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본가에서 준비해 준 차에 타기 싫었는지 직접 운전해 본가로 향했다. 물론 성유리도 함께였다. 가는 길 내내 박한빈은 평소보다 기분이 더 좋아 보였고 한 손으로 운전대를, 다른 한 손으로 성유리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성유리는 이미 그런 박한빈을 뿌리칠 힘도 남아있지 않아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차는 달리고 달려 어느덧 본가에 도착했고 그제야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박세빈 씨는 이미 지화 그룹에 들어온 상황인가요? 그럼... 박한빈 씨에게 영향 되는 일은 없을까요?” 성유리가 갑자기 이런 물음을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박한빈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영향이 없다고 말하면 믿을 거야?”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시선을 돌리며 계속 말했다. “할머니께서 소유하고 있는 주식을 개한테 줬다고 해도 아직 걔는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얻지 못했어. 그러니까 지화에 합류했다고 하더라도 큰 파장은 일으키지 못할 거야.” “그렇지만 할머님은...” “응. 만약 정말로 박세빈을 높은 자리에 앉게 한다면 확실히 일이 번거롭게 될 거야. 근데 손주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진즉에 집으로 들이지 않았을까?” 박한빈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결국 할머니 눈에 박세빈도 그저 그런 도구로 보일 뿐이지.” “도구라니요?” 박한빈은 조금 생각하다 대답했다. “나를 고통스럽게 벌을 주기 위한 도구랄까?” 말은 쉽게 내뱉고 있는 박한빈이지만 사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김난희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섞여 있었다. 박한빈은 박세빈을 눈엣가시나 라이벌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투명 인간 취급을 하고 있다. 성유리는 어젯밤 그렇게 날뛰던 박한빈이 정말로 박세빈의 외모 때문에 그런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본가에 도착한 박한빈이 먼저 차에서 내렸고 성유리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지금 박세빈은 이미 본가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밥상에 앉아 있었고 성유리를 보는 순간 옅은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성유리가 미처
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옆에 있는 성유리는 박한빈이 화가 나 이빨을 가는 소리와 선명하게 튀어나온 핏줄들을 다 보고 있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두려워하는 것이 박세빈과의 경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박세빈을 돕는 사람이 김서영이라는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유리는 문득 박한빈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손가락만 움직이던 그녀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박한빈은 이내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더니 입을 뗐다. “이미 결정을 내리셨는데 이제 와서 저한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래도 너한테 말은 해야지. 네가 대표잖아.” 김서영의 덤덤한 말투에 박한빈은 또다시 웃었다. “그래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답을 마친 박한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계속 말했다. “말씀 다 끝나셨나요? 이제 저희 가도 됩니까?” “바쁘면 너 먼저 가. 나는 유리한테 할 말이 있어서.” “유리한테 무슨 할 말이 있으십니까?” “우리 둘 사이 일이야. 그냥 몇 마디 간단하게 할 거고. 왜? 걱정되니?”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없이 입술을 꾹 닫은 채로 성유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유리도 김서영의 말에 굳이 반박할 생각은 없어 보였기에 박한빈은 순간 지기가 너무 무력하다는 생각과 서운하다는 감정이 마구 터졌다. 박한빈은 원래 자신과 맞서려는 사람이 오직 박세빈일 줄 알았지만 김난희는 지금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히고 있었다. 게다가 김서영마저 지금 박세빈 주위를 맴돌려 했기에 박한빈은 성유리마저 그럴까봐 무서웠다. “밖에서 기다릴게.” 결국 박한빈은 잠긴 목소리로 성유리에게 말하고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서영은 그런 박한빈에게 신경 쓰지도 않으며 고개를 돌려 박세빈을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로 하지 않던 박세빈은 어쩔 줄은 몰라 했다. “너도 먼저 회사로 가봐.” 김서영이 박세빈에게 계속 말했다. “전 대표 쪽은 내가 이미 다 말해뒀어. 그분이랑
성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가더니 김서영에게 되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말 그대로지. 설마 한빈이를 떠날 생각이 없어진 거니?” 성유리는 김서영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이건 저와 그 사람 사이 일이잖아요. 게다가 어머님은 한빈 씨 친모인데 뭐가 어찌 됐든 박한빈 씨 쪽에 서야 하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그녀의 말에 정곡이 찔렸는지 침묵했다. 성유리는 김서영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순간, 김서영이 씩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한빈이가 안쓰럽다는 거야?” 성유리는 그녀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함을 느껴 무슨 대답을 하려 했지만 김서영이 먼저 말했다. “유리야, 지금 개한테 흔들리는 거지?” 가벼운 한마디일 뿐이지만 김서영의 말은 마치 총알처럼 정확히 성유리의 심장을 겨눴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서영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팔짱을 낀 채로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다 다시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 이건 너희 둘 일이니 결국 유리 네 선택이지. 