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이 약방에 들어설 때, 마침 성유리가 이 말을 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약방 직원은 박한빈이 들어서자 친절하게 웃으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뭐가 필요하세요?” 박한빈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고 직원은 성유리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 직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무언가를 눈치 차린 듯 얼른 임신 테스트기 두 개를 꺼내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 물건을 사는 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고 결제를 하고 나서 박한빈이 다가가 물건을 챙기려 하자 성유리가 그의 손등을 세게 내리쳤다. 짝! 가게를 울리는 큰 소리에 직원들도 깜짝 놀랐는데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물건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박한빈은 그녀 뒤를 빠르게 따라나섰고 자신의 차에 올라타는 성유리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시간 동안 박한빈은 속으로 어떻게 말할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몸 상할까 봐 그랬다고 할까? 그렇다면 나는 왜 피임 도구를 안 쓴 거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까? 아니야. 다 알고 있을 거야.’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 때문에 박한빈은 도대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두 사람은 도연제로 가는 길 내내 침묵했고 도착하자마자 성유리는 발 빠르게 차에서 내려버렸다. 박한빈은 성유리와 같이 들어가고 싶었지만 성유리에 의해 밖에 문밖에 갇혔다. 아침까지만 해도 처리해야 할 업무가 가득 밀려있어 독촉 전화가 많이 걸려 왔지만 지금 그는 업무를 해결할 마음 따위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일 초가 일 년같이 느껴졌고 박한빈은 자신이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언제 또 이렇게 힘들게 기다렸더라?’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박한빈은 체감상 일 년을 밖에서 기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이때, 화장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결과를 물어보기도 전, 성유리가 그에게 임신 테스트기 하나를 던지듯 건넸다. “계속 피임약 먹었는데 임신했어요. 박 대표님, 왜 이런지 알려
성유리의 말을 박한빈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비록 성유리도 지금 자신이 말을 너무 심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뭐가 어떻든 싸울 때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은 제일 잔인한 일이니까. 아무리 지금 원망과 혐오의 감정이 넘쳐난다 해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은가! 게다가 아침에 친모한테 “배신”을 당해 기분이 상한 박한빈에게는 더더욱 그러면 안 됐다. 하지만 성유리는 결국 이성을 잃고 입 밖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었다. “역시. 너한테 그런 말을 했구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이 말을 했음에도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한빈은 갑자기 크게 웃더니 계속 말했다. “그래. 사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야. 필경 어머니 눈에 나는 그저 괴물일 뿐이니까. 만약 가능하다면 어머니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거야. 과거로 돌아가서 갓 태어난 나를 목 졸라 살해하고 싶을 거고.” “내가 아니었다면 어머니도 박씨 가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 묶여있지 않아도 됐고 자기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아 있을 수 있으니까.” 박한빈의 목소리는 점점 더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졌고 김서영에 대한 조롱의 의도 또한 더 강해졌다. 자기 말에도 입술을 오므리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지 않는 성유리를 보고 박한빈은 이제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 박한빈은 더는 성유리 앞에서 불쌍한 척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사실 박한빈도 일부러 성유리에게 신세 한탄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박한빈은 이내 자기감정을 추스르고는 말을 이어갔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네 약을 바꿨어. 아이를 이용해 너를 내 옆에 묶어두려고.” “네가 걱정하는 문제는 다 불필요한 거야. 우리가 앞으로도 서로 잘 지내면 아이도 모를 거잖아.” 성유리는 박한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아이가 모른다 해서 저도 모르는 건 아니잖아요?” “너도 아이를 가지고 싶은 거 아니었어? 넌 그저...”
