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상황은 원경릉의 할머니를 불러 얘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원경릉에게 대흥국에서 오신 노부인은 박식하고 말투와 태도가 예의 발랐기에 그녀와 얘기하고 있으면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것 같이 편했다. 원경릉이 이 말을 듣고, 늘 긴장하고 있어서 내천(川) 자로 깊은 주름이 패인 태상황의 얼굴을 보고 또 보며, “봄바람이 마음에 불어온다고요?”태상황이 한줄기 미소를 보였다. “맞아!”원경릉은 태상황과 우문호 둘이 갑자기 고상해진 게 영 낯설었다. 요즘 우문호는 집에서 말투도 부드럽고 따듯한 게 아주 우아 그 자체였다.원경릉이 말했다. “노인이 친구를 사귀는 것도 좋은 점이 있죠.”할머니도 자신의 친구가 있고 자신의 사교권이 있어야 했다.하지만 이어진 태상황의 물음을 듣고 원경릉의 몰골이 순식간에 헬숙해졌다. “너 노부인의 아명이 뭔지 알아?”“아...... 명이요?” 원경릉은 하마터면 너무 놀라 사레가 들릴 뻔했다.“응, 이름말이야. 과인이 계속 노부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게 호칭 자체가 너무 나이 들어 보이잖아.”“할머니께서는 이미 나이가 들으셨어요. 적어도 태상황 폐하보다는 많으시죠!” 원경릉은 ‘천벌을 받으시려고. 태상황 폐하께서 대체 왜 이러시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태상황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 말했다. “어디가 늙었다는 거야? 그렇게 안 늙어 보여. 내가 보기엔 그냥 여동생 같아.”원경릉은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었다.“노부인 아명이 뭐야?” 태상황이 꿋꿋하게 물었다.원경릉은 장난기가 발동해서 일부러 영어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었다. “할머니께서는 주디라고 합니다!”왜인지 모르지만 태상황에게는 할머니의 본명을 가르쳐주고 싶지 않았다.“주딩? 주딩이? 왜 그런 이름으로 지었어?” 태상황이 미간을 찡그렸으나 곧 고개를 갸웃거리고 생각하더니 과찬의 평가를 내렸다. “이 얼마나 겸손한 이름이야. 입은 화를 부르는 뿌리임을 잊지 말라고 강렬하게 표현했군. 그런 뜻 맞지?”원경릉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이 말에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할
태상황이 원경릉에게 말했다. “어허, 너 노부인이랑 상당히 닮았어. 특히 그 코, 콧날이 높고 콧방울이 동그래 가지고 윤기가 도는 게 아주 똑같다고!”원경릉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아주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는 별장을 나올 때 마차에서 할머니와 수다를 떨며 일부러 물어봤었다. “맞아요, 황조부랑 말이 잘 통하시는 거 같던데, 할머니...... 황조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친구로 생각하시는 거죠?”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원경릉의 손등을 쳤다. “우리 손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지?”“그냥요!” 원경릉이 뜨끔해져 바로 답했다. 할머니가 지혜로운 눈빛으로 원경릉을 바라보며 더욱 깊어진 미소를 띠었다. “왜? 너 원래 이 할미가 황혼연애 하는 걸 장려하지 않았어? 그냥 입에 발린 소리였나?”원경릉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입에 발린 소리라뇨? 할머니꼐서 누군가를 만나 연애하시는 걸 제가 얼마나 응원하고 있는데요.”“하지만 태상황은 안된다는 말이지?” 할머니가 물었다.그러자 원경릉이 당황하며 고심히 생각했다. ‘왜 태상황은 안되지?’ 원경릉은 사실 자신의 이런 복잡한 심경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 단지 마음이 어지럽고 복잡한 건 사실이었다.할머니가 원경릉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냥 장난친 것이다. 나와 태상황 폐하는 그저 말이 통하는 ㅊ친구 사이다. 태상황 폐하께서 하는 말이 판에 박힌 딱딱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아는 게 많고 일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시거든. 태상황 폐하는 어의나 의사들처럼 경직된 사람이 아니야, 가끔 농담을 해서 사람을 즐겁게 할 줄 알지. 친구로 분명 괜찮은 분이란다.”원경릉은 의아했다. “황조부가 농담을 할 줄 안다고요? 무슨 말로 사람을 웃겨요?”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혈압을 내려서 몸조리할 수 있는 처방을 드렸는데 그 처방이 좀 쓰거든. 태상황 폐하께서 내가 간 뒤에 농담으로 사람을 시켜 약을 전부 다바오한테 줬다더라, 재밌지 않아?”원경릉은
