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망은 충격이 빠졌다. 그녀의 무공이 단순 좀 높은 정도가 아니라, 상상 이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람이 10명이 있어도 상대가 안 될 가능성이 컸다.이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그동안은 왜 숨겼던 것일까?송석석은 혼수 목록을 든 채 그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한여름의 태양처럼 눈부시고 찬란한 미소였다.하지만 곧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혼수 목록을 공중으로 던지더니, 순식간에 눈꽃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눈으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혼수 목록이! 혼수 목록이…! 이럴 수가!”그 모습을 본 노부인이 절규하며 소리쳤다.“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넌 이제부터 장군부에서 아무것도 못 가져 갈 거야! 일 푼도 못 줘!”송석석이 웃으며 말했다.“제가 가지고 가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여기서 절 막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세요?”노부인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감히 뭐 어쩌겠다고? 혼수품에 손을 대기만 해봐, 바로 관부(官府)에 신고할 거야. 이혼당한 주제에, 어디서 감히 혼수품을 노려!”그리고는 옆에 있던 하녀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여봐라, 이년에게 아무것도 주지말고 쫓아내라. 함께 온 하인들도 모두 나가지 못하게 해라!”그렇게 하인들이 망설이며 우물쭈물하던 사이에, 갑자기 정문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지를 받들라!”모두가 사색이 된 채 얼른 몸을 가다듬었다. 노부인 또한 송석석을 내버려두고 정문으로 향했다.“얼른 무릎들 꿇어라! 성지를 받아야 한다!”하인들도 함께 서둘러 줄을 맞추어 무릎을 꿇었다. 곧이어 금군과 함께 오 대반이 성지를 들고 장군부 안으로 들어섰다.이때, 전북망이 가장 앞에서 외쳤다.“신(臣: 신하) 전북망, 성지를 받듭니다!”그러자 오 대반이 웃으며 답했다.“장군, 일어나십시오. 이 성지는 장군한테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송석석 양에게 주는 것이지.”이 집에 자신 말고 성지를 받을만한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송석석의 이름이 나오자
송석석이 고개를 숙이며 크게 절을 올렸다. 좀 늦긴 했지만, 그래도 드디어 기다리던 성지가 도착했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전북망은 창백해진 얼굴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럼 그때 궁에 들어간 것이 혼인을 방해하기 위함이 아니었단 말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이혼을 결심했지? 설마 교지 받았다는 말을 전하자마자?온갖 생각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는 송석석을 질투심이 많고 이기적인, 자신을 독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오해였다.전북망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곧이어 그의 눈에 환한 표정으로 성지를 받아들이는 송석석의 얼굴이 보였다. 곧이어 처음 청혼하러 갔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아름다웠었다. 전북망은 그녀의 눈부신 외모에 숨을 쉬는 것도 잊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었다.하지만 출정 뒤에, 이방을 만나게 되면서 그는 그때의 기분을 잊고 살았다. 노부인도 이런 결말은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송석석이 먼저 이혼을 요청했을 줄이야.황제가 허락한 이혼이니, 혼수품도 모두 돌려줘야만 했다. 장군부는 이미 빈껍데기 신세인데, 송석석의 혼수품까지 돌려주게 되면 정말 생계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석석아, 석석아! 내가 오해했다!”노부인이 다급히 송석석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내가 널 오해했어. 난 네가 당연히 북망과 이방의 결혼을 막으려고 황제폐하를 찾아간 줄 알았어. 그게 아닌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널 내쫓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돌아온 것은 송석석의 싸늘한 말 한마디였다.“오해였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그리고는 노부인을 등진 채, 오 대반에게 말을 건넸다. “오 공공, 뭐라도 대접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네요. 언제 진국부후에 오시게 되면 반드시 거하게 차려드리겠습니다. 저희 집 보주 음식 솜씨가 매우 뛰어납니다.”“좋습니다!”오 대반이 그녀를 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성지가 좀 많이 늦었