성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 아이를 원한다고 했어요? 박한빈 씨, 제가 분명히 말해두는데 당신한테 절 묶어둘 기회는 절대 주지 않을 거예요. 박한빈 씨가 나가는 순간 전 당장 이 아이를 없앨 거라고요!” 박한빈은 자신의 마음이 이미 충분히 차갑고 단단하다고 생각했었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 그토록 행복했던 자신이 지금 얼마나 우스워 보이는지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는 자신이 아직 충분히 단단해지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 그렇기에 지금도 성유리의 말에 충격과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성유리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병실 침대에 혼자 앉아 있던 그녀는 두 사람의 첫 아이를 잃었고 그날 펑펑 울었었다. 성유리는 훌륭한 어머니가 될 거라고 박한빈은 늘 확신해 왔다.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예전에 보육원 행사에 참여했을 때, 박한빈은 그녀가 조용히 아이들을 위로하던 모습을 직접 보았다. 그토록 따뜻한 표정을 보던 박한빈은 좀처럼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토록 원했던 아이를 없애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박한빈은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고 성유리는 마치 자신의 말이 진짜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즉시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깜짝 놀란 박한빈은 곧바로 뒤따라가 뒤에서 성유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놔요! 박한빈, 이 미친놈! 손 떼라고! 제가 그랬죠? 당신이 오늘 저를 막아도 소용없어요. 전 이 아이를 원하지 않아요! 제 몸은 제 거예요. 저한테는 아이를 낳을지 말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요!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리로 절 속인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박한빈 씨는 절 존중하지 않았잖아요!” “이게 무슨 사랑이에요? 누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아이를 강요하냐고? 저도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없어요!” 미쳐 날뛰는 성유리를 보고도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 그녀를 품에 안고 침실로 향했더니 침대 위에 그녀를
그날 하루,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버텼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박한빈이 보낸 사람이 오긴 했지만 그들에겐 수갑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없었다. 수갑 한쪽은 그녀의 손목에, 다른 한쪽은 침대 헤드보드에 걸려 있었다. 그렇기에 성유리는 하루 종일 꼼짝없이 침대 위에 갇힌 채로 지내야만 했다. 그녀는 지금 자기가 마치 침대 위에 갇힌 짐승처럼 느껴졌다. 농촌에서 키우는 돼지나 소 말이다. 자기 생각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고 결국 자기는 단지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모님, 뭐라도 조금 드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옆에서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난감해진 가사도우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조용히 방을 나갔다. 성유리는 그들이 나가고 나서도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래층에서 익숙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성유리가 수도 없이 들어 너무도 익숙한 소리였다. 언젠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벅차올랐지만 행여나 남들이 눈치챌까 봐 감추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 소리를 들은 순간, 성유리의 마음엔 차가운 한기만이 가득 머물렀다. 곧이어 문밖에서 박한빈과 가사도우미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우미는 성유리가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듯했다. 박한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조용히 음식을 들고 직접 방으로 들어왔다. 성유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일어나서 좀 먹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딱딱하게 들렸다. 성유리는 그의 말에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자 박한빈은 비웃듯 말을 이어갔다. “네가 이러면 내가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똑똑히 말해두지만, 네가 아무리 굶어도 난 널 침대에 묶어놓고 매일 영양제를 맞게 할 수 있어. 아이가 태어날 시간이 되면, 바로 제왕절개 수술을 받게 만들 거고.” “내가
“박한빈 씨는 심지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었잖아요. 당신은 그저... 이익을 위해서였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정우보다 못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절대로 걔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요.” 사실 성유리는 연정우를 깊이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가장 약했던 순간에 연정우가 구세주나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났을 뿐이다. 성유리는 그런 연정우에게 믿음직함과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박한빈의 반복된 방해는 오히려 성유리가 연정우에 대한 감정을 더 깊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복수를 위해서라도 연정우를 좋아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안색은 순식간에 더 어두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고 성유리의 턱을 쥔 손에 힘이 더해져 손가락 마디까지 하얗게 질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 그럼 두고 봐. 며칠 안에 내가 연정우를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눈물로 빌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말이야. 어때? 그 꼴 한번 구경해보지 않을래? 네가 그 모습을 보고도 계속...” “그래도 전 정우를 계속 좋아할 거예요. 박한빈 씨가 그러면 오히려 더 많이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요.” 성유리는 그의 말을 단호히 끊어버렸다. “결국 제가 정우를 망쳤으니까 잘못한 건 저예요. 걔는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제가 정우한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 순간, 그는 그녀를 통째로 삼켜버리고 싶었다. 뼛속까지 부숴서 그녀가 더 이상 이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박한빈은 힘을 아끼지 않았고, 성유리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마치 서로를 물어뜯는 야수처럼 서로를 처절하게 파괴하려고 했다. 피비린내가 입안에 퍼지기 시작하자 결국 먼
급하게 멈추는 차의 브레이크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집사가 바로 밖으로 달려 나갔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자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도련님,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그의 말을 들었음에도 박한빈은 그를 무시한 채 곧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박한빈의 어두운 표정에 집사는 순간 당황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가며 막아섰다. 그러자 박한빈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비키세요!” 평소 차분하고 온화한 모습을 유지하던 박한빈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집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김서영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계단 아래로 내려왔지만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왔니?” 박한빈은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보아하니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네.” 이 순간, 그는 김서영에게 존댓말조차 쓸 생각이 없었다. 김서영은 그런 걸 개의치 않는지 뒤를 돌며 말했다. “들어가자, 서재로.” 박한빈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서재 문이 닫히고, 넓은 공간에는 둘만 남았다. “오늘 성유리에게 무슨 말을 했죠?” 박한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별말 안 했어.” “허허” 박한빈은 김서영을 잔뜩 비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전 이해가 안 되네요. 제가 그렇게 미우세요? 제가 잘되는 꼴을 보기 싫은 겁니까? 모성애라는 게 이기심 없이 위대한 거라던데 당신한텐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네요.” “다른 어머니들처럼 희생하라는 말은 안 할게요. 제가 당신에게 뭘 바랄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이제 겨우 제가 원하는 걸 이루려는 찰나에 왜 그걸 끊어놓으려는 겁니까?” 박한빈이 말을 끝내자, 김서영은 잠시 침묵했다.그는 그녀가 무언가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김서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질문, 나도 전에 너한테 했던 적이 있지.” “아, 그래서 아직도 진성민 씨 일로 절 원망하는 거군요.”
