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현은 나를 힘껏 걷어찼다.“어딜 보는 거야? 내 말은 공항이요 에어포트!”하정현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그 순간 나는 내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깨달아 너무 난감했다.“하. 대화 주제가 뭐 그렇게 빨리 변해요? 반응할 새도 없이.”“그런데 무슨 뜻이에요? 공항을 체험해 보다니요?”나는 여전히 하정현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그러자 하정현이 으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B시에서 가슴 수술은 하지 못했지만 큰 수확을 얻었거든. 우리 동기를 만났는데 지금 광고 디자인 일을 맡고 있대. 그런데 나 같은 몸매가 요즘 보기 드물다고 공항 모델로 광고 한편 찍지 않을 거냐고 제안하더라고.”“난 이미 계약이 끝났는데 남자 모델 자리가 아직 비어 있어서 수호 씨가 해보지 않을 건가 해서. 보수도 짭짤해. 촬영 한 번에 100만 원 정도 벌 수 있어. 어때?”하정현은 나에게 손가락을 내밀며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앞에 그렇게 많이 했던 말들이 이걸 위한 빌드업이었어요? 저 지금은 시간 안 돼요. 요즘 일이 많거든요.”예전이었다면 나는 아마 고민도 없이 승낙했을 텐데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스케줄 조정이 어렵다.하정현은 일순 낯빛이 어두워졌다.“내가 이미 약속했단 말이야. 안 돼. 꼭 와야 해.”“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게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미리 말했어야지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내가 미리 말하면 동의 안 했을 거잖아. 이게 별로 자랑할 만한 건 아니지만 절대 불법은 아니야. 돈도 빨리 벌고. 게다가 한번 얼굴 알리면 돈 버는 건 한순간이야.”나는 그 말에 하마터면 입안에 머금었던 물을 뿜을 뻔했다. ‘그러니까 그 촬영이라는 게 살짝 야릇한 건가?’나는 얼른 거절했다.“정신 좀 차려요. 그런 사진이 나돌면 앞으로 어떻게 고개 들고 다니려고요? 게다가 하정현 씨 집 돈 많잖아요.”“그건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와야 해. 안 그러면 전에 물어본 건 대답 안 해줄 거야.”하정현은 팔짱을 끼고 거절은 사절한
하정현은 화가 난 듯 벌떡 일어섰다.“지은의 마음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수호 씨 마음속에 지은의 자리는 조금도 없어?”조금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윤지은은 내 첫 번째 여자기도 하고 미련이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불가능하다.신분차이나 너무 큰 것도 있지만 성격 차이도 너무 커서 우리의 미래는 당연히 그려본 적이 없다.그런데 하정현이 갑자기 위협하니 나는 일부러 시비 거는 듯 대꾸했다.“그렇다면 실망하겠네요. 나랑 하정현 씨 친구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하정현은 갑자기 내 뒤를 흘긋거렸다.“이제 끝났네. 지은이 바로 뒤에 있거든.”뒤를 돌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표정을 한 윤지은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나는 깜짝 놀랐다.“지, 지은 씨가 여긴 어떻게 왔어요?”나는 마음이 찔려 도저히 윤지은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내가 불렀어. 지은아, 이 인간이 글쎄 마음속에 넌 눈곱만치도 없대. 개도 이렇게 매정하지는 않겠다.”윤지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마루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정수호는 원래 개야. 개한테 뭘 바라?”‘그래. 뭐.’오히려 윤지은한테 시원하게 욕먹고 나니 내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윤지은은 항상 나한테 싸움을 걸어오기에 오히려 싸우지 않는 게 더 무섭다.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마음대로 말해요. 아무튼 두 사람한테 난 좋은 사람 아니잖아요. 오히려 지은 씨나 친구분 좀 말려 봐요. 야한 잡지 촬영하겠다고 하니까.”“야한 잡지라니? 그거 인체 보디아트든.”하정현은 강조했다.윤지은은 예쁜 눈매를 찌푸리더니 싸늘하게 하정현을 바라봤다.“보디아트라니? 제대로 말해.”“에이, 그냥 좀 노출 심한 사진 몇 장 찍는 거야. 하지만 가릴 곳은 가려. 얼굴도 안 나올 거고...”윤지은은 하정현의 말을 믿지 않았다.“네가 그렇게 돈이 없으면 나한테 말해. R국에 보내줄 테니까.”“R국은 왜?”“R국이 성진국인 데다 야동 사업이 발전됐잖아. 거기 가서 여주인공 맡으면 돈 빨리 벌 거야.
