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전화를 받았다.“사모님, 무슨 일이세요?”[별일 아니고, 뭐 좀 부탁드리고 싶어서요.]유미 사모님은 내가 백연우한테 당할까 봐 미리 전화해서 도와주려는 거였다.하지만 그걸 모르는 나는 사모님이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나는 얼른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냥 시키면 되지 부탁이라니요.”[그... 물 한 병만 사다 줄래요?]방문 앞까지 나간 나는 사모님의 말에 멈칫했다.“네? 방에 혹시 물 없어요?”‘여기 방마다 물이 있을 텐데? 없더라도 프런트에 전화하면 바로 가져다줄 텐데.’이런 작은 일로 굳이 전화한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하지만 그때 사모님이 바로 말을 이었다.[나 방에 있는 물 마시고 싶지 않아요. EVIAN 브랜드만 먹거든요,]그건 유명한 생수 브랜드인데, 생수 한 병에 몇천 원이다. 하지만 이 호텔에서는 그것보다 몇 배는 되어 몇만 원 정도 한다.일반인한테는 너무 사치스러운 거지만, 유미 사모님 같은 부자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나는 단순히 사모님이 그 브랜드 생수를 마시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요, 바로 사다 드릴게요.”나는 방을 나와 일부러 그 브랜드 생수를 파는 곳에 가 생수 두 병을 구매했다. 고작 두 병에 4만 원이었다.내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연우가 마침 내 방으로 갔다. 하지만 방에 사람이 없었다.백연우는 의아한 나머지 얼른 감시 카메라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내가 전화를 받고 어디론가 나갔다는 걸 발견하고 얼른 나에게 전화했다.하지만 나는 서둘러 물 배달하느라 진동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게 백연우의 심기를 단단히 건드려 버렸다.“흥! 정수호, 네가 나를 만족시켜 줄 수 없다면, 나 다른 사람 찾을 거야.”백연우는 화가 난 듯 뒤돌아 떠나갔다.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생수를 사서 사모님께 배달했다.똑똑똑.유미 사모님의 방을 노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모님이 문을 열었다.방을 흘긋 들여다봤더니 백연우가 보이지 않았다.“사모님, 백 쌤은요?”“일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사모님도 눈치챘는지 바로 사과했다.사모님의 그런 태도에 내가 오히려 어색해졌다.“별거 아닌데, 사과할 필요 없어요.”별일 아닌 거로 크게 반응하는 사모님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살짝 터치한 것뿐인데, 이렇게 긴장하며 사과할 필요가 있나?’그때 사모님이 아주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내가 수호 씨를 일부러 꼬신 거라고 오해할까 봐 그래요. 이렇게 입고 수호 씨 만나는 게 어색해서요. 당황하다 보니 손도 내 말을 안 듣네요.”“사모님은 그런 분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그렇지 않으면 그때 옷 살 때, 지퍼 올려달라는 부탁도 안 했을 거잖아요.”유미 사모님 얼굴은 더 붉어졌다.“그만 말해요. 그때 일은 내 아이디어가 아니에요.”“네?”“솔직히 말하면, 그때 여정이 수호 씨를 시험한 거예요. 그때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수호 씨는 모를걸요. 한 번도 다른 남자와 그런 스킨십을 한 적 없는데, 그때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어요.”나는 문뜩 그날이 떠오르면서 소름이 돋았다. 그때 내가 엉큼한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틀림없이 끝장났을 거다.”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다른 시키실 일 없으면 얼른 쉬세요. 전 먼저 가볼게요.”“그래요, 가 봐요.”808호실을 나온 나는 내 방인 819호실로 향했다.하지만 801호실을 지날 때 안에서 익숙한 여자의 신음이 들려왔다.그 목소리는 백연우 목소리 같았다.마침 방문이 꽉 닫히지 않아, 나는 몰래 문틈 사이로 안을 훔쳐봤다.그런데 안을 확인한 순간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백연우는 아까 이영미가 불러왔던 호스트 중 한 명을 불러 한창 즐기고 있었다.백연우는 침대 옆에 서 있었고, 그 남자는 백연우 위에서 열심히 힘쓰고 있었다.황홀한 표정의 백연우를 본 순간 나는 넋을 잃었다.백연우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정말 필요하다면 나를 찾아오면 되지, 왜 몸 파는 사람을 찾는지.순간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나는 씩
나는 백연우의 손을 뿌리쳤다.“새 애인 생겼으면서 왜 찾아왔어요?”백연우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아까 808호실 갔었어? 뭘 봤는데?”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모든 걸 묵인했다.백연우는 매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싱긋 웃더니 내 셔츠를 정리해 주었다.“나 사실 너 찾으러 왔었어. 그런데 전화 받고 나가더라고.”“내가 전화 받고 나간 건 어떻게 알았어요?”나는 문뜩 궁금했다.백연우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나한테 천리 밖까지 보는 초능력이 있거든.”“귀신을 속여요.”“정수호. 우리 서로 즐기기로 한 거 아니야? 설마 진심이었어?”나는 갑자기 마음이 찔려 버럭 소리쳤다.“누가 진심이라는 거예요? 아니거든요.”“아니면 다행이고. 난 연아거나 결혼은 질색이야. 나랑 재미 보는 건 괜찮지만, 날 묶어둘 생각이라면 버려.”순간 백연우가 남주 누나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조금 달랐다.남주 누나는 노는 걸 좋아하지만 자기를 잘 숨기고, 다른 남자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하지만 백연우는 아니다. 