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바로 화내지 않았다.윤지은의 손에 지금 내 마사지룸 열쇠가 있기에 이대로 윤지은을 몰아붙였다간 당장 달려 나가 헛소리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됐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요?”윤지은의 미소는 단번에 사라지더니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역시나 아까 그 말이에요. 소여정한테서 떨어져요. 앞으로 만나지도 마요.”“그럴게요. 당연히 할 수 있죠. 하지만 그 전에 윤지은 씨도 할 수 있어야 해요.”윤지은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소여정이 또 찾아오면 아예 무시해요.”“나도 그럴 생각이에요. 하지만 내 일은 내가 결정하면 안 될까요? 소여정 씨 신분은 두말할 필요도 없잖아요. 그 여자나 윤지은 씨나 날 마구 휘두르면 나라고 뭐 어쩌겠어요?”“두 사람은 권력을 쥔 사람이고, 난 지극히 평범한 사림이에요. 내가 오히려 빌고 싶네요. 제발 좀 나 가만 내버려두면 안 돼요?”이 여자들이 나를 상대로 장난치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하지만 윤지은은 여전히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정 안 되면 여기 그만두면 안 돼요?”나는 너무 화가 나 헛웃음이 나왔다.“그만두라고요? 일 그만두면 손가락만 빨라고요? 아니면 윤지은 씨가 나 데리고 살아줄래요?”유지은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내가 왜 그쪽을 데리고 살아야 해요?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그러니까요. 그쪽이 뭔데 나더러 일 그만두라고 하냐고요? 나는 일 잘하고 있는데, 두 사람이 자꾸만 찾아와서 나 귀찮게 하잖아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하나같이 다 찾아와서 나 괴롭히기나 하고, 진짜 다들 너무 한 거 아니에요?”나는 한꺼번에 마음속에 삭였던 분노를 모두 분출했다.하지만 윤지은은 여전히 자기 의견을 고집했다.“일 그만두라고 하는 게 다 당신을 위해서라는 걸 왜 몰라요?”“참 고맙네요.”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화가 나서.그러자 윤지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태도 조심해요!”나는 너무 화나고 어이없어 터져버릴 것만
나는 윤지은의 태도에 자극 받아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주제넘게 덤벼들었다.“윤지은 씨 정말 이상한 거 알아요? 나를 그렇게 무시하면서 왜 계속 나랑 몸은 섞어요? 나를 깎아내리는 거예요? 아니면 본인을 깎아내리는 거예요?”“입 다물어요. 말했죠, 그 일은 다시는 언급하지 말라고!”윤지은은 버럭 소리쳤다.이에 내가 차갑게 반박했다.“나도 일부러 그 얘기 언급한 거 아니에요. 윤지은 씨가 먼저 나를 자극했잖아요. 제발 본인 위치 좀 정확히 해요. 윤지은 씨 입으로 우리 관계를 부인하면, 내 일에 참견할 자격도 없는 거죠.”“그러니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마요. 나 그런 거 딱 질색이니까.”나는 말하면 할수록 열이 올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윤지은을 저격했다.하지만 윤지은은 이번에는 웬일인지 나에게 맞서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얼마 뒤, 윤지은은 갑자기 일어나 떠나갔다. 그 행동에 나는 오히려 어리둥절했다.왜 그러는지 궁금했지만, 나는 쫓아가지 않았다.이제 겨우 악마 같은 여자가 떠나갔는데, 이건 내가 간절히 바라던 거 아닌가?나는 의자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속으로는 윤지은이 다시 오지 말라고 빌면서.한참 휴식하다가 기분 전환 겸 물 마시러 로비에 나갔더니 모태진이 쪼르르 달려왔다.“수호 씨, 아까 그 여자는 어떻게 보낸 거예요?”“나도 몰라요.”나는 의자에 기댄 채 힘 빠진 듯 대답했다.그러자 모태진이 놀란 듯 입을 크게 벌렸다.“에? 모른다고요? 그 여성분 분명 수호 씨 마사지룸에서 나왔잖아요.”“하, 묻지 말아 줄래요? 저 휴식하고 싶어요.”나는 맥이 빠져 하루 종일 일한 것보다 힘들었다.앞으로 다시는 이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모태진은 내가 안쓰럽다는 듯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그래요. 잘 휴식해요. 방해하지 않을게요.”모태진이 제 할 일 하러 떠나자 나는 그제야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모 선생님.”‘한은솔?’나는
