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내가 지금 왜 왔겠어?”“그래서 내가 좋으면서도 불안한 거지.” 루카스는 직설적으로 말했다.그는 정말 소이연에게 희망을 품지 않았고, 그냥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셈이었다.그렇기에 소이연이 나타난 그 순간, 그는 정말 기쁘면서도 불안한 감정이 공존했다.그가 아는 소이연은 비웃기만 할 뿐,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설마 이 여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겠지?!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그를 좋아하고 있는......“너 무슨 생각 해?” 소이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갑자기 루카스 이 자식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아무것도.” 루카스는 자신의 생각을 접어두고 말했다. “하룻밤만 재워줘. 내일 내 짐 찾으면 갈게.”“그럼 만약 계속 못 찾으면?”“나 내일 대사관 가서 여권 발급받을 거야. 너한테 안 매달려!” 루카스는 고분고분함이 2초도 채가지 않고 다시 폭발했다.“딱 하룻밤만이야.” 소이연은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걱정 마. 여권만 받으면 나한테 제발 있어달라고 해도 갈 거야. 너한테 관심 없어.”“그러는 게 좋을 거야.” 소이연도 루카스에게 좋게 대할 수가 없었다.심지어 그녀는 자신이 왜 이 사람을 도와줬는지 알고 싶었다.그냥 착한 일 한 번 한다고 생각해야지.“조수석으로 가.”루카스는 조수석에 앉았고, 소이연은 운전석에 앉았다.소이연이 차에 막 타서 출발하려던 그때,“아빠?”등 뒤에서 갑자기 육민의 흥분해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의 목소리는 확실치 않지만 기대를 가득 안고 있는 것 같았다.소이연은 순간 긴장했다.육민이 루카스를 육현경이라고 생각한 것이다.육민이 잘못 본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녀도 가끔 헷갈릴 때가 있었다.게다가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는 얼굴이 잘 안 보이니, 더 닮아 보였다.“아빠.” 육민은 그를 한 번 더 불렀다.루카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스는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마 뒷자리에 누군가
엄마는 마치 아빠가 진짜 아빠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육민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소이연은 차를 몰고 저택으로 돌아갔다.밤새 들볶이다가 돌아가니 벌써 밤 11시가 지나 있었다.소이연은 그들과 함께 온 루카스에게는 대꾸도 하지 않고, 걸어가며 육민에게 말했다.“민이는 지금 한창 자랄 때니까, 잠을 충분히 자야 해. 얼른 씻고 가서 자.자기 전에 따뜻한 우유 마시는 거 잊지 말고. 엄마가 문씨 아저씨한테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할게.”“네.” 육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몰래 루카스를 보고 있었다.아빠 얼굴이 어떻게 저리 변했지?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내일은 주말이라서 수업이 없고, 오전 10시에 승마 수업이 있네.너무 일찍 일어나서 숙제하지 말고, 오늘은 늦게 자니까 내일도 조금 늦게 일어나.엄마가 시간 맞춰서 문씨 아저씨한테 깨워달라고 할게.”“네.”“내일 아침에는 먹고 싶은 거 있어? 엄마가 아저씨한테 말해둘게, 아저씨 말로는 요즘 입맛이 없다며.” 소이연이 계속 말했다.“먹고 싶은 거 없어요. 다 괜찮아요.” 육민이 대답했다.“맞다.” 육민의 문 앞까지 가서 소이연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머리 감고 꼭 다 말리고 자야 해. 머리가 젖어있으면 나중에 커서도 머리 아파.”“네.” 육민은 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방에 들어갔다.그 순간, 또 머리를 쏙 내밀었다.시선은 루카스를 향해있었다.루카스도 당연히 육민의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육민이 먼저 그를 보며 웃었는데 루카스는 눈썹을 찌푸렸다.소이연은 그대로 육민의 시선을 가로막았다.육민은 정신을 차리고 소이연을 보았다.“빨리 안 자고 뭐해.”“엄마 안녕히 주무세요.” 육민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저 사람 아빠 아니야.” 소이연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아저씨 안녕히 주무세요.” 육민이 말을 고쳤
