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애교 누나를 몰래 끌어당기며 내가 말한 대로 하라고 암시했다.하지만 어머니를 거역한 적이 거의 없는 애교 누나는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질끈 감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엄마, 우리 얘기해요.”고혜란은 화가 나서 팔짱을 낀 채로 씩씩거렸다.“난 너랑 할 말 없다. 내 딸이 되기 싫다며? 나가!”“제가 엄마 딸이 되기 싫어도 엄마가 열 달 동안 품고 낳은 자식이잖아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우리 사이는 끊고 싶어도 못 끊어요.”“저, 저도 엄마랑 사이가 틀어지는 게 싫어요. 하지만 우리 사이에 정말 너무 많은 문제가 존재해요. 그러니 얘기 나눠서 해결하고 싶어요.”고혜란은 솔직히 마음이 동했다.자기 자식한테 계속 화를 내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하지만 애교 누나가 했던 말은 확실히 엄마 마음에는 대못을 박는 말이었다. 고혜란은 엄마로서 딸한테 그런 말을 듣고 오히려 먼저 굽히고 화해를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그런데 애교 누나가 먼저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했으니 더 이상 밀어낼 수 없었다.“그래, 얘기하자.”고혜란은 말을 마친 뒤 다시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다.누나는 나를 돌아보며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내가 조용하게 용기를 북돋아 주자 크게 심호흡하더니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두 모녀가 방문을 굳게 닫아거는 바람에 나는 마지못해 거실 소파에 앉았다.그때 이태웅이 마침 화장실에서 걸어 나오는 바람에 우리는 서로 시선이 마주쳐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이태웅도 말없이 소파 쪽으로 다가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앉았다.나는 자리에 앉기도 뭐하고 서 있기도 뭐해 너무 불편했다.그때 이태웅이 먼저 딱딱한 분위기를 깨고 말을 걸어왔다.“듣자 하니 한의관을 열었다던데?”“네. 천수당이라고 정형외과 전문 한의원입니다.”나는 곧바로 신이 나서 대답했다.내 말을 들은 이태웅은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사업을 하려면 성실하게 해야지 절대 법을 어기고 규율을 위반하면 안 되네.”‘어. 이걸 말하는
“어떻게 도울 건가?”“두 분을 소개해 드릴게요.”이태웅은 내 말에 픽 웃음을 터뜨렸다.“자네가 우리를 소개해 준다고? 그럴 필요가 있어 보이나?”사실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답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뻔뻔하게 말했다.“필요 있을 것 같은데요. 저와 윤 회장님 사이를 모르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저희 형제 같은 사이예요.”“난 왜 윤해철한테 자네처럼 젊은 형제가 있는 줄 몰랐지?”“지금 아셨잖아요.”이태웅은 내가 이렇게 대답할 줄 몰랐는지 눈이 커다래지더니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세웠다.“자네 정말 대단하군. 전에는 왜 자네가 이렇게 뻔뻔한 줄 몰랐지?”“아버님, 사실 그냥 아버님 웃겨드리려고 드린 말씀이에요. 아버님과 어머님은 너무 엄숙하세요.”나는 내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그 말에 돌아온 건 이태웅의 콧방귀였다.“지금 나를 가르치는 겐가?”“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저는 그저 분위기 좀 풀려는 거였어요. 아버님과 어머님 모두 공무원이라는 거 알아요. 평소에 얼마나 엄숙하고 무게 잡는지도 알아요. 게다가 애교 누나를 엄청 사랑한다고 믿어요.”“하지만 두 분은 애교 누나를 너무 과보호하세요. 그래서 누나가 자기 생각을 두 분께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어요.”이태웅은 화가 난 듯 핸드폰을 티 테이블 위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말은 다 끝났나?”“아버님께서 만약 듣기 싫다고 하면 입 다물겠습니다. 하지만 애교 누나가 더 이상 다치는 게 싫다면 더 말씀드릴게요.”나는 시종일관 내 신분을 명심하면서 선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았다.이태웅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했다.“좋네. 계속 말해보게. 어디 어떤 말을 하나 들어나 보자고.”“음, 사실... 풀어줘야 할 때는 풀어줘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거든요.”이태웅은 픽 웃었다.“아이가 있나?”“아니요.”“아이도 없으면서 젖비린내나는 애송이 주제에 감히 나를 가르치는 건가? 난 30년 동안 아비로 있었네. 자네가 경험으로
그 말에 부인할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제가 아버님이었어도 딸을 저 같은 사람과 결혼하게 두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딸이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지도 않을 겁니다. 저는 딸과 친구처럼 지내고 싶지 제가 딸의 하늘이 되어 딸에게 뭐든 명령하고 꾸짖고 싶지 않습니다.”“저는 애교 누나와 아버님이 함께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봤지만, 애교 누나가 아버님 팔짱을 끼고 애교 부리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거든요. 하지만 저는 제 아버지 앞에서 애교 부려요. 아버님은 정말 이런 사이가 부럽지 않으세요?”이태웅도 자기만의 생각이 있겠지만 나도 나만의 생각이 있었다.내 말은 마침 이태웅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이태웅은 엄격한 아버지다. 하지만 아무리 엄격해도 다정한 면도 있을 거다. 특히 자기 자식 앞에서는 더더욱. 솔직히 이태웅도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매번 공원을 산책할 때 남의 집 딸이 아빠 팔짱을 끼고 애교 부리는 걸 보면 이태웅은 너무나도 부러웠다.