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내가 뭘 어떻게 해줄 수가 없네.” 루카스는 여전히 거절했다.그들은 친척도, 친구도 아니었기에 그가 자신을 희생할 이유가 없었다.“아빠......” 육민이 뭔가 말하려고 했다.“민아, 나 여자친구 있어.” 루카스가 또박또박 명확히 말했다.육민의 표정이 변하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아빠에게 자기 엄마 말고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렇게나 자기 엄마를 사랑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가 있을까.“그래서 난 너희 엄마랑 더 이상 어떤 관계가 될 수 없어.”“하지만 아빠는 엄마 사랑하고, 엄마만 사랑하잖아요?”“안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건 내 여자친구야.”“전에 진짜 힘들게 엄마 만났잖아요......!”“민아, 나 네 아빠 아니야.” 루카스는 귀찮다는 듯 다시 한번 설명했다.“그렇지만......”“그렇지만은 없어.” 루카스는 육민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했다. “너도 네 엄마가 몸이 안 좋고, 정신질환도 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너는 더 강해져서 엄마 잘 보살펴야 돼. 다른 사람한테 의지하는 건 스스로 의지하는 것만 못해.”육민은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아빠는 정말 절대 넘어오지 않았다.“나 갈게.” 루카스가 몸을 일으켰다.“아빠!” 육민은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루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어떻게 설명해야 통할지 모르겠다.됐다.어차피 그가 가고 나면 앞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이 꼬맹이도 다 알게 되겠지.“저는 아빠가 왜 우리를 안 만나려는지 모르겠지만, 무슨 이유던 다른 여자를 좋아하지는 마세요.다른 여자랑 연애하지 마요. 아니면 언젠가 아빠가 엄마한테 미안한 짓을 한 걸 진짜 후회하는 날이 올 거예요.루카스는 당연히 육민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그대로 거실을 나섰다.루카스는 저택의 대문을 나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런 저택은 인적이 드물어서 택시가 있을 리 없었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도련님, 아가씨께서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문씨 아저씨는 용기를 내 말을 꺼냈다.“일 다 보셨으면 일찍 오세요.”“......”그가 이 집 도련님이 아니라는 건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건가?!......소이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점심 즈음이었다.그녀는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지만, 정말 점심 12시였다!그리고 그녀가 잔 곳은...... 그녀의 침대가 아니라 바로 어젯밤 루카스가 잔 방이었다.어떻게 여기에 있지?!그녀는 정말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그녀가 여기서 잤다면, 루카스는 어디서 잔 거지?!그녀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옷을 보았다.잠옷은 똑바로 잘 입고 있었고, 다리에는 베개를 끼고 있었다.베개에는 아직 루카스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육현경의 냄새이다.단지 육현경과 루카스의 냄새가 비슷한 것 뿐이었다.그래서, 어젯밤에 루카스랑 같이 잤다고?!도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야?!소이연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빠르게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가 대충 세수를 하고 내려갔다.아래층에는 육민이 승마 수업을 다 듣고 집에 와있을 것이다.엄마가 이제서야 일어난 것을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엄마, 이제 일어났어요?”“응.” 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때는 조금 진정이 되었다.일단 진정하긴 했지만 또 그렇지도 못했다.잔인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그녀는 루카스와 같이 자면 정말 푹 잘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는 루카스와 같이 잘 수 없다.남자와 여자는 엄연히 다르다.게다가 그녀는 루카스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녀 역시 애초에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없었다.그래서 만약 그녀가 병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아빠 갔어요.” 육민은 우울한 듯 말했다.“그 사람 네 아빠 아니야. 그냥 낯선 사람이야.”“아빠 맞아요.”“육현경이랑 닮지도 않았잖아.”“얼굴은 변할 수 있어요. 저도 지금이랑 어릴
“엄마, 아빠 혹시......” 육민은 말끝을 흐렸다.소이연이 그의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가 더 이상 희망과 환상을 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이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니까!그녀가 말했다. “민아, 나도 네가 아빠를 많이 보고 싶어 하는 거 잘 알아. 근데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어. 앞으로 엄마도 너 더 잘 보살펴 줄게.”육민은 입술을 깨물고 뭔가 설명하려 했지만, 엄마가 절대 믿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그는 몰래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진실이 밝혀지면, 엄마도 그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엄마 오후에 잠깐 나갈 거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알겠지?”“네.”소이연은 정신과 담당 의사 제임스를 찾아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분석을 부탁할 생각이었다.어쩌면 그녀의 불면증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제임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이연 씨, 제 생각에는 이연 씨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그럴 리가요!” 소이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어요.그냥 그 사람한테 육현경 냄새가 나서 안정감을 느낀 것뿐이에요. 전 그 사람한테 감정 자체가 없어요.제가 육현경 말고 다른 사람한테 감정이 생길 리도 없고요.”제임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이건 제가 100% 확신할 수 있어요.”“좋아요.” 제임스도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만약 정말 당신 말대로라면, 저희는 당신의 불면증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요.”“무슨 방법이요?”“이 남자와 같이 자는 거요.”“......” 소이연은 어이가 없었다. “제가 매일 그 사람이랑 같이 잘 수 있었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겠죠.”“왜 안돼요?”“전 그 사람 단 1%도 안 좋아해요. 그리고 그 사람도 여자친구가 있고요.”“그 사람한테 여자친구 있는 게 신경 쓰이ㄴ시나요?”“제 말 이상하게 듣지 마시고요. 저 안 넘어가요.”
