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돌아오는 길에 백성들이 이미 삼삼오오 모여 오늘 아군여학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여학과 공방은 원래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이런 큰일이 터졌으니 떠들썩 하지 않을 수 없었다.더군다나 이 일은 태부의 손녀의 명예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귀하디귀한 여인이 한 상스럽고 천한 자에게 농락당했으니, 앞으로 어느 집안의 자제가 감히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 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어리석다고 말했다. 고귀한 집안의 규수로서 조용히 살면 될 것을 굳이 여부자가 되겠다고 나서더니, 이제 평생을 망쳐버렸다고 말이다.송석석은 일부러 말을 천천히 몰며 백성들 입에서 안여옥이 학생을 보호했다는 칭찬의 말을 듣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말은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그녀는 마음이 몹시 아프기 시작했다. 현갑군 지휘사를 맡게 된 이후로 그녀는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암살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으며 모든 일을 늘 완벽하게 해낼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공방 역시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지만, 그 모든 일에도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뭐든 서두르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나아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번 일은 그녀의 정신을 송두리째 무너뜨려 버렸다. 이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워 스스로 자책했다. ‘조금만 더 잘 대비했더라면...... 어쩌다 이렇게 경계심을 놓아버린 걸까? 사여묵이 진성을 떠난 이후 이별의 슬픔에 잠겨 마음이 흐트러져서 경계를 소홀히 했던 걸까?’그녀는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려 발생할 수 있는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예측했음에도 예방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황실로 돌아온 그녀는 홀로 의사당에 앉아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염선생이 급히 돌아왔다. 그 역시 이 일을 듣고 경조부에 가서 알아보았다. 왕비가 이렇게 빨리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황실에 도착하니 왕비가 의사당에 쓸쓸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염
태후는 평소 정사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으나 오직 이 여학만은 특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직접 명을 내려 세운 것이니 말이다.“혹시 여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집안 내부에서 벌어지는 다툼일 수도 있지 않을까?”송석석이 묻자 염선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범위가 너무 넓어지겠지요. 하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많은 집안이 겉으로 보기엔 본처와 첩의 사이가 화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었다. 첩은 아무리 귀한 첩이라도 본처 앞에서는 감히 건방진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주군이 첩을 편애해 본처의 지위가 흔들릴 때이다. 이럴 때면 본처와 첩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온갖 더러운 수단이 동원되기도 한다.본처와 첩이 각각 딸을 두었는데, 본처의 딸은 아군여학에 들어가고 첩의 딸은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는 아군여학에 정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첩이 본처의 딸의 명예를 망가뜨리기 위해 다른 이들까지 엮어서 함께 수치를 당하게 만드는 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이는 인식의 한계가 상황 판단을 흐리게 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하는 일을 완벽히 감춰졌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도 꽤 은밀히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니 입막음으로 살인까지 한 것이 아니겠는가.만약 이러한 상황일 경우엔 조사해야 할 범위가 너무나 넓어진다.송석석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우선 경조부에게 그 작업반장을 조사하게 해야겠다. 그가 평소 어떤 사람들과 어울렸는지, 누구의 일을 봐준 적이 있는지 전부 다 알아보게 말이야. 그때 가서 상황을 좀 더 지켜보도록 하지. 그리고 여론도 안여옥을 도와줘야 하니, 내가 옷을 갈아입고 입궁해 태후께 이 일을 아뢰고 오겠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죄를 씻기 위해 찾아뵙는 셈이지.”유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석석이 입궁해 죄를 청하겠다고 하자, 혜 태비가 나서며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내가 함께 가
송석석이 궁에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시만자가 급히 들어와 그녀를 한쪽으로 데려갔다.“여학 사건 말이야, 황제와 황후의 짓인 것 같아.” 시만자의 표정은 심각했고 눈에는 은근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송석석은 뜻밖의 소리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황제와 황후? 누가 그런 말을 했어?”“장기문이. 그가 황제가 황후에게 멋대로 굴었다고 꾸짖는 소리를 들었대. 황후는 변명하며 황제도 여학을 좋아하지 않으니 네가 진성의 권력 있는 명부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도록 자신이 황제의 걱정을 덜어드린 거라고 했다는 거야.”송석석은 이 말을 듣자마자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냉정을 잃으면 안 돼. 이 일을 장기문에게서 들었다는 걸 들키면 그의 앞날이 망가질 거야.” 시만자가 말했다.송석석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도 과감한 추측을 해본 적이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를 의심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비록 황후에 대해서는 의심한 적이 있었지만 말이다.