관계수리 시설 확충은 신임 재상의 도움 아래 마침내 조정을 통과했다.회왕은 호부상서 직으로 승진해 북당의 재신이 되었으나 우문호는 최근 계속 회왕을 괴롭혔다. 비록 관계 시설 확충 안건은 통과됐지만 돈을 얼마나 지출하는지는 공부와 합의해서 예산을 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우문호는 조금이라도 예산을 더 확보해 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싶었다.그리고 치수라고 하면 적임자가 하나 있는데 바로 왕강이였다!왕강은 천문지리에 정통하고, 수리 시설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고금의 지식에도 밝은 인재로 명원제도 여러 차례 조정에 합류할 것을 권했다. 하도 고사하는 바람에 처음엔 할 생각이 없었지만 이번에 우문호가 부르니 바로 짐을 챙겨서 왔다.우문호는 왕강을 위해 공부 시랑 직을 준비하고 왕강과 공부 상서가 전면적으로 나서 회강의 수리 시설 보수를 총괄하도록 했다.왕강을 공부 시랑으로 발탁하는데 반대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6부 중에서 공부가 가장 괄시받고 있었기 때문인데, 공부의 일은 대부분 무식쟁이에 흙투성이 인부들과 진행하는 것으로 선비들은 줄곧 이들을 무시했었다.하지만 왕강은 아주 기꺼운 마음이었는데, 공부야 말로 진정으로 백성을 위해 실질적인 일을 하는 관공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점도 우문호가 왕강을 부른 이유 중 하나로, 우문호의 부름에 왕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왔다.왕강은 전에 원경릉과 태양의 흑점에 관해 토론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회강 지부로 가기 전에 원경릉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했다.태양에는 여전히 흑점이 있었는데 이 흑점은 북당에 어떤 영향이 주는지에 관해서였다.사실 왕강은 흑점이 지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묻고 싶었다.원경릉은 전에 왕강과 태양의 흑점에 대해 논의했던 기억을 되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강은 이미 오랜 시간 관찰을 지속해 아마도 북당 전체를 통틀어 처음으로 잦은 흑점들을 발견한 사람일 것이다. 원경릉은 왕강의 질문에 이렇다 할 답안을 바로 제시할 수 없었다. 태양 흑점 활동이 빈번한 것이
우문호가 말했다. “사시는데 불편한 부분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옮겨도 돼요.”황귀비는 이게 우문호의 효심인 것을 잘 알았기에 뿌듯한 표정으로 우문호를 바라봤다. “그럴 필요 없어. 어마마마는 여기가 좋다.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이나 잘 보고 오려무나!”“알겠습니다!” 우문호가 대답했다.우문호가 안에서 황귀비와 잠시 얘기를 나누고 어서방으로 가면서 원경릉에게 장문전에 남아서 황귀비와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반면 황귀비의 안정되고 평온한 나날에 비해 명원제는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부자 지간에 전에 황귀비 일로 의견이 맞지 않았던 적이 있긴 했지만 결국 싸움은 일어나지 않아서 불쾌했던 기분도 다 사라졌다.명원제는 태자에게 일찍 갔다 와서 태자비의 출산을 놓치지 말라고 했다.“알겠습니다. 아바마마께서도 몸 건강하세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우문호가 걱정하자 명원제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짐이 보위에 오른 뒤로 네 황조부가 늘 등 뒤에서 지시를 해주셨는데, 지금 태상황 폐하께서 궁에 안 계시는 것에 짐이 아직 적응이 안되는구나. 짐이 전에 사람을 보내 회강 일에 대한 지시를 구할 때도, 아예 듣지도 않으시고 앞으로 다시는 묻지 말라고 하시더군.”“그건 황조부께서 아바마마를 완전히 신임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문호가 위로했다.“신임인지 실망인지 짐은 아직 구분이 안된다. 허나 짐은 태상황 폐하를 실망시켜 드릴 수 없지. 