“좋다!”송태공(宋太公)은 눈물이 앞을 가려 눈앞에 서 있는 소녀를 똑똑히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의기양양한 모습에 매우 기뻤다.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불길하니, 나는 먼저 떠나겠다. 너도 곧 떠나도록 하여라.”“네!”송석석은 일어나 송태공과 송세안을 배웅했다.둘째 부인도 이 틈을 타 떠났다. 본래 몇 마디 하려던 그녀였지만 방금 송석석이 괴롭힘을 당할 때 나서지 못했기에 오늘 오지 않은 척하기로 했다.전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은 자리에 벙졌다. 그들은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송석석이 순식간에 국공부(國公府)의 적녀가 되었고, 그녀의 남편도 국공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이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어떻게 뿌리가 다른데 작위(爵位)를 이어받을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황제는 분명히 가능하다고 했다. 전북망이 만약 그녀와 이혼하지 않았다면 작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그들은 이 엄청난 부귀를 눈앞에서 놓쳐버린 것이다.분산을 떨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심지어 그녀의 지참금(嫁妝)도 한 푼 받지 못했다.송석석은 그들이 멍하니 있는 동안 방으로 돌아갔다. 양 마마(嬤嬤)와 황 마마는 네 명의 하녀와 네 명의 집정, 그리고 보주와 함께 모든 물건을 깔끔하게 포장하고 있었다.송석석이 그들을 마다한 것은 방 안에서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지참물(陪嫁之物) 중에는 책상과 의자, 장롱이 많아 한동안 옮길 수 없으니 내일 다시 사람을 보내 옮기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황 마마가 말했다.“그래요, 침기(痰盂)까지도 다 가져갑시다, 그들한테 줄 수 없습니다.”양 마마가 화가 난 듯 말했다.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이제 돌아갑시다!”지참물을 마차에 싣고, 하인이 달려가 마차 두 대를 더 고용해 호화롭게 장군부(將軍府)를 떠났다.장군부 사람들은 붙잡을 수 없었다. 모두 정청에 숨어 나오지 않았고, 이혼서가 이미 내려왔기 때문에 송석석과 전씨 가문은 더 이상 관계가 없었다. 게다가 국공부의 딸이고 작위를
그날 저녁, 이방은 전북망을 불러내었다. 두 사람은 호숫가를 거닐고 있었다.전북망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방은 상황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를 불러내면 이혼의 상황을 이야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전북망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얼굴은 고양이에게 할퀸 것 같기도 했다.그러던 중,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이방이 멈춰 서며 물었다. “끝난 것입니까? 예단의 절반도 돌려받았습니까?”노을이 지면서 이방의 어두워진 얼굴을 비췄다.전북망은 갑자기 송석석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돌려받지 못했습니까?”이방은 그가 말이 없자, 한숨을 쉬며 다시 물었다. “제가 서신을 보내서 예단의 절반은 반드시 돌려받으라고 했잖습니까. 장군부의 재정이 바닥나서 돌려받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럽니까?”전북망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석석의 예단이지, 내 것이 아니고, 내가 번 것도 아니오. 이방, 당신은 나와 결혼한 게 고생하기 싫어서요?”“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이방은 돌아서며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계산적인 눈빛을 숨기려 했다. “저는 단지 우리가 앞으로 군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서 하는 말입니다. 돈 문제로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장군부가 당장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검소하게 살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소.”전북망이 말했다.이방은 돌아서며 재차 확인했다.“그래서, 정말로 돌려받지 않았습니까? 예단을 모조리 가져갔습니까?”그녀의 눈에 비친 실망과 분노에 전북망은 가슴이 시렸고 조금씩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이혼서를 건네려는데 황제의 명이 도착했소. 알고 보니 이미 궁에 들어가 황제에게 이혼을 청했고 처음부터 이혼할 생각이었던 것 같소. 당신과 지아비를 나눌 생각이 없었던 것 같소.”“네?”“그 사람은 역겹다고 했소.”이방은 냉소했다. “역겹다고요? 그녀가 한 말입니까? 제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데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설마 자신이 아주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전북망은 무
