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 어이없어서 벼랑 끝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애교 누나가 나를 위로했다.[수호 씨, 너무 난처해하지 마요. 이미 벌어진 일인데, 이제 와서 그런다고 소용없잖아요. 그리고 우리 정말 신경 안 써요. 이제 다 친해져서 서로 잘 알잖아요.]말은 그렇다지만, 난처한 건 나다. 게다가 그런 장면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이제 20대인데, 그렇게 망신당하면 앞으로 누나들을 어떻게 봐야하지?’“애교 누나, 여기 와서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 저 지금 너무 괴로워요.”애교 누나는 나를 무척 안쓰러워했다.[그래요, 기다려요. 바로 갈게요...][정수호, 깨어났어?]애교 누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 건너편에서 백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핸드폰을 던질 뻔했다.[내 전화 끊으려고 했지? 경호하는데, 전화 끊으면 아까 룸안에서 있었던 일 올릴 거야.]그 말에 나는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뭐라고요? 설마 사진도 찍었어요?”나는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내가 그렇게 벗고 있는 걸 찍었다고?’백연우는 아주 으쓱한 듯 말했다.[맞아. 그것도 여러 장. 보겠다면 보내줄 게.]“미쳤어요? 그런 사진은 왜 찍어요?”나는 너무 화가 나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백연우는 여전히 큰 소리로 웃어댔다.[재밌으니까. 그런 모습 처음 보는데, 바로 사진 찍어 저장해야 하지 않겠어? 그런데 이렇게 빨리 쓸모가 있을 줄 몰랐네. 난 역시 선견지명이 있다니까.]‘당시는 선견지명이 있는지 몰라도 나는? 내 기분은 생각해 봤냐고?’나는 화가 났지만 감히 그 화를 표출하지 못하고 전화에 대고 아부했다.“백 쌤, 대체 왜 그래요? 제 목소리 좀 들어봐요. 저 지금 울 것 같다고요, 제발 사진 좀 지워줘요.”[에이, 그럴 필요 없어. 그 사진은 내가 혼자 감상할 거야. 절대 외부에 노출하지 않아. 앞으로 내 말 잘 들어. 참, 누나들 지금 노래방에 있는데, 올래?]“싫어요!”나는 바로 거절했다.이 순간 나
나는 그 사진을 모두 삭제하고 싶었지만 권한이 없었다.하지만 그대로 두자니 또 너무 괴로웠다.게다가 백연우는 한번 당해보라는 듯 계속해서 사진을 전송했다.그걸 보고 있으니 마음이 더 괴로웠다.이런 느낌은 마치 벌거벗은 채 길거리를 활보하는 느낌이었다.나는 아까 전 내 뺨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왜 술은 그렇게 많이 마셔가지고 이런 흑역사를 남겼는지?나는 얼른 백연우에게 전화해 애원하듯 말했다.“누나, 잘못했어요. 바로 갈게요.”[흥, 진작 그럴 것이지. 늦었어.]백연우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나는 결국 아부하듯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또 뭘 원해요?”[이따가 오면, 우리 앞에서 스트립쇼 보여줘.]백연우는 아예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옆에서 하정현의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건너편 상황을 볼 수 없었지만, 모두 나를 웃음거리로 삼고 있을 모습이 상상되었다.결국 나는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좋아요. 하라는 대로 할 게요. 약점 잡혔는데 제가 별 수 있겠어요?”전화를 끊은 나는 얼른 용모를 정리하고 큰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별수 없이 약속 장소로 향했다.이런 상황에서 내가 손해 본 게 한두 번도 아니다. 때문에 나는 가는 내내 다시는 약점 잡히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이러고도 또 약점 잡히면 그때는 당해도 싸.’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노래방에 도착했다.누나들은 아주 큰 룸을 예약했다. 게다가 지금은 유미 사모님과 형수가 노래하고 있었다.백연우와 하성현은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내가 들어오자마자 싱긋 웃으며 바로 다가왔다.그러더니 나를 놀려대며 스킨십했다.그 순간 나쁜 짓을 강요당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느껴버렸다. 내가 너무 나약하고 작아진 기분이었다.“백 쌤, 하성현 씨, 그만 좀 하면 안 돼요? 다른 사람도 있는데.”나는 말하면서 애교 누나 쪽으로 달려갔다. 누나가 나를 구해줬으면 하는 마음에.애교 누나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나를 등 뒤에 숨기며 감싸주었다.“됐어요. 수호
나는 제 발이 저려 백연우의 눈을 피한 채 거짓말했다.“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저도 취해서 아무 기억도 안 나요.”“정말 기억 안 나? 아니면 안 나는 척 연기하는 거야?”백연우는 나를 꿰뚫어 볼 것 같은 눈빛으로 바라봤다.나는 시종일관 백연우의 눈을 피했다.사람이 잘못을 하면 정말 남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게 맞는 듯하다.그렇지 않고서야 상대가 거짓말하는지 알고 싶으면 눈을 보라고 하겠는가?눈은 정말 신기한 인체 기관인 것 같다. 사람 마음을 그대로 팔아버리니까.“정말이에요.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나는 극구 부인했다.그때 백연우가 윤지은을 끌고 왔다.“지은아, 네가 말해 봐.”‘윤지은은 왜 끌어왔지? 대체 뭘 말하라는 거지?’내가 의아해할 때, 윤지은이 폭탄을 던져 버렸다.“내가 깨어났을 때, 몸 위에 진득한 액체가 있던데. 그 짓을 했다는 증거지. 남자는 술에 취했을 때 자극을 받지 않고는 절대 뺄 수 없는데, 그랬다는 건 여기 있는 누군가와 했다는 거고.”윤지은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공개 처형했다.