넌 출장 가서 이 일을 합당하게 잘 해결하고 오너라, 북당의 농경이 계속 크게 발전하지 못했던 것은 매년 천재지변이 끝이 없었기 때문인데 물을 다스릴 수 있다면 농경 발전을 촉진할 수 있으니 이는 향후 몇 년간 지극히 중요한 사안이 될 거야.” 명원제가 말했다.우문호가 답했다. “소신 알겠습니다. 반드시 잘 해내겠습니다.”명원제가 우문호를 보고 안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네가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가거라, 어서 가봐!”우문호가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소신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어서방에서 나와 목여
희열은 일찌감치 철이 들어서 괜찮았지만, 요부인은 희성이가 걱정이었다.희성이 복도에 앉아 요부인 다리를 베고 눕자 갈팡질팡한 불안한 마음이 느껴졌다. 희성이가 요부인의 손목을 잡고 간절하게 물어봤다. “엄마는 훼천 삼촌한테 시집가서 아기 낳으면, 그때는 희성이 필요없겠죠?”요 부인은 가슴이 저릿해져 희성이를 끌어 안았다. “이 바보야, 엄마한테 네가 어떻게 필요가 없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들은 엄마의 사랑이고 보물이야.”희성이가 소심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그럼 훼천 삼촌은 우리한테 잘해줄까요?”요 부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만약 너희한테 제대로 못해준다면 엄마는 시집 안 가!”“엄마, 시집 안 가면 안돼요. 황조부께서 성지를 내리셨잖아요.” 희성이가 볼 멘 소리로 말하자 요 부인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희성이가 싫으면 엄마가 네 황조부에게 가서 직접 얘기할거야. 이 혼사는 굳이 안 해도 돼.”희성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전 엄마가 혼인했으면 좋겠어요. 언니 말이 맞아요. 우리가 나중에 다 시집가면 엄마 혼자 외롭잖아요. 그럴 때 훼천 삼촌이 곁에 있으면 우리도 안심이에요.”요 부인이 희성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난 외롭지 않아. 정화군주를 도와서 애들을 돌보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너희들이 원하지 않으면 엄마도 억지로 혼일 할 필요 없어.”희성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였다. “희성이는 원해요. 훼천 삼촌이 엄마한테 잘 하잖아요. 다섯째 숙모가 그러는데 이 세상에 훼천 삼촌보다 엄마한테 더 잘하는 사람 없데요.”담장 저편에 훼천이 담벼락에 귀를 대고 듣다가 세 모녀가 주고받는 얘기를 듣고 안심하더니 살금살금 자리를 떴다.이렇게 혼사가 결정되었다.전에 요 부인이 원경릉을 위해 신생아 옷을 준비해 준 것처럼, 이번에는 원경릉이 요 부인의 혼수를 준비할 차례였기에 미색에게 혼사를 얘기하자, 혼수는 자고로 돈이 제일 중요하다며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문제
그러자 우문령의 얼굴이 발그레해지더니 순식간에 귀까지 다 빨개졌다. “뭘.... 그렇게 대 놓고 묻고 그래요?”말이 필요 있나. 우문령의 반응을 보니 이미 합방을 끝낸 분위기였다. 미색이 우문령 한 번 보고 원경릉 한 번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나리 다 컸네, 남자가 다 됐어!”원경릉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게, 우리 사부님 다 컸어요!”사람들의 장난에 우문령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했다. “그만 좀 하세요! 지금은 훼천의 혼례식을 논하는 중이잖아요. 여자 쪽은 인원이 어느 정도예요? 예물은 어느 정도 할 거죠? 이런 것도 다 정해야 해요.”“우리가 어떻게 해? 그런 건 요 부인께 물어보면 돼. ” 미색이 우문령에게 말로는 이리 나리가 얼른 합방을 해서 아이를 낳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막상 이리 나리가 정말 합방했다는 말을 들으니 https://help.naver.com/support/alias/search/contents/contents01.naver허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어쩔 수 없었다.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같은 사람도 결은 보통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우문령은 낙담했다. “요 부인께 가서 물어보면 이 일에 대해서는 전혀 상대도 안 하실 거예요. 