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그가 메시지를 못 본 줄 알았다.“그럼 왜 왔어요?”“밥 먹으러요.”진짜 할 말이 없었다.“화장실은 어디 있어요?”육현경이 물었다.“방에 있어요.”혼자 살기 때문에 공용 화장실을 거실과 연결해 투명한 서재로 만들었다.육현경이 방에 들어갔다.침대에서 곤히 잠든 육민을 보고 화장실에 들어갔다.소이연이 돌아서려던 순간,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육현경이 문을 닫자마자 화장실에 버럭 뛰어들었다.육현경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이연 씨, 이게 지금…”소이연은 순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방금 샤워를 마치고 갈아입은 옷과 속옷들을 치우지 않았던 것이다.한 손에 옷을 움켜쥐고 다급하게 몸 뒤에 숨겼다.육현경이 보고 피식 웃었다.소이연이 옷을 갖고 바로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이현 씨.”육현경이 뒤에서 불렀다.소이연이 고개를 돌린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육이현이 글쎄 브라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그것도 가느다란 손가락에 걸고 높이 쳐들었다.방금 실수로 바닥에 떨어트린 걸 주은 거야?어떤 물건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모르나?이건 실례라고!소이연이 홱하고 빼앗아 도망치 듯 나왔다.귀까지 빨개졌다.…육현경이 화장실에서 나올 때 소이연은 소파에 앉아 이미 진정한 뒤였다.다 큰 성인들끼리 부끄러워할 것 없어.소이연이 육현경을 보내려고 일어서는데 그가 손에 드라이기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소이연은 의아했다.육현경이 소이연과 가장 가까운 거리의 콘센트를 찾아 드라이기를 꽂으며 말했다.“머리 말려 줄게요.”“…”“민이 잘 챙겨주고 저녁까지 차려줘서 고마워요.”“드레스는 이미 선을 넘었어요.”소이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매장에서 환불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육현경이 말을 이었다.“당신이 다른 사람이 사주는 드레스를 입는 게 싫지만 훌륭한 사업가라면 최대의 잉여 가치를 거절하면 안 되거든요.”소이연은 이 남자가 이토록 예의 바르게 제 욕심을 차리는 것에 감탄했다.육현경은 더는 말하지 않고
그동안 알고 지내면서 육현경은 이름 외에 자신의 가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맞습니다.”육현경이 대답하더니 이내 물었다.“언제 알았어요?”“방금.”소이연이 대답했다.“어렵지 않았어요. 성이 육 씨이고 홀아비에 씀씀이도 적지 않았으니까. 유일하게 어울리지 않은 건…”육현경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소문보다 훨씬 잘 생겼어요.”“고마워요, 칭찬으로 받아 줄게요.”“…”소이연은 그저 사실을 말할 뿐이었다.“숨길 생각은 없었어요.”육현경이 직언했다.솔직히 소이연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 아직 물건을 사서 주고받는 사이까진 아니었으니까.오늘 물어본 것도 마침 17일이 육 어르신 칠순 잔치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니 시간을 내라고 했을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시킬지 그 정도는 알 필요가 있다 생각했다.“누가 나를 소방관이라고 하길래 내가 설명하면 거짓말한다고 할 것 같아서요. 17일에 정식으로 소개를 하려고 했어요.”육현경이 아무렇지 않다는 말투로 말했다. 살짝 비꼬는 느낌도 있었다.소이연은 누굴 비꼬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 사람은 항상 눈썰미가 안 좋았어요.”육현경이 피식 웃었다.문서인에 대한 평가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늦었어요. 일찍 쉬고 민이 잘 부탁할게요.”“조심히 가세요.”육현경을 보내고 그제야 소이연이 침대로 돌아왔다.살면서 처음으로 침대에 다른 누군가를 들였다.이런 느낌은 너무 묘해서 전혀 싫지 않았다.희미한 불빛에 육민이 쌔근거리면서 자는 모습이 보였다.마음이 왠지 모르게 따뜻해졌다.이튿날 아침.소이연이 간단하게 아침을 차렸다.토스트, 계란과 우유.육민은 소이연이 무엇을 만들든, 계란후라이를 태워도 연속 맛있다고 칭찬했다.칭찬 소리에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둘이서 아침을 다 먹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소이연이 문을 열자 문씨 아저씨가 공손히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이연 아가씨. 우리 집 큰도련님께서 고객을 만나야 돼서 제가 작은 도련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진짜예요?”“그럼.”내일이면 육 어르신의 칠순 생신이다.확답을 듣고서야 육민이 웃으면서 아저씨를 따라나섰다.소이연도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화장하고 출근길에 나섰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장문기가 초청장 한 장을 들이밀었다.“육씨 그룹 어르신께서 내일 저녁에 생신연회를 여신대요. 회장님도 초대하셨어요.”소이연이 열어보았다. 초청장에 자신의 이름이 웅건한 필체로 멋지게 적혀 있었다.