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체는 이미 봤지? 그러면 하체를 보여 줄게.”하정현은 말하면서 제 치마를 걷어 올렸다. 그녀는 섹시한 망사 스타킹을 신어 보일 듯 말 듯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하지만 망사 스타킹 아래는 새하얗기만 할 뿐 문신 같은 건 없었다.그럼 하정현도 배제할 수 있었다.그러면 그날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사람 중에 유미 사모님만 남게 된 셈이다.그건 내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하정현은 또 뜸을 들이며 말했다.“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 좀 해볼게.”나는 너무 초조해서 심장이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만 뜸 들이고 얼른 말해요. 대체 누군데요?”“사실, 사실 그날 수호 씨랑 몸 섞은 사람은 한 명이 아니야.”“네?”그 대답은 내 예상 범위를 너무 벗어나 나는 한참 동안 반응하지 못 했다.“그럼 유미 사모님이 있었는지만 말해줘요.”“있었어. 하지만 사람을 착각해서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 뒤 도망가 버려서 실질적인 관계는 맺지 않았어.”그 대답을 들으니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나와 사모님이 잔 게 아니라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죄책감 가질 필요도 사장님께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나는 심지어 그날 밤 나와 사모님이 나눴던 스킨십을 간과했다.그런 일은 나와 사모님만 입 밖에 꺼내지 않으면 점점 잊힐 테니까.“진짜 수호 씨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누구인지 안 궁금해?”하정현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싱긋 웃었다.“사모님만 아니면 다른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어요.”“만약 나라면?”나는 멍하니 하정현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진짜예요? 농담이죠?”“난 우선 수호 씨 진심이 듣고 싶어. 수호 씨는 누구였으면 좋겠어?”하정현은 문제를 나한테 던졌다.하지만 나는 누구이길 바란 적은 없다. 그저 그 사람이 절대 사모님만은 아니기를 바랐을 뿐이지.그 때문에 하정현이 그런 질문을 할 때 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소여정? 설마 그 여자인가
“보니까 은근히 지은이길 바라네?”나는 윤지은이라고 확신했기에 하정현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했다.그건 아마도 그 상대가 윤지은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너무 커서였을 수도 있었다. 정말 윤지은이면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생각하니 웃음이 흘러나왔다.“당연하죠. 그럼 더 이상 알아내려고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동안 내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했는데,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안심할 수 있겠어요.”“너무 쉽게 생각하네. 수호 씨가 비록 임유미 씨와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딱 한 끗 차이였어. 본인이 키스했던 사람이 수호 씨라는 걸 발견했을 때 유미 씨 표정이 어땠는지, 수호 씨는 아마 모를 거야.”그 말은 단번에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어떤 표정이었는데요? 놀라던가요? 아니면 실망하던가요?”“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어. 놀라움과 실망감도 있긴 했지만 뭔가 더 있었어.”“뭐가요? 무슨 뜻인데요?”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그러자 하정현은 귀찮았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몰라.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보지 못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지. 유미 씨는 상대가 수호 씨라는 걸 발견한 뒤에도 수호 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계속할지 말지 고민했어.”“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사모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나는 사모님을 대신해 해명했다.하정현은 그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유미 씨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아무튼 알아요.”“그럼 내 친구 지은이는 그런 사람이고?”“그런 뜻 아니에요.”“정수호, 수호 씨는 항상 본인 입장에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더라. 그 사람을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지은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심지어는 수호 씨네 형수와 애교 씨도 제대로 알아본 적 없지? 두고 봐, 두려워할수록 그 일이 닥칠 테니까.”하정현의 애매모호한 말을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어 나는 마음이 초조했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아무것도 아니야. 할 말은 다 했
