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안한 마음에 이불로 나를 돌돌 감았다.“내가 무슨 배짱으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리고 이곳은 지은 씨 구역이잖아요. 난 이렇게 일찍 죽기 싫다고요.”윤지은은 갑자기 내 침대에 앉더니 명령조로 말했다.“이불 치워.”“왜요?”“치우라면 치워. 뭔 말이 그렇게 많아?”윤지은은 나한테 늘 이렇게 차갑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나는 순순히 이불을 치웠다.윤지은은 내 가슴을 세게 꼬집었다.“잘 들어. 앞으로 내 친구들 건드리지 마. 내 엄마는 더더욱. 어느 하나라도 거역하면 아주 처참하게 죽을 줄 알아.”꼬집은 자리가 너무 아파, 나는 무의식적으로 가슴을 막았다.“꼬집지 않으면 안 돼요? 이거 지은 씨 가슴 아니거든요.”여자 가슴과 마찬가지로 남자 가슴도 민감하다.‘고통 한번 느껴보게. 나도 꼬집어 보고 싶네.’나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때 윤지은이 나를 풀어주더니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이건 경고야. 내 말 새겨두라는 경고.”“네, 알았어요. 지은 씨 말대로 할게요. 됐죠?”나는 윤지은과 더 이상 말 섞기도 싫었다. 그저 당장 나갔으면 좋겠다.하지만 윤지은은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불을 들추더니 침대에 앉았다.그 헹동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뭐 하는 거예요? 지은 씨 말대로 하겠다는데, 왜 안 가요?”“이 호텔 전체가 우리 집 건데, 내가 어디서 자든 뭔 상관이야?”나를 쏘아붙이는 윤지은을 보니 순간 어이없었다.“그런데 여긴 내 방이거든요? 돈도 냈어요.”“그 돈 직접 냈어? 소여정이 대신 내준 거잖아. 그런데 어디서 직접 낸 것처럼 굴어?”윤지은은 나를 매섭게 째려봤다.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차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이따가 내 돈으로 다시 방 잡을 거예요.”‘내가 돈이 없는 줄 알아? 나도 여기 묵을 수 있다고.’나는 속으로 내가 직접 방을 잡으면 윤지은이 어떻게 또 꼬투리 잡나 두고 보겠다고 중얼거렸다.윤지은은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인어
“이게 다 지은 씨 탓이잖아요. 지은 씨가 나를 가두지 않았으면 이곳에 이렇게 오랫동안 묵을 일도 없었을 거고, 돈 낭비할 일도 없었을 거잖아요.”나는 화가 나서 윤지은을 째려봤다. 내가 억울한 걸 생각하니 두려울 것도 없어졌다.윤지은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그럼 어쩔 생각이야?”항상 쌀쌀맞게 굴던 윤지은이 갑자기 매력적으로 다가오니 견딜 수가 없었다.나는 몸을 흠칫 떨며 말했다.“어떻게 할 생각 없어요. 그냥 지은 씨가 여기서 빨리 나갔으면 좋겠어요.”윤지은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뭐? 다시 말해 봐!”‘이 여자는 뭔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지?’“아무 말도 안 했어요.”나는 결국 타협했다.이길 수 없으면 피하면 되지.내가 침대에서 내리려고 할 때 윤지은이 갑자기 말했다.“내려가지 마, 이리 와.”“윤지은 씨, 또 뭐 하려고요?”나는 할 말이 없었다.‘대체 무슨 생가인 건지?’그때 윤지은이 새하얀 발을 나에게 내밀었다.“마사지해 줘. 좀 뻐근해.”‘난 또 뭐라고.’‘마하지하러 왔으면 마사지나 받을 것이지 꼭 나를 먼저 괴롭힌다니까.’‘이 여자는 영원히 이렇겠지?’“마하지는 해줄 수 있어요. 하지만 쓸데없이 트집 잡지 마요.”“내가 언제 트집 잡았는데? 누가 우리 엄마랑 그러래? 내 친구랑 붙어먹으래?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왜 이러겠어?”윤지은은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됐어요. 못 들은 거로 해요.”나는 더 이상 윤지은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싸우기도 싫었다.나는 조용히 윤지은 발 옆에 앉아 그녀의 발을 들어 마사지하기 시작했다.윤지은은 눈을 감은 채 즐기고 있었다.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기에, 방은 고요함이 맴돌았다.하지만 그 시각, 808호실에서 백연우가 핸드폰으로 CCTV 영상을 보고 있었다는 걸 우리는 아무도 몰랐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다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그도 그럴 게, 백연우가 보고 있는 건 내 방의 화면이었으니까.백연우한테 내 방 CCTV