그녀는 말을 하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웠다. 그 눈빛은 박한빈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박한빈은 김서영의 표정을 보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결국 어머니는 박세빈 편도 아니고 내 편도 아니란 거네요.” 상대방은 그의 말에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박한빈은 답을 알 수 있었다. 박한빈은 김서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으려는 듯 냉정히 뒤를 돌았다. “그렇다면 이제 일은 간단해지겠네요.” 그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사실 박한빈은 마음 한구석에 아주 조금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서라고, 혹은 성유리와 더 솔직해지게 하려고 그랬다고 변명이라도 해준다면 설령 그런 변명이 억지스럽고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해도 그는 믿으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거짓말조차 하지 않았고 그 순간, 박한빈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망설임마저 사라졌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박한빈의 삶에서 낯설고 무의미했지만 “적”이라면 다룰 방법은 명확했다. 어차피 그는 어릴 적부터 늘 혼자였으니까, 익숙한 일이었다. 박한빈은 다시 차를 몰고 도연제로 돌아갔다. 의사는 이미 와 있었고 그는 성유리에게 진정제를 투여했다고 말하며 지금은 수액을 놓고 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의사는 이런 말을 조심스레 덧붙였다. “지금 환자분은 임신 중입니다. 이렇게 극심한 감정 변화는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산모와 아이 모두 위험합니다.” 의사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듣기만 했다. “알겠습니다.”의사는 박한빈의 짧은 대답에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대화 주제를 돌렸다. “도련님, 손에 난 상처는... 치료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필요 없습니다.” 박한빈은 의사 말에 거절 의사를 비추며 계단을 올라가려다 문득 멈춰 서더니 고개를 돌려
성유리가 눈을 떴을 때도 그녀는 변함없이 침대에 묶여있었다. 이번에 묶인 손은 오른손이 아닌 왼손이었는데 성유리가 강렬히 저항하다 손목에 난 상처를 박한빈이 본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성유리의 손목을 묶고 있는 물건은 수갑이 아닌 넥타이였다. 하나에 몇십억씩 하는 값비싼 넥타이가 성유리의 손목을 묶는 도구로 쓰이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성유리는 묶이지 않은 오른손을 힘껏 뻗어 그 넥타이를 끊어버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박한빈이 무슨 방법으로 넥타이를 묶었는지 성유리가 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단단하게 묶였다. 성유리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처럼 넥타이가 세게 묶이면 묶일수록 점점 이성을 잃더니 붉어진 두 눈으로 뜯어버리려고 했다. 한 손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성유리는 이빨까지 동원해 넥타이와 “승부”를 봤다. 성유리가 저도 모르게 자기 살을 물어뜯어 입에 피까지 나고 있었지만 비싼 물건이라 그런지 넥타이는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았다. 퍽! 손으로도 안 되고 이로도 안 되자 성유리는 자기 손을 벽에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다. 큰 소리에 가사도우미가 깜짝 놀라며 방 안으로 들어오자 성유리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가위 내놔요!” 도우미는 성유리의 말에도 요지부동이었다. “박한빈이 월급을 얼마나 주는 거죠? 제가 그 두 배를 드릴 테니 빨리 가위 내놔요!” 귀를 찌를 듯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성유리는 머리카락까지 풀어 헤쳐 정말 정신병자 같았다. 아니, 어쩌면 정말 정신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성유리는 지금 박한빈 때문에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다. 성유리가 아무리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도 가사도우미는 꿈쩍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와 달래주기 시작했다. “사모님, 너무 흥분하지 마셔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 임신 중이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절대안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셨잖아요.” 도우미의 말에 벽에 손을 힘껏 내리찍던 성유리가 하던 행동을 멈췄고 고개를 뚝 떨구더니 이를 꽉 깨물었다. 미쳐버릴
성유리는 사람들의 예상보다 도도하지 않았다. 적어도 대화에 있어선 상대가 무슨 말을 하던 하나하나 다 성의 있게 대답했다.누군가 다음번에 함께 전시회를 보러 가자거나 음악회를 들으러 가자고 제안하면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며 흔쾌히 응했다.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불편해하고 침묵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홍지은이었다.결국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그녀는 간단히 양해를 구한 뒤,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세면대 앞에 선 홍지은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 안의 물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그제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성유리가 왜 자신을 도와 거짓을 꾸며줬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얼마 전까지 신영지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상대는 여전히 그녀와 성유리의 관계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그래서 남편 측과의 협력도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성유리가 어떤 의도로 이 일을 했든 간에 자신이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이제 남은 건, 성유리를 얼마만큼 이용할 수 있는가 뿐이었다.홍지은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성유리였다.둘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성유리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온화하고 따뜻했다.그러나 홍지은은 순간적으로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리고는 곧바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그 질문에 성유리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뭐 하려는 거냐고요?”“왜 나를 도와서 저 사람들에게 잘 보이게 해준 거냐고.”“전 도와준 적 없어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그저 지난번 경매장에서... 너무 죄송해서 그랬던 것뿐이에요.”“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홍지은은 성유리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계속 물었다.“네가 뭐가 미안한데? 지금 박한빈 씨가 온 신경을
