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은 아이를 안고 나가 안풍 친왕비에게 보여주었는데, 안풍 친왕비는 아이를 받아 안고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녀석한테 평생 자기 애는 없을 줄 알았는데 정말 잘됐네. 걔가 갈수록 사람 냄새가 난다니까! 근데 이 아이.. 정말 어렸을 때 이리율을 쏙 빼닮았네. 이리율은 어릴 때 너무 말랐지만.”원경릉이 왕비를 보고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이리 나리가 이번에 상당히 긴장해 보이던데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남편이 긴장하는 건 당연하지만, 제 생각에 이리 나리는 태산이 무너져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할 사람인데 이번엔 좀 심하게 긴장하더라고요. 이니 나리에게 무슨 사연이 있나요?”왕비가 원경릉을 보고 약간 감동했다. “정말 꼼꼼하게 관찰했네. 이리율에게 관심을 가져줬구나. 사실 이리율은 너란 제자를 자랑스러워하지. 넌 이리율이 평생 단 하나 보호해야 할 여자야.”“에?” 원경릉이 약간 당황했다. “첫 번째는 왕비 마마실걸요? 마마는 이리 나리의 사부님이시잖아요.”“이리율은 어릴 때부터 누구의 보호가 필요 없다는 걸 알았어.” 왕비는 살짝 자기 이마를 아가 이마에 대고 원경릉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포대기를 토닥였다. “이 아기는 복 받았네. 태평성대에 태어나 부모 출신은 존귀하지. 이 아이는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 사랑하고 아낄 운명이야. 하늘의 사랑을 받은 아이니 이름을 이리천행이라 하자, 아이가 자라면 하늘의 도를 행해 백성을 보호하고 고통을 덜어주길 바라는 뜻으로. 어때?”“하늘의 도를 행한다, 천행.. 이리천행.. 이름 참 좋은데요. 뜻도 깊고요!” 원경릉이 안풍 친왕비 말에 찬성했다. “이리 나리…. 아이 이름은 마마께서 붙이셨는데 이리 나리 부모님께서는요?”이리 나리의 이력은 줄곧 베일에 싸여 있어 공주와 결혼할 때도 이리 집안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전에 듣기로 이리 나리도 부귀한 집안 출신으로 적어도 상인 집안일 거라고 했으나 이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몰랐다.원경릉은 원래 이리 나리 개인사를 수소문해
그러자 원경릉이 한 번도 보인적 없는 완력으로 미색을 끌고 나가 마차에 곧바로 태웠다.미색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위아래로 원경릉을 쳐다봤다. “언제부터 이렇게 힘이 세졌어요? 최근 무공수련이라도 한거예요? 계속 혜민서에 있지 않았어요? 이리 나리도 마마를 가르칠 틈이 없었는데. 폐하께서 직접 가르치신 건가요..? 폐하 성격에 마마께 무공을 가르치는 걸 마마께서는 참으실 수 있으세요?”“일단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물어볼 게 있어. 이리 나리 이력을 아는 게 있어?” 원경릉이 미색의 손을 누르며 물었다.“이리 나리 이력이요? 왜 갑자기 그런 개인적인 일을 물으시는 거지요?” 미색은 약간 의외였다.“그냥 우리가 이리 나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거 같아서, 좀 알아두고 싶어서 그래.” 원경릉은 이리 나리가 거의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을 본 순간을 떠올리며 속으로 강렬한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문령이 아이를 낳으면서 이리 나리 마음속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모양이었다.미색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사실 이리 집안이 어떤 상황인지 저도 잘 몰라요. 밖에 소문은 많이 돌죠. 누구는 이리 집안이 부유하다고 하고, 누구는 이리 집안이 어떤 방면에는 최고 부자라는 소리도 있지만 고아라는 말도 있어요. 제가 유일하게 아는 건 바로 이리 나리 어머니가 이리 나리를 낳을 때 난산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이리 나리는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 눈늑대봉에 나타난 것을 눈 늑대가 구해서 돌아왔다는 거예요.”원경릉이 화들짝 놀랐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늑대봉에 나타났다고? 누군가한테 버려진 거야?”“그건 잘 모르겠어요. 이리 나리가 얘기를 안 하시고 아무도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셔서 저도 무심코 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 마마께 눈 늑대를 달라고 하실 때 한 번 얘기하신 걸 들은 거예요.”원경릉이 놀라서 말했다. “어쩐지 이리 나리가 눈 늑대에 그렇게 깊은 집념을 보이더라. 알고 보니 이리 나리를 구한 게 눈 늑대였군.”미색이 고개를 끄덕
