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서 한참을 기다리니 제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그 남자는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황용길 일당을 잡을 때 현장을 지휘했던 베테랑 형사였다.“외삼촌, 어서 와요.”윤미화는 기쁜 얼굴로 얼른 달려갔다.그 모습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베테랑 형사가 바로 윤미화의 외삼촌이었다니.이건 너무 기막힌 우연이다.베테랑 형사도 나를 보고 놀랐는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이 총각이 여긴 왜 있지?”“두 사람 혹시 알아요?”나는 얼른 설명했다.“윤 사장님 외삼촌이 황용길을 체포한 형사예요. 전에 본 적 있어요.”“그렇구나. 삼촌, 누가 우리를 미행해요. 사람 좀 붙여서 우리 지켜줘요.”그 말에 도지섭은 이내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 대체 누가 그런 짓을 벌이는 거야? 대낮에 미행이라니.”“임천호 쪽 사람일 가능성이 커요. 삼촌이 점심에 잡은 황용길이 임천호 사람이거든요.”도지섭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그런데 그 자식은 임천호와의 관계를 부정해. 딱 잘라서 자기가 한 짓이라네.”나는 진작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직접 들으니 실망감이 밀려왔다.임천호는 법을 이리저리 너무 잘 피해 다닌다. 그런 사람을 하루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난 하루도 편히 살 수 없다.하지만 임천호를 상대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도지섭은 윤미화와 한참 동안 얘기하다가 나를 바라봤다.“정수호 씨, 이번 일은 정수호 씨 공이 커요. 내가 이미 상부에 포상금을 신청했어요.”‘이건 또 어디서 갑자기 굴러들어 온 복이지?’“감사합니다, 도 형사님.”“감사할 거 뭐 있어요. 수호 씨가 응당 받아야 할 건데요.”이런 게 바로 전화위복이라는 건가?비록 정부에서 주는 포상금은 많지 않겠지만 이런 영예는 돈 얼마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거다.게다가 도지섭의 말을 들어보면 포상금 외에도 우수 청년상까지 수여한다고 했다.그 상장을 우리 천수당에 걸어두면, 더할 나위 없는 큰 영광일 거다.그 뒤, 도지섭이 경찰차로
“네!”강용재는 곧바로 뒤돌아섰다.조용히 시가에 불을 붙인 임천호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원래는 나를 끌어들여 감옥에 처넣을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돌을 들어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으니. 그것도 모자라 중요한 부하 한 명을 일기까지 했으니 임천호는 그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렸다....오후에 출발한 우리는 밤 11시가 되어서야 강북에 도착했다.오는 내내 또 사고라도 날까 봐, 우리는 휴식도 하지 않고 끼니도 챙겨 먹지 못했다.그렇게 겨우 강북에 도착하니 나와 윤미화는 그제야 안심했다.다만 오는 동안 배를 쫄쫄 굶은 탓에 나는 당장 배부터 채우고 싶었다.“내가 알아봤는데 임천호가 아직 강북에 있대. 이따 혼자 돌아갈 때 조심해.”사실 인맥이 넓은 윤미화는 강북에 도착하기 전에 임천호의 행방을 수소문해 냈다.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윤 사장님도 조심해요.”식사를 마친 우리는 각자 헤어졌다.나는 차에 앉아 월세방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형수 집에 갈지 고민했다.만약 임천호가 나를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라면 분명 또 사람을 붙일 거고 강용재도 또 뭔가 손을 쓸 게 뻔했다.나는 형수와 형수 동생들한테 폐 끼치고 싶지 않았다. 주선영한테도 마찬가지였고. 때문에 나는 결국 호텔 방에 묵기로 했다.비록 혼자라 불안하고 위험했지만, 다른 사람한테 폐 끼치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았다.‘S시 한 번 갔다가 이게 뭔 봉변인지.’하지만 난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내가 그때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해도 황용길은 절대 나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다.‘됐어. 그만 생각해. 지내다 보면 답은 나오겠지.’하루 종일 분주하게 돌아다닌 데다 계속 유지하고 있던 긴장감이 풀린 탓에 나는 너무 피곤했다.때문에 샤워를 하자마자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그 잠은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이어졌다.평온한 밤을 보낸 나는 씻고 준비를 마친 뒤 청수당으로 향했다.민우와 현성은 내가 S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심했다. 이에 나는 두 사람을 사무실