나는 주선영한테 말했다.“너도 들어가서 마사지 좀 받아. 태진 선배 솜씨 좋아.”“됐어요, 나 돈 없어요.”주선영은 고개를 저었다.이에 내가 말했다.“돈은 내가 낼게. 넌 들어가기만 하면 돼.”주선영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이해되지 않는 듯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나는 이 단순한 여자애한테 상황을 설명하기 싫었다.“왜 나를 봐? 얼른 들어가. 넌 애교 누나 동생이니 내 동생이기도 해. 사촌 오빠가 도와주는 것도 안 돼?”사실 나와 주선영은 나이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런데 나를 오빠라고 자칭하는 건 내 판타지를 이루기 위해서다.하지만 이 단순한 여자애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 했다.주선영은 확실히 단순했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뿌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저, 저기, 혹시 정말 우리 언니랑 만나요?”“어린애는 어른들 일에 참견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기나 해.”주선영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나 이제 20살이라 어린애 아닌데.”그 옆에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네 몸이 20살이라도 머리는 어린애잖아. 어디 가서 속아야 정신 차리지.’“그래, 너 어린애 아니야. 그러니 얼른 들어가.”나는 어린애 달래듯 주선영을 달랬다.그랬더니 주선영은 역시나 기뻐했다.‘이런 여자애는 이 세상에 참 드문데.’아마도 가족이 애지중지 키우고 잘 보호해 줬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이토록 단순할 리 없다.사실 내가 주선영을 모태진의 마사지룸에 들여보내려 하는 건, 감시하기 위해서다.안에 있는 두 사람이 갑자기 활활 타올라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를까 봐.주선영이 들어가고 나서야 나는 안심하고 내 마사지룸으로 들어갔다.이제 1시간 정도만 더 있으면 퇴근이었다.나는 얼른 애교 누나한테 저녁에 밖에서 외식하며 제대로 축하하자는 문자를 보냈다.어쨌든 인생 첫 차를 샀으니, 이건 나한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다.애교 누나는 내 문자를 기다렸던 것처럼 바로 답장했다.[그래요. 그럼 샤부샤부 어때요?][뭘 먹을지는 누나가 결정해요.]내가 한창 애교
주선영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주선영을 먼저 애교 누나 집에 보내고, 나는 형네 집에 찾아갔다.이제 차키를 형수한테 돌려줄 생각이었다.하지만 내가 문을 두드렸는데 안에서 아무 응답도 없었다.당연히 집에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내 손에 형네 집 키를 쥐고 있었으니까.“형수, 형?”나는 두 사람을 불러 봤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보아하니 형과 형수가 정말 집에 없는 모양이었다.그게 왠지 조금 아쉬웠다.마지막으로 형수와 단둘이 집에 있을 기회인 줄 알았는데, 형수가 집에 없다니.나는 형수의 차키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 메모를 한 장 남겼다. 차를 샀으니 이제 형수 차가 필요 없다는 내용으로.차키와 메모를 식탁 위에 놓았지만 바로 떠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이 집에서 지낸 세월이 있고, 형수와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 것도 모두 이 공간이었으니.나는 방을 빙 둘러보다가 결국에는 형수와 형의 침실에 도착했다.이 집에서 내가 안 가본 곳이 없다. 유독 이 침실만은 거의 발을 들이지 않았다.얼마 전 형과 형수가 몸을 섞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불편했다.너무 아쉬워 침대에 앉아 한숨을 푹 쉬었다.나도 이런 날이 언젠가 올 줄 알았다.그렇게 한참 앉아 있다가 떠날 준비를 할 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하지만 그건 내 핸드폰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벨 소리는 침대 밑에서 나고 있었다.그걸 인지한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설마 침대 밑에 사람이 있나?’‘젠장, 너무 무섭잖아.’나는 얼른 손에 잡히는 물건을 대충 잡고 침대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누구야? 나와! 안 나오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연거푸 몇 번을 소리쳤지만 침대 아래에서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재빨리 침대 시트를 들었지만 선 자세로 침대 밑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나는 결국 몸을 쪼그렸다.침대 아래에는 아무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핸드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조금 경계를 풀고 바닥에 엎드렸더니 침대
하지만 전화 건너편에서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나도 들켰을까 봐 조마조마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형도 집에 없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형은 대체 왜 핸드폰을 숨겼지? 그 여자는 또 누구고?’나는 너무 궁금해서 이 사실을 알아내려고 낯선 번호를 적었다.이러고 나서 나중에 방법을 생각해 이게 무슨 일인지 확인할 생각이었다.나는 조용히 핸드폰을 원위치에 놓고 집을 나섰다.애교 누나 집에 도착했지만 나는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애교 누나도 걱정됐는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누나의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나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우리 샤부샤부 먹으러 가요.”