하지만 그의 딸 이애교는 그의 앞에서 그런 적이 거의 없다. 그랬어도 아득히 먼 옛날, 이애교가 어릴 적 이야기다.이태웅이 엄격해질수록 딸은 그를 무서워했고, 그의 앞에서 말하는 것마저 눈치를 봤다. 그런데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라니 가당치도 않다.묵묵부답인 이태웅만 봐도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사에 정도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나머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태웅이 스스로 생각할 테니까.하지만 소파에 앉아 있는 게 너무 불편해 나는 볼일 보러 가는 척하며 화장실에 숨었다.이씨 가문 본가 저택은 작은 침실 세가로 구성된 별로 크지 않은 집이었다. 게다가 화장실 공간도 그리 넓지 않았다.하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고 뭐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나는 화장실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애교 누나가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다급히 날려 나갔다.“엄마, 이 모든 건 다 수호 씨가 가르쳐 준 거예요. 우리 사이가 다시 회복될 수 있었던
“난 부시장이네. 내가 자네처럼 이미지도 지킬 필요가 없는 줄 아나?”이태웅은 싸늘한 얼굴로 반박했다.그러자 고혜란도 옆에서 맞장구쳤다.“나도 교수네. 학생들한테 늘 모범이 되어야지.”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이미지를 지키고 모범을 보이는 건 남들 앞에서만 하면 되잖아요. 가족들한테까지 그러면 너무 힘들지 않아요? 게다가 부부 사이에 그런 재미도 없으면 형제랑 뭐가 달라요?”고혜란은 즉시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다.그 순간 나는 의아하기만 했다.‘내가 대체 뭘 잘못했지?’그때 애교 누나가 나를 살짝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수호 씨, 그만 말해요. 우리 부모님은 생각이 좀 보수적이라 평소에 스킨십이 별로 없어요.”“어쩐지 누나한테도 너무 엄격하다 했어요. 본인들 생활이 즐겁지 않으니 누나도 즐기지 말라는 거였네요.”애교 누나는 다급히 나를 쿡 찔렀다.“헛소리 좀 그만해요. 두 분 귀에 들어가면 수호 씨 정말 끝이에요. 관계가 겨우 개선됐는데 또 어색해지면 어떡해요.”“알았어요. 말 안 할게요. 보아하니 못 들은 것 같아요. 손잡는 건 괜찮죠?”애교 누나는 자꾸만 피했지만 나는 끈질기게 누나 손을 잡았다. 우리 행동은 어린애처럼 유치하고 재밌었다. 물론 이태웅과 고혜란이 나오자마자 나는 이내 점잖은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연인 사이에 꽁냥거리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나는 대놓고 맞설 수 없었다. 어쨌든 아직 두 분 인정을 받지 못했으니 무례하게 굴 엄두가 나지 않았다.우리는 동네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했다. 그 레스토랑은 아주 평범한 레스토랑이라 가격도 저렴했다.그건 이태웅의 스타일과도 맞았다.나는 애교 누나와 같은 쪽에 나란히 앉으려고 했지만 이태웅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제 옆에 앉으라고 눈치를 주었다. 게다가 고혜란과 애교 누나가 이미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터라 나는 마지못해 이태웅 옆에 앉았다.하지만 이태웅과 고혜란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 누나와 나는 맞은편에 앉은 터라 내가 다리만
고혜란은 흠칫 놀라더니 남편의 손을 살짝 잡았다.“정말 이렇게 대담하게 군다고요?”“뭐?”이태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혜란을 바라봤다.그러자 고혜란은 이태웅의 손을 더 꽉 잡으며 물었다.“그러니까... 정말 여기서 할래요?”“여기 아니면 어디 가려고?”이태웅은 당연히 식사 얘기라고 생각하고 대답했다. 이미 여기까지 와서 자리에 앉았는데 먹지 않으면 뭘 하겠다는 말인가?고혜란은 점점 어 이상한 기분이 들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래요. 그럼. 당신이 오랜만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데.”그 순간 고혜란의 말을 들은 나는 갑자기 이상함을 느끼고 얼른 발을 뒤로 뺐다.아니나 다를까 다음 순간 고혜란은 낯빛이 변한 채로 남편 팔을 잡았다.“왜요?”“뭐가? 얼른 메뉴나 골라.”고혜란은 이태웅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해 먼저 이태웅을 슬쩍 건드렸다.“그래요. 뭐 먹고 싶어요?”누군가 저를 차는 느낌에 고개를 숙여 확인한 이태웅은 상대가 자기 아내라는 걸 발견했다.심지어 지금은 그를 툭툭 건드리면서 하이힐 끝으로 그의 바지를 쓸어 올렸다.이태웅은 갑작스러운 아내의 행동에 어리둥절했다.‘설마 방금 수호 녀석과 애교 때문에 자극받았나?’“크흠...”이태웅은 거절하려고 했지만 어쩌다가 먼저 다가오는 아내를 거절해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아예 고혜란의 발을 잡아 제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그 동작에 고혜란은 심장이 콩닥거렸다.‘몇십 년 동안 무뚝뚝하게 굴더니 이 양반이 드디어 눈을 떴나? 젊었을 때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 내가 행복한 세월을 얼마나 놓쳤는지.’나는 너무 놀라 애교 누나를 보며 숨을 참았다.보아하니 애교 누나도 이미 진작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낮게 소곤댔다.“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어요?”애교 누나도 입을 가리고 작게 소곤댔다.“말했는데, 수호 씨가 못 들은 거예요.”“이제 어떡해요? 두 분이 만약 제가 그런 거 알면 분명 죽이려고 할 거예요.”“우리가 말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체면을 중시한다.