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갑자기 이런 걸 묻지? 설마 뭔가를 발견했나?’나는 마음이 불안했다. 게다가 지금 애교 누나와의 관계도 알 수 없고, 미래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거짓말을 했다.“아직 없어요. 우선 사업부터 자리 잡고 나서 연애하려고요.”윤해철은 나에게 마음에 드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음, 그런 마인드 좋지. 사내라면 이 나이에 사업부터 이룩해야지. 능력이 있어야 애인한테 좋은 삶도 줄 수 있고.”“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분투 정신이 결여되었더라고. 대학 졸업하기 바쁘게 결혼부터 하고 말이야. 결혼의 의미가 뭐인지도 모르면서. 역시 우리 때 사람들이 참 뭐든 열심히 했는데. 하.”윤해철의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위험할 뻔했네. 앞으로 게시물도 설정해야겠어. 새 친구 추가할 때마다 내 게시물 함부로 볼 수 없게.’‘잘난 척 과시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겠어. 들키는 게 한순간이니까.’나는 속으로 다짐했다.그 뒤로 윤해철과 한참 얘기를 나누다 보니, 윤해철은 아예 나에게 자기 회사에서 일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제안했다.나는 그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니에요. 일개 한의사가 윤 회장님 회사에 가서 뭐 하겠어요?”“무슨 그런 말을 하나? 당연히 맞는 전공이 있으니까 오라는 거지. 우리 회사 내부에도 한약방이 있네. 회사 직원들한테 한약재가 들어간 음식과 차를 제공하고, 병도 봐주는 곳이거든.”그 말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한의사를 그렇게 좋게 보세요?”이건 내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윤해철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내가 건강 관리에 관심이 좀 많아서, 우리 회사 직원들도 건강하게 일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이건 너무 좋잖아.’‘한의학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보급하면, 지금처럼 인기가 없어질 일은 없었을 텐데.’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윤해철처럼 좋은 상사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봐도 찾기 어렵다.아마 회사 직원들도 행복할 거다.요즘처럼 직장인들 불만이 하늘을 찌르는 시대에, 정호섭과 윤해철
[윤 회장님, 사실 그런 게 아니라...]윤해철은 강력한 태도로 상대의 말을 잘랐다.“맞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네. 짐 챙겨서 나가게. 재무팀에서 월급을 정산해 줄 거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게. 안 그러면 진짜 화낼 테니까. 내 성격 알지 않나?”윤해철은 말을 마친 뒤 전화를 끊었다.나는 그제야 윤해철 회사에 한약방이 있는데도 왜 병이 있는지 알았다.누군가 뒤에서 손을 쓴 모양이었다.게다가 그렇게 다정하고 친절하게 얘기하던 사람이, 방금 전화한 사람과 대화할 때는 바로 회사 오너의 모습으로 변해 존경스러웠다.평소에는 온화하고 너그럽지만 매사에 강단 있는 사람,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이제야 알게 된 건데,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사귀는 것도 경험치를 높일 수 있다.경험을 쌓지 못하더라도 성공한 사람의 그림자를 통해 자기 생각과 관념을 바꿀 수 있다.“수호 군, 나 이만 가봐야겠어. 나중에 얘기하자고.”윤해철은 운동기구에서 내려오더니 다정하게 인사했다.나는 얼른 인사했다.“네, 앞으로 매일 나올 테니까 형님한테서 많이 배웠으면 좋겠네요.”“하하, 배우긴. 나는 우리가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하네.”윤해철과 작별하고 나니 감개무량했다.이토록 많은 수확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나는 얼른 이영미한테 문자를 보내 사실대로 말했다.[남편분 문제는 심각한 정도가 아니에요. 신장에 문제가 조금 있는데, 이 나이대 남자는 다 있는 정도라서 약 처방해드렸으니 괜찮아질 거예요.]이영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예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통화를 수락하니 잔뜩 흥분한 이영미의 모습이 보였다.[정말 큰 문제 아닌 거 맞지? 그런데 왜 나한테 손을 안 대지?]‘어... 이건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런 일을 즐기는 분이 아닌 가 보죠. 남편분 성공한 분 같던데, 성공한 남자는 할 일이 많잖아요.”[그런데 대부분 자리를 잡아 신경 쓸 게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바쁘지?]“아마도 건강을 중시하느라 그런 것 같
