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더 많이 할수록, 잘못도 더 많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자리를 뜨려 했다.“거기 서.” 여배우가 그녀 앞으로 뛰어와 말했다. “너 도희한테 사과 안 해?”“제가 왜 사과해야 해요?” 예수진은 알 수 없었다.“네가 얘 자리 뺏었으면 사과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그 자리는 심사위원 선생님이 주신 거예요. 불공평하다고 생각되시면 심사위원 선생님을 찾아가셔야죠. 제가 아니라.”“예수진, 너 책임 전가는 타고났구나?”“전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그럼 나도 사실 하나 알려줄게. 너 오늘 도희한테 정식으로 사과 안 하면 방송국에서 나갈 생각하지 마.”“......” 예수진의 눈빛이 흔들렸다.“누가 누굴 이길 수 있나 봐보자고!” 여배우는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길을 막았고, 예수진은 속으로 감정을 추슬렀다.3년 전 이런 일을 당했다면, 그녀는 그대로 눈에 거슬리는 앞에 있는 사람을 발로 차버렸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감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이 상태로는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대치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예수진의 전화가 울렸다.화면을 보고 전화를 받으려 했지만, 여배우에게 휴대폰을 빼앗겼다. “사과부터 해, 아니면 전화도 못 받아!”예수진은 이를 악물었다.그녀는 도희에게 걸어가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뭐가 죄송해?” 여배우가 협박했다.“제가 마지막 진출자 자리를 빼앗아서 죄송합니다.”“인정한 거야? 네가 낙하산인 걸 인정한 거야?”“방금 하신 말씀 다 맞아요.”예수진은 다 포기했다.어차피 말 몇 마디 더 한다고 닳지는 않으니까.그 사람들은 예수진이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일 줄 몰랐다. 그녀는 이미 그때의 오만함과 기가 없어졌다.“이제 제 휴대폰 좀 돌려주시고, 저 가도 될까요?” 예수진은 여배우에게 물었다.여배우는 도희를 흘끗 보았고, 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여배우는 휴대폰을 예수진에게 돌려주고, 협박도
아까 그는 예수진의 반격을 기대하고 있었다. 만약 사고를 치더라도 그가 뒤에서 몰래 잘 처리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타협을 선택했다.분명 그런 적이 없었는데도 오해를 받았지만 그저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길 바랬다.계지원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장안시 방송국 입구.예수진은 방송국을 나와 그 길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그녀는 마스크와 볼캡을 눌러쓰고 꽁꽁 싸매서 아무도 알아볼 리 없었다.사실상 지금 그녀의 인지도는 이미 아무도 못 알아볼 정도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 이슈는 없을수록 좋은 법이다.그녀는 발걸음이 아주 빨랐다.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수진 씨.”예수진은 심장이 떨렸다.발걸음은 멈칫했지만, 뒤를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소이연이 자신의 앞까지 온 것이 보였다.그렇다, 소이연은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루카스도 환상이 아니고 그는 육현경과 정말 닮았다.하지만 예수진은 정말 예수진이었다.3년 동안 못 보았지만 그녀는 확실히 변해있었다.옷도 이렇게 소박하게 입고 말이다. 기억 속의 그 영원히 패션 선두주자의 길을 걸을 것 같던 여자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심지어 소이연은 예수진의 손에 들린 가방도 모조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심지어 퀄리티가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조금만 자세히 봐도 알 수 있는 정도였다.근데 예수진은 정말 신경 쓰지 않는 걸까?자신의 명성이나 이미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 걸까?“이연 언니.” 예수진은 애써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고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오랜만이라는 말도 할 줄 알아요?!” 소이연은 기분 상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3년 동안 어디 갔었어요? 왜 나랑 지수 씨한테 연락도 안 했어요?”“말했었잖아요. 언니랑 지수는 제 마지막 희망이에요. 전 아직 마지막 희망까지 필요한 정도는 아니고요.” 예수진이 웃으며 말했다.소이연은 예수진의 웃는 모습을 보고