때는 밤 11시.형님 집 아래에 있는 공원에서 야간 러닝을 하던 중, 풀숲 속에서 들려오는 남녀의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진동성, 설마 안 되는 거야? 집에서는 느낌 안 산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더니, 왜 아직도 안 돼?”‘저거 우리 형수님 목소리 아니야?’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여자가 내 형수님 고태연이라는 걸 알아버렸다.‘형과 형수는 밥 먹으러 간다고 했는데? 왜 공원 풀숲에 있는 거지?’여자 친구는 한 번도 안 사귀어 봤지만 동영상은 그래도 많이 봤다고 자부하기에, 나는 곧바로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버렸다.‘형과 형수님이 이런 스릴을 좋아할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공원에서.’순간 몰래 엿듣고 싶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다.형수는 얼굴도 예쁘장한데 몸매는 더 끝내준다. 그런 형수의 신음소리라니 이건 꿈에 그리던 일이었다.살금살금 수풀 쪽으로 걸어가 몰래 머리를 내밀었더니 형수님이 형 위에 앉아 있었다. 물론 나를 등지고 있었지만 등 라인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순간 입이 바싹 마르고 아랫배에 열기가 올라왔다.하지만 이렇게 매력적인 형수님 앞에서 형은 영 맥을 못 췄다.“태연아, 나 여전히 안 되는데.”그 말에 형수가 버럭 화를 냈다.“약도 없네, 정말. 이제 고작 서른다섯이면서 왜 이렇게 쓸모가 없어? 안 서면 싸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아무것도 없으면 애는 어떻게 가져? 계속 이러면 나 다른 사람 만난다? 당신은 애 싫을지 몰라도 나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잔뜩 화가 난 형수가 바지를 입고는 수풀 밖으로 걸어 나오자 놀란 나는 헐레벌떡 도망쳤다.집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수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쾅’ 닫히는 문소리에 내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깜짝 놀랐네. 형과 형수님 사이가 이렇게 안 좋을 줄이야.’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욕구가 많아진다더니 형수님도 욕구 불만인 게 틀림없었다. ‘하긴, 형처럼 비실비실한 몸으로 형수님을 어떻게 만족시키겠어?
“애교야, 왔어? 얼른 들어와.”내가 한참 답답해하고 있을 때, 형수가 다가와 낯선 여자를 친절하게 맞이했다.여자는 형수의 초대로 곧장 집 안에 들어섰다.그러자 형수가 우리를 소개했다.여자는 형수의 친한 친구인데, 이름은 이애교,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다.“애교야, 이 사람은 동성 씨와 같은 마을에 살던 동생이야, 정수호라고, 어제 왔어.”애교라는 여자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빙그레 웃었다.“동성 씨한테 이렇게 어리고 잘생긴 동생이 다 있었어?”“수호 씨 이제 막 대학 졸업했어. 그러니 당연히 젊지. 젊을 뿐만 아니라 엄청 튼실해.”내 착각일지 모르겠으나 형수의 마지막 한마디는 무척 의미심장했다. 심지어 눈길마저 내 아래를 흘끗거렸다.그 동작에 나는 더 불편해졌다.그때, 애교 누나가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물었다.“태연아, 네가 말했던 마사지사가 설마 이 사람이야?”“맞아. 수호 씨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한테 마사지를 배웠대. 솜씨가 엄청 좋아.”형수는 말을 마치자마자 나를 봤다.“아까 미처 말하지 못했는데, 사실 내 친구가 허리와 척추가 아프다고 해서요. 가끔 가슴도 답답하대요. 원래는 한의사를 불러 마사지 좀 받게 하려고 했는데, 수호 씨가 마침 마사지할 줄 알잖아요. 그래서 한번 받아보게 하려고요.”‘그런 거였군.’나는 단번에 승낙했다.‘형과 형수가 나를 이곳에서 머물게 해주고 일자리도 알아봐 줬는데, 이런 일 정도야 당연히 도와야지.’그때, 애교 누나가 부끄러운지 형수를 옆으로 끌고 갔다.“이건 좀 아니지 않나? 너무 젊은데?”“젊은 게 뭐 어때서? 젊을수록 좋은 거 아니야? 젊어야 힘이 좋고, 그래야 너 같은 유부녀를 편하게 모실 수 있잖아.”“무슨 헛소리하는 거야.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애교 누나는 얼굴을 붉혔다.그러자 형수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농담이야. 네가 그쪽으로 생각하니까 그렇지. 솔직히 말해봐, 네 남편 반년 동안 집에 안 왔는데, 그동안 하고 싶지 않았어?”“너 계속 이러면