그녀는 절대 무엇으로도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다.“나 훔쳐볼 때, 흥분했어?”백연우가 갑자기 나에게 바싹 다가와 윙크하며 물었다.방금 전 장면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나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우리가 사귀는 게 불가능해도, 대놓고 그런 질문하는 건 아니죠.”“얼씨구, 소유욕이 넘치네. 그럼 화 좀 가라앉혀줄까?”“그래요.”나는 백연우를 거칠게 밀어 버렸다.내가 이렇게 난폭하게 나올 줄 몰랐는지, 백연우는 준비도 없이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아 버렸다.하지만 곧바로 눈빛이 야릇하게 변했다.“이런 모습도 있었네? 마음에 들어. 이리 와서 누나 마음껏 다뤄줘...”나는 바로 백연우를 덮쳐 거칠게 밀어붙였다.밤새도록 하다 보니 지쳐버린 나는 그대로 백연우를 안고 잠이 들었다.피곤한 나머지 너무 깊게 잠든 나는 날이 밝은 뒤에야 백연우의 핸드폰 소리에 잠
나는 전화를 바로 끊고 방 안을 샅샅이 뒤졌다.한번 빙 둘러보고 나니 침대 맞은편 벽화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그리고 벽화를 뜯어 봤더니 역시나 여자아이의 눈에 아주 작은 소형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이건 너무 충격이었다.호텔 방은 개인 공간인데, 그런 사적인 공간에 카메라가 숨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나는 얼른 침대 쪽으로 달려가 백연우를 흔들어 깨웠다.“얼른 일어나요!”“뭐야? 나 피곤하다고.”백연우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나를 째려봤다.“이거 설명해요. 이 카메라, 백 쌤이 단 거예요?”나는 카메라를 뜯어내 백연우 앞에 떡하니 내밀었다.눈을 비비던 백연우는 소형 카메라를 보고도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싱긋 웃었다.“어머, 들켰네.”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화가 치밀었다.“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이러면 난 사생활이 하나도 없잖아요.”“우리 그런 짓도 한 사이인데, 서로 사생활을 따져서 뭐 해?”“너무 하네요!”나는 화가 나서 카메라를 바닥에 내팽개쳤다.그러자 백연우가 아예 침대에 번듯하게 누워 말했다.“지금 나한테 짜증 낸 거야?”“이러는 게 정상 아니에요? 제 동의도 없이 방에 카메라를 설치했는데, 화도 못 내요?”“그래,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백연우는 나에게 사과했다.하지만 그걸 받아줄 마음은 없었다.“사과해도 소용없다면, 뭘 원하는데? 한 번 더 화풀이할래?”백연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두 손을 내 목에 감으며 내 얼굴에 입 맞췄다.“사실 나 나쁜 의도로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네가 방에서 매일 뭐 하나 보고 싶어서 그랬어.”“그럼 왜 소여정 씨한테 보냈어요?”내가 퉁명스럽게 묻자 백연우는 한참 생각하더니 대답했다.“우리 지은이 너랑 그런 사이라는 게 너무 충격이라 친구랑 공유하려고 그랬지.”“사모님은 알아요?”“유미한테는 아직 말 안 했어. 계는 애가 너무 올곧고 착해서 내가 그랬다는 걸 알면 바로 뜯어말렸을 거야.”“본인이 잘못했다는 걸 알기나 해요? 대학 학과장이라는 사람이
“그럼 임천호는요?”“하, 그 남자는 매일 바빠서 소여정과 같이 있어 줄 시간이 어디 있어?”“그럼 왜 불러갔는데요?”“소유욕이지 뭐. 소여정이 밖에서 마음대로 하다가 도망치거나, 딴 놈과 눈 맞아 바람날까 봐 그러지. 그래서 옆에 묶어두고 카나리아처럼 기르고 있어.”백연우는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난 뒤 소여정한테 영상 통화를 걸고는 아예 카메라를 내 쪽으로 돌렸다.나는 얼른 얼굴을 가렸다.“왜 나를 비춰요?”“무서워할 거 뭐 있어? 우리 잤잖아. 소여정이 남도 아니고.”‘그래도 내가 어색하다고요.’게다가 소여정이 이걸 알면 이것저것 캐물을 게 뻔하다.아니나 다를까, 나를 본 소여정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무슨 상황이야? 두 사람 붙어먹었어? 너무하네. 백연우, 나 부러워하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백연우는 카메라를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싱긋 웃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숨기기 싫어서 그랬어. 난 한 건 인정하는 사람이잖아. 숨길 거 뭐 있어?”“너 지금 윤지은이 한 일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까는 거지?”소여정은 입을 막으며 피식 웃었다.백연우는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건 네가 한 말이야. 여정아, 너 수호 씨 그곳이 얼마나 큰지 알아?”백연우는 일부러 소여정을 놀려댔다.이에 화가 난 소여정은 끊임없이 영상에 대고 주먹질했다.“입 다물어. 그만 말해. 안 그래도 부러운데, 이젠 배 아파. 너희들을 봐, 얼마나 자유로워. 나만 혼자 자유를 잃은 새잖아. 참, 수호 씨 좀 바꿔 봐. 할 말 있으니까.”백연우는 나에게 핸드폰을 건넸다.나는 얼른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영상 속에 비친 소여정을 보니 문뜩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정수호, 요즘 조심해.”“왜요?”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임천호의 경호원 중에 정태곤이라는 사람이 없어졌어. 아마 강북으로 간 것 같아.”“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나는 아직도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정태곤은 임천호 개인 경호원이거든. 중요한 일 아니면
