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고수연이 농담한 거라는 걸 알았기에 화를 내지 않았다.아파트 단지에 도착해 차를 세운 뒤 우리는 함께 형수 집으로 향했다.매일 형수를 찾아와서 돌봐주는 건 이미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처음에는 형수가 얼른 깨어나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점점 의식이 없는 형수를 보는 것도 익숙해졌다.형수가 깨어나든 말든 나는 형수를 평생 돌봐줄 생각이었다.하지만 뜻밖에 남주 누나가 찾아왔다.지난번에 병원에서 헤어지고 난 뒤 남주 누나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때문에 나는 남주 누나와 남편이 어떻게 됐는지도 몰랐다.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남주 누나는 형수 손등을 닦아주고 있었다. 남주 누나를 본 순간 나는 멍해졌다.하지만 남주 누나는 나를 보더니 미소 지었다.“왔어?”“남주 누나, 여긴 어쩐 일이에요?”남주 누나의 미소는 우리 사이의 어색함을 깨뜨렸다. 때문에 나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남주 누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말 이상한 게 하네?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미리 말이라도 해야 해?”“그건 아니에요. 물 마실래요? 물 따라줄게요.”“필요 없어. 태연이 몸 다 닦아줬어. 나 바로 갈 거야.”남주 누나는 형수 몸을 닦아준 뒤 예쁜 옷 한 벌을 꺼내며 말했다.“고태연. 얼른 일어나. 나 네 옷 샀는데 당장 입어보고 싶지 않아?”“그리고 너 깨어나지 않으면 정수호 다른 여자한테 뺏긴다.”남주 누나는 이 말을 형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나는 똑똑히 들었다.그 순간 나는 너무 어색하고 부끄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남주 누나가 예쁜 옷을 형수 옆에 내려놓고는 허리를 살살 흔들며 나한테 걸어왔다.“나 배웅해 줘. 괜찮지?”“네. 아래까지 배웅해 줄게요.”남주 누나가 고수연과 작별한 뒤 나는 남주 누나를 아래층까지 배웅했다.차에 올라타자마자 남주 누나는 내 목을 끌어안았다.“남주 누나...”나는 다급히 누나를 밀어냈다.“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묻지
하지만 나는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었다.남주 누나를 떠나보낸 뒤 형수네 집에 돌아가려고 뒤돌았을 때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고혜란을 본 순간 나는 온몸이 불편해졌다.하필 이 타이밍에 고혜란한테 그런 모습을 들켰다면 모든 게 끝날 거다.나는 불안한 마음에 얼른 설명했다.“어머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고혜란의 미소에는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지? 하필 그런 장면을 봐버렸네? 그래. 어디 말해 봐. 들어나 보자고.”고혜란의 말투에는 비아냥이 가득 담겨있었다.나는 해명하려고 했지만 고혜란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어머님, 저 애교 누나한테 진심이에요.”나는 해명하는 대신 내 마음을 표현했다.고혜란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진심이 몇 푼이나 할까? 자네 진심 따위 누가 쓰게 본대?”고혜란의 말은 이태웅보다 직설적이고 마음을 찔렀다.그나마 내 멘탈이 강해서 다행이었다.“어머님 기분 안 좋은 거 알아요. 욕할 테면 마음껏 욕하세요. 전 괜찮아요.”“자네 주제에 안 괜찮을 건 또 뭔가? 내 딸과 결혼하고 싶다면서 내 동의도 없이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고혜란은 또 나를 공격했다.하지만 나는 화를 내기는커녕 피식 웃었다.그러자 고혜란은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웃긴 뭘 웃나?”“어머님이 너무 귀여우셔서요.”고혜란은 잠깐 멍해 있더니 한참 뒤 반응했다.“입만 번지르르해서. 말발로 우리 딸 꼬셨구먼? 애교는 쉽게 넘어가도 난 쉽지 않을 거야.”고혜란은 모 대학교 교수라 나를 철없는 애송이로 보고 있었다. 그러니 애송이 따위가 하는 아첨을 당연히 마음에 둘 리 없었다.하지만 나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거짓말 아니에요. 어머님. 따님이 성인인데도 어머님이 여전히 이렇게 활력 있으신 걸 보니 건강하다는 뜻이에요. 게다가 사고도 민첩해서 욕도 매일 바꿔가면서 하더라고요. 그건 머리가 잘 돌아가고 논리가 정연하다는 뜻이죠.”“게다가