나는 마치 나쁜 짓을 한 어린애처럼 벌떡 일어났다.“형수님, 형수님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애교 누나도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양 볼은 어느새 사과처럼 빨갛게 무르익었다.“태연아, 그런 거 아니야. 나랑 수호 씨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가슴이 답답해서 마사지해 준 것뿐이야.”애교 누나가 구구절절 설명하자 형수가 피식 웃었다.“내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긴장해? 아니면 나 몰래 정말 나쁜 짓이라도 했어?”나와 애교 누나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그와 동시에 당혹스러웠다.‘내가 감히 형수님 친구를 어떻게 하려 하다니, 만약 형수님이 알면 분명 쫓아낼 거야.’그때 애교 누나가 안절부절못하더니 일이 있다는 핑계로 서둘러 집을 나갔다.형수는 그런 애교 누나의 뒷모습을 보며 멍해 있다가 한참 뒤에 나를 보며 물었다.“수호 씨, 내 친구 어떻게 같아요?”“네?”형수한테서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으니 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워 말까지 더듬었다.“좋죠. 예쁘고 몸매도 좋고 성격도 좋잖아요.”“그럼 내 친구 꼬시라고 하면 그럴 의향 있어요?”형수의 말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마음도 혼란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문제는 형수가 방금 내가 형수 친구를 어떻게 해보려던 걸 발견하고 일부러 떠보는 것일까 봐 걱정되었다.내가 긴장하고 있을 때, 형수가 내 팔을 잡으며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긴장할 거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돼요.”“형수님, 저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애교 누나는 형수님 친구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마음을 품겠어요?”“감히라고요? 아래가 이렇게 단단해졌으면서.”형수는 내 아래를 흘긋거리며 말했다.순간 너무 쪽팔리고 난감해 나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와, 사이즈 보통 아니네요.”내 착각일지 모르겠으나 내 아래를 본 순간 형수의 눈빛이 변했다.그때 형수가 말을 이었다.“나 농담 아니에요. 애교와 잠자리를 가져요. 형 도와주는 셈 치고.”‘뭐지? 애교 누나와 자는
팬티는 부드럽고 나른한 데다 심지어 형수의 냄새까지 배어 있었다.손에 감각이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아침에 몰래 엿들었던 소리가 뇌리에 재생되며 점차 흥분되었다.‘형수와 뭘 진짜로 할 수는 없지만 팬티로 상상하는 건 괜찮잖아.’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벨트를 풀고 팬티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내 손이 아래에 닿으려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고,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그대로 뿜을 뻔했다.‘집에 나와 형수님 둘뿐이니 노크한 사람은 형수님이겠지?’나는 서둘러 그 팬티를 꺼내 목욕 타월 선반 위에 올려다 놓고 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형수님, 왜 그러세요?”“수호 씨, 안에서 무슨 나쁜 짓 했어요?”‘이런 말을 묻는다고?’“네? 아, 아니요.”나는 찔려서 말을 더듬었다.“그런데 왜 그렇게 떨어요?”형수의 한마디에 나는 가슴이 철렁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형수가 아무리 개방적이라고 해도 본인과 나는 안 된다고 명확히 말했는데, 만약 내가 형수의 팬티를 가지고 그런 짓을 한 걸 들키면 내가 본인 말을 안 듣는다고 생각해 쫓아내면 어떡하지?’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나는 애써 설명했다.“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배가 아파서 식은땀이 난 것뿐이에요.”“갑자기 식은땀이 왜 나요? 혹시 어디 아파요?”형수는 이내 나를 걱정했다.“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좀 불편해요.”“문 좀 열어봐요. 어디 봐봐요.”“이, 이제 괜찮아요.”“내외할 거 뭐 있어요? 수호 씨 내 눈에는 아직 애예요. 그러니 얼른 문 열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실망감이 휘몰아쳤다. ‘내가 형수님 눈에 고작 애였다니. 어쩐지 내 앞에서 거침없더라니. 나는 그런 상대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나 보네.’나는 허리를 숙여 화장실 문을 열었다. 형수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목욕 타월을 놓은 선반 위를 확인했다.나는 마음이 찔려 형수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그때 형수가 선반 쪽으로 걸어가더니 나한테 웃으며 물었다.“혹시 내 팬티 건드렸어