“이제 돌아왔잖아!” 예수진이 조금 떨면서 웃었다.“난 네가 안 돌아올 줄 알았어!” 하지수가 원망했다.예수진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을 생각도 했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최근 그녀는 정말 많이 둥글둥글 해졌다.“나 그냥 나가서 콧바람 좀 쐬고 온 것 뿐이야!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당연히 돌아온 거고.” 예수진은 설명하려고 노력했다.“왜 3년 동안 우리한테 연락 한 번 안 했어?” 하지수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나 그냥 조금 비굴하면 안 될까? 다들 돈 많은 부잣집인데 나만 가난하니까, 그렇다고 내가 질투심을 가지면 안 되는 거잖아.”“예수진 말 똑바로 해!”“어어어, 내가 연락하면 나 팔아넘길까 봐 무서워서 그랬다! 장안시 사람들 보기도 싫어서 숨은 거고!”“어떤 사람들?”“아직도 몰라?” 예수진이 농담을 했다.“계지원?” 하지수는 정곡을 찔렀다.“완전히 그 사람 때문만은 아니긴 해.”“그건 알지? 그때 계지원이 교통사고......”“그 사람 얘기는 안 하면 안 돼?” 예수진은 그대로 말을 끊었다.“오늘 방송국에서 마주쳤는데, 내가 무슨 몇 천만 원이라도 빚진 것 마냥 얼굴이 썩어 있었어. 그러니까 나 지금은 기분 좀 좋게 있으면 안 돼?”“그래서 계지원을 피하기 위해서 숨었다고?”“진짜 아니야. 하도경, 육은숙 이런 사람들도 있고...... 그리고 다들 그 사람들이랑 어느 정도 관계가 있으니까 다 피한 거야.”“예수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였어?!”“인생이 날 이렇게 만든 거잖아?” 예수진은 담담하게 말했다.마치 심리 상태가 이미 아주 좋아진 것 같았다.이미 뭐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하지수는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소이연이 그녀를 제지했다.“수진 씨도 돌아왔으니, 지나간 일은 다 지나보내요.”하지수는 입술을 만졌다.예수진은 소이연에게 감격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하지수의 심문을 버티기 어려운 참이었다.“너 이 몇 년 동안 장안시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은 줄 알아?” 하지수는 더 이상
3년 동안 안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예수진의 성격은 여전히 그렇게 활발했다.정말 이 3년이라는 시간이 그녀가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한 것일까?그녀는 계지원, 하도경, 육씨 가문까지 내려놓았다.세 사람의 식사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저녁을 먹고 난 뒤, 그들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계산을 하고 나올 준비를 했다.문을 나서자마자 세 사람은 발걸음을 멈칫했다.육은숙을 보았기 때문이다.육은숙 외에 그 손을 꼭 잡은 하도경과 육가희도 보았다. 아마 방금 밥을 먹고 일어서려던 것 처럼 보였다. 하필 이때 갑자기 마주치다니!정확히 말하면, 이때 예수진은 그들과 갑자기 마주쳐서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육은숙도 예수진을 본 그 순간, 역시 많이 놀란 눈치였다.그녀가 예수진을 눌러버린 뒤로 그녀는 사라졌었다.3년이 넘게 사라졌었다.그녀는 거의 예수진을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갑자기 또 나타났기에 다시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팽팽했던 긴장감도 다 사라진 것 같았다.그냥 그렇게 둘은 낯선 사이가 되었다.“예수진, 너 돌아온 거야?” 처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육가희였다.그녀는 놀라우면서도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오늘 오후 《배우님 자리에 앉아주세요》의 녹화가 끝난 뒤, 그녀는 바로 방송국에서 나왔다.그녀의 메이크업실은 예수진과 같은 곳일 리도 없었다.그래서 육가희는 그녀를 마주치지 않았고, 그녀가 돌아온 줄 정말 모르고 있었다.“응.” 예수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순간 정말 생각 없이 하도경을 흘끗 보았다.하도경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계속 그렇게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시울이 아주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오랜만이네.” 예수진이 먼저 하도경에게 인사를 했다.그녀는 아주 찬란하고 호탕하게 웃었다.하도경은 참지 못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도경 씨.” 육가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단지 그가 손을 너무 꽉 잡아서 조금 아팠다.하도경은 그제야 정신이 든 것 같았다.그는
세 사람은 식당을 나섰다.“데려다줄게.” 소이연과 하지수가 동시에 말했다.예수진에게 하는 말이었다.말이 끝나자마자 세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이 빌어먹을 케미 같으니라고!예수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알아서 갈게. 여기 집에서 가까워서 엄청 편해.”“왜 우리가 못 데려다주게 해?” 하지수는 긴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너 내일 또 사라지는 거 아니지?”“말도 안 돼! 나 지금 돌아와서 뿌리도 내렸잖아.” 예수진은 과장해서 말했다.“내가 까먹고 말 안 했는데, 나 지금 《배우님 자리에 앉아주세요》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제 막 2라운드 진출했어.”“그럼 왜 우리가 못 데려다주게 해?” 하지수는 집착했다.“집이 너무 소박해서 제대로 접대 못 해줄 것 같아. 내가 좀 더 많이 벌어서 큰 저택 사면 우리 집에 두 사람 초대해서 제대로 접대해 줄게.”“그날까지 못 기다릴까 봐 그래!” 하지수가 말했다.“허, 친구끼리 이렇게 깔보기 있어? 나 이번에 돌아온 것도 다시 연예계 TOP 급 자리 뺏으러 온 거야. 내 자리는 무조건 있을 거야.”“장난이야. 나는 당연히 믿지.”“그럼 나 먼저 갈게.” 