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간에 사랑만 있는 것도 아니야......” "그만해." 예수진은 재빨리 하지수에게 소리쳤다. "난 이성애자야, 완전 이성애자!” 예수진은 정색하며 말했다. 식당에 도착한 예수진과 하지수는 식당 복도를 걸었다. 예수진의 발걸음이 갑자기 느려졌다.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수가 예수진의 시선을 따라가니 어딘가 낯익은 듯한 모습을 발견했다. "육현경?" 예수진이 중얼거렸다.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예수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예수진은 오랫동안 장안을 떠나 뉴스도 TV도 보지 않고,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하며 많은 일을 내려놓았다. 예수진은 어느 정도 마음의 평온을 찾은 뒤, 육현경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때는 육현경이 세상을 떠난 지 반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사망'이라는 두 글자를 봤을 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예수진은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내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수진은 소이연에게 전화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이미 반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물어볼 말이 없어하지 않았었다. 지금 이 사람을 보자 그때의 슬픔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내 눈이 어떻게 됐나 봐.” 하지수가 말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있을 리는 없잖아!” 예수진은 시선을 돌리며 눈물을 삼켰다. 그래, 죽은 사람이 살아있을 리가 없으니 잘 못 본 것이 분명했다."가자, 이연 언니가 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두 사람은 룸으로 들어섰다. 소이연은 일찍 도착했지만, 하지수의 운전 실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느긋하게 식당 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경합은 어땠어요?" 소이연이 예수진에게 물었다. "그렇게 좋지는 않았어요." 예수진이 입을 열지 않자, 하지수가 말했다. "계지원이 도와줘서 통과된 것 같대요.” 소이연은 예수진을 쳐다보았다. "낙하산인지 모르겠어요." 예수진은 오늘 경합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우울한 얘기는 이제
"그래요.” 하지수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일시적인 즐거움보다 절친의 몸과 일이 더 중요했다. 셋은 비틀거리며 식당에서 걸어 나왔다. 술이 당겨 정말 많이 마셨던 것이였다. 소이연은 복도로 나오자 속이 울렁거렸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소이연은 반 발자국 가지 못하고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너무 급해서 남자여자 화장실 표시도 제대로 보지 않고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어 세면대 앞에 엎드려 토하기 시작했다. "웩..... 웩웩......” 술을 안 마신 지 너무 오래됐다. 불면증에 시달릴 때 제임스가 술을 적당히 마시고 잠을 청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해서 해봤는데 전혀 소용이 없었다. 술을 마시고 잠을 청하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잠에 들기가 더 힘들었다. 그 후 그녀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설마 예수진과 하지원이 함께 있어 잊고 있었다. "웩......” 소이연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고, 속을 비웠더니 좀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입을 헹구면서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큰 거울을 보았다. 그 순간 소이연은 정말 멍해졌다. 소이연은 화장실 안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녀는 화장실을 잘못 들어간 것인가?! 남자 화장실 들어갔다고?! "충분히 봤어?"남자가 물었는데 그 남자의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아니, 목소리뿐만 아니라 얼굴 또한 낯이 익었다. 루카스 아닌가! 소이연은 술에 취해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 않았다. 소이연의 시선이 저절로 아래로 향했다. "뭘 또 봐?!" 루카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소이연, 너 정말 정신 나갔어?!” 소이연이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자 갑자기 토가 올라왔다. "웩......” 루카스는 그만 얼굴이 파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나를 보고 말도 없이 토하다니! 이 여자 일부러 이러는 거지?! 소이연은 노란 담즙이 나올 때까지 한참을 토하고 나서야 조금 진정되었다. 그
예수진과 하지수는 남자 화장실로 뛰어들어왔다. 그녀들도 술에 살짝 취해 있었기에 소이연이 화장실에 간 것을 본 그녀들은 화장실에서 나올 때까지 소이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실 안에서 '쾅' 소리가 나자 깜짝 놀란 두 사람은 그 화장실이 남자 화장실인 줄도 모르고 뛰어들어오는 순간 소이연의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녀들은 충격을 받아 지금 이 모습이 자신들이 술에 취해 환각을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이연의 이런 민망한 모습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소이연은 평소 그녀들과 다른 여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소이연은 몸가짐과 교양에서 완벽한 여자였고 공공장소에서 이런 어떤 엉뚱한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볼 수도 상상할 수 없는 존재였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예수진과 하지수는 당황해 눈을 깜박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이연이 남자의 바지를 잡아당기다가 그 남자의 발 앞에 쓰러뜨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강하고 자극적인 장면 앞에 예수진과 하지수 두 사람 모두 소이연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예수진과 하지수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 향했다. 