우리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직원이 갑자기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정 사장님, 주 사장님이 볼일 있다면서 찾아오셨어요.”“그래요. 알았어요.”우리는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그렇게 중앙홀에 도착했더니 주해진이 허허 웃으며 사람들에게 뭔가를 소개하고 있었다.“사자님들, 우리 가게 약재는 모두 최상품입니다. 특히 야생 산삼과 영지는 최상급 중의 최상급이죠. 다들 제 체면을 봐서 구매해 준다면 가격은 제가 싸게 해드릴게요.”주해진은 혼자 온 게 아니라 사람을 몇 명 데리고 왔다. 보아하니 주해진과 함께 온 사장들은 야생 산삼과 영지와 같은 약재를 원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우리 가게에 있는 최상급 야생 인삼과 영지는 모두 임천호에게 팔아버렸다. 게다가 아직 재고 보충을 하지 않은 상태다.나는 얼른 민우와 현성이를 불러내 사장님들을 응대하게 하고 주해진을 옆으로 불러냈다.“우리 가게에 산삼과 영지가 없어.”“왜?”“이틀 전에 다 팔았어.”“헐. 정말이야? 얼마나 벌었는데?”그걸 다 팔면 어마어마한 가격이기에 주해진은 단번에 흥분했다. 누구에게 팔든 그로서는 돈만 벌 수 있으면 그만이었으니까.하지만 이번 사태는 조금 복잡해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사실...”나는 결국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그걸 들은 주해진의 안색은 어둡다 못해 흉측하기까지 했다.“지금 그러니까 사기당했다는 거야? 그걸 다 가져갔는데 일전한 푼도 못 받아내고 오히려 몇천만 원이나 꼬라박았다고?”주해진의 언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바람에 가게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이에 나는 다급히 낮은 소리로 귀띔했다.“그 돈은 다 내가 책임지고 메꿀게.”“정수호. 이렇게 큰일이 있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나 어제 한밤중에 도착했어. 오늘 아침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주 사장이 들이닥친 거고.”“지금 내 탓이라는 거야?”“그런 뜻 아니야. 누가 사기당할 거라고 생각했겠어? 이미 벌어진 일인데 이제 와서 나
“안돼.”주해진은 여전히 거절했다.나는 애써 화를 눌러 참으며 말했다.“그럼 어떻게 할 건데?”“네가 정호섭 가게에 가서 인삼과 영지를 빌려와.”‘사 오는 것도 아니고 빌려 오라니.’이 상황에서도 주해진은 원가로 물건을 들여와 최대 수익을 낼 생각만 하고 있었다.‘머리 참 잘 굴리네.’돈은 벌고 싶고, 손해는 나더러 메꾸라고 하고, 화인당에 진 빚도 내가 갚게 할 생각이라니.누가 잘못했으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니 이건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다지만, 주해진이 이번 수익을 독식하겠다고 한 건 용납할 수 없었다.나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해 언성을 높였다.“내가 왜 그래야지?”“고객을 데려온 사람이 나인데, 당연히 내가 가져야 하는 거 아니야?”나는 너무 화가 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그렇게 치면 우리 셋은 매일 가게 돌보니까 평소 수익은 우리가 가지면 되겠네?”“애초에 가게를 돌보겠다고 한 건 너희들이야. 처음부터 나랑 진호는 가게에 관한 모든 걸 관여하지 않기로 해서 난 그냥 앉아 놀면서 연말 보너스만 받아 챙기면 그만이었어.”“그런데 내가 왜 고생하면서 손님 데려왔는데? 이게 다 돈 좀 더 벌려고 그런 거 아니야.”주해진은 이것도 말이라고 당당하게 뱉어냈다.나는 이제야 주해진이 왜 김진호와 붙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두 사람보다 더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마 찾아보기도 힘들 거다.나는 더 이상 실랑이 벌이기 싫어서 손을 휘휘 저었다.“그럼 약재 빌리러 가는 건 네가 알아서 해결해. 난 안 가.”말을 마친 뒤 나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그때 주해진이 나를 붙잡았다.“물건을 네가 팔았으면 네가 해결해야지. 누구한테 떠넘겨?”“그게 말이야 방귀야? 주해진, 가게 물건은 우리 모두의 것이야. 네가 가게 물건을 팔아 네 주머니를 채우겠다는데, 내가 동의할 것 같아?”“그딴 건 모르겠고, 네가 약재를 팔아서 손해를 봤으니 네 책임이지.”“말이 안 통하네.”내가 떠나려 하자 주해진은 또다시 나를 붙잡았다.“가겠으면 어