우문호는 자기가 외삼촌이 된다는 것이 기뻐서 원경릉에게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자꾸 물었다. 원경릉이 웃음을 지었다. “그래, 우리 그때 같이 가자. 외삼촌인데 조카한테 선물도 해야 하고.”“걱정하지 마, 목여한테 준비하라고 했어. 때 되면 여덟째랑 우리 애들이랑 같이 이리 저택으로 가자!” 우문호 또한 기쁜듯 힘차게 말했다.누구를 닮았는지는 세삼때 출궁해서 보기로 했다.우문호는 자신이 아버지로서의 비결을 전수해 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이리 나리가 다른 건 뭐든지 다 알지만 아빠는 처음이라 허둥지둥할 게 분명하니 자신처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곁에서 하나하나 가르쳐줘야 한다는 것이다.원경릉은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채로 알았다고 했고 우문호는 너무 흥분한 탓에 원경릉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목여를 불러 황제의 신분으로 아이에게 이름을 하사하려고 했다.원경릉이 얼른 말렸다. “그럴 필요 없어, 아기 이름 붙였어. 이리천행이라고, 안풍 친왕비께서 붙여주셨어.”우문호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천행? 어쩌자고 역병 이름을 붙이신 거야? 재수 없게. 안 좋아, 안 좋다고!”생각지도 못한 우문호의 반응에 원경릉도 놀라서 잠시 생각해 보니 유행성 돌림병이 떠올랐다. 천행은 역병 이름이긴 하지만 왕비가 아마 그것을 놓칠리는 없었다. “천행이라고 해도 단순히 유행성 돌림병만 지칭하는 건 아니고 보살이 수련하는 오행 중 하나도 그렇게 부른다고 들었어. 그리고 자연법칙을 따르고 흐름에 따라 행한다는 의미가 있잖아?”그리고 왕비는 ‘하늘의 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자연의 순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기에유행성 돌림병 어쩌고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어쨌든 이 아이는 계란이와 같은 운명으로 많은 별들이 하나의 달을 에워싸듯 추앙받을 것으로 이름은 그다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이리천행 듣기 좋잖아.’원경릉은 다음날 혜민서로 돌아갔다. 지금 혜민서 쪽은 할머니가 약재를 제련하는 실험실을 짓기 위해 확장 건축하고 있어 자신이 지켜봐
하지만 미색도 이리 나리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늑대봉에 버려졌다고 했으니 이리 나리의 모친이 난산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 탓을 전부 이리 나리에게 돌린것이라는 가능성이 있었다. 민간에도 그런 미신을 믿는 사람이 있지만 난산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많은 평민 백성이 전부 산모의 죽음이 난산 때문이라고 간신히 살아남은 아이에게 분노를 쏟아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를 너무도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매정한 아버지도 있으니 이리 나리 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왕비 마마께서 그러시는데 이리 나리 가족을 전부 다 죽었데요.” 원경릉이 슬쩍 떠봤다.하지만 소요공은 처음듣는 듯 놀라 물었다. “다 죽어요? 정말입니까? 어머니만 돌아가신 게 아니었어요…?”보아하니 소요공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본래 원경릉도 더 이상 떠볼 필요 없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린 불안감이 점점 강해져서 시시각각 초조해지기 시작했다.원경릉은 궁으로 돌아와 경단이 늑대를 세삼때 데려가서 한 달간 이리 나리에게 빌려 주기로 경단이와 상의했다. 원경릉은 이게 이리 나리에게 위로가 될지는 확신이 가지 않았지만, 늘 눈 늑대를 갈망했었고, 전에 며칠을 빌려줬을 때도 몹시 기뻐했던 것을 기억했다. 원경릉은 눈 늑대와 새로 태어난 아이가 이리 나리의 심령에 위안이 되어 붕 뜬 마음이 평온을 되찾기를 바랄 뿐이었다.세삼 때가 되자 원경릉 가족은 눈 늑대를 데리고 이리 저택을 찾았다. 이리 나리는 눈 늑대를 보더니 역시나 좋아하며 눈 늑대를 끌고 허스키와 후원으로 가더니 그들에게는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세삼 의식도 꽤 거창해서 안풍 친왕비가 주관해서 씻긴 후 원경릉이 안아서 공주에게 주는데 공주 눈가가 빨갛게 된 것이 운 모양이었다.원경릉이 좌우를 물리고 침대에 앉아 부드럽게 우문령에게 물었다. “왜 그래? 누가 서럽게 했어? 이리 나리가 잘 안 해주셔?”공주가 침대에 앉더니 아이를 안았다. 얼굴이 초췌한 것이 아직 창백한데 억지로
공주의 침실을 나온 후 원경릉은 이리 나리를 찾아 후원으로 향했다. 이리 나리는 허스키와 눈 늑대와 후원에서 뛰어 놀고 있었는데 정말 즐거워 보였다. 봄날의 햇살이 후원의 작은 연못에 금빛 가루를 뿌려놓은 듯 아름다웠고, 막 새순이 돋은 수양버들은 바람을 맞아 한들거렸다. 눈 늑대와 허스키는 수양버들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이리 나리는 신나게 웃고 있었다.원경릉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리 나리는 다른 누구 앞에서도 이런 기쁜 웃음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유독 눈 늑대를 대할 때는 모든 경계심을 풀고 진심 어린 미소를 짓는구나.이리 나리가 세상을 경계하며 담을 쌓고, 일찌감치 현실을 자각해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일까?하지만 이리 나리를 알고 지내오는 모든 시간동안 이리 나리는 항상 사람을 진심으로 대해왔으며 누구도 속이거나 무시한 적이 없었다. 나라에 난이 일어났을 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앞장섰으며, 돈이든 사람이든 이리 나리를 필요로 할 때 거절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이리 나리는 진심을 다해 사는 사람으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공주에게 착실하게 잘한 것을 모두 눈으로 확인했다. 공주가 시집온 지 몇 년 동안 전혀 건드리지 않은 것은 공주가 앞으로 임신, 출산과 양육을 견디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몸을 보양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무슨 생각 하세요?”갑작스런 질문에 원경릉이 정신을 차렸는데, 언제부터 이리 나리가 자기 앞에 서 있었는지 아직 미소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원경릉을 보고 있었다.“아뇨,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이리 나리와 늑대가 이렇게 즐거운데 방해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원경릉이 웃음을 지었다.이리 나리가 빙긋 웃으며 정자로 가더니 느긋하게 앉았다. 비단옷에 백옥같이 빛나는 외모, 맑은 기상, 여기에 약간의 시원스러움과 자유분방함이 어울려 지난날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앉으세요!”원경릉이 이리 나리 맞은편에 앉았는데 이리 나리 눈 밑이 검어진 게 보였