나도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얼른 마음을 추슬렀다.우리는 반반 육수를 시키고 아주 맛나게 먹기 시작했다.그 덕에 쓸데없는 고민도 모두 날아갔다.먹고 마시며 대화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 11시가 되었다.주선영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난 뒤, 애교 누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오늘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나는 누나를 와락 끌어안았다.“애교 누나, 제가 노력해서 당당하게 누나와 결혼할게요.”애교 누나는 싱긋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누나와 손을 서로 잡은 채 마주 보고 있으니 너무 행복했다.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참지 못하고 애교 누나를 껴안고 입술을 들이밀었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다급히 내 입을 막았다.“안 돼요. 들어가서 해요.”“한 번만요. 다른 걸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내 애교에 누나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안 믿어요. 매번 그렇게 말하면서 약속 안 지키잖아요.”“누나는 저를 너무 잘 알아요. 우리 점점 더 케미가 생기는 것 같은데요?”나는 일부러 애교 누나를 희롱했다.그때, 형네 집 문이 열리더니 동성 형이 걸어 나왔다.그럼에도 나는 애교 누나를 놓아주지 않았다.누나가 이미 왕정민과 이혼했으니, 누구보다 당당하게 만날 수 있었다.하지만 형의 안색이 이상한 걸 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아니
“그래?”겉웃음을 짓는 동성 형을 보니 나는 등골이 오싹해 대충 핑계를 대고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동성 형이 나를 붙잡았다.“수호야, 그렇게 급하게 돌아갈 필요 없잖아. 형 너랑 할 말 있어.”나는 심장이 철렁해서 속으로 형이 대체 뭐 하자는 건지 생각했다.그때 형이 두말없이 나를 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주 강박적이고 난폭하게 잡아당기며 나에게 반박할 여지도 주지 않았다.나는 너무 당황해서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형이 내 말을 전혀 믿지 않고 있다는 걸 아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러는 것도 나에게 따져 물으려는 거고.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잘못한 사람은 내가 아닌데, 내가 겁먹을 게 뭐 있나?나는 형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물었다.“날 여기까지 끌고 온 거 전화에 관해 물어보기 위해서지?”“너 그 전화 받았지?”동성 형은 숨길 생각도 없는지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나도 알고 있다. 형한테 직접적인 증거를 잡혀 잡아떼도 소용없다는 걸.때문에 나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내가 그 전화 받았어. 그리고 전화한 사람이 여자라는 것도 알아. 형 지금 형수 몰래 여분의 핸드폰을 준비해서 어디서 난지도 모를 여자랑 연락하고 지내고 있잖아. 나야말로 묻고 싶네, 대체 뭐 하자는 거야?”나는 동성 형을 반히 바라봤다. 하지만 형의 얼굴에는 후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나를 질책하고 있었다.“정수호, 내 말에 먼저 대답해. 차키 돌려주러 왔다면서 우리 침실에는 왜 들어갔어?”나는 너무 화가 났다.형이 그런 짓을 하고 후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나를 질책하고 있다니?그렇다는 건 전에 나한테 애원했던 것도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 아닌가?형은 형수와 제대로 살아볼 생각이 아예 없고, 후회하고 뉘우친 적도 없다.그 모든 건 형이 만들어낸 거짓이었다.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형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이 나쁜 자식! 쓰레기! 형수와 잘 살겠다고 약속했으
나도 모르겠다. 확신이 들지 않는다.나는 묵묵히 담배를 피우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옆에 있던 동성 형도 담배에 불을 붙이며 당황한 질문을 해 왔다.“내 일을 다 알았다면 너는? 솔직히 너, 네 형수랑 잘해보고 싶지?”“아니.”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한편으로 마음이 찔려 들킬까 봐 겁났다.그러자 동성 형이 피식 웃었다.“아니라고? 아니면 왜 우리 방에 들어갔어?”“궁금해서 들어가면 안 돼?”“수호야, 난 네가 자라는 거 지켜본 사람이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내가 왜 너를 집에 들였는지 알아? 네가 점잖은 사람이라서, 내 여자한테 더러운 마음 품지 않을 걸 아니까, 그래서 여기서 살게 했어. 하지만 나도 바보는 아니야. 네 변화를 내가 모를 것 같아?”형의 말에 너무 당황한 나는 담배로 마음을 삼출 수밖에 없었다.나는 사실 괜찮다. 