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 언니.” 육가희는 뒤에서 이미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고 있었다. 육가희는 소이연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반갑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소이연은 예수진이 생각나 항상 그녀에게 거리를 유지했다. 그녀는 벌써 3년 동안이나 예수진을 만나지 못했다. 예수진은 그때 사라진 이후로 소이연과 하지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들도 예수진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예수지는 대체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엄마가 며칠 전까지 민이를 집에 데라고 와서 같이 밥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육가희는 소이연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 적극적으로 이야기했다. "시간 날 때, 장안으로 갈게요." 소이연은 대답했다. "저도 민이가 보고 싶은데, 혹시 민이도 같이 왔나요?" 육가희가 물었다. "아니요, 오늘은 수업 있는 날이라서요.” "아, 잊어버렸네요" 육가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는 이제 그만 방해하고 먼저 나가있을게요." 소이연이 입을 열어 그녀들의 어색한 대화를 끝냈다. "네." 육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 씨, 같이 가요." 하도경은 소이연에게 말하고 다시 육가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밖에서 가희 씨 공연을 기다리고 있을 게요.” "네." 하도경과 소이연은 함께 그곳을 벗어났다. 소이연은 물었다. "예수진 소식 들은 것 있어요?” 하도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요. 저도 수진이도 서로 연락하지 않았거든요. 계지원에게 물어보세요. 아마 오늘 여기에 올 것 같은데, 도착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방금 비행기가 좀 연착된다고 문자 왔어요.” 3년 전 계지원은 뇌수술을 성공적으로 받고 해외에서 6개월간 요양을 한 뒤 귀국했다. 육현경의 일을 겪은 뒤 하도경과 계지원도 서로에게 쌓여 있던 앙금을 풀었다. 결국, 그들의 형제 한 명이 없어졌다. "그냥 물어봤어요. 수진이가 우리에게 연락하고 싶었다면 더 이상 피하지 않았을 거예요." 소이연이 덤덤하게 말했다. 소이연의 말투에는
시간이 되자 현장의 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런웨이에 불빛이 밝게 켜졌다. 그리고 모델들이 런웨이를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에 수많은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뜨리며 쉴 새 없이 모델들을 촬영했다. 소이연도 열심히 런웨이를 보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인 마린은, 디자인으로서 사람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런웨이에 선 모델도 모두 세계적인 모델들이었다. 그렇기에 육가희가 그 모델들과 함께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국내 정상급 연예인이 이런 자리에 섰다는 점도 현장에 있던 많은 취재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육가희가 나오는 순간, 약간의 불안감이 스쳤다. 바로 그때, 계지원이 나타나 하도경의 옆 자리에 앉았다. 하도경은 그를 돕기 위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비행기가 연착됐고 길도 막혔어." 계지원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어, 가희 씨 나왔다." 하도경이 런웨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계지원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희 씨가, 다음 달에 네 영화를 찍는다고 말하던데?” "응." 계지원은 대답했다. "다음 달 촬영에 들어가. 새해맞이 단편 영화인데 대략 1~2개월 정도 촬영할 것 같아. 대부분 장안에서 촬영할 거야.” "잘 됐네." 하도경이 대답했다. 계지원도 별다른 대답 없이 런웨이에 집중했다. 보통 그도 이런 패션쇼를 보러 오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마린이 국내에서 광고를 찍을 때 맺어진 인연으로 마린이 그에게 이번 쇼 초대장을 한 장 주어 참석하게 되었다. 계지원은 적극적이지도 않지만 거절도 잘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라, 다른 사람이 먼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다면, 그는 기본적으로 상대에게 예의를 다했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바쁜 일정이었지만 쇼에 참석했다. "방금 무대 뒤에서 이연 씨를 만났어. 앞에서 쇼를 보고 있어." 하도경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계지원이 맨 앞줄에 앉아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매우 진지한