예수진은 손을 저으며 자리를 떴다. “수진아.”하지수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소이연이 하지수에게 눈짓을 주었다.하지수는 깨닫고 말했다. “몸 조심 해.”“집 도착하면 연락할게.”예수진이 먼저 가고, 하지수는 소이연에게 걱정되는 듯 물었다. “수진이가 진짜 다 내려놓은 걸까요?”“모르겠어요.” 소이연이 고개를 저었다.“보기에는 또 아무 생각 없는 예수진인데.” 하지수는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소이연은 정말 알 수 없었다.그녀는 다른 사람 앞에서 항상 정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예수진은 버스에 앉아있었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미 이런 교통수단에 익숙해졌다.그녀는 창밖으로 비치는 장안시의 야경을 보고 있었는데 소속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고, 돌아오기로 다짐한 것이
“그 얘긴 안 하면 안 돼?”“내가 이렇게까지 힘들게 도와줬는데 안 사귄 거 나한테 안 미안해?”“미안해.”“미안한 거 알면 최소한 이유라도 알자. 나도 어떻게 이해는 해 볼게.” 하도경이 캐물었다.“그러니까...... 아, 어떻게 말해야 하지? 내가 스스로 너무 비참하게 느껴져서 난 너랑 안 어울린다는 생각에 계지원한테 연기 좀 해달라고 했다면 믿을거야?” 예수진이 설명했다.“내가 3살짜리 어린애야?”“아니, 근데 사실이야.”“예수진, 넌 한 번도 그렇게 비굴한 사람인 적 없었어.”“그건 옛날이고, 내가 육씨 가문 사람이 아닌 뒤로, 점점 비참해져서 너랑 같이 있을 때마다 스트레스 받았어.그래서 길든 짧든 계지원한테 도와달라고 한 거야.”“겨우 스트레스 때문에?”“그리고, 내가 널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하도경은 큰 충격을 먹었다.3년의 시간이 화살이 되어 심장을 뚫고 지나간 느낌이었다.“스트레스도 받고, 좋아하지도 않고...... 차라리 헤어지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그래.” 하도경도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벌써 3년 전의 일이다.“그럼 끊을게.”“앞으로 그렇게 사라지지 마. 아무도 네 과거 신경 안 써.”“앞으로는 안 그럴 거야. 어쨌든 난 나 스스로 의지해야 하면서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사람이니까! 언젠가 너희랑 어깨를 나란히 할 거야.”하도경이 웃었다.비록 3년 동안 사라졌었지만 예수진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여전히 명랑했다.“이제 끊을게, 나 집 도착했어.” 예수진이 급히 말했다. “나 이제 내려야 돼.”“안녕.”“안녕.”예수진은 전화를 끊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그녀는 창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었는데, 순간 인생은 정말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예수진은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방송국으로 향했다.2라운드에 진출했으니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 한다.배우들 대부분은 방송국에서 무대를 준비한다. 어쨌든 상대가
예수진의 눈빛이 흔들렸다.갑자기 계지원이 보였기 때문이다.주변에는 카메라도 많이 있었다.아마 연습하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한 것 같았다.어쨌든 그녀 혼자밖에 없으니 여기서는 사실 딱히 찍을 것도 없다.“유청하 씨랑 원빈 씨는요?” 감독이 물었다.“스케줄이 안 된대요.”“그래서 혼자 연습하고 있어요?”“어차피 저는 별일도 없는데요 뭐.” 예수진이 웃으며 말했다.감독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고는 그대로 촬영팀을 데리고 나가려 했다.“잠시만요.” 계지원이 갑자기 그들을 불러 세웠다.“계 감독님, 왜 그러세요?” 감독이 정중하게 물었다.“우선 예수진 씨 연기라도 봅시다. 기왕 왔으니까요.”“그래도 됩니다.” 감독이 대답하고는 예수진에게 말했다. “수진 씨 부분 연기해 봐 주세요.”예수진은 사실 하고 싶지 않았다.이 부분은 상대방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서 혼자서는 감정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수진 씨, 저희 지금 예고편 찍을 거니까 알고 계세요.” 감독이 미리 알려주었다.예수진은 이를 악물고 알겠다고 했다.그녀는 이렇게 많은 스태프 앞에서 연기를 시작했다.사실 그녀는 이미 아주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 효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예수진은 계지원의 얼굴을 보고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그녀가 자신의 작품을 망친다고 생각하는 건가?!그 순간 예수진은 그제야 계지원이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얼마 전에 넘어져서 다친 건가?계지원이 두 손 두 발을 하늘로 향한 채 넘어진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별로예요.” 계지원이 평가를 했다.“네, 제가 더 노력하고 연구하겠습니다.” 예수진의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는 그리 좋지 않았다.“이 역할을 이해하고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또 왜 숨기고 참는지, 어디까지 무너졌는지 생각해 봐요.이런 건 더 열심히 공부해야 연기에 녹여내서 관중이 공감하게 할 수 있을 거예요.”“네.” 예수진은 급히 정중하게 말했다.계지원은 그의 영화를 망칠까 두려웠다.이