“정수호, 지금 나를 찼어? 사람 많다고 나 하나 괴롭히는 거야? 너희만 똘똘 뭉친 한식구고 난 남이지?”나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난 널 내 사람으로 생각한 적 없어. 처음 협상할 때 말했지. 가게 일은 내가 관리한다고. 너랑 김진호는 빠지라고.”“그래도 난 손해는 안 끼쳤잖아.”주해진은 씩씩거리며 맞받아쳤다.나는 여전히 차갑게 쏘아붙였다.“손해 본 건 내가 메꾼다고 했어. 장부는 공용이야, 공동 재산은 일전한 푼도 손해 안 보게 할 거야.”“하지만 네가 딴 주머니 챙기는 건 용납 못 해. 그렇게 돈 벌고 싶으면 네가 가서 약재 알아봐. 이 가게의 모든 약재는 내가 직접 찾아온 건데, 네가 딴 주머니 챙기는 데 왜 내 약재를 갖다 바쳐야 해?”주해진은 할 말이 없어지자 아예 생트집을 잡았다.“나도 가게 약재 쓰고 나중에 메꿀 거야. 그리고 내가 뭔 딴 주머니를 챙겼다고 그래?”“쓸데없는 말 그만해. 오늘 일은 내가 말한 대로 하든지, 아니면 네가 데려온 사람들 데리고 나가든지 해.”나는 최후의 방법을 제시했다.그러자 주해진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바락바락 우겼다.“나가라고? 말도 안 돼. 내가 저분들을 어떻게 모셔왔는데...”“그럼 약재가 부족해서 이틀 뒤에 오라고 해. 그때 번 돈은 장부에 다 기록할 거야. 혼자 빼돌릴 생각 하지 마. 그게 싫으면 지금 당장 사람들 데리고 나가.”나, 현성 그리고 민우는 나란히 서 있었고 주해진은 혼자 우리를 마주한 채 서 있었다.저 혼자서는 똘똘 뭉친 우리 셋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주해진은 결국 한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새로운 약재는 언제 도착하는데?”“정확한 시간은 말할 수 없지만 약 사흘에서 닷새 정도 걸려.”“그래.”주해진은 말을 마친 뒤 씩씩거리며 떠나갔다. 그는 너무나도 화가 났지만 현재 우리는 모두 한배를 탄 신세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자기가 데려왔던 사람들을 거느리고 떠나가는 주해진을 보며 현성이 말했다.“저 자식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야.
사실 나는 고아연과 고수연의 선물도 샀다. 고수연은 함께 일하기에 천수당에서 이미 줬고 고아연의 선물은 따로 챙겨왔다.하지만 점심시간이라 고아연이 집에 없었기에 나는 그 선물을 가사도우미에게 맡겼다. 그러면 고아연이 저녁에 돌아왔을 때 전달받을 수 있을 테니까.형수 얼굴을 본 뒤, 나는 애교 누나에게 어디 있는지 문자를 보냈다.그러자 아직도 부모님과 함께 지낸다는 답장이 날라왔다.이에 나는 애교 누나 선물을 챙겨 왔다는 걸 알려주고는 나중에 형수 집에 와서 찾아가라고 귀띔했다.애교 누나와의 통화가 끝난 뒤 나는 곧장 15층으로 올라갔다.그도 그럴 게 형수와 애교 누나 선물 외에도 윤지은과 하정현의 선물도 사 왔으니까.‘집에 사람 있나 모르겠네.’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얼마 뒤 문이 열렸다.하지만 문을 연 사람이 윤지은이라는 사실은 좀 의외였다.“오늘 병원 출근 안 했어요?”윤지은의 안색은 창백해 보였는데 한눈에 봐도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혹시 어디 아파요?”“감기야.”“약 먹었어요?”“아니.”“아프면서 왜 약을 안 먹어요? 의사라는 사람이 이런 것도 남이 알려줘야 알아요?”윤지은은 맥없이 소파에 기대앉았다.“너랑 무슨 상관인데? 여긴 왜 왔어?”윤지은은 그날 밤 일 때문에 아직도 화가 안 풀린 모양이었다.나는 뜨거운 물 한 컵을 받아 먼저 윤지은에게 건넸다.“요즘 S시에 다녀왔어요. 오면서 그곳 특산품 좀 사 와서 그걸 주러 왔어요.”“사과하는 거야? 필요 없어.”윤지은은 차갑게 거절했다.이에 나는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사과하려고 선물 공세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생각나길래 가져왔어요.”“가져가. 이딴 거 필요 없어.”윤지은은 내 호의를 칼같이 거절했다.결국 나는 가져왔던 선물을 하나만 남기고 하나는 챙겨 들었다.“그래요. 그럼 지은 씨 건 도로 가져갈게요. 나머지 하나는 정현 씨한테 줘요.”“다 가져가. 네 물건 보고 싶지 않아.”윤지은은 내가 하정현을 위해 준비