“어머님,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세요.”“흥. 말로 이기지 못하겠으니 쫓아버리는 건가? 정수호, 자네 똑바로 들어. 내 앞에서 똑똑한 척하지 마. 속셈도 다 집어치우고. 진작 나한테 다 들켰으니까.”고혜란은 나에게 다가와 차갑게 경고했다.하지만 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어머님도 너무 똑똑한 척하지 마세요. 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게 제 진짜 마음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내 말에 고혜란의 얼굴을 이내 싸늘해졌다.“뭐라고? 지금 나한테 똑똑한 척하지 말라고 했어?”“어머님, 저는 어머님을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저를 모두 다 꿰뚫어 봤다고 자신하지 말라는 뜻이었어요. 제가 그렇게 간단한 사람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흥. 차라리 자네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안 그러면 우리 딸 지능을 의심해야 하니까. 왕정민에게 속은 것도 모자라 자네한테까지 속아 똑같은 곳에서 두 번이나 넘어진다니. 나 고혜란은 그렇게 멍청한 딸 둔 적 없으니까.”고혜란은 매사에 자신이 넘쳤다. 심지어 자기가 총명하니 자기 딸도 총명하다고 자신했다. 게다가 자기의 사상을 애교 누나에게 강요했다. ‘어쩐지 애교 누나가 겁 많고 나약하다 했네.’“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그러니 인제 그만 가보시지 그래요?”고혜란은 내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내려고 꿰뚫을 것처럼 노려봤다.사실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단지 고혜란과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고혜란이 가지 않는다면 내가 갈 수밖에.나는 먼저 고혜란을 지나쳐 떠났다.내가 떠나는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고혜란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그도 그럴 게, 자기 딸을 좋아한다고 말하던 사람이 자기한테 잘 보이려고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무시하고 대꾸하고 그것도 아니면 사탕발림으로 살살 꼬드겼으니 말이다.고혜란은 속으로 점점 자기 딸을 나 같은 사람과 결혼하게 두면 안 되겠다고 확신했다.집에 도착하기 바쁘게 고혜란은 애교 누나를 불러 꾸짖었다.“내가
고혜란은 화가 나서 애교 누나를 삿대질하며 욕했다.“너 정말 미쳤구나? 머리가 정말 어떻게 된 거였네. 어떻게 그런 망발을 할 수 있어? 너 정말 뻔뻔하구나?”애교 누나는 눈시울을 붉혔다.“제가 왜 뻔뻔한데요? 제가 엄마한테 잘못한 거라고 있어요? 아니면 엄마를 창피하게 했어요?”“이게 창피하지 않아? 이혼하고 새파랗게 어린놈을 만났는데, 그놈은 밖에서 이 다른 여자 만나고 다니고. 그것도 모자라 그게 네가 요구한 거라니. 너 엄마 체면을 아주 바닥으로 처박는구나!”애교 누나는 가슴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아파 눈물을 뚝뚝 흘렸다.“엄마, 다른 사람은 저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엄마가 어떻게 저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어요?”“제가 왜 왕정민한테 까맣게 속았는데요? 엄마한테는 책임 없다고 하실 거예요?”고혜란은 버럭 화를 냈다.“네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 왕정민 같은 놈 만난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애교 누나는 마음이 미어질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엄마는 저한테 늘 엄격하게 요구하셨잖아요. 학생 때는 연애하면 안 된다 스킨십도 절대 안 된다 하면서요. 심지어 저 대학 다닐 때까지 남자애들을 피해 다녔어요.”“그래서 내가 만난 놈이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도 모르고, 어떤 남자한테 평생을 맡겨야 할지도 모르고 왕정민이 나한테 조금 잘해줬다고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엄마, 제가 남자한테 속는다고 연애도 못 하게 막고 저를 잘 보호했다고 생각하시죠? 엄마가 저를 온실 속 화초로 길러 비바람 한 번 맞아보지 못했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겠어요?”고혜란도 마음이 아팠다.“너 지금 엄마가 너를 너무 지나치게 보호했다고 탓하는 거니?”“그런 뜻 아니에요. 그냥 저 이제 서른 넘었으니 저 혼자 싸워보게 내버려두라는 뜻이에요. 결과가 좋든 나쁘든 내가 책임질게요.”“이런 게 차라리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사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수호 씨와 태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 왕정민한테 완전히 놀아
고혜란은 순간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어졌다.이게 어릴 때부터 금지옥엽 기른 딸이라고?은혜를 모르는 건 둘째 치고 그녀 딸로 태어난 게 후회된다니?자식 키우는 엄마한테 이보다 더 마음 아픈 말은 없을 거다.고혜란은 눈물도 나오지 안았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애교 누나도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다급히 사과했다.“엄마. 그런 뜻이 아니라...”고혜란은 뻣뻣하게 딸을 밀치고 아무 말도 없이 짐을 챙겼다.애교 누나는 자기가 어머니를 화나게 했다는 걸 알고 해명하려고 했다.하지만 고혜란은 마치 목석처럼 멍하니 짐을 챙겨 말없이 떠날 준비를 했다.“엄마, 미안해요. 가지 마세요.”고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곳을 떠났다.