임천호를 떠나면 그나마 사람이 된 것 같지만, 그의 곁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소여정은 자신이 산송장이 된 기분이었다.살든 죽든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그때 벽연우가 다급히 말했다.“네가 돌아가서 심심할까 봐 내가 재미 좀 불어넣어 주려는 거 아니냐. 얼른 봐. 보고 나면 아마 피가 끓어오를걸.”백연우의 말에 소여정은 너무 궁금했다. 그녀는 얼른 영상을 재생했다.그리고 다음 순간, 생기가 없던 텅 빈 눈이 다시 반짝반짝 빛났다.백연우가 보낸 영상은 윤지은이 내 침대에 앉아 나한테 이불을 치우라고 명령하고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꼬집은 부분이었다.그 부분만 보면 내가 마치 윤지은의 스폰을 받는 기생오라비 같았다.윤지은이 나를 마음대로 괴롭히는데, 불쌍한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으니까.형소 친구들 앞에서 윤지은은 항상 무뚝뚝하고 차가운 모습이다.게다가 소여정이 임천호 정부 노릇을 하는 게 싫어, 늘 소여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심지어 친구 셋 모두 윤지은이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는 걸 몰라, 윤지은이 남자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이 영상은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었다.영상 속 윤지은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차가웠지만 눈빛이 여성스럽고 매력적이었다.심지어 먼저 나를 유혹하기까지 했다.소여정은 너무 놀라 소리쳤다.[이거 진짜 윤지은 맞아? 윤지은과 수호 씨가 그렇고 그런 사이었어?]백연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어때? 대박이지? 자극적이지?”소여정은 연신 감탄했다.[완전 대박인데? 정말 자극적이야. 이 영상이 없었다면 윤지은한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걸 모를 뻔했네.]“하하, 이제 윤지은 비밀을 알았으니까, 앞으로 윤지은이 너한테 뭐라고 하면 반박해.”소여정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그런데 이 영상 어디서 난 거야? 너 설마 수호 씨 방에 카메라 설치했어?]“응, 왜?”소여정은 바로 미간을 좁혔다.[너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윤지은이 알면 네 가죽을 벗기려고 할걸?]백연우는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마음대로 하라
“난 사람이지 애완동물이 아니에요. 옆에 묶어두고 있으면 언젠간 우울증 걸릴 거예요. 내가 우울증 걸려 죽으면, 앞으로 누가 회장님 모시겠어요?”임천호는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죽으면 안 되지. 네가 죽으면 내가 슬퍼.]“그러니까 내보내 달라고요. 기분이 좋아야 우울증도 안 걸리죠.”임천호가 물었다.[내 곁에 있는 게 그렇게 싫어? 예전에는 내 옆에 꼭 붙어 있는 걸 좋아했던 것 같은데?]소여정은 입을 삐죽거리며 애교 부렸다.“회장님도 말했다시피 그건 예전이에요. 예전에는 같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님 마음을 몰랐으니까 오래 같이 있어야 안심이 됐거든요.”[너도 참, 내가 너를 너무 예뻐했어. 해달라는 건 다 들어주니 이젠 점점 막 나가네.]소여정은 이내 생긋 웃으며 말했다.“회장님이 저를 예뻐하는 건 알죠. 하지만 나도 자유가 필요해요.”[그래, 네 마음은 알았어. 바쁜 일 끝내면 같이 나다니자.]임천호의 말에 소여정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따라서 얼굴에 걸렸던 미소도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그럼 됐어요. 안 나갈래요.”소여정은 아예 전화를 끈헝버렸다.소여정이 먼저 전화를 끊었지만 임천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있던 백발의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남자의 이름은 정태곤, 임천호의 경호원이다.임천호는 정태곤에게 말했다.“강북에 다녀와서 소여정이 그동안 뭘 하고 다녔는지 조사해.”소여정은 예전에도 밖에 나가겠다고 떼쓰곤 했지만 한 번도 오늘처럼 짜증을 낸 적은 없었다.때문에 임천호는 소여정이 강북에 간 게 단지 친구 만나러 간 게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정태곤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때까지 나는 곧 닥칠 위험을 알지 못했다.그 시각 나는 여전히 윤지은을 도와 마사지해 주고 있었다.하지만 한창 마사지하고 있는데 윤지은이 잠들어 버렸다.나는 윤지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을 갔다.소변을 보고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내 방의 문손잡이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백연우는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그 모습을 보니 식은땀이 났다.이 상황에 윤지은이 깨기라도 하면 난 죽는다.나는 살금살금 걸어가 백연우의 팔을 잡아당기며 경고했다.“뭐 하는 거예요? 이러다 깨겠어요. 제발 좀 가요.”백연우는 곤히 잠든 윤지은을 보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자식, 말로는 남자를 싫어한다더니, 뒤에서 이런 짓이나 하고 다니긴. 이거 참 보기 드문 일인데, 얼른 지은 옆에 누워. 내가 사진 찍게.”“미쳤어요? 싫어요.”‘난 아직 더 살고 싶다고.’백연우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명령했다.“얼른 가. 안 그러면 깨운다?”“헐, 여자들은 왜 다 이래요?”‘정말 미치겠네.’‘소여정도 그렇고, 윤지은도 그렇더니 이젠 백연우까지.’역시 사모님이 제일 착하다.다정하고 자상하고, 그야말로 최고의 사모님이다.“얼른 가. 