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래요. 다 소여정 씨 잘못이에요. 하지만 친구잖아요. 만약 소여정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슬퍼하지 않을 수 있어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었으니까.입으로는 소여정을 걱정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지만, 윤지은은 사실 누구보다 소여정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저 그걸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내는 게 싫을 뿐이지.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표정으로 떠나갔다.형수와 애교 누나 얼굴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나는 얼른 다가가 두 사람을 꼭 끌어안았다.“이제 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애교 누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수호 씨, 너무 무서워요...”“알아요. 다 이해해요.”형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을 보면 형수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아 수 있었다.나는 두 사람을 침대에 눕혀 재웠다.시간은 벌써 새벽 4시를 가리켰다.나도 피곤하고 졸리고 온몸이 아팠다. 하지만 자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아까 겪은 굴욕적인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그 기억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놈들에게 제압당해 도살장에 끌려간 개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게 너무 엿 같고 기분이 더러웠다.나는 속으로 다시는 이런 경험을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더 중요한 건, 내 품에 있는 두 사람이 더 이상 다치는 꼴을 보지 않을 거다.나는 강해지고 커질 거다.양동준처럼 독하고 주먹도 세지고 싶다.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어젯밤에 늦게 잔 탓에, 우리는 이튿날 11시가 넘어 깨어났다.게다가 어제는 몰랐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내 몸 군데군데 퍼렇게 멍이들어 있었다.형수는 이 상처들이 마음 아프면서도 우스운 모양이었다.“수호 씨, 온몸에 멍든 것 좀 봐요. 마음 아파 죽겠어요.”울고 싶은데 한편으로 웃고 있는 형수의 모습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형수, 지금 제 모습 마음에 들어요?”“풉...”형수는 내 말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무의식적
“백연우라고, 우리 사모님 친구분이에요.”나는 형수와 애교 누나한테 백연우를 소개하고 문을 열었다.백연우는 들어오자마자 내 몸을 더듬거렸다.“어디 다쳤어? 기능 상실한 건 아니지? 움직일 수 있어?”유미 사모님도 백연우와 함께 왔다.게다가 형수와 애교 누나도 있는데, 백연우가 이렇게 내 몸을 만지작대고 있으니 너무 어색하고 불편했다.나는 다급히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저 괜찮아요. 그저 가벼운 외상이에요.”나는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형수와 애교 누나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나는 다들 뭔가 알아챌까 봐 너무 당황했다.하지만 백연우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 듯 다시 나에게 달려왔다.“가벼운 외상은 무슨? 다친 것 좀 봐, 얼룩 개가 따로 없네. 못생겨 죽겠어. 그리고, 누구한테 맞았냐니까? 내가 그 자식 껍질을 벗겨버릴 거야.”“그럴 필요 없어요. 윤지은 씨가 그 사람 처리했으니까요.”그런데 백연우와 사모님도 왔는데 윤지은이 오지 않은 게 너무 이상했다.‘뭐 하러 갔지?’나는 결국 의아한 걸 물었다.“그런데 윤지은 씨는 어디 있어요? 왜 같이 안 왔어요?”“누가 알아? 일 있다고 안 왔어. 그래서 우리 둘만 왔어.”나는 사모님을 바라봤다. 사모님도 걱정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수호 씨, 미안해요. 내가 잘 챙겼어야 했는데.”사모님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는 너무 놀라 바로 대답했다.“사모님이 왜 미안해요?”“나 때문에 여기 왔는데, 그런 일을 당했으니 미안해요.”나는 더 쑥스러웠다.소여정의 돈을 받고 운전기사 노릇 좀 하다가 오히려 이런 곳에서 먹고 노는 게 나에게는 더 큰 이익이다.때문에 나는 다급히 말했다.“사모님,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어젯밤 일은 그냥 사고예요. 누가 그런 일이 있을 지 알았겠어요? 그래도 마지막에 문제가 해결되었잖아요. 저도 고작 외상 조금 있는 것뿐 아무 일도 없어요.”내가 말할 때 백연우가 형수와 애교 누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저 둘은 누구야?”“