애교 누나는 무력감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사실 누나는 어머니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무심코 한 말이 어머니의 마음에 대못을 받았다. 그 순간 누나는 죽고 싶었다....나는 형수의 상태를 살핀 뒤 형수 집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형수 집에서 나오자마자 문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애교 누나를 보고 말았다.나는 다급히 애교 누나 집으로 들어갔다.“누나, 왜 그래요?”애교 누나의 얼굴은 이미 눈물 범벅이었다.“엄마가 내 말 때문에 화나서 가버렸어요. 난 진짜 불효녀에 나쁜X이고 사람도 아니에요...”“대체 무슨 일인데요? 어머님은 왜 가셨어요?”애교 누나는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했다.“엄마가 분명 상처받았을 거예요. 방금 나를 욕하지도 않고 때리지도 않았어요.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떠나버렸어요. 그런 모습 처음 봐요. 수호 씨, 나 집에 데려다줘요. 나 엄마한테 사과해야 해요.”애교 누나는 일부러 어머니 마음을 상하게 한 게 아니다. 누나도 어머니가 자기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나는 조심스럽게 누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지금 돌아가도 어머님 화가 안 풀리실 거예요. 차라리 내일 가요. 어머님께도
애교 누나는 말하다가 또 슬피 울기 시작했다.나는 다급히 애교 누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누나든 어머님이든 잘못한 사람은 없어요. 그저 소통이 너무 부족해서 그래요. 어머님이 누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저도 느낄 수 있어요. 내일 가서 사과드리고 용서 빌어요.”애교 누나는 여전히 슬펐는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나는 그렇게 계속 애교 누나 곁을 지켰다.다음 날 아침, 나는 민우에게 전화해 늦게 갈 것 같다고 미리 언질 줬다.그러자 민우는 가게 일은 저와 현성이한테 맡기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했다.나와 애교 누나는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뒤 함께 누나의 본가로 향했다.애교 누나는 가는 내내 어머니가 저를 용서해 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고 모녀 관계에 금이 갈까 봐 무서워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럴 리 없어요. 딸의 실수를 계속 마음에 담아두는 엄마가 어디 있어요?”“정말 그럴까요? 그런데 어제는 아예 말도 안 했어요.”애교 누나는 여전히 걱정했다.“제가 보장할게요.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제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줄 테니 긴장 풀어요.”나는 누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으나 누나는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실수로 넘어질 뻔하자 그제야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 덕에 누나의 김장도 어느 정도 풀렸고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졌다.“정말 수호 씨 말대로 됐으면 좋겠네요.”30분 뒤, 차는 이씨 가문 본가에 도착했다.애교 누나는 아파트 아래에 서서 한참 동안 마음을 졸였다. 그때 나는 말없이 누나 손을 잡으며 말했다.“여긴 누나 집인데 뭐가 무서워요? 무서워해도 제가 무서워해야죠.”“왜요?”“아버님 어머님이 아직 우리 만나는 거 동의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먼저 찾아와서 두 분 얼굴 봐야 하는데 당연히 겁나죠.”애교 누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그렇네요. 수호 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난 오히려 마음이 덜 무겁네요. 만약 들어가기 싫으면 나 혼자 들어갈게요.”나는 누나 손을 꼭 잡고
나는 웃으면서 애교 누나 손을 놓았다.“아버님, 전 그런 뜻이 아니라 누나가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안정감을 주려고 그랬어요.”“무슨 목적이든 간에 여긴 우리 집이네. 그러니 단정하게 행동하게.”이태웅과 고혜란은 모두 공무원인지라 사상이 다소 틀에 박혔기에 난 앞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애교 누나는 조심스럽게 고혜란 방으로 다가갔다.“엄마, 문 열어요. 저 애교예요. 사과하러 왔어요.”“가. 난 너 같은 딸 둔 적 없어.”고혜란은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애교 누나는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어마,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엄마 말에 대꾸하지 않을게요. 그러니 화 푸세요.”고혜란은 시종일관 문을 열지 않았다.