우리가 최선을 다해 설득한 끝에 하정현은 끝내 우리 설득에 넘어왔다.“그래, 알았어. 안 찍을게. 안 찍으면 되잖아.”“네가 또 쓸데없는 짓 하면 안 되니까 수호 씨가 그동안 쟤 좀 감시해.”나는 내 귀를 믿을 수 없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내가 윤지은 씨 부하도 아니고 왜 지은 씨 말을 들어야 하는데요?”“뭐라고?”윤지은의 표정은 단번에 어두워졌다.나는 윤지은이 이럴 때면 가장 무섭다. 내가 그동안 만난 누나들 중 윤지은이 단연 가장 무섭다고 할 수 있다.윤지은이 나를 째려볼 때면 곧 화를 내겠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더군다나 상대는 하필 부잣집 아가씨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거다.나는 곧바로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해명했다.“저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지은 씨 친구 남편도 돌봐야 하고 화인당도 관리해야 하고 무엇보다 저도 지금 다쳐서 여유 시간이 없어요.”“호섭 씨는 상관할 거 없어. 내가 전문적인 가사도우미를 구했으니까.”“네?”‘그럴 거면 왜 진작 말하지 않고 진작 부르지 않은 건데?’‘왜 윤지은이 내가 사모님 댁에서 지내는 걸 싫어하는 것 같지?’‘에이, 설마.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이 여자는 절대 질투할 리 없어.’“그래도 안 돼요. 저도 따로 볼 일이 있어요.”나는 여전히 거절했다. 무엇보다 지금 해야 할 일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윤지은은 갑자기 테이블을 탁 쳤다.“가라면 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양동준한테서 복싱 배우고 싶은 거 맞아?”나는 변석호의 일을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윤해철을 배신하는 게 돼버려 꾹 참았다.하지만 죽어도 이 일을 승낙할 생각은 없었다. 하정현이 비록 덩치는 작아 보여도 너무 영리하고 비상해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다.나는 스스로 그런 번거로운 일을 자처할 생각이 없었다.“안 간다 이거지? 좋아.”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얼마 뒤 양동준이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앵동준은 오자마자 아무 말 없이 내 멱살을 잡아 올렸다
나는 더 이상 방법이 없어 결국 타협했다.“알았어요. 동의하면 될 거 아니에요.”양동준은 그제야 손을 멈췄고 나도 겨우 내 체면을 지켜냈다.나는 신속히 옷을 입으며 속으로는 윤지은을 짓밟고 혼내줄 상상을 했다.‘어떻게 부잣집 아가씨라는 사람이 이럴 수 있지? 너무하잖아.’난 꼭 언젠가 성공해 윤지은이 사람들이 앞에서 나한테 고백하는 걸 지켜볼 거다. 그때 가서 윤지은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꼭 구경할 생각이다.옆에 있던 하정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윤지은을 바라봤다.“지은아, 왠지 네가 이러는 게 나를 위한 게 아닌 것 같다? 너 일부러 정수호를 쪽팔리게 하려는 거지? 설마 질투해?”윤지은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질투해? 저런 인간이 뭐가 좋다고?”하정현은 혀를 날름거렸다.“혹시 알아? 정수호가 사모님 댁에 가는 게 싫어서 이러는 걸 수도 있잖아.”그 말인 즉 윤지은이 사모님을 질투한다는 뜻이었다.윤지은의 표정은 단번에 어두워졌다.“계속 헛소리하면 너도 똑같은 수모를 당하게 해줄게.”하정현은 목을 움츠리며 싱긋 웃었다.“안 그럴게. 말 안 하면 되잖아. 누가 우리 강한 지은을 건드리겠어?”하정현은 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표정만 보면 윤지은의 핍박에 못 이겨 마지못해 태도를 누그러뜨린 듯했다.윤지은의 안색은 얼마나 어두웠는지 모른다.그러다가 그 화를 뜬금없이 나한테 풀었다.“당장 가서 음료수 사와.”‘참 재수가 없으려니까.’“웨이트도 있잖아요. 왜 제가 가야 하는데요?”윤지은은 테이블을 탁, 내리쳤다.“가라면 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양동준더러 너 모셔가라고 할까?”나는 헐레벌떡 일어섰다.“참 대단하네요.”내가 떠난 뒤 윤지은은 하정현에게 말했다.“봤지? 정수호는 나한테 하인이나 다름없어. 나 같은 부잣집 아가씨가 저런 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그래. 알았어.”하정현은 겉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지은아, 너 다 티나.’‘증명하려고 과하게 행동하면 오히려