나는 당장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이건 어쩔 수 없다. 원래 부끄러움 많이 타는 성격인데, 누나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으니 너무 괴로웠다.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하지만 백연우가 강제로 내 손을 떼어내며 사납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라니까 얼굴은 왜 가려? 그곳도 봤는데, 부끄러울 거 뭐 있어? 설마 얼굴 보이는 게 그곳 노출한 것보다 더 부끄러워?”“그만 말해요, 제발.”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계속 말할 건데? 묻고 있잖아. 대체 누구랑 했냐고?”“정말 몰라요. 그때 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했어요. 그저 누군가 제 위에 올라타 입 맞춘 것밖에는...”내 말에 모든 누나들이 내 주위에 둘러싸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는 것처럼 나를 바라봤다.갑자기 누나들이 몰려들자 나는 깜짝 놀랐다.이대로 도망치고 싶었으나, 어디로 도망칠지 몰랐다.그때 형수가 물었다.“수호 씨, 정말 누구랑 한
“그때 우리가 다 과음했잖아. 그 사이 레스토랑 직원이 들어왔고, 그 직원과 붙어먹었을 수 있잖아?”‘정말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말만 하네?’‘레스토랑 직원이 남친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나는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이 여섯 명 중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 한사코 부정하고 있다고.“됐어요. 수호 씨 그만 놔줘요. 우선 물부터 마시고 좀 휴식하게 해줘요.”역시 나를 생각하는 건 애교 누나뿐이었다.심지어 나에게 물까지 따라주는 누나를 보니 무한한 감동이 밀려오면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 났다.애교 누나의 보호 아래 나는 겨우 소파에 앉았다.하지만 나머지 여자들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로 있으면 또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몰랐다.나는 몰래 애교 누나한테 말했다.“누나, 저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도와줘요.”애교 누나는 내가 안쓰러운 듯 손을 꼭 잡아 주었다.“수호 씨가 고생이네요. 누나들한테 계속 공격당하다니. 그런데 나도 도와줄 수 없어요.”누나의 말에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형수를 봤더니 아직도 화가 났는지 나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내가 다른 여자와 그 짓을 했다는 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큰일이네, 형수가 아예 날 상대하고 싶어 하지도 않잖아. 도움받는 건 더 불가능하겠네.’‘윤지은과 하성현, 그리고 백연우는 됐어. 나를 못살게 구는 게 이 세 명인데.’나는 결국 모든 희망을 유미 사모님한테 걸어야 했다.나는 뻔뻔하게 사모님 곁에 앉았다.“사모님, 저 밖에 나온 지도 며칠 되는데, 이제 출근하러 돌아가야 하지 않나요? 더 이상 돌아가지 않으면 정 사장님이 불만 가질까 봐 걱정이에요.”사모님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요. 내가 남편한테 이미 말해뒀어요. 수호 씨가 무슨 생각인지 알아요. 내가 최대한 도와줄게요. 내가 끌고 나왔는데, 그런 일이 있었고, 구경거리까지 됐으니 나도 마음이 불
누나들은 한 줄로 쭉 앉아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절대 사진 안 찍어.”“얼른 춰 봐. 나 스트립쇼는 처음 보거든.”이미 수없이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진짜 스트립쇼를 해야 한다고 하니 도저히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문제는 너무 어색했다.내가 이런 걸 해봤어야지, 한다 한들 꼴불견일 게 뻔했다.나는 결국 마지막까지 희망의 끊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안 하면 안 돼요? 노래하면 안 될까요?”“안 돼. 남자라면 뱉은 말은 이행해야지.”백연우는 계속해서 나를 부추겼다.하정현도 옆에서 계속 맞장구쳤다.이 두 사람이 반응이 가장 격렬했고 애교 누나와 사모님은 아예 뭐라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백연우가 또 강조했다.”“이애교, 임유미, 두 사람 더 이상 정수호 편 들지 마. 안 그러면 두 사람 의심할 거니까.”그 말에 애교 누나와 사모님은 더 이상 내 편을 들지 못했다.이제 나는 스스로 행운을 빌 수밖에 없었다.‘거기까지 보였는데 이대로 그냥 해버리자는 게 뭐 어때서? 두려울 거 뭐 있어?’‘스트립쇼, 까짓거 하면 되지.’“음악 좀 틀어줘요.”나는 호기롭게 얘기했고, 백연우는 곧바로 리듬감 있는 음악으로 틀어주었다.음악의 리듬에 맞춰 나는 몸을 흔들며 옷을 벗었다.춤을 잘 추든 못 추든, 예쁘든 추하든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 이대로 밀어붙일 생각이었으니까.이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니 어색함도 어느새 사라졌다.심지어 뻔뻔하게 구나 무서울 것도 없었다.내가 옷 한 벌 벗을 때마다 누나들은 옆에서 호응해 줬다.“어머, 어머...”리드미컬한 음악과 현장 분위기에 나는 저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다.심지어 미친 듯 스트립쇼에 빠져버렸다.나는 윤지은까지 잡아 일으켜 세웠다.윤지은을 선택한 건, 그녀가 나를 구경하면서 또 현장 수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내가 너 친구들앞에서 난처하게 한다.’윤지은은 내가 저를 끌어당기자 황급히 내 손을 뿌리쳤다.하지만 윤지은이 원하는 대로 해줄 내가 아니었다.백연우와 하정현은 아예 환호