그리고 황후는 지금쯤 대황자를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어야 했다. 이럴 때 이렇게 세가를 적으로 돌려서 무슨 이익을 본단 말인가? 비록 이번 일이 매우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애초에 이런 일을 계획했다면 그 결과도 충분히 예측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 작업반장이 죽지 않았다면? 혹은 그 작업반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말해버렸다면?장기문이 한 말을 잠시 생각해보니, 황제 역시 여학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는 황후가 여학을 공격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후를 꾸짖은 이유는 여학을 공격한 행위가 아니라 그 방식 때문이었다.즉, 그가 화를 낸 건 수단 때문이지 황후의 행동 자체는 아니었던 것이다.송석석은 순간 자신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황제의 생각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도 사여묵을 부려 명절에 그를 노주로 보내면서, 그는 황제임에도 정작 그녀가 서원의 훈장이 되어 세가의 명부들과 교류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더욱 받
연말이 다가오자 백성들은 설 맞이 장을 보느라 바빴다. 각 집안은 일손이 부족할 정도로 분주했다.하지만 분주한 만큼 사람들 사이의 교류도 늘어나게 되면서 온갖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 태후가 안여옥을 칭찬하며 내린 하사도 효과가 크지 않았고, 오히려 태후가 직접 칭찬한 것이 안여옥이 단순히 모욕만 당한 것이 아닐 거라는 의혹으로 이어졌다.심지어 이 의혹은 점점 사실로 되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듯했다. 북명황실이 나서서 공정한 말을 하거나,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이 나와 안여옥이 학생들을 보호하다가 그 인간에게 잠시 몸이 닿은 것뿐이라고 해명했지만, 백성들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백성들은 신을 만들어내기를 좋아했고, 신을 무너뜨리는 일에는 더욱 열광했다.과거 안여옥의 규수로서의 명성,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재능, 훌륭한 집안 출신을 부러워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만큼 배로 그녀에게 악의를 퍼부었다.그녀의 과거까지 들춰내며 사실 그녀는 고고하고 자만하여 사람을 깔보고 학문이 부족한 동료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장공주의 연회에서 사슴을 말이라 지칭하며 분명 그 그림이 심청화 선생의 작품이 아님에도 우긴 적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그 당시 안태부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할 수 없이 사슴을 말이라 칭했고 또 그것이 심청화 선생의 작품이라 주장했지만, 사실 현장에 있던 이들은 모두 비웃었다는 것이다. "심청화의 인장도 아니었는데, 그때 현장에 있던 사람들 중 누가 비웃지 않았겠어? 다만 체면을 봐서 들추지 않았을 뿐이지.”또한 그녀의 시와 그림이 명백히 표절이며, 이는 안태부가 그녀의 명성을 높여 북명왕과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북명왕은 차라리 재혼한 여성을 선택할지언정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았다.그녀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차선책으로 방시원에게 시집가기를 꿈꿨으나, 방시원은 어리석지 않아 그녀의 속셈을
문 앞의 이야기꾼들을 쫓아내고 나니 또 다른 골칫거리가 생겼다.이번에는 중매쟁이들이 번갈아가며 안여옥을 위한 것이랍시고 혼담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그들이 말하는 혼처들은 안여옥의 부모의 얼굴을 울긋불긋하게 만들 정도로 황당한 인물들이었다. 평소에는 청혼은커녕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침을 뱉고 지나갔을 법한 이들이었다.집안 배경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의 품행이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통방과의 사이에서 이미 서장자와 서장녀를 둔 사람이었고, 어떤 이는 매일 도박장에 들러 두 눈이 빨개지도록 돈을 탕진하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자였다. 또 어떤 이는 기루의 단골 손님이거나, 바깥에 첩을 둔 사람이었다.이들은 평소라면 감히 청혼하러 올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같이 은혜라도 베풀듯 거만하게 굴며 안여옥이 자신들과 혼인하지 않으면 다른 길은 없을 것처럼 굴었다.안태부는 평생 이렇게 큰 화를 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빗자루를 집어 들고 사람들을 쫓아냈지만, 결국 또 새로운 구설수만 만들어졌다.이 일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단 한 마디로 요약되었다.‘웃음거리.’"마치 그녀가 아직 선택할 여유가 있는 것처럼 굴지만, 누군가 그녀를 아내로 맞아주겠다고 나선 것만으로도 조상님 덕분이지.""그 더러운 남자에게 안겨 순결도 잃은 주제에 여전히 체면 따위를 챙기겠다고?""평생 시집가지 못할 팔자지. 누가 그녀를 데려가겠어? 빨리 머리 깎고 여승이나 되라지. 여자들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남자도, 여자도 가리지 않고 이런 말들을 쏟아내기 바빴다. 본인들이 당하는 일이 아니기에, 모두혀끝으로 상대를 아프게 하며 즐거워했다.이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즐거워한 사람은 바로 제자예였다. 그녀는 원래부터 안여옥을 몹시 싫어했다. 황후가 그녀에게 안여옥을 괴롭히고 골칫거리를 만들라고 했을 때, 그녀는 이미 안여옥을 자신의 적으로 삼았다.그래서 이번에 안여옥에게 일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친구 주창우를 찾아가 함께 안여옥 이야기를 하