“맞아요. 남자든 여자든 욕구가 생기는 건 당연해요. 아버님과 상의해서 한 달에 한 번 하거나 하시는 게 어때요? 그러면 아버님 부담도 덜 수 있고, 어머님 성욕도 풀 수 있잖아요.”이영미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러면 내가 사과해야 하잖아? 이런 일을 어떻게 말하지? 아니면 수호 씨가 나 한 번만 더 도와주는 건 어때?”‘이 상황에 어떻게 도와달란 말이지?’그렇다고 아내 욕구가 쌓였으니 만족시켜 주라고 대놓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그때 이영미가 말했다.“이번 일까지 도와주면, 양동준을 스승으로 모시는 일은 내가 100프로 성공하게 도와주지.”‘이건 나를 협박하는 건가?’나는 결국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알았어요. 해볼게요.”이영미와의 통화가 끝난 뒤, 나는 혼자 이곳저곳을 거닐었다.6월의 강북은 벌써부터 건조하고 무더웠다. 아침저녁에만 조금 선선할 뿐.공원 안 수로를 따라 한 바퀴 빙 도는 것도 꽤 힐링 됐다.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난 뒤, 나는 근처에서 음식점을 찾아 저녁을 먹었다.한창 먹고 있을 때, 형수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수호 씨, 어디예요? 내가 수연을 데리고 찾아갈게요.”그 말에 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 동생분은 왜 데려와요?”[수연한테서 얘기 다 들었어요. 이번 일은 수연이 잘못이니까 사과하게 해야죠.]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필요 없어요.”[안 돼요. 무조건 사과해야 해요. 수호 씨가 도와줬는데, 수연이 수호 씨를 그렇게 대한 건 너무했잖아요.]형수가 너무 집요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있는 위치를 알려 주었다.약 20분 뒤, 형수는 동생을 데리고 나타났다.형수는 나를 보자마자 동생더러 사과하라고 강요했다. 딱 봐도 고수연은 사과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 말이다.하지만 형수의 등쌀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사과했다.“미안해요.”퍽!형수는 고수연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뭔 불만이 그렇게 많아? 그게 사과야? 누가 보면 원귀인 줄 알겠어.
나는 결국 마음 약해져서 형수한테 타협했다.“지금 사는 곳 꽤 괜찮아요. 방 2개에 거실 1개 있고, 환경도 좋아요.”“말만 하지 말고 구경시켜 줘요.”형수는 또 한 번 재촉했다.결국 나는 마지못해 두 사람을 내가 사는 월세방으로 안내했다.형수는 집안을 한 바퀴 빙 돌아보더니 기뻐하며 말했다.“집 괜찮네요. 깔끔해 보이고, 환경도 좋고. 사는 곳 봤으니 마음 놓이네요. 안 그러면 계속 걱정했을 거예요.”형수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나는 형수가 내 몸을 노린다고 생각했다.‘차라리 죽자 죽어.’‘형수가 이렇게 잘해주는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나는 형수와 고수연에게 자리를 내어주고는 물을 따라주었다.고수연은 끝까지 말하지 않아 나도 그녀를 상관하지 않았다.어쨌든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하게 지낼 것도 아니기에 말하든 말든 상관없었다.형수는 나를 잡고 이것저것 물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물어본 건 애교 누나와 나 사이에 대한 일이었다.애교 누나를 언급하니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애교 누나는 본가로 돌아갔죠?”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날 아버지한테 끌려 돌아갔어요. 아마 한동안은 만나지 못할 거예요.”나는 순간 마음이 착잡했다.“애교 누나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요.”“걱정하지 마요. 그래도 아버지인데, 잡아먹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지금 수호 씨가 할 일은 얼른 강해져서 애교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 거예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수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안 그래도 그동안 그럴 생각이었다.형수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믿어요.”나와 형수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고수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질 난 고양이처럼 으르렁 대더니 소리쳤다.“진용진, 죽고 싶어? 계속 그렇게 나오면 너 죽고 나 죽는 수가 있어!”고수연의 말에 형수는 얼른 걱정이 돼 다가갔다.“왜 그래? 그 인간이 또 뭐래?”고수연은 엉엉 울기 시작