만약 지금처럼 같이 생활하고 싶다면 나도 끼어들 생각은 없단다.” “유리야, 한빈이한테 마음이 흔들리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한번 잘 생각해 봐.” “맞다! 그리고 뭐 하나 모르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 너 혹시 피임약 자주 먹니?” 그제야 성유리가 김서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달 전, 한빈이가 전에 연락하던 의사한테 물어봤다고 하더라. 피임약이랑 비슷하게 생긴 약 뭐 있냐고. 사람 몸에 무해한 성분인 약이었으면 더 좋겠다는 말도 했어. 그래서 난 생각했지. 과연 유리 네가 지금 먹는 피임약이 진짜 약일까?” 김서영의 의미심장한 말에 성유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한빈이가 너를 위해 그랬다고 생각하지는 마. 걔는 그냥 아이가 갖고 싶었을지도 모르니까.” 김서영은 아주 평온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왜 그랬냐 묻는다면 아마 아이를 이용해 너를 곁에 남겨두기 위해서였을 거야.”
박한빈이 약방에 들어설 때, 마침 성유리가 이 말을 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약방 직원은 박한빈이 들어서자 친절하게 웃으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뭐가 필요하세요?” 박한빈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고 직원은 성유리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 직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무언가를 눈치 차린 듯 얼른 임신 테스트기 두 개를 꺼내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 물건을 사는 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고 결제를 하고 나서 박한빈이 다가가 물건을 챙기려 하자 성유리가 그의 손등을 세게 내리쳤다. 짝! 가게를 울리는 큰 소리에 직원들도 깜짝 놀랐는데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물건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박한빈은 그녀 뒤를 빠르게 따라나섰고 자신의 차에 올라타는 성유리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시간 동안 박한빈은 속으로 어떻게 말할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몸 상할까 봐 그랬다고 할까? 그렇다면 나는 왜 피임 도구를 안 쓴 거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까? 아니야. 다 알고 있을 거야.’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 때문에 박한빈은 도대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두 사람은 도연제로 가는 길 내내 침묵했고 도착하자마자 성유리는 발 빠르게 차에서 내려버렸다. 박한빈은 성유리와 같이 들어가고 싶었지만 성유리에 의해 밖에 문밖에 갇혔다. 아침까지만 해도 처리해야 할 업무가 가득 밀려있어 독촉 전화가 많이 걸려 왔지만 지금 그는 업무를 해결할 마음 따위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일 초가 일 년같이 느껴졌고 박한빈은 자신이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언제 또 이렇게 힘들게 기다렸더라?’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박한빈은 체감상 일 년을 밖에서 기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이때, 화장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결과를 물어보기도 전, 성유리가 그에게 임신 테스트기 하나를 던지듯 건넸다. “계속 피임약 먹었는데 임신했어요. 박 대표님, 왜 이런지 알려
성유리의 말을 박한빈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비록 성유리도 지금 자신이 말을 너무 심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뭐가 어떻든 싸울 때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은 제일 잔인한 일이니까. 아무리 지금 원망과 혐오의 감정이 넘쳐난다 해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은가! 게다가 아침에 친모한테 “배신”을 당해 기분이 상한 박한빈에게는 더더욱 그러면 안 됐다. 하지만 성유리는 결국 이성을 잃고 입 밖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었다. “역시. 너한테 그런 말을 했구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이 말을 했음에도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한빈은 갑자기 크게 웃더니 계속 말했다. “그래. 사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야. 필경 어머니 눈에 나는 그저 괴물일 뿐이니까. 만약 가능하다면 어머니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거야. 과거로 돌아가서 갓 태어난 나를 목 졸라 살해하고 싶을 거고.” “내가 아니었다면 어머니도 박씨 가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 묶여있지 않아도 됐고 자기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아 있을 수 있으니까.” 박한빈의 목소리는 점점 더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졌고 김서영에 대한 조롱의 의도 또한 더 강해졌다. 자기 말에도 입술을 오므리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지 않는 성유리를 보고 박한빈은 이제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 박한빈은 더는 성유리 앞에서 불쌍한 척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사실 박한빈도 일부러 성유리에게 신세 한탄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박한빈은 이내 자기감정을 추스르고는 말을 이어갔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네 약을 바꿨어. 아이를 이용해 너를 내 옆에 묶어두려고.” “네가 걱정하는 문제는 다 불필요한 거야. 우리가 앞으로도 서로 잘 지내면 아이도 모를 거잖아.” 성유리는 박한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아이가 모른다 해서 저도 모르는 건 아니잖아요?” “너도 아이를 가지고 싶은 거 아니었어? 넌 그저...”