하지만 이태웅이 나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는 것만 해도 관계가 큰 진전이 있다는 증거였다.“하하하,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나중에 제가 약속 잡으면 아버님께 말씀드릴게요.”“난 신세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네. 자네가 나를 도왔으니 빚진 거라고 치자고. 하지만 이 일로 내 딸 만나는 거 허락해달라고 할 생각은 말게. 내 백을 이용해 부정당한 수단으로 목적을 이룰 생각도 하지 말고.”이태웅은 아주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이태웅은 매우 올곧은 사람이기에 진 빚은 무조건 갚는 성격이다. 하지만 그걸 이용해 선을 넘는 건 용납하지 못했다.그의 신분과 그의 딸이 그에게는 바로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었다.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버님, 신세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이건 저한테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에요. 두 분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든 저랑은 상관없으니 신세니 빚이니 할 필요 없어요.”이태웅은 내가 그런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지 나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봤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나는 이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레스토랑에서 나온 뒤 나는 윤해철에게 바로 전화했다.“수호 군, 무슨 일인가?”윤해철은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가 매우 밝았다.때문에 나도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윤 회장님, 혹시 시간 되시면 제가 따로 식사 대접해도 될까요?”“하하, 나야 언제든 괜찮지. 그런데 뜬금없이 식사는 왜 대접하겠다근 건가?”“회장님 찾아뵌 지도 오래돼서 얘기나 나눌까 해서요. 혹시 오늘 저녁은 어떠세요?”“그러자고. 주소 보내줘.”윤해철은 흔쾌히 동의했다.윤해철과 통화를 마친 뒤 나는 이 소식을 이태웅에게 전했다.이제 나머지는 이태웅에게 달렸다.내가 이태웅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건 이태웅의 신분을 고려해서다. 이태웅은 강북시 부시장인데 내가 제멋대로 부시장님이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한다면서 자리를 마련하는 건 접합하지 않으니까.하지만
“그런데 우리 가격이 저쪽보다 높아서 고객 다 뺏겼어.”나는 민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너 같은 성격은 정말 사업하면 안 되겠다. 오늘 저쪽에서 가격을 낮췄다고 너도 따라 낮추려 한다면 내일 그보다 더 낮추면 너도 또 따라 낮추려고? 우리는 사업 오래 하는 게 목적이야. 그러니 안목과 마음을 넓게 가져야지.”현성의 털털한 성격은 오히려 이런 상황에 좋은 작용을 했다.“그래. 수호 말이 맞아. 우리 가게는 평판을 우선시하기로 했잖아. 계속 가장 좋은 약재를 사용하면 고객 없을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넌 너무 조급해.”민우는 그 말에 한숨을 푹 쉬었다.“어쩔 수 없어. 난 하루빨리 돈 모아서 차 사고 집 사고 임설아와 결혼할 생각이니까. 내가 너희 둘과 어떻게 비하겠어? 한 명은 재벌 2세고, 한 명은 스폰 받고 있잖아...”“이봐, 한 가지 정정해야 할 게 있는데. 난 스폰 받은 적 한 번도 없거든.”나는 어이없어 귀띔했다.그러자 민우가 헤실 웃으며 말했다.“뭐가 다른데? 네 돈 다 그 예쁜 누나들이 준 거잖아.”민우가 나를 이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에 나는 마음이 안 좋았다.이에 나는 정색하며 강조했다.“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는데 넌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넌 내 친구잖아.”“왜 갑자기 무게 잡고 이래? 알았어. 말 안 할게.”내 상황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우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그런데도 내가 누나들한테서 스폰 받는 다는 말이나 하고 말이야. 내가 언제 스폰 받았다고 그래? 난 누나들 돈 일전한 푼 받은 적 없는데.’우리는 서로 즐기려고 만나는 사이인 건 맞지만 스폰과는 거리가 멀다.하지만 이건 별것도 아닌 일인지라 우리 사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게다가 민우도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그러다 퇴근할 때쯤 임설아가 또 왔다.민우는 얼른 나와 현성을 잡아끌었다.“오늘 저녁 우리 같이 밥 먹자. 내가 살게.”“난 안 돼. 저녁에 일이 있어.”난 오늘 저녁 이태웅과 윤해철을 만나
“이태웅? 수호 군 이태웅 부시장도 알아?”윤해철의 표정을 보면 그도 이태웅을 알고 있는 듯했다.하긴, 한 명은 강북시 부시장이고 한 명은 강북시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가이니 서로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하지만 윤해철은 이태웅과 트러블이 있는 것 같았다.나는 멍하니 윤해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윤해철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오늘 식사 자리도 이태웅 부시장이 부탁했나?”“네.”“이 사람이. 직접 불러내지 못하겠으니 수호 군을 앞세우다니. 혹시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얘기 못 들었나?”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런 말은 없으셨어요.”이태웅이 비록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진작 알아챘다.그렇지 않으면 강북시 부시장 신분으로 윤해철을 불러내지 못하는 게 말이 안 되니까.아무리 대단한 기업가라도 정계 인사의 체면을 봐야 한다. 