이리 나리는 대답하지 않고 눈 늑대를 불러 품에 안았다. 원경릉은 이리 나리를 한동안 바라보고 천천히 뒤돌아 나왔다.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문호와 아이들은 새로 생긴 사촌 동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전부 사촌 동생은 여동생처럼 예쁘지 않지만 그래도 예뻐해 줄 수 있다고 했다.원경릉은 아이들이 흥미진진하게 얘기하는 것을 흘려들었다. 같이 웃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이리 나리 일에 대한 생각뿐이었다.우문호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원경릉에게 한마디 했다. “안풍 친왕비 마마는 계속 이리 저택에 사실 건가? 우리가 갈 때도 전혀 돌아갈 의사가 없으시던데.”“소요공께서 그러시는데 왕비 마마는 며칠 이리 저택에 머무실 거래.”“그래? 왕비 마마께서 이리 나리에게 정말 잘해 주시네.” 우문호가 목을 움츠리며 잠시 있다가 다시 의문스러운지, “하지만 내가 알기론 안풍 친왕 부부는 전에 현대로 돌아갔다고 했는데 왜 다시 돌아오신 거지?”“소요공 말씀으론 안풍 친왕 부부께서 아쉬워하셨다는데.”“아쉬워도 좀 더 놀고 돌아와야지, 전에 당신이 한 얘기 기억하는 게 만약 평형을 유지하며 두 시공간을 왕복하는 동안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른다고 했어. 그 말은 안풍 친왕 부부가 돌아가서 며칠도 못 있었던 거지. 지난번 두 분이 얼마나 미친 듯이 즐기셨는지 기억하지? 저분들이 정말 벗어날 생각이었으면 분명 일 년은 아쉽고 뭐고 할 틈도 없으셨을걸.”원경릉이 이런 생각이냐며 물었다. “자기 말은 저분들이 뭔가 일이 터질 걸 알고, 서둘러 돌아오셨다는 거야?”우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환타 쌍둥이를 앞으로 안았다. “아마 갈 때는 너무 기뻐서 그 일을 잊었다가 나중에 좀 냉정을 되찾고 떠오르신 걸 거야. 그래서 부랴부랴 돌아오셨을테고…. 우리 눈앞에 그렇게 큰 일이 뭐가 있겠어? 나라는 평안하고 두 분의 발목을 잡던 건 황조부, 평남왕 등 몇몇 분에 기껏해야 이리 나리 정도에 불과하잖아. 어쩌면 이리 나리가 아빠가 되는 걸 보고 싶으셨을 수도 있지. 떠들썩한 기분으로 돌
안풍 친왕비 말대로 이리 나리의 대뇌를 통해 과거 사건 전체를 복기한다는 뜻은, 이리 나리 대뇌에서 기억 저장을 담당하는 부분에 침투한다는 말이다. 비록 지금의 원경릉이라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러려면 상대가 원경릉에게 아무런 경계심도 느끼지 않고 잠이 들어야 했다. 최면은 보통 피최면자의 말을 통해 대뇌에 침투하는 것인데, 원경릉이 하려는 것은 이리 나리의 기억 영역에서 해당 기억을 찾아내는 것으로 이리 나리 본인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기억까지 다룰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은 아기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기 때 기억은 사실 대뇌의 깊숙한 곳에 잠재되어 있지만 끊임없이 들어온 정보에 덮여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된다.보통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대뇌에 침투할 수 없지만 원경릉은 가능했다. 원경릉의 뇌파는 다른 사람과 달라서 다른 사람의 대뇌에 침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고를 제어하고 심지어 기억을 이식할 수도 있었다. 원경릉이 사고의 과도한 발달을 제어하는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쉽게 가능한 일이지만. 약을 복용한 뒤로 대뇌를 상당 수준 억제해 자신의 초능력에 천천히 익숙해질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이때 원경릉이 안풍 친왕비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제가 뭘 하길 바라세요?”안풍 친왕비가 답했다. “이리율이 겪었던 일을 새로운 기억으로 이식하는 걸 시도해 봤으면 해. 너한테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넌 최면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원경릉이 고개를 흔들었다. “최면술을 통해 기억을 심는 건 다른 사람에게는 가능할지 몰라도 이리 나리에게는 안 돼요. 이리 나리의 방어 기제는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어요. 기억을 제대로 심지 못하면 오히려 정신적으로 상당한 혼란을 일으킬 거고, 과거에 겪었던 일들이 이리 나리의 지금 모습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제 생각이 기우(기나라 사람들이 하늘이 내려앉는 것에 걱정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일까요?”그리고 실질적으로 원경릉이 최면으로 기억을 이식
