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저녁을 먹고 소이연은 예전에 늘 하던 대로 민이를 씻기고 동화책 한 권을 스스로 보게 한 뒤 자신도 샤워를 했다.옷을 벗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허리를 보니 새파랗고 큰 멍이 들어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팠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샤워를 했다.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구급상자를 꺼내 타박상 연고를 꺼냈다.거실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서 약을 바르기 편하게 옷을 들어 올렸다.허리를 내놓고 심지어 잠옷 바지도 살짝 내렸다.그녀가 거울을 보고 연고를 바르려던 그때 시선이 갑자기 한곳에 멈췄다.거울 속에서 갑자기 육현경이 거실의 창문 쪽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계속 그곳에 서 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소이연은 급히 옷을 내리고 바지를 올렸다.얼굴도 좋지 않았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어?”그녀는 분명 비밀번호를 바꿨다.육현경이 이렇게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그녀는 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올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민이가 문 열어줬어.” 육현경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소이연이 입술을 깨물었다.화재도 도둑도 막았지만 자기 아들은 막지 못했다.그녀는 스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뭐 하러 왔어? 민이 데리러 온 거야? 민이 자. 내일 주말이니까 안 데려 가도 돼.”육현경은 이미 소이연의 앞까지 와 있었다.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지금 집안은 그녀가 거울을 보고 있던 곳에만 밝은 조명을 켰을 뿐 다른 곳은 모두 약한 불빛이었다.불빛 아래의 육현경은 조금 위험해 보였다.소이연이 방어적인 태도로 말했다. “뭐 하려고?”육현경은 그대로 그녀의 잠옷을 벗겼다.“육현경.”“안 다쳤다며?” 육현경이 물었다. 시선은 그녀의 허리 부분의 파랗게 부은 멍 자국을 향해 있었다.정말 흉했다.“심아윤 씨 보다 안 심해.”“소이연, 너 진짜 아프다고 할 줄 몰라?”“타박상은 원래 이런 거야. 보기에만 이렇고 실제로는 안...... 아!” 소이연이 짧은소리를 질렀다.육현경이
소이연도 시간이 얼마나 흐른 지 알 수 없었다.그녀도 도대체 육현경이 약을 어떻게 바르는지 다 바르긴 한 건지 보이지 않았다.더 이상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다.그때 차가운 입술이 다친 곳을 피해 그녀의 허리에 닿았다.소이연은 매섭게 몸을 돌려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거울에 온몸을 밀착시키고는 굉장히 화가 난 듯 육현경에게 물었다. “뭐 하는 거야! 내 몸에 관심 없다며?”“참기 힘드네.”“육현경, 약혼녀가 있는 사람인 거 잊었어?” 소이연은 화가 정말 많이 났다.이보다 더 쓰레기 같을 수 있을까?!“아니.” 육현경은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 “아직은.”“비록 지금 결혼식을 올리진 않았지만, 약혼했잖아. 결혼도 먼 얘기가 아니야. 당신이 아무리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해도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 여자인 친구 집에 이렇게 아무렇게나 막 와? 종이 계약서라도 써야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거야?”육현경은 소이연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도대체 귀신에 씐 건지 스스로 컨트롤도 못 하고 그녀에게 뽀뽀를 했다.그녀의 몸에 사실 지금까지 면역력이 없었다.방금은 스스로 과대평가했다.“늦었어, 일단 돌아가 줘.” 소이연은 손님을 내쫓는 듯 말했다.육현경은 문을 나서며 말했다. “혼자 약 바르기 힘드니까, 수진이 내일 아침 일찍 올 거야. 내가 얘기해 뒀으니까 도와달라고 해.”“알아.”“잘 자......”쿵!문이 닫혔다.육현경은 그 자리에 서서 굳게 닫힌 문을 보고 있었다. 얼굴까지 부딪힐 뻔했다.사실 지금 당장 와서 소이연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하지만 한번 마주치면 참을 수 없을 만큼 계속 보고 싶었다.반년.반년 안에 반드시 이 모든 일을 처리해야만 한다.하지만 누가 알겠는가.예상치 못한 일은 항상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는 것을.일주일 뒤.은하그룹의 입찰 모집 사업이 드디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마지막 입찰 모집 현장.마지막으로 확정된 세 가문의 협력상이 현장 투표를 진행하고 있었다.한창인 가운데 갑자기