오늘 다 같이 신나게 놀지 몰라도, 내일이면 다 흩어질 텐데, 이 기회에 마음껏 즐겨야 할 거 아닌가?우리가 한창 신나게 놀고 있을 때, 누군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어머, 다들 뭐 하는 거야?”윤지은의 어머니 이영미가 문 앞에 서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우리를 보고 넋을 잃었다.윤지은은 어머니가 이곳에 갑자기 올 줄 몰랐는지 다급히 용모를 정리하고 평소의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그러고는 얼른 제 어머니한테 달려갔다.“엄마, 왜 왔어요?”“혼자 방에 있는 게 심심해서 같이 수다나 떨려고 왔지.”윤지은은 오늘 밤 너무 정신없이 놀아, 자기 어머니도 용천 호텔에 있다는 걸 까맣게 잊었다.게다가 이렇게 미친 듯이 노는 모습을 엄마한테 들키고 말았다.다들 윤지은의 어머니를 보자 다가와서 인사했다.하지만 나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었다.상체를 아예 벗고 있던 나는 얼른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때문에 다들 이영미한테 다가갈 때, 나는 구석에서 숨어 옷을 입기 바빴다. 그 모습은 마치 바람 현장을 들킴 사람 같이 볼품없었다.나는 다들 룸 안으로 늦게 들어오길 바랐다. 적어도 그사이에 내가 얼른 옷을 입어야 했으니까.하지만 역시 걱정하는 일은 벌어진다고, 내가 옷을 채 입지도 못했는데 이영미는 누나들한테 끌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때문에 내가 황급히 옷을 입는 모습은 그대로 이영미한테 들키고 말았다.이 상황은 정말 어색했다.“다들... 뭐 하고 있었던 거야?”이영미는 뭔가 오해한 모양이었다.나 혼자서 여섯 명을 상대한 거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윤지은이 다급히 설명했다.“오해하지 마요. 춤춘 거예요. 분위기를 타서 그런 거예요.”“춤추는데 옷은 왜 벗어? 뭐 스트립쇼라도 했어?”이영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 말에 애교 누나와 사모님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그에 반해 백연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우리가 한 게 아니라, 정수호 혼자 한 거예요. 우리는 구경했어요.”“하하, 잘 추든?”이영미는 나를 위아
나는 이명미가 아주 잘생긴 호스트 두 명을 불어올 줄은 몰랐다.물론 이런 자리에 나오는 게 두 사람 일인 건 알았지만, 백연우와 하정현이 두 사람 옆에 다가간 걸 보니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분명 모두 내 곁을 맴돌았는데. 이제는...“엄마, 저 사람들은 왜 불렀어요?”윤지은은 어머니 곁에 앉아 작은 소리로 물었다.두 사람은 용천 호텔에서 일하는 유명한 호스트라 이곳에서 꽤 유명했다. 윤지은은 이 사실이 아버지 귀에 들어갈까 봐 두려워했다.하지만 이영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네 아빠가 나 상관도 안 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뭐 어때서? 나만 기분 좋으면 되지.”이영미는 일부러 이랬다.집을 나온 지 이틀이나 되는데, 남편한테서 전화도 오지 않고, 문자도 오지 않는 게 너무하다고 생각했으니까.윤해철이 자기를 관심하지 않으니, 뭘 하든 상관없다고 여겼다.일부러 윤해철을 화나게 하려고.윤지은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미리 말하는데, 뭘 하든 상관없지만, 정수호는 멀리 해요.”이영미는 나를 흘긋 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왜? 혹시 네 남자 친구야?”“아니요, 저 사람 인성이 문제 있어요. 엄마를 어떻게 해보려고 할까 봐 그래요.”윤지은은 나를 모함하려고 못하는 말이 없었다.이영미는 나랑 같이 갇혀 있던 날을 떠올리더니 말했다.“사람 괜찮던데? 혹시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 그리고 저렇게 잘생긴 데다, 한의사라며? 나 요즘 허리 아파서 마침 마사지 좀 받으려고 했는데.”윤지은은 어머니의 말을 듣자마자 뜯어말렸다.“멈춰요. 눈굴 찾든 상관없는데, 정수호는 안 돼요. 내가 나중에 의사 알아봐 줄게요. 내 연락 기다려요.”이영미는 더 물어보려 했지만 윤지은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버렸다. 그 때문에 그녀는 오히려 마음이 더 근질근질했다.윤지은은 자기 어머니와 나 사이에 정말 뭐라도 있을까 봐 바로 한의원에 전화해 의사를 찾았다.윤지은은 애초부터 싹을 자를 생각이었다.모든 걸
나는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전화를 받았다.“사모님, 무슨 일이세요?”[별일 아니고, 뭐 좀 부탁드리고 싶어서요.]유미 사모님은 내가 백연우한테 당할까 봐 미리 전화해서 도와주려는 거였다.하지만 그걸 모르는 나는 사모님이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나는 얼른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냥 시키면 되지 부탁이라니요.”[그... 물 한 병만 사다 줄래요?]방문 앞까지 나간 나는 사모님의 말에 멈칫했다.“네? 방에 혹시 물 없어요?”‘여기 방마다 물이 있을 텐데? 없더라도 프런트에 전화하면 바로 가져다줄 텐데.’이런 작은 일로 굳이 전화한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하지만 그때 사모님이 바로 말을 이었다.[나 방에 있는 물 마시고 싶지 않아요. EVIAN 브랜드만 먹거든요,]그건 유명한 생수 브랜드인데, 생수 한 병에 몇천 원이다. 하지만 이 호텔에서는 그것보다 몇 배는 되어 몇만 원 정도 한다.일반인한테는 너무 사치스러운 거지만, 유미 사모님 같은 부자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나는 단순히 사모님이 그 브랜드 생수를 마시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요, 바로 사다 드릴게요.”나는 방을 나와 일부러 그 브랜드 생수를 파는 곳에 가 생수 두 병을 구매했다. 고작 두 병에 4만 원이었다.