[응.]윤지은은 차갑게 대답했다.나는 한 편으로 화도 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갑자기 왜 카톡을 삭제해요?”[삭제하든 말든 내 마음이지. 그것도 네 동의를 받아야 해?]윤지은은 차갑게 되물었다.그 말에 나는 더 어리둥절했다.“적어도 이유란 게 있어야 하잖아요. 이유가 뭔데요? 나한테 사형 선고를 내릴 거면 이유라도 알고 죽게 해줘요.”나는 뭐가 됐든 이유를 꼭 알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찝찝해서 견딜 수 없으니까.하지만 윤지은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이유는 없어. 이제 할 말없지? 끊을게.]윤지은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곧바로 전화를 끊지 않았다. 윤지은 성격에 정말 기분이 안 좋았다면 아무 말없이 바로 전화를 끊었을 텐데, 이렇게 기다린다는 건 나한테 기회를 준다는 뜻이었다.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윤지은이 내 카톡을 삭제했다는 일만 가득해 이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너무 막무가내로 구는 윤지은에게 화도 났다.“사람 참 뜬금없네요. 선물을 줬는데 싫다고 한 건 본인이면서 갑자기 연락처는 왜 삭제해요? 제가 그렇게 싫으면 아예 차단해요.”[너...]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말로 내 연락처를 차단했다.나는 윤지은의 속내를 도무지 읽을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심지어 음식을 해주려던 기분마저 사라져 버렸다.한편. 윤지은은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자마자 내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이번에 윤지은은 화난 게 아니라 실망하고 속상했다.윤지은은 아픈 사람을 상대로 그런 말까지 하는 내가 너무 양심 없다고 생각했다.사람은 아플 때 취약해진다고, 지금의 윤지은도 극도로 취약하고 예민했다. 심지어 너무 서러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눈시울을 적셨다.윤지은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얼굴도 예뻤으며 때 묻지 않고 자기애가 강했다. 하지만 처음 만난 남자 여준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윤지은이 온 마음을 다 바쳐 희생했는데도 여준휘는 항상 윤지은에게 더 뜯어낼 게 없나 계산기를 두드리기 바빴다.이에 워낙
나는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별 수 있어요? 제가 워낙 오지랖이 넓거든요. 지은 씨가 아픈 걸 아는데 내버려두는 건 의사로서 도리가 아니잖아요.”“그래서, 지금 그것 때문에 온 거야?”내 말에 윤지은은 살짝 실망했다.그런 윤지은의 마음을 내가 알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난 여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우리 그래도 친구 정도는 되잖아요. 친구 사이에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윤지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그때 나는 여전히 뻔뻔하게 말했다.“직접 할래요? 아니면 내가 해줄까요?”윤지은은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내 상태를 봐. 이런데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그럼 조금 비켜줄래요. 들어갈게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몸을 틀어 자리를 내주었다.식재료를 들고 주방으로 향하는 나를 본 윤지은은 그제야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렸다.보살핌을 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다.아무리 윤지은처럼 강한 사람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나는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며 물었다.“지은 씨는 지금 위장이 약할 테니 따뜻한 죽과 야채 샐러드 만들어 줄게요. 괜찮죠?”윤지은은 상관없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마음대로 해. 어차피 입맛 없어.”“입맛 없으니까 더 먹어야 하는 거예요. 안 먹으면 어떻게 나아요?”한결 부드러워진 윤지은의 말투에 내 마음도 따라서 편해졌다.나는 얼른 윤지은을 위해 따뜻한 죽과 야채 샐러드를 만들고 한약을 끓이기 시작했다.식사 준비를 마친 나는 모든 음식을 식탁 위에 세팅한 뒤 윤지은을 불렀다.“윤지은 아가씨, 다이닝룸으로 자리 옮기실게요.”윤지은은 나를 매섭게 째려봤다.“제대로 말해!”“지은 씨가 화낼까 봐 이러는 거잖아요. 화 다 풀렸으면 얼른 가서 식사해요.”윤지은은 다이닝룸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사실 윤지은은 입맛이 없었지만 내가 바삐 돌아다니며 준비한 걸 봐서 결국 숟가락을 들었다.“오후에 가게 나가?