나는 더 이상 소여정과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한테 계속 접근해 온 건 본인이면서, 일이 생겼는데 이런 말을 한다니.백연우는 소여정과 한참 통화하다가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나는 여전히 방금 전 들은 사실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백연우는 어느새 옷을 입고 싱긋 웃으며 내 뒤로 걸어왔다.“왜? 무서워?”“아니요!”나는 자존심에 끝까지 부인했다.그러자 백연우가 웃으며 내 팔을 꼬집었다.“아니긴, 몸이 뻣뻣하게 굳었으면서.”사실 나는 속으로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불안하기도 했고. 하지만 백연우 앞에서 인정하기는 싫었다.그러면 너무 찌질하고 멍청해 보일 것 같아서.하지만 내가 아무리 뻔뻔하게 아닌 척 우겨봤자, 백연우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백연우는 팔짱을 낀 채 웃으며 말했다.“정말 무서워한다고 해도 정상이야. 이런 상황에 안 무서울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런데 걱정하지 마. 우리가 지켜줄 테니까. 소여정도 지켜줄 거고.”“정말요? 아까 임천호가 자기 말은 안 믿는다고 했는데.”백연우는 웃으며 말했다.“그건 소여정이 일부러 겁주려고 한 말이고. 임천호가 소여정 말 안 믿어도 소여정은 너 지켜줄 거야. 나도 그렇고, 지은도 있고, 네 사장 사모님도 있고. 우리가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거야.”백연우의 말을 들으니 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이런 상황에 나는 무서워하기만 하고, 남다답게 책임질 줄도 모르고.전에 윤지은의 경호원 양동준처럼 될 거라고 했으면서, 결국 또 이렇게 되었다.나는 깊은숨을 들이켜고는 진지하게 말했다.“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오호? 갑자기 왜 남자다워졌대?”“저 항상 남자다웠거든요. 그걸 몰랐어요?”나는 야릇한 농담으로 내 남성미를 어필했다.하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지.한 사람이 정말 남자다운지는 잠자리 기술이 아니라 책임감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렸다.지금의 나는 그저 책임감을 질 마음만 있을 뿐 그럴 능력은 없다.물론 입으로는 내가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내 착각인지 상대는 내 옆을 쑥 지나갈 뿐 나한테 달려오는 게 아니었다.때문에 나는 별 생각 없이 지나쳤다.하지만 내가 뒤돌아볼 때, 남자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남자의 음산하고 서늘한 눈빛은 너무 무서웠다. 사람이 아니라 꼭 저승사자 같았다.그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오싹해졌다.나는 안 보면 무섭지도 않을 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하지만 상대는 분명 나한테 온 것 같았다.그도 그럴 게, 내 앞에서 멈춰 섰으니까.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고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져, 나는 아예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나는 상대와 충돌하고 싶지 않아 얼른 이곳을 떠나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하지만 내가 왼쪽으로 가면 상대는 왼쪽으로 오고, 내가 오른쪽으로 오면 상대도 오른쪽으로 왔다.이건 분명 내 길을 막는 행동이었다.이대로 도망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결국 큰 결심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저기요, 좀 지나갑시다.”이 순간 정말 무서운 추측이 떠올랐다. 상대가 바로 임천호의 개인 경호원, 다시 말해서 소여정이 말했던 정태곤이라는 사람이라고.내 추측은 맞았다. 서늘한 눈빛에 흰머리를 한 남자는 바로 임천호의 개인 경호원 정태곤이었다. 정태곤은 나를 서늘하게 쳐다봤다.“당신이 정수호야?”“아, 아니요.”나는 찌질하게 굴기 싫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너무 무서웠다.정태곤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 사진은 내가 온천 옆에서 소여정을 마사지해 주는 사진이었다.사진을 본 순간 나는 식은땀이 나면서 속이 뒤틀렸다.“사진과 똑같이 생겼는데 정수호가 아니면 누구지?”카리스마가 진동하는 정태곤을 보니 무서워 미칠 것만 같았지만, 나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했다.“그냥 생긴 게 비슷한가 보네요. 저 정말 그런 사람 몰라요.”말을 마친 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은근슬쩍 떠나려고 시도했다.이 상황이 너무 무서워 배부터 다리까지 후들후들 떨렸으니까.그때 정태곤이 내 팔을 덥석 잡았다. 갑자기 전해지는 고통에 나는 악 비명 질렀다.놈의 손힘이 어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핸드폰을 줍자마자 팔이 세게 걷어 차였다.팔이 끊어졌는지 갑자기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핸드폰도 제대로 쥐지 못했고, 손등은 이미 퍼렇게 멍이 들었다.팔이 갑자기 강타당해 피멍이 들었기 때문이었다.나는 이를 악물며 정태곤을 바라봤다.“임천호 회장님 명으로 소여정 씨에 대해 조사하러 온 거죠? 나 소여정 씨랑 아무 일도 없어요.”정태곤은 통나무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기계적인 말을 내뱉었다.“아무 일도 없었는데, 방금은 왜 거짓말했지?”나는 곧바로 반박했다.“당신 얼굴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겁에 질려 스스로를 보호하는 게 정상 아닌가?”“버러지 같은 놈!”정태곤의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말투에는 비아냥과 경멸이 섞여 있었다.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 순간 너무나도 큰 모욕감을 느껴버렸다.