“응? 누구더라?”백연우는 형수가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은 표정이었다.나도 형수가 백연우를 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그때 형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때 우리 같이 시험 쳤었잖아. 같이 붙었고. 그때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나 고태연, 기억 안 나?”“고태연, 이름이 익숙하네? 아, 기억났다. 너였구나? 그때 시험 합격했잖아, 왜 교편 잡지 않았어?”형수와 백연우는 함께 교사 시험을 봤었다. 하지만 형수가 결혼을 하며 교사가 되지 않았다.백연우는 아쉬운 듯 말했다.“그때 어렵게 붙었는데, 결혼을 왜 그렇게 일찍 했어? 그때 결혼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교수가 됐을 텐데.”지금 대학교 교수의 급여 대우는 무척 좋다. 게다가 아주 있어 보이는 직업이기도 하고.“나를 봐. 지금 학과장이잖아. 몇 년 뒤면 부교장도 문제없어.”형수는 그 말에 무척 부러워했다.백연우는 자유롭기도 하고 하고싶은 대로 마고 있다.그런데 형수는 결혼에 발목 잡히고 있다.게다가 중요한 건 모든 걸 버리고 결혼한 남자가 지금 이 모양이다.“부럽네. 내가 그때 급하게 결혼하지 않았으면 너처럼 됐을 텐데.”형수의 말투와 표정에는 부러움이 묻어 있었다.백연우는 웃으면서 형수의 손을 잡았다.“부러울 거 뭐 있어? 나 같은 생활이 부러우면 너도 하면 되지. 네 남편 차버려. 남자 없으면 고민도 없어져”백연우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옆에 있던 사모님이 결국 백연우의 팔을 잡아당겼다.“연우야, 헛소리 그만해.”사모님은 자기 친구가 말하는 데 거침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부부가 잘살고 있는데 왜 갈라놓으려고 부추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다.형수가 싱긋 웃으며 사모님을 바라봤다.“수호 씨 사장 사모님이죠? 수호 씨 평소 챙겨줘서 고마워요.”“참,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같이 식사하는 거 어때요?”형수도 열정적인 사람이고 두 사람과 대화가 잘 통해 바로 식사 초대에 응했다.때 백연우가 끼어들었다.“너무 좋다. 사람이 많으
나는 쪼르르 뒤따라갔지만 네 명의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형수와 백연우는 한창 얘기 중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얘기가 끊이질 않았다.애교 누나와 사모님도 마음이 잘 맞는지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오직 나만 쓸데없는 사람이 된 느낌이라 슬퍼졌다.이렇게 많은 미녀가 있는데 한 명도 붙잡지 못하다니, 내가 너무 쓸모없는 것 같았다.마음은 너무 괴로웠지만 나는 여전히 네 사람 뒤를 따라갔다.터치를 할 수 없다 해도, 그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우리는 함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형수는 편히 놀 수 있게 큰 룸 하나를 예약하였다.여자 네 명이 모여 웃고 떠드는 사이에 나는 도저히 한마디도 끼어들 수 없었다.얼마 뒤, 윤지은이 하정현과 함께 나타났다.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겨우 왔네요. 안 오면 나 외로워 죽을 뻔했어요.”윤지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한번 째려봤다.“외로운 게 얼마나 무서운 거야? 옆에 미녀들 끼고도 외롭다고 해?”어젯밤 일 때문인지 윤지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완전히 변했다.나는 최대한 윤지은과 싸우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이것 봐요. 다 저들끼리만 얘기하고, 난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한다니까요.”윤지은은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솔직히 쓸모없긴 하지.”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모두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때 윤지은이 자기 친구 하정현을 소개했다.“정현이라고, 내 고딩 시절 짝꿍. 나랑 사이 항상 좋았어.”하정현도 성격이 털털해 바로 무리에 어울렸다.여자 여섯 명은 모두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여성스럽고, 매력적이고, 섹시하고, 우아하고, 고상하고, 보이시하고 다정하고. 정말 다양하다.이렇게 몸매와 스타일이 다른 여섯 명의 여자가 함께 모여 있으니 이토록 눈이 즐거울 줄은 몰랐다.물론 한마디도 끼어들 수 없지만 이렇게 꽃 속에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속으로 엉큼한 상상도 할 수 있으니까.나는 몰래 여섯 명이 함께 있는 사진을 찍었다. 만약