육현경이 직접 쓴 것 같은 느낌 적인 느낌.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소이연이 고개를 들어 소나은을 바라봤다.“언니 찾으러 왔어요.”소이연이 장문기한테 나가 보라하고 초청장을 서랍에 넣었다.“어제 내가 일 때문에 나갔어. 회사 사이트에 내가 무단 결근했다는 것까지 올려야겠어?”소나은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따지러 왔다.출근하자마자 컴퓨터 창에 뜬 공식홈페이지 메시지를 보고 뚜껑이 열릴 뻔했다.어엿한 총괄 경영자로서 무단결근 통보를 받다니 이건 남의 웃음거리가 되란 말 아니야?“회사에도 회사의 규칙이 있으니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해야지.”“언니도 어제 무단결근했잖아?”“회사는 내 거야.”소이연이 차갑게 바라보았다.“그 말은 회사의 규정은 내게 무효라는 말이야.”소나은은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받아들일 수 없으면 은하그룹에서 나가도 돼.”소이연이 여전히 싸늘하게 말했다.이 기회에 나를 쫓아내려고? 누가 속을 줄 알아?“무단결근한 건 내가 잘못했어. 다음엔 안 그럴게.”소나은은 순순히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소이연이 냉소했다.“그럼 나가 봐.”소나은이 이를 악물고 돌아서는 순간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그동안 소이연에게서 받은 억울함과 치욕을 반드시 배로 갚아주겠다고 결심했다.사무실에 돌아왔지만 소나은의 안색은 여전히 보기 흉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한참이나 마음을 가라앉혀서야 전화를 받았다.“서아야.”“내일 소이연도 육씨 어르신 생신파티에 초대받았어?”소나은이 기억을 더듬
호화로운 연회장 내에 이미 손님으로 가득 찼다.장안 상류사회에서 정상급 인사들이 전부 모였다.소나은은 들뜬 표정으로 소승영 그리고 양화랑, 소준환과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갔다.육씨 연회에는 일반 그룹은 물론 아무리 재벌 집 자녀라고 해도 부모들의 중시를 받지 않으면 참가할 수 없었다.오늘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신분의 상징이자 큰 영광을 뜻했다.“나은아!”멀리서 문서아가 불렀다.“아버지. 친구 보러 갈게요.”“그래.”소승영이 당부했다.“행동거지를 조심해. 오늘 연회는 평소 연회와 달라서 무례하게 굴면 안 된다.”“당신도 참, 걱정 마세요. 나은이 일찍부터 철 들었다고요.”양화랑이 자랑스럽게 말하자 소승영이 흐뭇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소나은이 신난 표정으로 문서아에게 다가갔다.문서아 옆에 문서인이 있었다. 문서인은 상류사회의 젊은 도련님들과 함께 있었다.“서인 오빠.”소나은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문서인은 미소만 지을 뿐 너무 친밀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아직 대외에 소이연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기에 소나은과의 관계를 드러내면 안 되었다.두 사람은 강 건너 바라보듯 눈길만 주고받았다.“서인아, 네가 육씨네 큰도련님을 만나봤다면서?”그때 한 도련님이 문서인에게 물었다.“만났어.”문서인이 대답했다.“그래도 네가 체면이 있구나.”도련님이 감탄했다.“전에 내가 육 도련님을 만나러 갔을 땐 문전 박대를 받았거든.”“나도.”다른 도련님도 맞장구를 쳤다.“그 도련님은 대체 어떻게 생겼다냐?”“우리가 어떻게 문서인과 비교할 수 있어?”또 누군가 말했다.“서인은 혼자 힘으로 문씨 가문을 일으켰어. 장안에서도 쟁쟁한 인물이지. 우리와 달라.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같이 생매장당할 신세 아니라고.”그 말에 모두 껄껄 웃었다.농담소리 같지만 문서인을 칭찬하는 말은 진심이었다.“이따가 육 도련님을 보면 우리한테 소개해줘. 우리 아빠가 그렇게 육 도련님과 친분을 맺으라고 하신다. 같은 젊은이끼리 많이
“설마 누구랑 같이 왔나?”문서아가 그럴 만한 가능성을 말했다.소나은도 그럴 거라 믿었다.두 여자가 반응하기 전에 문서인이 소이연에게 다가가는 걸 보았다.소이연이 연회장에 들어온 순간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꼈다.그래도 태연하게 행동했다.문서인을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태연하게 행동해야 했다.“네가 어떻게 왔어?”문서인이 나지막하게 물었다.“여긴 육씨 가문 연회야. 문씨 연회가 아닌 이상 내게 물을 자격이 없을 것 같은데?”소이연이 비꼬아 말했다.“소씨 가문에서도 너를 데리고 오지 않았는데 은하그룹이 어떻게 육씨 초청장을 받을 수 있지? 너 어떻게 들어온 거야?”“그래서 뭘 의심하는데?”“소이연, 연회에 함부로 들어오는 건 아주 창피한 일이야.”문서인이 매섭게 말했다.그 말에 소이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됐다.”문서인이 갑자기 태도를 바뀌며 호의적인 표정을 지었다.“내 옆에 있어. 누가 물어보면 나랑 같이 왔다고 둘러댈게. 필경 다른 사람들 눈에 우리 아직 사귀는 사이로 보이니까.”그러면서 소이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하지만 소이연이 바로 뿌리쳤다.문서인이 돌변했다.“소이연. 억지 부리지 마. 지금 너를 돕는 거라고.”“네 호의 따위 필요 없어.”소이연이 싸늘하게 거절했다.“각자 알아서 챙겨.”말을 끝낸 소이연이 문서인 앞을 지나갔다.문서인이 험상궂은 얼굴로 소이연의 뒷모습을 쳐다봤다.눈부신 긴 드레스가 그녀에게 너무나 잘 어울려 아름답기 그지없었다.“미쳐버리겠어.”문서아가 그 모습을 보고 짜증을 냈다.“오빠도 참, 뭐 하러 소이연 신경을 써.”소나은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분명 헤어졌으면서 아직도 소이연을 잊지 못하는 거야?절대 문서인을 빼앗길 수 없어!“서아야.”소나은이 문서아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소이연이 몰래 들어왔다면 우리가…”그 말에 문서아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이 연회장 입구로 다가갔다.소이연은 연회장 한 켠에 서서 샴페인 한 잔을 가볍게 마셨다.
