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처음 같이 자는 것도 아니었기에 두 번째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에 벽이 생긴 것 같았다. 소이연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루카스도 잠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함께 잠을 자지 말아야 했다. 소이연이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의 큰 손이 그녀의 몸을 잡았다. 이 남자의 팔의 힘은 정말 놀라웠다. 마치 코알라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녀를 잡았다. 그의 품에 안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그녀의 머리 위에서 루카스의 위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자!” “..." 이 사람, 부드러움이 뭔지 모르는 거지? "아직 침대가 따뜻하지 않아. 그러니까 내 희생을 거절하지 말라고. 안 그러면 믿거나 말거나 널 때릴 거야!” 루카스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소이연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츤데레치곤 너무 야만적인 거 아닐까?도대체 이 남자의 여자친구가 어떻게 저 성질을 참고 있는 것 인지 모르겠다. 소이연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제임스의 말이 맞다. 지금 이 모든 행동은 단지 병을 치료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도덕적 가치로 해석할 필요가 없었다. 소이연은 멍하니 잠이 들었다. 루카스는 품에 안겨 잠든 여인을 바라보며 자신이 소이연에 속은 게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도대체 이 여자한테 무슨 수면장애가 있다는 것일까? 오히려 수면장애는 그에게 있는 것 같았다. 그녀와 잠을 자는 동안 그는 하룻밤도 잘 수 없었다. 소이연이 그를 속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자신의 희생이 단지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절대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루카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설마 그녀를 때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서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겠지? ...... 다음날. 소이연은 잠에서 깨었는데, 허리가 뻐근했다. 그녀는 몸을 약간 움직이고서야 자신이 루카스에
루카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의 부드럽고 푹신한 장면은 그의 온몸을 모두 편안하게 했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항상 하늘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 갑자기 귓가에 비명소리 들려서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멍하니 눈을 뜨며 가까이 있는 소이연을 보았다. 소이연은 얼굴이 약간 붉어진 채 불쾌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보고 있었다. 루카스도 어리둥절해하며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기분 좋은 꿈을 방해받아 기분이 상했다. "소이연, 넌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아? 젠장, 내가 만약 너보다 일찍 일어났다면 잠들어 있는 너를 깨울까 봐 조심했을 거야! 그런데 나한테 이렇게 하는 거야? 넌 양심이라는 게 있기는 하니?” 루카스가 화를 내며 물었다. 소이연도 사실 이 사람이 잠에서 깨면 얼마나 화를 낼지 충분히 예상했기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나는 네가 무섭고 그때가 너무 후회돼.” "네가 무슨 후회를 해! 어, 그래. 널 위해 침대를 따뜻하게 해 준 게 후회스러워! 불면증이라 더니 겨울잠 자는 곰처럼, 코를 골며 죽은 듯 잘만 자더라. 난 너 때문에 시끄러워서 밤새 잠도 못 자고 이제 겨우 잠들었다고! 겨우 잠들었는데, 네가 나를 깨웠는데 내가 화를 안 내게 생겼어? 소이연!” 마지만 세 글자를 말하며 루카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는 그녀를 마구 때리고 싶었다. 소이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행동으로 표현했다. 그 순간, 루카스가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소이연, 지금 나를 추행한 거야?!" 루카스는 목소리가 커졌다. 마치 소이연이 그를 이용했다는 듯 소리 질렀다. 루카스의 외침에 소이연은 마치 고막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한마디 한마디 그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계속 나한테 이런 짓을 하고 있었는데, 너 스스로 못 느꼈어?!” 루카스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그리고 곧 얼굴이 새빨개졌다. "정신 차렸으면 좀 놔줄래?