“네.” 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 “육현경”의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안정되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머리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고, 그녀는 무의식중에 이미 잠들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냄새를 남겨보는 건 어때요?” 제임스가 제안했다.“무슨 뜻이에요?”“누군가의 냄새는 사실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그가 입었던 옷이나 침구에 쉽게 잔류하죠.만약 정말 그 사람이랑 안 되겠으면, 그 사람이 남긴 냄새로 잠들 수 있게 노력해 봐요.”“그 사람이 남긴 냄새?” 소이연이 중얼거렸다.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꺼림칙했다.마치 그녀가 변태라도 된 듯했다.제임스도 소이연의 마음을 읽고 진지하게 말했다. “병을 치료하는데 남녀 간의 예의나 염치를 그렇게 챙길 필요는 없어요.환자가 수술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의사와 간호사가 모두 있어야 가능하잖아요?!”소이연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역시 정신과 의사여서 그런지 뭔가를 권유하는 데엔 일가견이 있었다.그녀는 제임스의 심리상담소에서 나왔다. 생각하면 할수록 제임스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그래서 집으로 돌아가, 소이연은 급히 루카스가 묵었던 방으로 갔다.그가 썼던 침구를 자신의 방으로 가져가 효과가 있는지 밤에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하지만 방으로 들어가자 소이연은 그대로 멍해졌다.방에는 침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그녀는 급히 문씨 아저씨를 찾아갔고, 문씨 아저씨가 설명했다.“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저택 대청소 날이라서, 모든 침구를 꺼내 와 세탁, 건조, 소독을 합니다.”그 순간 소이연은 그대로 타격을 입었다.문씨 아저씨는 소이연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 물었다. “아가씨, 제가 뭐 잘못 했습니까?”“아, 아니요.” 소이연은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문씨 아저씨에게 지시한 적이 없었고, 문씨 아저씨는 평소대로 방을 청소했으니, 그는 잘못이 없었다.그녀는 그저 “육현경”의 냄새가 이렇게 사라진 것이 서글펐다.루카스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와서 그의 냄새를 남기게 하룻
"너 귀신 들렸어?” 루카스가 물었다. 소이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나 아주 멀쩡하니깐 저주하지 마.” "정말 멀쩡한 거 맞아? 그런데 왜 나를 너희 집에 오게 할 수 있지? 소이연, 갑자기 날 사랑하게 됐다고 말하지 마! 어젯밤에 일부러 내 침대에 올라온 거 아니야?!” 소이연은 루카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스스로 발등에 도끼를 찍는 일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나 이를 갈았다. 제임스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했다. 소이연은 말했다. "돈은 갚을 필요 없고 하룻밤만 같이 있어주면 돼.” "너 미쳤어? 내가 무슨 제비야? 나랑 자고 싶어서 그래?!” "누가 너랑 잔대!" 소이연은 정말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너랑 자면 손해 보는 건 나 아니야? 내가 돈 갚아줄게!” "네가 왜 손해야? 넌 이미 아이도 낳은 사람이고, 나는 여전히......" 루카스는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어쨌든 내가 손해야! 소이연, 네가 날 억을 주고 산다고 해도 난 싫어! 난 값을 매길 수 없는 몸이라고!” "내가 좀 아파." 소이연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루카스와 이렇게 계속 싸우면 절대 끝이 안 난다. "너도 내가 아픈 거 알고 있잖아…… 이건 마음의 병이야.”소이연은 계속 말했다. "지난 3년, 난 매일 잠을 못 잤어. 정상적으로 잠을 자려면 수면제를 먹어야 하는데 의사가 이 방법은 장기적으로 내 몸에 해롭다고 했어. 최면도 마찬가지고.” "도대체 무슨 말 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루카스가 차갑게 말했다. "이런 내가 너를 안고 자면, 빨리 잠들 수 있어." 소이연의 설명에 루카스는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아마 소이연과 이틀 밤을 같이 잤던 게 생각난 듯했다. 그때 소이연은 정말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잘 잤다. "너한테서 익숙한 냄새가 나." 소이연은 설명했다. "너 지금 날 그 사람 취급한 거지?” 루카스가 비꼬며 말했다.