이리 나리는 숨소리가 점점 골라지고 온 몸에 긴장이 풀리며 수면 상태에 들어갔다. 안풍 친왕비가 살짝 불러도 반응이 없어 그녀는 한참동안 사랑이 넘치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이리 나리를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나갔다.원경릉은 밖에서 기다리다가 안으로 들어갔고 안풍 친왕비가 문 앞을 지켰다.원경릉은 창문을 다 닫고 사랑채 안의 휘장을 전부 내려 어둡게 했다. 방안은 마치 황혼을 지난 어두운 밤 같았다.원경릉은 방금 안풍 친왕비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는데, 엷은 침향이 느껴지며 마음이 아주 고요해졌다.은은한 안개가 온천지를 뒤덮자, 혼란스러운 미로에 빠진 듯 눈앞에 구불구불한 샛길이 보이고 의식을 연장하자 수많은 촉감이 생겨났다. 원경릉이 못 들어갈 곳이 없어서 앞으로 뚫고 나가며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어떤 건 이리 나리의 기억이고, 또 어떤 건 사건이 있었던 후에 알았던 정보로, 이것으로 당시 진상을 복기하기에 충분했다.36년 전, 풍도성.풍도성은 북당 건국 초기 이미 북당에 귀순했으나 계속 자치권을 인정받아 매년 조공만 바치기면 조정은 상관하지 않는 지역이었다.성주 안지여는 안 씨 집안에서 가장 뛰어난 후계자로 젊은 나이에 성주의 자리를 이어받아 이리 집안 큰 아가씨를 아내로 맞았다.이리 집안은 풍도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천문 세가인데, 천문이란 별의 형태를 보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파악하는 것으로, 천문 세가는 하늘의 뜻에 순행하는 집안을 말한다.그런 이리 집안의 가주가 누군가를 위해 하늘을 거슬러 운명을 바꾼 탓 때문에 참혹한 횡액을 당해, 큰 아가씨인 이리봉청이 가주가 되었다. 그렇게 이리봉청이 가주가 된 지 3년 만에 풍도성 성주 안지여에게 시집을 갔고, 그해 그녀의 나이는 18세였다.이리봉청은 천문 능력을 이어받아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역천개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 능력을 갖춘 자는 하늘의 뜻에 순행해야 하는데, 역천개명 할 경우 그 저주가 역천개명을 행한 사람에게 돌아오게 된다. 이리봉청의 아버지가 바로 그렇게
약도성의 건물 대부분이 무너져 백성들은 임시로 지은 오두막과 초가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폐허로 변한 도성은 눈에 보이는 곳마다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원경릉은 마음속 깊이 안타까움을 느꼈다.택란의 뜻으로 중증 환자들은 모두 저택으로 옮겨졌다. 원경릉은 계란이의 결정이 매우 옳다고 생각했다. 중증 환자들은 그녀와 몇몇 의원이 책임지고 돌보았고, 나머지 의원은 경증 치료를 맡았다.택란은 엄마 곁에 머물며 환자를 돌보는 것을 도왔는데, 기본적인 의술을 알고 있어서 소독과 붕대 감는 일을 도왔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통증이 심해 참기 어려웠고, 진통제를 먹이거나 진통 주사를 놓았다. 택란도 주사를 놓을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쉬지 않고 바쁜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본 환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들은 궁에서 자신들의 생사를 진정으로 걱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황후마저 직접 왔으니, 예전의 대립과 적대감은 유치한 웃음거리로 느껴졌다.저녁 무렵,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왔지만,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없이 서로 포옹한 뒤 다시 각자 사람들을 구하러 나섰다.백성 중 자발적으로 음식을 만들고 약을 끓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저택 내 물자는 부족했으나 주변의 도움이 끊이질 않았다. 호명은 사람들을 조직해 식량과 의복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의 약도성엔 인간의 이기심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했다.황후가 직접 약도성에 온 덕분에 서북 지역의 신하들도 직접 의원과 물자를 이끌고 약도성에 와서 돕기 시작했다.약도성은 전례 없는 관심을 받았고, 이는 약도성 백성들이 다섯 도시 중 가장 빠르게 조정을 인정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구하고 재난 이전의 상태로 빠르게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다.재난이 발생한 지 반달이 지나면서 발견된 것은 모두 희생자뿐이었다. 인원을 파악한 후 한곳에 모아 장례를 치렀다.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5만여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는 매우 끔찍했지만, 택란의 사전