현성과 민우는 내가 혼자인 게 시름이 놓이지 않고 걱정되어 돌아온 거엿다.무엇보다 내가 이번에 건드린 사람은 임천호다. 바로 그 S시 전체를 주름잡고 수많은 용병을 거느리고 있는 효웅이라 불리는 남자 말이다.우리는 그런 사람을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봤지 현실에서 만난 적이 없다.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우리 같은 새내기한테 그런 사람은 닿을 수도 없고 두려운 존재다.하지만 현성과 민우는 두려워하지 않고 내 곁에 있기로 했다.이건 단지 감동이라는 단어로 형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목숨을 나눈 우정과도 같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천수백 마디로도 우리의 우정을 표현할 수 없었으니까.나는 방 두 개를 현성과 민우에게 내어주고 혼자 거실에 누워 속으로 감탄했다.이 순간 흥분과 감동, 두려움과 무서움이 한데 섞여 내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하지만 이렇듯 신맛이 났다 단맛이 났다 쓴맛이 났다 매운맛이 나는 이런 과정이 바로 성장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우리 셋은 함께 천수당에 출근했다.나는 되도록 얼굴을 비추지 않으려고 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러다가 10시가 넘었을 때쯤 윤미화가 서윤기의 행방을 찾았다며 전화해 왔다.“어디 있는데요?”[샹젤리호텔. 내가 지금 마침 그곳에 가봐야 하니까 먼저 가서 확인해 볼게.]그 말을 들으니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뭐 하러 가는데요?”[고객이 거기서 기다려. 설마 내가 수호 씨랑 같이 가고 싶어서 일부러 이런다고 생각했어?]나는 순간 머쓱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그래요. 그럼 부탁할게요. 오해한 건 미안해요.”나는 윤미화를 단단히 오해했다는 걸 자각하고 다급히 사과했다.그러자 윤미화가 웃으며 말했다.[말만으로 미안하다면 다야? 실제 행동을 보여줘야지.]“사장님, 우리 한 식구 아니었어요? 뭐 하러 조목조목 다 따져요? 거리감 들게.”[누가 한 식구라는 거야?]“아니에요? 우리 탐정 사무소는 한 가족 아
“하지만 우리 언니 병 반드시 고쳐야 해.”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뒤돌아섰다.그러자 서지예는 다급히 나를 막아섰다.“뭐 하자는 거지?”“지예 씨 언니는 마음에 병이 있어요. 제가 심리 의사도 아니고 어떻게 무조건 낫게 한다고 장담하겠어요?”이건 너무 무리한 요구다.서지예도 자신의 요구가 좀 지나치다는 걸 알았는지 한발 물러섰다.“그럼 우리 언니랑 대화 많이 하면서 설득해 봐. 더 이상 죽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이제야 말이 되네요.”하지만 이것도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다.나는 한의학을 전공했지 심리학을 전공한 게 아니다. 더욱이 심리학 의사도 아니라 어떻게 서나연을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서지예는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떠나기 전에 특별히 몸에 좋은 약재를 몇 가지 사갔다.그렇게 하루를 바삐 보내다 보니 어느덧 저녁 7시가 넘었다.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는 온종일 의미 없는 일만 한 것 같다. 다행히 민우와 현성은 뭐라 하지 않았지만.그날 저녁, 우리 셋은 함께 식사하며 S시에 다녀온 일을 얘기했다.그때를 떠올리니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임천호 때문에 몇천만 원 손해 본 것도 모자라 앞으로 다른 사람한테까지 영향이 미칠지 모르겠어.”그 말에 현성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무서울 게 뭐 있어? 분명 해결 방법이 있을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우리랑 같이 이겨내면 되지.”민우도 내 어깨를 두드렸다.“걱정하지 마. 우리는 너랑 같이 일하기로 했으니 절대 널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두 사람의 감동적인 말에 나는 갑자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하지만 민우와 현성이 옆에 있으니 확실히 마음이 편해졌다.“너희밖에 없다. 자, 짠하자.”우리 셋은 함께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그러던 그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내가 가게에 있으면 임천호는 절대 우리 가게를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앞으로 난 가게 나가는 횟수를 줄일 테니까