형이 나를 때리든 욕하든 상관없다. 하지만 형수한테 폐 끼칠 수는 없다.나는 형수의 이미지가 나 때문에 훼손되는 걸 원치 않는다.형이 나와 형수 사이의 일을 알고 형수한테 함부로 대하는 건 더더욱 싫다.때문에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맞아. 나 변했어. 하지만 사람은 원래 변하지 않아? 형도 나를 이용해서 소여정한테 다리를 놓으려 했잖아. 왕정민과 협력하려고 나더러 애교 누나를 꼬시라고 했잖아. 나야말로 묻고 싶어. 그동안 나한테 잘해줬던 거, 목적이 있어서지?”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화제를 돌리며 마음속 의문을 제기했다.동성 형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나를 보더니 다리를 꼬며 가벼운 모습을 보였다.“그렇다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데? 우리가 무슨 사이라도 돼? 고작 같은 동네에서 자란 형 동생이야. 내가 왜 조건도 없이 너를 도와줘야 하는데? 내가 뭐 성인군자도 아니고.”“그리고 막말로, 애교 씨를 꼬시고 소여정한테 접근하라고 한 거, 너한테 아무 이득도 없었어?”동성 형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해 오히려 내가 잘못한 사람 같았다.나는 화가 뻗쳐 손데 든 담배꽁초를
나는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내가 젊다는 이유로 날 가르치려 들지 마. 형도 나랑 나이 차이 얼마 안 나잖아. 현자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형이 만약 아주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라면 형의 말에 동의하겠지만, 형도 지금은 실패자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날 가르치는 거지?형이 한 말은 너무 우스웠다.그때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형이 입가에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예전에는 동성 형, 동성 형 하며 따르더니, 이제는 그런 태도로 얘기하네? 솔직히 기뻐. 네가 성장했다는 거니까.”나는 그 말에 구역질이 났다.‘형이 기쁠 게 뭐 있는데?’‘기쁘다면 표정이나 좀 신경 쓰지.’나는 동성 형을 이제는 꿰뚫어 볼 수 있다. 항상 본인이 다 맞고, 잘난 체하는 족속.‘이런 방식으로 나를 주무르려 하다니. 내가 예전의 나인 줄 아나? 유치하긴.’이젠 더 이상 형을 동정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않는다. 현재 남은 검 오직 혐오감뿐이다.나는 씩씩거리며 소파에 다시 앉았다.“쓸데없는 얘긴 그만하고 솔직히 말해. 전화한 여자 누구야?”“나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믿을래?”“X발, 내가 등신도 아니고, 그걸 믿을 것 같아?”나는 버럭 소리쳤다.형이 이런 말을 하는 것마저 나에 대한 모욕 같았다.아무 사이도 아니면 폰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있나? 심지어 그럴 숨길 필요가 있나?그건 세 살짜리 어린이한테 말해도 믿지 않을 거다.형의 모습을 보니 솔직히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내 말 사실이야. 네가 형수한테 다른 마음 없다는 것과 같아.”형의 말에는 분명 숨은 뜻이 담겨 있었다.이건 뭐 자기 입에서 솔직한 말을 듣고 싶으면 먼저 솔직하게 말하라는 거랑 뭐가 다르지?나는 속으로 냉소했다.형이 대단하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쏙 빠져나가다니.나는 차갑게 웃으며 형을 바라봤다.“계속 그렇게 해. 언젠가는 결혼 생활이 파멸로 갈 거야.”“그럴 리 없어. 아이만 있으면 네 형수는 절대 나랑 이혼 안 할 거야.”형은 아주
나는 더 이상 이영미와 한 공간에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 헐레벌떡 도망쳤다.그 와중에도 이영미는 나더러 자기 남편 꼭 데려오라고, 안 데려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윽박질렀다.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윤해철에게 전화했다.[수호 군, 나도 마침 자네한테 볼일 있었는데.]“무슨 일인데요?”[회사 일은 내가 이미 다 처리했으니 방법을 대서 우리 마누라한테 좀 전해줘. 내가 요즘 데리러 갈 거라고.]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이영미가 하고 싶다고 할 때 윤해철이 마침 이영미를 데리러 올 생각이었다니.나는 다급히 윤해철에게 말했다.“방금 사모님을 뵀는데 사모님도 회장님을 무척 그리워하셨어요.”[마침 잘됐네. 그럼 지금 당장 데리러 가지.]“윤 회장님, 잠깐만요.”[왜 그러나?]“사모님은 지금 집에 안 계세요. 밖에 있어요...”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러다 문득 내가 집을 나올 때 이영미가 보냈던 주소가 떠올라 나는 그 주소를 윤해철에게 보내고 그곳에서 이영미를 찾으라고 했다.어떻게 설명할지는 부부가 만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었다.이영미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내 임무도 완수한 셈이었다.전화를 끊고 얼마 뒤, 나는 마침 장을 보고 온 애교 누나와 마주쳤다.“수호 씨, 왜 여기 있어요?”나는 대충 얼버무려 상황을 무마하면서 애교 누나의 짐을 들어주었다.“애교 누나, 저 마침 가게에 나가볼 참이었어요. 형수는 수고스러운 대로 누나가 좀 돌봐줘요. 제가 가능한 빨리 도우미를 구할게요. 그러면 누나도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애교 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나도 어차피 할 일이 없으니 태연이 돌보는 건 나한테 맡겨요. 내가 어려울 때 태연이도 항상 나를 도왔는데 지금은 태연이가 어려운 시기이니 당연히 내가 도와야죠.”“그런데 일 구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일은 뭐 구한다고 바로 구해지는 건가요? 나 공무원 시험 준비하려고요. 나도 아버지 말고 나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요.”애교 누나