“사모님!”누군가의 열정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홍지은은 순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상대가 점점 가까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발 물러섰지만 상대는 이미 홍지은의 손을 잡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오셨네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요!”“저를... 왜?”홍지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직됨이 묻어 있었다.솔직히, 이런 상황이 낯설지는 않았다.예전 학창 시절에도 이런 일을 수없이 봐왔다.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친절하게’ 누군가를 특정한 장소로 데려간 뒤, 마음껏 ‘즐기는’ 광경.단지 그때는 자신이 기다리는 입장이었을 뿐 지금처럼 직접 끌려가는 입장은 아니었다.막상 위치가 바뀌니 마음속에 스며드는 건 불안감뿐이었다.사실, 오늘 초대를 받았을 때부터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경매장에서 자신과 성유리에 대한 거짓말이 탄로 난 이후, 며칠 새 단체 채팅방에서도 강제로 쫓겨난 상태였다.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들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이건 명백히 수상한 일이었다.하지만 결국 홍지은은 오기로 결정했다.어쨌든 상대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은 임산부였다. 아무리 그래도 신체적인 위해를 가할 리는 없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홍지은은 이미 룸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 있었다.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자 홍지은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홍지은 씨 오셨어요?”성유리는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다.몸에는 맞춤 제작된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다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성유리는 말하는 내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홍지은은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왜 가만히 서 계세요?”그 모습을 본 성유리는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리 와서 앉으세요.”그 말을 듣고서야 홍지은은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다가갔다.이미 누군가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두었는데 그 자리는 바로 성유리의 옆자리였다.“지난번 경매장에서는 죄송했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투와 표정을 보고 문득 이런 느낌이 들었다.마치 지금 자신이 그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시켜도 그는 망설임 없이 실행할 것만 같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저 홍지은 씨 싫어해요.”성유리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박한빈이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좋아, 그럼...”“하지만 박한빈 씨가 손대는 건 원하지 않아요.”성유리가 이런 말을 덧붙이자 박한빈은 의아해졌지만 그녀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그 말에 박한빈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멍해졌다. 그러자 성유리가 물었다.“안 돼요?”“아니. 그게 아니라... 너 화 안 난 거야?”솔직히 말해, 홍지은이 어떻게 되든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오직 성유리의 감정뿐이었다.방금 전까지는 이 일을 잊고 있던 듯한 성유리였는데 다시 언급되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박한빈은 방금 했던 말을 얼른 넘기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까 이미 홍지은 씨한테 대답했어요. 그리고... 어차피 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그리고 다른 일들은 박한빈 씨가 방금 다 설명했잖아요. 게다가 물기까지 했고.”성유리의 말이 끝났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그러니까... 과거의 일들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은 없다는 거죠.”성유리의 명확한 대답이 떨어지자 박한빈은 비로소 한숨을 푹 내쉬었다.꽉 조여 있던 감정이 풀리면서도 성유리를 감싸고 있던 팔에는 오히려 더 힘을 줬다.“숨 막혀요. 좀 놔줘요.”성유리가 숨이 막힌 듯 박한빈을 손으로 밀어냈지만 그는 대답 없이 살짝 힘을 뺄 뿐 여전히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한참을 더 버둥거리다가 결국 포기한 성유리가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아까 제 말에 아직 대답 안 했잖아요.”“무슨 말?”“홍지은 씨에 관한 일이요. 제가 직접 해결하고 싶
성유리는 고개를 숙여 박한빈의 손을 쓱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놔요.”박한빈은 그녀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아파요.”그러자 성유리가 다시 말했다.그제야 박한빈의 손아귀 힘이 조금 느슨해졌지만 여전히 성유리를 꼭 붙잡고 있었다.그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박한빈은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그의 손을 끌어올렸다.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의 팔뚝을 세게 깨물었다.꽤 강한 힘으로 팔뚝을 물고 있는 성유리지만 박한빈은 단 한 번도 아프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성유리가 좀 더 제대로 물 수 있도록 스스로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그러나 이내 성유리는 박한빈의 팔뚝을 놓아주었다.박한빈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자신의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뚝을 드러냈다.“계속 물어. 네 화가 풀릴 때까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물었다.“박한빈 씨는 제가 고작 한번 물었다고 화가 풀릴 것 같아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대체 언제 성유정이 한 짓을 알게 됐어요?”“우리가 첫 번째 이혼을 한 다음에.”박한빈이 대답에 성유리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그럼 그전까지는... 