됐다, 오해했어도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이렇게 힘들게 루카스를 불렀는데 헛수고하고 싶지 않았다. ...... 루카스는 정오까지 잤다. 소이연이 떠난 후 그는 사실 잠들지 않았다. 어젯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해 너무 피곤했는데 잠을 잘 수 없었기에 불면증이 정말 힘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이연은 밤낮으로 잠을 못 잔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견뎌낸 거지?! 루카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씻고 옷차림 단정히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서 육민이 낮은 소리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었다. 루카스가 내려가자 육민은 얼른 피아노 앞을 떠나 루카스에게 걸어갔다. “아빠, 일어나셨어요?” “루카스라고 불러.” "아… 알겠어요." 육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곧 자신과 그의 관계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곧 유전자 검사센터에 갈 생각이다. 그리고 반드시 결과를 자신의 아빠와 엄마에게 알려 자신이 아빠를 잘못 알아본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엄마는?" 루카스가 무심한 말투로 물었는데, 왠지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엄마는 회사에 일이 있으셔서 잠깐 나가셨어요." 육민이 대답했다. "엄마는 오늘 하루 종일 바쁠 거라고 점심 먹을 때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어요.” "그래?” 루카스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신경 안 쓰려할수록 더 많이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이 여자는 사람을 이용해 먹고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일부러 그녀를 위해 돌아왔고, 오늘 떠날 줄 뻔히 알면서 인사도 안 하고 가버렸다? "아빠, 엄마 보고 싶어요?" 육민은 루카스의 표정을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농담하는 거지?” 루카스는 경멸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가 보고 싶으면 전화해도 돼요. 내가 엄마한테 돌아오라고 하면 하던일을 챙겨서 돌아올 거예요.” "배고파.” 루카스가 말을 돌리며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반대하지 않았다.그가 반대하지
소이연은 차를 몰고 돌아가는 길에 육민이 왜 갑자기 안 하던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마 그녀와 루카스를 같이 있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육민은 루카스와 육현경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유를 깨달은 그녀는 육민의 흥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육민은 그녀의 삶의 이유였다. 그래서 육민이 기뻐하고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한 그녀는 육민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별장으로 돌아왔다. 육민은 이미 루카스와 밥을 먹고 있었다. 육민은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재빨리 그녀를 불렀다. "엄마, 루카스가 배고프다고 해서 먼저 먹고 있었어요.” "응, 괜찮아." 소이연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고 식당으로 향했다. 루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엄마, 방금 루카스가 점심 먹고 서울로 간다고 말했어요." 육민은 서운해하며 말했다. "응, 알고 있어." 소이연은 육민에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려 루카스에게 말했다. "이따가 문씨 아저씨한테 너를 공항까지 태워다 주라고 했어.” "고마워.” 루카스는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육민은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며 한숨을 쉬었다. 육민은 겨우 열 살밖에 안 되었지만, 언젠가 부모님 덕분에 연애 전문가가 될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루카스는 방으로 돌아가 짐을 싸서 떠날 준비를 했다.소이연은 사실 급한 업무도 없었고 루카스가 떠난다고 생각해니 회사에 다시 갈 생각이 없어졌다. 그녀는 방에 들어가 좀 누워있으려고 위층으로 올라가자마자 루카스가 걸어 나오는 걸 보았다. 그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 시선을 피했는지 모르겠다. 왠지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잘 가." 소이연은 무심한 듯 가볍게 말했다. 루카스도 소이연을 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스쳐가는 순간 소이연은 갑자기 발이 꼬였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곤두박질치려고 했