“서인이 여자친구 아니에요?”그때 지나가던 도련님이 아는 척해왔다.문서인과 친분이 조금 있어 소이연과 만난 적이 있었다.소이연이 예쁘게 생긴 건 진작에 알았지만 오늘 저녁 소이연은 너무 예뻐서 알아보지 못했다.“서인이랑 같이 왔어요? 제가 가서 서인이 불러올게요.”이 도련님은 그래도 호의적인 편이었다.필경 예쁜 여자에겐 마음이 약해지는 편이니까.게다가 소이연이 살짝 안쓰럽기까지 했다.“문서인은 저런 여자 어디가 좋아서 사귀었나?”옆에서 또 여자의 비꼬는 목소리가 들렸다.“지난번에 두 사람 약혼이 무산되지 않았어? 하느님도 문서인이 이런 여자한테 물들이는 게 싫었나 보지.”소이연은 덤덤하게 들을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습관이 되었으니 정말 뭐라고 말하든 괜찮았다.고개를 숙여 지갑에서 초청장을 꺼내려고 할 때 문서인이 그 도련님한테 불려 왔다.“문 선생님.”직원이 깍듯하게 말을 건넸다.“아가씨가 초청장 없이 연회장에 들어왔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혹 도련님과 함께 입장하신 건가요?”문서인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방금 소이연이 무시했던 태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이연, 너 왜 왔어?”문서인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몸이 불편해서 안 온다고 했잖아.”자신이 소이연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소이연이 코웃음을 쳤다.소나은은 문서인이 소이연을 도와줄까 봐 무척이나 긴장했었다.그런데 방금 문서인의 말에 기분이 상쾌했다.이러면 소이연도 거짓말을 못하겠지?소문이 난다면 얼굴도 들지 못하고 다니게 될 거야.“정말 초청장도 없이 들어왔다니 너무 웃기다!”옆에 한 여자가 노골적으로 비꼬았다.“소이연은 정말로 상류층의 웃음거리야.”“무슨 상류층까지. 진작에 소씨네 가문에서 제명당했잖아. 문서인과 사귀지 않았다면 누가 상대해 주겠어?”“빨리 쫓아내지 않고 뭐하는 거야? 창피해 죽겠어.”직원이 문서인의 말을 듣고 바로 소이연에게 직언했다.“죄송합니다. 아가씨. 초청장이 없으면 연회에 들어올 수…”말이
“훗!”소이연이 코웃음을 치며 지나갔다.득의양양한 모습을 본 문서아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그만해!”문서인이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문서아에게 화풀이를 했다.“허튼 수작이나 부리고 창피하지도 않아? 나은아. 문서아한테서 나쁜 것을 배우지 마!”문서인이 한마디를 던지고 씩씩거리며 떠났다.문서아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소이연을 제보하자는 건 소나은 짓이란 말이야!문서아가 소나은을 질책했다.“왜 나서서 해명하지 않아?”“나… 그게…”소나은은 억울한 척했다.“내가 반응하기 전에 네 오빠가 벌써 거기 가 있었어.”문서아가 울분을 참으며 가버렸다.소이연으로 인한 소란은 연회장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권세가들은 여전히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오늘 주인공이 오길 기다렸다.갑자기 입구에 한 사람이 나타나자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검정 슈트를 입은 남자가 등장하면서 분위기를 압도했다. 연회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여기 대부분 사람들이 육현경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누구도 육현경이 왔다고 의심하지도 않았다. 오직 문서인만 적극적으로 다가가며 인사를 올렸다.“육 도련님.”모두 앞에서 태연하게 손을 내밀더니 이명진과 인사를 나누었다.이명진이 의아한 눈길로 쳐다봤다.이 사람 어디 잘못된 건가?이명진이 시선을 돌려 사장님을 바라봤다.문서인도 따라서 고개를 돌린 순간 경악했다.소방관이 왜 육현경 옆에 있지? 설마 보디가드가 된 건가?육현경이 이명진에게 눈짓을 했다.이명진이 눈치를 채고 바로 문서인과 악수를 나눴다.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행을 떠나 바로 연회장 뒤 켠에 있는 VIP휴식실로 들어갔다.연회장이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다.문서인은 또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도련님들의 칭찬을 받았다.“서인아, 이따가 꼭 육 도련님한테 우리를 소개해야 해.”“육현경과 친분을 맺으면 우리 형제들도 잊지 말고.”문서인은 겉으론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론 엄청 뿌듯했다.육씨 가문은 장안