“그럼 얼른 누우세요. 빨리 끝낼게요.”이영미는 두말없이 소파 위에 엎드렸다.나는 먼저 이영미의 허리부터 주물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영미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어머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나는 흠칫 놀라 손을 뒤로 뺐다.그랬더니 이영미가 발긋한 얼굴로 말했다.“남자가 내 몸 만지는 게 오랜만이라 흥분했나 봐.”“계속 그러면 제가 어떻게 주물러 드려요?”“이거 다 정상적인 반응이잖아. 의사라는 사람이 침착해야지.”나는 이런 목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침착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사람 혼을 쏙 빼놓는 듯한 목소리는 아마 내시가 들어도 견디지 못할 거다.“안 돼요. 계속 그러면 마사지 안 해드릴 거예요.”나는 참지 못해 난처한 상황이 생길까 봐 먼저 물러섰다.하지만 이영미는 그것조차도 반대했다.“안돼. 계속 해. 안 그러면 안 갈 거니까. 나도 이것저것 다 겪어본 사람인데 뭔들 못 봤겠어? 그러니 어색하지 마. 내 눈에 수호 씨는 꼬맹이나 다름없으니까. 난 괜찮아.”이영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나도 이제 성인이고 혈기 왕성한 나이인데, 어떻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여길 수 있냔 말이다.하지만 이영미는 한사코 내 팔을 꽉 잡고 어디 가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닿는 피붓결에 나는 마음이 더 콩닥거렸다.“알았어요. 그럼 잘 누워 있어요. 계속 마사지해 드릴게요. 하지만 소리 나지 않게 좀 참아주세요.”“그건 안 되지. 욕망을 억누르는 건 몸에 안 좋아.”이영미의 말은 예전에 남주 누나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영미는 내 마사지를 받으며 한편으론 감탄했다.“여자는 역시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니까. 혼자 하는 건 너무 재미없어. 남자도 마찬가지로 여자의 손길이 필요한 법이지. 안 그러면 조물주가 왜 남녀 성별을 따로 만들었겠어? 그것도 상호 보완할 수 있게. 안 그래?”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 여기 느
이영미는 제비집이며 인삼 등 다양한 보양식을 가져왔다.“어머님, 이거 다 너무 귀한 것들이에요.”“이건 다 수호 씨 형수 주려고 가져온 것들이야. 지금 의식이 없다고 해서 죽만 먹이면 안 돼. 영양소를 많이 공급해 줘야지.”나는 형수 대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혹시 윤지은 씨는 함께 오지 않았어요?”그때 애교 누나가 불쑥 물어봤다.“그 계집애는 또 무슨 일인지 함께 내려오자고 하니까 기어코 싫다고 하지 뭐야.”이영미는 말을 마친 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혹시 우리 지은이랑 싸웠어?”“아니요.”“못 믿겠는데? 지은이가 말은 독하게 해도 마음씨는 착한 애야. 네 형수 줄 거라니까 이렇게 바리바리 준비해 준 걸 보면 네 형수를 친구로 생각한다는 뜻이거든. 그런데도 기어코 직접 오지 않겠다는 걸 보면 이유는 하나야. 바로 너. 너희 둘 요즘 싸웠지?”나는 더 이상 그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어머님, 정말 아니에요.”하지만 이영미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아니긴 무슨. 두 사람 분명 문제 있는데.”그때 애교 누나는 내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얘기 나누세요. 저는 내려가서 뭐 좀 사 올게요.”역시 애교 누나는 내가 말하기 부끄러워할까 봐 배려해 주려고 자리를 피한 거였다.애교 누나가 떠난 뒤 이영미는 내 옆에 꼭 붙어 앉았다.“이제 다른 사람도 없으니 말할 수 있지? 대충 얼버무릴 생각하지 마.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나도 수호 씨 용서 안 할 거니까.”이영미가 계속 꼬치꼬치 캐묻자 나는 할 수 없이 그날 병원에서 싸웠던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어머님도 제가 쓰레기 같아요?”“응. 조금. 내 딸과 사귀면서 다른 여자와도 사귄다니. 내 딸의 매력이 그렇게 부족해? 한 명으로는 만족하지 못 하는 거야?”이영미의 말에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어머님은 저와 지은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잖아요. 우리는 각자 원하는 걸 교환한 것뿐이지 마음을 주고받고 결혼 얘기까지