더욱이 이태웅은 강북시 부시장이라 LC그룹 미래 발전을 결정지을 정도로 권력이 대단하다.”“됐네. 알겠어. 들어가지.”나는 이태웅과 함께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갔다.이곳은 3성급 호텔 레스토랑인데 윤해철에게는 별거 아닐지 몰라도 이태웅한테는 무척 호화로웠다.평소 겸손하기로 유명한 이태웅은 옷차림도 항상 수수하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훌륭한 공무원이다.그런데 이번에 윤해철을 만난다고 힘을 많이 준 모양이었다.룸에 들어서자 윤해철은 허허 웃으며 인사했다.“이태웅 부시장, 나랑 식사하고 싶었으면 바로 연락하면 될 것이지 뭐 하러 수호 군은 내세우나?”이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창백해졌다.“누가 자네와 식사하고 싶어 했다고. 정수호가 그래?”나는 바로 이태웅의 뜻을 이해하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아 사실은 제가 시간을 잘못 기억해서 두 분과의 약속 시간이 겹쳤지 뭐예요. 이왕 만났으니 함께 식사하죠.”커다란 원형 테이블에서 윤해철은 이태웅 옆에 자리했고 나는 두 사람과 멀리찍이 떨어진 곳에 앉았다.그럼에도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스파크가 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런데 내가 하필 그 가운데 끼어 있는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다.윤지은이 아침을 사 오자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그걸 본 윤지은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번 치료 방법이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나는 사모님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비록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도 사모님은 음식 드실 때 여전히 우아하고 단아했다. 살짝 슬픔을 띄고 있어 살짝 비극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내가 한창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윤지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나를 쏘아봤다. “짐승!”윤지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 욕에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제가 뭘 했다고 짐승이라는 거예요?”“아무튼 짐승 맞아. 이런 상황에서 훔쳐보기나 하고.”윤지은은 나를 째려봤다.난 그저 사모님을 몇 번 본 것뿐인데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너무 어이없었다.하지만 이러다 또 싸움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아침을 들고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웠다.식사를 마친 뒤 사모님은 자발적으로 나와 윤지은을 찾아왔다.“알고 있는 거 사실대로 다 알려줘요. 난 호섭 씨 사고에 대한 모든 사실이 알고 싶어요.”사모님은 너무 평온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때문에 나는 사모님 상태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사모님, 우선 맥 좀 짚어봐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알아야. 걱정할 거 없어요.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고, 호섭 씨가 떠난 사실을 받아들였어요.”“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호섭 씨처럼 착한 사람이 남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억울함을 풀어줄 거예요.”“난 강해져야 하고 호섭 씨처럼 용감해져야 해요. 그래야 호섭 씨가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요.”사모님은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그 말을 들으니 나도 코끝이 시큰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나는 얼른 마음의
나는 사모님 팔을 힘껏 잡으면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쳤다.“사모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사장님이 이런 사모님 보고 편히 가지 못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내 말이 사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사모님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윤지은은 내가 강제로 사모님을 자극했다며 나를 탓했다.“유미 지금 안 그래도 나약한 상태인데, 왜 그런 말을 직접 해?”나는 너무 난감했다.“누구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이 계속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상태가 점점 악화해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모님이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다.나도 사모님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모님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정말 사모님을 돕고 싶다면 모질어야 해요. 이럴 때 마음 약해지면 오히려 해치는 거예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내가 치료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진 사모님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사모님이 속사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속상해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사장님 사고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사고 낸 거예요. 