"목소리 좀 낮춰 주세요.” 계지원이 말을 하기도 전에 옆자리의 누군가가 하도경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옆 사람이 쇼를 보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도경은 입술을 깨물고 마음을 억눌렀다. 계지원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으로 계속 쇼를 보았다. 예수진에 대해 이야기해도 그다지 감정적 변화가 없어 보였다. 쇼가 반쯤 진행되었다. 소이연은 여전히 열심히 쇼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남자 모델이 런웨이를 걸어 나왔다. 모든 사람의 눈동자가 그에게 향했다. 그 모델은 날카로운 눈빛에 매우 잘생긴 얼굴과 훤칠한 키, 그리고 반듯한 몸매를 갖고 있었다. 그를 보고 있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반짝일 정도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델들 사이에서도 그의 출중한 외모는 눈에 띄었다. 소이연은 객석에 앉아있는 여자들의 탄성을 들었다. 그리고 흥분한 듯 어쩔 줄 몰라하는 여자들의 대화도 들렸다. "남자 입장에서 봐도 저 남자 모델은 확실히 잘생겼네요.” 심문헌이 남자를 평가하며 말했다. 보통 남자들은 다른 남자의 외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어쨌든 남자의 보는 눈은 여자의 외모에 맞춰져 있지만 눈앞의 이 남자 모델은 확실히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잘생겼다. 모델이 너무 잘생기면 옷의 디자인을 부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린과 같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아니고서는 감히 잘생긴 외모의 모델을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현장에는 끊임없는 카메라 셔터소리가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이 남자 모델의 사진을 미친 듯 찍었다. 계지원은 마주 오는 남자 모델을 보며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감독으로서 사람들 두고 배역을 고르는 습관이 있었다. 지금은 비주얼이 우선시되는 시대이기에 이 남자 모델은 곧 연예계에서 인기를 끌 것 같았다."좀 낯이 익지 않아?"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힌 하도경은 이 남자모델을 보고 입을 열었다. 계지원이 하도경의 물음에 미간을 좁혔다. 방금 전까지 이 모델의 상업적 가치
천우진은 휴대전화에 대고 지시했다. "지금 막 런웨이에서 내려간 그 남자 모델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 "네." "그 모델에게 사람을 붙이고 눈도 떼지 말고 정확하게 알아보라고 전해.” "네." 천우진은 전화를 끊고 소이연을 향해 말했다. "일단 알아보고 얘기해요.” 소이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도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도 희망이 커질수록 실망이 커질까 봐 두려워하며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무너질까 봐 걱정했다. 소이연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그 남자 모델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낯익은 그 모습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약 30분 뒤, 천우진은 소이연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델에 관한 자료 방금 이연 씨 휴대전화로 보냈으니 직접 확인해 봐요.” 소이연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려운 마음에 휴대전화를 확인할 수 없었다. "확인하고,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천우진이 재촉했다. 소이연은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마음속으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세상 어느 곳에서 이런 기적이 일어날까? 그저 살아남은 사람이 스스로에게 주는 희망일 뿐일 것이다. 소이연은 천우진이 보낸 자료를 터치했다. [루카스 리. 혼혈아. 아버지는 서울출신, 어머니는 캐나다 사람. 캐나다에서 자라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 경험이 전부. 올해 스물여섯 살. 전문 프로모델은 아니나 마린과 친분이 두터워 런웨이에 서기로 함. 집안 형편이 넉넉해 캐스팅 디렉터에게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으나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음. 가업을 이어받지 않고 단독으로 회사를 설립해 전자상거래를 하며 캐나다에서 회사를 발전시키고 있으며, 현재 국내에 진출할 의향에 서울에 와있음.]소이연은 묵묵히 자료를 읽어 내려갔다. 육현경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인적사항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은 넓고 별난 것들은 많죠." 천우진이 말했다. “비
"왜 이연 씨는 안 되는데요? 천우진 씨, 당신이야 말로 잊지 말아요. 당신은 아내와 아들이 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이야 말로 이연 씨한테 딴 마음을 품으면 안 된다고요!" 심문헌은 화를 내며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천우진의 거슬리는 행동을 참아왔는데, 오늘 그 참았던 화가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천우진은 바보를 본 듯한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심문헌은 더욱 화가 났다. "여기는 서울이에요!” 천우진도 심문헌을 말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네." 천우진은 숨기지 않았다. "이런 젠장할!" 심문헌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서울에서 그것도 천씨 가문의 무대에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심문헌은 욕설을 퍼부으며 천우진을 따라 전시장을 나왔다. 