눈앞의 남자는 쭉 뻗은 긴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는 검은색 드론즈 사각팬티를 입고 있었다. 사각팬티가 그의 둥근 엉덩이를 감싸고 있다. 예수진과 하지수는 자신들이 취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완벽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다. 정말 소이연의 절친들이 맞았다. 모든 행동들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훌륭한 장면을 소이연 혼자 감상하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같이 보러 들어오라고 한 거지! 예수진의 입가에 침이 흐르자 그녀는 황급히 침을 닦았다. 예수진은 마음을 침착하게 하기 위해노력했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진은 지금 전혀 침착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멋있어서가 아니라 이 사람, 이 사람 아니, 육현경 아니야?! 예수진은 자신의 눈을 비볐다.분명히 술에 취한 것이 확실하다 귀신을 보다
확실히 깨끗하지 않은 것을 본 것이 맞았다. 못 볼 것을 봐 버렸다. 돌아가서 눈을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거네." 예수진의 작은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소이연과 하지수는 그녀의 반응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육현경은 분명히 잘 지내지 못해서 우리를 찾아온 거야...... 가자, 가자, 내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우리 지금 당장 그를 위해 제사 지내러 가자!" 예수진은 당황하며 소이연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무슨 제사를 지내러 가." 소이연은 뜬금없어하다가 갑자기 예수진이 자신과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예수진이 정말 취해서 그러는 건가?! "가서 노잣돈을 좀 올려줘야겠어.” 예수진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는 틀림없이 돈이 부족한 거야.” "뭐라고...... 아!” 소이연은 예수진의 거친 손에 끌려갔다. 방금 넘어지며 양쪽 무릎이 다 부어있던 소이연은 예수진에게 잡아당겨지자 온몸이 다 아파왔다.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때려죽여도 그녀들과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마시더라도 절대 취하도록 마시면 안 되겠다. 그녀들의 술주정을 참아 줄 수가 없다. 하지수도 갑자기 넋이 나간 예수진의 모습에 당황했다.도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인가!“수진아, 천천히 가.” 하지수가 급히 뒤쫓아갔다. 세 사람은 모두 술이 깨면서 머리가 아파왔고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예수진의 발걸음이 매우 빨라 소이연은 자신이 곧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식당 밖으로 나와 예수진은 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하지수는 하마터면 그녀를 놓칠 뻔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열심히 뛰어가 간신히 택시에 탔다. 그녀는 아직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숨을 고르며 예수진의 말을 들었다.. "기사님, 여기서 가장 가까운 절로 가주세요.” "아가씨, 이 한밤중에 절로 가자고요?” "네." 예수진이 냉정하게 말했다. ”귀신을 조심
"제사 지내야 해, 빨리 절이나 올려." 예수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귀신 만났어?” "어." 예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연 언니도 보이지 않았어요?” "내가 언제요?" 소이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언니도 방금 분명히 봤을 거예요. 아, 됐어요. 취했다 생각하고 말아요." 예수진는 더 이상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말했다. 도대체 누가 취한 것인지. "빨리 가요. 예수진은 재빨리 두 사람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만." 하지수가 예수진을 말리며 말했다. "정말 이 한밤중에 여기를 들어가자고?” "응, 여기서 제사지 낼 수는 없어. 정확히 무덤 앞에 가서 해야 해.” "예수진, 너 혹시......” "그만 말하고, 빨리 와.” 예수진이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며 두 사람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동묘지 안의 불빛은 매우 어두웠다. 일렬로 무덤들이 늘어서 있었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곳은 장안 상류층만 묻힐 수 있는 곳으로 도심에서 가장 비싼 곳에 위치해 있어 웬만한 집값 보다 평당 단가가 높은 곳이었다. 이전에 예수진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 왜 이런 곳에 헛돈을 쓰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그녀는 이 돈이 헛돈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결국 사람은 죽어서 귀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녀들은 공동묘지의 가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직도 그녀들의 몸에 술기운이 남아 있었다. 사람은 술에 취해 정신이 맑지 못하면 담력이 평소보다 더 커지게 마련이다. 그녀들은 공동묘지 깊숙이 들어갔다.육씨 가문의 묫자리는 공동묘지 안에서도 가장 높은 곳, 풍수가 제일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육씨 가문의 묫자리에 도착한 예수진은 육현경의 무덤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야?" 예수진이 조급해하며 물었다. 육씨 가문의 묫자리에는 가로등이 있기는 했지만 불빛이 너무 어두웠고 술을 마셔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 한참을 찾아봐도 육현경의 묘가 보이지 않았다. 예수진은 약간 짜증이 올라왔고, 소