사진만 찍을 거야. 다른 건 안 해.”백연우는 계속해서 나를 부추겼다.하지만 나는 그 말에 넘어갈 리 없었다.여자는 절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걸 진작 알았으니까.이미 소여정한테 많이 당해기에 절대 두 번 당하지는 않을 거다.하지만 내가 제 말을 듣지 않으면 백연우는 정말 윤지은을 깨울 수 있다.윤지은의 성격을 생각하면 결구 손해 보는 건 또 나일 거고.나는 순간 좋은 수가 떠올라 밖으로 도망쳤다.‘이러면 어떻게 협박하나 보자고.’백연우는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이내 쫓아왔다.“정수호, 거기 서!”나는 도망치면서 계속 뒤를 돌아봤다. 백연우는 나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타이트한 침마와 흰색 셔츠를 입고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모습은 영락없는 학과장 선생님이었다.솔직히 이런 백연우가 두려웠다.나는 도망치면서 말했다.“제발 그만 쫓아와요. 시킨 대로 할 수 없어요.”“너 이 자식 당장 거기 서. 아직 졸업장 안 탔다는 거 잊지 마.”나는 단번에 우뚝 멈춰 섰다.‘무슨 뜻이지? 설마 졸업장으로 협박하려는 건가?
“형수랑 여자 친구가 지금은 없으니 우리...”백연우는 말하면서 손을 내 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다급히 뿌리쳤다.“그래도 안 돼요. 윤지은 씨가 제 방에 있어요. 언제 깨어날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사모님도 있는데 들킬까 봐 걱정도 안 돼요?”“걱정되긴 무슨.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친구들이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나올 때 네 사장 사모님한테 말했어. 재미 보러 나간다고. 그러니까 상관 안 할 거야.”백연우는 말하면서 또 나에게 손을 뻗었다.이에 나는 또 그녀를 밀어냈다.“그래도 안 돼요. 저 피곤해요.”나는 정력을 아껴뒀다가 애교 누나거나 형수와 하고 싶었다.하지만 백연우가 나한테 기대어 내 가슴을 살짝 께물었다.간지럽고 짜린한 느낌에 나는 순간 피가 들끓었다.“이래도 안 된다는 거야?”백연우는 고개를 쳐들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나를 유혹했다.나는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이성의 끈은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백 쌤, 진짜 안 돼요. 저 진짜 죽어요.”백연우는 피식 웃었다.“어디서 거짓말이야? 네 나이대 남자애들이 얼마나 혈기왕성한데, 하룻밤에 7,8 번도 문제없다고. 내가 언제 7.8번 하자고 했어? 한 번만 하면 돼.”백연우는 딱 봐도 경험이 많아 보였다. 때문에 나 하나 휘두르는 건 일도 아니었다.“그, 그럼 어디 갈 거예요?”나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끝내 타협했다.백연우는 이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밖에. 난 밖을 좋아하거든.”‘헐, 이런 취향이었어?’하지만 밖에서 하는 건 확실히 스릴 넘친다.낮에 형수와 밖에서 할 때도 평소와는 느낌부터 달라 평소보다 지구력도 늘었다.“그래요. 얼른 가서 속전 속결해요.”나는 윤지은이 깨어나거나 형수 혹은 애교 누나가 갑자기 돌아올까 봐 걱정되었다.그때 백연우가 갑자기 내 등에 뛰어올랐다.“나 업어줘.”‘무뚝뚝할 때는 그렇게 무섭더니, 부산스러울 때는 또 아이 같네. 업어 달라니.’나는 거절하지 않았다.백연우가 등에 엎드리자 갑자기 따
다만 백연우는 나를 바로 흥분시켰다.결국 한 번으로 끝내려던 게 두세 번 만에 끝났다.우리는 기진맥진하여 꽃밭에 벌러덩 누웠다.“너무 좋아. 역시 젊은 게 좋긴 좋아. 열정적이고 에너지도 넘치고.”백연우는 숨을 헐떡거렸지만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나는 문뜩 정신이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가 벌써 1시간 넘게 밖에 있었다는 걸 알았다.나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저 이제 가봐야 해요. 윤지은 씨가 깨어나서 제가 없는 걸 발견하면 또 트집 잡을 거예요.”백연우는 자리에 일어나 앉더니 나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윤지은이 그렇게 무서워?”“그걸 말이라고 해요? 재벌가 아가씨인데, 당연히 무섭죠. 어쩜 친구 넷 다 그렇게 무서워요? 아니지, 사모님이 제일 좋은 분이에요.”“유미가 좋은 사람이라고 어떻게 확신해? 유미도 우리 과일 수 있어.”옷을 입던 나는 손이 그대로 굳어버려 놀란 얼굴로 백연우를 바라봤다.“설마요. 유미 사모님도 이래요?”“하하, 농담이야. 얼른 돌아가.”백연우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먼저 옷을 입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산책하겠다고 나더러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나는 별생각 없이 정리하고 서둘러 호텔로 돌아갔다.하지만 급히 서둘렀는데도 내고 돌아왔을 때 윤지은은 이미 깨어 있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침대에 앉아 차갑게 물었다.“방금 어디 갔어?”“일 있어서 밖에 다녀왔어요.”나는 거짓말했다.윤지은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무슨 일이었는데?”“이봐요, 그건 내 사적인ㄴ 일이에요. 나도 내 개인 생활해야지, 뭐든 보고할 필요는 없잖아요?”내 반박에 윤지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그 순간 적당히 해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여기서 더 하면 윤지은의 화만 돋울 테니까.나는 너무 반항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관심을 한 스푼 섞었다.“아까 보니까 상태가 좀 심각해요. 요즘 마사지 계속 받아요.”잔뜩 화나 있던 윤지은은 내 말에 바로 화가 사그라들었다.“그 정도로 심