소이연은 무대 뒤에 있는 마린의 대기실에 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으려 하는 순간 갑자기 사람이 들어왔다. 순간 소이연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루카스 리. 그를 이렇게 가까이 보니 친근한 어떤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육현경이 아니다. 만약 그가 육현경이라면…자신을 이렇게 낯선 눈빛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는 그녀를 정말 잠깐 흩어보고는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혹시 마린을 찾으세요?" 소이연이 먼저 말을 건넸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긴장한 게 역력한 모습이였다. 루카스는 소이연의 질문에 몸을 돌리며 물었다. "마린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루카스의 맑은 목소리는 육현경의 낮은 목소리와는 달랐다. 정말 그는 육현경이 아니다."응?" 루카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이연을 쳐다보았다. 낯선 여자가 말을 걸어 기분이 나빴는지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소이연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대답했다.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마린 매니저가 곧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어요. 만약 만약 마린을 만나러 오신 거라면 여기서 좀 기다리시면 돼요.” 루카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게다가 이미 그가 가버려 화를 내야 할 곳이 없어졌기에 그녀는 화를 참기가 더욱 힘들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데?"마린이 대기실로 들어오며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이번 전시회를 매우 성공적으로 마쳤기에 그의 기분은 무척이나 좋았다."아무것도 아니야.”소이연은 웃으며 대답했다.“나 배가 조금 고픈 것 같애.”그녀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오래 기다리게 했지? 미안, 배고프겠다. 빨리 밥 먹으러 가자.”마린은 지체하지 않고 가방과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소이연과 함께 대기실을 나왔다."참, 친구 한 명이 더 있는데, 같이 가도 괜찮지?”갑자기 생각인 난 마린은 급히 소이연에게 말했다. "응, 괜찮아.”소이연은 웃으며 대답했다.마린은 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했기에 세계 각지에 친구가 있었다.일반적인 디자이너는 혼자 있는 것을 즐기지만 그는 보통의 디자이너와는 다른 성격을 가졌다.이것도 어쩌면 그가 이렇게 성공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두 사람은 전시회장 입구까지 함께 걸어갔는데, 입구에는 그 낯익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그 그림자를 볼 때마다 소이연의 심장은 두근거렸다.그녀가 시선을 피하는 순간 마린이 외쳤다."루카스, 여기.”그리고 루카스가 그들에게 걸어왔다.루카스의 눈빛은 소이연을 본 순간 짜증이 가득해졌다. 소이연도 입술을 오므렸다. 마린이 말한 친구가 루카스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아마 동석하기를 거절했을 것이다. "이쪽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lovely, 소이연 이야. 성공한 여성 사업가로 유명하지." 마린은 소이연을 소개한 뒤 바로 루카스를 그녀에게 소개했다. "이 쪽은 루카스, 내 친구이고, 서울에서 오래 살았어.” "안녕하세요." 소이연은 마린의 체면을 생각해 악수를 하기 위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루카스는 잠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내밀 생각
소이연은 당황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루카스의 허리를 꽉 잡고 그에게 여전히 기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재빨리 그를 놓고 똑바로 앉으며 말했다. "방금은 놀라서 실수한 거예요.” 루카스가 비웃었다. 분명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마린이 있었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루카스의 표정은 소이연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는 정말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듯했다. 모든 여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소이연은 그에게 보란 듯, 몸을 움직이며 그와 더욱 떨어져 앉았다. "소이연 씨, 안전을 위해 안전벨트를 매시는 게 어떻겠어요?” 루카스가 말했다. 소이연은 심호흡을 하며 속으로 스스로에게 화내지 말라고 말했다. 루카스가 그녀에게 친절을 나태 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또 핑계를 대며 자신에게 덤벼들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안전벨트를 매었고, 잠시 후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린은 비빔밥을 좋아했다. 외국인인 그는 고추장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셋이서 가게 안 룸으로 들어갔다. 