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이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처한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왜 저 자식만 우위에 있는 느낌인 건데?’나는 바로 반박했다.“나 버러지 아니야. 버러지는 너겠지. 남의 뒤나 졸졸 따라다니는 버러지. 난 내 두 손으로, 내 실력으로 밥 벌어먹고 살아. 너처럼 임천호 개새끼 노릇을 하는 게 아니라.”나는 순간 욱해서 주제넘게 망언을 내뱉었다.그 말은 정태곤의 심기를 제대로 긁어 버렸다.정태곤의 표정은 한층 더 음침해지더니,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이게 죽으려고!”나는 신속히 왼손으로 폰을 주워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하지만 정태곤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놈은 어찌나 빠른지 곧바로 나를 따라잡았다.이번에는 아예 정태곤의 발에 걷어차여 바닥에 코를 박고 말았다.그 순간 갈비뼈가 여러 개 부러지는 느낌이었다.정태곤은 허벅지에서 칼 한 자루를 꺼내더니 혀로 갈 날을 쓱 핥았다.“이 칼이 피 맛 안 본 지 오라거든. 오늘 네 피 좀 먹여줘야겠어.”섬뜩한 빛을 번뜩이는 칼날을 보니 나는 오히려 죽는 게 두렵지 않았다.나와 정태곤의 실력 차이가 너무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다.윤지은이 아침을 사 오자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그걸 본 윤지은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번 치료 방법이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나는 사모님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비록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도 사모님은 음식 드실 때 여전히 우아하고 단아했다. 살짝 슬픔을 띄고 있어 살짝 비극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내가 한창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윤지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나를 쏘아봤다. “짐승!”윤지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 욕에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제가 뭘 했다고 짐승이라는 거예요?”“아무튼 짐승 맞아. 이런 상황에서 훔쳐보기나 하고.”윤지은은 나를 째려봤다.난 그저 사모님을 몇 번 본 것뿐인데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너무 어이없었다.하지만 이러다 또 싸움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아침을 들고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웠다.식사를 마친 뒤 사모님은 자발적으로 나와 윤지은을 찾아왔다.“알고 있는 거 사실대로 다 알려줘요. 난 호섭 씨 사고에 대한 모든 사실이 알고 싶어요.”사모님은 너무 평온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때문에 나는 사모님 상태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사모님, 우선 맥 좀 짚어봐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알아야. 걱정할 거 없어요.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고, 호섭 씨가 떠난 사실을 받아들였어요.”“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호섭 씨처럼 착한 사람이 남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억울함을 풀어줄 거예요.”“난 강해져야 하고 호섭 씨처럼 용감해져야 해요. 그래야 호섭 씨가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요.”사모님은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그 말을 들으니 나도 코끝이 시큰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나는 얼른 마음의
나는 사모님 팔을 힘껏 잡으면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쳤다.“사모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사장님이 이런 사모님 보고 편히 가지 못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내 말이 사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사모님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윤지은은 내가 강제로 사모님을 자극했다며 나를 탓했다.“유미 지금 안 그래도 나약한 상태인데, 왜 그런 말을 직접 해?”나는 너무 난감했다.“누구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이 계속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상태가 점점 악화해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모님이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다.나도 사모님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모님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정말 사모님을 돕고 싶다면 모질어야 해요. 이럴 때 마음 약해지면 오히려 해치는 거예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내가 치료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진 사모님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사모님이 속사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속상해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사장님 사고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사고 낸 거예요. 