애교 누나는 팬티를 벗어 가방 안에 넣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창밖을 내다봤다.하지만 얼굴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랐고, 긴장했는지 두 다리를 꽉 붙이고 있었다.나는 백미러로 그 과정을 전부 눈에 담았다.수줍어하고 불안해하는 애교 누나의 모습은 너무 매력적이었다.특히 두 다리는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형수 정말 대박이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애교 누나가 저런 행동을 했지?’웅웅-그때 핸드폰이 갑자기 울려 확인해 보니 형수가 보낸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봤어요?]나는 너무 흥분하고 설레는 마음에 뭘 말해야 할지 몰라 싱긋 미소를 날렸다.그러자 형수의 문자가 또 날아왔다.[애교도 수호 씨처럼 부끄러운가 봐요. 하지만 내가 천천히 마음을 열게 할 테니까 기회 잡아요.][네.]답장을 보내고 나니 심장이 더 두근거렸고 가슴이 벅차올랐다.‘형수 진짜 대박이네.’쇼핑몰에 도착하자 형수는 자꾸만 나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자꾸만 피하는 애교 누나 때문에 나는 답답하기만 했다.그러다 잠깐 휴식하는 사이, 애교 누나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형수가 내게 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기회를 그렇게 많이 만들어줬는데 왜 접근하지 않아요?”“형수님, 저도 싫어서 안 한 게 아니라 애교 누나가 자꾸만 일부러 저를 피해요. 제가 본인한테 딴마음 품고 있다는 걸 의심하는 것 같아요.”“그게 접근한 거예요? 아침에 배웠잖아요. 여자를 상대할 때 너무 선비처럼 굴면 안 돼요. 애교가 멀리하면 수호 씨가 가까이 가야죠.”“애교가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 할 거예요? 강제로라도 해야죠. 남자는 남자답게 먼저 대시해봐요. 남자다운 모습 보여줘야죠. 그러다가 슬쩍 건드리면 애교도 서서히 넘어갈 거예요. 그렇게 안 하면 수호 씨 같은 굼뜬 성격에 언제 애교를 손에 넣겠어요?”이 방면에서 내가 좀 뻣뻣한 건 확실하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만 하느라 여자애를 사귈 생각도 못 했으니 성숙한 유부녀는 더 알 리 없다.나는 알 듯 말 듯해 고개를 끄
“아...”아까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강렬한 느낌이 들지 않아 한참은 더 걸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애교 누나가 나를 몰래 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나니 왠지 모르게 흥분되고 짜릿해 그대로 뿜어버렸다.방금 전 바지를 벗은 탓에 다행히 바지는 더럽혀지지 않았지만 운전석은 엉망이 되어버렸다.그걸 확인하니 당황함이 밀려왔다.형수한테 이걸 들키면 아마 쪽팔려 죽을 수도 있다.심지어 이건 형수가 가장 좋아하는 차다어제 동성 형과 함께 나를 픽업하러 왔을 때도 동성 형은 운전대도 잡지 못하게 했었다. 동성 형의 말에 의하면 이건 형수가 직접 산 차인데 고를 때도 엄청 오랫동안 골라 무척 아낀다고 했다.나는 다급하게 조수석에서 휴지를 꺼내 깨끗이 닦았다.하지만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이따가 식사 마치고 올 때까지 마를지도 걱정이었다.‘만약 흔적이 남으면 정말 곤란한데.’‘형수는 분명 나더러 학습하라고 했는데 내가 본인이 아끼는 차에서 이런 짓을 한 걸 알면 화내겠지?’얼른 차를 정리한 뒤 나는 나 자신도 정리했다.하지만 한참 동안 차에 앉아 내리지 않았다.나는 편해졌다지만 이대로 올라갈 수 있을지, 특히 애교 누나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걱정되었다.그리고 아까 서로 눈이 마주친 장면을 떠올리니 쪽팔리고 난처했다.‘애교 누나한테 그런 짓을 들켜 버리다니 나를 변태라고 생각했겠지?’안 그래도 나를 일부러 피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으니 형수한테 일러바칠 게 뻔했다.게다가 형수는 계속 나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모든 게 나 때문에 망쳐버렸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고 난감했다.‘지금 절대 올라갈 수 없어.’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나는 끝내 형수에게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애교 누나가 어떤 상태인지도 살필 겸.그리고 잠시 뒤, 형수의 답장을 받았다.[애교는 뭐 좀 가지러 간다고 내려간 뒤로 아직 안 돌아왔어요. 그래서 마침 물으려던 참이었는데, 혹시 애교 못 봤어요?]형수의 문자를 보니 나는 답답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아까부터 지
“보니까 은근히 지은이길 바라네?”나는 윤지은이라고 확신했기에 하정현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했다.그건 아마도 그 상대가 윤지은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너무 커서였을 수도 있었다. 정말 윤지은이면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생각하니 웃음이 흘러나왔다.“당연하죠. 그럼 더 이상 알아내려고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동안 내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했는데,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안심할 수 있겠어요.”“너무 쉽게 생각하네. 수호 씨가 비록 임유미 씨와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딱 한 끗 차이였어. 본인이 키스했던 사람이 수호 씨라는 걸 발견했을 때 유미 씨 표정이 어땠는지, 수호 씨는 아마 모를 거야.”그 말은 단번에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어떤 표정이었는데요? 놀라던가요? 아니면 실망하던가요?”“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어. 놀라움과 실망감도 있긴 했지만 뭔가 더 있었어.”“뭐가요? 무슨 뜻인데요?”