“그럼 뭐가 달라지나?”문서인이 계속 비꼬아 말했다.“그래도 하.등.인이잖아.”소이연은 그저 담담하게 문서인을 바라기만 했다.그때 홀에서 육현경이 다가왔다.소이연의 눈꺼풀이 살짝 흔들렸다.문서인도 다가오는 사람을 보면서 더 비꼬아 웃었다.문서인 옆에 있던 친구들도 우르르 쓸어왔다.‘육현경’ 측근과 가까이 있는 걸 보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었다. 대화에 끼어서 육현경과 조금이라도 관계를 맺을 수 있길 바랐다.“서인아, 이분은 누구셔?”한 도련님이 물었다.이 남자의 분위기가 남달라서 아직 신원을 파악하지 못했다.문서인이 시큰둥하게 말했다.“육 도련님 보디가드야. 소방관 출신이었지.”“그래?”한 도련님이 의아해하면서 한마디 했다.“요즘 소방관들은 인물로 뽑나 봐.”“인물로 뭘 할 수나 있겠어?”문서인은 전혀 체면을 주지 않았다.육현경이 문서인을 흘겨보더니 소이연 옆에 서서 작게 소곤거렸다.“이따가 민이가 할아버지랑 같이 오거든요. 민이가 자기 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어요.”“알았어요.”소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난 저쪽에 가봐야 돼서, 먼저 갈게요.”“일 보세요.”소이연은 이해하고도 남았다.오늘 육현경이 주인이니 많은 분들과 인사를 나눠야 했다.육현경이 돌아서 가자 몇몇 도련님들이 뒷모습을 보며 감탄했다.“저 차림새가 보디가드라고?”그렇다면 저 보디가드의 신분이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정시가 되자 전체 연회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드디어 주인공이 등장하는 모양이다.모든 사람들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마침 휠체어에 앉은 어르신이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들어오고 있었다.어르신이 자주 상류사회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당연히 알아보고 있었다.어르신이 나타나자 모두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순간 어르신이 인파속에 묻혔다.소이연도 그쪽으로 다가갔다.“소이연.”문서인이 갑자기 잡아당겼다.소이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뿌리쳤다.“네 신분을 알라고. 망신 당하러 가지 마.”소이연이 어르신한테 다가가는
예수진:[그럼 너랑 지수 다 서울에 있는 거야? 아직 병원이야?]예수진:[부모님은 좀 어떠셔? 충격이 크시지?]그들의 문자에 하나하나 답장을 하던 송문수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누구한테 일어나도 참혹한 비극인데 그 일이 제 형한테 일어났으니 송문수는 어떻게 송승우를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근심 속에서 밤이 깊어지자 하지수가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자?][아니.][병원에서 잘 수 있으면 어디서 눈이라도 좀 붙여. 문수 씨도 쉬어야지,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티시면 남은 건 당신뿐이야.][알아 나도. 넌 왜 아직 안 자? 시간 늦었는데.][당신이 걱정돼서.][뭐하러 날 걱정해, 난 괜찮아. 송승우가 문제지...]그의 문자에 어떤 말로 답을 해야 할지 몰랐던 하지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송문수도 그만 대화를 끝내려 했다.[늦었으니까 얼른 자.][응.][나 대신 부모님 좀 잘 챙겨줘, 엄마 아빠 쓰러질까 봐 나 너무 무서워.][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핸드폰을 내려놓은 송문수는 중환자실 앞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다.중환자실에서 나온 송승우가 바로 입원할 수 있게 병원에서 VIP 병실을 열어줬지만 송문수는 그 편한 곳도 마다하고 굳이 송승우 옆을 지키고 있었다.아무리 송승우라 해도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 봐.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아침까지도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던 송문수는 간호사의 친절한 부름에 서서히 눈을 떴다.“보호자분?”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몸을 일으킨 송문수는 의아한 눈으로 간호사를 바라보았다.“환자분이 보호자분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송승우 씨가요?”중환자실을 가리키며 당황한 듯 묻는 송문수를 향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송문수 씨가 중환자실로 와줬으면 하세요.”“면회 안된다면서요?”“좀 전에 선생님이 또 몸 상태 체크하셨는데 이젠 다 정상수치로 돌아와서 면회 가능하시대요. 대신 시간만 좀 주의해주세요. 아직 몸이 약하셔서 이럴 때는 저희도 환자분 부탁이라면 뭐든 다