소이연은 장문기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지금 검찰청에 조사받으러 가, 남은 일 좀 나 대신 처리해 줘. 당연히 오늘 입찰 모집 사업은 이어서 진행할 수는 없을 거고 내가 나오면 다시 얘기하자. 뒷수습 좀 잘 해줘.”“네.” 장문기가 급히 대답했다.긴장감을 감출 수 없는 얼굴이었다.그는 회장님의 침착함이 정말 감탄스러웠다.간단하게 인수인계를 마친 뒤 소이연은 검찰청 사람을 따라 자리를 떴다.소이연의 형사 구속 사건은 아주 빠른 속도로 장안시 전체에 퍼져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이때 소이연에 관한 기사가 많이 올라왔다.그녀에 대한 열기가 식기 무섭게 또 다른 충격적인 뉴스가 터져 나왔다.검색어 순위에 밥 먹듯 오르내리고 있었다.육현경은 마침 외국에서 미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예수진이 연락한 덕분에 소이연의 소식을 들었다.그는 처음에 전화를 받지 않고 끊었다.두 번째 전화가 걸려 오자 육현경은 뭔가 잘못된 것을 감지했다.예수진은 항상 그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그가 바쁠 때에는 절대 귀찮게 하지 않았다. 소이연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제외하고는.그는 곧바로 회의실을 나왔다.회의하던 고위층 사람들은 모두 서로 얼굴을 보며 의아해했다.육현경이 회의 도중에 자리를 뜨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왠지 낯빛도 안 좋아 보였다.명진도 눈치채고 빠르게 대표님의 뒤를 따라갔다.“무슨 일이야?” 육현경은 전화를 받자마자 물었다.“오빠......” 예수진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이연 언니 큰일 났어.”육현경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얼어붙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인데?”“오늘 뉴스에서 봤는데 검찰에서 이연 언니를 뇌물죄, 탈세로 데려갔어. 나 지금 다른 지역에서 리얼리티 쇼 촬영하고 있어서 내일 모레나 돼야 갈 수 있어. 지금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 근데 이연 언니가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겠어. 오빠, 빨리 와. 내 생각에 이거 보통 일이 아니야.” 예수진이 빠르고 급하게 말했다.육현경은 곧바
송문수는 샤워가운을 걸치고 호텔의 통창 앞에 서서 전화를 걸었다.하지수는 걸려온 전화를 보고 받자마자 말했다. “돈 얼마나 주면 올래?”하지수와 송문수의 결혼은 원래 부모님이 계획한 것이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송문수의 부모님이 하지수를 굉장히 좋아하셨다.송문수의 부모님은 그가 결혼한 뒤에도 계속 사고를 칠까 봐, 두 사람의 경제 주도권을 모두 하지수에게 주었다.송문수는 돈이 떨어지기 전에는 먼저 하지수에게 연락하는 일이 없었다.그녀는 사실 송문수가 쓰는 돈에 제한을 주지 않았다. 송문수 몫의 돈은 매달 조금도 덜지 않고 모두 그에게 주었다.하지만 송문수의 씀씀이는 매달 모자라서 그녀는 자신의 몫에서 조금 덜어주었다.어쨌든 그녀의 몫도 송씨 가문 소유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송문수는 매번 송씨 가문에 들키지 않기 위해 계좌이체로 받지 않았고 현금으로 달라고 했다.결혼한 지 3년, 이미 익숙해졌다.“돈은 필요 없어. 옷만 좀 가져다줘. 그리고 너희 변호사들 보석 수속 서류도 가져와. 현경이가 너한테 소이연 좀 보석으로 꺼내달래.” 송문수가 전달했다.하지수는 멍해졌다.오늘 오전에 난리가 났던 뉴스 기사가 인제야 떠올랐다.소이연이 검찰청으로 끌려갔다면 확실한 증거로 아마 이미 행정 구속되었을 것이다.“급해?”“다른 일 있어?” 송문수가 물었다.“우선 소이연 씨 소송 사건 먼저 확인해 봐야 해.”“안 급해. 근데 현경이가 급할 것 같은데. 그래서 최대한 빨리하는 게 좋지.”“최대한 해볼게.”송문수는 전화를 끊었다.그는 담배 한 대를 피웠다.침대 위의 여자도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송문수가 돈을 주고 쫓아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약 한 시간 뒤.하지수는 남자 정장 한 벌을 들고 송문수의 호텔 방으로 들어갔다.침대 위의 여자는 잠을 설쳤는지 허리와 등이 너무 아파서 이제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다.그때 또 다른 여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주 놀랐다.하지수는 익숙하다는 듯 여자를 흘끗 보고는 말했다. “어