윤지은은 내가 자기 친구를 잊은 걸 탓하기라도 하는 듯 째려봤다.‘그게 나를 탓할 일인가?’‘하루에도 손님을 얼마나 많이 받는데, 내가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겠냐고?’“그래요, 알았어요.”“태도가 왜 그래? 대충대충 넘어가려는 거야?”윤지은은 뜬금없이 화를 냈다.그런 윤지은의 태도에 나는 어쩔 줄 몰랐다.“이봐요, 대체 어쩌라는 거예요?”“다정하게 대해줘.”윤지은은 버럭 소리치며 씩씩거렸다.윤지은은 내 태도가 나쁜 게 싫은 게 아니라, 자기한테 잘해주지 않는 게 불만인 모양이었다.하지만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윤지은과 더 이상 싸우기 싫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하라는 대로 할게요. 됐죠?”나는 성질을 최대한 죽이고 울분을 참으며 말했다.하지만 윤지은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네가 내 부하야? 왜 그렇게 굽신대는데?”윤지은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짜증 내도 안 된다, 공손하게 대해도 싫다?’“이봐요, 윤지은 씨, 트집 잡으려면 시원하게 말해요. 굳이 핑계까지 댈 필요는 없잖아요?”‘정말 어이없네. 부잣집 아가씨들은 왜 성격이 다 이 모양인 거야?’‘그래도 이런 아가씨들 모시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지? 아무튼 난 싫어.’나도 윤지은한테 화가 나 씩씩거리며 소파에 앉았다.윤지은은 내 태도에 더 화를 냈다.“지금 나한테 얼굴 찡그렸어? 당장 일어나!”윤지은은 나한테 걸어와서 소리쳤다.나도 순간 욱해서 퉁명스럽게 윤지은의 손을 쳐냈다.“싫어요. 안 일어나면 어쩔 건데요?”윤지은은 내 말에 화가 났는지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씩씩거렸다.나는 얼른 윤지은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것 봐요. 또 화내잖아요. 왜 몸에 문제가 많은지 알아요? 이렇게 자꾸 화를 내서 그래요. 자꾸 화내면 몸에 해롭다는 거 몰라요? 계속 이러면 그 병 평생 안 나아요.”나는 계속해서 반박하지 않고 윤지은의 문제점을 콕 집어 말했다. 솔직히 나도 싸우는 건 피하고 싶었다.윤지은은 당장 폭발할 것처럼 거
“지금이야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그런 사람 만나면 생각이 바뀔 거야.”윤해철은 여전히 자기 생각을 고수했다.다만 윤지은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 쓰레기가 얼굴에 쓰레기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 부잣집 도련님 중에 쓰레기가 없다는 건 어떻게 장담해요? 아빠는 그동안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 봤잖아요. 그럼 아빠가 한번 말해 봐요. 평소 만났던 부잣집 도련님 중에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어요?”“다 싸잡아서 욕하지 마. 부잣집 도련님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 누군가는 네가 말한 그런 사람이 있겠지...”“저는 싸잡아서 욕한 적 없어요. 그저 어떤 신분의 남자든 쓰레기는 똑같이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었어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래요. 그 누구도 저를 강요할 수 없어요.”“아빠가 정말 저를 아끼고 사랑하고 저를 위해 생각한다면 제 의견도 존중해 줘야 하잖아요. 계속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할 게 아니라...”“내가 언제 강요했다고 그래? 몇천억짜리 회사를 그냥 주겠다는데 그게 왜 강요야?”두 부녀가 싸움 날 것 같자 이영미는 얼른 끼어들어 분위기를 풀었다.“됐어. 그만 싸워. 어쩜 부녀라는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워대? 지은아, 가업을 잇고 싶지 않으면 잇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엄마가 네 편 들어줄게. 오늘 식사 자리에 꼭 참석해. 엄마 체면 봐서라도. 알았지?”윤지은은 소파에 기대앉아 건성으로 대답했다.“나중에 주소 보내줘요.”그 말에 이영미는 활짝 웃었다.“그래. 레스토랑 예약하면 바로 알려줄게.”“여보, 나 짐 싸는 거 좀 도와줘.”이영미는 윤해철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홀로 남겨진 나는 윤지은을 빤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 곁으로 움직였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나를 째려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얘기 좀 해요.”“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있던가?”“아무 거나 얘기하면 되죠. 그러고 보니 우리 안 본 지 꽤 됐잖아요.”“차라리 평생 내 눈앞에서