제자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얼굴이 너무나도 창백해졌다.그녀는 여전히 왕지아에 대한 분노가 남아 있었다. 방시원을 두둔한 사람은 다름아닌 왕지아였다. 그 몇몇 집안의 엉망진창인 상황들은 듣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방씨 가문의 내실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그렇게 큰 저택에서 이런 추잡한 일이 벌어진 사실을 감추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그녀는 충동적으로 왕지아의 뺨을 때렸지만, 잘못은 여전히 왕지아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방시원을 두둔해서는 안 되었고, 그런 사람들과 그런 일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주창우는 훌쩍이며 눈물을 흘렸고, 제자예는 한참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제자예는 머리가 너무나도 복잡해졌다.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다가 끝내 나지막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사실 여학으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은데, 하황후께서 여학을 싫어하시니까…”지나치게 보호 받으며 자란 소녀, 제자예는 일의 심각성을 알지도 못한 채 결국 주창우에게 사실을 말해 버렸다.그러자 주창우는 순간 울음을 멈추고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황후께서 싫어하신다고? 왜 여학을 싫어하신다는 거야? 여학은 태후께서 명을 내려 세우신 거잖아.”“아마도 북명왕비가 훈장으로 있기 때문일 거야. 예전에 내가 큰어머니를 따라 궁에 갔을 때, 황후께서 큰어머니에게 하시는 말을 들었거든. 황제께서 원래 북명왕비를 궁에 들여 후궁으로 삼으려 했었대. 그래서 황후께서 줄곧 북명왕비를 싫어하셨어. 그러니 그녀가 세운 여학과 공방도 당연히 좋아하시지 않겠지.”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갖다 댔다.“이건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안 돼. 비밀이야.”주창우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을게.”그러고 나서 그녀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그 사람들은 도대체 왜 갑자기 들이닥쳐 사람만 보면 모조리 안으려고 한 걸까?" “그러게 말이
안여옥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 끊임없이 퍼져나갔다. 염선생이 조사한 결과, 실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를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과거의 일들이 하나하나 끄집어내져 그녀와 여학을 얽매는 방식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안여옥을 깎아내리는 것은 곧 안태부를 깎아내리는 것이었고, 동시에 아군여학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이어졌다.안태부와 제제사는 학문의 거장으로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으나, 이번 사건으로 안태부는 신격화된 위치에서 추락해 사람들의 존경을 잃어갔다. 반면, 사람들은 제제사를 치켜세우기 시작했다.흥미롭게도,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제상서의 외실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거론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렇게 제씨 가문을 치켜세우는 여론은 제씨 가문에도 이득이 되지 않았다. 권세가 지나치게 드러나면 반감을 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제씨 가문은 여론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염선생이 지켜본 결과, 제씨 가문은 실제로 여론을 진정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다시 화제를 여학과 안여옥으로 돌려, 안여옥의 혼사와 관련해 그녀를 깎아내리고 모욕하는 일이 계속되었다.염선생은 참을 수 없이 분노했다. 안여옥처럼 깨끗하고 순결한 여인이 이들에게 이렇게 더럽혀지다니, 정말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그녀를 모욕하기 위해 찾아온 이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처음에는 몇몇 사람들이 진심으로 청혼을 하러 오기도 했다. 물론 품행이 바르지 못한 하찮은 인간들이었지만, 그래도 결혼 의사는 있었다.하지만 이후에 찾아온 이들은 순전히 안여옥을 모욕하려는 의도로만 왔다. 보기 흉한 이들이 몰려왔고 청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비꼬는 말들을 내뱉었다. 제부에 들어가지 못하면 대문 밖에서조차 선심을 써 그녀를 데려가 주겠다고 외쳐댔다.염선생은 사람을 시켜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두었다. 나중에 이들을 조사한 뒤 응징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무리가 이들의 이름을 적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이 사실을 송석석에게 보고하자, 누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
태부부 앞에서 한때 소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이제 줄지어 대문 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모두 고개를 떨군 채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그들 앞에는 덩치가 크고 건장한 남자들이 그들을 주시하며 서있었는데, 그들의 주먹은 야자수 열매만큼 커서 한 대만 때려도 머리를 박살낼 듯한 위압감을 풍겼다.방시원은 말에서 내려 냉랭한 눈빛으로 그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그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없이 서 있었지만, 그의 위엄 있고 살벌한 기운은 이들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서로 몸을 붙이며 작은 안전이라도 찾으려는 듯했다. 아무도 방시원의 얼음 같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안태부는 중문을 열도록 지시했고, 안씨 노부인은 방씨 가문에서 청혼을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병이 절반이나 나은 듯했다. 그녀는 곧바로 하인들에게 따뜻한 물을 준비하게 하고, 단장을 하며 직접 나가 맞이하겠다고 말했다.안여옥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조부가 며칠째 그녀를 추월원에 머물게 했으며 하인들에게 외부의 소문을 그녀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그녀는 겉으로는 독서를 하거나 눈을 감상하고 차를 마시며 평온해 보였지만, 마음속은 고통으로 뒤덮여 있었다.그녀는 처음에 자신이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소문이 폭풍처럼 그녀를 휘몰아치자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았다.그래도 다행인 것은, 힘들기는 해도 무너지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그것은 그녀가 읽은 수많은 책 덕분이었다. 책 속에서 그녀는 많은 인생 이야기를 접했다.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와 강인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세상에 만연한 수많은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인간의 삶이 항상 평탄한 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험난한 길만 있는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삶에는 반드시 행복한 순간도 있고 어려운 시기도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그녀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위로하며 다짐했다. 소문을 신경 쓰지 않으