북당의 황후가 의원을 이끌고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믿지 않았다. 약도성의 백성들조차 믿을 수 없었고, 감히 믿을 엄두도 없었다.우문택란이 이미 약도성에 왔지만,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에 불과했다. 다들 그저 그녀가 약도성에 놀러 왔고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이후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녀의 비범한 능력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약도성의 성주로서 약도성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초토화되었고, 재건하려면 조정이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북당의 조정이 약도성을 방치하고 자연적으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어도 어쩔 수 없었다. 약도성 백성들은 줄곧 조정을 적대시하였기 때문에, 조정이 이들을 구할 이유가 없었다.그런데 황후가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약도성은 조정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지진 발생 열흘째 되던 날, 원경릉 황후가 이끄는 의원들이 약도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낮없이 말을 갈아타며 전력으로 달려왔다. 약도성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하며 황후께서 약도성에 오신다고 얘기를 전했다.사람들의 생각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지진 이전까지만 해도 조정을 적대시하고 북당을 적국으로 여겼던 약도성 백성들이, 이제는 원경릉을 환영하며 열광적으로 맞이했다. 이는 택란이 지진을 미리 알아차린 것과 구조 활동 덕분이었다.원경릉은 백성들의 뜨거운 환영을 예상하지 못했다. 말을 타고 앞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고, 그녀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어머니!”군중 속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경릉은 단번에 딸을 찾아내고 말에서 내려 달려갔다. 택란은 엄마 품에 안기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어머니,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너무 많아요!"택란이 흐느끼며 말했다.원경릉은 딸이 이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원경릉은 딸을 품에 꼭 안
택란은 어릴 적부터 화염을 다루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녀는 내면의 감정을 철저히 억눌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염을 제어하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스승님을 따른 후, 스승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약점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정의 틈새가 생기면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항상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일을 담담히 대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진심 어린 감정을 흔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녀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꼬마 봉황이 날개를 펼쳐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었다.그들은 수년간 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성장해 왔고,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잠시 후, 택란은 다시 구조 현장으로 나갔고, 여전히 평온하고 흔들림 없는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섰다.위왕과 안왕은 어린 조카의 침착함에 깜짝 놀랐다.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아이의 천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그들은 택란이 애초에 아이로서의 천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태어난 후, 조금이라도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빠르게 세상을 이해하며, 지혜롭고 노련한 어른처럼 모든 것을 맞서야 했다.사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한두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기대나 요구가 없었으며, 능력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그녀의 모든 행동을 걱정하고 감시하지 않았다.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약도성의 일이 안정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번 약도성 방문은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놀이가 아닌 실습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의지와 감정을 단련할 수 있는 장소였고, 실제로 그녀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구조 작업은 계속되었고, 지진이 발
