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애교 누나를 몰래 끌어당기며 내가 말한 대로 하라고 암시했다.하지만 어머니를 거역한 적이 거의 없는 애교 누나는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질끈 감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엄마, 우리 얘기해요.”고혜란은 화가 나서 팔짱을 낀 채로 씩씩거렸다.“난 너랑 할 말 없다. 내 딸이 되기 싫다며? 나가!”“제가 엄마 딸이 되기 싫어도 엄마가 열 달 동안 품고 낳은 자식이잖아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우리 사이는 끊고 싶어도 못 끊어요.”“저, 저도 엄마랑 사이가 틀어지는 게 싫어요. 하지만 우리 사이에 정말 너무 많은 문제가 존재해요. 그러니 얘기 나눠서 해결하고 싶어요.”고혜란은 솔직히 마음이 동했다.자기 자식한테 계속 화를 내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하지만 애교 누나가 했던 말은 확실히 엄마 마음에는 대못을 박는 말이었다. 고혜란은 엄마로서 딸한테 그런 말을 듣고 오히려 먼저 굽히고 화해를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그런데 애교 누나가 먼저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했으니 더 이상 밀어낼 수 없었다.“그래, 얘기하자.”고혜란은 말을 마친 뒤 다시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다.누나는 나를 돌아보며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내가 조용하게 용기를 북돋아 주자 크게 심호흡하더니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두 모녀가 방문을 굳게 닫아거는 바람에 나는 마지못해 거실 소파에 앉았다.그때 이태웅이 마침 화장실에서 걸어 나오는 바람에 우리는 서로 시선이 마주쳐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이태웅도 말없이 소파 쪽으로 다가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앉았다.나는 자리에 앉기도 뭐하고 서 있기도 뭐해 너무 불편했다.그때 이태웅이 먼저 딱딱한 분위기를 깨고 말을 걸어왔다.“듣자 하니 한의관을 열었다던데?”“네. 천수당이라고 정형외과 전문 한의원입니다.”나는 곧바로 신이 나서 대답했다.내 말을 들은 이태웅은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사업을 하려면 성실하게 해야지 절대 법을 어기고 규율을 위반하면 안 되네.”‘어. 이걸 말하는
“어떻게 도울 건가?”“두 분을 소개해 드릴게요.”이태웅은 내 말에 픽 웃음을 터뜨렸다.“자네가 우리를 소개해 준다고? 그럴 필요가 있어 보이나?”사실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답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뻔뻔하게 말했다.“필요 있을 것 같은데요. 저와 윤 회장님 사이를 모르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저희 형제 같은 사이예요.”“난 왜 윤해철한테 자네처럼 젊은 형제가 있는 줄 몰랐지?”“지금 아셨잖아요.”이태웅은 내가 이렇게 대답할 줄 몰랐는지 눈이 커다래지더니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세웠다.“자네 정말 대단하군. 전에는 왜 자네가 이렇게 뻔뻔한 줄 몰랐지?”“아버님, 사실 그냥 아버님 웃겨드리려고 드린 말씀이에요. 아버님과 어머님은 너무 엄숙하세요.”나는 내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그 말에 돌아온 건 이태웅의 콧방귀였다.“지금 나를 가르치는 겐가?”“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저는 그저 분위기 좀 풀려는 거였어요. 아버님과 어머님 모두 공무원이라는 거 알아요. 평소에 얼마나 엄숙하고 무게 잡는지도 알아요. 게다가 애교 누나를 엄청 사랑한다고 믿어요.”“하지만 두 분은 애교 누나를 너무 과보호하세요. 그래서 누나가 자기 생각을 두 분께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어요.”이태웅은 화가 난 듯 핸드폰을 티 테이블 위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말은 다 끝났나?”“아버님께서 만약 듣기 싫다고 하면 입 다물겠습니다. 하지만 애교 누나가 더 이상 다치는 게 싫다면 더 말씀드릴게요.”나는 시종일관 내 신분을 명심하면서 선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았다.이태웅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했다.“좋네. 계속 말해보게. 어디 어떤 말을 하나 들어나 보자고.”“음, 사실... 풀어줘야 할 때는 풀어줘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거든요.”이태웅은 픽 웃었다.“아이가 있나?”“아니요.”“아이도 없으면서 젖비린내나는 애송이 주제에 감히 나를 가르치는 건가? 난 30년 동안 아비로 있었네. 자네가 경험으로