성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 아이를 원한다고 했어요? 박한빈 씨, 제가 분명히 말해두는데 당신한테 절 묶어둘 기회는 절대 주지 않을 거예요. 박한빈 씨가 나가는 순간 전 당장 이 아이를 없앨 거라고요!” 박한빈은 자신의 마음이 이미 충분히 차갑고 단단하다고 생각했었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 그토록 행복했던 자신이 지금 얼마나 우스워 보이는지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는 자신이 아직 충분히 단단해지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 그렇기에 지금도 성유리의 말에 충격과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성유리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병실 침대에 혼자 앉아 있던 그녀는 두 사람의 첫 아이를 잃었고 그날 펑펑 울었었다. 성유리는 훌륭한 어머니가 될 거라고 박한빈은 늘 확신해 왔다.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예전에 보육원 행사에 참여했을 때, 박한빈은 그녀가 조용히 아이들을 위로하던 모습을 직접 보았다. 그토록 따뜻한 표정을 보던 박한빈은 좀처럼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토록 원했던 아이를 없애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박한빈은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고 성유리는 마치 자신의 말이 진짜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즉시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깜짝 놀란 박한빈은 곧바로 뒤따라가 뒤에서 성유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놔요! 박한빈, 이 미친놈! 손 떼라고! 제가 그랬죠? 당신이 오늘 저를 막아도 소용없어요. 전 이 아이를 원하지 않아요! 제 몸은 제 거예요. 저한테는 아이를 낳을지 말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요!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리로 절 속인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박한빈 씨는 절 존중하지 않았잖아요!” “이게 무슨 사랑이에요? 누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아이를 강요하냐고? 저도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없어요!” 미쳐 날뛰는 성유리를 보고도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 그녀를 품에 안고 침실로 향했더니 침대 위에 그녀를
그날 하루,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버텼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박한빈이 보낸 사람이 오긴 했지만 그들에겐 수갑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없었다. 수갑 한쪽은 그녀의 손목에, 다른 한쪽은 침대 헤드보드에 걸려 있었다. 그렇기에 성유리는 하루 종일 꼼짝없이 침대 위에 갇힌 채로 지내야만 했다. 그녀는 지금 자기가 마치 침대 위에 갇힌 짐승처럼 느껴졌다. 농촌에서 키우는 돼지나 소 말이다. 자기 생각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고 결국 자기는 단지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모님, 뭐라도 조금 드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옆에서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난감해진 가사도우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조용히 방을 나갔다. 성유리는 그들이 나가고 나서도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래층에서 익숙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성유리가 수도 없이 들어 너무도 익숙한 소리였다. 언젠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벅차올랐지만 행여나 남들이 눈치챌까 봐 감추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 소리를 들은 순간, 성유리의 마음엔 차가운 한기만이 가득 머물렀다. 곧이어 문밖에서 박한빈과 가사도우미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우미는 성유리가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듯했다. 박한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조용히 음식을 들고 직접 방으로 들어왔다. 성유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일어나서 좀 먹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딱딱하게 들렸다. 성유리는 그의 말에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자 박한빈은 비웃듯 말을 이어갔다. “네가 이러면 내가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똑똑히 말해두지만, 네가 아무리 굶어도 난 널 침대에 묶어놓고 매일 영양제를 맞게 할 수 있어. 아이가 태어날 시간이 되면, 바로 제왕절개 수술을 받게 만들 거고.” “내가
“박한빈 씨는 심지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었잖아요. 당신은 그저... 이익을 위해서였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정우보다 못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절대로 걔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요.” 사실 성유리는 연정우를 깊이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가장 약했던 순간에 연정우가 구세주나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났을 뿐이다. 성유리는 그런 연정우에게 믿음직함과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박한빈의 반복된 방해는 오히려 성유리가 연정우에 대한 감정을 더 깊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복수를 위해서라도 연정우를 좋아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안색은 순식간에 더 어두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고 성유리의 턱을 쥔 손에 힘이 더해져 손가락 마디까지 하얗게 질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 그럼 두고 봐. 며칠 안에 내가 연정우를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눈물로 빌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말이야. 어때? 그 꼴 한번 구경해보지 않을래? 네가 그 모습을 보고도 계속...” “그래도 전 정우를 계속 좋아할 거예요. 박한빈 씨가 그러면 오히려 더 많이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요.” 성유리는 그의 말을 단호히 끊어버렸다. “결국 제가 정우를 망쳤으니까 잘못한 건 저예요. 걔는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제가 정우한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 순간, 그는 그녀를 통째로 삼켜버리고 싶었다. 뼛속까지 부숴서 그녀가 더 이상 이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박한빈은 힘을 아끼지 않았고, 성유리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마치 서로를 물어뜯는 야수처럼 서로를 처절하게 파괴하려고 했다. 피비린내가 입안에 퍼지기 시작하자 결국 먼