“마음 가는 대로 얘기해도 내용이 있을 거 아니야. 어떤 내용으로 대화했는데?”서지예는 끈질기게 추궁했다.하지만 한참을 생각해도 나는 그날 대화 내용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별것도 아닌 얘기를 내가 어떻게 기억해요?”결국 마음이 조급해진 서지예는 무의식적으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잘 좀 생각해 봐. 나한테는 중요한 거란 말이야. 우리 언니 평소 남들과 얘기 안 해. 내가 뭘 물어보면 대답도 안 한다고.”“그런데 길게 대화했다는 건 진짜 놀라운 일이야. 정수호, 아니면 네가 우리 언니 좀 봐줄래?”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서씨 가문이 S시에서 어떤 가문인데요. 돈 있고 권력 있는 집안에서 설마 의사 하나 찾지 못하겠어요? 날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라면 포기해요.”나는 흙탕물 싸움에 끼어들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게다가 임천호가 만약 그 일을 알게 되면 더 골치 아파질 거다.그때 서지예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우리 언니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두고 볼 거야? 의사라며? 사람 살리는 게 의사의 본분 아니야?”“전 의사지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모두 구해줄 수는 없잖아요.”나는 이내 반박했다.그러자 서지예가 나를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그런데 이미 알면서 구하지 않으면 의사 자격 없는 거지.”“지예 씨도 의사면서 왜 본인이 구하지 않아요?”‘그리고 말은 왜 또 이렇게 듣기 거북하게 한담?’서지예는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내가 할 수 있으면 이렇게 널 찾아와서 입 아프게 설득하겠어?”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서지예는 이내 말을 이었다.“우리 언니를 치료해주면 내가 큰 고객 많이 소개해 줄게.”만약 서지예가 돈을 준다고 했으면 난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큰 고객을 소개해 준다고 하니 내 마음은 결국 흔들리고 말았다.물고기를 주기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내가 필요한 건 인맥이지 눈앞에 보이는 돈이 아니었다.서지예는 서씨 가문 둘째 딸이고
나는 속으로 오늘 왜 이토록 재수 없는지 한탄했지만 결국 서지예를 따라나섰다.밖에 나오자마자 서지예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봤다.“너 S시에 다녀왔어?”“네.”“뭐 하러 갔는데?”“돈 받으러 갔어요.”“거짓말. S시에서 우리 언니 만났잖아.”“지예 씨 언니를 만난 거랑 돈 받으러 간 거랑 모순되지 않잖아요.”나는 사실을 말했지만 서지예는 나를 믿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를 뚫어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봤다.“흥. 누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우리 언니에 대해 조사하러 갔겠지.”나는 너무 억울해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제가 왜 지예 씨 언니를 조사해요? 저랑 무슨 상관이라고요.”“너랑은 상관없지만 소여정과 상관있잖아. 솔직히 말해, 소여정이 우리 언니를 조사하라고 했지?”서지예의 엉뚱한 생각에 나는 화가 나 헛웃음이 나왔다.“증거 있어요? 소여정 씨가 저더러 지예 씨 언니 조사하라고 한 증거 있냐고요? 있으면 꺼내고 없으면 좀 가요.”나는 상대 체면도 고려하지 않고 축객령을 내렸다.그러자 서지예는 이를 갈며 나를 노려봤다.“나도 증거가 없으니까 따지러 왔잖아. 하지만 증거를 찾으면 그땐 죽을 줄 알아.”“우리 언니가 임천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나 해? 소여정이 자기를 조사하라고 했다는 걸 언니가 알면 죽으려고 할 거야.”서예지는 어찌나 걱정됐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서예지가 언니의 안위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서나연의 상태를 떠올리니 확실히 안타까웠다. 귀하게 자랐을 부잣집 아가씨가 남자 하나 때문에 죽으려고 하다니.그때를 떠올리니 내 태도도 서서히 누그러졌다.“임천호는 지예 씨 언니를 사랑하지 않아요. 동생이면 언니가 그런 남자 때문에 죽으려고 하는 걸 내버려두지 말고 포기하게 설득해야죠.”“말이 쉽지. 너 같은 사람은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 없지? 너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봐, 놓겠다고 쉽게 놓아지나.”서예지는 여전히 언니 편을 들었다.역시나 친자매 아니랄까
서윤기의 행방을 찾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인지한 나는 윤미화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탐정 사무소로 향했다.윤미화는 강북에 돌아온 뒤로 계속 잠을 보충하다가 내가 찾아오니 그제야 나른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심지어 옷도 갈아입지 않고 얇은 잠옷 바람에 나를 맞이하는 윤미화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윤 사장님, 이미지 좀 생각하면 안 돼요?”윤미화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다른 애들 다 일하러 나갔어. 여기 수호 씨뿐이야. 전에 못 봤던 것도 아닌데, 조심할 게 뭐 있어?”“그래도 조심해야죠. 사장님이잖아요.”나는 여전히 귀띔했다.그제야 윤미화는 대충 외투를 몸에 걸쳤다.“그래. 알았어.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야?”“저 대신 사람 좀 조사해 줘요.”나는 곧바로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그 말에 윤미화는 눈이 커다래졌다.“뭐야? 나 사장이야. 직원이 사장한테 일 시킨다고?”“돈 낼게요.”“누가 돈 달래? 안 해. 얼른 나가.”윤미화는 손을 휘휘 저었다.이에 나는 싱긋 웃으며 윤미화 곁에 앉았다.