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은 상냥하고 내성적이지만, 두 사람도 대화에 잘 끼어들었다.여섯 명은 가위바위보로 진 사람이 술을 마시는 벌칙을 했는데, 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은 운이 나빠 연속 몇 번이나 졌다.이대로 더 마시다가 일어나지도 못할까 봐, 나는 얼른 일어나서 말했다.“지금부터 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 술은 제가 마실게요.”“얼씨구, 이 정도로 마음 아파? 그럼 내 것까지 마실래?”백연우는 나를 보며 놀려댔다.나는 가슴팍을 팍팍 두드리며 말했다.“그래요, 술은 다 제가 마실게요.”윤지은은 나를 한번 째려봤다.“좋은 생각 하네. 흥 돋우려고 술 마시는 건데, 네가 다 마시면 우린 뭘 하고 놀아?”하정현도 옆에서 맞장구쳤다.“맞아. 이 술 한 병에 몇백만 원인데, 혼자 다 마시려고? 좋은 생각 하네.”‘이 둘은 참, 어쩜 내 마음도 모르고 그렇게 쪼잔한 사람으로 몰아? 내가 그렇게 잔 욕심 채우는 사람으로 보이나?”‘난 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이 마음 아파서 그런 거라고.’“두 사람은 마시고 싶으면 마셔요. 두 사람은 대신 안 마셔줄 테니까.”다들 하하호호 웃으며 얘기하느라 분위기는 전례 없이 좋았다.나는 애교 누나와 유미 사장님한테 끌려 가운데 앉았다.두 사람 주량은 모두 보통인데, 연속 몇 번 져서 술을 연달아 마셔서 그런지 얼굴이 발그스름했다.내가 나타난 건 두 사람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다.“수호 씨, 아예 수호 씨가 가위바위보까지 해요. 우리가 가위바위보도 못해서요.”애교 누나가 말했다.나는 유미 사모님을 바라봤다.“사모님은요? 제가 대신 가위바위보까지 할까요?”사모님은 얼굴이 발그스름해서 살짝 눈이 풀려 있었다.“그래요. 나 가위바위보 못해요.”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의 말에 나는 마치 성지를 바른 것처럼 아예 소매까지 걷어 올렸다.“좋아요. 그럼 제가 대신 이겨줄게요.”나는 가위바위보는 자신 있었다.그러니 누나들과 하면 꼭 이겨서 술을 먹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그러자 백연우가 언짢았는지 바로 나
“흥, 나를 취하게 해서 뭐 하려고? 엉큼하네, 아주.”나는 계속해서 형수와 가위바위보를 했다.형수가 또 연속 두 번 지니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때문에 다음 몇 판은 조금 봐줬다.하지만 이미 적지 않게 취한 형수는 머리가 어지러웠는지 헤롱헤롱하더니 아예 테이블에 엎드려 일어나지 못했다.백연우가 몇 번이고 불렀지만 형수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안돼. 나 머리 어지러워. 조금만 쉴게.”“너도 참, 할 줄 아는 게 뭐야? 내가 할게.”백연우는 계속해서 나를 상대하려고 앞장섰다.그때 윤지은이 앞에 막아섰다.“너도 쉬어. 내가 할게.”윤지은은 여전히 말만 사납게 했지 마음은 순두부나 다름없었다.겉으로는 백연우의 주량이 별로면서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고 투덜댔지만, 속으로는 친구를 걱정했다.백연우는 연약하게 윤지은한테 기댔다.“역시 우리 지은이가 제일 좋아. 네가 저 자식 이기면, 내가 너 더 사랑해 줄게.”하정현이 얼른 옆에서 맞장구쳤다.“그러면 걱정 붙들어 메. 우리 지은이 주량은 아무도 못 따라오니까. 심지어 쟤 의술보다 더 세.”“그래? 그건 몰랐네. 그럼 어디 한번 보여줘 봐.”백연우는 참지 못하고 부추겼다.백연우는 그걸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일전에 안철수의 신분으로 몇 번 술을 마셔 봤으니.그때는 그저 그랬던 것 같은데, 하정현은 대체 뭘 보고 윤지은이 술이 세다고 하는지 모르겠다.윤지은의 가위바위보 실력은 확실히 다른 사람보다 한 수 위였다.때문에 우리는 엎치락뒤치락 한 잔씩 마시며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술 한 병을 비웠다.하정현이 옆에서 얼른 새 술을 따면서 소리쳤다.“자, 계속 해. 두 사람 오늘 반드시 승부를 갈라야 해.”나도 이제는 머리가 어지러워 났다. 어쨌든 방금 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 대신 많이 마셨으니까.그때 조금 정신을 차린 애교 누나와 유미 사모님이 나를 도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윤지은도 하정현이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고, 백연우가 가끔 거들어 주었다
‘내가 누구랑 뭘 한 거지?’‘대체 누구야?’나는 정신이 혼미해 아무 일도 기억 나지 않았다. 심지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예 몰랐다.나는 머리까지 내리치며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젠장.”순간 어이가 없었다.‘내가 가장 늦게 깨어났으니, 누나들이 내 부끄러운 모습을 모두 봤다는 거 아닌가?’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순간 민망해서 얼굴이 시뻘겋게 닳아 올랐다.전에 나랑 몸을 섞은 여자들과 그랬다면 모를까, 룸에는 유미 사모님과 하정현도 있었다.특히 사모님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는 분이 일어나자마자 내가 벌거벗고 있는 걸 봤으면 분명 나를 경멸할 거다.‘젠장, 사모님 마음속 내 이미지가 망가져 버렸네.’나는 후회가 밀려왔다.‘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가지고.’게다가 문제는 정신이 몽롱해 상대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나는 자신을 탓하며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그러다가 결국 애교 누나한테 전화하기로 했다.전화를 건 지 한참 뒤 애교 누나가 전화를 받았다.누나가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다급히 물었다.