그래서 하는 수없이 올케들을 찾아온 거예요.” “요 부인은 아마 이런 허례허식은 다 안 하려고 들 걸, 요 부인 친정은 가봤어?” 미색이 물었다.“요 부인은 친정에 대해서 아예 묻지도 못하게 해요. 합의 이혼을 한 뒤로 친정에 돌아가지 않아서 이 일은 친정이 나서면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우문령이 말했다.한편, 원경릉은 요 부인이 이해가 됐다. 일단 이번 혼사에 요 부인의 친정이 발을 담그는 날에는 언젠가 지엽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가집은 따지는 법도가 많고, 훼천이 비록 후작으로 봉해졌다고는 해도 늑대골 출신에 늑대파에서 일해왔었다. 늑대파 사람들은 세세한 걸 따지지 않는 사람들로 법도에 묶이지 않아 혼례를 치를 때 법도를 따지는 대가집과 오히려 마찰이 생길
경성은 다시 평온한 일상을 회복했다.비록 초왕부는 북적북적했으나 우문호와 서일이 집에 없으니 원경릉은 영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날씨는 제법 쌀쌀해졌기에 부쩍 큰 아이들은 지식에 목말라했다. 원경릉은 탕양을 시켜 아이들에게 보라고 책을 한 무더기 안겨줬다.탕양은 원경릉에게 아이들을 국자감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태학 박사를 불러 수업을 듣게 하든지 해야하지 않겠나며 의견을 제시했다.원경릉도 그렇게 느꼈기에 탕양에게 냉정언을 찾아가 상의해보라고 했다.냉정언이 얘기를 듣고 껄껄 웃었다. “다른 사람 찾을 게 뭐가 있나? 내가 가면 될 것을!”문무를 겸비한 냉정언이 떡들의 선생님을 담당한다면 이보다 더 안성맞춤은 없었다.하지만 원경릉은 냉정언이 지금 상당히 바쁜 것을 알고 있기에 혹시라도 정무를 처리하는 데 지장을 줄까봐 걱정했으나 냉정언은 밤에 한 시간 왔다가는 것은 상관없다고 했다.그 말에 원경릉은 기분이 좋아져 떡들에게 얘기하자 떡들도 몹시 기뻐했다.그때 명원제가 이 얘기를 듣고 원경릉에게 사람을 보내 십황자를 초왕부로 보낼 테니 떡들과 함께 공부를 시키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사실 십황자가 공부를 하고 싶으면 궁의 서당에서도 충분하지만 명원제가 굳이 보내려는 이유는 그날 만두와 십황자가 얘기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만두가 십황자를 잘 다룰 수 있으니 십황자가 만두를 따르게 하면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하지만 이건 말이 상의지 명령이나 다름없으므로 원경릉은 알겠다고 했다. “호비 마마께서 동의하시면 며느리는 이견 없습니다.”그리고 원경릉은 호비가 반대해 주길 바랬다. 십황자가 초왕부로 오면 앞으로 십황자를 관리하는 책임이 원경릉에게 떨어질 것이고 아바마마께서 십황자를 심하게 편애하므로, 안된다고 말하기도 혼을 내기도 어려울 게 뻔했다.그리고 그들이 같이 공부해서 떡들이 십황자보다 출중하게 되면 아바마마는 아마도 원경릉이 온 마음 다해 돌보고 지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임이 틀림 없었다.하지만 호비는 찬성하다 못해 원경릉을 불
“그래, 잘못을 알았으면 됐어!” 원경릉이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그럼 앞으로 초왕부에서 탕 대인과 냉 대인께 도리를 잘 배우고 익히자. 앞으로는 쉽게 잘못을 범하지 않으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도 여전히 예전처럼 널 귀여워 하실 거야.”십황자는 목이 메였다. “저 진짜 나쁜 아이가 되지 않을 거예요.”원경릉이 십황자의 눈물을 닦아 주며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자기 말을 기억했다가 앞으로 나쁜 짓하지 말고 다시는 제멋대로 굴지 말자.”“알았어요!” 십황자가 엉엉 울며 답했다.원경릉이 십황자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울지 마. 초왕부에 도착했는데도 또 울면 만두랑 애들이 놀릴 거야.”십황자는 얼른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초왕부에 도착해 십황자는 만두와 애들을 보고 좋아서 같이 노느라, 방금 마차에서 울었던 건 완전히 잊었다. 건망증은 아이들 고유의 특성으로 슬픔도 다를 게 없었다.한편, 손왕은 늦은 시간에 몰래 초왕부에 들렀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탕양이 보이자, “우리 아내 여기 없나?”라고 하며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탕양이 의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손 왕비 마마는 오늘 안 오셨는데요. 왕야, 손 왕비 마마를 찾으십니까?”손왕이 그제야 안도하더니 허리를 꽂꽂이 세웠다. “태자비는? 