그 말에 부인할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제가 아버님이었어도 딸을 저 같은 사람과 결혼하게 두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딸이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지도 않을 겁니다. 저는 딸과 친구처럼 지내고 싶지 제가 딸의 하늘이 되어 딸에게 뭐든 명령하고 꾸짖고 싶지 않습니다.”“저는 애교 누나와 아버님이 함께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봤지만, 애교 누나가 아버님 팔짱을 끼고 애교 부리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거든요. 하지만 저는 제 아버지 앞에서 애교 부려요. 아버님은 정말 이런 사이가 부럽지 않으세요?”이태웅도 자기만의 생각이 있겠지만 나도 나만의 생각이 있었다.내 말은 마침 이태웅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이태웅은 엄격한 아버지다. 하지만 아무리 엄격해도 다정한 면도 있을 거다. 특히 자기 자식 앞에서는 더더욱. 솔직히 이태웅도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매번 공원을 산책할 때 남의 집 딸이 아빠 팔짱을 끼고 애교 부리는 걸 보면 이태웅은 너무나도 부러웠다.하지만 그의 딸 이애교는 그의 앞에서 그런 적이 거의 없다. 그랬어도 아득히 먼 옛날, 이애교가 어릴 적 이야기다.이태웅이 엄격해질수록 딸은 그를 무서워했고, 그의 앞에서 말하는 것마저 눈치를 봤다. 그런데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라니 가당치도 않다.묵묵부답인 이태웅만 봐도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사에 정도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나머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태웅이 스스로 생각할 테니까.하지만 소파에 앉아 있는 게 너무 불편해 나는 볼일 보러 가는 척하며 화장실에 숨었다.이씨 가문 본가 저택은 작은 침실 세가로 구성된 별로 크지 않은 집이었다. 게다가 화장실 공간도 그리 넓지 않았다.하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고 뭐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나는 화장실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애교 누나가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다급히 날려 나갔다.“엄마, 이 모든 건 다 수호 씨가 가르쳐 준 거예요. 우리 사이가 다시 회복될 수 있었던
“난 부시장이네. 내가 자네처럼 이미지도 지킬 필요가 없는 줄 아나?”이태웅은 싸늘한 얼굴로 반박했다.그러자 고혜란도 옆에서 맞장구쳤다.“나도 교수네. 학생들한테 늘 모범이 되어야지.”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이미지를 지키고 모범을 보이는 건 남들 앞에서만 하면 되잖아요. 가족들한테까지 그러면 너무 힘들지 않아요? 게다가 부부 사이에 그런 재미도 없으면 형제랑 뭐가 달라요?”고혜란은 즉시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다.그 순간 나는 의아하기만 했다.‘내가 대체 뭘 잘못했지?’그때 애교 누나가 나를 살짝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수호 씨, 그만 말해요. 우리 부모님은 생각이 좀 보수적이라 평소에 스킨십이 별로 없어요.”“어쩐지 누나한테도 너무 엄격하다 했어요. 본인들 생활이 즐겁지 않으니 누나도 즐기지 말라는 거였네요.”애교 누나는 다급히 나를 쿡 찔렀다.“헛소리 좀 그만해요. 두 분 귀에 들어가면 수호 씨 정말 끝이에요. 관계가 겨우 개선됐는데 또 어색해지면 어떡해요.”“알았어요. 말 안 할게요. 보아하니 못 들은 것 같아요. 손잡는 건 괜찮죠?”애교 누나는 자꾸만 피했지만 나는 끈질기게 누나 손을 잡았다. 우리 행동은 어린애처럼 유치하고 재밌었다. 물론 이태웅과 고혜란이 나오자마자 나는 이내 점잖은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연인 사이에 꽁냥거리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나는 대놓고 맞설 수 없었다. 어쨌든 아직 두 분 인정을 받지 못했으니 무례하게 굴 엄두가 나지 않았다.우리는 동네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했다. 그 레스토랑은 아주 평범한 레스토랑이라 가격도 저렴했다.그건 이태웅의 스타일과도 맞았다.나는 애교 누나와 같은 쪽에 나란히 앉으려고 했지만 이태웅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제 옆에 앉으라고 눈치를 주었다. 게다가 고혜란과 애교 누나가 이미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터라 나는 마지못해 이태웅 옆에 앉았다.하지만 이태웅과 고혜란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 누나와 나는 맞은편에 앉은 터라 내가 다리만