고수연은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서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와 현재 위치를 묻고 조사에 협조해줄 것을 요구했다.고수연은 울면서 형수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형수가 이따 함께 가서 편 들어주겠다고 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수호 씨, 이따 같이 가 줘요. 수호 씨가 남자라서 그래도 안심이 되거든요.”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여자 둘이 가는 건, 나도 마음 놓이지 않았다.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르엘 빌라로 향했다.진용진과 두 명의 경찰은 이미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가 들어오는 걸 보자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경관님, 저 여자예요. 저 여자! 저 여자가 저를 X 폭행했어요.”두 경찰은 모두 젊어 보였는데, 두 사람 모두 난처한 표정이었다.하지만 여전히 규칙대로 일을 처리했다.“말해 봐요. 무슨 일이 있었죠?”진용진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먼저 고자질했다.“제가 이혼하자고 했더니 저 여자가 안 된다고 하면서 저를 X 폭행했어요.”고수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X 폭행은 무슨. 아까 할 때 넌 안 좋았냐? 좋아서 소리 지른 게 누군데!”두 경찰의 표정은 더욱 난처해졌다.그때 진용진이 뻔뻔하게 말했다.“그래도 처음에는 강제로 한 거잖아. 이건 내 동의 없이 벌어진 일이라,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됐다고!”“상처는 무슨! 그래, 내가 제대로 상처내 줄게...”고수연은 쌩하고 달려가 진용진을 때리려고 했다.그러자 진용진은 얼른 두 경찰 뒤에 숨었고, 경찰은 고수연 앞에 막아섰다.“주의해 주세요. 계속 이러면 서로 가셔야 합니다.”고수연은 또 엉엉 울기 시작했다.“저 인간이 바람피우고 저를 빈털터리로 쫓아내려고 했어요. 저런 놈을 잡아야지, 왜 저를 잡아요?”그때 경찰 한 명이 입을 열었다.“이건 민사 건이라 저희 경찰 소관이 아니에요. 정말 함께 살 수 없으면 이혼하면 되지,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고수연은 여전히 엉엉 울었다.“누구
진용진은 그냥 바보 같았다. 특히 그런 말을 지껄이는 걸 보니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설마 자기가 멋있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나?’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경찰에게 다가갔다.“경찰관님, 이 사람 지금 거짓말하는 거예요.”“네? 왜 그렇게 말씀하시죠?”“사건 현장에 저도 있었거든요. 제가 볼 때 고수연 씨는 강요한 게 아니었어요. 두 사람은 서로 좋아서 관계를 맺었거든요.”진용진은 벌떡 일어나더니 노기등등해서 나를 쳐다봤다.“헛소리하지 마! 저 여자가 날 소파 위로 밀쳤다고.”나는 콧방귀를 뀌었다.“부부가 관계를 할 때 원래 침대 아니면 소파 위에서 하지 않나? 설마 서서 하게?”내 질문에 젊은 경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진용진은 바로 발끈해서 반박했다.“그런데 난 밀쳐져서...”나도 얼른 맞받아쳤다.“남자가 힘으로 여자 하나 못 밀쳐내는 게 말이 되나? 아예 밀쳐내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밀당하느라. 잇속 챙길 거 다 챙기고 상대를 X폭행으로 고소하다니,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니야?”진용진의 얼굴은 단번에 어두워졌다.“아니야. 아니라고...”“경찰관님,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저 사람이 그때 아주 즐거운 표정을 지었거든요. 그리고 소파에 밀쳐진 것 외에 나머지는 저 자식이 더 적극적이었어요.”젊은 경찰관은 붉은 얼굴로 나를 봤다.“무슨 뜻이죠? 혹시 현장에 계속 있었나요?”나는 고개를 저었다.“계속 현장에 있었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두 사람이 정식으로 관계하기 전에는 계속 있었어요. 진용진 씨는 싫은 척하면서 즐길 거 다 즐겼어요. 부부가 싸우면 그러는 건 정상이잖아요.”“다른 가정들도 부부가 싸워서 화해하고 싶으면 부부관계로 화해하고 그러잖아요. 싸웠다고 여자가 X폭행했다고 단죄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잖아요.”“네, 알겠습니다.”진용진은 더 변명하려고 했지만 젊은 경찰관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됐어요. 진용진 씨는 그만 말하세요. 상황은 이미 알겠어요. 입건될지 말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자료를
“당신 미쳤어? 내가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게 어때서?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처녀를 따져?”고수연은 기가 막히다는 듯 눈 앞의 남자를 바라봤다.두 사람은 결혼한 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런데 고수연은 자기가 결혼한 남자가 이렇게 속내를 꽁꽁 숨기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흥, 내가 점잖아 보이면 내 감정 따위 무시해도 돼? 다른 놈한테 굴려질 대로 굴려지고 딴 놈이 실증 내니까 나처럼 점잖은 사람 찾아 결혼하려고 했어? 그런 걸 보면 당신도 좋은 사람은 아니네.”고수연은 노기등등해서 성큼성큼 걸어가 진용진의 뺨을 후려 갈겼다.순간 진용진은 너무 놀라 얼빠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 손찌검을 날리려고 손을 번쩍 쳐들었다.그때 나와 형수가 고수연 앞에 막아섰다.진용진은 인수에서 딸리니 결국 막 나가지 못했다.그때 고수연이 울며 말했다.“잘 들어. 나 당신이랑 결혼하기 전에 남지 친구 사귄 거 맞아. 그런데 뭐? 