그때 유산된 게 정말 사고였다고 믿고 있었던 거네요?”박한빈은 침묵했고 성유리도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대신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박한빈이 힘을 주어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성유리는 몸을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럴수록 더욱 힘을 주었다.“그래. 나도 인정해. 난 한심한 놈이었어.”박한빈이 성유리의 귓가에서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러니까 네가 날 때리든 욕하든 뭐든 다 받아들일게.”“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내 곁에 있어. 그것만 해준다면... 나머지는 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얹고 최대한 밀어내려 할 뿐이었다.“그리고 아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성유리의 대답은 홍지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그녀는 한순간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뒤,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갔고 박한빈이 곧장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떠나기 전, 그는 단 한 번도 홍지은을 쳐다보지 않았다.하지만 홍지은은 알았다.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그러나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시궁창뿐인 인생이 여기서 훨씬 나빠진다고 한들 얼마나 더 나빠질까?그렇다고 혼자만 괴로울 수는 없었다.그러니 죽더라도 반드시 한 사람은 끌어내릴 것이다.성유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지 홍지은은 아직 모른다.세상 그 누가 행복하게 지낸다 해도 괜찮다.‘성유리는 절대 안 돼.’...성유리는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장 복도 끝까지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뒤따라오던 박한빈도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지만 옆에 조용히 서서 성유리만 쳐다봤다.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은 또렷이 비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그는 발신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울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나 상대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다.연달아 몇 번을 끊었음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그렇게 주차장까지 도착했을 때, 성유리가 먼저 떠날까 봐 조바심이 난 박한빈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 상대방이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박 대표님, 저예요. 왜 말도 없이 먼저 가셨습니까? 저...”박한빈은 상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행여 핸드폰이 또다시 울릴까 봐 박한빈은 이번에 아예 전원을 꺼버
홍지은의 말에도 박한빈은 여전히 침묵했고 아까보다 더 얼굴을 찌푸렸다.눈빛에 그득히 담겨있는 혐오와 무시의 감정은 선명히 드러났지만 박한빈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바로 맞은편에 서 있던 홍지은도 당연히 그의 감정을 알아차렸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진짜예요. 박 대표님,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제 남편은...”“꺼져.”단 두 글자뿐인 박한빈의 대답에 홍지은은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사실... 신경 쓰이는 건 박한빈의 대답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었다.홍지은은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처지가 더 난감해진다는 사실을.그러나 박한빈은 홍지은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자리를 떠버렸다.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홍지은은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박한빈 씨, 계속 이러신다면... 제가 유리한테 그 일들을 다 알려줘도 제 탓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발걸음이 뚝 멈췄고 이내 고개를 돌려 홍지은을 쳐다봤다.그러자 홍지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제가 아예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그때 유정 씨가 임신했던 아이 말이에요. 박 대표님 아이 맞죠?”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홍지은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 냉랭했다.그의 눈빛에 홍지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말했다.“지금 유정 씨가 잡혀있긴 하지만 그 일들이 다 끝이 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때 유리가 잃었던 아이도... 사실 박한빈 씨는 다 알고 있었잖아요. 유정 씨가 그랬다는 걸.”홍지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의 뒤에서 물건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쿵!그 소리에 박한빈이 뒤돌아보자 성유리가 머지않은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그녀의 표정은
그리고 이내 홍지은은 자신의 자리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금성에서 제일가는 큰 인물은 박한빈은 당연하게도 가장 앞에 있는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무대 위에 전시되는 물건엔 흥미가 없어 보였다.홍지은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을 때, 박한빈도 마침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멈칫하던 그는 다정하게 성유리 귓가에 얽혀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그저 연인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박한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을 일일이 다 풀어줬다.만약 홍지은이 직접 본 게 아니라면 그녀는 꿈에서도 박한빈이 이런 일을 한다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너무 놀란 홍지은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박한빈 좀 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성유리는 퉁명스럽게 그의 손을 밀쳐냈다.그리고는 박한빈을 슬쩍 째려봤지만 그는 화를 내기도 커녕 오히려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꽤 거리가 있던 홍지은과 두 사람이기에 그녀는 박한빈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옆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기 좀 봐요. 