“얼마 전 뉴스에서도 본 것 같아. 지금은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고?” 김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하나 씨는 참 의리 있는 분이고 사씨 가문의 배경도 대단하지만 하늘이는 내 손녀야. 계속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고. 아마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겠지.” “그리고 수술 후에는 분명 재활과 회복에 시간이 필요할 텐데 금성의 의료 환경은 전국 최고 수준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게 최선의 선택일 거야.” “내가 사는 집은 너도 와봤잖아. 지금은 나랑 몇몇 가정부들만 있어서 아주 조용해. 걱정하지 마. 한빈이도 그곳에 자주 오지 않으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김서영의 말은 느리고 차분했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준비한 듯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이유를 풀어내며 성유리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성유리는 잠시 김서영을 주시하다가 물었다. “왜죠?” “뭐가?” “왜 저와 제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요?” “아까 말했듯이...” 성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죠. 진짜 이유는... 어머니가 저와 박한빈 씨 사이를 다시 이어보려고 이러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반박할 수는 없겠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내 또래 사람들 곁에 자식들과 손주들이 둘러싸인 모습을 보면 부럽더라고.” “혼자 산 시간이 너무 길어서 아이가 곁에 있으면 훨씬 활기찰 것 같아.” “그럼 만약...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면요? 수술을 거부하시겠어요?” “그럴 리 없지.”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하늘이는 내 손녀니까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제안일 뿐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준 제안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깨어난 성유리는 먼저 하늘이를 보러 갔고 김서영은 그녀를 따라 아이의 병실까지 향했다. 하지만 성유리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경계심을 느꼈던 걸까, 김서영은 쉽게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하늘이를 처음 보는 날인데 서둘러 오느라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걸려 병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지만 결국 끝까지 들어서지 않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아직 어린아이의 티가 묻어 있었다. 김서영은 그 소리를 듣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문틈으로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이의 작은 뒷모습과 동글동글한 머리와 하얀 팔이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하늘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 같았다. 하늘이의 실물을 본 김서영의 시선은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그때, 병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성유리가 나왔다. 그녀는 방금 맞고 있던 수액 바늘을 뽑으려 했으나 사하나의 강한 만류로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는 아직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자신의 병실로 돌아온 뒤에야 성유리가 먼저 김서영에게 물었다.“이건 오늘 내가 막 받은 결과야.” 김서영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성유리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성유리는 서류에 적힌 조합 일치라는 몇 글자를 보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어 김서영을 바라보았고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자 김서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맞아, 이건 나와 아이의 조합 결과야.” “언제부터... 이렇게 준비하신 거예요?” 성유리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전에 한빈이한테 얘기 들었어. 물론 나도 한빈이의 결정에 극구 반대했지만 걔 몸은 결국 본인의 것이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그가 내린 결정을 어머니인 나조차 강요할 수 없었어.”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손녀잖아. 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이고 유리 네가 그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어. 그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하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더 깊이 성유리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대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박한빈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한빈의 침묵은 성유리의 숨통을 정확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며 모든 것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쥐락펴락하는 것이 바로 전부터 박한빈의 특기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유리를 가장 아프게 만들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걸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다. 사하나는 그녀 곁에서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미 잠들어있는 하늘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아직 너무도 작고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라면 성유리는 아이가 점점 쇠약해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성유리 씨! 유리 언니.” 사하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대답을 듣지 못한 그녀는 성유리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한없이 깊은 어둠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성유리는 끝없이 긴 길을 걷고 있었다.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눈앞은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멈춰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멈출 수 없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앞에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성유리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디에서인가 나약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졌고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 그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여전히 안개는 짙었고 그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성유리는 안개를 걷어