그건 정상적인 연애고, 정상적으로 욕구를 해결한 거야. 난 잘못 없어!”“여자 친구도 못 사귄 당신이 능력 없는 거겠지. 무슨 자격으로 나를 탓해? 내가 처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병 걸린 것도 아니잖아. 다른 남자 애를 밴 채로 당신과 결혼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나를 뭐라 해?”“당신이 다른 남자랑 잤으니까! 그럼 이미 더러워졌다는 거잖아!”진용진은 악에 바쳐 반박했다.“내가 점잖고 정직하지 않았다면, 우리 집 가정 형편이 안 좋지 않았으면 당신 같은 걸레랑은 결혼 안 했어!”그 말에 고수연은 결국 이성을 잃었다. 그녀는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어 진용진의 얼굴을 마구잡이로 잡아뜯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용진을 할퀴어 죽이고 싶었을 거다.진용진은 얼굴에 얼룩덜룩한 손톱자국과 핏자국이 난 채 고통에 꽥꽥 소리질렀다. 그는 고수연을 덮치려고 했지만, 형수가 뺨을 한 대 갈기는 바람에 다시 소파 위에 철푸덕 넘어졌다.“진용진, 내 동생 손끝 하나라도 건드려 봐!”나도 따라서 앞으로 나갔다.“나도 있다는 거 잊지 마.
형수와 고수연은 안방에서 자고 나는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만약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제일 먼저 반응할 수 있게.소파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을 회상하니 감개무량했다.나는 오늘만 해도 이 집을 세번이나 드나들었다가 결국 잠까지 자게 됐다.운명은 참 신기하다.방에서 여전히 흐느끼는 소리가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아마 고수연과 형수는 오늘 밤 잠을 설칠 것 같았다.그에 반해 나는 소파에 한참 누워 있었더니 점점 졸음이 밀려와 결국 잠이 들어 버렸다.한밤중에 잠에서 깬 나는 흐리멍덩한 눈을 한 채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처음에는 내가 남의 집에 있다는 걸 잊는 바람에 낯선 환경에 어리둥절했다.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챘다.나는 머리를 세게 내리치고 화장실로 걸어갔다.배가 좀 아파 변기에 앉아 볼 일을 볼 때였다. 들어올 때 핸드폰을 가져오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너무 어색해 주위를 돌아보는데, 선반에 여자 것으로 보이는 속옷과 팬티가 가득 쌓여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그 중에서 팬티 하나가 툭 떨어졌다. 순간 나는 너무 난감했다.‘하필 내 발밑에 떨어질 건 또 뭐람? 이걸 주워 말어?”안 줍자니 더러워질 것 같았다.결국 고민 끝에 나는 허리를 숙여 팬티를 집어 들었다.그런데 그때, 화장실 문이 밖에서 열리더니 다음 순간 나는 고수연의 퉁퉁 부은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서로 맞닿은 시선과 내 손에 들린 팬티. 오해 사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몇 초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정신을 차렸다.나는 얼른 해명했다.“팬티가 떨어져서 주운 것뿐이에요.”고수연은 어색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수호 씨가 집에 있다는 걸 잊었어요. 평소에 혼자 집에 있다 보니 바로 들어왔네요. 미안해요.”“아, 그럼 우선 나가줄래요. 바로 끝나요.”우리는 갑자기 서로 예의를 차렸다. 마치 손님을 상대하는 듯이.그 때문에 나는 오히려 더 어색해졌다.“내 팬티 제 자리에 놔주면 고맙겠네요.”고수연은 말을 마친 뒤 바로 나갔다.내 손에 들려
‘장난하나? 주머니에 들어간 돈을 다시 토해내라니. 절대 안 돼.’나는 돈도 없는 주머니를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그건 안 돼요.”“그럼 얌전히 여기 있다가 내가 없을 때 유미 대신 좀 돌봐 줘.”난 여전히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윤 사장님, 제가 싫은 게 아니라, 유미 사모님 평판이 나빠질 거예요.”“수호 씨가 유미를 노리지 않는 이상 평판이 나빠질 일은 없잖아. 오래전부터 유미를 노리고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나는 얼른 도리질했다.“그런 적 없어요. 전 사모님을 항상 존경해 왔어요.”“그럼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남아.”윤미화의 태도가 너무 강경한 바람에 나는 마지못해 동의했다.두 사람은 나에게 객실을 내주었다.유미 사모님의 집은 윤미화 집 못지않게 널찍하고 사치스러웠다. 방 4개에 거실 2개인 데다 인테리어가 화려했다.객실 침대에 누워 보니 평범한 침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보아하니 가격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하지만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잠이 오지 않았다.천수당, 이태웅, 왕정민이 하나하나 내 뇌리를 스치다가 결국에는 동성 형까지 떠올랐다.동성 형을 떠올리니 내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용천 호텔에서 돌아온 뒤로 동성 형과는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형수는 동성 형이 이제는 대놓고 밖으로 나돌고 있다고 했었다.형수도 지금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할 거다.나는 얼른 문자로 형수 동생은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수한테서 답장이 왔다.[아직도 싸우고 있어요. 이제는 아예 각자 변호사를 고용해서 소송을 진행 중이에요.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난 집에 돌아왔고요.][그럼 형은요? 형은 요즘도 집에 안 들어와요?][들어왔어요. 하지만 계속 각방 써요.]그 말에 나는 너무 놀라 되물었다.[왜요?][왜긴요, 요즘 일이 바쁘다면서 밤 늦게 들어오는데, 나를 방해하기 싫다면서 따로 자요.]그건 다 핑계일뿐이다. 사실 형수는 누구 보다도 그걸 잘 알고 있지만 티를 내지