윤지은은 오늘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벨 소리에 문을 연 순간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 있는 모습에 잠깐 넋을 잃었다.나 역시 잠옷을 입고 머리를 부스스하게 풀어 헤친 윤지은을 보고 잠시 넋을 잃었다.윤지은은 평소 병원에 있을 때 항상 머리를 높게 얹고 흰 가운을 걸치고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때문에 윤지은이 잠옷 차림으로 머리를 부스스하게 풀어 헤친 이웃집 동생 같은 모습을 한 걸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손에 의학서적 한 권을 들고 있어 박학다식한 학자 가문 집 딸내미 같은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이건 너무 큰 반전이었다.그때 윤지은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홱 째려봤다.“뭘 봐? 여긴 왜 왔어?”나는 얼른 생각을 정리한 뒤 해명했다.“저도 윤지은 씨 어머님 아버님과 함께 왔어요.”이영미는 얼른 내 편을 들었다.“지은아, 엄마랑 아빠가 화해한 거 다 수호 씨 덕분이야. 오늘 저녁 수호 씨한테 밥 사주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와.”“저는 됐어요. 바빠요.”윤지은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색다르게 보였다.그때 이영미가 친근하게 딸의 팔짱을 끼며 애교 부렸다.“가자. 우리 가족이 오붓하게 식사하는 거 오랜만이잖아. 엄마가 부탁할게. 응?”이영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윤지은도 더 거절할 수 없었다.그때 윤해철이 대뜸 물었다.“넌 여기서 언제까지 살 거야?”“그게 아빠랑 뭔 상관인데요?”“지은,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저 원래 이런 거 알잖아요. 듣기 싫으면 듣지 말던가요.”윤지은은 말을 마친 뒤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 모습을 보며 윤해철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우리 부녀는 전생에 원수였나 봐. 오랜만에 만나는데 가족애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네. 하.”나는 이 상항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윤지은이 나한테만 쌀쌀맞게 구는 게 아니라 친아버지한테도 쌀쌀맞게 구는 것 같았다.‘원수를 스스로 만드네.’윤지은은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
강용재라면 바로 임천호 곁을 지키던 그 덩치다.전에 백조의 호수 근처에서 강용재가 나를 미행했던 적이 있다. 다만 내가 정신없을 때 양동준이 나타나 위기를 넘긴 거였다.나는 이제야 임천호가 나를 쉽게 놓아줄 리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동안 윤지은이 양동준더러 은밀히 나를 지켜주라고 한 덕에 그동안 내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거였다.그런데 이제 양동준이 출장 갔으니 강용재는 나 혼자 상대해야 한다.예전 같았으면 나는 분명 불안했을 테지만 지금은 두렵지 않았다.두려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 사람들은 상대가 두려워한다고 동정하거나 불쌍하게 여길 사람이 아니다.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요즘 나와 윤지은은 거의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게 양동준더러 나를 보호하라던 것까지는 영향이 미치지 않은 모양이다.자세히 생각해 보니 내 목숨은 윤지은이 구해준 것이기에 나는 윤지은한테 화를 낼 자격이 없었다.나는 그저 이영미 쪽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랐다. 그러면 이영미가 나를 도와 좋은 소리 몇 마디 해주면 나와 윤지은의 관계도 완화될 수 있으니까.아파트 단지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마침 이영미와 윤해철을 만났다.이영미는 다정하게 윤해철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얼굴이 발그스름한 게 한눈에 봐도 사랑을 듬뿍 받은 티가 났다.윤해철 역시 활기가 차 넘치는 게 전에 여색에 관심조차 없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두 사람 사이가 더 화목해진 걸 보니 나는 흐뭇했다.“사모님, 윤 회장님.”나는 먼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그러자 이영미가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수호 씨 정말 대단하더라? 우리 남편 지금 엄청 끝내줘. 호호호...”이영미는 말하는 와중에도 흐뭇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때 나는 이내 겸손하게 말했다.“별말씀을요. 다 윤 회장님이 꾸준히 단련하고 보양에 신경 쓴 덕분이에요. 그 기초에 제가 약물로 조금 치료해 드리니 바로 나은 거예요. 기반이 좋지 않으면 제가 아무리 약을 들이부어도