“누나, 다들 어디 있어요? 왜 룸에 저밖에 없어요?”애교 누나의 목소리는 조금 이상했다.[수호 씨, 우리 술에 취한 뒤 대체 뭘 했어요?]“저, 저도 기억 안 나요. 저도 취했어요. 애교 누나는 일찍 깨어났어요? 아니면 늦게 깨어났어요? 혹시 제 추태를 봤어요?”애교 누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조금 늦게 깨어났어요. 내가 깨어났을 때, 나머지 사람들이 다 수호 씨를 둘러싸고 보고 있었어요.]“네?”‘이건 뭔 망신이래?’‘나를 둘러싼 채 보고 있었다고? 바지도 안 입고 있는 모습을?’‘젱장...’그 장면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못 볼 꼴 봤다고 생각하겠지?’나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었다.“누나, 다들 무슨 반응이었어요?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상대가 누구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 후회돼 미치겠어요.”[모르겠어요. 다들 반응은 정상이었어요. 윤지은
나는 너무 어이없어서 벼랑 끝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애교 누나가 나를 위로했다.[수호 씨, 너무 난처해하지 마요. 이미 벌어진 일인데, 이제 와서 그런다고 소용없잖아요. 그리고 우리 정말 신경 안 써요. 이제 다 친해져서 서로 잘 알잖아요.]말은 그렇다지만, 난처한 건 나다. 게다가 그런 장면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이제 20대인데, 그렇게 망신당하면 앞으로 누나들을 어떻게 봐야하지?’“애교 누나, 여기 와서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 저 지금 너무 괴로워요.”애교 누나는 나를 무척 안쓰러워했다.[그래요, 기다려요. 바로 갈게요...][정수호, 깨어났어?]애교 누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 건너편에서 백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핸드폰을 던질 뻔했다.[내 전화 끊으려고 했지? 경호하는데, 전화 끊으면 아까 룸안에서 있었던 일 올릴 거야.]그 말에 나는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뭐라고요? 설마 사진도 찍었어요?”나는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내가 그렇게 벗고 있는 걸 찍었다고?’백연우는 아주 으쓱한 듯 말했다.[맞아. 그것도 여러 장. 보겠다면 보내줄 게.]“미쳤어요? 그런 사진은 왜 찍어요?”나는 너무 화가 나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백연우는 여전히 큰 소리로 웃어댔다.[재밌으니까. 그런 모습 처음 보는데, 바로 사진 찍어 저장해야 하지 않겠어? 그런데 이렇게 빨리 쓸모가 있을 줄 몰랐네. 난 역시 선견지명이 있다니까.]‘당시는 선견지명이 있는지 몰라도 나는? 내 기분은 생각해 봤냐고?’나는 화가 났지만 감히 그 화를 표출하지 못하고 전화에 대고 아부했다.“백 쌤, 대체 왜 그래요? 제 목소리 좀 들어봐요. 저 지금 울 것 같다고요, 제발 사진 좀 지워줘요.”[에이, 그럴 필요 없어. 그 사진은 내가 혼자 감상할 거야. 절대 외부에 노출하지 않아. 앞으로 내 말 잘 들어. 참, 누나들 지금 노래방에 있는데, 올래?]“싫어요!”나는 바로 거절했다.이 순간 나
나는 재차 거절하며 말했다.“앞으로 우리 가게 자주 찾아와 주시면 돼요. 그러니 2억은 받을 수 없어요.”“에이, 수호 씨가 마음에 들어서 주고 싶어 주는 건 데도 안 받을 거야? 돈 받고 우리 딸이나 잘 만족시켜 줘.”이영미는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그에 반해 나는 그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님은 제가 지은 씨랑 만나는 거 괜찮아요?”“괜찮지 그럼. 이렇게 잘생기고 몸매도 좋은 남자애가 또 어디 있다고. 수호 씨가 우리 딸 만족시켜 주면 우리 지은이도 좋아할 거야.”“난 개방적인 사람이라 우리 딸만 즐겁고 행복하면 돼. 결혼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잠깐 만나다 헤어지면 그만이야.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 윤씨 가문은 지은이를 먹여 살릴 수 있어.”처음 들어보는 관점에 나는 크게 놀랐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윤씨 가문은 워낙 재산이 많고 부부가 워낙 개방적이니 결혼이 최종 귀착점이 아닐 수 있었다.게다가 이영미는 자식이라고는 윤지은 한 명뿐이니, 당연히 자기 딸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부끄럽네요. 하지만 어찌 됐든 이 돈은 받을 수 없어요...”“안 받으면 안 돼. 안 받으면 수호 씨가 우리 지은이 만족시켜주지 못할까 봐 걱정돼. 우리 지은이가 불감증인데 수호 씨를 못 잊는 걸 보면 수호 씨가 그쪽 방면으로 꽤 쓸만하다는 뜻이니까.”“콜록콜록...”나는 침에 사레가 들렸다.“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에요...”“구체적인 상황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우리 지은이가 수호 씨랑 같이 있고 싶어 하고 나도 수호 씨가 마음에 드니까, 수호 씨는 우리 지은이만 만족시켜. 난 우리 딸이 평생 즐거움을 경험해 보지 못하는 건 바라지 않아. 그러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뭔 소용이 있어?”역시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걸 나는 다시 한번 느꼈다.나는 열심히 돈 벌어 출세하려고 아득바득하고 있는데, 이영미는 벌써 후대의 행복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그것도 이토록 깊숙이.그때