“사모님, 제가 모셔다드릴게요.”사모님은 정말 초췌했다. 그렇게 밝던 얼굴에 지금은 피곤함만 묻어 있었다.우리의 고집을 꺽지 못한 사모님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조수석에 앉은 뒤 유미 사모님은 기분이 다운되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너무 안타까웠다.가는 내내 사모님은 방향을 가리키는 외에 그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차 안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다행히 30분 뒤 목적지에 도착했다.유미 사모님이 사는 곳은 고급 주택단지였는데, 주위 시설과 환경이 매우 좋았다.사모님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바로 떠나려 했지만 소파에 앉아 멍 때리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게다가 이곳은 사장님과 사모님이 깨 볶으며 지내던 집이라 모든 물건에 추억이 깃들어 있다. 그걸 보면 아마 건강하던 사장님이 더 그리워질 거다.나는 결국 다시 돌아왔다.“사모님, 그러지 마세요. 사장님 아직 살릴 방법이 있을 거예요. 사모님이 먼저 무너지면 사장님은 어떡해요?”사모님은 끝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나도 알아요. 하지만 주체가 안 돼요.”‘하...’그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 닥치면 똑같을 거다.나는 결국 사모님을 혼자 집에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 윤미화한테 전화했다.“윤 사장님, 혹시 유미 사모님 집에 와서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당연하지. 바로 갈게.]윤미화가 사는 곳은 이곳과 그리 멀지 않았기에 10분 내로 도착했다.“유미야. 내가 뭘 가져왔는지 봐 봐.”윤미화는 마술하는 듯 갑자기 예쁜 옷 한 벌을 꺼냈다.“그동안 남편 돌보느라 고생해서 옷 한 벌 사 봤어. 내일 병문안 갈 때 이 옷 입고 가. 그러면 네 남편도 분명 좋아할 거야. 병이 나을지도 모르지.”상대가 저를 위로한다는 걸 안 사모님은 자기의 우울한 기분 때문에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애써 미소를 짜냈다.“고마워.”“에이. 뭘 이런 걸 가지고.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에 뭘 그렇게 내외해? 요즘 남편이 곁에 있지 못할 테니 내가 자주 보러
겨우 며칠 못 본 사이에 사장님은 전보다 더 핼쑥해졌다. 그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그 누구도 우울한 티를 내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환자를 격려해야 한다. 주변에서 우울함을 드러내면 환자에게 안 좋다.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꼭 나을 수 있다며 사장님을 격려했다.다행히 정 사장님도 매우 낙관적이었다.“그동안 다들 수고 많았어. 내가 다 나으면 한텍 제대로 쏠게.”다들 그날을 기대했다.사람이 많다 보니 시끄러워져 오히려 정 사장님 휴식에 방해되었다. 때문에 우리는 병실에 잠깐만 있다가 떠날 준비를 했다.유미 사모님은 직접 문 앞까지 위를 배웅했다.그때 내가 넌지시 물었다.“B시 병원 쪽에는 연락했어요? 언제 가요?”사모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아직 남은 병실이 없대요. 부모님이 직접 병원에 찾아갔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어요.”이건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사모님의 초췌한 모습에 약간 마음이 아팠다.“사모님, 오늘 저녁은 제가 지킬 테니 사모님은 돌아가서 쉬세요.”“아니에요. 가게 돌보는 것도 바쁜데 이런 것까지 부탁할 순 없어요.”“사장님은 제 능력을 알아봐 준 분이에요. 정 사장님이 아니라면 지금의 저도 없었어요. 가게가 어려우면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오히려 사모님이 매일 여기서 지키고 있느라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했죠?”“소여정과 윤지은이 있어 괜찮아요.”사모님은 말하다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사장님의 병세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마음이 괴로운 모양이었다.이때 사장님이 쾌차해서 일어나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 사장님이 나아야 사모님도 미소를 되찾을 텐데 말이다.그때 익숙한 그림자 두 구가 가까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소여정과 윤지은이었다.윤지은은 퇴근했는지 의사 가운을 입지 않고 있었다. 다만 두 사람 역시 사모님 못지않게 초췌해 보였다.절친한 친구의 남편이 갑자기 병을 앓으니 두 사람 역시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다.백연우도 가끔 병문안 하곤 하는