이마에 멍이 든 것 같았다. 루카스는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켜 세울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엄마!" 그러자 뒤에서 육민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이연이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아래층에서 뛰어온 것 같았다. 문씨 아저씨도 육민의 뒤를 따라 올라오며 소이연이 바닥에 넘어져 코피가 줄줄 흐르는 것을 보고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연 씨! 아이고, 어떻게 해요? 빨리, 빨리 주치의 불러올게요.” "엄마, 엄마 아파요? 피가 나요......" 육민은 바닥에 주저앉아 걱정하고 있었다. 루카스는 젊은 사람이 이렇게 넘어져도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돌아서서 떠났다. 소이연은 루카스의 싸늘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소이연은 평생, 평생 이 악랄한 남자를 다시 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앞으로, 절대로, 죽어도 왕래하지 않을 것이다! ...... 루카스가 장안을 떠난 후 소이연은 그와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걸을 것이고 절대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떠난 후 소이연은 매일 밤 루카스가 사용했던 베개와 이불을 덮고 잤다. 정말 오랜만에 맡는 향기였다. 육현경과의 냄새와 비슷한 루카스의 냄새를 맡고 그녀는 잠을 잘 수 있었다. 숙면을 취하지는 못했지만 매일 밤 몇 시간씩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것은 큰 축복이었다. 하지만 소이연은 루카스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감사는 정말 그가 떠나던 날 그녀의 몸을 무자비하게 놓아버린 순간 바로 없어져 버렸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 멍이 든 이마로 회사에 간 것을 생각하면 루카스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 있었다. 루카스가 떠난 다음 날, 소이연은 집에서 택배를 받았다. 육민에게서 온 택배였다. 평소 육민은 물건을 구입할 때도, 인터넷 쇼핑을 할 때도 다 그녀의 이름으로 구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육민의 이름으로 택배가 와서 소이연은 조금 놀랐다. 그래서 소이연은 택배
오후가 되자, 육민은 학교에서 돌아왔고,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문씨 아저씨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오늘 저한테 온 택배가 있나요?” "택배요?" 문씨 아저씨는 의아해했다. "네 방 책상 위에 있어. 마침 엄마가 집에 있을 때 와서 네 방에 가져다 놨어." 소이연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엄마!" 육민이 예의 바르게 말하며 재빨리 위층으로 뛰어올랐다. "아기 도련님, 조심해요.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해요. 엄마 이마에 있는 멍도 아직 안 풀렸어요!" 문씨 아저씨는 아래층에서 큰소리로 육민에게 주의를 주었다. 소이연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렸다. 이마에 생긴 큼지막한 멍 때문에 그녀는 출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루카스가 다시 생각났고 오전에 봤던 그 친자확인서가 생각났다. 소이연의 감정은 순간순간 정말 끊임없이 변했다. 육민은 책상 위의 택배를 신이 나서 쳐다보았다. 원래 작은 것 하나까지 신경을 많이 쓰는 예민한 육민이었지만 너무 신이 나서 택배가 개봉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재빨리 봉투를 집어 들고 그 안의 친자확인서를 꺼내며 흥분한 얼굴로 결과지를 보았다. 결과지를 본 육민은 마치 돌기둥처럼 오랫동안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소이연은 육민이 걱정되어 그의 방 문 앞으로 왔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육민을 가만히 지켜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키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는 기적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지 않아.” 육민은 소이연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분명 아빠인데, 어떻게 아닐 수가 있지? 하지만 친자확인 결과지에는 루카스가 육민의 친부가 아닐 가능성이 99.99%라고 적혀있었다. 사실 소이연도 그 결과지를 봤을 때 가슴이 아팠다. 루카스가 육현경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결과지를 보는 순간 육현경이 한 번 더 죽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결과지는 그녀의 눈앞에서 멀어져
육민이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루카스는 정말 아빠가 아니라는 소리인가!그도 과학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검사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샘플 오류밖에 없습니다.” "뭐가 오류라고요?" 육민은 순간 긴장했다. "저희에게 보내신 검사 샘플이, 의뢰인께서 검사하고 싶은 두 사람의 샘플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예를 들어, 의뢰인과 A의 샘플을 검사하려고 했는데, 의뢰인과 B의 샘플을 제출했다면 검사 오류가 날 수 있어요. 이전에 이런 사 오류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그쪽에서는 설명했다. "그 외에는 아직까지 검사 오류가 있었던 사례는 없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육민은 전화를 끊고 자신이 보낸 머리카락을 생각했다. 그는 차라리 자신이 머리카락을 잘못 보냈다고 믿고 싶지, 루카스가 자신의 아빠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맞다! 육민은 무엇인가 떠올랐다. 루카스의 머리카락을 들고 가다가 문씨 할아버지와 부딪혔던 기억이 났다. 그때, 문씨 할아버지의 몸에서 머리카락을 찾았는데 그 머리카락이 루카스의 것이 아니면 문씨 할아버지의 것이었을 수 있다. 이것이 유일하게 남은 가능성이다! 생각을 마친 육민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 소이연을 찾았다. 소이연은 벌써 감정을 추스른 육민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역시 어린이의 회복력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강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걱정했다. 육민은 물었다. “엄마, 루카스가 또 올까요?"소이연은 미간을 좁혔다. 육민은 목표를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안 올 거야, 엄마랑도 우연히 만난 사이라 앞으로는 만날 기회가 없을 거야. 민민, 엄마도 네 아빠가 살아 계시기를 바라지만......” "엄마, 나 정말 못 믿어요?" 육민이 약간 감정이 격해진 듯 말했다.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했잖아.” "실수가 있었던 것 같아요.” "민민." 소이연은 굳은 표정으