나는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보며 이러다가는 누나가 사과는커녕 또 실망한 채 돌아가야 할 거란 생각을 했다.가끔 제삼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면 당사자보다 더 분명할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애교 누나가 이렇게 사과만 해서는 절대 소용이 없을 거다.고혜란은 대학교 교수라 자부심이 대단하고 공제욕도 대단하다. 비록 그녀 역시 좋은 마음에 애교 누나를 생각해서 과도하게 보호했다지만 그 때문에 애교 누나는 자기 색깔을 잃었다.애교 누나가 지금 사과한다면 당분간 용서는 구할 수 있을 테지만 오히려 어머니의 자신감에 더 불을 붙여 앞으로 분명 고혜란 손에 완전히 잡혀 살 거다.나는 오면서 사과만 하지 않고도 자기 마음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귀띔했어야 했다.소통은 쌍방이 하는 것이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에 무조건 따르고 사과만 해서 되는 게 아니다.애교 누나가 화장실에 간 틈에 나는 누나를 따라 들어갔다.“누나, 이렇게 하면 안 돼요.”“왜요?”애교 누나는 어찌나 속상했는지 너무 울어 눈이 팅팅 부었다.나는 얼른 누나 귓가에 대고 내 의견을 말했다.“누나처럼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차라리 반대로 행동해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요. 어머님을 화나게 하는 게 오히려 나아요.”애교 누나는 눈이
나는 애교 누나를 몰래 끌어당기며 내가 말한 대로 하라고 암시했다.하지만 어머니를 거역한 적이 거의 없는 애교 누나는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질끈 감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엄마, 우리 얘기해요.”고혜란은 화가 나서 팔짱을 낀 채로 씩씩거렸다.“난 너랑 할 말 없다. 내 딸이 되기 싫다며? 나가!”“제가 엄마 딸이 되기 싫어도 엄마가 열 달 동안 품고 낳은 자식이잖아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우리 사이는 끊고 싶어도 못 끊어요.”“저, 저도 엄마랑 사이가 틀어지는 게 싫어요. 하지만 우리 사이에 정말 너무 많은 문제가 존재해요. 그러니 얘기 나눠서 해결하고 싶어요.”고혜란은 솔직히 마음이 동했다.자기 자식한테 계속 화를 내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하지만 애교 누나가 했던 말은 확실히 엄마 마음에는 대못을 박는 말이었다. 고혜란은 엄마로서 딸한테 그런 말을 듣고 오히려 먼저 굽히고 화해를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그런데 애교 누나가 먼저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했으니 더 이상 밀어낼 수 없었다.“그래, 얘기하자.”고혜란은 말을 마친 뒤 다시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다.누나는 나를 돌아보며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내가 조용하게 용기를 북돋아 주자 크게 심호흡하더니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두 모녀가 방문을 굳게 닫아거는 바람에 나는 마지못해 거실 소파에 앉았다.그때 이태웅이 마침 화장실에서 걸어 나오는 바람에 우리는 서로 시선이 마주쳐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이태웅도 말없이 소파 쪽으로 다가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앉았다.나는 자리에 앉기도 뭐하고 서 있기도 뭐해 너무 불편했다.그때 이태웅이 먼저 딱딱한 분위기를 깨고 말을 걸어왔다.“듣자 하니 한의관을 열었다던데?”“네. 천수당이라고 정형외과 전문 한의원입니다.”나는 곧바로 신이 나서 대답했다.내 말을 들은 이태웅은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사업을 하려면 성실하게 해야지 절대 법을 어기고 규율을 위반하면 안 되네.”‘어. 이걸 말하는
하지만 형수는 너무 오랫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에 반해 양춘옥은 힘이 넘쳐나 손쉽게 형수를 제압했다.형수는 순간 폭발해 버렸다.“당, 당신 뭐 하는 거야?”양춘옥은 얼른 아들에게 말했다.“아들, 뭐 해? 얼른 밧줄을 찾아오지 않고. 이 여자 윗몸만 움직일 수 있고 아래는 못 움직여. 너한테 마침 좋은 기회잖아.”양춘옥의 아들은 얼른 벨트를 풀더니 형수의 손을 묶으려고 다가갔다.그 순간 나는 방으로 쳐들어가 그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양춘옥은 그 순간까지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양춘옥의 머리채를 잡고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나는 양춤옥이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뺨을 후려갈겼다.형수는 위험한 순간에 나타난 나를 보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나 역시 형수가 깨어난 걸 보니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형수!”“수호 씨, 타이밍 너무 좋았어요. 이 둘은 인간도 아니에요! 감히...”