진동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난 지금 누구보다도 그 자식 죽이고 싶어. 젠장. 내가 돈 들여 대학교까지 보내줘서 이 정도 된 건데. 도움을 그렇게 많이 받았으면서 개 같은 게 감히 나를 물어?”“솔직히 궁금하네. 대학 내내 서포트해 주려면 돈이 적게 들지 않을 텐데, 그 돈 다 네가 낸 거 맞아?”왕정민은 고기 한 점을 집어먹으며 물었다.그러자 진동성이 대답했다.“내가 미쳤어? 그 자식이 대학 다닐 때 쓴 돈은 내가 그 자식 부모님 주민등록증을 가져가서 대출받은 거야. 그 자식 부모도 그 사실을 아들한테 알리지 않으려고 하니까 내가 한 것처럼 했지 뭐.”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뛰쳐나가 진동성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계속해서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진동성이 또 내 뒤에서 얼마나 양심 없는 짓을 했는지 들으려고.그때 진동성이 말을 이었다.“내가 그동안 준 용돈도 사실은 얼마 안 되는데 그 가족한테는 엄청난 은혜처럼 느껴졌나 봐. 내가 그 집에 찾아갈 때마다 정수호 부모가 나한테 얼마나 깍듯이 대하는데. 나를 조상으로 모실 판이라니까. 정수호 그 자식도 그동안 동성 형 하면서 내 말은 개처럼 따랐어.”둘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분노가 치밀어 나는 이를 갈았다.하지만 진동성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키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내가 전에 정수호 집에서 낡은 의학서적을 발견해서 몰래 훔쳐 왔는데 어땠는 줄 알아? 그게 고대 의서라는 거야. 엄청 희귀한 거래. 그걸 팔아서 1000만 원 벌었어.”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뛰쳐나갔다.“진동성!”나는 그 세 글자를 이를 갈면서 토해냈다.자리에 앉아 있던 네 명은 모두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특히 진동성이 가장 놀란 듯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뭐야? 너도 여기 있었어? 내가 한 얘기 다 들은 거야?”“그래, 들었어
때는 밤 11시.형님 집 아래에 있는 공원에서 야간 러닝을 하던 중, 풀숲 속에서 들려오는 남녀의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진동성, 설마 안 되는 거야? 집에서는 느낌 안 산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더니, 왜 아직도 안 돼?”‘저거 우리 형수님 목소리 아니야?’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여자가 내 형수님 고태연이라는 걸 알아버렸다.‘형과 형수는 밥 먹으러 간다고 했는데? 왜 공원 풀숲에 있는 거지?’여자 친구는 한 번도 안 사귀어 봤지만 동영상은 그래도 많이 봤다고 자부하기에, 나는 곧바로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버렸다.‘형과 형수님이 이런 스릴을 좋아할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공원에서.’순간 몰래 엿듣고 싶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다.형수는 얼굴도 예쁘장한데 몸매는 더 끝내준다. 그런 형수의 신음소리라니 이건 꿈에 그리던 일이었다.살금살금 수풀 쪽으로 걸어가 몰래 머리를 내밀었더니 형수님이 형 위에 앉아 있었다. 물론 나를 등지고 있었지만 등 라인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순간 입이 바싹 마르고 아랫배에 열기가 올라왔다.하지만 이렇게 매력적인 형수님 앞에서 형은 영 맥을 못 췄다.“태연아, 나 여전히 안 되는데.”그 말에 형수가 버럭 화를 냈다.“약도 없네, 정말. 이제 고작 서른다섯이면서 왜 이렇게 쓸모가 없어? 안 서면 싸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아무것도 없으면 애는 어떻게 가져? 계속 이러면 나 다른 사람 만난다? 당신은 애 싫을지 몰라도 나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잔뜩 화가 난 형수가 바지를 입고는 수풀 밖으로 걸어 나오자 놀란 나는 헐레벌떡 도망쳤다.집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수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쾅’ 닫히는 문소리에 내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깜짝 놀랐네. 형과 형수님 사이가 이렇게 안 좋을 줄이야.’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욕구가 많아진다더니 형수님도 욕구 불만인 게 틀림없었다. ‘하긴, 형처럼 비실비실한 몸으로 형수님을 어떻게 만족시키겠어?