소이연은 마음이 아팠다.그녀와 육현경은 아직 부부도 아니었다.정말 관계를 확정 지으려던 그 시점에 육현경이 죽어 버리고 말았다. 루카스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에 소이연이 이렇게 동요할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오랜 친구”는 소이연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했다.그리고 많이 사랑했다.그러니 마음속에 말 못 할 뭔가가 남아 있었다. 마치 뭔가...... 느낌도 아닌 것만 같았다.당연히 그 역시 정말 질투를 한다거나 그럴 일은 아니다.하지만 허영심이 끼어들었다.그래도 지금까지 어떤 여자라도 그에게 관심이 없는 여자는 없었다.소이연은 마치 이 세상에는 정말 없는 것 같았다.속으로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나 잘게.” 루카스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소이연도 뒤돌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가슴 아픈 게 계속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육현경에게 정말 너무 많은 아쉬움이 남아서 일 것이다.그녀가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정말 너무너무 많이.밤이 깊어지고 세상이 고요해졌다.소이연은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역시 또 잠이 오지 않았다.역시 기대를 너무 많이 하면 안 된다.어젯밤에 병원에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병세가 나아진 것이 아니라, 단지 익숙한 품에 안겨서 일 것이다.이제는 그 품을 떠났으니, 그녀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잠에 들 수 없었다.불면증은 3년 동안 정말 매일매일 그녀를 괴롭혔다.의사는 이렇게 계속 지내다 보면,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하지만 정신과 진료를 3년 동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신과에서 억지로 잠깐 자는 것 외에 애초에 스르륵 잠들 수 없었다.갑자기 충동적인 마음이 일었다.루카스의 방으로 가 정말 그를 안고 있으면 잘 잠들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시도해 보고자 하는 충동이 일었다.하지만 이성이 안 된다고 했다.만약 지금 그녀가 루카스의 방문을 열면, 후폭풍은 상상도
그녀는 조금씩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몸은 마치 무서운 듯, 아니면 누군가에게 버려진 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루카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는데,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스스로도 왜 짜증이 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냥 왠지 모르게 미칠 것만 같았다.그는 여태껏 한 여자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크게 요동친 적이 없었다.분명 손을 뻗어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녀의 떨리는 몸을 받치고 있으니 그냥 참기로 했다.“소이연, 오늘 밤은 그냥...... 빚 갚는 거라고 생각할게.” 루카스가 소이연에게 말했다.소이연은 애초에 들리지 않았다.“네가 받아들이는 거라고 생각할게.” 루카스는 다시 한번 말했다.자신을 설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고는 루카스는 다시 똑바로 누워서 소이연을 품에 안았다.소이연을 안은 순간, 루카스는 소이연의 몸이 더 이상 떨리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소이연은 머리를 그의 가슴에 파묻고는 호흡도 일정해졌다.루카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소이연 이 여자가 마르긴 말랐어도, 나와야 할 곳은 나와있었다.......이튿날 아침.루카스가 눈을 떴는데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그는 고개를 숙여 품에 꼭 안겨있는 소이연을 보았다.어젯밤 소이연은 푹 잤지만, 그는 거의 밤을 새웠다.잠이 든 소이연은 얌전히 자지 않았다. 지난번 병원에서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소이연이 그에게 유별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정말 그녀가 자신을 꼬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는 소이연을 밀어내고 일어나려 했다.소이연은 마치 그가 자리를 뜨려는 것을 알아챈 듯, 그를 더 세게 안고 얼굴을 그의 가슴에 파묻었다.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죽을래?루카스는 속으로 욕을 했다.계속 이렇게 가다간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겁이 났다.그는 이를 악물고 소이연을 세게 떼어냈다.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루카스는 이 틈을 타 침대에서 내려와 가쁜 숨을 쉬었다.그는 성큼성큼 욕실로 가 문을 닫고 찬물로