성유리의 말을 들은 사하나는 눈에 띄게 멍해졌다. 그녀는 성유리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듯했고 몇 초가 지나서야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수술을 받고 싶지가 않대.” 성유리는 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말에 사하나는 즉시 이어폰을 벗으며 외쳤다. “박한빈 씨 정말 제정신이에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병상에 누워 있던 하늘이를 깨웠다. 깨어난 하늘이는 졸린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 성유리는 급히 하늘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가 너 깨웠니? 미안해.” 하늘이는 성유리와 사하나를 다시 번갈아 보았다. 그때 이미 사하나의 얼굴은 화가 나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 엄마랑 이모 싸웠어?” 하늘이가 물었다. “아니야. 그냥 이야기한 거야. 괜찮으니까 하늘이는 다시 자면 돼.” 성유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하늘이의 뺨을 쓰다듬어줬다. 하늘이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다른 이야기를 막 하며 아이의 주의를 돌렸다.성유리가 오랜 시간 달래고 나서야 하늘이는 다시 잠들었고 그제야 사하나는 숨을 고르고 조금 진정된 상태로 말했다. “솔직히 전 전혀 놀랍지 않아요.” 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그 사람 애초부터 아버지다운 면모가 없었잖아요. 언니가 아이를 낳을 때도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인데. 그리고 지금까지 아이가 아프다고 몇 번이나 보러 왔어요?” “박한빈 씨가 예전에 적합성 검사를 받아준 것도 병원 사람들 입을 막으려고 한 거였겠죠. 검사가 적합하지 않게 나왔더라면 그는 여전히 멋진 아버지 이미지를 유지했을 거예요. 하지만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오니까 그냥 도망친 것 같아요.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이제 와서 언니가 찾아가니까 대놓고 거부하잖아요. 이런 세상에 미친 놈을 봤나! 자기 아이를 위해 수술을 거부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게 말이 돼요? 하늘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태어났을까요?” 사하나는 최대
“자기 친자식을 미워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아이가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시겠다고요?” “그래. 내가 그 말을 했었지. 하지만 분명히 말할게. 난 이 수술 못 하겠어.” 박한빈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지금 성유리에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성유리의 말이 맞다. 박한빈은 약속을 어겼고 말한 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병원 규정에 따르면 반드시 본인이 병원에 와서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결정권은 박한빈에게 있었으니 그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의 손을 강제로 잡아 서명하게 만들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성유리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박한빈이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자기 아이가 정말로 위험에 처했을 때 그걸 눈 뜨고 지켜보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정말로 그런 냉혈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이미 목구멍이 꽉 막혀버린 것 같았다. “박한빈 씨, 전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 오히려 네가 날 미워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거든.”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막지 않았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다. 이 사실 또한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 박한빈이 성유리를 미워하듯 그녀 또한 그를 미워했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성유리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몰랐기 때문에. 하늘이는 여전히 병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의사들은 희망적인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이미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 의사들 눈에는 동의서 서명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박한빈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박한빈은 자신을 억제해 왔다. 결국 버림받은 사람은 그였으니까. 버려진 사람이 다시 상대를 붙잡고 이유를 묻는 것은 실패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에 재회한 이후 그는 한 번도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국 참지 못했다. 성유리가 직접 말해주는 정답이 너무 궁금했고 진심으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유리의 과거 행동들은 박한빈에게 너무도 모순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고생하고 싶지 않다며 떠났지만 정작 그의 물건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박한빈이 그때 성유리에게 해준 선물들은 아주 많았다. 그중 단 하나만이라도 가져갔다면 평생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유리가 말한 이유는 단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한 핑계였던 걸까?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한빈은 간절하게 답을 알고 싶어 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향했고 성유리는 잠시 그의 시선을 마주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는 제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어요.” “뭐라고?” “혼자였다면 당신과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를 당신 때문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성유리는 조용히 진실을 말했다. 그건 극적이거나 박한빈이 상상했던 불가피한 사연 같은 것도 아니었고 답은 그저 이렇게 간단했다.하지만 이 간단한 답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박한빈의 마음을 꿰뚫었다.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던 박한빈의 손에 힘이 천천히 풀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성유리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하늘이는 저에게 너무도 소중해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저는 모든 걸 버릴 수 있어요.” “알겠어. 그래 보이네.” 박한빈은 여전히 피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때는 주저 없이 나를 떠나고 이혼했겠지. 지금은 나랑 잠자리를 해서라도 동의서를 얻어내려는 거고.” 성