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그러자 하정현은 귀찮았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몰라.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보지 못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지. 유미 씨는 상대가 수호 씨라는 걸 발견한 뒤에도 수호 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계속할지 말지 고민했어.”“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사모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나는 사모님을 대신해 해명했다.하정현은 그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유미 씨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아무튼 알아요.”“그럼 내 친구 지은이는 그런 사람이고?”“그런 뜻 아니에요.”“정수호, 수호 씨는 항상 본인 입장에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더라. 그 사람을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지은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심지어는 수호 씨네 형수와 애교 씨도 제대로 알아본 적 없지? 두고 봐, 두려워할수록 그 일이 닥칠 테니까.”하정현의 애매모호한 말을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어 나는 마음이 초조했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아무것도 아니야. 할 말은 다 했
“내 상체는 이미 봤지? 그러면 하체를 보여 줄게.”하정현은 말하면서 제 치마를 걷어 올렸다. 그녀는 섹시한 망사 스타킹을 신어 보일 듯 말 듯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하지만 망사 스타킹 아래는 새하얗기만 할 뿐 문신 같은 건 없었다.그럼 하정현도 배제할 수 있었다.그러면 그날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사람 중에 유미 사모님만 남게 된 셈이다.그건 내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하정현은 또 뜸을 들이며 말했다.“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 좀 해볼게.”나는 너무 초조해서 심장이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만 뜸 들이고 얼른 말해요. 대체 누군데요?”“사실, 사실 그날 수호 씨랑 몸 섞은 사람은 한 명이 아니야.”“네?”그 대답은 내 예상 범위를 너무 벗어나 나는 한참 동안 반응하지 못 했다.“그럼 유미 사모님이 있었는지만 말해줘요.”“있었어. 하지만 사람을 착각해서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 뒤 도망가 버려서 실질적인 관계는 맺지 않았어.”그 대답을 들으니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나와 사모님이 잔 게 아니라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죄책감 가질 필요도 사장님께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나는 심지어 그날 밤 나와 사모님이 나눴던 스킨십을 간과했다.그런 일은 나와 사모님만 입 밖에 꺼내지 않으면 점점 잊힐 테니까.“진짜 수호 씨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누구인지 안 궁금해?”하정현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싱긋 웃었다.“사모님만 아니면 다른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어요.”“만약 나라면?”나는 멍하니 하정현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진짜예요? 농담이죠?”“난 우선 수호 씨 진심이 듣고 싶어. 수호 씨는 누구였으면 좋겠어?”하정현은 문제를 나한테 던졌다.하지만 나는 누구이길 바란 적은 없다. 그저 그 사람이 절대 사모님만은 아니기를 바랐을 뿐이지.그 때문에 하정현이 그런 질문을 할 때 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소여정? 설마 그 여자인가
하정현의 말을 들으니 나는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하정현은 평소 무심하고 털털해 보이고 아버지가 잡혀갔다는 얘기를 농담하듯 가볍게 꺼냈지만 사실 그 모든 건 가짜였다. 나는 이제야 그간 하정현이 지은 미소가 모두 가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하정현은 사실 그 일로 계속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바보라고 하기에는 효심이 많고 똑똑하다고 하기에는 인터넷 대출을 받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지금은 대출 빚을 갚으려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고.하지만 계속 이렇게 가면 하정현은 분명 망가질 거다.“이 일은 지은 씨한테 얘기해 볼게요.”나는 속으로 마음을 굳혔다.하지만 하정현은 다급히 내 팔을 잡아당겼다.“지은한테 알려주지 마. 지은이는 안 돼.”“왜요? 지은 씨한테 2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인데 왜 본인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숨기는 거예요?”