임양운은 한동안 경사에 계속 머물렀다. 예전에는 신화기 연구에 몰두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이제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진성의 일을 놓을 수 없다는 핑계로 더 머물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그는 송석석을 걱정하고 있었다.처음 신화기를 연구할 때, 특별히 사람을 보내 북당으로 가서 처방을 받았던 것도 남강과 송회안, 그리고 결국은 사여묵과 송석석 때문이었다.하지만 사부로서 제자들이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고, 그들의 든든한 방패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임양운은 항상 자신이 사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전부 뛰어났고, 인품마저 매우 훌륭했다. 그 누구도 그를 걱정하게 만들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송석석만은 걱정이 되었다. 송석석은 놀고 싶어만 하는 아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술을 출중하게 익힐 만큼 뛰어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 펼쳐진 자유롭고 밝은 웃음을 볼 때마다 임양운은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이후 그녀가 강제로 빠르게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언제나 마음의 긴장을 놓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서 진심 어린 미소를 볼 수 없게 되자, 그는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받은 상처들은 시간만이 해결 해 줄 수 있는 것이었기에, 다른 이들이 도와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사여묵은 그녀에게 행복을 주고 웃게 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결핍까지는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양운은 아픈 마음에 술을 잔뜩 마시고 오후까지 잠을 잤다. 그러고는 궁에 가서 황제와 대면했다.한때 번성했던 임씨 가문에는 지금 그 혼자만 남아 있었다. 제자들만 있을 뿐 자식이나 후손은 없었기 때문이다. 임왕 임병일은 당시 한때 많은 군사를 거느렸는데, 그 공로가 너무 커서 황제를 위협할 정도였다. 그 사이에 아마도 여러 가지 은혜와 원한이 있었을 것이지만, 숙청제는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임씨 가문은 결국 사씨 가
거리를 돌며 공개적으로 조롱받는 동안, 영군왕은 완전히 무너져 미쳐버린 듯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 무지하고 어리석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백성들이 조정에 속아 폭군을 현명한 군주로 착각하였으며, 자신 사청엄만이 진정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고 외쳤다.그러나 그의 쉰 목소리는 백성들의 저주 속에 묻혀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죽이라 외치며 요참형조차 그에게는 너무 관대하다며, 차라리 천 번의 칼질과 만 번의 난도질을 하는 능지처참으로 갚아야 한다고 외쳤다.연왕은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은 억울함과 사청엄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만약 사청엄이 자신의 사람들을 배반시키지 않았다면 자신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 믿었다.사청엄은 어둠 속에 숨어 기회를 엿보던 독사처럼 그가 모르는 사이 치명적인 한 방을 날렸다.사청엄 때문에 그는 이제 단순한 역적이 아니라 어리석은 역적으로 전락했다. 자신이 평생 공들여 쌓아 온 모든 것을 남에게 넘겨야 했고, 자신을 배신한 부하들에게 묶여 조정의 군대에 넘겨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훗날 역사에 기록될 자신의 이름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그는 평생 동안 권력과 명성을 위해 애써왔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형틀에 묶여 처형대로 끌려가는 순간, 그의 온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세상은 온통 증오와 조롱의 눈빛으로 가득했다. 마침내 그는 울부짖으며 오열했다.이 모든 순간을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대업을 이루기 위해 그는 단 한 가지도 자신의 뜻대로 해본 일이 없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지도 못했고, 아내를 맞이하고 첩을 들인 것조차 모두 이용을 위한 수단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났을 때 단 한 번이라도 마음껏 사랑해보려 했지만, 그로 인해 무상과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눈물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는 군중 속에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 자줏빛 옷을 입은 그녀는 아름답고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드디어 대청산이 시작되었다.대리사와 경위 형부의 공동 조사 끝에, 연왕과 영군왕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사실로 밝혀졌다.모두 죄목이 확실했기에,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린 이유는 그들의 모든 죄목을 하나하나 나열하여 천하에 알리기 위해서였다.연왕 일가는 정보를 제공한 공을 세운 사여령을 제외하고 모두 황실 감옥에 갇혔다.사여령은 황실 족보에서 이름이 제외되었다. 여전히 대리사에서 감옥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긴 했지만, 앞으로 10년 동안은 승진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진이는 그를 일시적으로 직무에서 배제시켰고, 처분이 끝난 후 복직시키겠다고 했다.진이는 선의를 베풀어 그에게 앞으로 이 직책을 계속 맡고 싶다면 황실 감옥에 가까이 가지 말고, 집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반성하라고 당부했다.