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여옥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 끊임없이 퍼져나갔다. 염선생이 조사한 결과, 실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를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과거의 일들이 하나하나 끄집어내져 그녀와 여학을 얽매는 방식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안여옥을 깎아내리는 것은 곧 안태부를 깎아내리는 것이었고, 동시에 아군여학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이어졌다.안태부와 제제사는 학문의 거장으로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으나, 이번 사건으로 안태부는 신격화된 위치에서 추락해 사람들의 존경을 잃어갔다. 반면, 사람들은 제제사를 치켜세우기 시작했다.흥미롭게도,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제상서의 외실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거론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렇게 제씨 가문을 치켜세우는 여론은 제씨 가문에도 이득이 되지 않았다. 권세가 지나치게 드러나면 반감을 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제씨 가문은 여론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염선생이 지켜본 결과, 제씨 가문은 실제로 여론을 진정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다시 화제를 여학과 안여옥으로 돌려, 안여옥의 혼사와 관련해 그녀를 깎아내리고 모욕하는 일이 계속되었다.염선생은 참을 수 없이 분노했다. 안여옥처럼 깨끗하고 순결한 여인이 이들에게 이렇게 더럽혀지다니, 정말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그녀를 모욕하기 위해 찾아온 이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처음에는 몇몇 사람들이 진심으로 청혼을 하러 오기도 했다. 물론 품행이 바르지 못한 하찮은 인간들이었지만, 그래도 결혼 의사는 있었다.하지만 이후에 찾아온 이들은 순전히 안여옥을 모욕하려는 의도로만 왔다. 보기 흉한 이들이 몰려왔고 청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비꼬는 말들을 내뱉었다. 제부에 들어가지 못하면 대문 밖에서조차 선심을 써 그녀를 데려가 주겠다고 외쳐댔다.염선생은 사람을 시켜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두었다. 나중에 이들을 조사한 뒤 응징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무리가 이들의 이름을 적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이 사실을 송석석에게 보고하자, 누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
태부부 앞에서 한때 소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이제 줄지어 대문 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모두 고개를 떨군 채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그들 앞에는 덩치가 크고 건장한 남자들이 그들을 주시하며 서있었는데, 그들의 주먹은 야자수 열매만큼 커서 한 대만 때려도 머리를 박살낼 듯한 위압감을 풍겼다.방시원은 말에서 내려 냉랭한 눈빛으로 그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그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없이 서 있었지만, 그의 위엄 있고 살벌한 기운은 이들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서로 몸을 붙이며 작은 안전이라도 찾으려는 듯했다. 아무도 방시원의 얼음 같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안태부는 중문을 열도록 지시했고, 안씨 노부인은 방씨 가문에서 청혼을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병이 절반이나 나은 듯했다. 그녀는 곧바로 하인들에게 따뜻한 물을 준비하게 하고, 단장을 하며 직접 나가 맞이하겠다고 말했다.안여옥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조부가 며칠째 그녀를 추월원에 머물게 했으며 하인들에게 외부의 소문을 그녀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그녀는 겉으로는 독서를 하거나 눈을 감상하고 차를 마시며 평온해 보였지만, 마음속은 고통으로 뒤덮여 있었다.그녀는 처음에 자신이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소문이 폭풍처럼 그녀를 휘몰아치자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았다.그래도 다행인 것은, 힘들기는 해도 무너지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그것은 그녀가 읽은 수많은 책 덕분이었다. 책 속에서 그녀는 많은 인생 이야기를 접했다.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와 강인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세상에 만연한 수많은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인간의 삶이 항상 평탄한 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험난한 길만 있는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삶에는 반드시 행복한 순간도 있고 어려운 시기도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그녀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위로하며 다짐했다. 