그녀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감독팀이 갑자기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네, 이따가 깨워주세요.” 원빈은 급히 옆에 있던 소파로 향했다.예수진과 유청하는 같이 연습을 시작했다.“안되겠어요.” 유청하는 한번 연습하더니 하기 싫어졌는지 말했다. “한 명이 빠지니까 애초에 배역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요. 계속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네요. 일단 좀 쉬고 원빈 씨 일어나면 이어서 해요.”예수진은 이제 세상 물정을 너무 잘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연예계에 돌아온 뒤 딱 한 가지 지조가 있었다.바로 미움받지 않으려면 아무에게도 미움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청하에게도 가서 쉬라고 했다.예수진은 구석진 곳에 앉아 대본을 연구하며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매번 대사를 할 때마다 스스로 녹음했다.그리고 가장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 골랐다.이렇게 오후 내내 기다렸다. 원빈은 그제야 일어나 기획팀이 가져온 점심을 먹고 드디어 세 사람이 처음으로 맞춰보았다.아주 당연하게도, 원빈과 유청하는 개인적인 연습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대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수진 씨, 정말 미안해요. 이 작품이 이렇게나 난이도가 있는 작품인 줄은 몰랐어요. 그냥 대충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제가 얕봤네요.” 원빈이 사과했다.“괜찮아요, 연습을 많이 하면 되죠.”결국,오후 5시 반이 되니 두 사람은 각종 이유를 대며 연습실을 떠났다.또 예수진 혼자 남았다.됐어, 누가 한가하래?예수진은 거울을 보며 혼자 연습하다가 시간 개념이 사라졌다.예수진이 시간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중요한 건 방금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려는데 갑자기 화장실의 불이 꺼졌다.심지어 건물 전체가 깜깜해졌다.“악!”예수진은 깜짝 놀랐다.익숙지 않은 화장실 안에서 갑자기 깜깜해지니 너무 놀랐다.많은 공포영화에 필수로 등장하는 배경이 바로 화장실이었기에 생각할수록 너무 무서웠다.예수진은 급히 자신의 휴대폰으로 플래시를 켜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
이제 송문수도 정신을 차렸으니 하지수는 본인도 원래의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송문수의 사무실이 워낙 커서 둘이 같이 쓴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그녀는 사무실을 옮기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컴퓨터를 켜기 시작했다.하지수가 OA의 서류들을 훑어보려 할 때 송문수의 비서가 마침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하지수를 보자마자 놀란 기색을 비추며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 오셨어요?”“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송 대표님이랑 같이 회의 참석한 거 아니었어요?”“회의라니요?”“지금 회의 중 아니에요?”“저희 오전 회의 없어요, 오후 3시에 첫 회의에요.”“그럼 송 대표는 어디 갔어요? 거래처랑 계약하러 간 거예요 아니면 현장 나간 거예요?”어디를 가든 대동하던 비서도 없이 혼자 나선 송문수에 하지수는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아침에 연락 오셔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좀 늦는다고 저한테 오후 회의자료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거 다 프린트해서 지금 대표님 책상에 올려두려고 들어오는 길이었고요.”제 손에 들린 서류들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비서에 하지수의 미간은 더욱더 찌푸려졌다.집안일은 다 허영지와 하지수가 책임지고 있는데 출근 시간까지 늦춰가며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도대체 뭔지 하지수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알겠어요, 나가서 일 보세요.”“네.”서류를 송문수 책상 위에 올려둔 비서가 인사를 하며 나가자 서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곧바로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문수 씨, 지금 어디야?][나 회사에 있지, 왜 그래?]보낸 지 1초 만에 온 답장이었지만 내용은 역시나 거짓말이었다.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저를 속이는 건가 싶었던 하지수는 오락가락했던 지난날 송문수의 태도를 떠올렸다.생리가 온 그날만 해도 하지 못해서 안달 나 하던 사람이 생리가 끝났다는 데도 저를 피하는 게 안 그래도 이상했는데 하지수는 설마 송문수에게 이제 제가 필