고혜란은 흠칫 놀라더니 남편의 손을 살짝 잡았다.“정말 이렇게 대담하게 군다고요?”“뭐?”이태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혜란을 바라봤다.그러자 고혜란은 이태웅의 손을 더 꽉 잡으며 물었다.“그러니까... 정말 여기서 할래요?”“여기 아니면 어디 가려고?”이태웅은 당연히 식사 얘기라고 생각하고 대답했다. 이미 여기까지 와서 자리에 앉았는데 먹지 않으면 뭘 하겠다는 말인가?고혜란은 점점 어 이상한 기분이 들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래요. 그럼. 당신이 오랜만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데.”그 순간 고혜란의 말을 들은 나는 갑자기 이상함을 느끼고 얼른 발을 뒤로 뺐다.아니나 다를까 다음 순간 고혜란은 낯빛이 변한 채로 남편 팔을 잡았다.“왜요?”“뭐가? 얼른 메뉴나 골라.”고혜란은 이태웅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해 먼저 이태웅을 슬쩍 건드렸다.“그래요. 뭐 먹고 싶어요?”누군가 저를 차는 느낌에 고개를 숙여 확인한 이태웅은 상대가 자기 아내라는 걸 발견했다.심지어 지금은 그를 툭툭 건드리면서 하이힐 끝으로 그의 바지를 쓸어 올렸다.이태웅은 갑작스러운 아내의 행동에 어리둥절했다.‘설마 방금 수호 녀석과 애교 때문에 자극받았나?’“크흠...”이태웅은 거절하려고 했지만 어쩌다가 먼저 다가오는 아내를 거절해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아예 고혜란의 발을 잡아 제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그 동작에 고혜란은 심장이 콩닥거렸다.‘몇십 년 동안 무뚝뚝하게 굴더니 이 양반이 드디어 눈을 떴나? 젊었을 때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 내가 행복한 세월을 얼마나 놓쳤는지.’나는 너무 놀라 애교 누나를 보며 숨을 참았다.보아하니 애교 누나도 이미 진작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낮게 소곤댔다.“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어요?”애교 누나도 입을 가리고 작게 소곤댔다.“말했는데, 수호 씨가 못 들은 거예요.”“이제 어떡해요? 두 분이 만약 제가 그런 거 알면 분명 죽이려고 할 거예요.”“우리가 말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체면을 중시한다.하지만 이태웅이 나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는 것만 해도 관계가 큰 진전이 있다는 증거였다.“하하하,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나중에 제가 약속 잡으면 아버님께 말씀드릴게요.”“난 신세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네. 자네가 나를 도왔으니 빚진 거라고 치자고. 하지만 이 일로 내 딸 만나는 거 허락해달라고 할 생각은 말게. 내 백을 이용해 부정당한 수단으로 목적을 이룰 생각도 하지 말고.”이태웅은 아주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이태웅은 매우 올곧은 사람이기에 진 빚은 무조건 갚는 성격이다. 하지만 그걸 이용해 선을 넘는 건 용납하지 못했다.그의 신분과 그의 딸이 그에게는 바로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었다.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버님, 신세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이건 저한테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에요. 두 분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든 저랑은 상관없으니 신세니 빚이니 할 필요 없어요.”이태웅은 내가 그런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지 나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봤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나는 이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레스토랑에서 나온 뒤 나는 윤해철에게 바로 전화했다.“수호 군, 무슨 일인가?”윤해철은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가 매우 밝았다.때문에 나도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윤 회장님, 혹시 시간 되시면 제가 따로 식사 대접해도 될까요?”“하하, 나야 언제든 괜찮지. 그런데 뜬금없이 식사는 왜 대접하겠다근 건가?”“회장님 찾아뵌 지도 오래돼서 얘기나 나눌까 해서요. 혹시 오늘 저녁은 어떠세요?”“그러자고. 주소 보내줘.”윤해철은 흔쾌히 동의했다.윤해철과 통화를 마친 뒤 나는 이 소식을 이태웅에게 전했다.이제 나머지는 이태웅에게 달렸다.내가 이태웅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건 이태웅의 신분을 고려해서다. 이태웅은 강북시 부시장인데 내가 제멋대로 부시장님이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한다면서 자리를 마련하는 건 접합하지 않으니까.하지만
“그런데 우리 가격이 저쪽보다 높아서 고객 다 뺏겼어.”나는 민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너 같은 성격은 정말 사업하면 안 되겠다. 오늘 저쪽에서 가격을 낮췄다고 너도 따라 낮추려 한다면 내일 그보다 더 낮추면 너도 또 따라 낮추려고? 우리는 사업 오래 하는 게 목적이야. 그러니 안목과 마음을 넓게 가져야지.”현성의 털털한 성격은 오히려 이런 상황에 좋은 작용을 했다.“그래. 수호 말이 맞아. 우리 가게는 평판을 우선시하기로 했잖아. 계속 가장 좋은 약재를 사용하면 고객 없을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넌 너무 조급해.”민우는 그 말에 한숨을 푹 쉬었다.“어쩔 수 없어. 난 하루빨리 돈 모아서 차 사고 집 사고 임설아와 결혼할 생각이니까. 내가 너희 둘과 어떻게 비하겠어? 한 명은 재벌 2세고, 한 명은 스폰 받고 있잖아...”“이봐, 한 가지 정정해야 할 게 있는데. 난 스폰 받은 적 한 번도 없거든.”나는 어이없어 귀띔했다.