내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연우가 마침 내 방으로 갔다. 하지만 방에 사람이 없었다.백연우는 의아한 나머지 얼른 감시 카메라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내가 전화를 받고 어디론가 나갔다는 걸 발견하고 얼른 나에게 전화했다.하지만 나는 서둘러 물 배달하느라 진동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게 백연우의 심기를 단단히 건드려 버렸다.“흥! 정수호, 네가 나를 만족시켜 줄 수 없다면, 나 다른 사람 찾을 거야.”백연우는 화가 난 듯 뒤돌아 떠나갔다.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생수를 사서 사모님께 배달했다.똑똑똑.유미 사모님의 방을 노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모님이 문을 열었다.방을 흘긋 들여다봤더니 백연우가 보이지 않았다.“사모님, 백 쌤은요?”“일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다.윤지은이 아침을 사 오자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그걸 본 윤지은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번 치료 방법이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나는 사모님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비록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도 사모님은 음식 드실 때 여전히 우아하고 단아했다. 살짝 슬픔을 띄고 있어 살짝 비극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내가 한창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윤지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나를 쏘아봤다. “짐승!”윤지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 욕에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제가 뭘 했다고 짐승이라는 거예요?”“아무튼 짐승 맞아. 이런 상황에서 훔쳐보기나 하고.”윤지은은 나를 째려봤다.난 그저 사모님을 몇 번 본 것뿐인데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너무 어이없었다.하지만 이러다 또 싸움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아침을 들고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웠다.식사를 마친 뒤 사모님은 자발적으로 나와 윤지은을 찾아왔다.“알고 있는 거 사실대로 다 알려줘요. 난 호섭 씨 사고에 대한 모든 사실이 알고 싶어요.”사모님은 너무 평온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때문에 나는 사모님 상태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사모님, 우선 맥 좀 짚어봐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알아야. 걱정할 거 없어요.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고, 호섭 씨가 떠난 사실을 받아들였어요.”“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호섭 씨처럼 착한 사람이 남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억울함을 풀어줄 거예요.”“난 강해져야 하고 호섭 씨처럼 용감해져야 해요. 그래야 호섭 씨가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요.”사모님은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그 말을 들으니 나도 코끝이 시큰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나는 얼른 마음의
나는 사모님 팔을 힘껏 잡으면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쳤다.“사모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사장님이 이런 사모님 보고 편히 가지 못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내 말이 사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사모님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윤지은은 내가 강제로 사모님을 자극했다며 나를 탓했다.“유미 지금 안 그래도 나약한 상태인데, 왜 그런 말을 직접 해?”나는 너무 난감했다.“누구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이 계속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상태가 점점 악화해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모님이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다.나도 사모님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모님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정말 사모님을 돕고 싶다면 모질어야 해요. 이럴 때 마음 약해지면 오히려 해치는 거예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내가 치료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진 사모님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사모님이 속사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속상해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사장님 사고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사고 낸 거예요. 사모님, 정신 차리고 우리와 함께 진실을 조사해요.”