그 말에 하정현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내가 지은이한테 진 빚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빚지면 안 돼.”“그러 알아? 애초에 지은과 준휘를 연결해 준 사람도 나야. 준휘가 쫓아다닐 때 지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나서서 기호를 만들어 준 것 때문에 지은이는 모든 게 하늘의 뜻이라고 믿게 된 거라고...”하정현의 말에 나는 너무 놀라 한참 동안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러다 한참 고민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지은 씨도 정현 씨를 탓하지 않을 거예요. 안 그러면 정현 씨를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나도 지은이가 나를 탓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지은이는 착한 사람이야. 말을 좀 독하게 해서 그렇지. 그런데 그래서 더 이상 폐 끼칠 수 없어.”“하지만 이 일은 정현 씨 혼자서 해결할 방법이 없잖아요. 계속 이러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돼요.”“아무튼 이 일은 지은이한테 말하지 마. 동의하면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게.”“전 정현 씨의 비밀에 관
‘진짜 약도 없네. 지은 씨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그걸 또 몰래 찍었다고?’내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하정현이 갑자기 제 핸드폰을 내 앞으로 쑥 들이밀었다.그 사진을 본 순간 나는 다급히 액정을 가렸다.“미쳤어요? 이렇게 노골적인 사진을 찍으면 어떡해요? 가족이 볼까 봐 두렵지도 않아요?”하정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이게 뭐가 노골적이야? 가려야 할 곳은 다 가렸잖아.”‘이게 가린 거라고?’이런 사진은 섬나라에 수출해 봤자 삼류 축에도 못 낄 거다.나는 하정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아버지가 관직에 계셨고 가정 형편도 괜찮았으니 돈이 모자라면 집에 말하면 될 것인데, 왜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 사진들 당장 삭제해요. 이 사진은 얼굴도 나왔잖아요. 이 사진이 퍼지기라도 하면 앞으로 얼굴 어떻게 들고 다니려고요?”“하. 난 이런 말 들으려고 수호 씨 부른 거 아닌데. 나랑 같이 커플 사진 찍자...”“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저는 절대 이런 사진 찍지 않을 거예요.”나는 하정현의 생각을 아예 싹 잘라버리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러자 하정현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돈 주는데도 안 한다고? 사진 한 세트 찍으면 얼마나 벌 수 있는지 알아?”“저 지금 돈이 부족하지 않아요. 오히려 정현 씨야말로 돈이 부족하면 나한테나 친구한테 말해야지 왜 이런 짓을 해요?”“하.”하정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내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나 자이언트 베이비 아니거든. 그런데 왜 다른 사람한테 손 벌려야 하는데? 나도 내 능력으로 먹고사는 거니까 부끄러울 거 없다고 생각해.”그 말을 들으니 하정현이 궁하긴 궁했나 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이런 사진은 정상적인 여성이라면 절대 찍지 않았을 거다.그 순간 뭔가 머리를 스쳐지나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설마 어디서 대출받은 건 아니죠?”하정현은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더 이상 이영미와 한 공간에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 헐레벌떡 도망쳤다.그 와중에도 이영미는 나더러 자기 남편 꼭 데려오라고, 안 데려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윽박질렀다.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윤해철에게 전화했다.[수호 군, 나도 마침 자네한테 볼일 있었는데.]“무슨 일인데요?”[회사 일은 내가 이미 다 처리했으니 방법을 대서 우리 마누라한테 좀 전해줘. 내가 요즘 데리러 갈 거라고.]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이영미가 하고 싶다고 할 때 윤해철이 마침 이영미를 데리러 올 생각이었다니.나는 다급히 윤해철에게 말했다.“방금 사모님을 뵀는데 사모님도 회장님을 무척 그리워하셨어요.”[마침 잘됐네. 그럼 지금 당장 데리러 가지.]“윤 회장님, 잠깐만요.”[왜 그러나?]“사모님은 지금 집에 안 계세요. 밖에 있어요...”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러다 문득 내가 집을 나올 때 이영미가 보냈던 주소가 떠올라 나는 그 주소를 윤해철에게 보내고 그곳에서 이영미를 찾으라고 했다.어떻게 설명할지는 부부가 만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었다.이영미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내 임무도 완수한 셈이었다.전화를 끊고 얼마 뒤, 나는 마침 장을 보고 온 애교 누나와 마주쳤다.“수호 씨, 왜 여기 있어요?”나는 대충 얼버무려 상황을 무마하면서 애교 누나의 짐을 들어주었다.“애교 누나, 저 마침 가게에 나가볼 참이었어요. 형수는 수고스러운 대로 누나가 좀 돌봐줘요. 제가 가능한 빨리 도우미를 구할게요. 그러면 누나도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애교 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나도 어차피 할 일이 없으니 태연이 돌보는 건 나한테 맡겨요. 내가 어려울 때 태연이도 항상 나를 도왔는데 지금은 태연이가 어려운 시기이니 당연히 내가 도와야죠.”“그런데 일 구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일은 뭐 구한다고 바로 구해지는 건가요? 나 공무원 시험 준비하려고요. 나도 아버지 말고 나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요.”애교 누나
