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누구더라?”백연우는 형수가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은 표정이었다.나도 형수가 백연우를 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그때 형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때 우리 같이 시험 쳤었잖아. 같이 붙었고. 그때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나 고태연, 기억 안 나?”“고태연, 이름이 익숙하네? 아, 기억났다. 너였구나? 그때 시험 합격했잖아, 왜 교편 잡지 않았어?”형수와 백연우는 함께 교사 시험을 봤었다. 하지만 형수가 결혼을 하며 교사가 되지 않았다.백연우는 아쉬운 듯 말했다.“그때 어렵게 붙었는데, 결혼을 왜 그렇게 일찍 했어? 그때 결혼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교수가 됐을 텐데.”지금 대학교 교수의 급여 대우는 무척 좋다. 게다가 아주 있어 보이는 직업이기도 하고.“나를 봐. 지금 학과장이잖아. 몇 년 뒤면 부교장도 문제없어.”형수는 그 말에 무척 부러워했다.백연우는 자유롭기도 하고 하고싶은 대로 마고 있다.그런데 형수는 결혼에 발목 잡히고 있다.게다가 중요한 건 모든 걸 버리고 결혼한 남자가 지금 이 모양이다.“부럽네. 내가 그때 급하게 결혼하지 않았으면 너처럼 됐을 텐데.”형수의 말투와 표정에는 부러움이 묻어 있었다.백연우는 웃으면서 형수의 손을 잡았다.“부러울 거 뭐 있어? 나 같은 생활이 부러우면 너도 하면 되지. 네 남편 차버려. 남자 없으면 고민도 없어져”백연우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옆에 있던 사모님이 결국 백연우의 팔을 잡아당겼다.“연우야, 헛소리 그만해.”사모님은 자기 친구가 말하는 데 거침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부부가 잘살고 있는데 왜 갈라놓으려고 부추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다.형수가 싱긋 웃으며 사모님을 바라봤다.“수호 씨 사장 사모님이죠? 수호 씨 평소 챙겨줘서 고마워요.”“참,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같이 식사하는 거 어때요?”형수도 열정적인 사람이고 두 사람과 대화가 잘 통해 바로 식사 초대에 응했다.때 백연우가 끼어들었다.“너무 좋다. 사람이 많으
나는 쪼르르 뒤따라갔지만 네 명의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형수와 백연우는 한창 얘기 중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얘기가 끊이질 않았다.애교 누나와 사모님도 마음이 잘 맞는지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오직 나만 쓸데없는 사람이 된 느낌이라 슬퍼졌다.이렇게 많은 미녀가 있는데 한 명도 붙잡지 못하다니, 내가 너무 쓸모없는 것 같았다.마음은 너무 괴로웠지만 나는 여전히 네 사람 뒤를 따라갔다.터치를 할 수 없다 해도, 그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우리는 함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형수는 편히 놀 수 있게 큰 룸 하나를 예약하였다.여자 네 명이 모여 웃고 떠드는 사이에 나는 도저히 한마디도 끼어들 수 없었다.얼마 뒤, 윤지은이 하정현과 함께 나타났다.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겨우 왔네요. 안 오면 나 외로워 죽을 뻔했어요.”윤지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한번 째려봤다.“외로운 게 얼마나 무서운 거야? 옆에 미녀들 끼고도 외롭다고 해?”어젯밤 일 때문인지 윤지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완전히 변했다.나는 최대한 윤지은과 싸우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이것 봐요. 다 저들끼리만 얘기하고, 난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한다니까요.”윤지은은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솔직히 쓸모없긴 하지.”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모두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때 윤지은이 자기 친구 하정현을 소개했다.“정현이라고, 내 고딩 시절 짝꿍. 나랑 사이 항상 좋았어.”하정현도 성격이 털털해 바로 무리에 어울렸다.여자 여섯 명은 모두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여성스럽고, 매력적이고, 섹시하고, 우아하고, 고상하고, 보이시하고 다정하고. 정말 다양하다.이렇게 몸매와 스타일이 다른 여섯 명의 여자가 함께 모여 있으니 이토록 눈이 즐거울 줄은 몰랐다.물론 한마디도 끼어들 수 없지만 이렇게 꽃 속에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속으로 엉큼한 상상도 할 수 있으니까.나는 몰래 여섯 명이 함께 있는 사진을 찍었다. 만약