시부모님의 몸 상태를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던 하지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송기명은 더욱이 쓰러진 지 얼마 안 된 터라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다가는 정말 큰 일이 날 것 같았다.“아버님, 어머님, 여긴 문수 씨한테 맡기도 우린 먼저 호텔에 가 있어요.”하지수의 거듭되는 권유에 송기명과 허영지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고 송문수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알겠다니까요. 걱정 마시고 가세요. 제가 입구까지 모셔다드릴게요.”송기명과 허영지를 차에 태운 송문수는 조수석에 앉은 하지수를 바라보았다.모든 감정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녀도 송문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의 눈엔 미련이 가득했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그렇게 차가 출발하고 방향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송문수는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중환자실 복도에 앉은 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리고 핸드폰을 켜보았다.역시나 수많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그의 알림창을 꽉 채우고 있었다.다른 문자는 싹 다 무시한 송문수는 친구들과의 방, 그리고 소이연, 예수진이 함께 있는 단톡방, 이렇게 두 곳에만 답장을 했다.육현경:[대체 무슨 일이야?]계지원:[문수야, 너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아저씨 생신 파티는 왜 취소하는 거야?]하도경:[말 좀 해봐, 전화도 안 받고. 이러다가 다들 답답해 죽겠어,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또 다른 단톡방에 있던 소이연과 예수진 역시 걱정스러운 문자를 보내왔다.소이연:[문수 씨, 무슨 일 있는 거죠?]예수진:[송문수, 답장 안 해? 기사 보니까 아줌마 안색도 엄청 안 좋던데 무슨 일이 나긴 난 거지?]예수진:[말 좀 하라고 이 자식아!]소이연:[수진 씨 진정해요 일단. 문수 씨랑 지수 씨가 바빠서 답장을 못 하는 것 같은데 급한 일 다 보고 나면 우리한테도 알려줄 거에요.]예수진:[알겠어요, 기다려봐야죠 뭐.]자신의 화면을 가득 채운 문자를 보던 송문수는 손가락을 움직여
송문수가 사 온 물을 건네도 부모님은 고개만 저으며 손을 모으셨다.그래서 하지수에게 건네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물을 받아들었다.서울에 온 뒤 송씨 일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줄곧 자리를 지키며 송승우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송승우가 눈을 뜨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는 받아든 물이라 몇 모금 마시기는 했지만 물을 마시면서도 신경은 온통 송승우에게 쏠려있었다.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송승우의 몸을 보게 되었다.너무 아파서인지 아니면 힘이 없어서인지 몸은 미세한 떨림 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송승우의 눈이 서서히 떠지고 있어 하지수는 잔뜩 흥분한 채 외쳤다.“승우 오빠 일어났어요!”“문수, 문수야! 얼른 의사 불러와!”하지수의 말에 정신을 차린 부모님이 송문수에게 의사를 데려오라 했고 송문수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의사는 중환자실에서 각종 검사를 진행했다.방음효과가 워낙 좋은 중환자실이라 의사와 송승우의 대화를 듣지 못했던 가족들은 또다시 초조해 났다.한참이나 지나서 중환자실 빠져나오는 의사에 허영지가 다급히 달려가 물었다.“선생님, 저희 아들은 좀 어떤가요?”“방금 검사 진행했는데 생명엔 아무 지장 없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하지만 아직 회복이 덜 돼서 여기서 며칠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일반병실로 옮겼다가 세균감염이라도 되면 큰일이거든요.”“알겠습니다, 입원은 며칠 하든 상관없으니까 저희 애 잘만 치료해주세요. 그런데 저희가 들어가서 같이 있어 주는 건 괜찮을까요?”“아직은 들어가지 마세요. 환자분도 방금 깨어나셔서 머리가 어지러울 겁니다. 오늘은 그냥 쉬게 놔두시고 내일 상태 좀 나아지면 그때 들어가 보시게 도와드릴게요.”“감사합니다 선생님!”“아닙니다.”감격 어린 허영지의 말에 의사가 한마디 더 보탰다.“환자가 아직은 본인 몸 상태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면회하실 때도 다리 절단한 사실은 일단 말하지 마세요. 환자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그 말에 허영지는 대성통곡을 했고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끄떡없던 송기명마저 아들 일에 눈물을 보였다.평소에 사이는 안 좋았지만 그래도 친형이었기에 송문수도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고 하지수 역시 송승우가 다리를 잃는다는 말에 눈물을 떨어뜨렸다.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는데.