“애교야, 왔어? 얼른 들어와.”내가 한참 답답해하고 있을 때, 형수가 다가와 낯선 여자를 친절하게 맞이했다.여자는 형수의 초대로 곧장 집 안에 들어섰다.그러자 형수가 우리를 소개했다.여자는 형수의 친한 친구인데, 이름은 이애교,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다.“애교야, 이 사람은 동성 씨와 같은 마을에 살던 동생이야, 정수호라고, 어제 왔어.”애교라는 여자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빙그레 웃었다.“동성 씨한테 이렇게 어리고 잘생긴 동생이 다 있었어?”“수호 씨 이제 막 대학 졸업했어. 그러니 당연히 젊지. 젊을 뿐만 아니라 엄청 튼실해.”내 착각일지 모르겠으나 형수의 마지막 한마디는 무척 의미심장했다. 심지어 눈길마저 내 아래를 흘끗거렸다.그 동작에 나는 더 불편해졌다.그때, 애교 누나가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물었다.“태연아, 네가 말했던 마사지사가 설마 이 사람이야?”“맞아. 수호 씨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한테 마사지를 배웠대. 솜씨가 엄청 좋아.”형수는 말을 마치자마자 나를 봤다.“아까 미처 말하지 못했는데, 사실 내 친구가 허리와 척추가 아프다고 해서요. 가끔 가슴도 답답하대요. 원래는 한의사를 불러 마사지 좀 받게 하려고 했는데, 수호 씨가 마침 마사지할 줄 알잖아요. 그래서 한번 받아보게 하려고요.”‘그런 거였군.’나는 단번에 승낙했다.‘형과 형수가 나를 이곳에서 머물게 해주고 일자리도 알아봐 줬는데, 이런 일 정도야 당연히 도와야지.’그때, 애교 누나가 부끄러운지 형수를 옆으로 끌고 갔다.“이건 좀 아니지 않나? 너무 젊은데?”“젊은 게 뭐 어때서? 젊을수록 좋은 거 아니야? 젊어야 힘이 좋고, 그래야 너 같은 유부녀를 편하게 모실 수 있잖아.”“무슨 헛소리하는 거야.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애교 누나는 얼굴을 붉혔다.그러자 형수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농담이야. 네가 그쪽으로 생각하니까 그렇지. 솔직히 말해봐, 네 남편 반년 동안 집에 안 왔는데, 그동안 하고 싶지 않았어?”“너 계속 이러면
나는 마치 나쁜 짓을 한 어린애처럼 벌떡 일어났다.“형수님, 형수님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애교 누나도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양 볼은 어느새 사과처럼 빨갛게 무르익었다.“태연아, 그런 거 아니야. 나랑 수호 씨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가슴이 답답해서 마사지해 준 것뿐이야.”애교 누나가 구구절절 설명하자 형수가 피식 웃었다.“내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긴장해? 아니면 나 몰래 정말 나쁜 짓이라도 했어?”나와 애교 누나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그와 동시에 당혹스러웠다.‘내가 감히 형수님 친구를 어떻게 하려 하다니, 만약 형수님이 알면 분명 쫓아낼 거야.’그때 애교 누나가 안절부절못하더니 일이 있다는 핑계로 서둘러 집을 나갔다.형수는 그런 애교 누나의 뒷모습을 보며 멍해 있다가 한참 뒤에 나를 보며 물었다.“수호 씨, 내 친구 어떻게 같아요?”“네?”형수한테서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으니 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워 말까지 더듬었다.“좋죠. 예쁘고 몸매도 좋고 성격도 좋잖아요.”“그럼 내 친구 꼬시라고 하면 그럴 의향 있어요?”형수의 말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마음도 혼란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문제는 형수가 방금 내가 형수 친구를 어떻게 해보려던 걸 발견하고 일부러 떠보는 것일까 봐 걱정되었다.내가 긴장하고 있을 때, 형수가 내 팔을 잡으며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긴장할 거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돼요.”“형수님, 저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애교 누나는 형수님 친구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마음을 품겠어요?”“감히라고요? 아래가 이렇게 단단해졌으면서.”형수는 내 아래를 흘긋거리며 말했다.순간 너무 쪽팔리고 난감해 나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와, 사이즈 보통 아니네요.”내 착각일지 모르겠으나 내 아래를 본 순간 형수의 눈빛이 변했다.그때 형수가 말을 이었다.“나 농담 아니에요. 애교와 잠자리를 가져요. 형 도와주는 셈 치고.”‘뭐지? 애교 누나와 자는