사모님, 정신 차리고 우리와 함께 진실을 조사해요.”사모님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사모님을 깊은 슬픔에서 꺼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나는 말투를 부드럽게 하며 방금 한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사장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사모님도 사장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거 원하지 않죠? 우리 함께 진실을 알아내 사장님이 억울하게 죽임당하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사모님 상태는 살짝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지도 몰랐다.나는 사모님이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서둘러 사모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수호 씨, 이거 놔요. 난 남아서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사모님은 마구 버둥대며 소리쳤다.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아예 사모님을 어깨에 두러 업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곧바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벼랑 끝에 서 있는지라 조금만 실수하면 함께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사모님을 손날로 기절시켰다.내가 가드레일 안쪽으로 다시 넘어왔을 때 윤지은의 차가 마침 도착했다.“왜 그래?”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사모님을 차에 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지그 정신이 이상해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요. 방금 사장님이 춥다고 한다면서 옷 주러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계속 이럴 순 없어. 우리가 잠깐은 지켜볼 수 있지만 평생 지켜볼 순 없잖아.”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사모님께 사장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드리는 건 어때요?”“미쳤어? 이번 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또 자극하자고?”윤지은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환자가 가족을 잃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치료가 안 된다면 환자한테 희망을 줘야 한대요. 그 희망이 의학에서 말하는 기예요.”“그 기를 가진 환자가 음식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서서히 회복할 수 있대요.”“사장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모님과 함께 그 사건을 수사하는 거예요. 아마 사모님도 사장님이 죽은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장례식장 안을 모두 뒤져 봤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 조급하지 않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해졌다.사모님은 현재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서도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어 나는 문득 사모님 번호를 떠올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계속 긴 연결음만 들릴 뿐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 연결음이 꺼졌다.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사모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나 괜찮으니까 좀 내버려둬요.]사모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어디 있어요? 너무 걱정돼요.”[혼자 있고 싶어요.]“알아요, 아는데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사모님이 안전하다는 거 확인해야 해요.”전화 건너편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때 갑자기 차 경적음이 들려왔다.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장례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문득 사모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알려주시면 안 돼요?”사모님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대충 답을 얻은 나는 장례식장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사장님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았냐는 윤지은의 전화를 받은 나는 내 추측을 말했다.“아니요. 사모님 아마도 사장님 사고 난 곳에 있는 것 같아요.”[거긴 왜?]윤지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사장님 죽음이 수상해 직접 조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장님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 지금 가는 중이에요.”[그럼 먼저 건너가. 나 이따 바로 갈게.]나는 윤지은과 상의한 뒤 먼저 사장님이 사고 난 곳으로 향했다.사고가 난 곳은 절벽인데, 사모님은 마침 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