소문을 신경 쓰지 않으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난 후, 안태부가 사람을 보내 그녀를 밖으로 불렀다.안여옥은 경주가 가져온 화려한 옷과 정교하게 맞춘 장신구들을 바라보았지만, 결국 간단히 흰옷과 살구색 망토를 걸쳤다. 마치 손님을 맞거나 자신의 인생을 논할 중요한 순간이 아닌, 단지 정원을 산책하러 나가는 것 같은 차림새였다.외원의 본채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곧바로 방시원을 향했다. 그도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빛은 깊고 맑았으며 약간의 절제가 묻어나 있었다.그녀는 단 한 번 마주치고도 더 이상 쳐다볼 수 없었다. 심장은 북을 치는 것처럼 요란하게 뛰었고,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졌다.하지만 그녀는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한 명 한 명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이때 그녀를 보자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오른 오수인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요즘 많이 힘들었지? 정말 속상했겠다."어른에게서 건네받는 따뜻한 위로에 안여옥은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콧날이 시큰해졌지만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옷깃을 여미고 몸을 낮춰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정도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승상 부인은 그녀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훌륭한 아가씨가 사람들 입에서 얼마나 심하게 오르락 내리락거렸는지!"참하기도 하지. 오늘 내가 이 혼사를 주선하러 왔단다. 네 조부모님께서도 네 의견을 묻고 싶어 하신다. 방시원과의 혼인을 받아들이겠니?"안여옥은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최대한 태연하고 당당하게 보이려고 했지만, 왜인지 마음속의 억눌렀던 감정이 갑자기 밀려들었다.그녀는 거의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목이 여러 번 멘 탓에, 동의한다고도 동의하지 않는다고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모두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방시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으로 걸어오며 공손히 말했다."잠시 둘이서
경주는 문 밖에 서서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가 결국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가씨가 지난날 얼마나 힘들고 마음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는지 그녀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방 장군이 이렇게 북과 징을 울리며 청혼하러 오고 중매자로 승상 부인을 데려왔으니, 이 일이 성사된다면 바깥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어째서 아직 승낙하지 않는 것인지, 경주는 속이 타 들어가, 아가씨 대신 대답을 해주고 싶은 지경이었다. 안여옥은 코끝이 찡했다."오늘 제가 승낙하지 않으면 장군께서 저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실 겁니다."방시원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나는 사람들에게 비웃음 당하는 게 하나도 두렵지 않소. 더 실컷 비웃으라지. 사내가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소? 당신은 여학에서 학생들을 용감하게 구했으니, 이런 유언비어에 시달릴 이유가 없소."안여옥은 그의 말을 듣고 문득 깨달았다. 그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청혼을 하러 온 이유는 만약 그녀가 거절하더라도 소문을 자신의 쪽으로 돌려 그녀를 구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이다. 방시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입가에 여전히 미소를 띠며 말했다."천천히 생각해 보시오. 굳이 지금 대답할 필요는 없소. 충분히 고민한 뒤 사람을 보내 알려주기만 하면 되오."안여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장군! 저…… 승낙하겠습니다."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불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린 채 말을 이었는데, 목소리에는 자신도 모르는 애교 섞인 투정이 담겨 있었다."저는…... 저는 다른 의견 없어요. 무조건.. 조부모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그리고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몸을 돌려 황급히 도망치듯 뛰어나갔다.방시원은 잠시 놀란 듯 그 자리에 굳어 서 있었다. 이내 그의 눈빛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침내 소원이 이루어진 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얼굴 가득 번져 나갔다.