미리 예약을 했기 때문에 음식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각각 앉았고, 루카스는 일부러 소이연과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녀에 경계심과 편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이연은 트집 잡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루카스의 고의적인 행동은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참으며 루카스의 존재를 무시하며 마린과의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캐나다에서 먹은 비빔밥이랑 서울에서 먹는 비빔밥은 역시 맛이 달라." 마린은 먹으면서 말했다. "그렇지, 루카스?” "응." 루카스가 대답했다. 그는 옆에서 묵묵히 꽤 많이 먹은 듯했다. 소이연은 그가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관찰하고 싶지 않았지만 곧 한 그릇을 다 비울 것 같았다.소이연은 얼마 먹지 못하고 있었다. "참, lovely. 루카스는 이번에 전자상거래 플랫폼을 열어보려고 서울에
"어쨌든 나랑 소이연 씨는 잘 알지도 못하는데 함부로 귀찮게 할 수는 없어.” "이미 아는 사이가 됐잖아.” 마린이 숟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안 그러면 왜 이 둘을 함께 초대해 식사를 하겠는가? 루카스가 뭐라 대답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확인하며 말했다. "잠시 실례할게요.” 그러고는 일어나서 나갔다. 마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소이연을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루카스 태도에 신경 쓰지 마. 사람들이랑 사귀는 걸 조금 어려워하긴 한데, 사람은 정말 좋아. 내가 전에 캐나다에서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루카스가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 "나랑은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소이연은 더 이상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에이, 너한테만 그런 거 아니야." 마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루카스만 탓할 수도 없어. 너도 루카스 외모 봤잖아. 쟤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너무 많아. 어떤 여자들은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하기도 해. 심지어 어떤 여자는 루카스를 납치하기도 했었어. 그래서 쟤가 그때부터 여자를 피해.” 소이연은 조금 놀랐다. 어떤 여자가 납치까지 하는 미친 짓을 하는 걸까? "정말이야.” 마린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러면 넌 나에게 저 사람을 소개하지 말았어야 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린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너와 루카스가 잘 어울릴거라 생각했어.” 소이연은 마한의 말에 방금 마신 음료수를 내뿜을 뻔하였다. 마린이 언제부터 사랑의 큐피드가 된 거지?! "지난 몇 년 동안 네가 혼자 지내는 걸 보면서 남자친구를 소개해 줘야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너랑 어울릴만한 남자가 없더라고. 작년에 루카스를 만났을 때, 너랑 루카스가 어울릴 거라 생각했어......”"남녀 관계는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난 네 호의를 잘 알지만, 저 사람이랑 난 정말 아니야. 그리고 보시다시피, 저 남자는 나한테 경계심이 너무 많아." 소이연은 재빨리 거절했다
“이연 언니가 왔다고?”오랜만에 들려온 소이연의 소식에 하지수는 흥분하며 답했다.“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랫동안 못 봐서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육현경 씨랑 이연 언니가 나 엄청 많이 도와줘서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 하고 싶었어.”“계지원 씨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예수진 씨 배도 점점 불러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그냥 거기서 보기로 했어.”“그래. 그럼 퇴근할 때 연락해. 나는 먼저 어머님이랑 아버님 생일파티 준비하고 있을게.”“응.”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집을 나섰고 하지수는 바로 송 씨 가문별장에 시어머니를 모시러 갔다.하지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승우가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게 보였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아직 어색했기에 하지수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송승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엄마 모시러 온 거야?”“네.”“집에 계속 계시는 거예요?”“나갔으면 좋겠어?”헛웃음을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다급히 해명했다.“아뇨, 그냥 전에는 계속 일로 바쁘셨던 분이 계시니까 물어본 거예요.”“전에는 연구과제 때문에 바빴는데 이제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서 한가해.”“아, 네.”고개를 끄덕이는 하지수를 보며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는 걸 느낀 송승우는 올라오려는 화를 참으며 물었다.