나는 내가 예전에 살던 방을 들여다보았다.이곳은 내 추억이 너무 많이 깃든 곳이다. 상황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익숙한 물건들을 보니 나는 문득 형수와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고 형수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 모든 건 어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했다.“저 잠깐 형수 좀 보고 올게요.”나는 형수 방으로 향했다.혼자 얌전히 누워 곤히 잠든 형수의 모습은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았다.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이불을 덮은 모습은 진짜 그냥 자는 것 같았다.나는 젖은 수건으로 형수의 몸을 닦아준 뒤 면봉에 물을 묻혀 형수의 입을 적셔주었다.형수의 현재 상태는 기껏해야 죽 같은 음식밖에 먹일 수 없고 또 매일 많은 량을 먹을 수도 없다. 나도 당연히 형수가 빨리 깨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날 밤 이후로 내가 무슨 짓을 해서 자극해도 형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애교 누나가 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내가 먹일게요. 수호 씨는 불편하면 가서 쉬어요.”“네. 애교 누나. 그럼 부탁할게요.”사실 나는 너무 아파 더 이상 형수를 돌볼 상황이 아니었기에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갔다.형수는 내 방을 예전 내가 떠나던 그날 그대로 남겨두었다.형수와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니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나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첫 번째는 나비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형수의 일 때문이었다.원래 나비 일은 이제 그냥 묻어두려고 했는데 결국 어젯밤 또 그렇게 되어버렸다.솔직히 나 스스로도 내가 헛것을 봤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용천 호텔에서의 그날 밤 나와 잔 사람이 세 명 중 한 명이라면 아무리 해도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다.결국 나는 환각이라고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나는 침대에 똑바로 누운 채 눈을 지그시 감고는 30분 동안 얕은 수면을 취했다.고작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잤다고 정신상태는 훨씬 나아졌다.침실에서 나와 보
그 순간 나는 머리가 띵했다. 나는 애써 눈을 뜨려고 했지만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눈꺼풀이 무거워 도저히 뜰 수 없었다.다만 그 와중에 약간의 의식은 존재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용천 호텔에서 나와 몸을 섞은 사람이 사모님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사모님 댁에서 지내면서 사모님 다리에 있는 나비 문신을 보고 내 추측을 확신했고.하지만 지금껏 나는 그게 사모님이든 아니든 무조건 사모님과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최면했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사장님께 미안한 행동은 할 수 없었으니까.하지만 오늘 저녁 나는 또 잠결에 그 나비를 보게 된 거다. 그 순간 나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뭐지?’오늘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날 용천 호텔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애교 누나뿐이다.하지만 애교 누나 몸에는 분명 나비 문신이 없다.게다가 나는 애교 누나 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애교 누나의 피부는 이 정도로 희지 않다.하지만 애교 누나가 아니면 또 누구란 말인가?고아연? 아니면 고수연?그날 밤 나는 이 두 여자를 본 적이 없다.나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했고 상대가 누구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무엇보다 오늘 너무 취해 머리가 어지러웠기에 눈을 뜰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로 애써 몸부림쳤지만 결국 의식이 점멸되어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그리고 나는 다음 날까지 푹 잠들었다.내가 바닥에서 일어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깨어났다. 내가 그중 맨 마지막에 깨어난 듯했다.나는 아픈 머리를 문지르다가 테이블을 치우는 애교 누나를 발견했다.“누나, 다른 사람들은요?”애교 누나는 테이블을 정리하면서 대답했다.“다들 일이 있다고 먼저 갔어요. 수호 씨를 방에서 자라고 하려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 아무리 깨워도 깨지 않더라고요.”“애교 누나, 어젯밤 혹시 안 잤어요?”나는 몸부림치며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그때 애교 누나가 입을 열었다.“늦게 잠들긴 했지만 안 잔 건 아니에요. 나