태자비를 찾아왔다네.”“태자비 마마는 계십니다. 들어가서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가 바로 말씀 올리겠습니다.”원경릉이 막 십황자를 자리 잡아 준 뒤로, 탕양에게 손왕이 왔다는 말을 듣고 마음 속에 미묘한 의심이 들었다. “손왕 전하께서? 무슨 일로 오셨대?”“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들어오시더니 제일 먼저 손 왕비 마마께서 계신지부터 물으셨어요.” 탕양이 답했다.“그럼 아마 관아에서 바로 오셔서 아직 집에도 가지 않으신 것 같은데. 둘째 형님이 여기 계시다고 생각하시는 걸 보니… 됐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내가 직접 가서 볼게.”손왕은 본관에서 원경릉을 기다리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탕양에게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냉정언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 의원을 부르지 않은 것이냐?" 역 일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돈이 없다고 하셔서 해열에 좋은 약초를 조금 달여주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의원을 부르고 진료하고 약을 짓는 데에는 모두 돈이 필요했지만, 역에서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예산이 따로 없었다. "오계부의 부승이 상경하여 직무를 보고하러 왔는데, 돈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냐?" 냉정언이 놀라서 물었다. "나리께서 돈이 든 보따리를 도둑맞았다고 하셨습니다." "혼자 온 것이냐?" 냉정언이 물었다. "예. 관속이나 아전도 없이 혼자입니다." 경성과 꽤 멀리 떨어진 오계부의 부승이 그 먼 길을 수행 인원도 없이 홀로 와, 직무를 보고하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원경릉이 말했다. "내가 확인하겠소." "부인께서 의원이십니까?" "그렇다. 길을 안내하거라." 원경릉이 답했다. 역 일꾼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북당에서는 여인이 의술을 익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황후가 의학원을 세운 이후, 해마다 여인들이 입학하여 의술을 배우고 있었다. 우문호가 미색을 돌아보자, 미색이 바로 입을 열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원경릉은 약상자를 챙겨 들고, 역 일꾼의 안내를 받아 한 객실로 향했는데, 문이 세게 잠겨져 있었다. 일꾼이 문을 두드렸다. "제 대인, 제 대인. 의원께서 오셨습니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하지만 방은 일꾼의 부름에도 여전히 잠잠했다. 이내 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한참 기침을 하다, 쇳소리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마." 말이 끝나자, 침대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문이 열렸고, 솜으로 만든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린 채, 핏발이 선 눈만 드러낸 관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문턱을 잡고 서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른 뒤
이번 순행에 서일이 동참하면서 사식이도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러나 고된 여정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었다. 다행히 원가에서 사식이가 서일과 함께 순행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원가는 서일 부부가 3년이든 5년이든 돌아오지 않더라도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약속해주었다. 그 역시 아이들과 떠들썩하게 지내고 싶어 했던 터라 기뻤다.