나한테 다른 선택지가 있기는 한 걸까?이태웅한테 1년 안에 성과를 내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애교 누나 곁을 떠나겠다고 했는데.나는 애교 누나와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쉽기도 하고 이대로 등신처럼 사는 게 싫었다.나도 자존심이 있고,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 나도 체면 있게 살고 싶다.“당연히 하고 싶지.”나는 한참 숨을 참고 있다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러자 민우는 이내 흥분했다.“그럼 우리도 해보자고. 하지만 내 말에 화내지 마.”“뭔데? 말해.”“나 사실 의욕만 넘쳤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몰라.”1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피가 끓은 것처럼 호기롭게 말하는 민우의 모습에 나는 그가 이미 방법을 생각해 두고 리드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저 생각만 있을 뿐 상세한 계획이 없다니.시실 나도 혼자 일해볼 생각을 했었다. 천수당이 화인당을 모함할 때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다. 다만, 내가 워낙 현실에 타협하는 성격이라 그걸 실천에 옮기지 않았을 뿐이다.그런데 민우가 이 일을 먼저 꺼내니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우리 천수당을 빼앗아 오자.”민우는 나에게 방법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얼른 캐물었다.“어떻게 할 생각인데?”나는 상세하게 분석했다.“천수당이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어. 장사도 항상 안 되고. 지금은 오히려 적자가 나는 상황이야. 천수당은 지리적으로도 위치가 좋은 데다 단골이 있으니 빼앗아 올 수만 있다면 수고를 덜게 될 거야.”민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계속 물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해? 천수당은 김진호랑 관련 있잖아. 김진호가 극구 반대할걸. 게다가 지금은 김진호 형과 척을 졌으니 그쪽에서 절대 천수당을 순순히 내놓지 않을 거야.”이건 확실히 문제가 된다.하지만 천수당은 장사가 안돼 적자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언젠가는 가게를 내놓아야 할 판국이다.“우리 전 재산을 모아봤자 고작 2천만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게 문제야.”“천수당을 생각할 시간에 우선 돈부터 모으자.”민우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기 마련이다.누나들도 나한테 흥미를 잃을 거고 점점 잊을 거다.때문에 지금 이 상황을 즐기기만 할 수는 없다. 나는 반드시 강해져야 한다.예전에는 사실 한의관 직원으로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한 달에 200 정도씩 받는 것도 꽤 만족스러웠다.하지만 일련의 일을 겪고 나니 이 상황에 만족하면 발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물론 어떻게 강해질지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한참 뒤 민우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아까 그 사람 강북시 부시장이라던데, 네 여자 친구 아버지야?”“응.”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그러자 민우가 내 옆에 아예 자리 잡고 앉았다.“이런 장인어른이 있는 거 압력 심하지? 임설아도 가정 형편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부시장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 난 임설아 가족 형편도 부담되는데. 지금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매달 그래도 만족스럽게 벌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해. 우리가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게 부자들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수호야. 넌 혹시 스타트업 시작해 볼 생각 없어? 우리 같이 한 건 제대로 해볼래?”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민우를 바라봤다. 민우가 이토록 야심가인 줄은 생가지도 못했다.전에는 분명 화인당에서 일하게 된 것만으로도 기뻐 날뛰었는데 말이다.내가 궁금한 걸 물어보자 민우는 담배 한 대를 태우더니 웃으며 말했다.“사람은 원래 이래. 어쩔 수 없어.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했을 때는 좋은 직장이 있다고 만족했는데, 이제 좋은 직장에서 일하니 남 밑에서 일하기보다 내가 사장이 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원래 좀 욕심이 많아. 그게 내 약점이기도 해. 그래서 한의원에서 오래 못 버텼잖아.”나는 민우의 말을 대충 이해했다. 그는 예전에 자기 야심을 펼치지 못한다고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야심이 너무 커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했었다.그러다가 화인당에서 일하기 시작해서는 직원들과 잘 지냈지만 이 정도로 욕심이 차지 않는 눈치였다.민우는 자존심이