그러자 민우가 헤실 웃으며 말했다.“뭐가 다른데? 네 돈 다 그 예쁜 누나들이 준 거잖아.”민우가 나를 이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에 나는 마음이 안 좋았다.이에 나는 정색하며 강조했다.“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는데 넌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넌 내 친구잖아.”“왜 갑자기 무게 잡고 이래? 알았어. 말 안 할게.”내 상황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우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그런데도 내가 누나들한테서 스폰 받는 다는 말이나 하고 말이야. 내가 언제 스폰 받았다고 그래? 난 누나들 돈 일전한 푼 받은 적 없는데.’우리는 서로 즐기려고 만나는 사이인 건 맞지만 스폰과는 거리가 멀다.하지만 이건 별것도 아닌 일인지라 우리 사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게다가 민우도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그러다 퇴근할 때쯤 임설아가 또 왔다.민우는 얼른 나와 현성을 잡아끌었다.“오늘 저녁 우리 같이 밥 먹자. 내가 살게.”“난 안 돼. 저녁에 일이 있어.”난 오늘 저녁 이태웅과 윤해철을 만나
“이태웅? 수호 군 이태웅 부시장도 알아?”윤해철의 표정을 보면 그도 이태웅을 알고 있는 듯했다.하긴, 한 명은 강북시 부시장이고 한 명은 강북시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가이니 서로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하지만 윤해철은 이태웅과 트러블이 있는 것 같았다.나는 멍하니 윤해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윤해철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오늘 식사 자리도 이태웅 부시장이 부탁했나?”“네.”“이 사람이. 직접 불러내지 못하겠으니 수호 군을 앞세우다니. 혹시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얘기 못 들었나?”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런 말은 없으셨어요.”이태웅이 비록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진작 알아챘다.그렇지 않으면 강북시 부시장 신분으로 윤해철을 불러내지 못하는 게 말이 안 되니까.아무리 대단한 기업가라도 정계 인사의 체면을 봐야 한다. 더욱이 이태웅은 강북시 부시장이라 LC그룹 미래 발전을 결정지을 정도로 권력이 대단하다.”“됐네. 알겠어. 들어가지.”나는 이태웅과 함께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갔다.이곳은 3성급 호텔 레스토랑인데 윤해철에게는 별거 아닐지 몰라도 이태웅한테는 무척 호화로웠다.평소 겸손하기로 유명한 이태웅은 옷차림도 항상 수수하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훌륭한 공무원이다.그런데 이번에 윤해철을 만난다고 힘을 많이 준 모양이었다.룸에 들어서자 윤해철은 허허 웃으며 인사했다.“이태웅 부시장, 나랑 식사하고 싶었으면 바로 연락하면 될 것이지 뭐 하러 수호 군은 내세우나?”이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창백해졌다.“누가 자네와 식사하고 싶어 했다고. 정수호가 그래?”나는 바로 이태웅의 뜻을 이해하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아 사실은 제가 시간을 잘못 기억해서 두 분과의 약속 시간이 겹쳤지 뭐예요. 이왕 만났으니 함께 식사하죠.”커다란 원형 테이블에서 윤해철은 이태웅 옆에 자리했고 나는 두 사람과 멀리찍이 떨어진 곳에 앉았다.그럼에도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스파크가 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런데 내가 하필 그 가운데 끼어 있는
“지은이가 그동안 나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나도 도움이 돼야지. 지은이한테 돈은 부족하지 않은 거 알아. 수호 씨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야.”하정현은 요즘 막 취직하여 이곳에 남아 윤지은을 돌봐 줄 수 없기에, 미력하나마 자기 최선을 다할 생각인 듯했다.나도 더 이상 하정현과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결국 카드를 받았다. 나중에 그걸 쓸지 말지는 나중에 결정할 일이다.“지은이한테 절대 말하지 마.”하정현은 또다시 당부했다. 그러다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로부터 얼마 뒤, 윤해철과 하정현도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찼다. 내가 병실에서 나온 건 정확한 결정이었다.하지만 사람들은 한 명도 남지 않고 결국 하나둘씩 떠나갔다.윤해철도 나에게 당부했다.“수호 군. 수호 군이 그래도 우리 지은이 마음 쓰는 게 보여. 이번 기회에 서로 좀 잘해 봐. 난 두 사람 응원해.”이영미도 따라서 맞장구쳤다.“나도 두 사람 응원해. 내가 볼 때 두 사람 아주 천생연분이야.”“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면, 내 딸은 뭐지?”이게 무슨 상황인지, 애교 누나가 아버지인 이태웅과 함께 나타났다.