“믿어요.” 육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엄마가 얼마나 아빠를 사랑하는지 알고, 엄마가 최근 몇 년 동안 아빠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기에 이제 아빠가 돌아왔으니, 엄마도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다. “너...... 내가 엄마 뺐었다고 생각 안 해?” 루카스가 물었다.그는 단번에 이 아이와 엄마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 지 알 수 있었다.특히 이런 한 부모 가정에서 남자아이는 자신의 엄마에 대한 소유욕이 있는데, 얘는 정말 괜찮은 건가?“아빠랑 엄마가 같이 있는 건, 불변의 법칙이죠. 나중에 제가 다 크면 엄마랑 떨어지지만, 아빠는 계속 엄마랑 같이 있잖아요.아빠는 평생 엄마를 보살펴야 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아빠한테 질투 안 해요.” 육민이 진지하게 대답했다.루카스는 알 것 같았다.이 아이는 아직도 계속 나를 자기 아빠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도대체 얼마나 닮았길래?!“난 네 아빠 아니야.” 루카스는 바로 벽을 세웠다. “너 사람 잘못 봤어.”“우리 기억 못 하는 거예요?” 육민이 되물었다.“난 원래 모르는 사람이니까 기억 못 하는게 당연하지.”“아빠......”“됐어, 나 갈게.” 루카스는 그대로 육민의 말을 끊었다.꼬맹이랑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육민은 실망한 눈치였다.루카스는 이런 순간을 참지 못했다.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그는 원래 항상 낯선 사람에게 차갑게 대해왔는데, 소이연과 그의 아들한테는 죽어도 못하겠다.“그럼 언제 다시 와요?” 육민은 작은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띠었다.“안 와. 나랑 너희 엄마는 정말 우연히 알게 된 거야. 당연히 어젯밤에 손 내밀어 준 건 고맙지만, 감정적으로는......”“그럼 저랑 같이 아침밥만 먹고 가면 안 돼요?” 육민이 그의 말을 끊으며 애원했다. 아마 듣기 싫었던 것 같았다.루카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아이도 아마 엄격하고 날렵한 사람 같았다.비록 꼬맹이한테 이런 말은 안 어울리지만,어떻게 시간을 절약하는지, 어떤 것이 그가 원하는 정보인지 다 이해하고
“......” 그는 자신이 아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그럼 아빠 따뜻한 우유 좀 마셔요. 우유는 배를 따뜻하게 해줘요.” 육민은 아주 적극적으로 자신의 우유를 루카스에게 건넸다.이때 되니 루카스는 더 이상 꼬맹이의 호감 표시를 거절할 수 없었다.“고마워.”“아니에요 아빠.” 육민은 착하게 웃었다.루카스는 왠지 모를 심적 부담감이 생겼다.마치 그가 이 아이의 아빠가 아니라면, 이 아이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것 같았다.하지만 그는 정말 아니었다.그는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랑 같이 아침 먹었으니까 난 이제 갈게.”“아….” 육민이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나 못 봐.” 루카스는 그가 보고 싶어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명확히 말했다.“왜요?”“난 네 아빠가 아니니까.” 루카스는 또박또박 말했다.그러자 육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루카스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했다. “네가 무슨 마음인지 나도 잘 알아. 네가 네 아빠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 지도.하지만 난 네 아빠가 아니고, 난 네 아빠처럼 널 사랑해 줄 수 없어.”“저는 안 사랑해 줘도 돼요. 제가 사랑하면 돼요.”“민아......”“아빠.”“엄마 잘 지켜줘.” 루카스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빠가 없어졌으니까 너랑 네 엄마는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야 돼. 그리고 너도 이제 다 큰 남자니까 엄마를 잘 보살필 의무가 있어. 그러니까 넌 네 엄마한테 더 집중해야 해. 허황된 환상이 아니라.“아빠는 무슨 말 못 할 사정 때문에 나랑 엄마 만나는 게 불편한 거예요?”“그런 거 없어. 그냥 내가 네 아빠가 아닌 것 뿐이야.”“아빠...... 설마 기억을 잃은 거예요?” 육민이 물었다.어젯밤에 그는 일찍 자라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컴퓨터로 거의 밤새 자료를 찾아보았다.왜 누군가 다른 사람을 자신이 아니라고 속이는 건지. 검색 결과 가장 많은 답은 두 가지가 있었다.하나는 말 못 할 사정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는