“윤 사장님 이렇게 인정머리 없는 분 아니잖아요. 항상 말만 독하게 하지 마음은 누구보다 여린 거 알아요. 제발 도와줘요. 이 사람 저한테 정말 중요해요.”“흥. 난 돈에 매수당할 사람 아니야. 돈으로 날 매수하려 했다면 날 정말 얕잡아봤어.”나는 다급히 물었다.“그럼 뭘 원하는데요? 뭐든 말해요. 할 수 있는 거면 무조건 할게요.”“다리 좀 두드려 봐. 다리 아파.”“네.”나는 얼른 윤미화의 다리를 두드렸다.“이 정도 강도면 괜찮아요?”윤미화는 눈을 감고 빙그레 웃으며 마사지를 즐겼다.“좋네. 딱 좋아. 역시 한의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다르네.”“그럼 아까 일은...”“아, 다리가 또 아프네.”나는 윤미화가 일부러 이런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리를 두드렸다.그러자 윤미화는 아예 나를 시종 취급하면서 차를 따르게 했다가 음식을 사 오게 했다가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시켰다.그렇게 약 2시간
하지만 난 윤지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윤지은의 집에서 나온 뒤, 나는 곧장 천수당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가는 도중 익숙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서윤기였다.서윤기가 강북에 돌아왔다.전에 경진당 사장 조천석은 진동성한테서 산 의서를 다시 서윤기한테 팔았다고 했던 적이 있다.그 뒤로 나는 서윤기한테 연락해 만나자고 했지만 서윤기는 일이 있다며 나중에 강북에 돌아오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그리고 오늘 서윤기를 바로 만난 거다.나는 서윤기를 나쁜 쪽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정말 요즘 너무 바빠 나한테 연락할 시간이 없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먼저 전화를 걸었다.서윤기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나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서 사장님, 요즘 뭐 하세요?”[뭘 하긴요. 약재상이니 당연히 약재 사업하느라 바쁘죠.]“그러면 어디 계세요? 강북에 돌아왔나요?”[아니요. 아직 Y시에 있어요.]서윤기의 말을 들은 순간 내 마음은 나락으로 떨어졌다.분명 강북에 돌아왔으면서 나한테는 아직 Y시에 있다고 거짓말이라니.만약 서윤기가 강북에 돌아왔는데 요즘 바쁘다고 하면 나는 별생각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런 거짓말을 하니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바로 서윤기가 나를 속이고 있다고.‘하지만 왜 나를 속이지?’‘설마 의서를 나한테 팔지 않으려고?’그건 아마 아닐 거다. 내가 전화에서 의서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으니까.그렇다는 건 분명 다른 일이 있다는 거다.전에 서윤기가 나를 찾아와 같이 손잡자고 제안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그러니 서윤기가 지금 나한테 보이는 살가운 태도는 사실 모두 가식이다.사람은 역시나 겉만 봐서는 안 된다.그래도 서윤기가 착하고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모두 내 바람이었다.나는 속으로 냉소를 삼키며 서윤기의 거짓말을 까발렸다.“그래요? 그런데 방금 북원로에서 사장님을 봤는데요.”“하하. 그래요? 잘못 본 건 아니고요?”서윤기는 여전히
냄새를 조금 맡아보던 윤지은은 여전히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안돼. 이거 냄새 너무 심해서 못 참겠어.”“그러면 코 막고 눈 감고 한꺼번에 마셔요.”나는 어린아이 달래듯 윤지은을 어르고 달랬지만 윤지은은 끝까지 한약을 거부했다.결국 나는 의자를 꺼내 위에 앉으며 최후의 수단을 썼다.“지은 씨가 안 마시면 저 안 가요. 누가 이기나 해 봐요.”“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나 환자야. 의사가 환자를 그렇게 대하면 어떡해?”“환자가 말도 안 듣고 협조도 안 해주는데 어떡해요? 지은 씨 같은 환자가 있으면 난 바로 치료 방법 바꿔요.”한의학적 치료 방법은 고작해야 한약과 침술 그리고 마사지다.때문에 윤지은이 계속 한약을 거부하면 나는 침을 놓을 수밖에 없다.침을 맞는다는 생각에 윤지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다만 대체 무슨 상상을 했기에 이토록 부끄러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윤지은은 갑자기 그릇을 빼앗아 가더니 코를 막고 한약을 깨끗이 비웠다.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싫다고 생떼를 부렸는데 왜 갑자기 순순히 먹는 거지?’하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약을 먹었으면 된 거니까.“됐어요. 얼른 휴식해요.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나는 그릇과 수저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그때 윤지은도 따라 일어나며 몸을 비틀거렸다. 워낙 감기 기운이 심한 탓에 윤지은은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나는 얼른 수저를 내려놓고 윤지은을 부축했다.“방까지 부축해 줄까요?”“부축 안 해줄 생각이었어? 나 혼자 방에 들여보낼 생각이었나 봐? 내 상태를 봐. 이 상태로 나 혼자 방까지 갈 수나 있을까?”역시 윤지은의 입은 독사보다 더 독했다.나는 윤지은의 팔을 덥석 잡았다.“알았어요. 지은 씨는 부잣집 아가씨니까, 지은 씨 말이 다 맞아요. 자, 들어가요.”나는 윤지은을 방까지 부축했다.하지만 오랜만에 와 보는 윤지은의 방에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때문에 나는 윤지