한 마을 주민이 눈물을 닦으며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원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오. 조정은 우리를 모조리 죽이길 바라오. 우리가 죽어야 조정은, 이 약도성을 완전히 삼킬 수 있소.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소.”택란은 화가 나서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내가 여기에 왔잖냐! 빨리 계속 파시게!”주민이 그녀를 힐끔 보며 물었다.“웬 꼬마가, 넌 누구냐?”택란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어둠 속이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약도성의 성주, 우문택란이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산사태가 난 지역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작은 몸집이 시선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작아 보였다.황실의 공주라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공주가 이런 곳에 직접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저택 안에서 잘 보호받고 있어야 할 존재다.그녀는 알 수 없는 힘을 사용해 접근한 곳의 흙을 한 겹씩 옮겨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구조 요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가 급히 구조 작업에 참여했다.약도성의 지진은 강북부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낡은 집도 무너졌지만,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 약도성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위왕과 안왕은 신속히 구조 병사를 파견했다. 그들은 택란이 약도성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 여태껏 택란이 스승과 함께 떠났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네 오빠들은 바로 병사를 데리고 약도성으로 향했다. 지진 발생 12 시진 후 약도성에는 8천 명 이상의 병사가 합류했다.약도성의 백성은 조정이 지원군을 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정이 약도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과거에도 가뭄, 메뚜기 떼, 산사태 등의 재난이 일어났지만, 북막조정은 몇 포대의 쌀만 보내며 형식적인 구조를 했을 뿐이다.약도성
지진이 발생하기 전, 호명과 주 아가씨는 약도성 중심부에서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새벽녘은 사람들이 가장 피곤할 시간이다.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백성들은 분노했다. 그중 한 집안은 도축업을 하는 홀아비가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새벽 무렵에야 돼지를 잡고 고기를 나눠주고 돌아와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데다 아이까지 깨우니,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옆집 사람은 칼을 들고 나가 저들을 쫓아내면 다시 잘 수 있다고 부추겼다.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상황이라 아들을 방으로 데려다 놓고, 즉시 칼을 들고 나가 주 아가씨와 맞섰다.그가 칼을 휘두르며 집안 식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그 순간, 지진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기 집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먼지가 자욱했고, 곁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옆집 역시 무너졌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집 처마 아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깔려 있었다.“아들! 아들아!”홀아비는 그제야 안으로 데려다 놓았던 아들을 떠올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집은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 겨우 세 살밖에 안 되는 아들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했다.그는 미친 듯이 벽돌과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주 아가씨와 호명도 서둘러 도왔다.지진은 단 몇 초 만에 일어났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고, 그 결과 무너진 집에 깔린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약도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사방에서 울부짖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평소 조정과 맞서던 이들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해 보였다. 그들의 처절한 울음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다.홀아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들 함께 벽돌을 치우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도구가 없어서 맨손으로 작업해야 했다. 주 아가씨의 손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흙벽을 밀어내고 벽돌을 옮겼다.반 시진 후, 주 아가씨가 마침내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는 다리를 크게 다쳐 엉엉 울고 있었다. 홀아