진동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난 지금 누구보다도 그 자식 죽이고 싶어. 젠장. 내가 돈 들여 대학교까지 보내줘서 이 정도 된 건데. 도움을 그렇게 많이 받았으면서 개 같은 게 감히 나를 물어?”“솔직히 궁금하네. 대학 내내 서포트해 주려면 돈이 적게 들지 않을 텐데, 그 돈 다 네가 낸 거 맞아?”왕정민은 고기 한 점을 집어먹으며 물었다.그러자 진동성이 대답했다.“내가 미쳤어? 그 자식이 대학 다닐 때 쓴 돈은 내가 그 자식 부모님 주민등록증을 가져가서 대출받은 거야. 그 자식 부모도 그 사실을 아들한테 알리지 않으려고 하니까 내가 한 것처럼 했지 뭐.”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뛰쳐나가 진동성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계속해서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진동성이 또 내 뒤에서 얼마나 양심 없는 짓을 했는지 들으려고.그때 진동성이 말을 이었다.“내가 그동안 준 용돈도 사실은 얼마 안 되는데 그 가족한테는 엄청난 은혜처럼 느껴졌나 봐. 내가 그 집에 찾아갈 때마다 정수호 부모가 나한테 얼마나 깍듯이 대하는데. 나를 조상으로 모실 판이라니까. 정수호 그 자식도 그동안 동성 형 하면서 내 말은 개처럼 따랐어.”둘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분노가 치밀어 나는 이를 갈았다.하지만 진동성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키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내가 전에 정수호 집에서 낡은 의학서적을 발견해서 몰래 훔쳐 왔는데 어땠는 줄 알아? 그게 고대 의서라는 거야. 엄청 희귀한 거래. 그걸 팔아서 1000만 원 벌었어.”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뛰쳐나갔다.“진동성!”나는 그 세 글자를 이를 갈면서 토해냈다.자리에 앉아 있던 네 명은 모두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특히 진동성이 가장 놀란 듯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뭐야? 너도 여기 있었어? 내가 한 얘기 다 들은 거야?”“그래, 들었어
나는 더 이상 방법이 없어 결국 타협했다.“알았어요. 동의하면 될 거 아니에요.”양동준은 그제야 손을 멈췄고 나도 겨우 내 체면을 지켜냈다.나는 신속히 옷을 입으며 속으로는 윤지은을 짓밟고 혼내줄 상상을 했다.‘어떻게 부잣집 아가씨라는 사람이 이럴 수 있지? 너무하잖아.’난 꼭 언젠가 성공해 윤지은이 사람들이 앞에서 나한테 고백하는 걸 지켜볼 거다. 그때 가서 윤지은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꼭 구경할 생각이다.옆에 있던 하정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윤지은을 바라봤다.“지은아, 왠지 네가 이러는 게 나를 위한 게 아닌 것 같다? 너 일부러 정수호를 쪽팔리게 하려는 거지? 설마 질투해?”윤지은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질투해? 저런 인간이 뭐가 좋다고?”하정현은 혀를 날름거렸다.“혹시 알아? 정수호가 사모님 댁에 가는 게 싫어서 이러는 걸 수도 있잖아.”그 말인 즉 윤지은이 사모님을 질투한다는 뜻이었다.윤지은의 표정은 단번에 어두워졌다.“계속 헛소리하면 너도 똑같은 수모를 당하게 해줄게.”하정현은 목을 움츠리며 싱긋 웃었다.“안 그럴게. 말 안 하면 되잖아. 누가 우리 강한 지은을 건드리겠어?”하정현은 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표정만 보면 윤지은의 핍박에 못 이겨 마지못해 태도를 누그러뜨린 듯했다.윤지은의 안색은 얼마나 어두웠는지 모른다.그러다가 그 화를 뜬금없이 나한테 풀었다.“당장 가서 음료수 사와.”‘참 재수가 없으려니까.’“웨이트도 있잖아요. 왜 제가 가야 하는데요?”윤지은은 테이블을 탁, 내리쳤다.“가라면 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양동준더러 너 모셔가라고 할까?”나는 헐레벌떡 일어섰다.“참 대단하네요.”내가 떠난 뒤 윤지은은 하정현에게 말했다.“봤지? 정수호는 나한테 하인이나 다름없어. 나 같은 부잣집 아가씨가 저런 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그래. 알았어.”하정현은 겉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지은아, 너 다 티나.’‘증명하려고 과하게 행동하면 오히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설득한 끝에 하정현은 끝내 우리 설득에 넘어왔다.“그래, 알았어. 안 찍을게. 안 찍으면 되잖아.”“네가 또 쓸데없는 짓 하면 안 되니까 수호 씨가 그동안 쟤 좀 감시해.”나는 내 귀를 믿을 수 없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내가 윤지은 씨 부하도 아니고 왜 지은 씨 말을 들어야 하는데요?”“뭐라고?”윤지은의 표정은 단번에 어두워졌다.나는 윤지은이 이럴 때면 가장 무섭다. 내가 그동안 만난 누나들 중 윤지은이 단연 가장 무섭다고 할 수 있다.윤지은이 나를 째려볼 때면 곧 화를 내겠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더군다나 상대는 하필 부잣집 아가씨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거다.나는 곧바로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해명했다.“저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지은 씨 친구 남편도 돌봐야 하고 화인당도 관리해야 하고 무엇보다 저도 지금 다쳐서 여유 시간이 없어요.”