전북망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오늘의 싸움에서 완패했던 말하기 부끄러웠다.“참말입니까?”이방이 재차 물었다.전북망은 한숨을 쉬었다.“됐소, 그 얘기는 그만하오.”그러자 이방이 장난스럽게 말했다.“거 보세요. 저를 속이려던 거였군요. 이혼이든 별거든, 일이 해결됐으니 되어습니다. 저와의 이부를 경멸했다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음험한 짓은 저는 흉내도 내지 못합니다. 그게 그녀의 진짜 능력이겠지요.”이방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덧붙였다.“그런 능력들을 제가 흉내 낼 수도 없지만 나긋한 말투로 달콤하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그녀는 손을 다소곳이 앞에 모으고 몸을 배배 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낭궁님!”그러고 나서 일부러 몸을 떨었다.“세상에, 정말 너무 소름 끼치고 너무 가식적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가식적일 수 있습니까?”전북망도 소름이 쫙 돋았다. 그것은 이방의 가식적인 모습때문이였다.사실 송석석은 그렇게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부드러웠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았고, 온화하면서도 단호했으며, 절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이방은 콧노래를 부르며 뛰어갔다. 비록 예단의 절반은 돌려받지 못했지만, 송석석이 떠났으니, 그녀가 정실 아내가 되었다. 더 이상 평처가 될 필요 없었다.인생이란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그녀는 언제나 긍정적이었고, 절대 송석석처럼 유치하게 굴지 않으려 했다.전북망은 그녀를 따라가는 대신 호숫가에 앉았다.오늘 이혼령이 내려졌다. 마치 맑은 날의 벼락처럼 그의 머릿속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송석석과의 첫 만남,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고 청혼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녀가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난 후, 그와의 혼인을 동의했을 때 그는 너무도 기뻤다.혼인 준비를 하며 그녀를 맞이할 때의 심경을 떠올렸다. 혼인 당일 출정해야 했을 때, 그는 송석석을 떠나기 싫었다.심지어 행군하는 동안에도, 붉은 면사포를 벗겼을 때의 송석석을 떠올리며, 자신이 그녀와
송세안은 송씨 가문의 자제들을 불러와 물건을 정리하도록 했다. 한창 바쁘게 움직인 후, 송세안과 송석석은 함께 저택 곳곳을 걸었다. 한때는 매우 활기찼던 저택이 지금은 너무 조용했다.송세안은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국공부에는 네가 혼자고, 하인도 본가에서 데려온 사람들뿐이니, 먼저 힘을 쓸 수 있는 남 집사를 찾도록 해라. 그리고 기가 센 하녀와 하인도 필요하다. 부엌과 정원, 마구간, 마차(馬廄車) 준비도 사람이 빠질 수 없다. 혹시 여의찮다면, 내가 대신 찾아주마.”송석석은 감사를 표했다.“안 그래도 바쁘신데,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황 마마와 양 마마가 알아서 할 겁니다.”송세안은 그녀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 집안끼리 폐를 끼치다니 무슨 소리냐? 예전에 네 아버지가 군을 지휘할 때, 늘 우리 집안 형제들을 불러 모아 전쟁터의 위험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경외감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웠다. 왜냐하면 우리 송씨 가문의 사람들이 나라를 지키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우리 가문에 무장이 없을 것 같구나.”송씨 가문의 다른 자제들은 대부분 글공부나 장사를 선택했다. 위망 높은 가문에서 무장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 정말 안타까웠다.송석석은 말이 없었지만,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앞으로는 전씨 가문과의 연락을 끊고, 원망하지도 만나지도 마라. 너의 인생을 잘 살아가면 된다.” 송세안이 당부했다.“숙부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송석석은 고개를 숙였다.송세안은 그녀의 평온한 모습을 보며 말했다.“언젠가 전북망은 틀림없이 후회할 것이다.”송석석의 눈빛이 흔들림이 없었다.“그럴 테죠. 하지만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송씨 가문의 사람들은 놔야 할 때는 내려놓을 수 있었다.그녀의 굳센 모습에 송세안은 미소 지으며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내일은 내가 사람을 보내서 예단 가구를 다시 가져오게 할 테니, 너는 나설 필요 없다.”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공부는 무장 세가(武將世家)였지만 견식이 있는 아가씨는 분명히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이 글을 아는 것을 원할 것이다.“좋다, 너희는 아가씨 곁에서 시중들도록 해라. 이름은 나중에 아가씨께서 지어주실 거다.”네 사람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마마!”황 마마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아직 고맙다고 하기엔 이르다. 먼저 아가씨 곁에서는 규칙을 배워야 한다. 잘 익히지 못하면 등급이 내려갈 거다.”네 사람은 고개를 숙였다. “꼭 잘 배우겠습니다.”네 명을 고른 후, 두 마마는 또 몇 명의 하녀와 하인을 더 고용했다. 그리고 아행의 사람들에게 마부, 목수, 말을 관리하고 화초를 돌볼 사람들을 찾도록 했다.외원의 총괄 집사와 계원은 맨입으로는 구할 수 없었다.아행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내일 보내드리면 마마께서 선택하면 되옵니다.”