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은 상냥하고 내성적이지만, 두 사람도 대화에 잘 끼어들었다.여섯 명은 가위바위보로 진 사람이 술을 마시는 벌칙을 했는데, 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은 운이 나빠 연속 몇 번이나 졌다.이대로 더 마시다가 일어나지도 못할까 봐, 나는 얼른 일어나서 말했다.“지금부터 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 술은 제가 마실게요.”“얼씨구, 이 정도로 마음 아파? 그럼 내 것까지 마실래?”백연우는 나를 보며 놀려댔다.나는 가슴팍을 팍팍 두드리며 말했다.“그래요, 술은 다 제가 마실게요.”윤지은은 나를 한번 째려봤다.“좋은 생각 하네. 흥 돋우려고 술 마시는 건데, 네가 다 마시면 우린 뭘 하고 놀아?”하정현도 옆에서 맞장구쳤다.“맞아. 이 술 한 병에 몇백만 원인데, 혼자 다 마시려고? 좋은 생각 하네.”‘이 둘은 참, 어쩜 내 마음도 모르고 그렇게 쪼잔한 사람으로 몰아? 내가 그렇게 잔 욕심 채우는 사람으로 보이나?”‘난 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이 마음 아파서 그런 거라고.’“두 사람은 마시고 싶으면 마셔요. 두 사람은 대신 안 마셔줄 테니까.”다들 하하호호 웃으며 얘기하느라 분위기는 전례 없이 좋았다.나는 애교 누나와 유미 사장님한테 끌려 가운데 앉았다.두 사람 주량은 모두 보통인데, 연속 몇 번 져서 술을 연달아 마셔서 그런지 얼굴이 발그스름했다.내가 나타난 건 두 사람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다.“수호 씨, 아예 수호 씨가 가위바위보까지 해요. 우리가 가위바위보도 못해서요.”애교 누나가 말했다.나는 유미 사모님을 바라봤다.“사모님은요? 제가 대신 가위바위보까지 할까요?”사모님은 얼굴이 발그스름해서 살짝 눈이 풀려 있었다.“그래요. 나 가위바위보 못해요.”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의 말에 나는 마치 성지를 바른 것처럼 아예 소매까지 걷어 올렸다.“좋아요. 그럼 제가 대신 이겨줄게요.”나는 가위바위보는 자신 있었다.그러니 누나들과 하면 꼭 이겨서 술을 먹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그러자 백연우가 언짢았는지 바로 나
“흥, 나를 취하게 해서 뭐 하려고? 엉큼하네, 아주.”나는 계속해서 형수와 가위바위보를 했다.형수가 또 연속 두 번 지니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때문에 다음 몇 판은 조금 봐줬다.하지만 이미 적지 않게 취한 형수는 머리가 어지러웠는지 헤롱헤롱하더니 아예 테이블에 엎드려 일어나지 못했다.백연우가 몇 번이고 불렀지만 형수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안돼. 나 머리 어지러워. 조금만 쉴게.”“너도 참, 할 줄 아는 게 뭐야? 내가 할게.”백연우는 계속해서 나를 상대하려고 앞장섰다.그때 윤지은이 앞에 막아섰다.“너도 쉬어. 내가 할게.”윤지은은 여전히 말만 사납게 했지 마음은 순두부나 다름없었다.겉으로는 백연우의 주량이 별로면서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고 투덜댔지만, 속으로는 친구를 걱정했다.백연우는 연약하게 윤지은한테 기댔다.“역시 우리 지은이가 제일 좋아. 네가 저 자식 이기면, 내가 너 더 사랑해 줄게.”하정현이 얼른 옆에서 맞장구쳤다.“그러면 걱정 붙들어 메. 우리 지은이 주량은 아무도 못 따라오니까. 심지어 쟤 의술보다 더 세.”“그래? 그건 몰랐네. 그럼 어디 한번 보여줘 봐.”백연우는 참지 못하고 부추겼다.백연우는 그걸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일전에 안철수의 신분으로 몇 번 술을 마셔 봤으니.그때는 그저 그랬던 것 같은데, 하정현은 대체 뭘 보고 윤지은이 술이 세다고 하는지 모르겠다.윤지은의 가위바위보 실력은 확실히 다른 사람보다 한 수 위였다.때문에 우리는 엎치락뒤치락 한 잔씩 마시며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술 한 병을 비웠다.하정현이 옆에서 얼른 새 술을 따면서 소리쳤다.“자, 계속 해. 두 사람 오늘 반드시 승부를 갈라야 해.”나도 이제는 머리가 어지러워 났다. 어쨌든 방금 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 대신 많이 마셨으니까.그때 조금 정신을 차린 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이 나를 도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윤지은도 하정현이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고, 백연우가 가끔 거들어 주었다