혼사 문제가 해결된 뒤, 송석석은 비로소 소란을 일으킨 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방시원은 혼사를 논의하러 직접 제씨 가문을 찾아갔을 때 문제를 일으켰던 이들을 소집하기만 했을 뿐, 사적 형벌을 가하지는 않았다. 송석석 또한 공정하게 처리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녀는 오진에게 관련된 모든 인물들을 데려오게 하고는, 그들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소란을 일으킨 혐의로 처벌을 내렸다.벌금형을 부과하거나 매질을 하도록 했으며, 염선생의 명단에 올라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처벌했다.한편, 제씨 가문이 주의를 돌리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동원하였고, 이 과정에서 연여옥을 고의로 해치려 한 정황을 발견했다. 이에 송석석은 수집한 모든 증거를 민지 장공주에게 넘겼다. 민지 장공주는 이를 자신의 시아버지인 어사대부에게 전달했다. 그 결과, 조회가 끝나기 전에 제씨 가문에 대한 탄핵 상소가 이루어졌다.비록 제상서는 자신은 전혀 이 일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숙청제는 관리 소홀을 이유로 그의 반년 치 봉록을 삭감하고 연말 포상까지 제외시켰다.오 대반이 북명황실로 포상을 전달하러 오자, 송석석은 그를 직접 맞이하며 차를 대접했다.서우도 집으로 돌아와 있던 참이었다. 송석석은 서우를 데리고 나와 오 대반에게 인사를 드리게 했다.서우는 지난 1년간 키가 부쩍 자랐고, 외모는 점점 그의 아버지를 닮아갔다. 서원에 들어간 이후로는 더욱더 겸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보였으며, 품행 또한 단정해졌다.오 대반은 그를 바라보며 깊은 감동을 느꼈다."정말 훌륭하게 잘 자랐구나. 공부도 잘하고."서우는 공손히 말했다.“차를 드십시오.”그는 보주가 가져온 간식 쟁반을 직접 받아 들고 나와 말했다.“이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생강 대추 떡입니다. 많이 드십시오. 마마께서 이 떡이 속을 따뜻하게 해준다고 하셨습니다.”오 대반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그래, 그래!”그는 떡 한 조각을 먹고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서우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올
송석석은 오 대반을 배웅한 후 염선생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는, 곧바로 시만자와 오사형이 준비한 모닥불에 둘러앉아 고구마를 구워 먹는 자리에 합류했다.남풍관의 일은 염선생에게 맡겨 두었으니, 염선생이 사람을 보내 감시할 것이다.오사형과 시만자는 제제사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시만자는 자신이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믿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끊임없이 놀라워했다.왕이장은 남북을 돌아다니며 온갖 일을 겪고, 또 온갖 것을 봤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의아해했다.“나이가 그렇게 많고 지위도 그렇게 높은 사람이 왜 그런 곳에 가야 했을까?”그들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제제사는 남풍관에서 특별히 부끄러울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단지 몇 명의 소관을 불러 시중을 들게 하고, 술을 조금 마시고 노래를 들으며 손을 만지는 정도였다.제제사는 선황제의 스승이었다. 선황제는 남색을 가장 싫어했고, 심지어 이를 깊이 혐오한 인물이었다. 그런 선황제의 스승으로서, 제제사는 선황제가 즉위한 후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국가를 다스렸다. 또한 과거 신중하고 겸손했던 제씨 가문의 태도를 생각하면 그 역시 남색을 극도로 싫어해야 맞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말년에 갑자기 억압을 풀어내기라도 하듯 모든 걸 무시하고 남풍관으로 드나들었다.송석석은 자리에 앉아 고구마 하나를 집어 들어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이리저리 던지며 식혔다. 이를 본 왕이장이 손을 뻗어 고구마를 가져갔다. 후후 숨을 불어 열기를 식힌 다음 두 손으로 살살 굴려 껍질을 벗겨 송석석에게 건넸다.“빨리 먹어. 먹고 몸 좀 따뜻하게 해.”송석석은 활짝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는 말랑말랑해 보이는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지며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하아, 하아 숨을 불어가며 겨우 다 삼켰다.시만자는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왕이장을 쳐다봤다.“다정한 면도 있었네?”“뭐 어려운 거라고. 너도 하나 줄게.” 왕이장은 두 손가락으로 고구마
