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육현경은 끝까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없었던 일처럼 지나갈 것이다.이 일로 그는 소이연을 난처하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기다려줘요."소이연의 목소리에는 선명한 울먹임이 남아있었다."그래."천우진은 그녀의 곁에서 기다렸다.그녀의 모습을 보며 천우진은 가슴이 아파왔다. 지금 당장 육현경을 한 대 치고 싶었다.그러나 그는 이 모든 충동을 참았다.이게 소이연에게 최선의 시나리오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어떠한 행동이나 말도 그녀를 위로해 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이상한 선택을 하지 않게 같이 있어 주는 것 뿐이었다.비록 그녀가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음에도 말이다.핏줄로서 자신의 가족의 아픔에 천우진도 가슴이 아팠다.게다가 소이연이 가장 힘들 때 천우진을 찾았으니 그는 소이연의 모든 행동에 관용을 베풀 수 있었다.한참 후에 소이연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 천우진을 바라보았다.눈과 코는 모두 빨갰다.소이연이 이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가요."소이연은 두 글자만 뱉었다.정말 모든 미련을 버린 것처럼.천우진은 소이연이 모든 미련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찌 되었던 이 비극을 끝낸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천우진이 보기에 심문헌이 소이연과 더 잘 어울렸다.천우진은 몸을 일으켜 소이연을 안아 들고 부드럽게 휠체어에 놓아주었다.그들이 떠날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천우진의 전용기는 호텔 옆의 공지에 세워뒀다.천우진이 그녀를 안고 비행기에 오르며 말을 뱉었다."임아영은 이미 대외에 이틀 뒤에 육현경과의 결혼한다고 소식을 뿌렸어.""응."그녀의 대답에서는 아무런 기분도 느낄 수 없었다."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도 없어요."천우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소이연도 아무런 말 없이 밖의 야경만 바라보았다.미련 때문이 아니다.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심문헌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소이연을 바라보았다.그는 꿈속에서도 그녀를 갖고 싶었다.그러나 정말 그날이 닥쳐오자 어안이 벙벙해졌다.소이연은 밤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존재인 것만 같았다.그런 별 같은 존재가 그에게 시작해보자 않겠냐고 물어온 것이다.환청인가?심문헌은 자기도 모르게 천우진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는 자신과 소이연 대신에 이 장면을 본 증인이었다.천우진의 밝지만은 않은 표정을 보고 심문헌은 이건 환청일거라 생각했다.천우진은 항상 둘을 응원했기에 소이연의 허락에 기뻐해야 할 것이다.심문헌도 잘 알았다. 천우진이 그들을 응원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육현경이 너무나 소이연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천우진에게는 육현경처럼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용서받을 수 없었다.천우진은 그런 심문헌의 눈빛을 읽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천우진도 사실 놀랐다.그러나 모든 건 이해가 가능했다.소이연은 진즉에 육현경을 포기했어야 했다.천우진은 말없이 몸을 돌려 떠나갔다.심문헌도 그가 불러내서 온 것이다.소이연과 심문헌을 맺아주려 한 것도 그였다.사람을 사람으로 잊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다.천우진은 예전에 심문헌을 좋게 보지 않았으나 그건 편견이었음을 깨달았다.한 남자가 자신의 취향도 바꿀 만큼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 어찌 그의 진심을 의심할 수 있을가.원하는 바를 이루었기에 천우진이 떠날 때가 되었다.심문헌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착각인가?오늘밤 천우진에게서 고독함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너무 외로워 보였다.소이연을 그에게 맡기기에는 아깝다고 생각되었나?아니면 심문헌이 못 미더워 보인 것인가."싫어요?"소이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그녀의 미소는 밤하늘 아래서 더욱 빛이 났다.심문헌은 그녀의 미소에 넋을 잃었다.주위의 모든 것은 희미해지고 그녀만 보였다.이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이연 씨, 오늘만을 기다렸어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그래서 심문헌은 그녀가 육현경에게서 상처를 받은 걸 알고 있었다.그녀는 의지할 곳이 필요한 것이다.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그녀는 너무 지쳤다.심문헌은 이 모든 걸 알았으나 개의치 않고 감격했다.얼마나 대단한 인격이란 말인가.소이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심문헌의 가슴에 안겼다.심문헌은 심장이 튀어나올것 같았다.자신의 심장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미친 듯이 뛰였다.그는 품 안의 소이연이 흐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가 자신 때문에 우는 건지 아니면 육현경 때문에 우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그의 품 안에 있는 건 확실했다.자신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었다."문헌 씨,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사랑하려고 노력할게요. 맹세해요."소이연은 천천히 맹세했다."그 말이면 충분해요."심문헌은 소이연을 품 안에 가두었다.둘이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육민과 천우진이 보고 있었다.둘은 천씨 저택의 2층 베란다에서 달빛 아래의 그들을 바라보았다.천우진이 일부러 육민을 부른 것은 아니었다.그가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육민이 베란다에서 그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육민의 침착함은 10살짜리 애라고 믿을 수 없었다.