‘내가 누구랑 뭘 한 거지?’‘대체 누구야?’나는 정신이 혼미해 아무 일도 기억 나지 않았다. 심지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예 몰랐다.나는 머리까지 내리치며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젠장.”순간 어이가 없었다.‘내가 가장 늦게 깨어났으니, 누나들이 내 부끄러운 모습을 모두 봤다는 거 아닌가?’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순간 민망해서 얼굴이 시뻘겋게 닳아 올랐다.전에 나랑 몸을 섞은 여자들과 그랬다면 모를까, 룸에는 유미 사모님과 하정현도 있었다.특히 사모님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는 분이 일어나자마자 내가 벌거벗고 있는 걸 봤으면 분명 나를 경멸할 거다.‘젠장, 사모님 마음속 내 이미지가 망가져 버렸네.’나는 후회가 밀려왔다.‘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가지고.’게다가 문제는 정신이 몽롱해 상대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나는 자신을 탓하며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그러다가 결국 애교 누나한테 전화하기로 했다.전화를 건 지 한참 뒤 애교 누나가 전화를 받았다.누나가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다급히 물었다.“누나, 다들 어디 있어요? 왜 룸에 저밖에 없어요?”애교 누나의 목소리는 조금 이상했다.[수호 씨, 우리 술에 취한 뒤 대체 뭘 했어요?]“저, 저도 기억 안 나요. 저도 취했어요. 애교 누나는 일찍 깨어났어요? 아니면 늦게 깨어났어요? 혹시 제 추태를 봤어요?”애교 누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조금 늦게 깨어났어요. 내가 깨어났을 때, 나머지 사람들이 다 수호 씨를 둘러싸고 보고 있었어요.]“네?”‘이건 뭔 망신이래?’‘나를 둘러싼 채 보고 있었다고? 바지도 안 입고 있는 모습을?’‘젱장...’그 장면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못 볼 꼴 봤다고 생각하겠지?’나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었다.“누나, 다들 무슨 반응이었어요?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상대가 누구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 후회돼 미치겠어요.”[모르겠어요. 다들 반응은 정상이었어요. 윤지은
나는 너무 어이없어서 벼랑 끝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애교 누나가 나를 위로했다.[수호 씨, 너무 난처해하지 마요. 이미 벌어진 일인데, 이제 와서 그런다고 소용없잖아요. 그리고 우리 정말 신경 안 써요. 이제 다 친해져서 서로 잘 알잖아요.]말은 그렇다지만, 난처한 건 나다. 게다가 그런 장면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이제 20대인데, 그렇게 망신당하면 앞으로 누나들을 어떻게 봐야하지?’“애교 누나, 여기 와서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 저 지금 너무 괴로워요.”애교 누나는 나를 무척 안쓰러워했다.[그래요, 기다려요. 바로 갈게요...][정수호, 깨어났어?]애교 누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 건너편에서 백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핸드폰을 던질 뻔했다.[내 전화 끊으려고 했지? 경호하는데, 전화 끊으면 아까 룸안에서 있었던 일 올릴 거야.]그 말에 나는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뭐라고요? 설마 사진도 찍었어요?”나는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내가 그렇게 벗고 있는 걸 찍었다고?’백연우는 아주 으쓱한 듯 말했다.[맞아. 그것도 여러 장. 보겠다면 보내줄 게.]“미쳤어요? 그런 사진은 왜 찍어요?”나는 너무 화가 나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백연우는 여전히 큰 소리로 웃어댔다.[재밌으니까. 그런 모습 처음 보는데, 바로 사진 찍어 저장해야 하지 않겠어? 그런데 이렇게 빨리 쓸모가 있을 줄 몰랐네. 난 역시 선견지명이 있다니까.]‘당시는 선견지명이 있는지 몰라도 나는? 내 기분은 생각해 봤냐고?’나는 화가 났지만 감히 그 화를 표출하지 못하고 전화에 대고 아부했다.“백 쌤, 대체 왜 그래요? 제 목소리 좀 들어봐요. 저 지금 울 것 같다고요, 제발 사진 좀 지워줘요.”[에이, 그럴 필요 없어. 그 사진은 내가 혼자 감상할 거야. 절대 외부에 노출하지 않아. 앞으로 내 말 잘 들어. 참, 누나들 지금 노래방에 있는데, 올래?]“싫어요!”나는 바로 거절했다.이 순간 나
나는 그 사진을 모두 삭제하고 싶었지만 권한이 없었다.하지만 그대로 두자니 또 너무 괴로웠다.게다가 백연우는 한번 당해보라는 듯 계속해서 사진을 전송했다.그걸 보고 있으니 마음이 더 괴로웠다.이런 느낌은 마치 벌거벗은 채 길거리를 활보하는 느낌이었다.나는 아까 전 내 뺨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왜 술은 그렇게 많이 마셔가지고 이런 흑역사를 남겼는지?나는 얼른 백연우에게 전화해 애원하듯 말했다.“누나, 잘못했어요. 바로 갈게요.”[흥, 진작 그럴 것이지. 늦었어.]백연우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나는 결국 아부하듯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또 뭘 원해요?”[이따가 오면, 우리 앞에서 스트립쇼 보여줘.]