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윤해철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자네 딸과 수호 군의 결혼 반대한 거 아니었어? 자네는 수호 군을 싫어하겠지만, 난 좋아해.”이태웅은 냉담한 얼굴로 걸어왔다. 그 강력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순식간에 찬 숨을 들이켰다.하지만 이건 가장 무서운 게 아니었다. 이보다 더 무서운 건, 내가 애교 누나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나는 내가 윤지은한테 마음이 흔들린 게 애교 누나한테 미안했다.그때 애교 누나가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수호 씨, 우리 저쪽에서 얘기 좀 할래요?”나와 애교 누나는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애교 누나, 제 말 좀 들어봐요...”나는 애교 누나에게 설명하고 싶었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웃으
나는 머리를 문질렀다.“백 쌤, 너무 세게 때렸잖아요. 머리통 날아갈 뻔했어요.”“흥. 그러게 누가 지은이 노리래? 감히 지은이까지 넘봐?”젠장.좋은 분위기가 그대로 망해버렸다. 만약 다음번에 또 물어보려면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윤지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는 얼굴로 백연우와 임유미를 바라봤다.“연우야, 유미야, 왔어?”유미 사모님은 창가에 앉아 다정하게 윤지은의 손을 잡았다.“어쩌다 이렇게 됐어?”“실수로 데였는데 큰 문제 없어.”“내가 들은 건 아예 달랐는데? 네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던데.”백연우는 히죽거리며 물었다.그 말에 윤지은은 마음이 찔려 시선을 피했다.“누구한테서 들었는데?”“강한나지. 네 그 교통경찰 하는 친구. 오는 길에 마침 만났는데 말해주더라고.”“걔가 헛소리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윤지은이 해명했다.하지만 백연우는 마치 신대륙을 만난 사람처럼 신기해했다.“오호라. 이거 봐. 네 말투가 이미 너를 배신했어.”화들짝 놀라는 백연우의 모습에 윤지은이 오히려 멍한 얼굴을 했다.“내 말투가 어때서?”백연우는 마치 윤미화에게 빙의 된 것처럼 탐정놀이를 시작했다.“너 평소 얼음장처럼 싸늘하고 남이 말하면 몇 배 욕해주잖아. 그런데 네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내가 놀려댔는데 나를 욕하지도 않았잖아. 이거 이상해.”‘헐.’백연우의 관찰력은 확실히 대단했다.사실 방금 윤지은이 말할 때 나도 그 점을 눈치채 백연우와 유미 사모님한테 들킬까 봐 걱정했다.그런데 정말 이런 식으로 들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무엇보다 백연우는 사실 나와 윤지은의 사이를 진작 알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모른 척하고 있다는 거다.아마 연기했으면 오스카상 감이다.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었다가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까 봐 슬금슬금 도망칠 각을 쟀다.물론 서둘러 떠나지는 않았다.백연우와 유미 사모님은 윤지은의 병문안을 온 거라 이따가 떠날 텐데, 침대도 내리지 못하는 윤지은을 돌봐 줄 사람은 필요하다.윤
윤지은은 부족함 없지 자랐다. 부잣집 외동딸인 데다, 아버지는 강북에서 유명한 대기업 회장이라 주변에 구애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는 부잣집 도련님도 있고, 실력 좋은 보디가드들도 있었다.그렇게 우수한 남자들을 많이 봐왔기에 윤지은은 나한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게 맞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한테만은 자꾸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윤지은은 마음이 복잡해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정수호, 내려줘.”얌전히 안겨 있던 윤지은이 갑자기 또 이러자 나는 순간 어리둥절했다.“왜요? 아프게 했어요?”“그런 거 아니야!”윤지은은 또 쌀쌀맞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네 돌봄 따위 필요 없어. 나가.”“왜요?”“이유 없어. 그냥 나가.”“요즘 지은 씨 무척 이상한 거 알아요?”나는 해답을 찾으려고 일부러 떠나지 않았다.하지만 윤지은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윤지은이 그동안 보인 이상 행동을 열거했다.“갑자기 연락처를 삭제했다가, 아예 차단해 버리고. 이제는 또 뜬금없이 쫓아내기까지. 설마 나 좋아해요?”나는 이 기회에 윤미화의 말이 진짜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말을 내뱉은 순간 내 마음도 무척 두근거렸다.이런 일은 진지한 태도로 얘기할 수 없기에 나는 결국 농담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마침 분위기가 무르익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그 말을 들은 순간 윤지은은 심장이 벌렁거려 극구 부인했다.“무슨 헛소리야? 내가 왜 너를 좋아하겠어?”“그럼 왜 뜬금없이 나한테만 화내요? 합당한 설명을 해줘요.”나는 포기하지 않고 캐물었다.결국 윤지은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렸다.“내가 왜 설명해야 하는데? 네가 뭔데?”“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지은 씨가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고 나를 몇 번이나 구해줬잖아요.”“저한테 아무 마음도 없으면 계속 도와줄 리 없잖아요. 본인이 다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와주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고요. 나를 좋아한다고