“미안, 내가 뭘 어떻게 해줄 수가 없네.” 루카스는 여전히 거절했다.그들은 친척도, 친구도 아니었기에 그가 자신을 희생할 이유가 없었다.“아빠......” 육민이 뭔가 말하려고 했다.“민아, 나 여자친구 있어.” 루카스가 또박또박 명확히 말했다.육민의 표정이 변하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아빠에게 자기 엄마 말고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렇게나 자기 엄마를 사랑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가 있을까.“그래서 난 너희 엄마랑 더 이상 어떤 관계가 될 수 없어.”“하지만 아빠는 엄마 사랑하고, 엄마만 사랑하잖아요?”“안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건 내 여자친구야.”“전에 진짜 힘들게 엄마 만났잖아요......!”“민아, 나 네 아빠 아니야.” 루카스는 귀찮다는 듯 다시 한번 설명했다.“그렇지만......”“그렇지만은 없어.” 루카스는 육민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했다. “너도 네 엄마가 몸이 안 좋고, 정신질환도 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너는 더 강해져서 엄마 잘 보살펴야 돼. 다른 사람한테 의지하는 건 스스로 의지하는 것만 못해.”육민은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아빠는 정말 절대 넘어오지 않았다.“나 갈게.” 루카스가 몸을 일으켰다.“아빠!” 육민은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루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어떻게 설명해야 통할지 모르겠다.됐다.어차피 그가 가고 나면 앞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이 꼬맹이도 다 알게 되겠지.“저는 아빠가 왜 우리를 안 만나려는지 모르겠지만, 무슨 이유던 다른 여자를 좋아하지는 마세요.다른 여자랑 연애하지 마요. 아니면 언젠가 아빠가 엄마한테 미안한 짓을 한 걸 진짜 후회하는 날이 올 거예요.루카스는 당연히 육민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그대로 거실을 나섰다.루카스는 저택의 대문을 나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런 저택은 인적이 드물어서 택시가 있을 리 없었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도련님, 아가씨께서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문씨 아저씨는 용기를 내 말을 꺼냈다.“일 다 보셨으면 일찍 오세요.”“......”그가 이 집 도련님이 아니라는 건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건가?!......소이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점심 즈음이었다.그녀는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지만, 정말 점심 12시였다!그리고 그녀가 잔 곳은...... 그녀의 침대가 아니라 바로 어젯밤 루카스가 잔 방이었다.어떻게 여기에 있지?!그녀는 정말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그녀가 여기서 잤다면, 루카스는 어디서 잔 거지?!그녀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옷을 보았다.잠옷은 똑바로 잘 입고 있었고, 다리에는 베개를 끼고 있었다.베개에는 아직 루카스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육현경의 냄새이다.단지 육현경과 루카스의 냄새가 비슷한 것 뿐이었다.그래서, 어젯밤에 루카스랑 같이 잤다고?!도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야?!소이연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빠르게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가 대충 세수를 하고 내려갔다.아래층에는 육민이 승마 수업을 다 듣고 집에 와있을 것이다.엄마가 이제서야 일어난 것을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엄마, 이제 일어났어요?”“응.” 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때는 조금 진정이 되었다.일단 진정하긴 했지만 또 그렇지도 못했다.잔인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그녀는 루카스와 같이 자면 정말 푹 잘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는 루카스와 같이 잘 수 없다.남자와 여자는 엄연히 다르다.게다가 그녀는 루카스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녀 역시 애초에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없었다.그래서 만약 그녀가 병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아빠 갔어요.” 육민은 우울한 듯 말했다.“그 사람 네 아빠 아니야. 그냥 낯선 사람이야.”“아빠 맞아요.”“육현경이랑 닮지도 않았잖아.”“얼굴은 변할 수 있어요. 저도 지금이랑 어릴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