형수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나는 얼른 형수의 두 손을 꼭 잡았다.“알아요. 다 알아요. 형수, 걱정하지 마요. 이 사람들이 한 짓 내가 모두 찍었어요. 지금 경찰에 신고할게요.”양춘옥은 경찰에 신고한다는 내 말에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마구 달려들어 내 손에 있는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했다.나는 또다시 양춘옥의 뺨을 내리쳤다.그러자 이번에는 양춘옥의 아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모자 둘이 달려들어도 내 상대는 아니었다.양춘옥은 더 이상 방법이 없자 그제야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정 사장님, 제발 신고하지 말아 주세요. 제 아들이 이제 막 출소했는데 또 잡히면 이번에는 끝장이에요.”나는 이를 악물며 양춘옥을 바라봤다.“당신 아들 생각하기 전에 우리 형수는 생각했어? 내가 마침 집에 오지 않았다면 당신과 당신 아들이 형수한테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거잖아.”“내가 아줌마를 얼마나 믿었는데, 이렇게 보답하는 거야? 정말 악독하기도 하지. 오늘 당신도 법의 처벌을 받게 될 거야.”“안 돼요. 정 사장
“뭐요?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니에요?”“까다로운 게 아니라 원래부터 얌전하지 않은 여자인 것 같아. 남편과 잘 지내지 않고 별 같잖은 남자랑 바람이 났어. 정수호라는 사람인데, 매일 이 여자 몸을 닦아주러 와서 이 여자를 형수라고 불러...”“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 이런 일이 다 있다니. 이 여자도 참 뻔뻔하네요.”아들의 말에 양춘옥이 말했다.“그러니까 내가 널 불러온 거잖아. 이 여자도 워낙 얌전하지 않은 여자니까 너도 욕구나 풀어보라고. 아들, 너 이제 막 감방에서 나와 많이 쌓였을 거 아니야?”“밖에서 아가씨 찾기보다 이 여자한테 욕구를 푸는 게 더 나아. 적어도 이 여자는 깨끗하잖아.”고태연은 두 모자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치밀어 당장이라도 일어나 양춘옥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하지만 결국 그녀가 가장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그녀가 혼자 집에 있을 때 말이다.이런 상황에서 당하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를 거다.고태연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심지어 이 두 모자에게 이토록 모욕당할 바에는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그 시각 양춘옥과 아들의 대화를 들은 나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나는 서둘러 안으로 쳐들어가지 않았다.나는 우선 거실에 설치했던 감시 카메라를 찾았다. 그랬더니 카메라는 어느새 구석으로 옮겨졌다.‘이 아줌마가! 나는 그래도 믿고 매일 카메라를 돌려보지 않았는데, 이런 짓을 하다니.’나는 핸드폰 녹화 기능을 켜고 방 안을 몰래 촬영했다.탐정 사무소에서 일을 하게 된 이후로 나는 뭐든 증거싸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남자가 형수 몸에 바짝 붙어 다리에 코를 가져다 대며 냄새를 맡았다.“냄새 좋다. 식물인간한테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다니. 피부도 이렇게 좋고. 대박, 몸매도 완전 끝내주잖아.”양춘옥은 옆에서 키득거렸다.“당연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여자는 깨끗해. 아들, 얼른 하지 않고 뭐 해?”“헤헤. 그럼 엄마는 밖에서 망 좀 봐...”양춘옥은
“나 그만 놀려요. 내가 보고 싶은데 왜 애교 누나 집에 와서 혼자 술을 마셔요?”나는 아직 어려 정치계 판을 잘 모른다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다.남주 누나는 내 말에 피식 웃었다.“우리 푸들 많이 똑똑해졌네? 예전처럼 타격감이 좋지 않아. 하지만 점점 더 귀여워.”나는 자꾸만 내 몸을 타고 올라오는 남주 누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말해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일에 무슨 문제 생겼어요?”“응. 이 세상에서 날 괴롭힐 수 있는 건 일밖에 없어.”“왜죠? 왜 혼인이나 가정 문제는 될 수 없어요?”“헛소리 아니야? 혼인과 가정이 나보다 중요할 리 없잖아.”‘맞다. 누나도 가정보다 자기 지위가 우선인 여자였지. 백연우처럼.’“그래서 일은 해결됐어요?”나는 그 말을 내뱉은 순간 후회했다. 해결되었으면 술로 기분을 달랠 리 없을 테니까.하지만 남주 누나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해결된 셈이지. 하지만 강등됐어.”“얼마나요?”“아무 실권도 없는 말단직으로. 그래도 괜찮아.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내 약점을 잡고 나 협박하는 사람 없을 테니까.”남주 누나는 강등된 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건 아마도 자기 위로일 수 있었다.“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시간도 아까운데 계속 즐겨볼까?”