봐.” 김서영이 박세빈에게 계속 말했다. “전 대표 쪽은 내가 이미 다 말해뒀어. 그분이랑
성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가더니 김서영에게 되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말 그대로지. 설마 한빈이를 떠날 생각이 없어진 거니?” 성유리는 김서영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이건 저와 그 사람 사이 일이잖아요. 게다가 어머님은 한빈 씨 친모인데 뭐가 어찌 됐든 박한빈 씨 쪽에 서야 하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그녀의 말에 정곡이 찔렸는지 침묵했다. 성유리는 김서영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순간, 김서영이 씩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한빈이가 안쓰럽다는 거야?” 성유리는 그녀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함을 느껴 무슨 대답을 하려 했지만 김서영이 먼저 말했다. “유리야, 지금 개한테 흔들리는 거지?” 가벼운 한마디일 뿐이지만 김서영의 말은 마치 총알처럼 정확히 성유리의 심장을 겨눴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서영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팔짱을 낀 채로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다 다시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 이건 너희 둘 일이니 결국 유리 네 선택이지. 만약 지금처럼 같이 생활하고 싶다면 나도 끼어들 생각은 없단다.” “유리야, 한빈이한테 마음이 흔들리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한번 잘 생각해 봐.” “맞다! 그리고 뭐 하나 모르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 너 혹시 피임약 자주 먹니?” 그제야 성유리가 김서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달 전, 한빈이가 전에 연락하던 의사한테 물어봤다고 하더라. 피임약이랑 비슷하게 생긴 약 뭐 있냐고. 사람 몸에 무해한 성분인 약이었으면 더 좋겠다는 말도 했어. 그래서 난 생각했지. 과연 유리 네가 지금 먹는 피임약이 진짜 약일까?” 김서영의 의미심장한 말에 성유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한빈이가 너를 위해 그랬다고 생각하지는 마. 걔는 그냥 아이가 갖고 싶었을지도 모르니까.” 김서영은 아주 평온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왜 그랬냐 묻는다면 아마 아이를 이용해 너를 곁에 남겨두기 위해서였을 거야.”
“자기 친자식을 미워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아이가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시겠다고요?” “그래. 내가 그 말을 했었지. 하지만 분명히 말할게. 난 이 수술 못 하겠어.” 박한빈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지금 성유리에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성유리의 말이 맞다. 박한빈은 약속을 어겼고 말한 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병원 규정에 따르면 반드시 본인이 병원에 와서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결정권은 박한빈에게 있었으니 그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의 손을 강제로 잡아 서명하게 만들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성유리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박한빈이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자기 아이가 정말로 위험에 처했을 때 그걸 눈 뜨고 지켜보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정말로 그런 냉혈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이미 목구멍이 꽉 막혀버린 것 같았다. “박한빈 씨, 전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 오히려 네가 날 미워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거든.”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막지 않았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다. 이 사실 또한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 박한빈이 성유리를 미워하듯 그녀 또한 그를 미워했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성유리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몰랐기 때문에. 하늘이는 여전히 병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의사들은 희망적인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이미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 의사들 눈에는 동의서 서명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박한빈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박한빈은 자신을 억제해 왔다. 결국 버림받은 사람은 그였으니까. 버려진 사람이 다시 상대를 붙잡고 이유를 묻는 것은 실패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에 재회한 이후 그는 한 번도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국 참지 못했다. 성유리가 직접 말해주는 정답이 너무 궁금했고 진심으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유리의 과거 행동들은 박한빈에게 너무도 모순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고생하고 싶지 않다며 떠났지만 정작 그의 물건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박한빈이 그때 성유리에게 해준 선물들은 아주 많았다. 그중 단 하나만이라도 가져갔다면 평생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유리가 말한 이유는 단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한 핑계였던 걸까?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한빈은 간절하게 답을 알고 싶어 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향했고 성유리는 잠시 그의 시선을 마주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는 제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어요.” “뭐라고?” “혼자였다면 당신과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를 당신 때문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성유리는 조용히 진실을 말했다. 그건 극적이거나 박한빈이 상상했던 불가피한 사연 같은 것도 아니었고 답은 그저 이렇게 간단했다.하지만 이 간단한 답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박한빈의 마음을 꿰뚫었다.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던 박한빈의 손에 힘이 천천히 풀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성유리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하늘이는 저에게 너무도 소중해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저는 모든 걸 버릴 수 있어요.” “알겠어. 그래 보이네.” 박한빈은 여전히 피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때는 주저 없이 나를 떠나고 이혼했겠지. 지금은 나랑 잠자리를 해서라도 동의서를 얻어내려는 거고.” 성