하정현의 아버지 하대철은 재직할 때, 많은 지역의 거물들에게 미움을 샀었다. 때문에 하대철이 무너지자마자 그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들이 하정현과 하정현의 어머니 진수향을 잡으려고 쫓아다녔다.그래서 진수향은 할 수 없이 몸을 숨겼고 하정현 역시 강북으로 도망쳐 와서 윤지은을 찾았다.하지만 하정현은 이런 일들을 윤지은한테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동안 윤지은의 기분이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하정현은 평소 털털하고 덤벙거리는 것 같지만 사실 매우 섬세했다. 때문에 기분도 안 좋은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아직 강북까지 쫓아온 건 아니기에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날 밤 용천 호텔에서 하정현은 아버지를 구해내라는 진수향의 전화를 받았다.하정현도 답답한 마음에 푸념했다.“제가 무슨 수로 아버지를 구해요? 제 코가 석 자인데...”[그런 건 모르겠고 우리가 너를 힘들게 키워 놨으니 이제 너도 은혜를 갚을 때가 됐어. 만약 네 아버지를 구해내지 못하면 앞으로 너 같은 딸 둔 적 없다고 생각할 거야.]진수향의 말은 너무 모질고 무자비해 하정현은 기분이 계속 안 좋았다. 심지어 그때 하정현은 생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다.하지만 나와 사모님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하정현은 스스로 자멸할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정현은 나쁜 놈 손에 유린당할 바에는 차라리 처음을 원하는 사람한테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강요는 아니니까.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하정현은 나를 찾아왔었다. 진실을 끝까지 얘기하지 않은 건 단순히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하정현은 자신의 비참한 가정사를 들키고 싶지 않았고 내가 그 때문에 자기를 동정해서 도와줄까 봐 싫었다.매일 가슴 확대 수술을 입에 달고 사는 듯하지만 사실 그건 하정현이 스스로를 속이려는 말이었다.생존조차 어려운 여자가 가슴 확대 수술에 신경 쓸 여력이 있을까?하정현은 단지 몸매를 더 예쁘게 만들어 모델 일이라도 하거나 아니
“보니까 은근히 지은이길 바라네?”나는 윤지은이라고 확신했기에 하정현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했다.그건 아마도 그 상대가 윤지은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너무 커서였을 수도 있었다. 정말 윤지은이면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생각하니 웃음이 흘러나왔다.“당연하죠. 그럼 더 이상 알아내려고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동안 내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했는데,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안심할 수 있겠어요.”“너무 쉽게 생각하네. 수호 씨가 비록 임유미 씨와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딱 한 끗 차이였어. 본인이 키스했던 사람이 수호 씨라는 걸 발견했을 때 유미 씨 표정이 어땠는지, 수호 씨는 아마 모를 거야.”그 말은 단번에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어떤 표정이었는데요? 놀라던가요? 아니면 실망하던가요?”“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어. 놀라움과 실망감도 있긴 했지만 뭔가 더 있었어.”“뭐가요? 무슨 뜻인데요?”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그러자 하정현은 귀찮았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몰라.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보지 못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지. 유미 씨는 상대가 수호 씨라는 걸 발견한 뒤에도 수호 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계속할지 말지 고민했어.”“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사모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나는 사모님을 대신해 해명했다.하정현은 그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유미 씨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아무튼 알아요.”“그럼 내 친구 지은이는 그런 사람이고?”“그런 뜻 아니에요.”“정수호, 수호 씨는 항상 본인 입장에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더라. 그 사람을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지은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심지어는 수호 씨네 형수와 애교 씨도 제대로 알아본 적 없지? 두고 봐, 두려워할수록 그 일이 닥칠 테니까.”하정현의 애매모호한 말을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어 나는 마음이 초조했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아무것도 아니야. 할 말은 다 했