소설 중간마다 가끔 나오는 삽화는 수위가 너무 높았다.나는 이런 걸 이해할 수 없지만 요즘 많은 여자애들 사이에서 비엘이 인기라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영미도 그중 하나였을 줄은 몰랐다.나는 책을 다시 책장에 밀어 넣고 다른 책 하나를 골랐다. 이번에는 비엘 만화였다. 이영미가 이 정도로 심각하게 베엘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다니.나는 그 책을 도로 꽂아 넣고 또 다른 책을 골랐다. 하지만 이번 역시 비엘 만화였다.알고 보니 책장 전체에 이런 책들뿐이었다.나는 너무 어이없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보아하니 이영미는 평소 이런 책을 즐겨 보고 윤해철은 이영미를 무척이나 아끼기에 특별히 아내를 위해 전문 책장까지 만들어준 모양이었다.볼 수 있는 책이 없어 나는 결국 새를 구경하러 갔다.어떤 새들은 마치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무척 재밌게 행동했다.그중에 말할 수 있는 앵무새 두 마리가 있었는데, 나는 참지 못하고 그 앵무새들을 건드렸다.그때 한 앵무새가 갑자기 이영미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여보, 샤워해.”그러자 다른 앵무새가 잇따라 소리 냈다.“같이 씻을래?”“좋아. 난 역시 욕실이 좋아...”대화가 이어지는 두 앵무새를 보니 나는 넋을 잃었다. 앵무새까지 이 정도로 밝히는 걸 보면 평소 이 집 부부가 얼마나 붙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그 뒤로 무려 2시간 뒤에 윤해철과 이영미는 함께 내려왔다.나는 속으로 윤해철의 지속력에 감탄했다.이영미는 얼굴이 발그스름했고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오래 기다렸지?”“아니에요.”나는 예의상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지만 솔직히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었다. 아니, 참기 힘들다는 게 더 맞을지도.집안 곳곳에서 느껴지는 야릇한 분위기에 보통 사람들이 오면 정말 견디지 못할 거다.“수호 군, 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수표를 써줄 테니까.”윤해철은 내려올 때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가 돋보인다던 양복을 입고 내려왔다. 그 모습은 같은 남자인 내가 봐도 너무 멋있었다.그러니
“크흠...”나는 일부러 헛기침하며 뒤에 나도 앉아 있다는 걸 티 냈다.그런데 이영미는 오히려 깔깔 웃으며 말했다.“수호 씨는 한숨 자. 나는 우리 남편과 볼일이 좀 있으니까.”‘이건 무슨 상황이지?’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잘 수 있을 리가 있나?“저기 두 분 좀만 참으세요. 이따가 집에 도착하면 마음껏 하셔도 돼요.”우리 부모님과 비슷한 또래의 부부에게 이런 말을 하려니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때 이영미가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이런 걸 어떻게 참아? 수호 씨도 경험 있을 거 아니야. 하고 싶을 때 쉽게 참아져?”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그럼 저 먼저 내렸다가 두 분 끝나면 다시 올게요.”“그럴 필요 없어. 그냥 앉아 있어. 차는 움직일 때 더 느낌 있으니까.”내 옆에 앉은 기사는 이런 대화를 듣고도 덤덤한 표정이었다. 보아하니 자주 있는 일이라 익숙해진 듯했다.결국 나는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올 리가 만무했다.그도 그럴 게, 귓가에 자꾸만 이영미의 애교 섞인 웃음소리가 들렸으니까.비록 두 사람은 정말 몸을 섞지는 않았지만 서로 희롱하며 불장난하는 모습만 봐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심지어 가끔 몸을 저릿하게 하는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이 점으로 보면 두 사람이 평소 자주 야릇한 농담을 주고받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둘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다 보니 나는 점점 부러웠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도 나중에 늙어서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집으로 가는 내내 화끈한 장면이 뒤에서 생중계되는 바람에 영화를 관람할 때보다 더 괴로웠다.심지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윤해철은 이미영을 안고 서둘러 침실로 돌진했다.운전기사이자 윤씨 가문 집사인 손정현은 나를 거실로 데리고 가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그때 나는 문득 궁금해서 물어봤다.“혹시 기사님은 아무 반응도 없어요?”손정혁은 덤덤하게 대답했다.“나도 이제 50이 넘는데 무슨 반응이 있겠어요?”“50이 넘는다고 나이 든 건 아