남주 누나는 또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심지어 리듬 있는 음악을 틀어 놓아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나에게 또 충격을 안겨주었다.나와 남주 누나는 그사이 애교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몰랐다.애교 누나는 내가 걱정되어 직접 와 봤다. 하지만 방에서 들리는 나와 남주 누나의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남주였네. 다른데 좀 가지. 왜 우리 집에서 수호 씨를 꼬시는 거야?”애교 누나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아섰다.나와 남주 누나는 한밤중까지 몸을 섞고 피곤한 몸을 한 채 잠이 들었다.오랜만에 푸는 욕구에 우리 둘 다 너무 흥분해 버린 탓이었다.심지어 남주 누나는 열정적이다 못해 심지어 내가 지금 동영상 촬영 현
남주 누나는 헤실 웃으며 말했다.“정수호네. 이리 와, 와서 한잔해.”나는 남주 주나 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가봤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와인 두 병 중 한 병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남주 누나도 이미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발그스름했다.“누나, 혼자 이렇게 마신 거예요?”남주 누나는 똑바로 앉아 내 팔을 감싸안았다.“너 아니면 애교를 불러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요즘 바쁘다고 해서 안 불렀어. 그런데 마침 이렇게 와 버렸네? 나랑 한잔해.”나는 지난번 남주 누나를 봤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누나도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아마도 일 때문인 것 같았다.그런데 이번에 이토록 취해 있는 걸 보니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나는 남주 누나 손에 있는 와인을 빼앗았다.“그만 마셔요. 취했어요. 부축해 줄 테니 방에서 휴식해요.”“정수호, 예전에 너한테 장난치던 때가 그리워. 도 장난칠 테니까 내 장난 받아줘. 응? 나도 기분 좀 좋아지게.”남주 누나는 몽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그게 대체 뭐가 그립다는 건지.’나는 그때 너무 단순해 항상 남주 누나한테 농락당했다. 심지어 몇 번이나 나를 유혹하는 남주 누나를 눈앞에 두고 입맛만 다시며 마음을 졸였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가 조금도 그립지 않았다. 나는 하고 싶을 때면 마음대로 하는 지금이 더 좋다.“내가 네 소원 들어줄게.”남주 누나는 내 목을 끌어안고 취한 말투로 말했다.누나의 완벽한 몸매를 보니 나도 솔직히 몸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남주 누나는 지금 많이 취한 상태고, 기분도 안 좋아 보이니 몸을 섞는다고 즐겁지는 않을 거다.“됐어요. 누나 지금 취했어요. 부축해 줄 테니 방에서 자요.”“나 많이 안 마셨어. 그냥 조금 알딸딸한 정도야.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있잖아. 나 요즘 너무 바빠서 남자 만날 시간도 없었어. 그러니 오늘 너 땡잡은 거야.”남주 누나는 말하면서 나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나는 술에 취한
“정 사장님, 물 바꿔드릴까요?”내가 형수의 팔을 닦아주는 동안 양춘옥이 방에 들어와 열정적으로 물었다.그 모습에 나는 간단히 말했다.“아니에요. 거의 다 닦아요.”나는 형수가 뭘 걱정하는지 몰랐다. 무엇보다 양춘옥이 문제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그때 양춘옥이 목적성이 다분한 질문을 했다.“정 사장님, 요즘 안 보이시던데 바쁘셨나요?”“네. 요즘 일이 바빠서 매일 오지 못해요. 그러니 이모님이 우리 형수님 잘 돌봐주세요. 참, 요즘도 제가 바쁘니 부탁드릴게요.”양춘옥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싱긋 웃었다.“정 사장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무조건 잘 돌봐드릴게요.”“형수, 다 닦았어요. 형수가 깨끗한 걸 좋아하는 거 알고 특별히 피부 관리하는 스킨로션도 발라줬어요.”나는 형수를 돌본 뒤 옆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고아연이 돌아온 뒤에야 떠났다.고아연은 나를 집 앞까지 마중하며 물었다.“요즘 바빠?”“네, 왜 그래요?”“아니, 별 건 아니고. 지난번에 찍는다던 영상을 안 찍었길래 바쁜가 해서.”“요즘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었어요.”이건 단순한 오락이라 돈을 버는 것에 비하면 당연히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그래. 그럼 앞으로 안 찾을게. 내 연락처 삭제해.”고아연은 갑자기 말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여자들은 다 이래요? 심심하면 연락처 삭제하고? 이런 거 엄청 예의 없는 거 알아요?”고아연은 팔짱을 낀 채 웃었다.“우리는 원래부터 아는 사이도 아니었어. 그런데 지금 바빠서 영상 찍을 시간도 없다는데 내가 네 연락처를 왜 남겨? 난 원래 이래. 연락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은 삭제해. 수호 씨도 마찬가지야.”나는 일부러 고아연에게 맞섰다.“그럼 형수가 지금 이러니까 형수도 삭제했겠네요?”“그래.”“흥. 누가 믿을 줄 알고.”“믿든 말든.”고아연의 모습은 거짓 같지 않았다.나는 이 순간 고아연을 또다시 봤다.“바쁜 일 다 처리하면 도와줄게요. 연락처 삭제하지 마요. 앞으로 또다시 추가하