아까는 앉아서도 잘만 자더니 제대로 누우니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 송문수는 하지수를 기다리며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보이지 않은 인영에 그는 문을 살짝 열고 문틈 사이로 거실 쪽을 내다보았다.그리고는 하지수가 아직도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사실 송문수는 인내심이 없는 게 아니라 하지수가 그녀가 쓰던 방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그게 걱정돼서 확인한 것이었다.그 뒤로도 몇 번 더 훔쳐보던 송문수는 마침내 티비를 끄는 하지수에 깜짝 놀라 침대로 달려가 자는 척을 했다.한편 드디어 티비를 끈 하지수는 먼저 본인 방으로 가 세수를 마친 뒤에야 송문수의 방안으로 들어섰다.자고 있는 송문수를 발견한 그녀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천천히 이불을 들추고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오랜만에 푹 자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싶었지만 하지수는 본능적으로 자꾸 송문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그 때문에 자는 척하던 송문수는 온몸이 경직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하지수랑만 있으면 몸이 멋대로 긴장하는 거라 그건 송문수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런데 곧이어 제 몸에 닿아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하지수의 온기가 느껴지자 송문수는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구나 싶었다.하지수가 있으니 평범하던 세상도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다음날부터는 송문수도 일 때문에 바빴고 하지수도 아버님의 생일 파티 준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둘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사실 둘 중에 더 바쁜 건 송문수였다.그래서 하지수도 평소에는 그 얼굴도 자주 볼 수 없었다.항상 밤늦게 귀가하는 송문수는 터덜터덜 들어와 잠든 하지수를 품에 안고 자다가 그녀가 깨어나기도 전에 출근해버렸다.밤에는 분명 온기가 느껴졌는데 일어날 때는 늘 비어있는 옆자리에 하지수는 못내 서운한 감정도 들면서 송문수가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는 하지수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춰왔다.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지수의 입술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엄청 부드럽네.”야한 꿈을 꾸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하지수는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이제 좀 정신 차리나 했더니 꿈속에서까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여자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문수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눈 좀 떠봐.”생리도 끝나지 않은 와중에 이렇게 꿈을 꾸는 남자랑은 하고 싶지 않았던 하지수는 이번에는 그가 깨어나길 바라며 아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었다.“무슨 꿈이 이렇게 진짜 같아?”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몸에 어지러워진 송문수는 그제야 눈을 뜨며 말했다.“그럼 꿈이 아닌가 보지.”“꿈이 아니라고?!”하지수가 짚어줘서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 송문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꿈에 누가 나왔는데 그래?”누가 나오긴, 송문수의 꿈에 나올 사람은 늘 하지수 한 명뿐이었다.전에는 꿈속에서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게 현실이 되어버려 순간 당황한 것이었다.하지만 송문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나 어떻게 잠든 거야?”평소에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하지수 앞에만 서면... 속마음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피곤했나 봐.”진실이라는 게 알아서 다 좋은 건 아니었기에 하지수도 모른 척 말을 돌리는 송문수를 따라가 주었다.괜히 끝까지 캐물어서 상처받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서였다.“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쩌다 쉬는 날도 밖에서 돌아다니기만 했잖아. 얼른 씻고 자, 내일부터 또 출근해야지.”“너는?”하지수의 재촉에 방으로 들어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걸음을 멈