소이연은 묵묵히 묘비 위의 흑백 사진을 바라보았다.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그의 낯익은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그가 가깝고도 또 멀리도 느껴졌다. 소이연의 마음속의 슬픔이 마치 폭풍처럼 밀려들어왔기에 그녀는 정말로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소이연의 눈에서 눈물이 미친 듯이 자꾸만 흘러내렸다.3년, 30 년이 지나도 육현경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이연 언니.”예수진이 소이연의 곁으로 다가왔다.예수진은 소이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예수진은 술이 올라 충동적으로 그녀를 여기로 데려왔다.진작에 알았다면, 그녀 혼자 왔으면 좋았을 것이다.육견경이 저승에서 돈이 모자란 것 같으니 예수진은 제사상에 돈을 올려 주기만 하면 되었다.소이연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싶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소이연은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정말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우리 제사상에 돈 좀 올려줘요.”예수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저 빨리 할 일을 끝내고 소이연을 데리고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예수진은 소이연이 정말 아파 죽을까 봐, 아니면 충동적으로 자살이라도 할 까봐 걱정되었다.예수진은 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사온 향초와 과일을 꺼냈고, 라이터를 켜 향초에 불을 붙이고 준비한 돈을 올리고 묘지에 절을 했다. 그녀는 돈을 제사상에 올리며 말했다. "오빠가 이 세상을 그리워하고 이연 언니를 놓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지만, 오빠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언니를 찾아오지 마. 내가 오늘 오빠를 위해 돈을 올렸으니까 마음 편히 아래에서 즐기고 돌아오지 마.” 예수진은 계속 중얼거리며 말했다. 하지수는 할 수 없이 예수진 옆에서 제사상에 돈을 올렸다. 제사를 마치고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이곳의 섬뜩한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소이연의 감정도 확실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수는 고개를 들어 소이연을 바라보았다. 소이연은 줄곧 육현경의 사진을 보며 울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큰
"어떻게 해." 예수진이 놀라서 정신이 없이 물었다. "뭘 어떻게 해! 빨리 불이나 꺼!" 하지수는 재빠르게 말했다. "어." 예수진이는 얼른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자 하지수와 소이연도 외투를 벗었다. 세 사람은 외투를 사용해 죽을힘을 다해서 불을 끄기 시작했다. "뭐 하는 겁니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들은 깜짝 놀라 쓰러지는 줄 알았다. 예수진은 자신의 심장이 좋지 않았다면 오늘 밤 수백 번은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세 사람이 몸을 돌려 제복을 입은 경비원을 보자 경비원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술에 취해서 산에 불을 질렀어요?” "할아버지, 그게 아니고....!” "누가 할아버지입니까!" 경비원이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30살 밖에 안 됐다고요!” “......" "아, 죄송해요. 저희는 제사 지내러 왔어요. 그러다가 실수로 옆에 불이 붙었는데, 저희가 지금 막 껐어요......” "한밤중에 제사를 지내러 왔다고요?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경비원은 더 이상 그녀들에게 말하지 않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가 바로 신고하자 그녀들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경찰 오면 그때 설명해요!” 경비원은 단호하게 말을 하며 그녀들이 도망갈까 봐 손전등으로 그녀들을 향해 계속 쏘았다. 세 사람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미 경찰에 신고했다는데 어쩌겠는가 말이다!예수진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내가 방금 할아버지라고 불러서 저 사람 화난 거지?”하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실력 있는 엘리트 변호사인 그녀는 왜 자신이 예수진과 함께 소란을 피우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법을 잘 알고 있는 그녀가 법을 어길 수 있겠는가! 대략 30분 정도 지나자 경찰이 왔다. 경찰은 상황을 파악한 후, 세 사람을 경찰서로 데려가 조사했다. 경찰서에 가기 전, 예수진은 경찰을 붙잡고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면 안 돼요? 오늘 밤 저는 정말 가족을 추모하러 이곳에 왔어요.” 경찰이 그녀를 자세
"그럼 서로 보증을 서주면 되지 않아?" 예수진은 순진하게 말했다. "어때요?” “...…" 예수진은 다른 말을 하지 못하며 그저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사실 경찰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보증을 서줄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었고 친척도 친구도 없는 예수진의 유일한 두 친구는 모두 여기에 있었다. 소이연은 예수진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생모 관계가 어떤 상황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예수진이 말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소이연도 더는 묻지 않았기에 그녀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소이연은 먼저 카톡을 보내고 이명진에게 전화해서 자신의 보증인이 되어 달라고 말했다. 하지수도 자신의 비서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요?" 소이연이 통화를 하며 놀랐다. "대표님, 대표님께서 제 휴가를 직접 승인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명진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드디어 아내와 신혼여행을 올 수 있었는데, 지금 돌아가야 한다면 평생 회사와 결혼해야 할 판이었다. "아, 네, 깜빡했네요." 소이연은 자신이 그의 휴가신청서에 사인을 해준 것이 기억났다. "대표님,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이승윤 씨가 제 일을 할 수 있도록 인계해 주고 왔습니다.” "아, 알겠어요. 그럼 즐거운 신혼여행 되세요.” "네, 대표님. 감사합니다.” 이명진은 무거운 짐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꼈다. 소이연이 이승윤에게 전화하려는 순간 휴대전화의 배터리가 나갔다. 소이연은 이승윤의 전화번호를 잘 기억하지 못해 휴대전화 충전기를 빌리러 가려던 참이었다.그 순간 낯이 익어 보이는 한 경찰이 그녀에게 말했다. "소이연 씨, 제가 당신 남자 친구분께 소이연 씨를 데리러 오라고 연락했습니다.” "네?" 소이연은 경찰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남겨두었던 전화번호가 그대로 있어서요.” 소이연은 이 경찰이 지난번 루카스의 싸움을 처리한 경찰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