어릴 때부터 본인 잘난 멋에 살던 사람이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되려 죽겠다고 난리를 칠 것 같아 하지수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목숨이 다리 한쪽보다는 더 중요했기에 결국 사인을 한 송기명은 온몸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기분 좋게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인 줄로만 알았는데 갑작스레 닥친 비극에 송문수도 아버지를 부축하며 착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지는 수술에 다들 정신을 반쯤 놓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고요한 복도에 갑자기 인기척이 들리더니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걸어 나왔다.가족들 못지않게 속을 태우던 장지석은 피곤한 듯 마스크를 벗는 의사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가 물었다.“승우는 좀 어떻습니까?”그제야 가족들도 정신을 차리고 하지수와 송문수가 어머니 아버지를 부축한 채 의사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다른 말보다 먼저 나온 게 의사의 한숨이라 허영지는 쓰러질뻔한 걸 간신히 버텨내며 물었다.“왜 그래요 선생님, 우리 아들 잘못된 거 아니죠?!”“생명엔 지장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런데...”“그런 데라뇨!”“환자분이 다리를 잃었으니 깨어나시고 나서도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정할 겁니다. 가족분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습니다. 오른쪽 다리 외에도 몸 각 부위가 다 강한 충격을 받아서 일단은 중환자실에서 회복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의식 돌아오고 모든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오면 그때 일반병실로 옮길 겁니다.”의사의 말에 허영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송기명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금 그들은 전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있었다.그들도 송승우가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
만약 하지수가 송승우의 교통사고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제가 그런 하지수를 제대로 바라볼 수나 있을지 송문수는 지금 모든 게 미지수였다.송승우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를 정말 친오빠처럼 생각했던 하지수는 역시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서울 가장 좋은 병원에 입원해 있대.”“나 서울 가야겠어.”“그래요 여보.”마침내 정신을 차린 허영지가 입을 열자 송기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갈 거면 다 같이 가야죠. 오늘 파티는 일다 취소하죠.”부모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문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파티장 취소할 테니까 지수 너는 서울 가는 티켓이랑 차량 좀 준비해줘.”“알겠어.”이미 혼이 반쯤 나간 부모님을 모시려면 본인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기에 하지수는 바로 기사에게 연락하며 공항까지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그리고는 한 시간 뒤에 출발인 항공편까지 끊어놓았다.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송문수는 서둘러 파티를 취소하고 있었는데 직원을 시켜 손님들께 나중에 아버지와 직접 찾아뵙고 취소이유를 말씀드리고 사과까지 드린다는 말도 전하게 했다.공항에 도착한 뒤에도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송문수는 여러 가지 일을 지시하느라 바삐 돌아치고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차분했다.하지만 다들 송승우를 걱정하고 있어서 확 달라진 송문수에게 주의를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1시간이 넘는 비행을 마치고 서울공항에 내린 송씨 일가는 바로 대기 중이던 차를 타고 서울 대학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나와 있던 송승우의 동료가 그들을 맞아주었다.“아주머니, 아저씨 오셨어요? 저는 승우 형 직장 동료 이찬혁이라고 합니다. 형은 안에서 수술 중이에요.”“우리 아들 많이 심한가요 지금?”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걱정을 멈출 수 없었던 송기명이 이찬혁을 붙잡고 묻자 그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저도 좀 전에 연락받고 온 거라 상태가 어떤지는 정확히 몰라요. 형이 실려 올 때는 의식이 있었다고 하니까 아마도...”