애교 누나 얘기를 언급하니 내 기분은 저절로 다운되었다.“난 누구랑 결혼할지도 모르겠어.”“왜? 애교 누나랑 사이가 틀어졌어?”민우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그런 건 아니야. 그냥 애교 누나랑 나는 결혼할 사이가 같지 않아. 애교 누나가 나한테 너무 관대하고 너무 풀어줘. 그래서 너무 진실감이 없어.”“헐. 여자 친구가 풀어주는 게 얼마나 좋은데? 네가 밖에서 다른 여자 만나도 뭐라 안 하고 오히려 응원해 준다며? 그렇게 좋은 여자 손전등 켜고 찾아도 없어.”현성과 민우는 나를 부러워했다.사실 나도 예전에는 똑같은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애교 누나는 너무 좋고 너무 관대하여 질투도 하지 않아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가끔 이 모든 게 허상이라는 생각도 들곤 한다.그에 반해 윤지은은 또 나에게 너무 현실을 체감하게 해준다. 좋아할 때도 질투할 때도 있어 오히려 더 커플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정수호, 너 진짜 쓰레기네. 너 설마 애교 누나 버리려고 그래?”현성이 갑자기 물었다.“헛소리. 내가 언제 버린다고 했어?”“그럼 아까 발언 무슨 뜻인데?”“난 그냥 애교 누나가 너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지 버리겠다는 뜻 아니야. 함부로 누명 씌우지 마.”나는 바로 현성을 반박했다.하지만 그때 민우가 바로 끼어들었다.“사실 나도 네가 좀 쓰레기 같아. 아마 네가 만난 누나들이 다 너 같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나 보다.”“젠장. 내가 너희들한테서 무슨 좋은 말을 듣겠냐?”그날 저녁 퇴근 후 나는 형수네 집에 들렀다.그동안 너무 바빠 형수를 보러 오지도 못하고 몸을 닦아주지도 못했기에, 나는 얼른 따뜻한 물을 담아 형수 몸 곳곳을 닦아주었다.형수는 이렇게 오랫동안 누워만 있었지만 뺌은 여전히 발그스름하고 피부도 백옥 같은 피부에 핑크빛이 감돌았다.아마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저 잠자고 있다고 생각할 거다.내가 형수의 몸을 닦아주는 동안 형수의 가슴은 사실 콩닥콩닥 북을 쳤다.‘수호 씨가 이제야 날
“이 얘기는 이쯤에서 하고. 말해요, 서나연 씨 일 외에 다른 볼 용건 있어요?”나는 화제를 다시 끌어왔다.그러자 소여정은 내 턱을 잡으며 생글생글 웃었다.“있지 그럼. 너 놀리러 왔어. 내가 너 놀리는 거 오랜만이잖아.”“미쳤어요?”나는 다급히 소여정의 손을 쳐냈다.“날 미친X 취급해? 내가 진짜 너 가만 안 둔다?”“못 믿겠어요. 나 이제 임천호도 안 두려운데 소여정 씨를 두려워하겠어요?”나는 소여정에게 계속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소여정은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오호라. 며칠 새에 많이 컸네? 그런데 그런 모습 점점 더 좋아지는데?”소여정은 정말 역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번 나타났다 하면 나에게 귀찮은 일을 던져주곤 한다.물론 내가 이제 임천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지만 그렇다고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그저 장사를 잘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내가 소여정을 무시하자 소여정도 나를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스스로 가게 안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결국 몇 가지 선물 세트를 골랐다.소여정이 계산하려고 할 때 나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다.“선물 세트 사서 누구한테 주려고요?”“이젠 임천호 안 두렵다며? 내가 누구한테 주든 무슨 상관이야? 아니면 내가 이 선물을 가져갔다가 이 가게에서 샀다는 걸 들킬까 봐 그러는 거야?”소여정은 마치 내 배에서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빠삭하게 알았다.“찾아오겠으면 찾아오라고 해요. 소여정 씨는 정상적인 소비예요.”나는 말발로 소여정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바로 뒤돌아 떠나갔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후들거렸다.소여정은 물건을 구매한 뒤 가게에서 택배로 보낼 수 있는지 물었다. 그 질문에 점원 한 명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소여정은 주소 하나를 남기고 직원더러 선물 세트를 주소에 적인대로 보내달라고 당부했다.소여정이 떠난 뒤 나는 그 위에 적힌 주소를 확인했다. 주소는 H시로 되어 있고, 받는 이는 ‘소원규’로 되어 있었다.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에 한참을 떠