“호섭 씨는 상관할 거 없어. 내가 전문적인 가사도우미를 구했으니까.”“네?”‘그럴 거면 왜 진작 말하지 않고 진작 부르지 않은 건데?’‘왜 윤지은이 내가 사모님 댁에서 지내는 걸 싫어하는 것 같지?’‘에이, 설마.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이 여자는 절대 질투할 리 없어.’“그래도 안 돼요. 저도 따로 볼 일이 있어요.”나는 여전히 거절했다. 무엇보다 지금 해야 할 일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윤지은은 갑자기 테이블을 탁 쳤다.“가라면 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양동준한테서 복싱 배우고 싶은 거 맞아?”나는 변석호의 일을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윤해철을 배신하는 게 돼버려 꾹 참았다.하지만 죽어도 이 일을 승낙할 생각은 없었다. 하정현이 비록 덩치는 작아 보여도 너무 영리하고 비상해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다.나는 스스로 그런 번거로운 일을 자처할 생각이 없었다.“안 간다 이거지? 좋아.”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얼마 뒤 양동준이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앵동준은 오자마자 아무 말 없이 내 멱살을 잡아 올렸다
하정현은 화가 난 듯 벌떡 일어섰다.“지은의 마음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수호 씨 마음속에 지은의 자리는 조금도 없어?”조금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윤지은은 내 첫 번째 여자기도 하고 미련이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불가능하다.신분차이나 너무 큰 것도 있지만 성격 차이도 너무 커서 우리의 미래는 당연히 그려본 적이 없다.그런데 하정현이 갑자기 위협하니 나는 일부러 시비 거는 듯 대꾸했다.“그렇다면 실망하겠네요. 나랑 하정현 씨 친구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하정현은 갑자기 내 뒤를 흘긋거렸다.“이제 끝났네. 지은이 바로 뒤에 있거든.”뒤를 돌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표정을 한 윤지은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나는 깜짝 놀랐다.“지, 지은 씨가 여긴 어떻게 왔어요?”나는 마음이 찔려 도저히 윤지은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내가 불렀어. 지은아, 이 인간이 글쎄 마음속에 넌 눈곱만치도 없대. 개도 이렇게 매정하지는 않겠다.”윤지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마루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정수호는 원래 개야. 개한테 뭘 바라?”‘그래. 뭐.’오히려 윤지은한테 시원하게 욕먹고 나니 내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윤지은은 항상 나한테 싸움을 걸어오기에 오히려 싸우지 않는 게 더 무섭다.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마음대로 말해요. 아무튼 두 사람한테 난 좋은 사람 아니잖아요. 오히려 지은 씨나 친구분 좀 말려 봐요. 야한 잡지 촬영하겠다고 하니까.”“야한 잡지라니? 그거 인체 보디아트든.”하정현은 강조했다.윤지은은 예쁜 눈매를 찌푸리더니 싸늘하게 하정현을 바라봤다.“보디아트라니? 제대로 말해.”“에이, 그냥 좀 노출 심한 사진 몇 장 찍는 거야. 하지만 가릴 곳은 가려. 얼굴도 안 나올 거고...”윤지은은 하정현의 말을 믿지 않았다.“네가 그렇게 돈이 없으면 나한테 말해. R국에 보내줄 테니까.”“R국은 왜?”“R국이 성진국인 데다 야동 사업이 발전됐잖아. 거기 가서 여주인공 맡으면 돈 빨리 벌 거야.
하정현은 나를 힘껏 걷어찼다.“어딜 보는 거야? 내 말은 공항이요 에어포트!”하정현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그 순간 나는 내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깨달아 너무 난감했다.“하. 대화 주제가 뭐 그렇게 빨리 변해요? 반응할 새도 없이.”“그런데 무슨 뜻이에요? 공항을 체험해 보다니요?”나는 여전히 하정현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그러자 하정현이 으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B시에서 가슴 수술은 하지 못했지만 큰 수확을 얻었거든. 우리 동기를 만났는데 지금 광고 디자인 일을 맡고 있대. 그런데 나 같은 몸매가 요즘 보기 드물다고 공항 모델로 광고 한편 찍지 않을 거냐고 제안하더라고.”“난 이미 계약이 끝났는데 남자 모델 자리가 아직 비어 있어서 수호 씨가 해보지 않을 건가 해서. 보수도 짭짤해. 촬영 한 번에 100만 원 정도 벌 수 있어. 어때?”하정현은 나에게 손가락을 내밀며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앞에 그렇게 많이 했던 말들이 이걸 위한 빌드업이었어요? 저 지금은 시간 안 돼요. 요즘 일이 많거든요.”