하지만 윤지은은 겉으로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뜬금없이 왜 이래?”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윤지은이 대놓고 거절하지 않았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뜻이니까.나는 말을 이었다.“우리가 서로 날을 세우고 있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사람 중에 서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안 그래요?”“그런 거 묻지 마. 난 몰라.”윤지은은 답변을 거절했다.이에 나는 싱긋 웃었다.“저는 지금 이대로가 편한 것 같아요. 사실 지은 씨가 말은 독하게 하지만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내가 그딴 감언이설에 넘어갈 것 같아? 그럴 시간에 사업이나 일궈.”“안 그래도 사업은 할 거예요. 참, 이틀 뒤에 천수당이 개업하는데 지은 씨도 와요.”“시간 봐서. 스케줄 없으면 가고, 있으면 못 가.”윤지은은 항상 이런 식이다. 어느 한번 애교 누나나 형수처럼 확정된 대답을 할 때가 없다.하지만 윤지은이 이렇게 말한 것만 해도 나는 무척 기뻤다.나는 다른 걸 바라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이렇게 평화롭게 지내면 친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서로 틀어져 영원히 얼굴 보지 않는 관계보다는 나으니까.우리가 한창 대화하고 있을 때 이영미와 윤해철이 짐을 챙겨 나왔다.나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짐을 대신 들었다.윤지은은 아버지한테 여전히 쌀쌀맞게 굴었지만,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나오라는 건 고분고분 동의했다.차에 오른 뒤 윤해철은 참지 못하고 한탄했다.“지은이 쟤는 성격이 누구를 닮았는지 아주 고집불통이야.”“누구를 닮았긴? 당연히 당신을 닮았지. 당신도 젊었을 때 저랬잖아.?”“내가 그랬다고? 난 당신 앞에서 저런 적 없는데?”윤해철은 인정할 수 없었다.그때 이영미가 윤해철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내 앞에서는 그런 적 없어도 아버님 앞에서는 그랬잖아. 잘 생각해 봐. 지은이 성격 당신이랑 똑 닮았지?”윤해철은 난감한 듯 얼굴을 붉혔다.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젊었을 때 윤해철은 사업
“지금이야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그런 사람 만나면 생각이 바뀔 거야.”윤해철은 여전히 자기 생각을 고수했다.다만 윤지은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 쓰레기가 얼굴에 쓰레기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 부잣집 도련님 중에 쓰레기가 없다는 건 어떻게 장담해요? 아빠는 그동안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 봤잖아요. 그럼 아빠가 한번 말해 봐요. 평소 만났던 부잣집 도련님 중에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어요?”“다 싸잡아서 욕하지 마. 부잣집 도련님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 누군가는 네가 말한 그런 사람이 있겠지...”“저는 싸잡아서 욕한 적 없어요. 그저 어떤 신분의 남자든 쓰레기는 똑같이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었어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래요. 그 누구도 저를 강요할 수 없어요.”“아빠가 정말 저를 아끼고 사랑하고 저를 위해 생각한다면 제 의견도 존중해 줘야 하잖아요. 계속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할 게 아니라...”“내가 언제 강요했다고 그래? 몇천억짜리 회사를 그냥 주겠다는데 그게 왜 강요야?”두 부녀가 싸움 날 것 같자 이영미는 얼른 끼어들어 분위기를 풀었다.“됐어. 그만 싸워. 어쩜 부녀라는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워대? 지은아, 가업을 잇고 싶지 않으면 잇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엄마가 네 편 들어줄게. 오늘 식사 자리에 꼭 참석해. 엄마 체면 봐서라도. 알았지?”윤지은은 소파에 기대앉아 건성으로 대답했다.“나중에 주소 보내줘요.”그 말에 이영미는 활짝 웃었다.“그래. 레스토랑 예약하면 바로 알려줄게.”“여보, 나 짐 싸는 거 좀 도와줘.”이영미는 윤해철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홀로 남겨진 나는 윤지은을 빤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 곁으로 움직였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나를 째려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얘기 좀 해요.”“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있던가?”“아무 거나 얘기하면 되죠. 그러고 보니 우리 안 본 지 꽤 됐잖아요.”“차라리 평생 내 눈앞에서