그는 매매 계약서를 건넨 후, 두 마마에게 붉은 봉투를 건네며 웃으며 말했다. “마마,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저희 아행을 찾아주세요. 저희는 여러 가지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마마는 붉은 봉투를 받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사람을 보내 아행을 배웅시켰다.아가씨가 이제 막 이혼하고 돌아왔으니, 사람들은 현재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마마는 말을 아꼈고 아행들이 함부로 추측하여 소문을 퍼뜨리지 않도록 했다.아직 사람들이 다 모이지 않아서 황 마마는 오늘 뽑은 네 명의 하녀를 데리고 아가씨에게로 갔다.송석석은 여전히 출가 전 살던 영롱각(玲瓏閣)에 살고 있었다. 영록각은 그녀가 출가한 후로 아무도 살지 않아 청소 외에는 손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이곳은 그대로였다. 핏자국이 없었기에 벽을 덧바를 필요도 없었다.영롱각에는 그녀의 무기를 두는 무기고가 있었고, 그녀가 읽었던 책을 두는 작은 서재도 있었다. 대부분은 병서 책론(兵書策論)이었다.출가한 1년은 마치 악몽 같았다. 만약 그녀가 혼인하지
하지만, 이 일은 이제 조사할 수 없다. 첩자들은 거의 죽었고, 살아남은 자는 서경으로 도망갔기에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떠올리며 설움을 삼켰다.아버지와 형제들은 남강을 되찾았지만, 지키지 못하고 다시 빼앗겼고, 결국 전장에서 비참하게 전사했다. 만약 북명왕이 승리하여 남강을 되찾는다면, 아버지와 형제들의 소원을 풀어주는 셈이 될 것이다첫날 밤, 송석석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꿈에 어머니, 형수, 조카들이 살해당하는 장면이 떠올라 한밤중에 깬 그녀는 다시 잠들 수 없었다. 그녀는 천장을 응시하며 끊임없이 생각했다.친인들의 상처를 보면 범인의 극악무도함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들은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전쟁 중 서경이 패했다고 해서 이렇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전에도 패한 적 있었다. 당시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3만 병사를 잃었을 때에도 서경의 첩자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전쟁에서는 왜 이렇게 움직이는 걸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고아와 과부를 죽이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뒤척이던 송석석은 결국 날이 밝을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시중들러 온 보주는 초췌한 송석석의 얼굴을 보고 그녀가 전북망의 무정함에 상처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하여 그녀는 묻지도 못하고 몰래 눈물을 훔쳤다.다음 날, 송세안은 송씨 가문의 자제들을 거느리고 예단을 옮겼다. 담나무로 만든 탁자와 의자, 가구, 금실로 수놓은 병풍 등 예단 목록에 있는 모든 것을 챙기며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노부인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통곡하며 송석석이 무정하고, 옹졸하고 이기적이면서 질투심으로 가득한 사람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그 말을 들은 송세안이 너무 화가 나서 크게 소리쳤다. “내 조카가 너희들에게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 이웃들에게 한번 물어보아라. 그녀를 나쁘게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석석이가 옹졸하고 이기적이라 나무라면서 왜 너희 장군이 무슨 나쁜 짓을 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느냐? 혼인날 출정하고 돌아와서는 전공을
상서원과 지안궁에서 벌어진 일은 순식간에 숙청제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마음이 나날로 초조해져갔다.게다가 연일 계략까지 모색하느라 두통이 심해져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정도였다.황후의 금족령을 해제한 것도, 대황자를 태자로 책봉하기 위한 준비였다. 태자가 될 인물에게 금족된 어머니가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숙청제는 금족된 황후가 자식을 방치하는 것이 곧 자식을 해치는 일임을 깨달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황후는 반성하긴 커녕, 오히려 황자가 자신의 곁에 있어야만 자신의 지위를 굳힐 수 있다고 확신할 뿐이었다. 한편, 숙청제는 입맛이 없는듯 저녁 식사를 대충 때운 뒤 약탕을 마셨다. 아무리 지쳐도 약은 반드시 복용해야 했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매번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항상 죽음은 먼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이리도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다가온 것이니 말이다.