사모님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사모님을 깊은 슬픔에서 꺼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나는 말투를 부드럽게 하며 방금 한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사장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사모님도 사장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거 원하지 않죠? 우리 함께 진실을 알아내 사장님이 억울하게 죽임당하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사모님 상태는 살짝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지도 몰랐다.나는 사모님이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서둘러 사모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수호 씨, 이거 놔요. 난 남아서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사모님은 마구 버둥대며 소리쳤다.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아예 사모님을 어깨에 두러 업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곧바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벼랑 끝에 서 있는지라 조금만 실수하면 함께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사모님을 손날로 기절시켰다.내가 가드레일 안쪽으로 다시 넘어왔을 때 윤지은의 차가 마침 도착했다.“왜 그래?”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사모님을 차에 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지그 정신이 이상해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요. 방금 사장님이 춥다고 한다면서 옷 주러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계속 이럴 순 없어. 우리가 잠깐은 지켜볼 수 있지만 평생 지켜볼 순 없잖아.”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사모님께 사장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드리는 건 어때요?”“미쳤어? 이번 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또 자극하자고?”윤지은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환자가 가족을 잃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치료가 안 된다면 환자한테 희망을 줘야 한대요. 그 희망이 의학에서 말하는 기예요.”“그 기를 가진 환자가 음식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서서히 회복할 수 있대요.”“사장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모님과 함께 그 사건을 수사하는 거예요. 아마 사모님도 사장님이 죽은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장례식장 안을 모두 뒤져 봤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 조급하지 않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해졌다.사모님은 현재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서도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어 나는 문득 사모님 번호를 떠올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계속 긴 연결음만 들릴 뿐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 연결음이 꺼졌다.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사모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나 괜찮으니까 좀 내버려둬요.]사모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어디 있어요? 너무 걱정돼요.”[혼자 있고 싶어요.]“알아요, 아는데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사모님이 안전하다는 거 확인해야 해요.”전화 건너편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때 갑자기 차 경적음이 들려왔다.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장례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문득 사모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알려주시면 안 돼요?”사모님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대충 답을 얻은 나는 장례식장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사장님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았냐는 윤지은의 전화를 받은 나는 내 추측을 말했다.“아니요. 사모님 아마도 사장님 사고 난 곳에 있는 것 같아요.”[거긴 왜?]윤지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사장님 죽음이 수상해 직접 조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장님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 지금 가는 중이에요.”[그럼 먼저 건너가. 나 이따 바로 갈게.]나는 윤지은과 상의한 뒤 먼저 사장님이 사고 난 곳으로 향했다.사고가 난 곳은 절벽인데, 사모님은 마침 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