“맛있어.”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간 남자가 이런 맛을 낸 건 객관적으로 대단한 일이라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토록 바라는 칭찬을 결국 해주었다.사실 이미 사약 같은 맛일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꽤나 달달해서 하지수도 놀라웠다.한편 원하던 칭찬을 들은 송문수는 신나서 채널을 돌리며 물었다.“이거 맞지?”“응.”“법률 채널이네?”여자들은 다 예능이나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이런 지루한 채널을 좋아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법 좋아해서 대학 때도 법 배운 거야. 난 이런 거 좋아해.”“그래.”하지수의 말에 그제야 그녀가 변호사였다는 걸 떠올린 송문수였다.그렇게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는 걸 알아차리자 한 번 더 감동받은 송문수는 저도 하지수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나도 같이 봐.”그의 제안이 의외였지만 이렇게 완벽한 판례분석이라면 송문수도 관심 있어 할 것 같아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접하지 않던 분야라 처음엔 싫어할 수 있어도 그 속에서 다룬 사건들을 계속 보다 보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면서 법률 지식까지 알게 되니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일 것이다.역시나 하지수는 법조인답게 바로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는데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잘 보던 송문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점점 지루해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핸드폰을 꺼내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제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던 그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티비에 빨려 들어갈 듯 열중하고 있던 하지수가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송문수는 이미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었고 고개도 반쯤 돌아가 있는 누가 봐도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잘 자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지루하면 지루하다고 말이라도 하지.하지수는 미련한 송문수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담요도 덮어주었다.하지만
송문수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지고 갔던 생리대로도 부족했었는데 양까지 많았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생각을 마치고 나니 심심해진 하지수는 자연스레 티비를 켜고 법률 채널을 틀어놓았다.주방에서 돌아치는 송문수는 진작에 잊은 하지수가 전형적인 판례들을 넋 놓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는 마침내 흑설탕물을 다 끓여냈다.맛없는 걸 가져다주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먹어보고 괜찮으면 그때 가져다주라는 소이연의 당부가 있었기에 송문수는 맛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어서 그는 용기를 내어 그걸 하지수에게로 들고 갔다.“이게 뭐야?”하지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지만 송문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흑설탕물이야. 뜨거울 때 마셔.”“뭐?”“생리 기간에는 이런 거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나 주려고 당신이 직접 만든 거야?”“당연하지, 내가 생리 올 리는 없잖아.”진지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어떨 때는 신기하리만치 제 마음을 몰라주다가 또 이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저를 위해주는 걸 보면 그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송문수는 정말 밉지만 싫어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고마워.”낮에 있었던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살짝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흑설탕물 한번 가져다줬다고 하지수의 화는 또 사르르 풀려버렸다.“어때?”그런데 하지수가 마셔보려고 컵을 든 순간 송문수는 맛을 물으면서 자연스레 채널을 돌려버렸다.한창 판례를 보고 있었는데 또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그의 행동에 하지수는‘사랑이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과도 같다’라는 가사에 깊은 공감이 가 순간 한숨을 쉬어버렸다.정말 송문수에게는 기대를 품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기대하는 족족 그것들이 실망으로 이어지니 말이다.한편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쉰 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황하며 물었다.“맛없어?”“내가 먹어볼 때는 맛있었는데? 너 생리만 아니었으면 내가 다 마