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국가의 중대사나 미래의 계획 같은 무거운 이야기가 아닌 단순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숨을 돌리며, 마음을 편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참을 머리를 굴린 끝에 떠오른 인물은 단 한 사람, 송석석뿐이었다. 송석석은 부상 치료로 며칠간 어서방에 오지 않았다. 숙청제는 임태의를 불러 침술로 두통을 진정시켰으나, 어지러운 증상과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지러움 때문인지, 검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가 싶더니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그러다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닌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확신이었다.한편, 북명왕부에서 노 집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급히 달려왔다.“무슨 일이오?” 염 선생이 서재에서 나오며 물었다. 노 집사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서는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왕비마마를 뵙고 싶다 하시옵니
황후는 시간을 맞춰 다시 상서원으로 간 후, 대황자를 데리고 함께 지안궁으로 가서 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앞뒤로 늘어선 수행원들의 위세는 대단했다.대황자마저 어린 환관의 등에 업혀 궁문에 이르러서야 그를 내려놓았다.황후는 의복을 단정히 하고 대황자의 손을 잡고 지안궁으로 들어갔다. 꿇어앉아 예를 올린 후, 태후의 안부를 여쭈어 보았다. 비록 예법은 완벽했으나, 태후는 한동안 그녀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다만 대황자를 불러 물었다. “오늘 태부께 칭찬을 들었느냐?” 그러자 대황자는 태후의 눈치를 살짝 살피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태부께서 칭찬을 잊으신 것 같사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황후가 서둘러 말을 보탰다. “태부께서는 엄격하시어 쉬이 칭찬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황후는 태후가 이미 태부와 약속을 해둔 일을 모르고 있었다.대황자가 그날 착실하고 성실히 임하면 수업이 끝날 때 한마디 칭찬을 해 주기로, 그렇지 않으면 칭찬은 없기로 말이다. 이를 통해 태후는 대황자의 하루 태도를 알 수 있었다. 태후는 황후의 말을 무시한 채 담담히 대황자를 향해 말했다. “규율은 기억하고 있느냐?” 그러자 순간 대황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급히 변명하며 말했다. “태부께서는 어머니가 저를 찾으신 것을 못마땅히 여기셔서 칭찬하지 않으신 것 같사옵니다.” “그렇다면 벌을 받아야 하는 건 너냐, 아니면 네 어미냐?” 태후가 묻자, 대황자는 황후를 가리키며 재빨리 말했다. “어머니를 벌하옵소서! 어머니께서는 글을 베끼시는 것을 가장 즐기시옵니다!” “맞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저는 글을 베끼는 것을 좋고 자식을 가르치지 못한 죄도 있으니 응당 벌을 받아야 하옵니다.” 황후도 서둘러 맞장구를 치자, 태후는 그녀를 흘끗 보더니 금마마에게 명했다. “대황자를 저녁을 차려주고 작은 서재로 보내라. 해시 전까지 모두 베끼지 못하면 출입을 금하라.” 그러자
두 사람은 그렇게 어서방에서 거의 한 시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태후가 떠난 뒤, 숙청제는 황후의 금족령을 해제하라는 어명을 내릴 뿐, 후궁을 관리하는 권한은 돌려주지 않았다.오대반으로부터 어명을 전해 들은 제황후는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갑자기 금족령이 해제했단 말인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자신이 전에 퍼뜨리도록 지시했던 말들이 효과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후가 살아 있는데, 적자를 태후궁에서 보살피는 것은 규율에 어긋난다는 말이었다.금족령이 해제된 제황후는 감사의 인사는 뒤로하고 대신, 곧장 서대신, 곧장 대황자를 만나러 상서원으로 향했다. 대황자는 황후를 보자마자 봅시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태부가 강의를 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장 속에서 풀려난 새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아들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사옵니다! 언제쯤 저를 다시 데려가시겠나이까!” 황후는 허리를 숙여 그의 어깨를 잡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들을 찬찬히 살폈다. 초구를 걸치지 않은 대황자는 많이 야워어 턱선이 뽀쪽하게 드러난 모습에 황후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어찌 이렇게 수척해졌느냐? 잘 먹지 못한 것이냐?” 대황자는 입을 삐죽이더니 금세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재에서 돌아가면 황조모께서는 또 글을 외우게 하십니다. 외우지 못하면 밥을 주지 않으시니 황조모궁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빨리 돌아가고 싶사옵니다!” 제황후는 태후가 엄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방금 금족령이 풀린 상황에서 태후와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다만 대황자를 달래며 말했다. “조금만 더 참거라. 어미가 네 부황을 설득할 것이다.” 대황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하려다, 안만수 태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문을 닫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때 안만수가 제황후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마마, 대황자께서는 수업 중이시옵니다.” 제황후는 안