두 사람은 함께 호텔을 나섰다. 하지수가 운전을 하고 송문수는 조수석에 앉아있었다.하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이연 사건은 친구한테 부탁해서 알아봤는데 쉽지 않겠어. 심증, 물증이 다 있고 범죄 사실도 명확해. 뇌물죄와 탈세에 따르면 관련 금액이 커서 거의 10년 정도 되는 유기 징역이야.”“우선 가서 보석으로 데리고 나온 다음에 다시 얘기해. 현경이한테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응.” 하지수가 대답했다.갑자기.송문수가 매섭게 손을 뻗어 하지수 대신 운전대 방향을 틀었다.이와 동시에 뒤에 있던 차량이 그들 바로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만약 송문수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차와 옆 차는 부딪혔을 것이다.앞으로 지나간 차량은 창문을 내리고 욕을 퍼부었다. “운전 할 줄 아는 거 맞아? 못하면 하지 마!”송문수는 갑자기 차가운 얼굴로 변했다. “이게 바로 운전 실력이야. 차선 바꾸면서 뒤에 볼 줄 몰라?!”하지수는 입술을 만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운전 실력은 확실히 좋은 편은 아니었다.그녀는 손을 꿈틀거렸다. 자기 손 위에 있는 송문수의 손을 치우라는 뜻이었다.송문수는 손을 떼고 말했다. “네 실력으로 앞으로 운전하지 마.”“천천히 몰면 되잖아.” 하지수도 송문수와 말싸움하기 싫었다.“집에 기사 있잖아? 아버지한테 기사 하나 붙여달라고 하면 붙여주시겠지. 널 친딸처럼 생각하잖아.” 송문수가 음흉하게 말했다.하지수는 침묵을 택했다.그녀는 송문수와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멈춰!” 송문수가 소리쳤다.하지수는 차를 길가에 세웠다.그녀는 그가 택시를 타고 가려는 줄 알았다.하지만 그가 갑자기 하지수가 있던 운전석 앞으로 와 말했다. “내려.”하지수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조수석에 타.”송문수는 운전석에 앉고 하지수는 조수석으로 갔다.“넌 의자가 이게 뭐야, 앉을 수도 없어.” 송문수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하지수는 왜 이렇게 항상 성질을 부리는지 알 수 없었다.
송문수가 엄숙한 표정으로 계지원을 바라봤다.“이러면 곤란해.”이 일은 분명 누가 고의로 은밀히 배치한 것이다. 게다가 든든한 지원이 없다면 이 정도까지 일을 벌이지 못한다. 만약 육현경이 지금 힘을 쓰지 못한다면 소이연은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니 정말 한숨만 나왔다.“내가 현경이와 연락할 방법을 찾을게. 현경이라면 지수 씨한테 이연 씨의 사건을 맡길 거야. 넌 지수 씨한테 먼저 세부 사항을 조사하라고 해. 현경이 돌아오면 우리는 가차 없이 대처해야 할 거야.”계지원과 송문수가 상의를 끝냈다.“알았어.”구치소 내부.하지수가 나타나자 소이연은 잠시 놀랐다가 금세 알아챘다.육현경이 대신 배치한 것 같았다.예전에는 하지수가 송문수의 아내이자 송씨 그룹에서 근무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나중에야 우연히 송씨 그룹의 법률 고문이라는 것을 알았다.“이연 씨.”하지수가 정중하게 불렀다.“저 현경 씨의 부탁을 받고 이연 씨의 사건을 맡게 되었어요..”“네.”소이연이 짧게 대답했다.열정적으로 대하고 싶었지만 의뢰인이 누군지 알고 있으므로 육현경의 호의를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게다가 그녀는 육현경이 나서도 별로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수는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저희가 재판에서 더 나은 변호를 하기 위해서 먼저 한 가지 확인할게요. 소이연 씨는 뇌물과 탈세를 한 적 있나요?”“없어요.”비록 희망을 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주저앉고 싶지는 않았다.하지수는 그녀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이 사건의 특수성을 단번에 눈치챈 것 외에 예수진의 관계도 있었다.예수진이 마음을 터놓고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인품이 나쁘지 않을 테니까.“그런데 저한테 당신의 범죄 증거가 있어요.”하지수가 서류 한 장을 소이연의 앞으로 내밀었다.소이연이 검찰에 갔을 때 보았던 서류였다.“여기에 모든 범죄 사실들이 있어요.첫 번째 증거는 계좌이체 기록. 비록 본인