문자를 본 허영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자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사모님, 무슨 일이라도 난 겁니까? 왜 그러십니까?”특종을 잡은 것마냥 달려드는 기자들에 송씨 일가 사람들도 다 같이 허영지를 주목했다.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진 그를 보며 송기명이 물었다.“여보, 왜 그래요?”아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시울만 붉히고 있자 조급해 난 송기명이 다시 한번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요?”“엄마, 무슨 일 있어요?”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긴장한 채로 물어왔지만 허영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기 시작했다.그에 미간을 찌푸린 송문수는 아직 켜져 있는 엄마의 핸드폰을 가져와 문자를 확인했는데 그 역시 문자를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송 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핸드폰으로 뭘 봤길래 사모님이 저러시는 겁니까?”기자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그는 바로 허영지의 핸드폰을 들고 기자회견장을 벗어났다.“대표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무슨 일인지 한 말씀 해주세요!”하지만 그런 무시에도 굴하지 않는 기자들이 송문수를 따라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호원들이 몸을 던져 그들을 막기 시작했다.송문수의 표정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아챈 하지수도 입술을 말아 물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복도로 나오자 송문수는 이미 통화 중이었는데 통화가 거듭될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송문수의 표정이 저 정도로 굳어있다는 건 무언가 큰일이 났다는 뜻이었다.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본 적 없던 표정이라 하지수는 자연스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음주운전으로 잡혀갈 때도 침착하기만 하던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지 하지수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한참 동안 통화를 하다 전화를 끊은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문 채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하지수에게로 다가갔다.밖으로 나온 허영지와 송기명도 그저 장난 전화이길 바라며 송문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
“오해 아닙니다, 전에는 저 그런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변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송 회장님의 입원 때문입니까?”“제 우상이시던 아버지가 쓰러지신 것도 하나의 이유죠. 제 눈에 아버지는 늘 이 집안을 지키는 영웅이셨고 절대 늙지도 않을 것 같던 분이셨는데 갑자기 아프다고 하시니까 그때 이 집안을 책임질 사람은 저뿐이더라고요.”이젠 다 커서 자신의 고초도 이해해주는 어엿한 아들을 보며 송기명은 아주 감동스러워했다.“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제 아내인 하지수 씨입니다.”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모든 카메라도 그녀에게 집중되었다.갑작스러운 이목에 놀랄 새도 없이 송문수는 말을 이어나갔다.“제 아내가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회사를 지키기 위해 같이 밤을 새우면서도 불평불만 한마디 없었던 사람입니다. 성격 안 좋은 저를 보듬어주고 격려해주면서 제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줬어요. 그래서 저는 제 아내한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저를 언급하며 고맙다고 하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심장은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소문에 의하면 두 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하던데, 진짭니까?”“당연히 사실이 아닙니다.”“저희 사이좋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철이 없어서 아내한테 상처 주는 일도 많이 해서 사이가 위태로웠겠지만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지금 혹시 사모님한테 고백하시는 겁니까?”기자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반박하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을 붉히는 송문수를 보며 다들 제 눈을 의심했다.파파라치한테 찍힐 때도 이미지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까지 휘두르던 사람이 언제 이렇게 쑥스러움이 많아졌나 싶어 다들 당황해하고 있는데 하지수는 그의 모습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으면 그간의 이상하던 태도와 관계를 피했던 이유도 더 이상은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송승우 씨는 왜 오지 않으신 겁니까, 오늘은 불참하시나요?”“두 분은