이튿날, 목 승상은 바로 태의원으로 향하였다. 태의원에서는 모든 태의와 원정이 대기 중이었다. 자리에 앉은 목 승상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딱 한 가지만 묻겠다. 폐하의 병을 치료할 자신이 있느냐?” 태의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오원정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목 승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사옵니다.” “조금이라도 말이냐?” 목 승상은 쉽게 납득할 수 없어 다시 물었다. “단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혹 다른 방도라도 없단 말이냐?” 모두가 다시 침묵하자, 목 승상의 눈빛은 점차 어두워졌고 그러다 완전히 빛을 잃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의원의 명성을 걸고서라면, 이 기한을 2년으로 늘릴 수는 없겠느냐?” 오원정은 얼굴에 깊은 자책감이 서려 있었다. “승상, 폐적증은 발작하면 기세가 매우 심각하여 2년은커녕 1년조차도…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번에는 목 승상이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는 마침내 한 마디 내뱉었다.“입들 조심하거라.” 그는 천천히 태의원을 나서며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이렇게도 빨리 또 연말이 다가왔다. 날씨가 갈수록 추워져 뼛속까지 스며들었다.태후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모르는 듯했지만, 태의원의 밤새 꺼지지 않는 불을 보고일이 터졌음을 짐작했다. 그녀는 두통을 핑계로 오원정을 불러 진맥을 청했다. 그러자 진맥을 마친 오원정이 말했다. “태후마마께서는 수면이 부족하신 듯하옵니다.” 꼿꼿이 서 있는 그는 태후가 이미 무엇인가를 눈치챘음을 알고 있었다. 궁에서 태후의 눈과 귀를 피해 갈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태후가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때만 예외였다. 태후는 주변 사람들을 돌려 보내고, 오원정만 남게 했다. 문지방 위로 햇살이 드리웠지만 매서운 바람이 드리워, 그 햇살조차 싸늘하게 느껴졌다. “말해보거라.” 태후는 자리에 앉아, 오원정의 멍든 눈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기에
오늘 밤, 목 승상은 궁에 묵기로 하였다. 한편, 숙청제는 여전히 후궁에 들지 않았으며, 자신의 침전에 돌아가지도 않고 어서방 안의 침상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목 승상은 황제가 약을 다 마시는 것을 보고 사탕 하나를 건넸다.숙청제는 사탕을 받아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눈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어릴 적, 부황에게 호되게 꾸짖음을 당하고 나면 승상께서 꼭 사탕 하나를 건네며 격려의 말을 해주시곤 하였지요.” 목 승상도 그를 바라보았다.“그렇습니다. 저 역시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황상께서 당시 말씀하셨지요. 훗날 현군이 되겠노라고 말입니다.” “혹 승상을 실망시킨 적이 있었는지요?” 숙청제는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로 인해 목소리가 다소 흐릿해졌다. “없사옵니다. 소인에게 폐하는 이미 현군이시옵니다.” 숙청제는 고개를 저으며, 눈에 실망스러운 빛을 띠우고 말했다. “난 현군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이제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태의원에서 아직 진단을 내리지 않았으니, 폐하께서는 비관하시면 안되옵니다.” 목승상의 위로는 다소 건조하게 느껴졌다. “조금은 아쉽기는 하지만 더 많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숙청제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무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우선, 태자를 정해야 할 텐데 승상께서는 대황자가 어떠신지요?” 목승상이 답했다. “대황자는 장남이자 중궁의 적자로서, 지금은 태부의 가르침 아래 점점 나아지고 있사옵고 예전의 제멋대로이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더욱 믿음직스러운 인물이 될 것입...” 그러자 숙청제가 그의 말을 끊었다. “저는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현재를 이야기하시지요. 그럼, 이황자는 어떻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목 승상이 답했다. “이황자는 영민하고 총명하지요. 비록 이제 막 학문을 시작하셨으나, 근면하고 배우려는 의지가 강한 점이 눈에 띕니다. 다만 이를 지속할 수 있을지는