이태웅은 사레가 심하게 들려 나를 말리지도 않았다. 다행히 내가 한참 동안 등을 토닥여줬더니 상태가 점차 호전되었다.이태웅은 나를 차가운 눈으로 쏘아봤다.“됐네. 날 위하는 척 그만하게. 내가 그렇게 대했는데 이렇게 참을성을 보인다고? 누굴 속이나?”나는 담담하게 웃었다.“속인다고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저가 뭘 하든 아버님 눈에는 제가 거짓말하는 거로 보일 거잖아요.”“내가 자네한테 선입견을 갖고 있는 건 부정하지 않겠네. 다만 자네와 내 딸이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닌 건 맞아.”이태웅은 자기가 너무 했나 싶었는지 태도를 살짝 누그러뜨렸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 저는 애교 누나랑 다른 세계 사람이에요. 누나는 정계 유명 인사 딸인데 저는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 제가 이렇게까지 누나를 쫓아다니는 건 분명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아버님도 제가 왕정민과 같은 목적으로 애교 누나를 이용해 아버님 권세를 빌리려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이태웅은 묵인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우리를 그토록 반대하는 것도 아마 그 이유에서일 거다.내가 아무리 입이 닳도록 말해도 이태웅은 절대 나를 믿지 않을 거다. 때문에 나는 변명하는 대시 다른 방식으로 말했다.“하지만 제가 성과를 보인다면 기회를 주실래요?”이태웅은 단칼에 거절하지 않고 나를 보며 물었다.“어떤 성과 말인가?”이 상황에서 나도 모른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내가 너무 줏대 없고 무성의해 보일 테니까.”이태웅이 찾으려는 건 애교 누나한테도 잘하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다.그래도 명색이 강북시 부사장 사위인데,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을 한번 이혼한 딸과 이어준다면 분명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릴 거다.”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진지하게 말했다.“왕정민 정도 실력을 키울게요.”내가 너무 큰소리쳤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이태웅은 상대가 왕정민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어야 마음 놓고 딸을
“꺼져. 여긴 당신 환영하지 않아.”나는 쌀쌀맞게 축객령을 내렸다.왕정민은 그 순간 폭발했지만 찍소리도 못한 채 의기소침해서 꽁무니를 뺐다.동료들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져 묻지도 않고 다들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그사이 나는 이태웅 곁으로 다가갔다.“아버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이태웅은 여전히 서리를 뒤집어쓴 것처럼 안색이 좋지 않았다.“얘기 좀 하려고.”“아, 그럼 안으로 들어가죠.”나는 지나치게 흥분하지도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안 그러면 이태웅은 내가 저를 무서워해서 아부하려 한다고 생각할 테니까.나는 오민혁에게 차 두 잔을 부탁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버님, 무슨 말이 하고 싶으세요?”“내 딸 일이네. 난 역시 자네가 내 딸한테 헤어지자고 먼저 얘기했으면 좋겠네.”청천벽력 같은 한마디에 나는 살짝 평정심을 잃었다.하지만 이내 싱긋 웃었다.“제가 싫다면요?”이태웅의 낯빛은 더 어두워졌다.“정말 내 딸을 위한다면 귀찮게 굴지 말게. 이미 한번 상처받은 아이라서 두번 다시 상처받는 걸 원치 않네.”나는 자연스럽고 의젓한 말투로 말했다.“전 누나한테 진심이에요. 절대 상처 주지 않아요.”“하. 진심만 있다고 되는 줄 아나? 자네가 내 딸이 편한 생활을 누리게 할 수 있나? 다른 사람이 뒤에서 애교를 손가락질하지 않게 할 수 있나?”“왕정민은 아무리 망나니라도 사업을 하고 있는 회사 대표인데, 자네는 뭔가?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인 데다 능력까지 없으니 다들 내 딸이 자기보다 못한 짝을 찾았다고 말하지 않겠나?”그 말을 들으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하지만 나는 반박했다.“입이 그 사람들한테 달린 걸 어쩌겠어요. 다른 사람 의견이 그렇게 중요하면 차라리 살지 말아야죠.”이태웅은 쾅, 하고 테이블을 내리 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의 안색은 무서울 정도로 새파래져 있었다.“지금 태도가 그게 뭔가?”