예수진은 빠르게 소이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연 언니, 송문수 왔어요.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방금 안으로 들어갔어요!][내가 진짜 올 거라고 했잖아요.][내 매력이 그 정도일 줄 몰랐죠.]역시나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예수진에 어이없다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난 소이연은 송문수의 인영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하도 큰 키 덕분에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우뚝 솟아있는 송문수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문수야.”마찬가지로 그를 알아본 육현경이 인사를 건네자 송문수는 빠르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언제 왔어?”“어제 오후에.”“왔는데 왜 말도 안 해? 사업 잘된다고 이젠 우리도 모른 척하는 거야?”“아무리 잘 되봤자 내가 현경이만큼 돈이 많진 않아.”볼멘소리를 하는 하도경에 맞는 말로 반박하자 하도경도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언제 가?”“모레 비행기야, 내일 집 가서 부모님만 뵙고 가려고.”“그래서 우리 만날 시간은 없다 이거지?”“이번엔 시간이 좀 빠듯해, 거기 일도 많고. 오늘 보지 뭐, 술 제대로 마시자 한번.”“너 진짜 많이 변했어 송문수, 이렇게 진지하진 말아 줄래?”적응되지 않는 송문수의 말투에 하도경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그럼 어쩌라고.”“나는...”판을 깔아주니 말하기 어려웠는지 하도경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술 마셔 그냥.”“그래.”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둘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파티의 주인공이 자리하기도 전에 술부터 마시기 시작했다.육현경이 그런 그들을 말리려 할 때 송문수의 옆에 문득 한 여자가 앉았다.그에 술잔을 들고 있던 송문수도 잠시 멈칫했다.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며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송문수를 한번 보던 소이연은 하지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지수 씨, 왔어요?”“네.”“혼자예요?”“네.”혼자라는 말에 송문수의 손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혼자니까 더 조심해요 다닐 때.”“그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송문수는 마침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캐나다에 있는 회사도 이제 정상적으로 흘러가자 귀국한 거였지만 그도 그냥 예수진 아들의 백일을 축하하러 온 것뿐이었다.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송문수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배가 부른 채로 있던 예수진이 벌써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백일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오랜만에 온 장안시였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귀국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저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오랫동안 비워둔 집이라 그런지 온통 먼지투성이여서 일단 도우미부터 부른 송문수는 아주머니가 정리를 마친 다음에야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떠나기 전만 해도 이곳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데.이제는 그 모든 게 다시는 들춰선 안 될 과거가 돼버린 것 같았다.해외에 있던 시간 동안 송문수는 부단히 하지수를 잊으려 애쓰고 있었다.물론 정말 잊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하지만 하지수와 송문수가 반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할 때도 같은 집에 살던 하지수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그저 우연히 한 번, 그녀의 뒷모습이 화면에 스친 게 전부였다.몸을 뒤척이던 송문수는 내일의 백일잔치에 대해 생각했다.내일 가면 친구들이 무조건 술을 권할 텐데,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않은 탓에 송문수는 지금 자신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그래도 푹 쉬면 조금은 낫겠지 싶어 그대로 잠을 청한 송문수는 이튿날 아침이 돼서야 눈을 떴다.언제부턴지 부모님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린 탓에 송문수는 이젠 밤을 새우는 게 오히려 힘겨웠다.그렇게 여유롭게 준비를 마친 그는 한 번 더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집을 나섰다.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딱 적당한 시각에 집을 나선 그는 문득 옛날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어쩜 그리 특이하게 살아왔는지, 참으로 유치했던 것 같다.해외에서 반년 동안 혼자 살아서