백연우는 아예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옆에서 하정현의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건너편 상황을 볼 수 없었지만, 모두 나를 웃음거리로 삼고 있을 모습이 상상되었다.결국 나는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좋아요. 하라는 대로 할 게요. 약점 잡혔는데 제가 별 수 있겠어요?”전화를 끊은 나는 얼른 용모를 정리하고 큰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별수 없이 약속 장소로 향했다.이런 상황에서 내가 손해 본 게 한두 번도 아니다. 때문에 나는 가는 내내 다시는 약점 잡히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이러고도 또 약점 잡히면 그때는 당해도 싸.’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노래방에 도착했다.누나들은 아주 큰 룸을 예약했다. 게다가 지금은 유미 사모님과 형수가 노래하고 있었다.백연우와 하성현은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내가 들어오자마자 싱긋 웃으며 바로 다가왔다.그러더니 나를 놀려대며 스킨십했다.그 순간 나쁜 짓을 강요당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느껴버렸다. 내가 너무 나약하고 작아진 기분이었다.“백 쌤, 하성현 씨, 그만 좀 하면 안 돼요? 다른 사람도 있는데.”나는 말하면서 애교 누나 쪽으로 달려갔다. 누나가 나를 구해줬으면 하는 마음에.애교 누나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나를 등 뒤에 숨기며 감싸주었다.“됐어요. 수호
나는 제 발이 저려 백연우의 눈을 피한 채 거짓말했다.“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저도 취해서 아무 기억도 안 나요.”“정말 기억 안 나? 아니면 안 나는 척 연기하는 거야?”백연우는 나를 꿰뚫어 볼 것 같은 눈빛으로 바라봤다.나는 시종일관 백연우의 눈을 피했다.사람이 잘못을 하면 정말 남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게 맞는 듯하다.그렇지 않고서야 상대가 거짓말하는지 알고 싶으면 눈을 보라고 하겠는가?눈은 정말 신기한 인체 기관인 것 같다. 사람 마음을 그대로 팔아버리니까.“정말이에요.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나는 극구 부인했다.그때 백연우가 윤지은을 끌고 왔다.“지은아, 네가 말해 봐.”‘윤지은은 왜 끌어왔지? 대체 뭘 말하라는 거지?’내가 의아해할 때, 윤지은이 폭탄을 던져 버렸다.“내가 깨어났을 때, 몸 위에 진득한 액체가 있던데. 그 짓을 했다는 증거지. 남자는 술에 취했을 때 자극을 받지 않고는 절대 뺄 수 없는데, 그랬다는 건 여기 있는 누군가와 했다는 거고.”윤지은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공개 처형했다.나는 당장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이건 어쩔 수 없다. 원래 부끄러움 많이 타는 성격인데, 누나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으니 너무 괴로웠다.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하지만 백연우가 강제로 내 손을 떼어내며 사납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라니까 얼굴은 왜 가려? 그곳도 봤는데, 부끄러울 거 뭐 있어? 설마 얼굴 보이는 게 그곳 노출한 것보다 더 부끄러워?”“그만 말해요, 제발.”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계속 말할 건데? 묻고 있잖아. 대체 누구랑 했냐고?”“정말 몰라요. 그때 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했어요. 그저 누군가 제 위에 올라타 입 맞춘 것밖에는...”내 말에 모든 누나들이 내 주위에 둘러싸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는 것처럼 나를 바라봤다.갑자기 누나들이 몰려들자 나는 깜짝 놀랐다.이대로 도망치고 싶었으나, 어디로 도망칠지 몰랐다.그때 형수가 물었다.“수호 씨, 정말 누구랑 한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주해진을 바라봤다.“왜 이렇게 쉽게 돈을 주는 거지?”주해진이 오늘 이 사달을 벌이느라 분명 적지 않은 돈을 썼을 텐데, 나한테 2천만 원 가까이 되는 돈까지 배상하니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심히 의심됐다.“이 전에는 이대로 넘어가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 댔는데, 두 사람 실력을 보니 승복했거든. 두 사람 말대로 나도 젊을 때는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굴렀는데, 한 번도 두 사람처럼 죽기 살기로 싸우는 사람을 못 봤거든.”사실 주해진은 말을 아꼈다. 그가 가장 두려운 건 우리의 믿기지 않는 전투력이 아니라 궁지에 몰렸으면서 상황을 역전한 거였다. 그거야말로 가장 두려운 거였으니까.주해진은 우리를 맹수라고 느꼈다. 그것도 싸울수록 더 미쳐 날뛰는 맹수. 