너무나도 큰 일이라 송석석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황제가 만약 승하한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대황자가 황위에 오를 것이고, 조만간 태자로 책봉될 것이다. 어린 황제가 즉위한다면, 반드시 보정 대신이 필요할 것이며, 그 수는 한 명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해 조정은 여러 당파로 갈리게 될 것이고,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만약 보정대신을 두지 않는다면, 태후나 제황후가 수렴청정할 것이다. 황후는 야망이 가득한 사람으로, 현재 금족 된 상태에서도 대황자를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제씨 가문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져 최근 황제가 억누르고는 있으나, 만약 황제가 승하하고 대황자가 즉위하면 제씨 가문은 다시 힘을 얻게 될 것이었다. 누군들 권력을 탐하지 않겠는가? 목승상은 고령이라 퇴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신황을 위해 나라를 돌보려 해도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나중에 벌어질 일들이고 현재 가장 우려되는 것은 황제에게 1년이란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가 승하하기 전에 황후는 대황자를 위해 모든 장애물과 위협을 제거하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명왕부가 가장 큰 위협이었다. 오대반도 이 점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는 황제의 병세를 알게 되었을 때, 오직 북명왕만이 어린 황제를 도와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송석석의 근심 어린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그 끔찍한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아니, 이것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었다. 현실이 될 가능성이 너무나도 컸다. “왕비마마, 차라리 떠나시는 것이…” 송석석이 서둘러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그만하시옵소서. 지금은 태의조차 확실히 진단 내리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단순한 두통이거나 종기일 수도 있사옵니다.” 그녀는 오대반이 조언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혹여 훗날 황제에 대한 자신의 불충함을 느끼고 괴로워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먼지떨이를 꽉 쥔 오대반은 그녀의 뜻을 바
와야 할 사람들은 모두 만났기에, 이제 송석석은 마음 놓고 쉴 수 있을 것 같았다.간혹 임 태의가 상처 치료와 흉터 제거를 위한 약을 챙겨 찾아오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염 선생이 그를 환대해 주었고 황제께 대신 감사를 전해줄 것을 바랐다. 이날은 임 태의가 오대반과 함께 찾아왔다. 염 선생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임 태의에게 흉터 제거에 관련한 질문이 있다며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서 송석석이 오대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했다. “폐하께서 보내신 것이옵니까?” 송석석이 묻자, 오대반은 손에 든 먼지떨이를 팔꿈치 위에 걸친 채 문밖에 함께 온 친위병들을 힐끗 보며 답했다. “황상께서 보내신 것도 맞고, 내 스스로도 오고 싶었사옵니다. 왕비 마마는 좀 나으셨사옵니까?” 잠시 망설이던 송석석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 보이시나요?” 오대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통찰력이 깊으시옵니다. 좀 나아진 듯하나, 아직은 거동이 어려우신 것 같습니다만.” 송석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좀 나아지긴 했으나 아직 걸을 수는 없사옵니다.” “왕비마마께서는 마음 졸이지 마시고, 우선 몸부터 잘 돌보셔야 하옵니다.” 오대반이 위로하자, 송석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음이 급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단신의 말로는 골절은 백일이 걸린다 하였으니, 이 백일 동안 잘 요양해야 할 듯하옵니다.” 그때 시만자가 안쪽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멀리서 보고 척귀대인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와보니 내가 착각했군.” 그 말을 들은 친위병들은 그녀가 장기문 대감의 사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예를 갖춰 인사했다. 시만자는 그들의 이름을 물은 뒤,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재미있군요. 내 제자들이 그대들 무예가 뛰어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던데, 오늘 잘 만났군. 내 그대들과 몇 수 겨루도록 하지.” 그 말에 친위병들의 눈이 반짝였