예전이었다면 나는 아마 고민도 없이 승낙했을 텐데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스케줄 조정이 어렵다.하정현은 일순 낯빛이 어두워졌다.“내가 이미 약속했단 말이야. 안 돼. 꼭 와야 해.”“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게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미리 말했어야지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내가 미리 말하면 동의 안 했을 거잖아. 이게 별로 자랑할 만한 건 아니지만 절대 불법은 아니야. 돈도 빨리 벌고. 게다가 한번 얼굴 알리면 돈 버는 건 한순간이야.”나는 그 말에 하마터면 입안에 머금었던 물을 뿜을 뻔했다. ‘그러니까 그 촬영이라는 게 살짝 야릇한 건가?’나는 얼른 거절했다.“정신 좀 차려요. 그런 사진이 나돌면 앞으로 어떻게 고개 들고 다니려고요? 게다가 하정현 씨 집 돈 많잖아요.”“그건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와야 해. 안 그러면 전에 물어본 건 대답 안 해줄 거야.”하정현은 팔짱을 끼고 거절은 사절한
“고마워요. 석훈 형님.”한 달이라는 시간은 나한테 충분했다.내가 도장에서 나오자마자 하정현의 전화가 걸려 왔다.[나 강북에 도착했으니 마중 나와.”나는 이 일을 잊고 있었다.나는 하정현에게 문자를 보낸 뒤 곧바로 차를 몰고 공항으로 향했다.그런데 이곳에서 한지영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사실 나는 한지영의 사촌 동생이 하정현이라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다.어제 식사할 때 한지영의 사촌 동생이 B시에 가슴 수술받으러 갔다고 했을 때부터 그 사람이 하정현일 거라고 대충 짐작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 줄이야.한지영은 여전히 말이 많아 나를 만나기 바쁘게 물었다.“여긴 웬일이에요? 나 스토킹한 거예요? 설마 나 좋아하는 건 아니죠?”나는 눈을 홉뜨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전 사람 마중하러 왔어요.”“누구요?”“하정현 씨요.”“내 사촌 동생을요? 내 동생이랑 알아요?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한지영의 질문은 끝날 줄 몰랐다.심지어 또 100퍼센트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 항목이 있다면서 나를 꼬드겼다. 다행히 얼마 뒤 하정현이 나타난 덕에 나는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나는 다급히 하정현 옆으로 다가갔다.“혹시 사촌 언니도 불렀어요?”“아니? 언니는 내가 오늘 돌아온다는 거 알고 자발적으로 마중 나온 거야. 우리 언니가 정신이 좀 산만하니까 조심해. 무엇보다 절대 속지 마.”하정현마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앞으로 거리를 둬야겠네.’우리가 뭐라고 중얼거렸는지 모르는 한지영은 하정현의 팔짱을 끼며 싱글벙글 웃었다.“정현아, 왜 이제야 왔어? 보고 싶었잖아. 언니가 한턱 쏠게. 어때?”한지영이 사겠다고 한 가게는 바로 어제 봉섭 할아버지와 함께 갔던 가게였다.그 가게 음식은 매우 비싼 데다 어제 보니 계산도 신용카드로 하는 것 같던데, 한지영은 대체 뭘 믿고 또 가겠다고 하는지 의문이었다.나는 얼른 하정현의 팔을 잡아당기며 절대 가지 말라고 눈치를 줬다.하지만 하정현은 내 사인을 이해하지 못
사모님은 늘 온화하고 착하기에 화내는 눈빛과 말투로 말하는 건 극히 드물다. 지난번에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무례를 저질러 나를 그렇게 대했다면 이번에는 내가 용천 호텔에서 있은 일을 언급하는 바람에 또 그럴 위기에 처했다.나는 순간 또 사모님의 한계를 건드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모님이 이토록 화를 낼 리 없다.나는 너무 무서워서 말까지 더듬었다.이건 무서워서가 아니라 죄책감 때문이었다. 내가 사장님께 미안한 짓을 했다는 죄책감.“아, 아니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나는 거짓말했다.사모님도 숨기고 싶어 한다면 끝까지 숨길 작정이었다. 그렇다면 모두에게 좋을 테니까.나는 허둥지둥 화장실을 나왔다. 하지만 멘탈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난 솔직히 사모님의 분위기를 매우 좋아한다. 그렇다고 사모님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이제 어떡하지? 이제 사장님 얼굴 어떻게 보지?’나는 기분이 매우 다운되었다. 더군다나 앞으로 사장님과 사모님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라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나는 한참 동안이나 생각을 정리한 뒤에야 마음이 가라앉았다.현재 유일한 방법은 그 일을 떠올리지 않는 거다.나는 곧장 변석훈을 찾으러 떠났다.변헉훈은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전투 기술과 도망치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뿐이야. 게다가 내가 너한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졌으니 내 속도를 따라오는지 못 따라오는지는 너한테 달렸어.”나는 변석훈이 진심으로 나를 가르치고 싶어 가르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단지 윤해철이 맡겨준 임무를 완수하려고 할 뿐이었다.다만 나도 감히 뭘 더 바랄 수는 없었다.“그래요, 알았어요.”말을 마친 뒤 나는 핸드폰 녹화 기능을 켜고 거치대 위에 핸드폰을 세워놓았다.그동안 격투기 같은 전투 기술을 배운 적 없기에 배우기 힘든지조차 가늠이 가지 않았다.때문에 우선 영상으로 녹화한 뒤 돌아가서 반복적으로 보면서 연구하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변석훈은 아무 말도