천우진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육민에게 걸어가 함께 소이연과 심문헌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삼촌."육민이 입을 열었다."엄마가 아빠를 버린 건가요?""엄마가 아빠를 버린 것 같애?"천우진이 되물었다.육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엄마를 버린 것이다.결국 아빠가 엄마에게 상처를 주었다."늦었어. 아직 키 클 때니까 빨리 가서 자."천우진은 육민의 어깨를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네."천우진은 육민의 방을 나갔다.그의 발걸음은 점점 늦어졌다.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도 마음이 아파왔다.육민은 자신의 침대로 올라가 아까 찍은 사진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그건 소이연과 심문헌이 포옹하는 사진이었다.육민은 이 사진을 육현경에게 보낼지 말지 주저하다가 메세지와 함께 사진을 전송했다.[그 자리에
육현경의 핸드폰에 메세지 알림이 떴다.조용한 복도에서 알림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복도에는 육현경 빼고 임씨 어르신도 있었다.이번 임아영의 자살 기도로 임씨 어르신이 그에 대한 적의는 눈에 띄게 심해졌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임씨 어르신은 임아영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도 가만두지 않을 거라 협박했다.그러던 터라 핸드폰 메세지 알림 소리에도 임씨 어르신의 매서운 눈빛이 느껴졌으나 육현경은 무시했다.임아영이 죽지 않으면 그가 임씨 가문에서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그는 잘 알았다.임씨 가문은 육현경이 임아영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잘 알았기에 그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그러나 임아영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는 살아서 임씨 가문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육현경은 담담하게 메세지를 클릭해 보았다.순간 그의 손가락은 굳어졌다.메세지 속의 사진도 흐릿하게 보였다.그러다가 복도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열리는 응급실 문을 바라보았다.기진맥진한 의료진들이 터덜터덜 밖으로 걸어 나왔다.임씨 가족들과 육현경이 의료진들에게 달려갔다."의사 선생님, 어떻습니까? 저희 아영이 괜찮은 거죠?"임씨 어르신이 급히 물었다."제때 응급처치를 해서 생명의 위협은 없습니다."의사는 연신 강조했다."이 환자는 특수한 상황잊니다. 이번에 몸을 다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계속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심장에 무리가 갈 것입니다. 가족분들이 많이 돌봐주시길 바랍니다.""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임씨 어르신은 생명의 위험이 없다는 말을 듣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의료진에게도 친절하게 대했다.그들은 간단하게 주의 사항만 전달해 주고 떠났고 곧이어 임아영도 모습을 드러냈다.그녀의 얼굴은 창백하여 허약하기 그지없었다.임아영은 가족들을 보자 웃으려고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그러나 그녀의 노력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임씨 어르신은 더 이상 볼 수 없어 입을 열었다."아영아, 왜 또 멍청한 짓을
임아영은 눈을 감은 그 순간에 육현경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녀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모든 사람들이 남아 임아영의 병실을 지켰다.그녀가 잠에 들고나서야 가족들은 하나둘씩 떠났다."루카스, 나 좀 봅세."임씨 어르신의 얼굴이 굳어졌다.임아영을 대하던 자상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냉기만 가득했다.육현경은 어르신을 따라 병실에서 나와 복도에 서 있었다.다른 가족들이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임씨 어르신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루카스, 내가 자네를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아영이가 아니었다면 자네가 살아있었을거라 생각하나?""이번엔 오해십니다."육현경이 덤덤하게 답했다."오해? 자네랑 소이연은 대체 무슨 사이인가?""인정합니다. 소이연에게 마음이 간 적이 있습니다.""루카스!"임씨 어르신은 그의 대답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소이연은 매력적인 여인이기에 정상적인 남자인 제가 마음이 동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육현경은 두려움 따위는 없는 눈빛으로 어르신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지금 저는 아영 씨만 사랑하고 있습니다. 소이연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요 며칠 누구랑 함께 있었지? 루카스, 아영이는 자네를 위해 목숨까지 던졌는데, 자네는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임씨 어르신은 얘기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될 수만 있다면 눈앞의 사내를 갈기갈기 찢고 싶었다.임이영만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어르신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도 남았을 것이다."그건 아영 씨와 소이연 사이의 거래였습니다. 저는 그 거래 물이었고 심지어 선택권도 없었습니다. 믿기지 않으시면 아영 씨에 여쭈어보세요."육현경의 설명에 어르신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거짓말을 한다 한들 속이기도 힘들고요.""그럼 아영이가 왜 또 그런 일을 벌인 것인가?""아영 씨는 자살로 저를 협박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떠나갈까 봐.""자네가 충분