가슴을 졸이며 부둣가에 도착하니 술을 마신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역시나 운전석에 앉아야만 했다.진짜 이런 데이트를 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것 같아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던 하지수는 집으로 가는 동안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삐진 티를 내고 있었지만 송문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부르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송문수는 오늘이 아주 완벽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온 하지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송문수는 그 속도 모르고 또 그녀를 붙잡았다.“왜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좀 앉아있지.”아직 이른 시간이라 송문수 딴에는 하지수와 함께 티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나 씻고 싶어.”“나중에 씻어.”“보트 탈 때 몸이 다 젖어버려서 아직도 추워. 나 생리 와서 생리대도 바꿔야 하는 데 그럴 거면 그냥 씻고 싶어.”하지수의 말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여자가 생리 기간일 때는 더욱더 신경 써서 몸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간만의 데이트라 너무 신난 탓에 그만 까먹어버린 것이다.“먼저 보고 있어, 나 금방 씻고 나올게.”“응.”하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문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생리 기간에는 어떤 걸 신경 써줘야 하는 거예요?][송문수, 너 생리 기간도 못 참고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짐승 같은 놈.][날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면 어디 덧나니? 나 그런 놈 아니거든.][그럼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생리 때는 체온 유지에 신경 써줘야 해서 춥게 굴면 안 되고 피곤하지 않게 많이 쉬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술이랑 찬 건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고요. 하지만 지수 씨 성격이라면 남한테 기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서 했을 거예요 이미.]소이연은 이내 송문수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문수 씨는 흑설탕물이나 끓여주세요. 피도 잘 통하게 해주고 생리통 푸는 데에도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흑설탕물은 달달하
하지만 그리 남사스러운 말은 아니라서 하지수는 한마디 더 보탰다.“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매력이 넘치는 걸 어떡하겠어.”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하지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하지수, 내가 전에 좀 막살았던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나. 내가 너랑 잘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해.”“응, 알겠어.”하지수는 송문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믿었다, 아니 다 믿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바뀔 걸 알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네가 나한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너 실망시키지 않을게.”“알았어.”우쭐대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송문수의 말이라면 늘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바로 하지수였다.밥을 다 먹고 난 둘은 해변가를 거닐었는데 붉은 태양이 바다에 걸쳐져 있어 노을이 아주 예쁘게 져 있었다.주변 환경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경치는 봐줄 만해서 하지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날에 좀 있으면 파도가 더 거세질까 봐 걱정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보며 말했다.“문수 씨, 우리 이제 가자.”“가고 싶어?”“응.”“좀 더 있다 가자, 여기 좋잖아.”“좀 있다 보트도 타야 하잖아, 저녁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낮에 올 때도 무서웠는데 밤엔 더할 것 같아 하지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무서워?”송문수는 그런 하지수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응. 무서워.”“그럼 가자.”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 송문수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제 의견을 바로 수락해줄 줄 몰랐던 하지수는 어벙벙한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사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원래의 그녀였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소이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평생 참고 살