소이연의 마음은 또 한 번 아팠다.그녀는 육민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약속했다. "엄마가 널 잘 돌봐줄게.” "저도 엄마를 잘 보살펴 줄게요!" 육민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소이연과 육민은 암묵적으로 약속이라도 한 듯 루카스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보름이 지났다. 천우진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에 언제 갈 것인지 물었다. 지난번에 그녀는 외할아버지에게 이번 달에 얼마동안 서울에 지내겠다고 약속했다. 역시 약속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 그녀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약속을 어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육민도 겨울방학중이라, 천우진은 특히 육민을 데리고 오라고 강조했다. 소이연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는 했지만, 다행히 육민이 며칠 동안 겨울 캠프에 참가해서 일주일 후에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약속을 다음 주로 미룰 수 있었다. 소이연은 오늘 장안 방송국에 일정이 있었다. 그녀의 회사는 '《배우님 자리에 앉아주세요》 '의 의상을 협찬으로 제공했기에 소이연은 프로그램 녹화가 진행 중인 지금, 그들의 광고 시간과 장소를 다시 결정하기로 결심했다. 이전에 협의된 내용과 약간의 차이가 있고, 회사의 고위 경영진이 이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그녀가 직접 나서야 했다. 그녀는 승용차를 타고 방송국 입구에 도착했다. 방송국 사람들은 이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소이연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앞으로 나와 그녀를 방송국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방송국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소이연은 익숙한 사람을 본 듯했다. 그녀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다시 보니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소 이사님, 왜 그러세요?" 방송국 고위 경영진이 재빨리 물었다. "방금 지인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잘못 보았나 봐요." 소이연이 담담하게 말했고, 고위 경영진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 소이연은 여전히 미심쩍어 하며 물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어디로 가는 건가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
예수진은 빠르게 소이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연 언니, 송문수 왔어요.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방금 안으로 들어갔어요!][내가 진짜 올 거라고 했잖아요.][내 매력이 그 정도일 줄 몰랐죠.]역시나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예수진에 어이없다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난 소이연은 송문수의 인영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하도 큰 키 덕분에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우뚝 솟아있는 송문수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문수야.”마찬가지로 그를 알아본 육현경이 인사를 건네자 송문수는 빠르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언제 왔어?”“어제 오후에.”“왔는데 왜 말도 안 해? 사업 잘된다고 이젠 우리도 모른 척하는 거야?”“아무리 잘 되봤자 내가 현경이만큼 돈이 많진 않아.”볼멘소리를 하는 하도경에 맞는 말로 반박하자 하도경도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언제 가?”“모레 비행기야, 내일 집 가서 부모님만 뵙고 가려고.”“그래서 우리 만날 시간은 없다 이거지?”“이번엔 시간이 좀 빠듯해, 거기 일도 많고. 오늘 보지 뭐, 술 제대로 마시자 한번.”“너 진짜 많이 변했어 송문수, 이렇게 진지하진 말아 줄래?”적응되지 않는 송문수의 말투에 하도경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그럼 어쩌라고.”“나는...”판을 깔아주니 말하기 어려웠는지 하도경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술 마셔 그냥.”“그래.”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둘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파티의 주인공이 자리하기도 전에 술부터 마시기 시작했다.육현경이 그런 그들을 말리려 할 때 송문수의 옆에 문득 한 여자가 앉았다.그에 술잔을 들고 있던 송문수도 잠시 멈칫했다.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며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송문수를 한번 보던 소이연은 하지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지수 씨, 왔어요?”