나는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별 수 있어요? 제가 워낙 오지랖이 넓거든요. 지은 씨가 아픈 걸 아는데 내버려두는 건 의사로서 도리가 아니잖아요.”“그래서, 지금 그것 때문에 온 거야?”내 말에 윤지은은 살짝 실망했다.그런 윤지은의 마음을 내가 알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난 여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우리 그래도 친구 정도는 되잖아요. 친구 사이에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윤지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그때 나는 여전히 뻔뻔하게 말했다.“직접 할래요? 아니면 내가 해줄까요?”윤지은은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내 상태를 봐. 이런데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그럼 조금 비켜줄래요. 들어갈게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몸을 틀어 자리를 내주었다.식재료를 들고 주방으로 향하는 나를 본 윤지은은 그제야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렸다.보살핌을 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다.아무리 윤지은처럼 강한 사람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나는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며 물었다.“지은 씨는 지금 위장이 약할 테니 따뜻한 죽과 야채 샐러드 만들어 줄게요. 괜찮죠?”윤지은은 상관없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마음대로 해. 어차피 입맛 없어.”“입맛 없으니까 더 먹어야 하는 거예요. 안 먹으면 어떻게 나아요?”한결 부드러워진 윤지은의 말투에 내 마음도 따라서 편해졌다.나는 얼른 윤지은을 위해 따뜻한 죽과 야채 샐러드를 만들고 한약을 끓이기 시작했다.식사 준비를 마친 나는 모든 음식을 식탁 위에 세팅한 뒤 윤지은을 불렀다.“윤지은 아가씨, 다이닝룸으로 자리 옮기실게요.”윤지은은 나를 매섭게 째려봤다.“제대로 말해!”“지은 씨가 화낼까 봐 이러는 거잖아요. 화 다 풀렸으면 얼른 가서 식사해요.”윤지은은 다이닝룸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사실 윤지은은 입맛이 없었지만 내가 바삐 돌아다니며 준비한 걸 봐서 결국 숟가락을 들었다.“오후에 가게 나가?
[응.]윤지은은 차갑게 대답했다.나는 한 편으로 화도 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갑자기 왜 카톡을 삭제해요?”[삭제하든 말든 내 마음이지. 그것도 네 동의를 받아야 해?]윤지은은 차갑게 되물었다.그 말에 나는 더 어리둥절했다.“적어도 이유란 게 있어야 하잖아요. 이유가 뭔데요? 나한테 사형 선고를 내릴 거면 이유라도 알고 죽게 해줘요.”나는 뭐가 됐든 이유를 꼭 알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찝찝해서 견딜 수 없으니까.하지만 윤지은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이유는 없어. 이제 할 말없지? 끊을게.]윤지은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곧바로 전화를 끊지 않았다. 윤지은 성격에 정말 기분이 안 좋았다면 아무 말없이 바로 전화를 끊었을 텐데, 이렇게 기다린다는 건 나한테 기회를 준다는 뜻이었다.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윤지은이 내 카톡을 삭제했다는 일만 가득해 이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너무 막무가내로 구는 윤지은에게 화도 났다.“사람 참 뜬금없네요. 선물을 줬는데 싫다고 한 건 본인이면서 갑자기 연락처는 왜 삭제해요? 제가 그렇게 싫으면 아예 차단해요.”[너...]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말로 내 연락처를 차단했다.나는 윤지은의 속내를 도무지 읽을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심지어 음식을 해주려던 기분마저 사라져 버렸다.한편. 윤지은은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자마자 내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이번에 윤지은은 화난 게 아니라 실망하고 속상했다.윤지은은 아픈 사람을 상대로 그런 말까지 하는 내가 너무 양심 없다고 생각했다.사람은 아플 때 취약해진다고, 지금의 윤지은도 극도로 취약하고 예민했다. 심지어 너무 서러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눈시울을 적셨다.윤지은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얼굴도 예뻤으며 때 묻지 않고 자기애가 강했다. 하지만 처음 만난 남자 여준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윤지은이 온 마음을 다 바쳐 희생했는데도 여준휘는 항상 윤지은에게 더 뜯어낼 게 없나 계산기를 두드리기 바빴다.이에 워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