“그럼... 호명, 가십시다!”주 아가씨는 왠지 모르게 택란의 말을 믿었다.호명도 주 아가씨의 말을 듣고 동의했다. 그의 생각은 단순했다. 지진이 생기지 않으면 백성들을 귀찮게 한 정도로 끝날 테지만, 정말 지진이 발생한다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게다가 약도성의 백성들은 조정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더 미움을 사도 중요하지 않다.일행은 즉시 돌아가 병사들을 소집해 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백성에게 넓은 곳으로 대피하라고 알렸다.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난 백성은 역시나 원치 않았다.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병사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성주가 단호하게 명령한 일이었기에, 백성들은 마지못해 끌려 나갔다.그러나 문제는 강제로 밖으로 끌어낸 사람들을 계속 감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떠난 후 많은 백성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게다가 일부 폭도들은 이를 계기로 병사들과 정면으로 맞서며 심각한 충돌을 일으켰다.부분 병사가 백성들이 소란을 피우는 마을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마을은 거의 조정을 적대시하는 곳이었다. 너무 외진 곳이고 여인도 적은 곳이라, 이곳 남자들은 혼사도 치르지 못하고 가난하게 지내고 있었다. 하루 세 끼를 유지하기조차 힘들었고, 금나라의 선동이 더해져 이 지역의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다. 이 몇몇 마을에서 15세 이하의 아이들은 열 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병사들이 징과 북을 울리며 백성을 깨우자, 폭도들이 화를 내며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몸싸움이 벌어졌고, 20여 명의 병사들이 이들에게 압도당해 심하게 얻어맞았다.결국 병사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약도성에서 대피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약 만 명 정도였다. 대부분 병사가 떠난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조정이 백성을 괴롭힌다고 욕하며 약도성에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이에 주 아가씨가 분노를 참지 못해 말했다.“성주께 말씀드려서 집을 전부 불태워버리자고 해야겠습니다! 정말 너무합니다.”호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녁 무렵, 그들 일행은 출발했다.약도성의 밤은 전혀 활기가 없었다. 해가 지고 나면 거리에서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수년간 치안이 매우 나빴다. 비록 저녁에 병사들이 순찰하고 있지만, 백성들은 이미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덕분에 이번 외출은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약도성이 가난하다 보니, 부유한 이들의 저택만 튼튼할 뿐, 대부분의 집은 돌집이나 흙집, 나무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초가 거의 다져지지 않은 상태여서 지진이 발생한다면, 대부분의 건물이 버틸 수 없을 것이다.택란은 이 점이 걱정되었지만, 아직 지진이라 단언할 수 없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길한 예감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그녀는 꼬마 봉황에게 물어보았고, 꼬마 봉황이 하늘로 날아올라 몇 바퀴를 돌며 주변을 살폈다.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것을 본 꼬마 봉황은 택란에게 알렸다. 그녀의 불안감이 점점 더 커졌다.택란은 호명과 주 아가씨에게 자신의 걱정을 털어놓으며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호명과 주 아가씨는 믿지 않았다. 약도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만 지진이 발생하였다.주 아가씨가 말했다.“오늘 밤하늘을 보니 지진운 같은 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걱정하신 것 같습니다.”“지진운은 믿을 수 없소. 강가로 한번 가보시게.”이곳에는 바다가 없고, 산을 따라 흐르는 큰 강만 있었다.다들 풍등을 들고 강가로 향했다.강물의 흐름은 빠르지 않았고, 눈에 띄게 가뭄의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물 높이는 겨울이나 봄에 비해 많이 낮아졌고, 어떤 곳은 강바닥이 드러나 있었다.택란은 풍등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강물은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아마도 수심이 얕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이곳에 샘물이 있소?”택란이 주 아가씨에게 물었다.“있습니다. 여기서 2리 정도 떨어진 곳에 큰 샘물이 하나 있는데, 근처 주민들이 그곳에서 물을 떠다 마십니다.”“좋소. 가보겠소!”택란이 말했다.일행은 다시 큰 샘물로 향했다. 