“네.”“혼자예요?”“네.”혼자라는 말에 송문수의 손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혼자니까 더 조심해요 다닐 때.”“그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송문수는 마침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캐나다에 있는 회사도 이제 정상적으로 흘러가자 귀국한 거였지만 그도 그냥 예수진 아들의 백일을 축하하러 온 것뿐이었다.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송문수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배가 부른 채로 있던 예수진이 벌써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백일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오랜만에 온 장안시였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귀국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저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오랫동안 비워둔 집이라 그런지 온통 먼지투성이여서 일단 도우미부터 부른 송문수는 아주머니가 정리를 마친 다음에야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떠나기 전만 해도 이곳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데.이제는 그 모든 게 다시는 들춰선 안 될 과거가 돼버린 것 같았다.해외에 있던 시간 동안 송문수는 부단히 하지수를 잊으려 애쓰고 있었다.물론 정말 잊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하지만 하지수와 송문수가 반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할 때도 같은 집에 살던 하지수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그저 우연히 한 번, 그녀의 뒷모습이 화면에 스친 게 전부였다.몸을 뒤척이던 송문수는 내일의 백일잔치에 대해 생각했다.내일 가면 친구들이 무조건 술을 권할 텐데,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않은 탓에 송문수는 지금 자신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그래도 푹 쉬면 조금은 낫겠지 싶어 그대로 잠을 청한 송문수는 이튿날 아침이 돼서야 눈을 떴다.언제부턴지 부모님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린 탓에 송문수는 이젠 밤을 새우는 게 오히려 힘겨웠다.그렇게 여유롭게 준비를 마친 그는 한 번 더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집을 나섰다.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딱 적당한 시각에 집을 나선 그는 문득 옛날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어쩜 그리 특이하게 살아왔는지, 참으로 유치했던 것 같다.해외에서 반년 동안 혼자 살아서
“보름 넘게 준비한 건데 서두르는 건 아니지.”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을 떠나는 일인데도 송문수는 참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갔다가 언제 와?”“그건 몰라. 상황 봐서 잘 되면 빨리 오는 거고 잘 안되면 못 오는 거지.”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송문수에 그의 결심이 바뀔 리 없다는 걸 알아챈 송승우는 그만 입을 다물고 하지수의 손을 맞잡았다.무의식중에 눈물을 흘리던 하지수는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빠르게 표정을 감췄다.“가자.”그리고는 송승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그녀는 송문수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마지막 작별인사도 전하지 않은 채 그렇게 헤어졌다.하지수의 몸에 감히 시선을 두지 못하던 송문수도 그녀가 송승우와 함께 차에 타서야 차창 너머로 비치는 그 뒷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그는 한참 동안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사실 캐나다도 송문수가 직접 갈 필요는 없었다.회사에 유능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 아무에게나 CEO라는 직급을 쥐어 보내면 될 일이었지만 송문수는 본인이 가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여기서 다정하게 지내는 둘을 보고 있는 게 더 가슴 아플 것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어서.손 하나 잡았다고 이렇게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데 이런 모습을 계속 보는 건 정말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는 이곳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송문수는 캐나다에 도착해서야 육현경과 소이연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출국 소식을 알렸다.그리고 언제 돌아갈지는 모른다는 말까지 남기자 다들 깜짝 놀랐지만 별말은 하지 않고 몸 잘 챙기라는 소리들뿐이었다.그리고 시간 되면 놀러 오라는 얘기들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는데 역시나 예수진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그녀는 굳이 송문수에게 따로 문자까지 보내며 물었다.[너 진짜 어쩌려고 그래? 이렇게 가겠다고? 다 버리고? 송문수, 너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해졌니? 내가 너였으면 당장이라도 송승우랑 싸웠어!][어차피 못 이