“내 상체는 이미 봤지? 그러면 하체를 보여 줄게.”하정현은 말하면서 제 치마를 걷어 올렸다. 그녀는 섹시한 망사 스타킹을 신어 보일 듯 말 듯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하지만 망사 스타킹 아래는 새하얗기만 할 뿐 문신 같은 건 없었다.그럼 하정현도 배제할 수 있었다.그러면 그날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사람 중에 유미 사모님만 남게 된 셈이다.그건 내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하정현은 또 뜸을 들이며 말했다.“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 좀 해볼게.”나는 너무 초조해서 심장이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만 뜸 들이고 얼른 말해요. 대체 누군데요?”“사실, 사실 그날 수호 씨랑 몸 섞은 사람은 한 명이 아니야.”“네?”그 대답은 내 예상 범위를 너무 벗어나 나는 한참 동안 반응하지 못 했다.“그럼 유미 사모님이 있었는지만 말해줘요.”“있었어. 하지만 사람을 착각해서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 뒤 도망가 버려서 실질적인 관계는 맺지 않았어.”그 대답을 들으니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나와 사모님이 잔 게 아니라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죄책감 가질 필요도 사장님께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나는 심지어 그날 밤 나와 사모님이 나눴던 스킨십을 간과했다.그런 일은 나와 사모님만 입 밖에 꺼내지 않으면 점점 잊힐 테니까.“진짜 수호 씨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누구인지 안 궁금해?”하정현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싱긋 웃었다.“사모님만 아니면 다른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어요.”“만약 나라면?”나는 멍하니 하정현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진짜예요? 농담이죠?”“난 우선 수호 씨 진심이 듣고 싶어. 수호 씨는 누구였으면 좋겠어?”하정현은 문제를 나한테 던졌다.하지만 나는 누구이길 바란 적은 없다. 그저 그 사람이 절대 사모님만은 아니기를 바랐을 뿐이지.그 때문에 하정현이 그런 질문을 할 때 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소여정? 설마 그 여자인가
하정현의 말을 들으니 나는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하정현은 평소 무심하고 털털해 보이고 아버지가 잡혀갔다는 얘기를 농담하듯 가볍게 꺼냈지만 사실 그 모든 건 가짜였다. 나는 이제야 그간 하정현이 지은 미소가 모두 가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하정현은 사실 그 일로 계속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바보라고 하기에는 효심이 많고 똑똑하다고 하기에는 인터넷 대출을 받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지금은 대출 빚을 갚으려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고.하지만 계속 이렇게 가면 하정현은 분명 망가질 거다.“이 일은 지은 씨한테 얘기해 볼게요.”나는 속으로 마음을 굳혔다.하지만 하정현은 다급히 내 팔을 잡아당겼다.“지은한테 알려주지 마. 지은이는 안 돼.”“왜요? 지은 씨한테 2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인데 왜 본인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숨기는 거예요?”그 말에 하정현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내가 지은이한테 진 빚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빚지면 안 돼.”“그러 알아? 애초에 지은과 준휘를 연결해 준 사람도 나야. 준휘가 쫓아다닐 때 지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나서서 기호를 만들어 준 것 때문에 지은이는 모든 게 하늘의 뜻이라고 믿게 된 거라고...”하정현의 말에 나는 너무 놀라 한참 동안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러다 한참 고민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지은 씨도 정현 씨를 탓하지 않을 거예요. 안 그러면 정현 씨를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나도 지은이가 나를 탓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지은이는 착한 사람이야. 말을 좀 독하게 해서 그렇지. 그런데 그래서 더 이상 폐 끼칠 수 없어.”“하지만 이 일은 정현 씨 혼자서 해결할 방법이 없잖아요. 계속 이러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돼요.”“아무튼 이 일은 지은이한테 말하지 마. 동의하면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게.”“전 정현 씨의 비밀에 관