하지만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를 무시한 채 뒤돌아섰다.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당연히 그가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성유리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건 제 잘못이에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간절함이 더 묻어나 있었다.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아이는 아무 죄가 없잖아요. 제발...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성유리는 행여나 박한빈의 심기를 또 건드릴까 신중히 단어들을 선택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성유리는 이곳에서 박한빈의 시간을 조금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성유리도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은 사실 그녀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박한빈은 그녀가 무릎을 꿇고 굴욕적이게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기를 바랐다.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쳐다봐줬다. 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잡아 억지로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고 그렇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성유리의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한층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잠시 성유리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야.” 그의 말은 성유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는 한동안 마음을 다잡은 뒤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성유리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고 그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그녀의 눈빛은 박한빈이 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이 조금 담겨있
박한빈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성유리가 카드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들며 말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이번 거래 조건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보는 게 어때요?”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쳐다보았다. “이건 수술 동의서예요. 먼저 서명해 주세요.” 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 지난번 그는 자신이 약속한 적 없다고 했을 때 성유리는 반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행여나 같은 일이 반복이 되는 것이 두려운 성유리는 이번에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했다. 박한빈은 철저한 사업가였으니 결국 눈앞에 놓인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동의서 외에도 또 다른 계약서를 준비했는데 그 계약서에는 그들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계약서에 똑똑히 이런 문구를 적었다.자신이 박한빈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지만 그 조건은 하늘이가 회복되는 기간 동안에만 작용을 한다는 문구.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하늘이가 건강을 되찾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즉시 종료되며 앞으로는 아무런 관련도 없게 된다.] 계약서의 조항은 간단하지만 지나치리만큼 직설적이었다. 이 문서가 만약 언론에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둘 모두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거래의 도구로 내놓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박한빈은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조용히 서류만 주시하고 있었다. 짧은 몇 줄의 문장이었기에 그는 이미 내용을 다 읽었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바라봤다. “박 대표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제야 박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성유리는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단지 분풀이일 뿐일 거야.”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말했다. “나에게서 받은 좌절과 실망감을 이제 와서 나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제가 보기엔...” “만약 그 사람이 정말로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일을 가지고 나를 협박하진 않았을 거야.”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그의 말에 따르고 있는 것도 하늘이가 수술받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야. 이런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니 사하나, 나와 그 사람은 정말로 끝난 사이야.” ... 어느새 밤이 다시 찾아왔다.솔직히 말해서 성유리는 이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박한빈에게서 어떤 메시지가 올까 걱정했고 동시에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어쨌든 박한빈은 아직까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전날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뉴스에서는 전날 밤 박한빈이 어떤 연회에 참석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진 속 박한빈의 옆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화장이 조금 달라졌지만 성유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와 함께 마트에 갔던 여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유리에게 있어 함께 마트로 향하는 일은 꽤 친밀한 행위로 느껴졌다. 둘이 함께 살지 않는다면 마트에서 함께 필요한 물건을 고르며 자신들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일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박한빈은 항상 바빴다. 그의 옷은 계절마다 고급 맞춤 팀에서 직접 저택으로 보내졌고 생활용품 같은 사소한 물건에 시간을 쓰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낭비라는 것도 박한빈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어떤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을 하든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
“유리 언니? 성유리 씨!” 사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더니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사하나가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며 물었다. “정신이 어디 외딴곳으로 나가 있는 것 같아요.” “나... 괜찮아.” “그런데 다크서클이 왜 이렇게 심해요? 어제는 집에 가서 푹 쉬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병원에서 밤을 새웠을 때보다 더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어젯밤에 잘 못 잤어.” 성유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늘이를 못 봐서 걱정돼서 그런가 봐.” “뭐가 걱정이세요? 여기 이렇게 의사랑 간호사가 많은데. 게다가 의사 선생님도 말했잖아요. 이식 수술만 잘되면 하늘이는 곧 완치돼서 퇴원할 거라고.” 사하나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나저나 박한빈 씨는 언제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러 오는데요? 그 말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성유리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는 성유리의 모습을 사하나가 놓칠 리 없었다. “왜 그래요? 설마... 박한빈 씨가 마음을 바꾼 건 아니죠?” “아니야.” “근데 이상하잖아요. 어제도 병원에 안 왔고 오늘도 안 왔어요. 이게 뭘 의미하는 건데요? 검사가 끝난 걸 모를 리 없잖아요. 그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죠? 일부러 잘난 척하려고 그러는 건가? 언니한테 직접 와서 부탁하게 만들려고?”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하나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듯 언성을 높이며 계속 말했다. “미쳤나 봐요! 하늘이가 자기 친자식인데! 언니가 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대한다고요? 이건 완전 고의적인데?”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언니가 무릎 꿇고 빌기라도 바라는 건가요? 아님 자기 앞에서 사죄하면서 참회하라고? 정말...” 사하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성유리가 그녀를 진정시키듯 입을 뗐다. “진정해.” 사하나와는 달리 성유리는 오히려 차분한