왕이장의 말에 시만자가 끼어들며 말했다."사실 나도 네가 남자도 여자도 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칭찬은 고맙지만, 남자도 여자도 다 아니야. 고마워." 왕이장은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너희끼리 천천히 고구마나 굽고 아가씨들끼리 얘기나 나눠."그는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평소 그의 걸음걸이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때로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듯 걷고, 때로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곤 했다. 하지만 지금 뒤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느껴지자 허리를 곧게 펴고 마치 군인처럼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그러자 시만자가 문득 어떤 일이 떠오른 듯 말했다."참, 만두랑 신신이 설을 지내러 올지도 몰라. 전에 편지가 왔었거든. 그런데 아직 모습을 안 보이는 걸 보면 아마 못 오는 것 같기도 해.""설인데, 그들의 사부님이 허락할까?" 송석석이 물었다."못 왔으니 아마 허락이 안 난 거겠지. 어쩌면 연후에야 올 수 있을 지도 모르고." 시만자는 장작불에 새 숯을 더 넣으며 말했다. 새로 얹은 은빛 숯이 붉게 타오르는 숯을 덮었고, 이내 한쪽에서부터 천천히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네가 전에 우리 쪽에 사람이 부족하다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편지를 보낸 거야.""신신도 올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송석석은 시만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올해는 진짜 힘들었어. 늘 기운이 부족한 느낌이 들었달까…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항상 새로운 일이 생기곤 했지.""이번 설에는 푹 쉬어." 시만자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설이면 현갑군이 제일 바쁘지." 송석석은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였다."사실 바쁜 것도 괜찮을지 몰라. 자기 전에 누우면 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을 테니까."시만자가 궁금해하며 물었다."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어떤 기분이야?""그리운 건 괜찮은데 기다리는 건 정말 힘들어. 하루하루 날짜를 세며 보내야 하니까."송석석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받치고 살짝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녀의 턱선이 유난히 선명해 보였
설날 전날, 서우는 빨간 비단 솜옷을 입고 흰 여우 털 장식이 달린 두툼한 모자를 쓰곤, 밝은모습으로 공씨 가문의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염선생은 미리 많은 선물을 준비해 두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서우가 직접 고른 것들이었다.어젯밤, 국공부에서 온 진복이 장부를 가져왔고, 서우는 이를 꼼꼼히 보느라 밤을 새웠다. 염선생은 아이가 어리니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며 송석석에게 말려 달라 부탁까지 했지만, 송석석은 일찍 장부 보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은 일이라며 계속 보게 하였다. 국공부는 결국 서우가 책임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서우가 장부를 볼 때, 서동 진소설도 그의 곁에 있었지만 진소설은 오늘 집으로 돌아가 설을 보내야 했기에 그를 따라 공씨 가문까진 갈 수 없었다.송석석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서우가 섬세하고 침착하며 성숙한 태도를 가졌으면서도 천진난만한 동심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는 서우가 어려운 시간을 겪으며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모습일 수도 있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때로는 겉으로 약한 척하며 속으로 강함을 숨길 줄 는 것이 삶의 지혜라 여겼기에 뿌듯해했다. 서우는 공씨 가문에 가서 설을 보내고 싶었지만, 올해는 고모부가 집을 비웠기에 고모가 홀로 설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서우는 고모의 손을 잡고 말했다.“저는 설날 다음 날 바로 돌아올 거예요. 오래 머물지 않고 돌아와서 고모와 함께 있을게요.”송석석이 그의 코를 살짝 문지르며 다정하게 말했다.“조금 더 오래 머물다 와도 돼. 고모는 바빠서 네가 같이 있어주지 않아도 괜찮아.”그러자 곁에 있던 시만자가 송석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서우야, 나도 있으니까 안심하고 다녀와.”“네. 시 고모도 계시고, 왕 사백도 계시니까요.”서우는 시만자와 왕이장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염선생과 보주를 포함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또 많은 분들이 있으니 걱정 없겠어요.”서우는 마치 작은 어른처럼 손을 뒤로 하고 눈웃음을 띄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