얼마 뒤 윤미화도 떠나는 바람에 병실에는 나와 윤지은 둘뿐이었다.윤지은은 눈을 감고 있었는데 자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그런 윤지은의 마음을 읽을 수도 꿰뚫어 볼 수도 없어, 나는 결국 사과를 깎아 건넸다.“사과 좀 먹어요.”“안 먹어.”“그럼 귤은요?”“안 먹어.”“포도는요?”“좀 조용히 할 수 없어?”나는 윤지은이 말하는 틈에 포도 한 알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아플 때 많이 먹어야 빨리 나아요.”“미친놈.”윤지은은 나를 욕하면서도 순순히 포도를 씹어 먹었다.심지어 하나를 다 먹고 난 뒤 또 하나를 요구했고. 그걸 먹고 나니 또 요구했다.윤지은은 늘 이렇듯 말은 누구보다 날카롭게 하면서 마음은 항상 여리다.이번에 윤지은의 도움이 컸기에 나는 윤지은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곁에서 세심하게 돌봐 주었다.사람을 돌보는 건 나한테 어려울 게 없었다. 딱 한 가지만 빼면 말이다. 그건 바로 화장실 문제였다.윤지은도 부끄러워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서 계속 참았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니 한계에 다다랐다.“나, 나 좀 화장실로 부축해 줘.”윤지은은 끝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지만 방광이 터질 것 같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나는 서둘러 윤지은을 부축한 채 화장실로 향했다.윤지은이 입원한 병실은 1인실이었기에 안에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화장실 문 앞까지 부축한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윤지은은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한 발에만 힘을 줘야 했기에 변기에 앉는 것도 어려웠다. 어렵사리 변기에 앉으니 또 바지를 벗는 게 문제였다.나도 윤지은이 불편할 걸 알았기에 밖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도움 필요해요?”“필요 없어. 훔쳐보지 마.”‘그럴 필요 있나? 우리 사이에 안 본 곳이 어디 있다고.’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밖에서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안에서 ‘아’하는 비명이 나더니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보아하니 윤지은이 넘어진 모양이었
나는 윤지은이 그동안 나를 미워하고 싫어한다고만 생각했다. 가끔 외로울 때 나를 찾아 외로움을 달래는 것 외에는 아무 감정이 없다고 여겼다.때문에 윤지은이 나를 좋아하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그래서인지 이 순간 나는 모든 게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현실적인 느낌과 비현실적인 느낌이 한데 섞여 나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때 윤미화가 팔꿈치로 나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거 봐. 내 말 맞지? 지은 씨가 수호 씨를 좋아한다니까.”“윤 사장님도, 지은 씨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나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아 되물었다.그러자 윤미화는 화가 난 듯 나를 째려봤다.“더 사람이 하는 대화 못 들었어? 또 어떻게 해야 믿을 건데?”“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믿기지 않아서요. 제가 전에 지은 씨한테 고백했는데 아주 대차게 차였거든요.”“우리 평소에 만나면 항상 다투기만 해요. 누구도 서로 양보하지 않아요. 게다가 연인끼리 하는 달콤한 말은 한 번도 한 적 없고, 서로 좋아한다는 고백을 한 적도 없어요.”“너무 사랑하면 미워지고 너무 미워하면 사랑한다는 거 몰라?”윤미화는 아주 철학적인 말을 했다.나는 그 말을 한참 곱씹었다.“확실히 일리가 있네요.”만약 정말 그렇다면 나는 너무 기쁘다. 그러면 윤지은의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뜻이니까.하지만 한편으로 골치 아팠다. 나한테 이미 애교 누나가 있기에 나는 윤지은을 책임질 수 없고 사랑을 받아줄 수도 없다.윤미화는 마치 내 뱃속에 들어왔다 나온 것처럼 농담조로 말했다.“평생 결혼하지 마. 그러면 부담 없잖아.”“어떻게 그래요?”“안 될 거 뭐 있어? 결혼은 종잇장으로 한 약속에 불과해. 누구한테 잘해주고 싶으면 그런 게 없이도 잘해줄 수 있잖아. 요즘 연애만 하고 결혼하지 않는 사람 많아. 난 그것도 괜찮다고 봐.”‘대체 뭐라는 거지?’나는 그 정도로 개방적이진 않다.나는 우선 마음을 가다듬었다.