“문수는?”“출근했어요.”“주말에도 출근해?”“요즘이 회사한테 중요한 시기라서 일요일만 쉬기로 했대요. 내일은 안나가요.”사실 송문수에게는 거의 휴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처리해야 할 일이 매일 산더미여서 그는 시간만 나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송문수 많이 변했네.”“송문수가 변해서 너도 걔를 다시 보게 된 거야?”냉소를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감정이라는 게 원래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기는 거잖아요.”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기척 없이 생겨서는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하지수의 말로부터 그녀가 이제는 정말로 송문수를
“하지수, 변호사 일할 때는 똑똑하더니 연애에는 영 소질이 없나 봐?”자는 척하고 자신을 놀려먹은 건 송문수인데 오히려 바보라고 핀잔을 듣자 화가 난 하지수가 얼굴을 붉혔다.“네가 나한테 뽀뽀하는 게 좋으니까 계속하라고 가만히 있은 거잖아!”송문수가 언성을 높여 말해서야 이유를 알게 된 하지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 표정에 어이가 없어진 송문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이렇게 바보 같아서 어떡해, 누가 너 팔아넘겨도 모르겠다.”“누가 누구한테 바보래. 내가 당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인 줄 어떻게 알고...”말을 채 끝맺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입을 맞춰오며 진득한 키스를 이어나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눈을 크게 떴다.“아...”아까 자신이 한 건 그저 뽀뽀이지 이렇게 치열을 훑고 지나가는 키스는 아니었는데 입속 깊은 곳까지 뜨겁게 만드는 키스는 옆에서 핸드폰이 울리건 말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송문수도, 하지수도 그 벨 소리를 무시한 채 키스를 이어나가다 둘의 입술이 다 번들번들해질 때가 되어서야 송문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지수를 놓아주었다.송문수의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진 하지수는 나른한 눈빛으로 송문수를 보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보던 송문수는 갑자기 욕설을 내뱉더니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가 욕실로 달려들어 갔다.그의 샤워 소리가 들릴 때에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도 시간을 보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변호사 일을 시작하면서 누구보다 규칙적이고 자율적인 일상을 보내왔던 하지수였기에 그녀는 자신이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송문수를 만난 뒤부터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송문수가 만약 자신을 팔아넘겨도 그를 도와 돈을 세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었다.생리대부터 바꾸러 제 방으로 돌아간 하지수가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송문수도 옷을 갈아입은 채로 거실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평소에는 7시에 일어나서 8시 정도면
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새 깨어난 지도 모르고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고 송문수는 다정한 눈을 한 채 떨리는 손으로 제 옆에 누운 하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이튿날 아침, 눈을 뜬 하지수는 방금 일어난 탓에 낯선 주위를 한참이나 둘러보고서야 여기가 송문수의 방임을 기억해냈다.관계 빼고는 별짓 다 한 어젯밤이 떠오른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혼자 자는 게 습관 되어있어 송문수의 품에 안긴 뒤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아마도 바쁜 일정 때문에 피곤했던 것 같다.완전히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송문수를 바라보았다.자고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처럼 차갑지 않고 쫙 펴진 미간 덕분에 오히려 부드러워 보여 공격성이 다분하지도 않았다.왜 눈을 뜬 모습과 감은 모습이 이렇게 다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송문수의 얼굴을 찬찬히 보던 하지수는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전에는 그 눈빛이 마음속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아 두려웠었는데 지금의 하지수는 더 이상 잠들어있는 송문수도, 깨어있는 송문수도 두렵지는 않았다.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깨어있는 송문수를 마주할 때는 하지수가 주동적으로 입을 맞출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잠들어있을 때는 그야말로 하지수 세상이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송문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하지수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입을 맞추다가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릴 때가 돼서야 행동을 멈추었다.