박한빈은 언제나 어딜 가도 주목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성유리는 잘 알고 있다. 예전에도, 그리고 얼마 전에도 수많은 여자들이 그의 곁에 머물렀고 심지어 종래로 마트에 발을 들이지 않던 박한빈이 다른 여자와 함께 다니는 모습까지 보았었다. 박한빈이 원하기만 하면 그와 함께 침대에 올라가려는 여자들은 줄을 서 있을 것이다. 늘 인기가 많은 박한빈에게는 성유리를 제외하고도 다른 선택지가 많다. 그리고 자신은 그 많은 선택지 중에서 제일 좋은 선택이 될 리가 없었다. 예전에도 아니었으니 지금은 더더욱 아닐 것이 뻔했다. 그 순간, 박한빈의 몸이 굳어지더니 시선이 성유리의 흉터에 머물렀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시선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고 무슨 원인에서인지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입꼬리를 약간 올려 미소를 짓던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그래서 박한빈 씨는 계속하실 건가요? 확실하세요?”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어두워 성유리는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뭔가를 더 말하려는 찰나, 그는 고개를 숙였고 이내 박한빈의 입술이 그녀의 흉터에 닿았다. 부드럽고 섬세한 감촉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안색이 잔뜩 어두워지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단단히 눌러 제압했다. “당신...” 성유리는 뭔가 말하려 애썼지만 박한빈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쳐 하려던 말을 막아버렸다. 이런 감정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그녀는 이미 잊고 있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사실 성유리는 오늘 박한빈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오늘 밤을 함께 보내면 내일 수술을 받아들일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박한빈이 끝까지 자신과 사랑을 나눌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유리가 알던 박한빈은 늘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 흉터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니,
금세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박한빈은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면 피울수록 박한빈의 기분은 더욱더 뒤숭숭해졌다. 욕실 안에서 끝도 없이 씻고 있는 성유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결국 담배를 꺼버리고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박한빈이 손가락으로 문을 살짝 두드리자 또랑또랑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5분 줄 테니까 나와.” 말을 마친 박한빈은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 앉더니 시선을 욕실 문에 고정했다. 그러자 안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마침내 멈췄다. 성유리는 마치 안에서 휴대폰으로 시간을 재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히 5분이 다 되어가는 순간, 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녀의 가운으로 자신의 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고 이를 본 박한빈은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꼭 이래야 해? 네 몸에서 내가 못 본 데가 어디 있다고?” 성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땅바닥만 쳐다봤고 가운을 꽉 움켜쥔 손가락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박한빈은 지금 그녀가 폭발하기를 바랐다. 무엇이든 던지거나, 욕을 해도 되고 심지어는 자신을 물어뜯기라도 하길 바랐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쭈뼛거리던 성유리는 몸에 걸친 가운을 한 번 더 단단히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불 끄면 안 될까요?” “뭐라고?” “불... 끄고 싶어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아주 낮은 데다가 떨리기까지 했다. 마치 박한빈이 너무 두렵다는 듯이.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쭉 뻗어 그녀를 단숨에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성유리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의 몸은 이미 침대 위에 눕혀졌고 부드러운 매트리스가 그녀의 등을 받치자 이내 그녀의 눈앞에는 박한빈의 잔뜩 찌푸려져 있는 얼굴이 보였다. 그는 몸을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길게 늘어진 앞머리가 성유리의 뺨을 스치자 그녀는 더욱 떨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연기하려는 셈이야? 응?”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비웃으며 물었다. “내 아이까지 낳아준 몸인
이 층은 최고급 스위트룸이 있는 층이었다.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고 왠지 모를 스산함도 감돌았다. 성유리는 초인종을 누른 뒤 고개를 숙이고 자기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에서만 지내던 최근, 그녀의 하얀 운동화에는 어느새 흙이 묻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딛고 있는 고급스러운 브라운 카펫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기 지금 성유리가 서 있는 이 세상은 그녀의 세계가 아니었다. 성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알 수 없었다. 몇 초일 수도, 아니면 아주 긴 십여 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 시간이 한 세기처럼 길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손발이 저려오기 시작할 때쯤, 마침내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러나 문 너머의 사람을 본 순간, 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옆에 늘어져 있던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고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살짝 바라봤다. 박한빈은 방금 욕실에서 나온 상태였는지 허리에는 흰 수건 하나만 걸려 있었고 머리카락은 아직 마르지 않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방울은 하얗고 탄탄한 가슴을 타고 흘러내려 복근을 따라 아래로 이어졌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은 앞머리가 길어 눈을 거의 덮을 정도였지만 그 안의 깊고 어두운 눈빛은 성유리에게 똑똑히 보였다.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준 박한빈은 성유리를 본 체도 하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몇 걸음 걸어가던 박한빈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박한빈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먼저 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의 말에 성유리는 순간 숨이 가빠졌고 박한빈에게 되물었다. “뭐가 무슨 뜻이에요?” 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웃음을 터뜨렸다. “성유리, 네가 지금 나한테 질문을 하고 있어?” 그녀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내 박한빈은 벽에 몸을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