“보름 넘게 준비한 건데 서두르는 건 아니지.”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을 떠나는 일인데도 송문수는 참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갔다가 언제 와?”“그건 몰라. 상황 봐서 잘 되면 빨리 오는 거고 잘 안되면 못 오는 거지.”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송문수에 그의 결심이 바뀔 리 없다는 걸 알아챈 송승우는 그만 입을 다물고 하지수의 손을 맞잡았다.무의식중에 눈물을 흘리던 하지수는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빠르게 표정을 감췄다.“가자.”그리고는 송승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그녀는 송문수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마지막 작별인사도 전하지 않은 채 그렇게 헤어졌다.하지수의 몸에 감히 시선을 두지 못하던 송문수도 그녀가 송승우와 함께 차에 타서야 차창 너머로 비치는 그 뒷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그는 한참 동안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사실 캐나다도 송문수가 직접 갈 필요는 없었다.회사에 유능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 아무에게나 CEO라는 직급을 쥐어 보내면 될 일이었지만 송문수는 본인이 가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여기서 다정하게 지내는 둘을 보고 있는 게 더 가슴 아플 것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어서.손 하나 잡았다고 이렇게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데 이런 모습을 계속 보는 건 정말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는 이곳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송문수는 캐나다에 도착해서야 육현경과 소이연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출국 소식을 알렸다.그리고 언제 돌아갈지는 모른다는 말까지 남기자 다들 깜짝 놀랐지만 별말은 하지 않고 몸 잘 챙기라는 소리들뿐이었다.그리고 시간 되면 놀러 오라는 얘기들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는데 역시나 예수진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그녀는 굳이 송문수에게 따로 문자까지 보내며 물었다.[너 진짜 어쩌려고 그래? 이렇게 가겠다고? 다 버리고? 송문수, 너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해졌니? 내가 너였으면 당장이라도 송승우랑 싸웠어!][어차피 못 이
둘의 이혼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고 두 사람은 각각 손에 이혼 증명서를 들고 법원에서 나왔다.“이제 끝난 거지?”“네.”하지수에게 건네받은 이혼 증명서를 들춰보던 송승우는 안에 적힌 내용을 다 확인한 후에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혹시라도 돌발상황이 생길까 봐 따라온 건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의 이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송문수는 하지수를 보고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절차대로 서류만 제출했다.아무 감정도 없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송승우는 감정이란 게 저렇게 쉽게 사라질 수도 있나 싶었다.둘 사이에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혼만 하면 그만이었기에 송승우는 다른 건 묻지 않았다.이제 두 사람이 이혼했으니 송승우는 저와 하지수도 떳떳해진 것 같았다.그리고 그는 송문수만 연락을 끊는다면 하지수를 다시 자기 여자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그래서 법원에서 나오자마자 송승우가 먼저 송문수를 불러세웠다.“시간 되면 집에 와서 밥이라도 먹어. 엄마 아빠가 전화해도 안 오던데, 많이 바쁜 거야?”“응.”“바쁘다고 가족들도 다 내팽개치는 건 아니지. 워라벨도 신경 써야지.”어른스러운 말투로 나무라듯 말하는 송승우를 송문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서울에서 일할 때 1년이 넘도록 안 오던 게 누군데.부모님이 굳이 송승우를 부르지 않은 건 그의 일에 방해가 될까 봐서였다.무튼 송승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다른 사람들의 일은 언제든지 시간을 뺄 수 있는 여유 적적한 일이라 여기는 사람.“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주면 도우미들 시켜서 너 좋아하는 거...”“나 해외에 잠깐 나가봐야 해.”“뭐라고?”송문수가 송승우의 지루한 말을 끊으며 대답하자 송승우는 당황하며 물었다.“엄마 아빠가 말 안 했어?”“무슨 말이야 그게?”금시초문이었던 송승우는 하지수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그녀 역시 처음 듣는 말인 것 같았다.“우리 회사 전기차 해외 매출이 자꾸 오르니까 전