임씨 어르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기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제 멋대로 이번 일에 대해 결론을 내리거나 누군가를 부정하거나 설득되어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모든 일들을 물 흘러가듯 넘길 것이다.어르신은 담담히 말했다."젊은이들 일에 내가 끼지 말아야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아영이는 몸이 약하니 잘 보살피게. 아무튼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네. 늦었으니 힘들었을 텐데 가서 쉬게.""네."육현경은 짧게 대답했다.그렇게 임씨 어르신은 떠나갔고 육현경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지금 어르신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야 했다. 아니면 임씨 가문에서 설 자리가 없어 이후의 일들을 진행할 수 없을 것이다.다만.육현경의 손이 떨려왔다.소이연과 심문헌이...육민의 말이 옳았다.한 자리에서 계속 기다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육현경이 소이연을 버린 것이다.그러나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녹화일.바다에서 녹화를 마치고 민박으로 돌아왔다.마지막 날, 제작진은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고 5쌍의 커플에게 커플당 음식을 준비시켜 저녁을 함께 먹게 했다.예수진이 잠에서 깨자 옆에는 계지원이 없었다.아침 8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디로 간 것일까?그녀는 잠에 취해 그가 떠나간 것도 느끼지 못했다.예지원은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일어서며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쥐고 화장실로 갔다.변기에 앉아서 뉴스 면을 클릭하자 최상단에 임아영과 루카스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둘은 연예계 종사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예수진은 미간을 구겼다.사진 속의 루카스는 아무리 보아도 육현경과 판박이였다.둘의 이목구비는 조금 달랐으나 느낌은 똑같았다.이 세상에 이렇게나 똑같게 생긴 사람이 있다니.예수진은 믿을 수 없어 소이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소이연은 아직 꿈속이었다.어제 늦게 돌아온 뒤 심문헌과 ...
"응. 어제 너무 늦게 잠에 들었어."소이연은 기지개를 켜며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그럼 좀 더 잘래?"예수진은 잠투정이 많았다. 그리고 잠든 도중에 깨우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괜찮아, 이미 깼어.""그래."예수진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으나 참고 있는 듯했다."무슨 일 있는 거야?"소이연이 먼저 물었다."큰일은 아니야."예수진은 계속 머뭇거렸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소이연은 그녀를 너무 잘 알았다. 예수진은 모든 것이 티 났다.닦달에 예수진은 아쩔수없이 입을 열었다."루카스가 임이영이랑 결혼하는 거야?""응."소이연은 태연하게 대답하려 애썼다."근데 루카스랑 육현경이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너 그런 의심을..."예수진은 말하다가 실수한 걸 깨닫고 입을 닫았다.소이연은 입술을 지그시 쌔물었다.그녀는 예수진에게 모든 사실을 알릴지 말지 고민했다.고민하던 소이연은 결국 입을 열었다."육현경은 내가 보는 앞에서 사라졌어."육현경이 스스로 진실을 알리지 않은 이상 그녀도 그럴 자격이 없었다.육현경은 그녀에게 낯선 사람이기도 했다.그의 일은 더 이상 그녀와 관련이 없었다.그녀도 더 이상 그를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그런데 정말... 내가 육현경이랑 오래 지내 봐서 아는데, 작은 표정들까지 정말 판박이야."예수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의심이 가면 네가 직접 가서 물어봐."소이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육현경은 이미 죽었어.""나는 너희들이 서로를 놓칠까 걱정돼."예수진은 흥분한 모습이었다.그녀는 육현경이 살아있기를 원했다.예수진과 육현경은 친남매처럼 친했다.육현경이 사고를 당했을 때 예수진은 아파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그러나 육현경과 그녀는 결코 아무 사이도 아니었기에 지금 제일 걱정되는 건 소이연이었다.예수진은 단지 루카스가 육현경이라면 육현경이 지금 결혼을 하니 이후 소이연과 가능성이 없어질까 봐 두려운 것이다."이미 놓쳤어.""이연아...""나랑 그 사람의 일은 간
예수진은 소이연의 말을 잘 따랐다.그녀의 말은 신뢰가 갔다.소이연은 이미 여러 번 계지원과 잘 해보라고 당부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진은 마음속으로 여전히 그를 배척했다...아무런 희망도 걸 수 없었다.그러나 이번엔 뭔지 모를 용기가 생겨났다.소이연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기에 계지원은 인성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전에 계지원이 자신에 대한 거절을 떠올리면...정말 모순되었다.예수진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그럼 해 볼게."예수진은 자신도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을 때 소이연의 말을 들었다."지원 씨는 너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야."소이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러길 바래야지."예수진은 쉽사리 희망을 품지 못했다."촬영하는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집중해.""그래. 나중에 통화해."예수진도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이미 화장실에 너무 오래 있었으니 말이다."맞다."소이연은 갑자기 예수진을 불렀다."응?""촬영 끝나면 내 비밀을 알려 줄게.""그때까지 꼭 기다려야 하는 거야?""네가 놀랄까봐 그래.""무슨 일인데...""촬영 끝나면 알려 줄게. 일 열심히 해."소이연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예수진은 끊긴 전화를 쥐어 잡고 어이가 없었다.소이연은 분명 그녀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성격임을 알면서 알려주지 않다니...예수진은 짜증이 났다.예수진이 화장실에서 나와도 계지원은 보이지 않았다.이상하네, 어디 간 거지?일 때문에 또 어디 간 거 아니야?예수진 혼자 예능을 촬영하는 건 그녀로서 너무 난처했다.방송이 나간 후 아마 그들의 스캔들이 터져 나올 것이다.그들의 결혼도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아직 일부에서 그들의 결혼이 가짜라는 설이 돌고 있다.예수진은 이를 악물고 계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수진 씨.""하도경?"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예수진은 그가 하도경임을 알아채고 깜짝 놀랐다."계지원 씨는요? 전화를 왜 당신이 받는 거예요?""지원 씨는 저랑 있어요. 여기 오지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