윤지은은 오늘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벨 소리에 문을 연 순간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 있는 모습에 잠깐 넋을 잃었다.나 역시 잠옷을 입고 머리를 부스스하게 풀어 헤친 윤지은을 보고 잠시 넋을 잃었다.윤지은은 평소 병원에 있을 때 항상 머리를 높게 얹고 흰 가운을 걸치고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때문에 윤지은이 잠옷 차림으로 머리를 부스스하게 풀어 헤친 이웃집 동생 같은 모습을 한 걸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손에 의학서적 한 권을 들고 있어 박학다식한 학자 가문 집 딸내미 같은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이건 너무 큰 반전이었다.그때 윤지은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홱 째려봤다.“뭘 봐? 여긴 왜 왔어?”나는 얼른 생각을 정리한 뒤 해명했다.“저도 윤지은 씨 어머님 아버님과 함께 왔어요.”이영미는 얼른 내 편을 들었다.“지은아, 엄마랑 아빠가 화해한 거 다 수호 씨 덕분이야. 오늘 저녁 수호 씨한테 밥 사주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와.”“저는 됐어요. 바빠요.”윤지은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색다르게 보였다.그때 이영미가 친근하게 딸의 팔짱을 끼며 애교 부렸다.“가자. 우리 가족이 오붓하게 식사하는 거 오랜만이잖아. 엄마가 부탁할게. 응?”이영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윤지은도 더 거절할 수 없었다.그때 윤해철이 대뜸 물었다.“넌 여기서 언제까지 살 거야?”“그게 아빠랑 뭔 상관인데요?”“지은,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저 원래 이런 거 알잖아요. 듣기 싫으면 듣지 말던가요.”윤지은은 말을 마친 뒤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 모습을 보며 윤해철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우리 부녀는 전생에 원수였나 봐. 오랜만에 만나는데 가족애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네. 하.”나는 이 상항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윤지은이 나한테만 쌀쌀맞게 구는 게 아니라 친아버지한테도 쌀쌀맞게 구는 것 같았다.‘원수를 스스로 만드네.’윤지은은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
강용재라면 바로 임천호 곁을 지키던 그 덩치다.전에 백조의 호수 근처에서 강용재가 나를 미행했던 적이 있다. 다만 내가 정신없을 때 양동준이 나타나 위기를 넘긴 거였다.나는 이제야 임천호가 나를 쉽게 놓아줄 리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동안 윤지은이 양동준더러 은밀히 나를 지켜주라고 한 덕에 그동안 내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거였다.그런데 이제 양동준이 출장 갔으니 강용재는 나 혼자 상대해야 한다.예전 같았으면 나는 분명 불안했을 테지만 지금은 두렵지 않았다.두려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 사람들은 상대가 두려워한다고 동정하거나 불쌍하게 여길 사람이 아니다.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요즘 나와 윤지은은 거의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게 양동준더러 나를 보호하라던 것까지는 영향이 미치지 않은 모양이다.자세히 생각해 보니 내 목숨은 윤지은이 구해준 것이기에 나는 윤지은한테 화를 낼 자격이 없었다.나는 그저 이영미 쪽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랐다. 그러면 이영미가 나를 도와 좋은 소리 몇 마디 해주면 나와 윤지은의 관계도 완화될 수 있으니까.아파트 단지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마침 이영미와 윤해철을 만났다.이영미는 다정하게 윤해철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얼굴이 발그스름한 게 한눈에 봐도 사랑을 듬뿍 받은 티가 났다.윤해철 역시 활기가 차 넘치는 게 전에 여색에 관심조차 없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두 사람 사이가 더 화목해진 걸 보니 나는 흐뭇했다.“사모님, 윤 회장님.”나는 먼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그러자 이영미가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수호 씨 정말 대단하더라? 우리 남편 지금 엄청 끝내줘. 호호호...”이영미는 말하는 와중에도 흐뭇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때 나는 이내 겸손하게 말했다.“별말씀을요. 다 윤 회장님이 꾸준히 단련하고 보양에 신경 쓴 덕분이에요. 그 기초에 제가 약물로 조금 치료해 드리니 바로 나은 거예요. 기반이 좋지 않으면 제가 아무리 약을 들이부어도