심지어 궁지로 몰아넣으면 넣을수록 우리는 오히려 피에 굶주린 모습을 드러냈다.주해진은 제 체면을 회복하고 싶어 그동안 승복하지 않은 거였는데, 우리가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존재라는 걸 알았으니 더 이상 저항할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이미 손을 씻었고, 이제는 그저 장사를 하며 지내기에 어렵게 얻은 걸 망치고 싶지 않았다.나는 여전히 반신반의했지만 민우는 나더러 먼저 돈을 받으라고 계속 눈을 깜박거렸다.나도 민우의 뜻을 알고 있었다. 이걸 나중에 우리의 사업 자금에 보태자는 뜻이었다. 1800만 원이나 되는 돈을 보니 나도 확실히 마음이 동해 결국은 말없이 받았다. 주해진은 김진호와 안명훈더러 우리에게 사과하게 했고, 두 사람은 찍소리 못하고 순순히 사과했다.떠나갈 때 주해진은 제 차를 나에게 주면서 몰고 가라고 했다.그 순간 나는 오히려 경계심이 곤두섰다.“돈도 배상했으면서 차는 왜 주는 거야? 설마 또 해코지하려고?”주해진은 호탕하게 웃었다.“경계심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그냥 친구 삼고 싶어서 주는 거야.”“그런데 난 그쪽이랑 친구하기 싫은데.”나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주해진은 여전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고. 친
김진호는 속이 좁고 질투심이 강하지만 실력은 별로 없다. 특히 일이 터지면 항상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난다.그런데 주해진이 자기를 내밀자 안명훈보다 더 겁을 먹었다.“싫어요... 안 돼요... 해진 형, 저 자식 차를 망가뜨리라고 한 건 형이잖아요. 저더러 형 대신 뒤집어쓰게 하면 안 되죠.”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김진호는 제가 한 짓에 책임지지 못하고 주해진의 체면을 바닥에 짓밟았다.주해진은 너무 쪽팔려서 김진호의 뺨을 내리치면서 버럭 소리쳤다.“사과하라면 해. 어디서 말이 그렇게 많아? 젠장. 내가 널 돕지 않았다면 수호 동생한테 미움 살 일이 있었겠어?”한창 화를 내고 있던 나는 그 말에 순간 멍해졌다.‘수호 동생? 지금 나를 말하나?’‘젠장, 내가 언제 제 동생이 됐다는 거야?’“어디서 친한 척이야? 너희 셋 다 내려와.”나는 차를 또다시 쾅쾅 내리쳤다.민우 역시 차 위에서 나를 협조해 주었다.승합차가 우리 때문에 완전히 뒤집힐 지경이 되자 주해진은 우리와 연맹을 맺으려는 듯 은근슬쩍 나를 회유했다.“수호 동생, 그만해. 내려갈게. 우리 사이에는 원한이 없잖아. 수호 동생이랑 원한 있는 건 김진호잖아. 그리고 안명훈 저 자식도 자기 여자 친구더러 동생 친구 꼬시라고 했어. 저 둘 중에 좋은 놈 하나 없어. 내가 지금 바로 이 두 놈 내려 보내겠으니까 마음대로 처리해.”주해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정말로 김진호와 안명훈을 끌어내 앞에 내팽개쳤다.내 분노는 사실 김진호와 안명훈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장 큰 원인은 내 차가 박살 난 것 때문이다. 그리고 주범은 바로 주해진이다.때문에 나는 화가 잔뜩 나서 주해진을 향해 파이프를 휘둘렀다.“이 자식들 빚은 내가 천천히 받을 거야. 하지만 내 차를 망가뜨린 건 어쩔 건데?”주해진은 고개를 돌려 내 차를 흘긋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배상할 수 있는 저렴한 차라 안도한 듯했다.“수호 동생, 저 차는 1600만 정도 하지? 내가 나중에 새 차 하나 뽑아줄게.”주해진이
사실 오늘 안명훈은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주해진이 기어코 자기 위엄을 보여주겠다고 불러냈다.그런데 주해진의 위엄은 못 보고 오히려 나와 민우의 미친 모습만 보게 된 거다. 그러니 혼비백산이 되지 않을 리가 있나?안명훈은 필사적으로 차 문을 흔들었다.“나 내릴래. 내려줘...”주해진은 안명훈의 뺨을 후려갈기더니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부었다.“사내자식이 내리긴 어딜 내려? 네가 문을 내리면 저놈들이 올라올 거잖아. 문 열면 안 돼. 얌전히 앉아 있어. 설마 저 자식이 문을 부수겠어?”펑!나는 승합차를 향해 쇠 파이프를 세게 휘둘렀다.그러면서 속으로는 방금 전의 울분을 토해냈다.‘내 자식 같은 새 차, 아직 할부도 안 끝나 얼마나 애지중지했는데. 네놈들 때문에 고물이 됐잖아.’나는 승합차를 내리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나와. 차 안에 숨어 있는 게 겁쟁이랑 뭐가 달라?”차 안 세 사람 눈에 나는 충혈되어 시뻘게진 눈을 가진 분노한 맹수나 다름없었을 거다.안명훈은 완전히 겁을 먹어 나한테 끊임없이 간청했다.“오늘 밤 일은 나랑 상관없어... 제발 살려줘. 제발...”주해진도 솔직히 속으로는 무서웠지만 안명훈이 저 하나 살려고 자신을 배신한 걸 보자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버렸다.안명훈은 그 힘에 못 이겨 옆으로 벌러덩 굴러 넘어졌다.그때, 마침 유리창을 깨뜨린 나는 쇠 파이프로 주해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셋 셀게, 당장 내려. 안 그러면 죽이는 수가 있어.”주해진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럴 필요까지 있어? 내가 사람을 불러 모으긴 했지만 무기는 안 들었잖아. 게다가 저놈들은 겁을 먹고 이미 도망쳤어. 너희 둘도 크게 다치지 않았으먼서 꼭 미친 짐승처럼 나를 그렇게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겠어?”나는 이를 악물었다.“난 짐승처럼 네 놈을 물고 늘어지는 거로 안 끝나. 아주 뼈도 안 남기고 씹어 먹을 거야. 내가 얼마나 어렵게 산 차인데, 평소 아까워서 조심조심 다뤘는데, 네 놈 때문에 폐차하게 생겼잖아. 내 차 물어