‘진짜 약도 없네. 지은 씨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그걸 또 몰래 찍었다고?’내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하정현이 갑자기 제 핸드폰을 내 앞으로 쑥 들이밀었다.그 사진을 본 순간 나는 다급히 액정을 가렸다.“미쳤어요? 이렇게 노골적인 사진을 찍으면 어떡해요? 가족이 볼까 봐 두렵지도 않아요?”하정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이게 뭐가 노골적이야? 가려야 할 곳은 다 가렸잖아.”‘이게 가린 거라고?’이런 사진은 섬나라에 수출해 봤자 삼류 축에도 못 낄 거다.나는 하정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아버지가 관직에 계셨고 가정 형편도 괜찮았으니 돈이 모자라면 집에 말하면 될 것인데, 왜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 사진들 당장 삭제해요. 이 사진은 얼굴도 나왔잖아요. 이 사진이 퍼지기라도 하면 앞으로 얼굴 어떻게 들고 다니려고요?”“하. 난 이런 말 들으려고 수호 씨 부른 거 아닌데. 나랑 같이 커플 사진 찍자...”“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저는 절대 이런 사진 찍지 않을 거예요.”나는 하정현의 생각을 아예 싹 잘라버리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러자 하정현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돈 주는데도 안 한다고? 사진 한 세트 찍으면 얼마나 벌 수 있는지 알아?”“저 지금 돈이 부족하지 않아요. 오히려 정현 씨야말로 돈이 부족하면 나한테나 친구한테 말해야지 왜 이런 짓을 해요?”“하.”하정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내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나 자이언트 베이비 아니거든. 그런데 왜 다른 사람한테 손 벌려야 하는데? 나도 내 능력으로 먹고사는 거니까 부끄러울 거 없다고 생각해.”그 말을 들으니 하정현이 궁하긴 궁했나 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이런 사진은 정상적인 여성이라면 절대 찍지 않았을 거다.그 순간 뭔가 머리를 스쳐지나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설마 어디서 대출받은 건 아니죠?”하정현은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더 이상 이영미와 한 공간에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 헐레벌떡 도망쳤다.그 와중에도 이영미는 나더러 자기 남편 꼭 데려오라고, 안 데려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윽박질렀다.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윤해철에게 전화했다.[수호 군, 나도 마침 자네한테 볼일 있었는데.]“무슨 일인데요?”[회사 일은 내가 이미 다 처리했으니 방법을 대서 우리 마누라한테 좀 전해줘. 내가 요즘 데리러 갈 거라고.]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이영미가 하고 싶다고 할 때 윤해철이 마침 이영미를 데리러 올 생각이었다니.나는 다급히 윤해철에게 말했다.“방금 사모님을 뵀는데 사모님도 회장님을 무척 그리워하셨어요.”[마침 잘됐네. 그럼 지금 당장 데리러 가지.]“윤 회장님, 잠깐만요.”[왜 그러나?]“사모님은 지금 집에 안 계세요. 밖에 있어요...”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러다 문득 내가 집을 나올 때 이영미가 보냈던 주소가 떠올라 나는 그 주소를 윤해철에게 보내고 그곳에서 이영미를 찾으라고 했다.어떻게 설명할지는 부부가 만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었다.이영미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내 임무도 완수한 셈이었다.전화를 끊고 얼마 뒤, 나는 마침 장을 보고 온 애교 누나와 마주쳤다.“수호 씨, 왜 여기 있어요?”나는 대충 얼버무려 상황을 무마하면서 애교 누나의 짐을 들어주었다.“애교 누나, 저 마침 가게에 나가볼 참이었어요. 형수는 수고스러운 대로 누나가 좀 돌봐줘요. 제가 가능한 빨리 도우미를 구할게요. 그러면 누나도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애교 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나도 어차피 할 일이 없으니 태연이 돌보는 건 나한테 맡겨요. 내가 어려울 때 태연이도 항상 나를 도왔는데 지금은 태연이가 어려운 시기이니 당연히 내가 도와야죠.”“그런데 일 구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일은 뭐 구한다고 바로 구해지는 건가요? 나 공무원 시험 준비하려고요. 나도 아버지 말고 나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요.”애교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