만약 양동준이 갑자기 나한테 웃어준다면 난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다고 느꼈을 거다.“실력이 되면 그때 얘기해요.”“동준 형님, 그럼 볼일 봐요. 전 더 방해하지 않을게요.”나는 양동준 앞에서 배알이 조금도 없다. 그런 나 자신이 너무 나약하게 느껴졌다.양동준과 헤어진 뒤 나는 변석훈에게 전화해 얼른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그래. 배우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와.”변석훈은 나한테 주소를 보냈다.나는 그 주소를 적어 둔 후 이따가 찾으러 가기로 결심했다.사모님과 사장님은 한참 동안 산책했다. 그러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자 나는 얼른 사장님을 안으로 밀고 갔다.사장님은 너무 더워 땀을 흘렸는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슬립으로 갈아입었다.사모님이 걸어 다닐 때마다 사모님 다리에 있는 날개를 활짝 편 나비가 자꾸만 내 눈에 들어왔다.나비가 움직이는 모습은 그날 내 눈앞에서 하늘거리던 나비와 똑같았다. 거기에 사장님이 전에 사모님이 용천 호텔에 다녀온 후로 사람이 변한 것 같다던 말을 연상하니 나는 그날 밤 나랑 산 사람이 사모님이 아닐까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결국 나는 사모님께 살짝 떠보기로 했다. 나는 일부러 화장실에 가 사모님 가까이로 다가갔다.“사모님,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사모님은 내가 화장실로 들어와 저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쳤다.“뭔데요?”“사모님이 용천 호텔에 다녀오신 뒤로 이상해졌다고 사장님이 그러셨는데, 혹시 그날 제 그런 모습을 봐서 그래요?”나는 너무 직설적으로 물어보면 사모님이 또 나를 무시할까 봐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은 그 말에 얼굴이 화르르 타올랐다.“그, 그런 말 하지 마요. 내가 수호 씨 거기를 본 걸 우리 그이가 알면 얼마나 난감해요.”사모님은 고개를 숙인 채 내 눈을 피했다. 하지만 사모님의 백옥처럼 투명하고 흰 피부는 한번 보니 도저히 시선을 옮길 수 없었다.나는 그날 밤 그 나비를 본 것 외에 상대의 피부가 사모님처럼 하얀지 기억을 더듬었다.하지만 그날 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나는 급히 구석진 곳에 몸을 숨겨 변석훈의 명함을 꺼냈다.며칠 동안 요양한 덕분에 내 상처는 거의 다 나았다. 때문에 이제 변석훈을 찾을 때도 됐다.하지만 나는 양동준과 했던 열흘간의 약속에 대해서도 잊지 않았다.내가 양동준의 요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지켜야 할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우선 양동준에게 먼저 전화해 현재 상황을 말할 생각이었다.“동준 형님, 지금 어디예요?”“백조의 후수.”그 대답에 나는 일순 멍해졌다.백조의 호수라면 사장님과 사모님이 살고 계신 동네다.나는 다급히 물었다.“형님도 백조의 호수에서 사세요?”“아니요.”“그럼 이곳에서 뭐 하세요?”“임천호 쪽 사람을 감시 중이에요.”그 말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방금 임천호 쪽 사람이 나를 미행하는 걸 발견한 것도 놀라운데 그 뒤에 양동준까지 있다니 너무 충격이었다.이건 말하지 않아도 윤지은의 명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윤지은이 일부러 동준 형님을 보내 나를 지켜주려는 건가?’“동준 형님, 정확한 위치가 어디예요? 제가 찾으러 갈게요.”나는 양동준을 찾아가 정확히 묻고 싶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찾으러 갈 테니까.”얼마 뒤, 양동준의 그림자가 나 시선에 들어왔다.양동준을 본 순간 나는 순식간에 안심이 되었다.“동준 형님, 혹시 윤지은 씨가 형님을 여기에 보냈어요?”나는 양동준을 보자마자 다급히 물었다.양동준은 워낙 냉담한 성격이라 말하는 것도 조급하지 않았다.“네.”정말 윤지은이라니.“지은 씨가 정말 동준 형님을 보내 저를 지켜주라고 할 줄은 몰랐네요.”“김칫국 그만 마셔요. 아가씨는 나더러 수호 씨를 지키라고 한 게 아니라 임천호가 뭘 하려는 건지 지켜보라고 한 거예요.”비록 그렇다지만 난 이것조차 나에 대한 보호라는 걸 알고 있었다.때문에 속으로 윤지은에게 고마웠다.“동준 형님, 열흘이 흘렀는데 형님이 말한 수준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