윤지은은 대체 진동성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 일이 있은 후 진동성은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다.때문에 우리는 형수를 집으로 모신 뒤 번갈아 가면서 돌보기로 했다. 그러는 게 서로서로 안심이 되기도 했으니까.그 일로 애교 누나는 아버지를 설득해 원래 살던 형수네 옆집으로 다시 이사 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한테 다시 함께 살자고 초대했다.나는 잠시 고민 끝에 결국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당분간은 누나랑 같이 살 수 없어요.”“왜요?”애교 누나는 실망스러운 듯 나를 바라봤다.나는 애교 누나의 얼굴을 감싸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 사실을 누나 아버지가 알게 되면 저를 더 싫어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성공하기 전까지 같이 살면 안 돼요. 그래야 누나 아버지를 화나게 하거나 누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 거예요.”애교 누나는 이내 미소를 되찾았다.“바보. 수호 씨가 나를 이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요.”“당연하죠. 저는 정말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요. 때문에 누나 명성을 제가 망가뜨릴 수는 없어요.”“그래요. 수호 씨 말에도 일리가 있네요. 하지만 월세방에서 지내는 건 너무 머니까 태연이네 집에서 지내는 건 어때요?”애교 누나의 제안에 나는 살짝 어리둥절했다.“왜요?”“예전에도 태연이네 집에서 지냈잖아요. 지금 다시 거기서 지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동네 사람들도 태연이 교통사고로 의식이 없는 걸 알고, 진동성은 바빠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도 아니까 동생이 대신 형수 돌보는 건 당연하잖아요.”애교 누나는 조리 정연하게 분석했다.사실 애교 누나는 내가 자기랑 같이 살든 아니면 형수 집에서 지내든 가까이에 있고 싶은 거였다. 하지만 나도 나름 걱정이 있었다.“진동성과 형수 사이에 이혼 얘기가 오가고 있다는 건 언젠가 소문이 퍼질 거예요. 그런데 제가 형수 집에 무슨 신분으로 있겠어요? 이건 형수의 평판에도 안 좋아요. 차라리 월세방에서 지내면서 매일 보러 갈게요.”애교 누나는 아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괜찮아요.”“혹시 불편하지는 않아요? 아까 걸을 때 보니 허리를 짚고 걷던데요.”나는 걱정이 되어 물어봤다. 무엇보다 방금 사모님이 계속 허리를 짚고 걷는 걸 보니 허리가 분명 불편한 것 같아 보였다.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제가 주물러 드릴까요?”“아, 아니에요.”사모님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행동했다.‘대체 왜 이러지?’사모님이 싫다고 하니 나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하지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고 할 때 사모님이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수호 씨, 그날 밤 일은...”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어느 날 밤을 말하는 거지?’그러다가 사모님이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본 후에야 나는 사모님이 치마가 젖었던 그날을 말한다는 걸 깨달았다.나는 다급히 설명했다.“사모님이 말씀하지 않으면 진작 잊어버렸어요.”“정말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제가 왜 거짓말하겠어요? 저 매일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할 수 없어요.”사모님의 미소는 살짝 이상했다. 그건 아무리 봐도 겉웃음이었다.“그럼 다행이네요. 일 봐요.”나는 뒤돌아 집을 나섰다.그 시각 임유미는 안절부절못하며 치맛자락을 잡은 채 나를 훔쳐보았다.임유미는 요즘 왠지 모르게 저녁만 되면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 몰래 야한 영상을 보곤 한다. 그것도 나이 많은 여자 주인공과 젊고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영상을.영상 속 어린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누나라고 부를 때면 임유미는 따라서 흥분하곤 했고 강렬한 오르가슴을 느끼곤 했다.임유미도 자기가 요즘 왜 이러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렇다고 남편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방금 나를 붙잡은 것도 아무 이유 없이 단순히 내 목소리를 듣고 내 탄탄한 팔뚝을 한 번 더 보기 위해서였다. 가끔 임유미는 자기 마음속에 다른 자신이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게, 그동안 자기한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심지어 가끔은 자기 친구들과 함께하