“누구한테 들었어?”“그건 상관하지 마요. 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요.”나는 얼렁뚱땅 넘기려고 했다.다행히 소여정은 내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맞아. 나도 예전에 윤지은과 임유미처럼 잘 사는 집 딸이었어. 안 그러면 우리 넷이 왜 친구가 됐겠어?”하긴. 소여정은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물었다.“뭐 하나만 물을게.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강북에 있지?”“그걸 어떻게 알아요?”나는 흠칫 놀랐다.그 말에 소여정이 대답했다.“어떻게 알았는지는 알려고 하지 마. 맞는지 아닌지만 말해.”소여정이 이렇게 묻는다는 건 이미 단서를 찾았다는 뜻이기에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맞아요. 임천호 아내가 강북에 와서 요즘 유미 사모님과 같은 동네인 백조의 호수에 살아요.”“백조의 호스? 보아하니 나도 그곳에 집을 마련해야겠네.”소여정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 말에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지금 제정신이에요? 소씨 가문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데 멀리 숨지는 못할망정, 같은 동네에 살겠다고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 설마 서나연 씨를 쫓아내고 본인이 임천호 아내가 되려고 그래요?”소여정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안돼? 임천호가 얼마나 대단해. 나한테도 잘해주고.”“대단하긴 무슨. 부시장님과 윤 회장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더만.”나는 내가 임천호 뒷담화를 하는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소여정은 나를 다시 봤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정수호, 대단하네. 임천호를 그렇게 말하고. 임천호가 안 뒤 죽이려고 할까 봐 두렵지 않아?”“내가 임천호 산하의 대출 회사도 무너뜨렸는데, 임천호를 무서워하는 거로 보여요?”나도 비록 내가 너무 잘난체 한다는 걸 알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이 세상에 허영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게다가 이건 내가 평생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닐 일이기도 하다.소여정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아주 어깨뽕이 하늘로 치솟는구먼? 그 대출 회사 임천호한테 엄청 중요한 회사인 건
“오, 오빠가 뭘 하려는지 알아요. 만약 하고 싶으면 날 오빠한테 줄 수 있어요.”주선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옷자락을 잡고 긴장한 표정으로 고백했다.이건 현성에 대한 인정이었다. 현성은 너무 설레어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두말없이 주현영을 와락 끌어안았다.그러자 주현영이 이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여, 여기서는 안 돼요. 우리... 호텔 가요.”“그래, 바로 가자.”나는 현성과 주현영이 손잡고 뛰쳐나오는 걸 본 순간, 현성이 오늘 소원을 이룰 거라는 걸 알았다.나는 싱긋 웃으며 현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파이팅.”“당연하지.”현성은 헤헤 웃으며 말했다.이윽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기쁜 얼굴로 떠나갔다.나는 얼른 이 기쁜 소식을 민우에게 알려주려고 전화했다.[수호야. 왜 그래? 나 지금 바빠.]민우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말했다.그 목소리에 나는 의아했다.“너 지금 뭐 해? 가게 보는 거 아니었어?”[설아가 점심에 나 찾아와서 지금 설아랑 호텔에 있어.]“헐, 너 뭐야? 임설아랑 결실을 보는 거야?”‘왜 친구들한테 버림당해 혼자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지?’민우는 헤실 웃었다.[이만 끊어. 설아가 샤워하러 갔다가 지금 나와. 우리 오늘 마지막까지 갈 거거든.]민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대충 음식을 먹고 가게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하지만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을수록 기분이 안 좋았다.예전에는 내가 민우와 현성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었는데, 현재는 내가 두 사람을 부러워하는 꼴이 되었으니.하지만 윤지은과 애교 누나한테는 연락할 엄두도 나지 않고 형수는 아직 혼미해 있으니 누구를 찾아야 할지 고민이었다.나는 주위에 여자가 끊이지 않다고 이렇게 외로이 혼자 남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정수호 몰락했네. 몰락했어!’내가 속으로 감개무량해하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직원 한 명이 나를 불렀다.“정 사장님, 누가 찾아왔어요.”“알았어요.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