그런데 그때, 협탁에 놓인 물과 알약 한 알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그 옆에 나란히 놓여있는 쪽지에는 “단기 피임약”이라는 말도 적혀있었다.그 약과 물을 번갈아 보던 하지수는 피가 차게 식는다는 게 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너무나도 명확한 송문수의 의사에 하지수는 가슴이 아려왔다.성인 남녀 둘이 충동적으로 서로를 원해서 가졌던 하룻밤이니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고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걸 이렇게 약으로 알려주다니.알약을 집어 든 하지수는 참으로 처량하게 웃어 보였다....그렇게 점심이 다돼서야 하지수는 별장으로 돌아갔다.핸드폰 배터리가 다 된 탓에 그녀는 송승우가 몇 통의 전화를 했는지도 모른 채 별장 안으로 들어섰는데 송승우는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얼굴로 이제야 들어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와 달리 허영지와 송기명은 살갑게 하지수를 걱정해주었다.“지수야, 어제 어디 갔었어? 전화는 왜 꺼놓고. 수진이한테 전화했는데 네가 문수랑 같이 갔다고 해서 문수한테 연락해보니까 문수는 또 너랑 같이 있는 거 아니라고 그러던데.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어디 다친 데는 없지?”“없어요.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셔서 문수 씨 집에서 잔 것뿐이에요.”송문수 집에서 잤다는 하지수의 말에 송승우는 더는 못 참겠는지 언성을 높였다.“하지수, 너 나랑 한 약속 잊었어? 네가 어떻게 거기서 잠을 자!”“내가 무슨 약속을 했는데요?”송승우는 아무리 화가 났어도 저 질문에만큼은 답을 할 수 없었다.가스라이팅으로 어렵게 얻어낸 기회라는 걸 다른 사람한테는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나 문수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 그러니까 아직은 뭘 하든 합법적이란 소리죠.”“하지만...”“이혼하고 나서 얘기해요. 나 피곤해서 먼저 올라 가볼 게요.”몸도 마음도 다 힘들었던 하지수는 송승우를 화를 살필 겨를이 없었기에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렇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목 끝까지 끌
“너 내일 후회할 거야.”이런 하지수를 앞에 두고 참는 건 송문수에게도 곤욕이었다.온몸이 떨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게 더 힘들었다.“후회 안 해.”“딱 하나 후회되는 게 있다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한번 밖에 못 해봤다는 거야. 그리고 그 한 번도 진짜 별로였어.”“뭐?”아까부터 한번을 강조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그 한 번도 다 너한테 맞춘 거였잖아.”고작 한 번이라니, 그럴 리가.그런데 또 곱씹어 보니 둘이 함께 잔 건 한 번뿐인 것 같긴 했다.하지만 송승우와 그렇게 오래도록 사귀면서 송승우 방까지 들락날락하던 게 하지수인데 그런 그녀의 인생에서 저와 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이번엔 내가 움직일 거야.”하지수는 잔뜩 풀린 눈으로 당차게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나 또 밀어내면 그땐 진짜 물어버릴 거야.”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닥에 눕힌 뒤 그 위에 올라탔다.“반항하지 마.”곧바로 하지수의 입술이 자신에게 다가왔지만 송문수는 정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이 상황에 그녀를 밀어내면 하지수가 정말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가슴 아픈 일이었기에 송문수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그렇게 내일 그녀의 원망도 다 받아낼 심산으로 송문수는 하지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이 밝아오자 하지수는 몸을 뒤척였다.온몸에 차에 깔리기라도 한 듯 무거웠고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던 그녀는 힘겹게 눈부터 떠보았다.익숙하고도 낯선 이곳은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송문수의 집이었다.그리고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의 기억 조각들이 하나하나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그것들이 마침내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대담한 모습을 그녀는 차마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술이 깬 지금에 와서는 절대 못 할 일이