주 아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부지깽이를 찾다가 깜짝 놀라 외쳤다.“뱀이야! 부엌에 뱀이 들어왔다! 어서 뱀을 잡아! 성주께서 놀라시면 안 된다!”몇몇이 부엌으로 몰려가 한바탕 소동 끝에 뱀 세 마리를 잡아냈다. 비록 정원에 뱀이 나타나지만, 뱀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어찌 집 안으로 들어온 걸까?택란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이오?”공연이 서둘러 대답했다.“성주님,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여기 뱀이 있습니다.”“뱀이 집 안으로 들어왔소?”택란은 뱀을 힐긋 보았다. 그 뱀은 독성이 없는 풀뱀이다.“어제 요리사가 쥐가 많이 돌아다닌다고 했는데, 오늘은 뱀이 여기저기 기어다니네. 정말 이상한 일이오.”“별일 아닙니다!”공연은 손을 씻고 와서 말을 이었습니다.“제가 성주님을 방으로 모시겠습니다.”택란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아직 정오였고, 태양이 세게 내리쬐고 있었습니다.“약도성에 예전에 지진이 난 적이 있었느냐?”택란이 고개를 돌려 요리사에게 물었다.요리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지진이요? 땅이 움직이는 것을 말씀하십니까?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어릴 때 할아버지가 큰 지진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산이 흔들려서 집도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하셨습니다.”“성주님 겁주지 말고 할 일 하시오.”공연은 택란이 놀랐을까 봐 걱정하며 요리사에게 떠나라 했다.택란은 방으로 돌아간 뒤, 꼬마 봉황을 불렀다.뱀, 곤충, 쥐, 그리고 새는 지진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특히 꼬마 봉황은 영적인 새이기에 더더욱 그렇다.꼬마 봉황이 조금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꼬마 봉황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뭔가 큰일이 닥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설마 지진이 나는 건 아니겠지?”택란은 바닥에 엎드려 귀를 대고 지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그녀의 청력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기에, 지진이 오고 있다면 땅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하지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건설을 추진하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첫걸음을 내디뎌야 한다는 생각으로, 택란은 이에 관해 세게 명을 내렸다.성내 백성들은 택란이 이 도시의 성주이자 진국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강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택란이 낭산의 도적들을 토벌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여덟 살짜리 아이가 낭산 도적들을 전멸시켰다는 것을 누가 믿을까?이곳의 백성들은 평생 황실 사람을 본 적 없었다. 지금 이렇게 직접 마주하자, 감정이 폭발하여 약도성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황실에 대한 깊은 원망을 드러냈다.약도성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백성은 백여 명에 불과했고, 셈조차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이렇게 폐쇄적인 환경에서 원망은 쉽게 극대화되었다.특히 금나라 사람들이 부추기자,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다.처음엔 택란도 외출을 하곤 했지만, 적대적인 감정이 격렬해지자 외출할 때마다 돌멩이가 날아왔다. 다행히 호명이 그녀의 안전을 염려해 경호를 강화하면서 크게 다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양두는 백성들과 다투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자네들이 원망해야 할 대상은 북막의 황실과 진가요!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북당을 침략하려다 패배하는 바람에 약도성을 내놓은 것이오. 다들 그때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소? 전쟁을 지지해 놓고 이제 와서 북당을 원망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소!”양두는 기세가 등등했고 욕도 도리가 있어, 백성들을 순간 잠잠하게 했다. 하지만 이내 돌멩이가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고, 양두는 머리를 감싸며 도망쳐야 했다.이들은 이성적으로 도리를 따질 사람이 아니었다.호명은 상황을 이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해, 택란에게 경성으로 돌아가길 권유했다. 하지만 택란은 단호히 거절했다. 첫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십 년이 지나도 변화는 없을 것이고, 약도성은 영원히 이 상태로 남을 것이다.호명은 사고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경호를 더욱 강화했다.그는 주 아가씨에게도 특별히 경계를 강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