육민이 입을 삐죽거렸다.성격이 이렇게나 나쁘니, 엄마가 그를 아빠라고 믿고 싶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하지만.아빠가 다시 돌아오셔서 기분이 너무 좋다.육민은 아빠의 정체를 증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했고, 그중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인은 친자 확인검사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아빠가 부자 관계라는 것을 확인하면 친아빠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어떻게 아빠의 머리카락을 손에 넣을지 생각하며 우울했는데 아빠가 직접 집으로 들어왔다. ......루카스는 어젯밤 그가 묵었던 방에 짐을 두었다.방에 놓인 침구들을 보니 아예 바뀌어 있었다.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소이연이 아픈지 말든지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그는 단지, 그녀에게 빚지고 싶지 않을 뿐이다.…..저녁.문씨 아저씨는 루카스에게 아래층으로 내려와 밥을 먹으라고 말했다.루카스는 침대에서 내려왔는데, 오후 내내 잤더니 허리가 뻐근했다.루카스가 방을 나서자 문씨 아저씨가 그의 침대 시트를 정리하러 들어갔다."내 방은 건드리지 말아요.”루카스는 갑자기 흥분하며 말했다."왜요? 큰 도련님.”"큰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루카스라고 불러요.”"큰 도련님의 영어 이름도 루카스……" 문씨 아저씨는 자신을 사납게 바라보는 루카스의 시선에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루카스 도련님.”"아무튼 내 침대에 손대지 말아요. 아저씨 냄새가 섞인다고요.”“…..." 자신의 큰 도련님이 결벽증이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루카스는 입술을 오므렸다. 그는 자신이 이러는 이유가, 소이연의 수면을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소이연이 다른 핑계를 대며 자신에게 다가오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이 집을 빨리 떠나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루카스는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소이연과 육민이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카스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소이연은 그에게 냉담한 태도를 유지한 반면 육민은 급히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빠!”
식탁은 조용했다. 소이연과 육민의 식사예절은 정말 좋았는데, 물론 루카스도 나쁘지 않다. 루카스는 소이연의 음식이 이렇게 자신의 입맛에 맞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오늘 식탁에 올라온 음식들은 대부분 그가 정말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어쩌면 소이연이 그의 음식 취향을 파악한 것일까? 그녀가 마린에게 물어보기만 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니 놀랄 것도 없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루카스는 더 이상 식탁에 앉아있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애벌레처럼 이불에 자신의 몸을 감쌌다. 이렇게 하면 이불에 체취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지 않을까? 소이연이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잠을 잘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 역겹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얼른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 순간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나더니 작은 머리가 문틈으로 빠끔히 들어왔다. "루카스, 자요?” "왜 그러는데?” 루카스는 육민을 보며 물었다. "이렇게 일찍 주무시려고 방으로 들어가셨는데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돼서요." 육민이 말했다. "안 아파요.” "그럼 저 방에 들어가도 돼요?” "응?" 루카스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오늘 밤 같이 자면 안 돼요?” "안돼.”루카스는 바로 거절했다. 육민은 또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엄마가 너랑 내가 같이 못 자게 할 거야.” "왜요?" 육민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말했다. "같이 자고 싶은 사람이 엄마예요?” 루카스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같이 자고 있다가 엄마 오면 가면 안 돼요?” "안 돼.” 루카스는 또다시 거절했다. 육민은 더욱 섭섭해 하며 불평했다. "아빠는 엄마가 생긴 이후로 나에 대한 사랑이 정말 달라졌어요.” "변한 게 아니라, 네 엄마와 따로 약속한 게 있어서 그래." 루카스는 말이 나오는 대로 설명했
"못하시겠죠?" 육민이 루카스를 자극했다. "자극하지 마, 네 수법에 안 넘어가.” "그럼 그냥 제가 올라가서 뽑을게요!" 육민은 침대로 올라가려 했다. 그때. "잠깐만." 루카스는 육민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이를 악물고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았고, 육민은 의기양양 해하며 웃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받아 들고 기뻐해 하며 방을 나갔다. 육민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달려가다가 복도에서 문씨 아저씨와 부딪쳤다. 빠르게 달리던 육민이 문씨 아저씨의 몸에 부딪히며 문씨 아저씨가 넘어질 뻔했다. 육민은 다급하게 문씨 아저씨를 잡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괜찮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문씨 아저씨가 물었다. "아기 도련님은 괜찮으시죠?” "전 괜찮아요...... 아, 근데 머리카락 어디 있지?” 육민은 당황했다. "머리카락이요?" 문씨 아저씨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육민은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카락을 찾기 시작했다. 방금 문씨 아저씨를 두 손으로 잡아서 손에 들고 있던 머리카락을 떨어뜨렸던 것이었다. "진짜 중요한 머리카락이에요.” 문씨 아저씨는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카락이 왜 중요하지? 설마, 우리 아기 도련님은 또 연구와 실험을 할 건가? “아, 여기 있다." 육민은 문씨 아저씨의 몸에서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했다. 머리카락은 다행히 문씨 아저씨의 몸에 떨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집어 들고 신이 나서 떠났다. 문씨 아저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긁적거린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떨어지자 문씨 아저씨는 우울 해졌다. 나이가 드니까 자꾸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 같았다. 머지않아 대머리가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밤늦은 새벽이 되었다. 루카스는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였다. 소이연은 왜 아직 안 오는 거지? 그는 어제 너무 피곤하고 당황해서 잠을 잘 못 잤다.낮잠을 자는 습관이 없는 그는 깊은 밤이 되니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