“사장님도 이미 최선을 다하셨어요.”나는 정 사장님을 매우 존경한다. 하지만 나더러 정 사장님처럼 하라고 하면 할 자신이 없다.내 생각도 사실은 만건희나 이규민과 다를 게 없다. 장사는 당연히 돈을 버는 게 목적이니까.하지만 이 일은 정 사장님이 나한테 부탁한 일이기에 나는 책임지고 정 사장님을 도와야 한다. 비록 모든 사람은 이미 마음이 변해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지만.나는 정 사장님이 자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이건 정 사장님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니까.나는 더 이상 정 사장님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방을 나왔다.사실 나는 정 사장님이 왜 이토록 박애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이 공무원이 되었다면 분명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사모님이 다가오자 나는 궁금했던 걸 물었다.“사모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뭔데요? 물어봐요.”나는 얼른 궁금한 걸 물었다.“사실 좀 궁금해서요. 정 사장님은 왜 상회를 설립하셨어요?”“그걸 설명하려면 우리 그이 어릴 때부터 이야기해야 해요.”사모님은 나와 함께 소파에 앉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사실 호섭 씨는 고아예요. 나도 들은 거지만 부모님 모두 병으로 돌아가셨대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의학을 파고들었고 커서도 계속 의학 분야에서 일했어요.”“화인당도 사실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오픈한 게 아니에요. 그냥 최선을 다해 병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병을 볼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서였어요.”그 말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정 사장님이 이토록 위대한 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호섭 씨는 착한 사람이라 누군가 병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가장 싫어해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 현실성 없다고 하겠지만 이게 사실인걸요. 호섭 씨는 누구한테나 친절해요. 선악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도 아니고요. 게다가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한테 잘해줘요. 내 눈에 호섭 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남자예요.”나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깊이 동감하는 바니까.정 사장님은 모
“나는 이 사장을 따를 생각이 없지만, 정 사장 생각이 너무 허황한 건 사실이에요. 우리가 장사하는 목적이 돈 벌기 위해서인 건 맞잖아요. 그런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걸 왜 하지 않으려 하죠?”민건희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민건희는 겉으로는 정 사장님 뜻에 따르는 척했지만 사실 진작 마음이 변했다.테이블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몸을 앞으로 기울였던 나는 민건희의 말을 듣는 순간 몸을 뒤로 빼 의자에 기댔다.“민 사장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민건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솔직히 우리끼리 협력할 수 있어요. 강북 약재 시장 자원 대부분 정 사장이 쥐고 있으니 우리는 원가대로 다른 사장한테 팔면 그만이잖아요. 그러면 수호 씨도 정 사장한테 결과를 보여드릴 수 있고요.”“다만 서윤기한테만큼은 약재 가격을 좀 더 쳐줘서 그자가 우리를 도와 더 큰 이익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게 하면 돼요.”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어떻게 쳐줄 건데요? 진짜 약재를 사용하면 서윤기가 제공하는 가격이 이미 최저 가격이에요. 민 사장님 말대로 하려면 약재를 바꾸는 수밖에 없어요.”민건희은 얼른 자기 생각을 말했다.“약재를 바꾸는 게 안 될 것도 없죠. 그저 품질이 좀 떨어지는 거로 바꿀 생각이지 가짜 약재로 숫자를 채우자는 게 아니잖아요.”나는 속내를 꿰뚫어 볼 것처럼 민건희를 빤히 바라봤다.적어도 민건희는 이규민이나 전광진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민건희는 그저 다른 방식으로 제 욕심을 채우려 하는 것뿐이었다.나는 싱긋 웃으며 말을 아꼈다.“민 사장님, 오늘 만나지 않았던 거로 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내가 떠나려고 하자 민건희는 다급하게 일어섰다.“왜요? 싫어요? 내가 말한 방법은 우리 두 사람한테 모두 이로운 방법일 텐데 왜 싫다는 거죠?”“이건 정 사장님이 원하는 게 아니에요.”민건희는 대뜸 물었다.“정 사장 생각은 너무 현실성 없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백성들한테 좋은 일을 하자니, 그게 장사꾼이 할 수 있는 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