송문수는 자신마저도 취해버린 것 같았다.그래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입술을 뗀 하지수가 오랜만에 얌전해진 송문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자신의 키스에 몸을 맡기며 가만히 있기만 하는 그에 하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문수 씨, 내가 하는 키스가 그렇게 별로야?”별로라니, 흥분해서 자칫하면 이성이 끊길뻔했는데.여기서 입을 열면 더 이상은 참지 못할 것 같아 송문수는 이번에도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어디가 별론지 얘기해주면 내가 고칠게, 응?”송문수는 아까부터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부단히도 움직이는 그의 울대가 그의 초조함을 대변하고 있었다.하지수 앞에서만큼은 속절없이 무너지는 송문수라 하지수가 한마디만 더 하면 그는 정말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지수...”그래서 그만하라고 말하려 하는데 하지수가 본인의 손가락을 송문수의 입에 가져다 댔다.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진 지 아는 송문수는 지금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주며 간신히 참고 있었다.이대로 가면 정말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데, 그걸 다 알면서도 그는 하지수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그런데 하지수는 점점 과감해지는 건지 이젠 하다 하다 손까지 집어넣어 송문수의 몸 곳곳을 어루만지고 있었다.그녀의 손길이 지나간 곳이면 그게 어디든 불에 덴 듯 뜨거워 났다.송문수 역시 술을 마신 몸이라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그래서 그는 자신이 느슨해져서 이 상황을 즐기는 일이 없게 온몸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하지 마 하지수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더 깊은 곳까지 손을 움직여왔다.“아!”그러다 결국 송문수에게 손이 잡혀버린 그녀는 울망울망한 눈으로 송문수를 올려다봤다.자칫하면 그곳까지 갈 수도 있었는데 뭐가 아쉬워서 저런 표정을 짓는지.송문수는 심호흡으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그만해 하지수.”“왜?”“별장에 데려다줄게.”저 순진무구한 눈을 보고 있으면 송문수도 빨려 들어갈
술에 취한 하지수의 고집을 당해낼 수 없었던 송문수는 결국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밤늦은 시간에 별장에 들어가면 다른 가족들을 깨울 수도 있으니 집에서 잠만 재운다는 핑계를 대가며 말이다.송문수가 하지수를 침대에 눕히고 자리를 뜨려 하자 하지수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가지 마.”손끝에서 느껴지는 하지수의 온기에 송문수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하지수, 잘 봐. 나 송문수야.”“알아, 네가 송문수인 거. 나 버린 무책임한 놈이잖아 너!”풀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말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술을 마신 하지수는 송문수가 감히 컨트롤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왜 날 송승우한테 넘긴 거야? 내가 물건이야? 네가 뭔데 날 송승우한테 준다 만다냐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지수는 침대에 올라 선 채 송문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서 있지 말고 일단 앉아, 그러다가 넘어져.”“안 넘어져.”하지수는 송문수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계속 질문만 퍼부었다.“왜 날 밀어내는 건데! 내가 어디가 별로야? 몸매가 별로야 아니면 내가 못생겼어? 뭘 그렇게 일일이 다 따지고 들어? 넌 보는 눈이 그렇게 높아?”“일단 누워.”“싫어.”송문수가 그녀를 잡아주려고 손을 뻗으면 하지수는 곧장 몸을 돌려 피하곤 했다.그렇게 휘청대는 하지수를 보는 게 송문수는 조마조마하기만 했다.“내 말에 대답부터 해. 왜 날 싫어하는 거야?”“난 너 싫어한다고 안 했어.”그의 대답에 송문수를 향해 손가락질하던 하지수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넌 그냥 내가 싫은 거잖아! 나 말고 밖에 있는 그 못된 여자들을 더 좋아하는 거잖아. 나도 그 여자들처럼 변하면 나 좋아해 줄 거야?”“그런 거 아니야.”“변명하지마! 넌 그냥 몸매 좋고 능숙한 그런 여자들만 좋아하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혼자 화를 내는 하지수가 송문수는 어이없기만 했다.술을 마신 하지수는 아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