하정현의 아버지 하대철은 재직할 때, 많은 지역의 거물들에게 미움을 샀었다. 때문에 하대철이 무너지자마자 그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들이 하정현과 하정현의 어머니 진수향을 잡으려고 쫓아다녔다.그래서 진수향은 할 수 없이 몸을 숨겼고 하정현 역시 강북으로 도망쳐 와서 윤지은을 찾았다.하지만 하정현은 이런 일들을 윤지은한테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동안 윤지은의 기분이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하정현은 평소 털털하고 덤벙거리는 것 같지만 사실 매우 섬세했다. 때문에 기분도 안 좋은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아직 강북까지 쫓아온 건 아니기에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날 밤 용천 호텔에서 하정현은 아버지를 구해내라는 진수향의 전화를 받았다.하정현도 답답한 마음에 푸념했다.“제가 무슨 수로 아버지를 구해요? 제 코가 석 자인데...”[그런 건 모르겠고 우리가 너를 힘들게 키워 놨으니 이제 너도 은혜를 갚을 때가 됐어. 만약 네 아버지를 구해내지 못하면 앞으로 너 같은 딸 둔 적 없다고 생각할 거야.]진수향의 말은 너무 모질고 무자비해 하정현은 기분이 계속 안 좋았다. 심지어 그때 하정현은 생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다.하지만 나와 사모님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하정현은 스스로 자멸할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정현은 나쁜 놈 손에 유린당할 바에는 차라리 처음을 원하는 사람한테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강요는 아니니까.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하정현은 나를 찾아왔었다. 진실을 끝까지 얘기하지 않은 건 단순히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하정현은 자신의 비참한 가정사를 들키고 싶지 않았고 내가 그 때문에 자기를 동정해서 도와줄까 봐 싫었다.매일 가슴 확대 수술을 입에 달고 사는 듯하지만 사실 그건 하정현이 스스로를 속이려는 말이었다.생존조차 어려운 여자가 가슴 확대 수술에 신경 쓸 여력이 있을까?하정현은 단지 몸매를 더 예쁘게 만들어 모델 일이라도 하거나 아니
“보니까 은근히 지은이길 바라네?”나는 윤지은이라고 확신했기에 하정현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했다.그건 아마도 그 상대가 윤지은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너무 커서였을 수도 있었다. 정말 윤지은이면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생각하니 웃음이 흘러나왔다.“당연하죠. 그럼 더 이상 알아내려고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동안 내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했는데,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안심할 수 있겠어요.”“너무 쉽게 생각하네. 수호 씨가 비록 임유미 씨와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딱 한 끗 차이였어. 본인이 키스했던 사람이 수호 씨라는 걸 발견했을 때 유미 씨 표정이 어땠는지, 수호 씨는 아마 모를 거야.”그 말은 단번에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어떤 표정이었는데요? 놀라던가요? 아니면 실망하던가요?”“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어. 놀라움과 실망감도 있긴 했지만 뭔가 더 있었어.”“뭐가요? 무슨 뜻인데요?”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그러자 하정현은 귀찮았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몰라.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보지 못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지. 유미 씨는 상대가 수호 씨라는 걸 발견한 뒤에도 수호 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계속할지 말지 고민했어.”“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사모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나는 사모님을 대신해 해명했다.하정현은 그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유미 씨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아무튼 알아요.”“그럼 내 친구 지은이는 그런 사람이고?”“그런 뜻 아니에요.”“정수호, 수호 씨는 항상 본인 입장에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더라. 그 사람을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지은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심지어는 수호 씨네 형수와 애교 씨도 제대로 알아본 적 없지? 두고 봐, 두려워할수록 그 일이 닥칠 테니까.”하정현의 애매모호한 말을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어 나는 마음이 초조했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아무것도 아니야. 할 말은 다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