강한나는 윤지은 옆에 앉으며 물었다.“다리는 왜 그래?”“별거 아니야.”강한나는 장소도 개의치 않고 윤지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윤지은의 종아리는 벌겋게 부어오른 데다 물집까지 잡혔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둬? 그리고 이렇게 됐으면 병원부터 가지 왜 여기까지 달려와서 저 사람 일에 신경 쓰는 건데? 너 미쳤어?”강한나는 윤지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윤지은은 남자에게 희망을 걸 사람이 절대 아니고, 남자를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을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그런데 윤지은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었다.강한나는 문득 눈앞의 윤지은이 자기가 알던 그 윤지은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괜찮은 줄 알았어. 이렇게 심각할 줄 몰랐어.”윤지은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실 그녀도 다리에 흉터가 남을까 봐 걱정됐다.“안돼. 너무 아파. 얼른 병원 데려다줘.”강한나는 화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어 윤지은을 업고 일어났다.“못 말려 정말. 여자는 역시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니까.”윤지은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그런 거 아니야. 허튼 생각 하지 마. 정말 실수로 이런 거야. 이렇게 심각할 줄 몰랐어.”“알았다. 알았어. 해명할 거 없어. 그럴수록 오히려 뭘 숨기려는 것 같으니까.”강한나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윤지은이 떠난 뒤 윤미화만 밖에서 나를 기다렸다.약 30분 뒤, 나는 풀려났다. 하지만 윤미화만 보여 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지은 씨는요?”“몰랐어?”“뭘요?”“다리에 화상을 입어 물집까지 잡혔는데 수호 씨를 돕겠다고 달려온 거였어. 방금 경찰 친구가 병원에 데려갔어.”윤지은이 화상을 입다니. 어쩐지 방금 절뚝거린다 했는데.그 정도로 화상을 입었다면 절대 가볍지 않다.게다가 여자는 누구나 예쁜 걸 좋아하니 흉터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게 먼저일 텐데, 윤지은은 상처를 치료하러 가지 않고 먼저 나를 찾아왔다.나는 윤미화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어
윤지은은 마음이 초조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때문에 실수로 컵라면을 엎어 뜨거운 물이 다리 위로 흘러내렸다.윤미화는 아파서 찬 공기를 들이마셨지만 대충 찬물로 덴 곳을 헹구고 얼른 옷을 입고 밖으로 향했다.“무슨 일인데요? 상세하게 말해 봐요.”윤미화는 자초지종을 대충 설명했다.이윽고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에게 연락했고, 경찰서에 인맥이 있던 강한나가 인맥을 통해 말을 해둔 덕에 윤지은과 윤미화는 곧바로 나를 찾아왔다.“윤지은? 여긴 어쩐 일이에요?”평소 혼잣말 할 때 이름만 부르는 게 습관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이름이 튀어나왔다.윤지은은 절뚝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윤지은이 걷는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했다.“다리는 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야.”윤지은은 솔직히 말하지 않고 의자를 당겨 그 위에 앉았다.“일은 대충 들었어. 하지만 상대가 절대 합의는 안 해주겠다고 하네. 정말 의서를 돌려줄 생각 없어?”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절대 안 내놔요. 내놓으면 끝이에요. 그건 제 할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에요.”“그럼 강도죄가 성립되어 감옥살이해야 해.”윤지은이 강조했다.나는 복역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거예요?”윤지은은 고개를 저었다.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어쨌든 그 의서는 절대 내놓을 수 없어요.”“봐요. 내 말 맞죠? 참 융통성이 없다니까요.”윤미화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그때 윤지은도 나를 날카롭게 째려봤다.“융통성도 없고 멍청하기도 하네요.”“내 상황을 보고도 욕이 나와요?”‘참 동정심도 없다니까.’윤미화는 결국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죽어도 뜻을 안 꺾겠다고 버티는 거야? 이게 뭔지 봐 봐.”윤미화는 새 책 하나를 나한테 건넸다.너무 궁금한 나머지 몇 장 펼쳐 본 순간 나는 눈이 커다래졌다.“이, 이건 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서 내용이잖아요.”‘왜 인쇄되어 있지?’할아버지가 남긴 의서는