두 사람 사이 너무 좋아 보이지 않아요? 유리가 평소에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게 혹시 박 대표님께서 쟤를 숨겨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니까요.”홍지은의 옆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금성에서 거주하는 현지 사람이 아니었고 결혼한 남자도 업계에서 중하층에 속하는 위치였다.전에 그녀는 홍지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막상 말을 거니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그렇게 홍지은의 미소와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정 사모님?”상대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이내 정연화는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홍지은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선명히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은 ‘화살’이 되어 홍지은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고 있었고 흐르는 ‘피’조차 그녀에게는 차갑게 느껴졌다.입술을 뻥긋거리
홍지은은 마치 성유리와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라는 듯 능글맞게 대꾸했다.그리고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발 빠르게 성유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한빈은 경매에 참석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유리는 미소를 지은 채 그의 곁을 지켰다.사실 그녀는 웃고는 있었지만 이미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상태였고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그래서 홍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 예전에는 이런 장소에 오는 거 별로라고 했잖아.”홍지은은 아주 자연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잡힌 손을 빼냈다.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홍지은은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보며 계속 말했다.“어머? 박 대표님도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만약 이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면 아무리 싫어도 박한빈은 몇 마디 대답은 해줬었다.그렇지만 유독 오늘따라 그는 대답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말을 건 상대가 홍지은이라서 싫었다.필경 홍지은을 볼 때면 성유리가 지나간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니까 말이다.그게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박한빈은 성유리가 홍지은을 마주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오다가다 마주친다고 하더라도.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고 홍지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녀와 함께 떠나버렸다.박한빈은 홍지은이 자신의 대답을 들을 자격도, 자기가 대답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대답을 하지 않은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제자리에 서 있던 홍지은의 반응과 표정이 어떻게 변해가던 박한빈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박 대표님!”이내 다른 사람이 박한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그는 미소 지으며 상대에게 성유리를 소개해 줬다.“여기는 제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성유리라고 하고요.”“안녕하세요. 사모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홍지은은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성유리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 번 말해봤지만 걔는 원래 이런 곳에 나오길 싫어해서요.”오늘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괜찮아요. 그래도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경매회도 곧 시작하는데 저도 박 대표 부인의 취향이 궁금하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으니까 미리 유리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두고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홍지은도 사람들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유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물어봤는데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다고 했거든요.”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현실은 완전히 뒤집혔다.왜냐하면 그날 경매장에 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올해 금성에서 열리는 첫 대형 경매 행사였다.특히 경매 목록에 포함된 한 세트의 보석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도시 내에서 일정한 신분을 가진 인사들은 전부 참석했다.사실 성유리는 처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전날 밤, 박한빈과 게임 내기를 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박한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그 조건이 바로 경매장에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다만, 박한빈도 굳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면 돼. 너 피곤해지면 바로 나가자.”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다.성유리가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홍지은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과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비록 남편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홍지은에게 자유를 허용했다.어차피 그의 사업 자원 중 상당수가 홍지은의 인맥과 네트워크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으니까.오늘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완벽한 메이크업 덕분인지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그런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