”우리 능력으로는 부족하지만 현경 씨가 도와준다면 희망은 있어요.”하지수가 직설적으로 말했다.소이연이 입술을 오므렸다.“지수 씨는 이 사건의 배후가 누구라고 생각해요?”하지수가 잠깐 침묵했다.“지수 씨는 짐작했을 거예요. 저와 그 여자 사이에서 육현경이 누굴 도울 것 같아요?”“남녀 간의 일은 저는 잘 몰라요.”하지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하지만 현경 씨가 문수를 통해 저한테 사건을 맡긴 걸 보면 틀림없이 이연 씨를 더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이익은 사랑 앞에서 한 푼의 가치도 없어요.”하지수는 갑자기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소이연과 많이 접촉한 적 없었다. 이번을 제외하고 지난번에 예수진과 같이 밥을 먹을 때 만났었다.그때는 예수진을 따라 술을 마시러 갔지만 소이연에게 다가가지 않았다.지금의 소이연은 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그러다 상황을 전환할 기회가 올지도 몰라요. 송문수와 육현경의 관계가 없더라도 이연 씨는 예수진의 친구이기 때문에 저도 전력으로 도와주고 싶어요.”하지수가 한마디 덧붙였다.“강세에 미리 겁먹지 마세요.”소이연은 조금 감동했다.하지수는 변호사라 그런지 사람에게 주는 인상이 차가웠다. 말할 때 표정도 빈틈이 없고 정서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왠지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는 매력이 있다.두 여자는 우연히 만났지만 하지수의 능력과 똑똑한 머리로 지금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다.하지만 서로 선정하지는 않았다.하지수는 계속해서 엄숙하게 사건을 주제로 토론했다.“세무 신고서에 대해 더 얘기하죠. 전부 이연 씨의 친필 서명인데 아무리 경각심이 없어도 재무 쪽으로 소홀할 리가 없다고 생각되거든요.”“이 신고서는 모두 프로그램으로 서명한 거예요. 프로그램의 일부 서류들을 비서한테 맡겨서 처리했어요. 최근엔 입찰 작업을 하느라 바빴거든요.” “그럼 이연 씨의 비서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군요.”하지수가 결론
하지수가 구치소에서 나와서 그녀를 기다리는 송문수에게 다가갔다.두 사람은 다시 승용차에 올라탔다.송문수가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이연 씨의 상태는 어때?”“냉정하고 이성적이야. 내가 구체적인 상황을 물었는데 사건을 뒤집을 수 있는 부분이 많았어. 우리가 찾아낼 수 있다면 이연 씨는 무사할 거야. 참, 현경 씨한테는 얘기했어? 이연 씨 지금 보석할 수 없어.”“통화 안 돼.”“비행기 탔나?”“아니, 할아버지가 해외에 연금했대.”하지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그렇게 봐도 소용없어. 육씨 가문에서 할아버지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아. 현경이 아무리 능력이 대단해도 할아버지한테 꼼 짝도 못 해.”“그럼 이연 씨의 사건을 해결하기 어려워.”“지원이가 현경을 찾을 방법을 알아보고 있어. 제발 성공했으면 좋겠다.”송문수는 난처했다.그때 하지수는 문득 뭔가 떠올라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지수.”“수진아, 지금 어디야?”“비행기 타고 돌아가려고. 이연 언니한테 큰일 나서 미칠 거 같아.”휴대폰 너머로 그녀가 초조해하는 것이 느껴졌다.“마침 너한테 할 말 있어. 나 지금 이연 씨 담당 변호사야. 방금 만나서 사건에 대해 알아봤는데...”“언니는 어때?”하지수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예수진이 격동하며 물었다.“괜찮아 보였어. 그런데 아직 보석으로 풀려날 수 없어.”“뭐? 왜 안 되는데?”“먼저 내 말 좀 들어봐.”“그래.”예수진도 자기가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사건엔 빈틈이 너무 많아. 하지만 지금 우린 그걸 조사할 능력이 없어. 너희 오빠만 가능해.”“내가 오빠한테 전화했어. 지금 아마 집에 돌아갔을 거야.”“너희 오빠가 해외에 연금됐어.”“뭐?!!”하지수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너 일단 돌아와서 집안 상황 좀 살펴봐. 그리고 현경 씨와 연락할 방법도 찾아보고. 사건은 내가 다 알아볼 테니까 현경 씨만 돌아오면 바로 시작하자.”“알았어. 나 지금 탑승해야 해. 장안에 도착하면 바로 육씨 저택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