“아버님이 애교 누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어요. 하지만 누나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왕정민은 제 쪽으로 걸어오는 이태웅과 딱 마주쳤다. 그 순간 왕정민은 사색이 되었다.물론 지금은 이애교와 이혼한 상태지만 이태웅이 주는 위압감은 여전히 사람을 숨 막히게 했다.왕정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로 말했다.“아버님, 언제 오셨어요?”나는 그런 왕정민이 참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는 그야말로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줬다.그때 이태웅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아버님이라 하지 마. 난 당신 같은 사위 둔 적 없으니까. 아까 내 딸을 천 것이라고 욕하는 것도 똑똑히 들었어.”왕정민은 여전히 헤실 웃고 있었다.“잘못 들으셨겠죠. 제가 왜 애교를 욕하겠어요. 애교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요. 우리가 이혼한 건 다 제 잘못 때문인데, 제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애교를 욕하겠어요?”사람이 뻔뻔하면 얼굴이 벽보다 더 두꺼워질 수 있다더니, 왕정민이 딱 그 짝이었다.헛소리를 해대는 왕정민의 모습에 이태웅의 얼굴은 새파래졌지만 본인 신분 때문에 직접적으로 손찌검하지 못했다.왕정민 역시 이태웅이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이태웅은 자기 신분을 가장 신경 쓴다. 그런데 강북시 부시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어떻게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리겠나?그저 본인이 환하게 웃으며 뻔뻔하게 굴면 이태웅이 저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걸 왕정민은 확인했다.두 사람은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에 서로 어떤 성격인지 꿰고 있다. 게다가 이태웅은 확실히 왕정민 생각대로 어쩔 방법이 없었다.그때 내가 간 크게 다가가 발로 왕정민의 허리를 걷어차 그를 넘어뜨렸다.왕정민은 이내 눈을 부라리며 나를 째려봤다.“정수호, 네가 감히 나를 찼어?”나는 왕정민에게 삿대질하며 버럭 소리쳤다.“애교 누나는 내 여자 친구야. 한 버만 더 누나 뒷담화하면 또 차버릴 거야.”인기척을 느낀 동료들은 하나둘 뒷마당으로 모여 나를 도와주었다.다들 이유는 모르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편을 들어주었다.결국 머릿수에서 밀리자 왕정민은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네
왕정민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았다.“무섭지. 당연히 무섭지. 그렇게 대단한 분들 앞에서 난 고작 벌레에 불과해. 내가 왜 이애교는 모함하면서 전소희한테는 아무것도 못 하는지 알고 싶어?”왕정민이 마침 내가 알고 싶어하는 걸 물었기에 나는 말하지 않았다.그런데 갑자기 웬일인지 왕정민은 먼저 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유야 간단해. 이태웅 역시 딸과 마찬가지로 나를 너무 믿었어. 두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너무 감정적이라는 거야. 이애교의 약점은 나고, 이태웅의 약점은 딸이고. 내가 아무리 이애교를 모함해도 이태웅은 자기 딸 명성을 생각해서 나를 진짜 어떻게 하지는 않을 거야.”“만약 뒤에서 몰래 나를 공격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뒤에서 말이 나올 거야. 무엇보다 이태웅처럼 정직한 사람은 그런 일은 못 해.”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그렇게 말하면서 양심의 가책도 안 느껴져?”왕정민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심? 양심이 뭔데? 양심이 밥 먹여줘? 양심이 뭔 쓸모가 있는데? 내가 강북에서 혼자 구르는 동안 이태웅은 조금도 도와준 적 없어. 다 내 혼자 이룬 성과야. 그런데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이태웅은 계속 나를 못마땅해 했어. 내가 이애교와 이혼한 건 이태웅 때문도 있어.”“내가 왜 전소희를 선택한 줄 알아? 전소희 아버지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것 말고도 그 여자한테는 희망이 보여.”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렇다면 왜 또 전소희까지 배신하는데?”나는 정말 왕정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말에 왕정민은 웃음을 터뜨렸다.“배신? 배신까지는 아니지. 난 전소희 배신할 생각 없어. 그 간호사와는 그냥 좀 즐기는 것뿐이야. 남자는 다 그렇잖아. 돈이 있으면서 밖에 애인 없는 남자가 어디 있어? 이건 체면과 신분의 상징이야. 내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거기기도 하고.”왕정민은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려 발로 눌러 껐다. 이윽고 짙은 담배냄새를 풍기며 나에게 걸어왔다.“내가 왜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