하지만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를 무시한 채 뒤돌아섰다.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당연히 그가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성유리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건 제 잘못이에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간절함이 더 묻어나 있었다.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아이는 아무 죄가 없잖아요. 제발...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성유리는 행여나 박한빈의 심기를 또 건드릴까 신중히 단어들을 선택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성유리는 이곳에서 박한빈의 시간을 조금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성유리도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은 사실 그녀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박한빈은 그녀가 무릎을 꿇고 굴욕적이게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기를 바랐다.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쳐다봐줬다. 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잡아 억지로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고 그렇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성유리의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한층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잠시 성유리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야.” 그의 말은 성유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는 한동안 마음을 다잡은 뒤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성유리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고 그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그녀의 눈빛은 박한빈이 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이 조금 담겨있
박한빈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성유리가 카드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들며 말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이번 거래 조건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보는 게 어때요?”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쳐다보았다. “이건 수술 동의서예요. 먼저 서명해 주세요.” 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 지난번 그는 자신이 약속한 적 없다고 했을 때 성유리는 반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행여나 같은 일이 반복이 되는 것이 두려운 성유리는 이번에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했다. 박한빈은 철저한 사업가였으니 결국 눈앞에 놓인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동의서 외에도 또 다른 계약서를 준비했는데 그 계약서에는 그들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계약서에 똑똑히 이런 문구를 적었다.자신이 박한빈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지만 그 조건은 하늘이가 회복되는 기간 동안에만 작용을 한다는 문구.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하늘이가 건강을 되찾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즉시 종료되며 앞으로는 아무런 관련도 없게 된다.] 계약서의 조항은 간단하지만 지나치리만큼 직설적이었다. 이 문서가 만약 언론에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둘 모두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거래의 도구로 내놓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박한빈은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조용히 서류만 주시하고 있었다. 짧은 몇 줄의 문장이었기에 그는 이미 내용을 다 읽었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바라봤다. “박 대표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제야 박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성유리는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단지 분풀이일 뿐일 거야.”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말했다. “나에게서 받은 좌절과 실망감을 이제 와서 나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제가 보기엔...” “만약 그 사람이 정말로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일을 가지고 나를 협박하진 않았을 거야.”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그의 말에 따르고 있는 것도 하늘이가 수술받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야. 이런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니 사하나, 나와 그 사람은 정말로 끝난 사이야.” ... 어느새 밤이 다시 찾아왔다.솔직히 말해서 성유리는 이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박한빈에게서 어떤 메시지가 올까 걱정했고 동시에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어쨌든 박한빈은 아직까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전날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뉴스에서는 전날 밤 박한빈이 어떤 연회에 참석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진 속 박한빈의 옆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화장이 조금 달라졌지만 성유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와 함께 마트에 갔던 여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유리에게 있어 함께 마트로 향하는 일은 꽤 친밀한 행위로 느껴졌다. 둘이 함께 살지 않는다면 마트에서 함께 필요한 물건을 고르며 자신들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일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박한빈은 항상 바빴다. 그의 옷은 계절마다 고급 맞춤 팀에서 직접 저택으로 보내졌고 생활용품 같은 사소한 물건에 시간을 쓰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낭비라는 것도 박한빈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어떤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을 하든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