물론 자의로 멈춘 건 아니고 입맞춤을 하던 와중에 눈을 떠버린 송문수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깜짝 놀라 잠시 멈칫한 것이었다.당황한 하지수는 빠르게 도망가려 했지만 자신을 눌러버린 송문수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분명 방금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송문수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몽롱한 느낌은 전혀 없는 눈으로 그는 하지수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의 진득한 눈빛을 당해내지 못한 하지수는 서둘러 눈을 피했
“미안해 문수 씨... 평소엔 이때가 아니라서 나도 몰랐어...”“응.”이 일은 애초에 하지수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던 송문수는 하늘이 불공평하다고 한탄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수를 만나는 날만 기다리며 3년 동안 아무와도 관계를 하지 않았던 그인지라 오늘에서야 비로소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겠다고 기뻐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에 또 일주일을 더 기다리게 된 이 상황에 송문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한숨을 쉬는 송문수를 본 하지수는 그가 자신에게 실망한 줄로 알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다음에 다시 할까?”하지수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이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그걸 말이라고 해? 생리 끝나면 당장 해.”자신한테 자꾸 일이 생겨버려 송문수가 다른 사람을 찾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던 하지수는 확신에 찬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며 청심환을 하나 먹고는 말했다.“그럼 편히 자, 난 내 방 가서 잘게.”“어디 간다는 거야?”“내 방 가야지.”“하지수, 네 발로 직접 내 방 찾아와 놓고 이제 돌아가겠다는 거야?”갑자기 터진 생리 때문에 관계를 못 가진 것도 화가 나는데 사람까지 가버리겠다는 말을 들은 송문수는 언짢은 티를 팍팍 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나 생리 와서 어차피 못하잖아.”“그게 왜?”“아까 문수 씨도 생리 끝나면 하자고 했잖아. 지금 하는 건 나도 좀...”송문수가 되묻자 하지수는 아주 난감해하며 답했다.“하지수, 넌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아까 너 안 놔줬으면 여기 진작에 피바다 됐어.”“...”“관계까지 할 사이에 뭘 내외를 하고 그래. 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앞으로 쭉 같이 자자고? 나랑?”“왜, 싫어?”“아니.”당연히 싫진 않았지만 하지수는 그저 송문수가 관계도 없는 잠을 자신과 함께 자겠다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그렇게 순진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빨리 와서 자. 아까 너무 움직였더니 피곤해.”송문수가 먼저 침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눕자 하
송문수의 입술이 하지수의 입술을 지나 그녀의 귓가에 닿을 때, 이런 식의 스킨십은 처음 해보는 하지수는 온몸이 떨려왔다.태어나서 딱 한 번, 송문수와 차에서 해본 게 전부인 그녀는 송문수의 유혹을 당해내지 못하고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목에 자신의 고개를 비볐다.그렇게 하지수를 안달 나게 하던 송문수는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걸 확신하고는 점차 행동을 대범하게 하기 시작했다.자연의 섭리인 것마냥 물 흐르듯 움직임을 이어나가던 송문수가 갑자기 멈췄을 때 하지수는 온몸이 뜨거워 나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온몸이 나른해진 그녀는 송문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참 지나 송문수가 더는 움직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가 그를 보며 물었다.“왜 그래?”제 아래에 누워있는 하지수를 보며 정말 이성을 잃을까 봐 걱정된 송문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문수 씨?”하지만 하지수는 아까는 그렇게 늑대처럼 달려들던 사람이 갑자기 말도 안 하고 거친 숨만 연신 내뱉는 게 이상했다.“문수 씨...”“지수야.”송문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자 그 숨결에 의해 뜨겁게 달궈진 피부에는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곧 자신이 상상했던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었던 아주 아름다운 순간이었는데 다른 여자들한테는 다 곁을 내주면서 왜 자기 앞에서는 갑자기 멈추는 건지 하지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본인이 여자로서의 매력이 떨어져서 송문수가 싫어하는 걸까 봐 자연스레 눈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송문수가 잔뜩 실망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너 생리 왔어.”“뭐?”송문수의 말에 깜짝 놀란 하지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송문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속옷에 피 묻어있어, 아마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수치스러움에 빨개진 얼굴로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이틀 뒤가 예정일인데 왜 갑자기 오늘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가 민망해 침대에서 뛰어내리다가 하마터면 넘