안여옥이 몸을 굽히며 작별 인사를 했다.“그럼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사옵니다.” “살펴 가세요.” 최숙심은 미소를 띈 얼굴로 그녀를 배웅했다. 안여옥이 떠난 후, 최숙심이 왕청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는 또 다시 후회를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이미 지난 일을 되새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서 들어가시지요.” 왕청여가 송석석을 문병하러 온 것은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그녀는 송석석에게 사과와 감사를 동시에 전해야 했기에, 오늘은 그저 형수님들을 따라온 척했지만, 사실은 과거의 모든 일을 마주하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석석을 마주할 용기는 냈지만, 안여옥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마치 무언가로 세게 맞은 듯 머릿속이 하얘졌고, 그 미소조차 억지로 지어낸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까 두려웠다. 멍하니 형수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왕청여는 송석석을 마주한 순간 이미 눈물은 시야를 가렸다.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던 송석석은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으라 권하고 차를 내렸다. 그녀의 다리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던 최숙심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닌지요? 얼마나 많이 아프셨습니까?” 그녀의 진심 어린 염려에 송석석은 오히려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 작은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듣자 하니 뼈까지 부러졌다던데, 얼마나 오래 요양해야 한답니까? 나중에 걷는 데 지장은 없겠사옵니까?” “이것 보세요. 아주 멀쩡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괜찮습니다. 전장에서의 부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송석석은 태연하게 다리를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의연한 모습에 최숙심의 눈이 더더욱 슬퍼졌다. “전장에서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늘 있는 일이지요. 이제 다 나았사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남희가
그렇게 궁을 떠난 혜태비는 왕부에 들어서자마자 서우와 함께 곧장 송석석에게로 향했다. 계속 입이 근질거렸던 그녀는 송석석과 대화를 마치자마자 돌아서서는 서우가 멀어지기 바쁘게 오늘 궁에서 들은 이야기와 태후가 내린 엄벌 조치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러자 모든 것을 전해 들은 송석석은 오히려 혜태비를 위로했다. 후궁에 갇혀 있다 싶이 하는 자들이라 너무나 한가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그녀처럼 거리를 산책하거나 연극을 보러 갈 수도 없기에 자연스레 이야기를 꾸며내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거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길고 지루한 나날을 어떻게 보내겠냐며 말이다.하지만 혜태비는 여전히 화가 났다."그렇다 해도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 되는 것이니라. 게다가 듣기 거북할 정도이니 용서할 수 없느니라. 우리 묵이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도 있다니, 이게 사람이 할 소리냔 말이다! 나이만 먹었지. 기본 예의라곤 없는 사람이니라!" 송석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 이상함을 느꼈을 때 자신이 곧장 액션을 취하지 않았음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그 탕약을 마시기 전에는 이상하다고 느꼈어도 이렇게까지 심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도리어 황제가 만종문의 일을 알아내려는 줄로만 여겼다. 지금까지도 황제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원체 생각이 많은 그인지라 생각을 꿰뚫었다는 느낌이 왔어도 크게 어긋날 때가 더욱 많았다. 비록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군정 회의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으니, 전선의 소식은 오직 사매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가한 나날들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문병하러 찾아왔기 때문이다.아프지 않을 때는 알 수 없던 관계망이, 병환에 있게 되니 얼마나 넓은지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선물 꾸러미와 약재를 한가득 들고 찾아왔다.모두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하였으나 날마다 많은 이들이 찾아오니 일일이 응대해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야 비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