“왜 안 먹어?”송문수의 재촉에 하지수는 손으로 게를 잡고 뜯었는데 다른 곳보다는 맛있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들였던 노력에 비하면 그리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어때? 맛있지?”“맛있어.”하지만 기대에 찬 송문수를 보며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어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역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하지수를 긍정을 듣고서야 드디어 먹기 시작한 송문수는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하도경이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현경이랑 지원이는 바빠서 같이 몇 번 못 왔었어.”“그랬구나.”“술 마실래?”“나 생리 왔잖아.”영혼 없이 답을 하던 하지수는 신나서 술을 제안하는 송문수에 또 체념한 듯 말했다.반복되는 실망에 기대를 하지 않다 보니 송문수의 무관심이 이젠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아, 맞다. 그럼 음료수라도 마실래?”“물 줘 그냥.” 그녀의 대답에 송문수는 직원에게 물과 맥주를 부탁했다.지금 술을 마시면 좀 있다 돌아갈 때 운전은 또 하지수의 몫이 되겠지만 오랜만에 신난 송문수를 위해 하지수는 한 번 더 참기로 했다.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만 계속 참는 건 좋은 연애가 아니라고들 하는데 하지수는 송문수가 기뻐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하지수는 정말 상대방에게 아주 관대한 사람이었다.밥을 먹으면서도 그녀는 간간이 소이연과 예수진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어디에서 데이트하는지 많이 궁금하길래 솔직하게 알려주니 예수진이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진짜 송문수답다, 연애 고자잖아 이건.][지수 씨, 문수 씨한테 거기 별로라고 얘기 못 했어요?][안 했어요, 뭐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아직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나도 문수 씨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보고 싶어요.][알아가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건 아니죠. 지수 씨, 부부 사이에는 그렇게 내외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사인데 불편한 게 있으면 용기 내서 말해야죠.]소이연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본 하지수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친구들 말고는 다른 사람 데려간 적도 없는 곳이야. 네 기억에 남을 만한 맛집이니까 기대해.”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또 괜히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영화는 별로여도 식당은 좋은 데로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차가 부둣가에 도착하고 송문수와 함께 차에서 내린 하지수는 울퉁불퉁한 길을 하이힐을 신은 상태로 걷자니 발이 아파왔지만 얼마나 대단한 맛집일까 싶어 애써 참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그런데 식당은커녕 눈에 보이는 건 보트에 타라고 저를 향해 손짓하는 송문수뿐이어서 하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바다에서 먹는 거야?”역시나 기대를 하지 말아야 했었던 걸까.송문수는 하지수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그녀를 잡아끌며 보트에 태웠다.곧이어 출발한 보트는 물살 때문에 심하게 휘청였는데 워낙 물을 무서워하던 하지수는 난간을 꽉 붙잡고 몰아치는 파도를 버텨내고 있었다.“와아!”송문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아주 신나 보였지만 하지수는 도저히 소리를 지를 정신이 아니었다.밀려오는 파도에 온몸이 다 젖어버린 그녀는 번진 화장부터 열심히 세팅한 머리까지 지금 걱정투성이였다.데이트한다고 치마까지 꺼내입었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제 남자 친구 때문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게다가 생리까지 하고 있는데 여기는 화장실도 하나 없었다.도통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데이트코스로 선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라도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라고 본인을 위로하며 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하지수가 기대한 서프라이즈는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의 놀라움은 끊이지 않았다.파도를 헤치며 달리던 보트는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멈춰 섰는데 해변가에 세워진 집으로 가려면 맨발로 거기를 걸어가야 했기에 딱딱한 모래 때문에 하지수는 안 그래도 아픈 발이 더 아파왔다.그래도 아무 말 없이 송문수를 따라갔더니 그 힘든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곳이 바로 시골 식당이었다.두 사람은 허름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