진이는 사여령이 어리석기는 해도 성실하고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자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우유부단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기에 진이는 여전히 그를 돌보아 주려 했다.진이는 송석석에게도 사여령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송석석은 사여령이 어릴 적부터 겁이 많아 무슨 일이 생겨도 반항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자랐지만, 다행히 적모 밑에서 자라며 훌륭한 교육을 받아 본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사여령을 특별히 돌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여령이 진성에 머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황제를 안심시킬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진이는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사여령이 이번 처벌을 피할 수 있던 이유도 연왕의 사병 정보를 제공한 덕이었지만, 일이 지나간 후 황제가 그를 떠올리면 여전히 불편함을 느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황제가 그의 직책을 박탈하지 않은 이유는 그를 자신의 눈앞에 두고 감시하려는 의도였다. 그가 진성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그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었다.조정 회의에서 숙청제는 영군왕과 연왕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죄목을 발표했다. 그들의 죄목은
추몽의 눈빛에 섬뜩함이 스쳤다."좋습니다. 위선적인 말 어디 한번 들어보지요."숙청제는 원래 의심이 많아 항상 북명황실을 경계해 왔다. 송석석에게 여성이 억압받아 살 길이 막힌다면 반기를 들겠냐고 묻는 것도, 비록 그녀가 부정한다 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 의심을 남겨두기 위한 것이었다.송석석이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묻는지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녀는 질문을 들었을 때부터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아직 송석석이 대답도 하기 전에, 추몽은 비웃으며 말을 덧붙였다."먼저 아첨하며 숙청제를 치켜세워 보시지요. 그의 정책이 여성을 얼마나 잘 대우했는지 떠들어 보십시오.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마음껏 칭송하시지요."송석석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비꼬는 듯한 도전적인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럴듯하게 가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전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세상이 어리석고 폐쇄적이라 당신의 기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세상의 인정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당신 개인의 문제일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대표하지도 못하며,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은 그들에게 원한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더 큰 혐오와 배척을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를 안다면 틀림없이 당신을 꾸짖고 비난할 것입니다."추몽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지만, 그는 이내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결국 대답하지 않으시는군요. 여성이 억압받아 살 길이 막힌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까?"그러자 송석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만약이라는 것은 그저 가정일 뿐이고 사실이 아니니 제가 굳이 고민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결국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시는군요." 추몽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송석석이 차분히 대답했다."살 길이 막혔다는 것과 대다수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을 같은
제제사와 추몽은 대리사의 심문실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낡은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송석석은 서리의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리 않았기에 그들이 아무리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더라도 송석석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 그리고 간혹 들릴 듯 말 듯한 한숨 소리 전부 말이다.하지만 대화는 하지 않았고, 심지어 서로 시선을 몇 번 마주하지도 않았다. 마치 강제로 한자리에 앉혀진 낯선 이들처럼 거리감과 냉담함이 느껴졌다.송석석은 자신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자리를 떠날 수 없었기에 그 어색함을 어쩔 수 없이 함께 견뎌야 했다.오랜 침묵 끝에 제제사가 겨우 한 마디 꺼냈다.“왜 이런 짓을 한 거냐?”그는 진심으로 의아해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눈앞의 사람이 자신이 기억하는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아무리 보아도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겹쳐지지 않았다.추몽은 두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굳이 따져 묻을 필요가 있나?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되는 법이지.”“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 아니더냐?” 제제사가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로 묻자, 추몽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어차피 이 생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할 수는 없었다. 선황제가 그러지 않았나? 나는 패역한 자라고. 그래서 생각했지. 내가 가진 생각들이 진정 패역한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진짜로 패역한 일을 저질러 보자고. 다른 모든 것은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제제사가 그의 시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너희 반란으로 수천수만 명이 죽었고, 피비린내는 지금도 가시지 않았다. 네가 이런 짓을 했다는 걸 나는 믿을 수 없다. 네가 언제부터 사람 목숨을 이렇게 하찮게 여겼느냐?”추몽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심히 차갑고 냉담해 보였다.“추몽,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나.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거냐?” 제제사가