탕양도 순행에 참여했으나, 그의 부인은 맡은 직책이 있어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미색 또한 당연히 회왕을 따라갈 예정이었으나, 오랜만의 외출인 만큼 아이를 데리고 간다면 재미가 없을 테니,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녀의 시어머니인 태비도 흔쾌히 아이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이제 아이도 다 컸으니 힘들게 돌볼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렇게 모두가 신나게 순행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원경릉은 순행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숙왕부의 노인들이 걱정되었다. 비록 삼대 거두는 여행을 떠난 상황이긴 하지만, 숙왕부에는 아직 흑영 어르신들이 계셨다. 그리고 안정을 찾은 추 할머니마저 지속해서 약을 복용해야만 했다. 온갖 걱정에 흽싸인 원경릉 때문에 오히려 원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성가시다고 느꼈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그냥 편히 놀러 가면 되지, 뭘 그렇게 걱정하냐? 내가 있지 않느냐?"그 말에 원경릉은 할머니를 껴안으며 웃었다."맞아요. 제가 몸이 열 개라도 할머니는 못 이길 테니까요!"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원경릉이 비록 황후라고 해도, 숙방부에서의 위세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는 바로 주사기를 꺼낼 때 뿐이지만, 원 할머니는 달랐다. 그녀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빛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을 제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그녀의 성격이 점점 난폭해져서, 틈만 나면 사람을 끌고 가서 주사를 놓았다. 원 할머니가 손수 만든 약이 한가득 담긴, 원경릉의 약상자에는 없는 귀한 약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약들은 수토불복, 고
조사가 끝난 후, 목을 쳐야 할 자는 목을 치고, 옥에 보내야 할 자는 옥에 보냈다. 그리고 오씨가 챙긴 돈은 전부 피해자 가족들에게 배상되었다.우문호는 신하들 앞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그는 탐관오리를 금지하고 청렴을 장려하는 법을 내렸으며, 부정부패 전담 조사 관아를 설립해 전국을 조사하라 명했다. 부정부패를 근절해야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동시에 그는 신하들의 봉급 인상을 제안했다. "예전엔 나라가 가난해 관리들의 봉급이 적었지만, 이제는 나라도 번영하고 산업이 활성화되었으니 함께 잘 살아야 할 때다." 봉급을 높이면 부정부패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조회가 끝난 후 우문호는 수보와 친왕들을 불러 오래 전부터 품어온 생각을 털어놓았다."과인은 순행하고자 하오!"나라가 태평하지만 황제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왕과 태자 시절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잘 알았지만, 지금은 점점 백성과 멀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직접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보고 싶었고, 공무를 핑계로 원 선생과 북당 전역을 둘러보고 싶었다.냉정언이 적극 찬성하며 말했다."상소문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은폐된 사실, 억울한 사건, 고통받는 백성들을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옳은 말이네." 우문호는 최근 냉정언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그러나 냉정언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하지만 아직 각지에 위험한 도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안전을 위해 소신이 대신 가는 것이..."그러자 우문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수보의 말도 일리 있지만, 참 뻔뻔하구먼!" 그러고는 어명이 적힌 서찰을 건네며 덧붙였다."함께 순행할 명단이니 반포하시게!"냉정언은 자기가 제외될 줄 알았으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소신도 갈 수 있습니까?""가시게. 국정에 큰일이 없으니 내각에서 처리할 수 있네. 새로 양성한 인재들의 능력을 시험해볼 기회이기도 하고.""상산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