“고집 한 번 세네. 아주 정호섭과 똑같아. 좋아. 그럼 나도 쓸데없는 말 하지 않을게.”서윤기는 손을 휙 저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직원이 내 몸을 더듬었다.“서 사장님, 없어요.”서윤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봤다.“의서를 숨겼어?“그건 원래부터 우리 집 의서였어.”“그런데 지금은 내 거야. 네놈이 내 물건을 빼앗았으니 내가 신고하면 넌 감방행이야.”“정수호,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줄게. 나랑 손잡으면 의서 건은 책임을 묻지 않고 큰돈을 만지게 해줄게.”나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아무리 돈이 좋아도, 난 깨끗한 돈만 취급해. 양심을 팔아 돈 버는 일은 안 해.”“좋아. 그럼 신고하지.”30분 뒤, 경찰 몇 명이 현장에 도착했고 호텔 CCTV에 찍힌 바람에 나는 잡아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다 나는 결국 경찰들에게 잡혀갔다.내가 잡혀가는 걸 보자 윤미화는 다급히 달려와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의서는 찾았어요?”나는 가장 걱정되는 것부터 물었다.그러자 윤미화는 고개를 끄덕였다.“찾아서 챙겼어. 그런데 왜 잡혀가는 거야?”“그 약재상이 신고했어요. 의서를 내놓지 않는다고 잡혀가는 중이고요.”“의서가 뭐라고 주면 될 거 아니야.”“안 돼요. 그건 할아버지가 저한테 남겨준 거라 절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면 안 돼요. 서윤기는 악덕 상인이라 그 책을 망가뜨릴 거예요.”나는 그 의서만큼은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그럼 나도 구해줄 수 없어.”나는 윤미화의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알고 있다. 때문에 이 일도 솔직히 윤미화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모양이었다.서윤기의 인맥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경찰들은 나를 경찰서에 데려간 뒤 서둘러 심문하지 않고 취조실에 계속 가두었다.이건 분명 절차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서윤기의 체면을 봐서 일부러 이러는 거다.안에 갇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윤미화가 나를 꺼내주기만을 기다렸다.윤미화는 강북
윤미화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막았지만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막지 못했다.그 사람들은 방을 한 칸 한 칸 수색하다가 결국 내가 숨어 있는 방에 쳐들어와 다짜고짜 나를 잡았다.그러고는 곧장 나를 8층 808호실로 끌고 갔다.놈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나는 속으로 기뻤다.내 계획이 성공했으니 말이다.서윤기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내가 말했잖아. 발버둥 치지 말라.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내가 전에 사람 잘못 봤네. 서윤기 당신도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눈에 돈밖에 없는 인간이었어.”나는 서윤기를 비아냥거렸다.그러자 서윤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돈 버는 게 나빠? 뭐 문제 있어? 난 상인이야. 상인이 돈 벌지 않고 설마 사람을 구할까?”“아무리 돈을 벌고 싶어도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약재 가격을 높이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안 좋은 약재와 좋은 약재를 섞어서 팔고 가짜 약재로 진짜 약재를 바꿔치기 할 수 있어? 이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이건 내가 가장 참지 못할 부분이다.약재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약재상이 질이 안 좋은 약재를 섞어 팔고 가짜 약재로 수만 채운다면, 약은 제 약효를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환자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그때 서윤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정 사장이랑 같이 일할 때 항상 가장 좋은 약재를 가장 싼 가격에 팔았어. 그렇게 매일 개처럼 일했는데 결국엔 고작 몇 푼밖에 못 벌었다고.”“내가 지난 몇 년 동안 고생해서 번 돈이 동종업자들이 1년 동안 번 것보다 적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놀리고 비꼬아 댔는지 알아? 병에 걸린 환자들도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의사한테 고마워하지, 누가 약재상한테 고마워해?”“양쪽에서 모두 찬밥 신세 당하면서 내가 왜 남 좋은 일만 해야 하는데? 내가 정 사장과 협력하지 않은 이후로 한 달에 얼마씩 버는 줄 알아?”“4억 가까이 돼. 전에는 1년에도 이 정도 못 벌었어. 매달 4억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