이튿날 아침, 송석석은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회왕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번에 회왕이 진성으로 잡혀왔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기에 목종욱은 여전히 병사들을 이끌고 회왕의 아들을 수색하고 있었다.회왕비는 자신의 아들도 왕표처럼 요참형에 처형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송석석을 찾아온 것이다.사실 전에 회왕이 진성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회왕비가 란이를 찾아가 송석석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시켰지만 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심지어 송석석 앞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송석석도 석소 사저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회왕비가 재빨리 송석석에게 다가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석석아! 이모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송석석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회왕비는 얼른 두 팔을 활짝 벌려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몇 마디만 하면 돼.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좀 살려주면 안 돼? 네 사촌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전부 걔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제발 네가 좀 구해줘!”송석석은 눈시울이 붉어진 회왕비를 보며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진성으로 돌아와 관아에 갇혀 있었을 때 회왕비가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송석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나약한 회왕비와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으며 회왕비를 슬쩍 피해 경위부 안으로 들어갔고 경위대에게 회왕비를 쫓아내라고 지시했다.이때 등 뒤에서 회왕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석석아, 너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느냐? 네가 어렸을 때 이모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송석석이 뒤도 안 돌아보자 회왕비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송석석, 네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꼈다! 네가 날 이렇게 모른 척하면 분명 네 어머니 상심이 클 것이다!”자신의 어머니가 언급되자, 걸음을 멈춘 송석석은 싸늘하게 굳은
한편, 송석석은 서재에서 편지 한 장을 쓴 뒤, 편지를 염구진에게 주면서 사람을 시켜 남강에 있는 사여묵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송석석은 현재 남강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병사들만 끌어 모을 뿐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대치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남강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황제에게 먼저 얘기한 빅토르는 전쟁을 이기지 못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지만 사청엄이 반역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빅토르에게 성을 나눠줄 수 없었고 빅토르도 공을 세울 수 없었다.이대로 섣불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쓴 서약서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초원과 연합하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초원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초원은 애초부터 전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마음을 졸이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중립을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만약 둘 중 한 나라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초원은 반드시 상국을 선택할 것이다.전에 사제가 송석석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남강 병사들은 빅토르를 확실하게 공격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송석석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때,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석석아!”“들어와.”송석석의 말에 시만자가 최숙심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최씨께서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최숙심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왕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송석석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전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몸으로만 갚지 않으시면 됩니다.”송석석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농담을 하자, 흠칫하던 최숙심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시만자는 잠깐 앉아있다가 왕경루로 가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종문파와 시씨 가문 사람들은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