나는 여전히 손에 든 쇠 파이프를 필사적으로 휘둘렀다. 분명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수도 없었다.민우가 말한 적이 있는데, 싸울 때 가장 무서운 건 싸우기 전부터 겁을 먹는 것이라고 했다.하지만 한참 싸우다 보니 나는 점점 힘에 부쳤다. 놈들 인원수가 너무 많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그렇다고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인체에는 자극을 받으면 잠재력을 자극하는 혈 자리가 있는데, 그 혈 자리가 자극을 받으면 잠재력이 폭발했다가 나중에 한동안은 몸이 나른해진다.하지만 이 상화에서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에 나는 고민 없이 혈 자리를 눌렀다. 그 순간 온몸에 힘이 솟아나면서 내가 마치 거인이 된 느낌이었다.“야! 다 죽었어!”나는 고함을 지르는 동시에 쇠 파이프를 휘두르면서 달려갔다.나를 에워싸고 있던 놈들은 내가 더 이상 전투력이 없다는 걸 보고 모두 긴장을 푼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미친 것처럼 놈들의 코뼈를 하나씩 부러뜨렸다. 심지어 손이 무척 매웠다.나는 피가 들끓어 끊임없는 힘이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매번 파이프를 휘두를 때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한방에 놈들 뼈를 부러뜨릴 수 있다는 것에 흥분됐다.‘만약 동준 형님이 이 모습을 본다면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여기지 않을까?’싸울수록 피가 끓고 힘이 솟아났다. 놈들은 심지어 나를 보자 연신 뒷걸음쳤다.옆에 있던 민우마저 나를 보면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물었다.“수호야, 너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난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나는 혈 자리를 가리켰다.그러자 민우는 바로 눈치챘다.민우 역시 의학을 전공한 지라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곧이어 민우 역시 스스로 한 대 치더니 갑자기 피가 솟구치는 것처럼 흥분했다.“하하하, 나도 다시 회복했어. 너희들 죽었어.”우리는 서로 협조하면서 놈들한테 달려가 퍽퍽, 주먹을 날렸다.우리를 끝장내버리겠다고 큰소리치던 놈
전에는 누가 와서 소란을 피울까 봐 민우더러 나와 함께 가게에서 지내자고 했지만, 지금 사장님 댁에 머물고 있는데 민우까지 데려올 수는 없었다. 때문에 뭐든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민우를 집에 데려다 두는 길에 그는 나에게 함께 사장님 댁에 있어 달라냐며 물었다. 그러면 서로 보살필 사람이 있다면서.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나도 그걸 생각해 보지 않은 적 없어. 하지만 사장님을 돌보려고 그 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너까지 데려가면 이상하잖아.”“난 그 개자식들이 또 너한테 무슨 짓 할까 봐 그러지.”“나도 무서워. 하지만 이미 준비해 뒀어.”나는 의자 밑에서 도구 몇 개를 꺼냈다.민우는 그 도구들을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말했다.“이 도구들은 조금 도움이 될 뿐이야. 그래도 내가 너한테 가르쳐준 방법을 사용해.”민우는 말하면서 손을 움켜쥐는 동작을 했다.그 동작에 나는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그 방법 확실히 좋더라...”우리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백미러에 언뜻거리는 차 한 대가 비쳤다.무의식적으로 뒤에 따라붙은 사람이 운전할 줄 모른다며 투덜거리던 나는 갑자기 이상한 낌새를 챘다. 그도 그럴 게, 뒤에서 달려오는 차는 속도가 아주 빨랐는데 마치 나를 강제로 세울 것처럼 굴었으니까.“잘 앉아.”나는 불안한 예감에 다급히 액셀을 밟아 속도를 냈다.다만 내 차의 유일한 단점은 속도를 너무 빨리 낼 수 없다는 거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뒤 차에 따라잡혔다.놈들은 내 차를 강제로 멈추게 할 작정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 차량은 승합차였는데, 그런 승합차는 용량이 커 적어도 열댓 명을 태울 수 있었다.만약 차에서 열 몇 명이 우르르 내리면 나와 민우 둘이 대처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때문에 나는 액셀을 밟았다. 하지만 승합차 두 대는 좌우에서 협공하며 내 차를 가운데 몰아 끼긱끼긱, 하며 긁히는 소리가 났다. 분명 차가 내는 소리였지만 내 살점이 뜯겨나가는 기분이었다.아직 차 할