송문수는 자신의 떨림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하지수도 그의 몸 아래에서 떨리고 있었다.송문수는 이미 자신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예전의 그라면 이미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겼을 것이다.그는 조심스럽게 지수에게 다가갔다.지수는 온몸이 긴장돼 있었고 두 손은 이불을 꼭 쥐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송문수의 몸 아래에 있게 됐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지 지금, 그의 숨결은 몹시 거칠고 심장 소리는 우뢰처럼 커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어쩔 바를 몰라 했고 곧 무언가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그때, 송문수의 입술이 서서히 하지수의 입술에 와닿았다.송문수의 심장은 더욱 격렬히 뛰고 있었고 이불을 꼭 쥐고 있던 지수의 두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두 입술이 맞닿은 그 순간, 두 사람은 머리가 하얘졌다.둘만의 공간, 둘만 나누는 부드러운 촉감, 온몸으로 느끼는 서로의 떨림……이것이 진짜 입맞춤이었다.하지수의 뇌리에는 갑자기 전에 송문수의 차에서 나눴던 관계가 스쳐 지나갔다. 단지 관계를 위한 관계였을 뿐, 사실 그녀는 아무런 떨림도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 굴욕적이라는 생각까지도 들었었다.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오히려 그녀가 리드하고 있었다.송문수가 조심스러워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가 먼저 리드했다.그는 그녀의 유혹을 당해낼 수가 없었고 둘은 더더욱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온 세상이 조용해지고 두 사람의 심장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두 사람은 얼마 동안 키스를 나눴는지 가늠조차 못 하고 있었다. 아주 길게 또 아주 짧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입술을 뗀 두 사람의 얼굴은 너 나 할 것 없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이런 경험은 송문수도 처음이였다. 능수능란해야 마땅한 그는 지수와의 키스 후 고장 난 사람처럼 어쩔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방금 전의 달콤하고도 아름다웠던 키스에 사로잡혀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온 밤을 그녀와 보내고 싶었다.그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에 다가갔다.천천히
그는 너무 기뻐하다가 오히려 일을 망칠까 봐 조금 두려웠다.“그러면 오늘밤에 같이 자는 거 어때?”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며 물었다.“푸!” 송문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조금 전에 마시던 물을 내뿜었다.“싫으면 말고…” 송문수의 격한 반응에 지수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그런 거 아니야.” 송문수는 다급히 해명했다.지수는 어리둥절해졌다. 바로 전에 문수가 분명히 아주 격렬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송문수는 연신 입을 닦으며 말을 덧붙였다.“너랑 같이 자는 게 절대 싫어서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그럼 나 먼저 씻을게.”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그래.”“네 방에서 잘까? 아니면 내 방?”“난 다 좋아.”“그러면 네 방에서 자자. 네 방이 더 크니까.”“그러자.”“나 씻을게.”“응.”“너도 빨리 씻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수는 얼굴이 타오르듯 빨개졌다.무슨 의미인지 두 사람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송문수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가 힘들었다.하지수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송문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방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그는 곧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너무 긴장되어 숨도 안 쉬어지고 물컵을 들고 있던 손도 떨릴 지경이였다.수도 없이 많은 여자를 만나봤던 그로서는 남녀관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고 이런 경험이 처음일 리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그 상대가 하지수라니, 송문수는 머리가 하얘졌다.그는 남아있던 물을 한 모금에 다 마시고 나서 바로 방으로 돌아가 샤워하기 시작했다.오늘 밤이 지나면 둘 사이는 전혀 다른 관계가 되어 있을 것 같았다.송문수는 샤워를 마쳤다.평소라면 몇분이면 끝낼 샤워를 오늘에는 한번 또 한 번 반복해서 씻었다. 행여나 깨끗이 못 씻었을지 몇 번이나 더 씻은 후 겨우 욕실을 나와 침대에서 하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지수가 이미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으나 지수는 더 오래 걸렸다.아마도 그와 똑