“그럼 얼른 누우세요. 빨리 끝낼게요.”이영미는 두말없이 소파 위에 엎드렸다.나는 먼저 이영미의 허리부터 주물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영미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어머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나는 흠칫 놀라 손을 뒤로 뺐다.그랬더니 이영미가 발긋한 얼굴로 말했다.“남자가 내 몸 만지는 게 오랜만이라 흥분했나 봐.”“계속 그러면 제가 어떻게 주물러 드려요?”“이거 다 정상적인 반응이잖아. 의사라는 사람이 침착해야지.”나는 이런 목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침착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사람 혼을 쏙 빼놓는 듯한 목소리는 아마 내시가 들어도 견디지 못할 거다.“안 돼요. 계속 그러면 마사지 안 해드릴 거예요.”나는 참지 못해 난처한 상황이 생길까 봐 먼저 물러섰다.하지만 이영미는 그것조차도 반대했다.“안돼. 계속 해. 안 그러면 안 갈 거니까. 나도 이것저것 다 겪어본 사람인데 뭔들 못 봤겠어? 그러니 어색하지 마. 내 눈에 수호 씨는 꼬맹이나 다름없으니까. 난 괜찮아.”이영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나도 이제 성인이고 혈기 왕성한 나이인데, 어떻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여길 수 있냔 말이다.하지만 이영미는 한사코 내 팔을 꽉 잡고 어디 가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닿는 피붓결에 나는 마음이 더 콩닥거렸다.“알았어요. 그럼 잘 누워 있어요. 계속 마사지해 드릴게요. 하지만 소리 나지 않게 좀 참아주세요.”“그건 안 되지. 욕망을 억누르는 건 몸에 안 좋아.”이영미의 말은 예전에 남주 누나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영미는 내 마사지를 받으며 한편으론 감탄했다.“여자는 역시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니까. 혼자 하는 건 너무 재미없어. 남자도 마찬가지로 여자의 손길이 필요한 법이지. 안 그러면 조물주가 왜 남녀 성별을 따로 만들었겠어? 그것도 상호 보완할 수 있게. 안 그래?”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 여기 느
이영미는 제비집이며 인삼 등 다양한 보양식을 가져왔다.“어머님, 이거 다 너무 귀한 것들이에요.”“이건 다 수호 씨 형수 주려고 가져온 것들이야. 지금 의식이 없다고 해서 죽만 먹이면 안 돼. 영양소를 많이 공급해 줘야지.”나는 형수 대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혹시 윤지은 씨는 함께 오지 않았어요?”그때 애교 누나가 불쑥 물어봤다.“그 계집애는 또 무슨 일인지 함께 내려오자고 하니까 기어코 싫다고 하지 뭐야.”이영미는 말을 마친 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혹시 우리 지은이랑 싸웠어?”“아니요.”“못 믿겠는데? 지은이가 말은 독하게 해도 마음씨는 착한 애야. 네 형수 줄 거라니까 이렇게 바리바리 준비해 준 걸 보면 네 형수를 친구로 생각한다는 뜻이거든. 그런데도 기어코 직접 오지 않겠다는 걸 보면 이유는 하나야. 바로 너. 너희 둘 요즘 싸웠지?”나는 더 이상 그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어머님, 정말 아니에요.”하지만 이영미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아니긴 무슨. 두 사람 분명 문제 있는데.”그때 애교 누나는 내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얘기 나누세요. 저는 내려가서 뭐 좀 사 올게요.”역시 애교 누나는 내가 말하기 부끄러워할까 봐 배려해 주려고 자리를 피한 거였다.애교 누나가 떠난 뒤 이영미는 내 옆에 꼭 붙어 앉았다.“이제 다른 사람도 없으니 말할 수 있지? 대충 얼버무릴 생각하지 마.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나도 수호 씨 용서 안 할 거니까.”이영미가 계속 꼬치꼬치 캐묻자 나는 할 수 없이 그날 병원에서 싸웠던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어머님도 제가 쓰레기 같아요?”“응. 조금. 내 딸과 사귀면서 다른 여자와도 사귄다니. 내 딸의 매력이 그렇게 부족해? 한 명으로는 만족하지 못 하는 거야?”이영미의 말에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어머님은 저와 지은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잖아요. 우리는 각자 원하는 걸 교환한 것뿐이지 마음을 주고받고 결혼 얘기까지