내가 한창 망설이고 있을 때 사장님도 말을 보탰다.“수호 씨, 남아서 좀 도와줘. 우리 마누라가 요즘 너무 힘들어서 그래. 어릴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이런 고생 언제 해 봤겠어? 이것 봐, 피곤해하는 거 보이지? 나도 솔직히 마음 아파.”사장님과 사모님이 모두 나를 남으라고 설득하는 상황이라 나도 더 이상 거절하기 곤란했다.“그래요. 제가 남아서 도와드릴게요.”사장님이 드시고 사용해야 하는 약이 너무 많아 확실히 번거롭긴 하다. 때문에 나도 사모님 혼자 사장님을 케어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됐다.사모님은 내 말에 이내 환한 표정을 지었다.“수호 씨는 아무것도 가져올 필요 없어요. 여기 모두 있으니까. 전처럼 계속 객실에서 자면 돼요. 그곳 채광이 좋고 공기도 좋아요...”사모님은 내가 이곳에서 지내는 데 불편해할까 봐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았다.사장님 내외가 사는 집은 모두 고급 가구를 사용했는데, 내가 이곳에 남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런 걸 누려볼 기회가 어디 있을까?사장님 내외는 나한테 너무 잘해줘서 내가 다 미안할 따름이었다.사장님 몸은 우선 한약으로 며칠간 보양해야 하지만 약을 다 먹으면 사실 힐 것도 없어 나는 가게 일을 돌볼 수 있었다.요 며칠간 주해진은 소란 피우러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대로 포기했다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동료들한테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한편 주해진은 그날 도망치듯 가게를 떠난 뒤 마음이 계속 안 좋았다.하지만 최근 일손을 구해봤지만 누구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첫째 이유는 주해진이 깡패라 정계와 연이 닿는 지인이 적었고, 두 번째 이유는 사촌 형이 다시는 화인당을 다시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주해진은 입으로는 싫다고 했지만 요 며칠간 그래도 제 분수를 지켰다. 다만 김진호 병문안을 간 뒤, 마음이 또 바뀌었다.김진호는 나를 여자 등에 빨대 꽂고 출세한 놈으로 말하면서, 깡패인 주해진이 나 같은 등신 하나 해결하지 못한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웃음거리
어르신도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너도 잘했어. 처방한 게 거의 다 맞췄으니까. 새내기 같지가 않아. 네 할아버지한테서 많이 배웠나 보네?”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럭저럭요. 그런데 그때는 너무 어려 할아버지의 모든 재능을 배우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에요.”“괜찮아. 앞으로 내가 네 할아버지니까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물어봐.”나는 얼른 감사를 표했다.어르신과 약처방을 확인한 뒤, 나는 화인당에 가 이틀 치 약을 짓고 동료들에게 사장님이 퇴원했다는 사실을 말했다.다들 사장님이 다 나은 줄 알고 기뻐하는 눈치였다. 특히 민우는 슬그머니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사장님이 돌아오면 우리 따로 나가는 거지?”나는 얼른 민우의 말을 잘랐다.“사장님이 돌아와도 이런 말은 급하게 하면 안 돼. 화인당이 안정되고 가게에 일손이 부족하지 않을 때 떠날 수 있어. 우리가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건 자신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지만, 화인당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되지. 사장님이 우리 둘한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는 내가 말 안 해도 알잖아.”민우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네. 앞으로 절대 함부로 말 안 할게.”“참, 요즘 태진 선배는 어때? 가게에서 본 적 있어?”나는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모태진이 오늘 없다는 걸 발견했다.내 말에 민우가 대답했다.“누가 알겠어? 또 그깟 일 때문에 가게에 피해 갈까 봐 안 나왔겠지. 상관하지 마. 다 큰 어른이 본인 몸 하나 건사 못 하겠어? 수호야, 아직은 따로 나가는 말은 안 할게. 하지만 천수당을 관찰하는 건 괜찮지?”“관찰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함부로 하지 마.”나는 신신당부했다.그러자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뜻을 내비쳤다.나는 약을 가진 후 다시 사모님 댁으로 돌아갔다.이 약 일부는 목욕용이고 일부는 마시는 약이라 나는 위애 상세하게 적어 따로 분리했다. 그리고 먹는 약은 모두 달여 진공 포장한 뒤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이렇게 하면 마실 때 데