사모님, 정신 차리고 우리와 함께 진실을 조사해요.”사모님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사모님을 깊은 슬픔에서 꺼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나는 말투를 부드럽게 하며 방금 한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사장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사모님도 사장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거 원하지 않죠? 우리 함께 진실을 알아내 사장님이 억울하게 죽임당하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사모님 상태는 살짝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지도 몰랐다.나는 사모님이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서둘러 사모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수호 씨, 이거 놔요. 난 남아서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사모님은 마구 버둥대며 소리쳤다.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아예 사모님을 어깨에 두러 업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곧바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벼랑 끝에 서 있는지라 조금만 실수하면 함께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사모님을 손날로 기절시켰다.내가 가드레일 안쪽으로 다시 넘어왔을 때 윤지은의 차가 마침 도착했다.“왜 그래?”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사모님을 차에 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지그 정신이 이상해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요. 방금 사장님이 춥다고 한다면서 옷 주러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계속 이럴 순 없어. 우리가 잠깐은 지켜볼 수 있지만 평생 지켜볼 순 없잖아.”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사모님께 사장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드리는 건 어때요?”“미쳤어? 이번 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또 자극하자고?”윤지은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환자가 가족을 잃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치료가 안 된다면 환자한테 희망을 줘야 한대요. 그 희망이 의학에서 말하는 기예요.”“그 기를 가진 환자가 음식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서서히 회복할 수 있대요.”“사장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모님과 함께 그 사건을 수사하는 거예요. 아마 사모님도 사장님이 죽은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장례식장 안을 모두 뒤져 봤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 조급하지 않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해졌다.사모님은 현재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서도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어 나는 문득 사모님 번호를 떠올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계속 긴 연결음만 들릴 뿐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 연결음이 꺼졌다.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사모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나 괜찮으니까 좀 내버려둬요.]사모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어디 있어요? 너무 걱정돼요.”[혼자 있고 싶어요.]“알아요, 아는데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사모님이 안전하다는 거 확인해야 해요.”전화 건너편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때 갑자기 차 경적음이 들려왔다.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장례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문득 사모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알려주시면 안 돼요?”사모님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대충 답을 얻은 나는 장례식장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사장님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았냐는 윤지은의 전화를 받은 나는 내 추측을 말했다.“아니요. 사모님 아마도 사장님 사고 난 곳에 있는 것 같아요.”[거긴 왜?]윤지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사장님 죽음이 수상해 직접 조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장님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 지금 가는 중이에요.”[그럼 먼저 건너가. 나 이따 바로 갈게.]나는 윤지은과 상의한 뒤 먼저 사장님이 사고 난 곳으로 향했다.사고가 난 곳은 절벽인데, 사모님은 마침 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