하지수는 민망함에 얼굴이 더 붉어졌다.그녀는 송문수와의 관계가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직 아이를 가질 정도까지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송문수도 민망해하며 말했다.“저희 둘 사이 일은 걱정하시지 마세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네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이러는 거야.” 송문수 어머니는 핀잔을 주었다.“네가 조금 더 잘했으면 지금쯤 애가 뛰어다니며 놀 나이가 됐을 거야.”“엄마! 그만 하세요.”문수는 더 이상 듣기 싫었다.“그래, 알았어. 근데 내가 다시 한번 강조하는 건데, 너 다시는 지수 같은 여자애 못만난다는거 기억해. 지수 놓치면 평생 후회하면서 혼자 살게 될 거라는걸.”“알겠어요, 알겠다고요.”송문수는 잔소리가 듣기 싫었지만, 어머니의 말에 반대는 하지 않았다.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송승우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자리를 박차 거실을 나갔다.모든 사람의 눈길이 그에게로 향했다.송문수는 송승우가 왜 화가 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하지수도 송승우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지수도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눈길이 가게 된 것이었다.송문수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송승우에 대한 마음은 일찌감치 접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송문수는 시선을 돌렸지만, 마음속으로는 내심 안도했다.하지수는 정말 송문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송승우의 돌발행동에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이에 대해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가장 많은 논의가 있었던 것은 역시나 아버지의 생일파티와 그들에게 아이를 낳는 것을 권유하는 것이었다.저녁 아홉 시, 송문수와 하지수는 집으로 돌아갔다.야근을 자주 하는 탓에 이렇게 일찍 귀가한 적은 처음이었다.예전에는 집으로 돌아오면 너무 피곤해서 샤워만 하고 각자 잠에 들었었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일찍 돌아온 탓에 오히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언제부터인가 두 사람 사이의 기류는 점점 부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눈만 마주쳐도
송문수는 깍지를 끼고 있는 두 손을 바라보았다.심장은 더욱 빨리 뛰고 따뜻함은 배가 되고 있었다.그녀의 마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송문수 역시 더욱 세게 손을 잡았다.하지수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로, 로비로 들어갔다.그곳에는 문수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셨다.문수의 형, 송승우도 앉아 있었다.둘이 손을 잡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승우의 눈에는 분노가 차올랐다.지금 도발하는 건가? 송문수와 하지수가 일부러 도발을?송문수의 부모님 역시 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 흐뭇하게 웃고 계셨다.이 얼마나 바라왔던 일인가.문수의 어머님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시며 말씀하셨다.“얼른 들어와, 지금 바로 저녁 준비하라고 할게.”“네, 엄마.”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어머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도 그런 문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그녀는 누군가와 손을 잡는 게 이렇게도 설레는 일인지 처음 깨달은 듯싶었다.그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송문수와 하지수는 나란히 앉아 밥을 먹을 때에도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님은 흐뭇하기 그지없었다.유독 송승우만 얼굴이 굳은 채로 한 술도 먹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너무 고생 많았어. 오늘은 특별히 너희가 좋아하는 반찬들을 준비했으니까 많이 먹어.”송문수 어머님은 반찬을 덜어주며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송문수 아버님도 문수의 업무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질문도 하시곤 하셨지만, 문수를 지지해 주시는 마음은 느낄 수 있었다.저녁 식사는 시끌시끌하였다. 송승우만 빼고 말이다.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혼자만 쓸쓸한 저녁 식사였다.식사가 끝난 후, 수다는 계속되었다. “곧 너의 아버님 환갑인데 난 시끌벅적 크게 보내고 싶은데 어때?”“좋아.” 송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원하는 대로 해. 엄마랑 아빠가 기분 좋은 게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