윤지은은 보기 드물게 이번만큼은 내 편에 섰다.“동의하기 싫어도 동의해야지. 내가 진작 서약이 부작용이 있고 중독성이 커서, 장기적으로 이렇게 치료하면 환자가 오히려 탈탈 털릴 거라고 말했는데. 유미한테는 내가 말할게. 걔네 부모님은 아무튼 B시에 계시잖아? 한동안 돌아올 수 없으니까 당분간 비밀로 하지 뭐.”윤지은이 전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 건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서의학 의사면서 서의학이 안 좋다고 하면 분명 안 좋은 영향이 있을 거다.하지만 친구 남편인 정호섭의 생명이 달린 일이니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친구 임유미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만약 정호섭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임유미는 어떡하라고?나는 사장님을 바라봤다.“그래도 되겠어요?”사장님은 효심이 강한 분이라 장인 장모를 속이는 게 안 좋다고 여겼다. 게다가 두 분이 지금껏 사장님을 길러왔으니.하지만 사장님이 고민하는 동안 윤지은은 이미 사장님 대신 결론을 내렸다.“뭐 그렇게 생각할 게 많아요? 두 분한테 말하면 절대 동의 안 할 거예요. 이 일은 내가 말한 대로 해요. 나도 한의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라 파악이 없으면 이런 말 안 해요.”나와 사장님 모두 머뭇거렸는데, 윤지은이 이런 태도로 나오니 오히려 감화되었다.나는 윤지은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뭐든 엄격하고 신속하게 하는 모습은 내가 따라 배울 점이었다.윤지은은 나더러 병원에 남아 사장님을 돌보게 하고 본인은 유미 사모님을 모셔 오면서 한의 치료 방법에 대해 말해주겠다고 했다.그사이 나는 사장님이 아침 식사를 드시는 걸 도와드렸지만, 사장님은 입맛이 없다면서 조금밖에 드시지 않았다.요즘 매일 많은 양의 약을 먹어 위장이 망가져 음식을 먹는 것조차 무리였다.이렇게 부작용이 큰 게 바로 서양의학의 가장 큰 단점이다.나도 사장님을 강요하지 않았다.환자가 입맛이 없다는데 억지로 먹게 하면 오히려 위장의 부담을 더해주기 때문이다.나는 따뜻한 물을 받아와 사장님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었다.
어르신은 내가 보인 자신감에 매우 만족해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을 귀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침술 하기 전에 모든 서약을 끊고 한동안 몸보신해야 해. 지금 너의 사장님 몸은 너무 나약해서 기혈이 거의 다 사라진 거나 다름없어. 이 상태로 침술 할 수 없어. 이 일은 먼저 환자 가족들과 상의하고 동의를 구한 뒤 진행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때마침 윤지은이 회진하러 와서 나는 그녀더러 사장님을 잠시 봐달라고 하고는 어르신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됐어. 데려다 줄 필요 없어. 이 부근에 마친 공원이 있으니 나도 좀 산책하다가 택시 타고 가면 돼. 네 사장님 상황은 서둘러서 가족과 상의해. 더 지체되면 천지신명이 와도 어쩔 수 없어.”어르신의 긴박한 말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할아버지.”나는 진심으로 어르신께 감사했다. 90세가 넘는 분이 내 전화 한 통에 아무 이유 없이 도와준 거니까.이 은혜는 꼭 마음에 새길 거다.어르신은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사람을 구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이건 나를 위해 덕을 쌓는 거야. 너도 얼른 가 봐. 이 일은 지체하면 안 된다는 거 잊지 말고.”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르신이 뒤돌아 떠난 뒤에야 나는 병실로 돌아갔다.다른 사람은 이미 떠나고 윤지은만 병실에 남아 있었다.나는 얼른 윤지은과 사장님께 방금 전 상황을 말씀드렸다.“수호 씨, 한의학 치료법으로 정말 내 병을 완화할 수 있어?”사장님은 나를 조금 믿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한번 확인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설명했다.“아까 보신 분이 우리 마을에서 엄청 유명한 명의세요. 젊을 때 저희 할아버지랑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 병을 치료해주셔서 엄청 유명해요. 저도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건데 정말 방법이 있다더라고요.”“사장님이 입원한 뒤 몸 상태가 확실히 점점 나빠지셨잖아요. 이 부분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사장님도 느끼셨을 거예요. 서약은 비록 효과는 빠르지만 부작용도 커요. 사장님 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