둘의 이혼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고 두 사람은 각각 손에 이혼 증명서를 들고 법원에서 나왔다.“이제 끝난 거지?”“네.”하지수에게 건네받은 이혼 증명서를 들춰보던 송승우는 안에 적힌 내용을 다 확인한 후에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혹시라도 돌발상황이 생길까 봐 따라온 건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의 이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송문수는 하지수를 보고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절차대로 서류만 제출했다.아무 감정도 없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송승우는 감정이란 게 저렇게 쉽게 사라질 수도 있나 싶었다.둘 사이에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혼만 하면 그만이었기에 송승우는 다른 건 묻지 않았다.이제 두 사람이 이혼했으니 송승우는 저와 하지수도 떳떳해진 것 같았다.그리고 그는 송문수만 연락을 끊는다면 하지수를 다시 자기 여자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그래서 법원에서 나오자마자 송승우가 먼저 송문수를 불러세웠다.“시간 되면 집에 와서 밥이라도 먹어. 엄마 아빠가 전화해도 안 오던데, 많이 바쁜 거야?”“응.”“바쁘다고 가족들도 다 내팽개치는 건 아니지. 워라벨도 신경 써야지.”어른스러운 말투로 나무라듯 말하는 송승우를 송문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서울에서 일할 때 1년이 넘도록 안 오던 게 누군데.부모님이 굳이 송승우를 부르지 않은 건 그의 일에 방해가 될까 봐서였다.무튼 송승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다른 사람들의 일은 언제든지 시간을 뺄 수 있는 여유 적적한 일이라 여기는 사람.“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주면 도우미들 시켜서 너 좋아하는 거...”“나 해외에 잠깐 나가봐야 해.”“뭐라고?”송문수가 송승우의 지루한 말을 끊으며 대답하자 송승우는 당황하며 물었다.“엄마 아빠가 말 안 했어?”“무슨 말이야 그게?”금시초문이었던 송승우는 하지수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그녀 역시 처음 듣는 말인 것 같았다.“우리 회사 전기차 해외 매출이 자꾸 오르니까 전
그런데 그때, 협탁에 놓인 물과 알약 한 알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그 옆에 나란히 놓여있는 쪽지에는 “단기 피임약”이라는 말도 적혀있었다.그 약과 물을 번갈아 보던 하지수는 피가 차게 식는다는 게 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너무나도 명확한 송문수의 의사에 하지수는 가슴이 아려왔다.성인 남녀 둘이 충동적으로 서로를 원해서 가졌던 하룻밤이니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고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걸 이렇게 약으로 알려주다니.알약을 집어 든 하지수는 참으로 처량하게 웃어 보였다....그렇게 점심이 다돼서야 하지수는 별장으로 돌아갔다.핸드폰 배터리가 다 된 탓에 그녀는 송승우가 몇 통의 전화를 했는지도 모른 채 별장 안으로 들어섰는데 송승우는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얼굴로 이제야 들어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와 달리 허영지와 송기명은 살갑게 하지수를 걱정해주었다.“지수야, 어제 어디 갔었어? 전화는 왜 꺼놓고. 수진이한테 전화했는데 네가 문수랑 같이 갔다고 해서 문수한테 연락해보니까 문수는 또 너랑 같이 있는 거 아니라고 그러던데.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어디 다친 데는 없지?”“없어요.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셔서 문수 씨 집에서 잔 것뿐이에요.”송문수 집에서 잤다는 하지수의 말에 송승우는 더는 못 참겠는지 언성을 높였다.“하지수, 너 나랑 한 약속 잊었어? 네가 어떻게 거기서 잠을 자!”“내가 무슨 약속을 했는데요?”송승우는 아무리 화가 났어도 저 질문에만큼은 답을 할 수 없었다.가스라이팅으로 어렵게 얻어낸 기회라는 걸 다른 사람한테는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나 문수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 그러니까 아직은 뭘 하든 합법적이란 소리죠.”“하지만...”“이혼하고 나서 얘기해요. 나 피곤해서 먼저 올라 가볼 게요.”몸도 마음도 다 힘들었던 하지수는 송승우를 화를 살필 겨를이 없었기에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렇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목 끝까지 끌
“너 내일 후회할 거야.”이런 하지수를 앞에 두고 참는 건 송문수에게도 곤욕이었다.온몸이 떨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게 더 힘들었다.“후회 안 해.”“딱 하나 후회되는 게 있다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한번 밖에 못 해봤다는 거야. 그리고 그 한 번도 진짜 별로였어.”“뭐?”아까부터 한번을 강조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그 한 번도 다 너한테 맞춘 거였잖아.”고작 한 번이라니, 그럴 리가.그런데 또 곱씹어 보니 둘이 함께 잔 건 한 번뿐인 것 같긴 했다.하지만 송승우와 그렇게 오래도록 사귀면서 송승우 방까지 들락날락하던 게 하지수인데 그런 그녀의 인생에서 저와 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이번엔 내가 움직일 거야.”하지수는 잔뜩 풀린 눈으로 당차게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나 또 밀어내면 그땐 진짜 물어버릴 거야.”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닥에 눕힌 뒤 그 위에 올라탔다.“반항하지 마.”