나는 내가 예전에 살던 방을 들여다보았다.이곳은 내 추억이 너무 많이 깃든 곳이다. 상황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익숙한 물건들을 보니 나는 문득 형수와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고 형수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 모든 건 어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했다.“저 잠깐 형수 좀 보고 올게요.”나는 형수 방으로 향했다.혼자 얌전히 누워 곤히 잠든 형수의 모습은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았다.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이불을 덮은 모습은 진짜 그냥 자는 것 같았다.나는 젖은 수건으로 형수의 몸을 닦아준 뒤 면봉에 물을 묻혀 형수의 입을 적셔주었다.형수의 현재 상태는 기껏해야 죽 같은 음식밖에 먹일 수 없고 또 매일 많은 량을 먹을 수도 없다. 나도 당연히 형수가 빨리 깨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날 밤 이후로 내가 무슨 짓을 해서 자극해도 형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애교 누나가 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내가 먹일게요. 수호 씨는 불편하면 가서 쉬어요.”“네. 애교 누나. 그럼 부탁할게요.”사실 나는 너무 아파 더 이상 형수를 돌볼 상황이 아니었기에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갔다.형수는 내 방을 예전 내가 떠나던 그날 그대로 남겨두었다.형수와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니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나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첫 번째는 나비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형수의 일 때문이었다.원래 나비 일은 이제 그냥 묻어두려고 했는데 결국 어젯밤 또 그렇게 되어버렸다.솔직히 나 스스로도 내가 헛것을 봤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용천 호텔에서의 그날 밤 나와 잔 사람이 세 명 중 한 명이라면 아무리 해도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다.결국 나는 환각이라고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나는 침대에 똑바로 누운 채 눈을 지그시 감고는 30분 동안 얕은 수면을 취했다.고작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잤다고 정신상태는 훨씬 나아졌다.침실에서 나와 보
그 순간 나는 머리가 띵했다. 나는 애써 눈을 뜨려고 했지만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눈꺼풀이 무거워 도저히 뜰 수 없었다.다만 그 와중에 약간의 의식은 존재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용천 호텔에서 나와 몸을 섞은 사람이 사모님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사모님 댁에서 지내면서 사모님 다리에 있는 나비 문신을 보고 내 추측을 확신했고.하지만 지금껏 나는 그게 사모님이든 아니든 무조건 사모님과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최면했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사장님께 미안한 행동은 할 수 없었으니까.하지만 오늘 저녁 나는 또 잠결에 그 나비를 보게 된 거다. 그 순간 나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뭐지?’오늘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날 용천 호텔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애교 누나뿐이다.하지만 애교 누나 몸에는 분명 나비 문신이 없다.게다가 나는 애교 누나 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애교 누나의 피부는 이 정도로 희지 않다.하지만 애교 누나가 아니면 또 누구란 말인가?고아연? 아니면 고수연?그날 밤 나는 이 두 여자를 본 적이 없다.나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했고 상대가 누구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무엇보다 오늘 너무 취해 머리가 어지러웠기에 눈을 뜰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로 애써 몸부림쳤지만 결국 의식이 점멸되어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그리고 나는 다음 날까지 푹 잠들었다.내가 바닥에서 일어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깨어났다. 내가 그중 맨 마지막에 깨어난 듯했다.나는 아픈 머리를 문지르다가 테이블을 치우는 애교 누나를 발견했다.“누나, 다른 사람들은요?”애교 누나는 테이블을 정리하면서 대답했다.“다들 일이 있다고 먼저 갔어요. 수호 씨를 방에서 자라고 하려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 아무리 깨워도 깨지 않더라고요.”“애교 누나, 어젯밤 혹시 안 잤어요?”나는 몸부림치며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그때 애교 누나가 입을 열었다.“늦게 잠들긴 했지만 안 잔 건 아니에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