화장을 마치고 머메이드 드레스로 갈아입은 하지수는 불빛 아래에서 더 반짝이는 드레스를 보며 아무래도 자신이 허영지를 가리는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시 한번 송문수를 불러보았다.“문수 씨, 이게 진짜 괜찮다고?”정말 아닌 것 같아서 한 질문이었지만 송문수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 마, 이거 네 거 맞다니까.”“진짜 어머님이 준비하신 거 맞지?”“너 나 안 믿을 거야?”송문수가 목소리를 깔며 말하자 하지수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입을게.”정말 허영지의 뜻이라면 하지수도 걱정할 게 없었다.사실 평소 하지수에게 검소하다는 말을 자주 하던 허영지였기에 그녀가 이런 드레스를 준비했다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이번 기회에 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시어머니의 마음인가보다 하며 하지수는 나갈 준비를 마쳤다.“가자 이제.”“엄마가 인터뷰 있다고 빨리 오래. 사진도 찍어야 한대.”“그래.”차에 탄 뒤에도 송문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리를 덜덜 떨며 자꾸만 핸드폰을 확인했다.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하지수가 그를 부르자 송문수는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문수 씨.”“어?”“더워?”에어컨을 틀어 시원한 차 안에서도 땀을 흘리는 게 이상해서 한 질문인데 송문수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아니.”“땀 나는데?”“그래?”제 이마에 묻은 땀을 훔치던 송문수가 또 말을 바꾸자 하지수는 그를 수상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좀 더운 것 같기도 해.”“오늘 왜 이래? 당신 좀 이상한 것 같아.”“아무것도 아니야.”송문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쉽게 넘어갈 하지수가 아니었다.“어디 아파?”“그럴 리가, 나 소처럼 건강한 남자야, 병도 잘 안 걸린다고.”“...”누가 봐도 오바하는 것 같았지만 사정이 있겠지 싶어 하지수도 더는 묻지 않았다.그들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도 이른 시간이었지만 매체들에서는 더 빨리 와 있었기에 기자들과 송기명, 허영지 모두 그들 부
아침 일찍 디자이너를 불러 단장을 마친 송기명과 허영지는 나이 들면 가만히 잊지 못한다는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른 시간부터 호텔로 향했다.그리고는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차피 송문수는 전화를 잘 받지 않으니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하지수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 이미 습관처럼 몸에 배 있었다.좀 전에 일어나서 스타일링을 받고 있던 하지수는 시부모님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다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네, 저희 일어났어요. 문수 씨는 씻고 있고 저는 화장하고 있어요.”“네, 먼저가 계시면 저희도 금방 갈게요. 8시 전엔 도착할 거에요.”통화를 마친 하지수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었다.본인이 주인공도 아닌데 화장이 너무 화려한 것 같았다.게다가 원래는 송문수와 커플룩으로 어머니께서 맞춰주신 복고풍 드레스를 입기로 했으니 어찌저찌 의상을 수정하다 보니 오늘 입어야 할 건 민소매인 머메이드 드레스가 되어버렸다.예쁘긴 예쁘지만 꾸민 티가 너무 많이 나서 고민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불렀다.“문수 씨, 나 진짜 이거 입어? 이거 어머니가 골라주신 것도 아닌데...”오늘 아침은 하지수보다도 더 빨리 일어난 송문수는 아까부터 소파에 앉아있었다.그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라 알람 소리에 눈을 뜬 하지수는 제 옆에 없는 송문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었다.출근할 때도 알람이 몇 번이나 울려서야 화를 내며 일어내던 사람이 오늘은 웬일인가 싶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60세 생일파티라 신경을 쓰는 건가 싶어 하지수도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었다.“뭐라고?”그런데 제가 한참 불러서야 모습을 드러낸 송문수가 혼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덜덜 떨고 있자 하지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오늘 뭐 발언이라도 할 거야?”“아니, 왜?”“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해?”“내, 내가? 아, 아니야! 그럴 리가!”“아직 잠이 덜 깨서 그래!”송문수는 말까지 더듬으며 손사래를 쳤고 하지수는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