예수진은 빠르게 소이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연 언니, 송문수 왔어요.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방금 안으로 들어갔어요!][내가 진짜 올 거라고 했잖아요.][내 매력이 그 정도일 줄 몰랐죠.]역시나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예수진에 어이없다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난 소이연은 송문수의 인영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하도 큰 키 덕분에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우뚝 솟아있는 송문수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문수야.”마찬가지로 그를 알아본 육현경이 인사를 건네자 송문수는 빠르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언제 왔어?”“어제 오후에.”“왔는데 왜 말도 안 해? 사업 잘된다고 이젠 우리도 모른 척하는 거야?”“아무리 잘 되봤자 내가 현경이만큼 돈이 많진 않아.”볼멘소리를 하는 하도경에 맞는 말로 반박하자 하도경도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언제 가?”“모레 비행기야, 내일 집 가서 부모님만 뵙고 가려고.”“그래서 우리 만날 시간은 없다 이거지?”“이번엔 시간이 좀 빠듯해, 거기 일도 많고. 오늘 보지 뭐, 술 제대로 마시자 한번.”“너 진짜 많이 변했어 송문수, 이렇게 진지하진 말아 줄래?”적응되지 않는 송문수의 말투에 하도경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그럼 어쩌라고.”“나는...”판을 깔아주니 말하기 어려웠는지 하도경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술 마셔 그냥.”“그래.”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둘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파티의 주인공이 자리하기도 전에 술부터 마시기 시작했다.육현경이 그런 그들을 말리려 할 때 송문수의 옆에 문득 한 여자가 앉았다.그에 술잔을 들고 있던 송문수도 잠시 멈칫했다.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며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송문수를 한번 보던 소이연은 하지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지수 씨, 왔어요?”“네.”“혼자예요?”“네.”혼자라는 말에 송문수의 손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혼자니까 더 조심해요 다닐 때.”“그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송문수는 마침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캐나다에 있는 회사도 이제 정상적으로 흘러가자 귀국한 거였지만 그도 그냥 예수진 아들의 백일을 축하하러 온 것뿐이었다.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송문수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배가 부른 채로 있던 예수진이 벌써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백일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오랜만에 온 장안시였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귀국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저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오랫동안 비워둔 집이라 그런지 온통 먼지투성이여서 일단 도우미부터 부른 송문수는 아주머니가 정리를 마친 다음에야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떠나기 전만 해도 이곳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데.이제는 그 모든 게 다시는 들춰선 안 될 과거가 돼버린 것 같았다.해외에 있던 시간 동안 송문수는 부단히 하지수를 잊으려 애쓰고 있었다.물론 정말 잊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하지만 하지수와 송문수가 반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할 때도 같은 집에 살던 하지수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그저 우연히 한 번, 그녀의 뒷모습이 화면에 스친 게 전부였다.몸을 뒤척이던 송문수는 내일의 백일잔치에 대해 생각했다.내일 가면 친구들이 무조건 술을 권할 텐데,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않은 탓에 송문수는 지금 자신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그래도 푹 쉬면 조금은 낫겠지 싶어 그대로 잠을 청한 송문수는 이튿날 아침이 돼서야 눈을 떴다.언제부턴지 부모님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린 탓에 송문수는 이젠 밤을 새우는 게 오히려 힘겨웠다.그렇게 여유롭게 준비를 마친 그는 한 번 더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집을 나섰다.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딱 적당한 시각에 집을 나선 그는 문득 옛날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어쩜 그리 특이하게 살아왔는지, 참으로 유치했던 것 같다.해외에서 반년 동안 혼자 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