곧바로 하지수의 입술이 자신에게 다가왔지만 송문수는 정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이 상황에 그녀를 밀어내면 하지수가 정말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가슴 아픈 일이었기에 송문수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그렇게 내일 그녀의 원망도 다 받아낼 심산으로 송문수는 하지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이 밝아오자 하지수는 몸을 뒤척였다.온몸에 차에 깔리기라도 한 듯 무거웠고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던 그녀는 힘겹게 눈부터 떠보았다.익숙하고도 낯선 이곳은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송문수의 집이었다.그리고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의 기억 조각들이 하나하나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그것들이 마침내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대담한 모습을 그녀는 차마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술이 깬 지금에 와서는 절대 못 할 일이
송문수는 자신마저도 취해버린 것 같았다.그래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입술을 뗀 하지수가 오랜만에 얌전해진 송문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자신의 키스에 몸을 맡기며 가만히 있기만 하는 그에 하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문수 씨, 내가 하는 키스가 그렇게 별로야?”별로라니, 흥분해서 자칫하면 이성이 끊길뻔했는데.여기서 입을 열면 더 이상은 참지 못할 것 같아 송문수는 이번에도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어디가 별론지 얘기해주면 내가 고칠게, 응?”송문수는 아까부터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부단히도 움직이는 그의 울대가 그의 초조함을 대변하고 있었다.하지수 앞에서만큼은 속절없이 무너지는 송문수라 하지수가 한마디만 더 하면 그는 정말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지수...”그래서 그만하라고 말하려 하는데 하지수가 본인의 손가락을 송문수의 입에 가져다 댔다.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진 지 아는 송문수는 지금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주며 간신히 참고 있었다.이대로 가면 정말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데, 그걸 다 알면서도 그는 하지수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그런데 하지수는 점점 과감해지는 건지 이젠 하다 하다 손까지 집어넣어 송문수의 몸 곳곳을 어루만지고 있었다.그녀의 손길이 지나간 곳이면 그게 어디든 불에 덴 듯 뜨거워 났다.송문수 역시 술을 마신 몸이라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그래서 그는 자신이 느슨해져서 이 상황을 즐기는 일이 없게 온몸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하지 마 하지수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더 깊은 곳까지 손을 움직여왔다.“아!”그러다 결국 송문수에게 손이 잡혀버린 그녀는 울망울망한 눈으로 송문수를 올려다봤다.자칫하면 그곳까지 갈 수도 있었는데 뭐가 아쉬워서 저런 표정을 짓는지.송문수는 심호흡으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그만해 하지수.”“왜?”“별장에 데려다줄게.”저 순진무구한 눈을 보고 있으면 송문수도 빨려 들어갈
술에 취한 하지수의 고집을 당해낼 수 없었던 송문수는 결국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밤늦은 시간에 별장에 들어가면 다른 가족들을 깨울 수도 있으니 집에서 잠만 재운다는 핑계를 대가며 말이다.송문수가 하지수를 침대에 눕히고 자리를 뜨려 하자 하지수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가지 마.”손끝에서 느껴지는 하지수의 온기에 송문수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하지수, 잘 봐. 나 송문수야.”“알아, 네가 송문수인 거. 나 버린 무책임한 놈이잖아 너!”풀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말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술을 마신 하지수는 송문수가 감히 컨트롤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왜 날 송승우한테 넘긴 거야? 내가 물건이야? 네가 뭔데 날 송승우한테 준다 만다냐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지수는 침대에 올라 선 채 송문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서 있지 말고 일단 앉아, 그러다가 넘어져.”“안 넘어져.”하지수는 송문수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계속 질문만 퍼부었다.“왜 날 밀어내는 건데! 내가 어디가 별로야? 몸매가 별로야 아니면 내가 못생겼어? 뭘 그렇게 일일이 다 따지고 들어? 넌 보는 눈이 그렇게 높아?”“일단 누워.”“싫어.”송문수가 그녀를 잡아주려고 손을 뻗으면 하지수는 곧장 몸을 돌려 피하곤 했다.그렇게 휘청대는 하지수를 보는 게 송문수는 조마조마하기만 했다.“내 말에 대답부터 해. 왜 날 싫어하는 거야?”“난 너 싫어한다고 안 했어.”그의 대답에 송문수를 향해 손가락질하던 하지수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넌 그냥 내가 싫은 거잖아! 나 말고 밖에 있는 그 못된 여자들을 더 좋아하는 거잖아. 나도 그 여자들처럼 변하면 나 좋아해 줄 거야?”“그런 거 아니야.”“변명하지마! 넌 그냥 몸매 좋고 능숙한 그런 여자들만 좋아하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혼자 화를 내는 하지수가 송문수는 어이없기만 했다.술을 마신 하지수는 아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