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내세우기 위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소나은이 널 사랑한다고?”소이연은 그를 비웃었다.“소나은은 그저 내가 가진 물건을 사랑할 뿐이야. 내 것이라 하면 다 뺏으려고 했으니까.”“나랑 나은이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들지…”“아니라면 왜 문 씨 그룹이 큰 위기에 처했는데도 소 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겠어! 소나은이 널 그렇게 사랑한다면 소 씨 가문에서 왜 너한테 도움을 주지 않겠냐고!”소이연의 질문에 문서인은 반박했다.“네 아버지 소승영이 너무 현실적인 사람이라 그래. 나은이가 날 돕기 위해 소승영과 연을 끊었어. 오로지 투자를 받아내기 위해서 말이야!”“그래서? 뭐 달라진 건 있어?”소이연은 되물었다.“나은이는 소승영을 설득할 수 없어.”“문서인, 솔직히 말해줄까? 네가 소나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무너지지도 않았어!”“소이연!”문서인은 그녀의 풍자 섞인 말에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소승영처럼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너와 소나은 사이에 혼약이 오갈 때 곧바로 거절할 수 없었어. 문 씨 가문을 거절했단 소문이 돌면 그의 얼굴에 먹칠하는 셈이니까. 자고로 상인은 명예를 중요시하기에 신임을 잃으면 그 바닥에서 더 어떻게 벌어먹겠어?”소이연은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소나은이 진심으로 널 도우려고 했다면 소승영은 자금을 선뜻 빌려주었을 거야. 소나은이 널 도울 생각조차 없었고 이 계기를 빌미로 너와 헤어지려 한 것이라고!”“내가 너의 그딴 거짓말에 넘어갈 것 같아?”문서인은 차갑게 웃었다.“넌 그저 나와 나은이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우리가 사랑하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겠지? 소이연, 내가 뭐 하나 알려줄까? 소나은이 우리 가문이 이렇게 어려운 것도 알고 소승영이 자금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을 때 나보고 너를 찾아가라고 했어.”그는 말을 이었다.“나은이는 너한테 합작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으니 온갖 방법을 써서라도 너와 합작하라고 먼저 와서 알려주었지. 나은이는 우리가 사랑했었던 사이라는 것
소이연은 알약을 물고만 있었고 삼키지 않았다.문서인이 그녀한테 먹이는 약이라면 절대 좋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한참을 대치 상태에 있었다.문서인은 소이연의 코를 막았다.밀려오는 질식감 때문에 소이연은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고 문서인은 그 틈을 타 옆에 놓여있던 물을 그녀 입안에 콸콸 부었다.코가 막힌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살려고 물을 삼켰다.소이연은 결국 하얀 알약을 삼켜버렸다.문서인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그는 입을 열었다.“소이연, 네가 무슨 약을 먹었는지 맞춰 봐.”소이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고 한이 서려있었다.“나는 네가 죽어도 아무 느낌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네 그 표정을 보면 내가 얼마나 달아오르는지 알아? 너의 그 무표정, 이제는 지긋지긋해!”문서인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네가 먹은 건 최음제라고 하는 마약이야. 먹으면 몸이 꼬이고 뜨겁게 달아오르지.”소이연이 예상했던 것이었다.문서인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다 예상했다.이런 방식으로 성관계 동영상을 찍은 후 그녀를 협박해서 합작하려는 속셈이었다.“소나은이 이렇게 해라고 가르쳤어?”소이연은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그에게 물었다.“아니! 나은이는 그 정도로 추악하지 않아!”문서인은 그녀를 사납게 노려보았다.“그래서 넌 추악하다고 인정하는 거네?”“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네가 날 도와서 문 씨 그룹과 합작한다면 나도 너한테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고! 네가 스스로 자초한 거야!”“문서인, 네가 이렇게 한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결과? 너와 합작하게 될 거야.”“내가 말하는데 너의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문 씨 그룹과 합작하지 않을 거야! 문 씨 가문을 돕는 건 영원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문서인, 나한테 협박 같은 건 통하지 않아.”“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동영상을 인터넷에 퍼뜨릴까 봐 두렵지도 않아? 온 국민이 너의 몸을 보게 되면… 육현경도 보게 되면 넌 그의 연인이 될 자격도 없어! 소이연, 인터
조금씩 빨개져갔다.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약효가 나타난 것이다.문서인은 소이연을 지그시 쳐다보았고 반응하는 몸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빠르긴 하네.”문서인은 말을 이었다.“정말 예민한 몸이라니까.”소이연은 눈앞이 흐릿해짐을 느꼈다.그녀가 정신을 차리려 해도 쓸모없었다.솟구쳐 오르는 성적 욕구는 그녀의 이성을 모조리 잡아먹었다.그녀는 18살 때의 일을 떠올렸다.놓아 달라고 죽도록 빌었지만 돌아오는 건 그녀의 여린 몸에 남겨진 자국뿐이었다.다시 겪고 싶지 않았는데…이러다가 죽을까 봐.“날 놓아줘…”소이연은 마지막 힘을 다해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문 씨 그룹과 합작할게.”“내가 믿을 것 같아?”“말 한대로 할게…”“그런데 이걸 어쩌지? 이제는 내가 싫어. 합작 계약서보다 너의 몸에 더 끌리거든. 소이연, 지금 네가 얼마나 섹시한지 알아? 남자라면 널 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어.”문서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그는 소이연이 딱딱하고 아무 매력도 없을 줄 알았다.그래서 소나은과 잠자리를 하고 나서는 소이연한테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그녀의 풀린 두 눈과 시선이 마주친 그는 온몸이 달아올랐다.더군다나 그녀의 몸매는 글래머였다.아, 아쉬워.왜 진작에 얘랑 관계를 갖지 않았을까?육현경이 나보다 먼저 맛 보다니.문서인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그는 소이연 몸에 감은 밧줄을 재빨리 풀었다.밧줄이 풀리자마자 소이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 쪽으로 달려갔다.방문이 열린 순간.“쾅!”열렸던 문이 그녀의 뒤에 따라붙은 문서인에 의해 닫겼다.그는 이 상황에서도 소이연이 정신줄을 붙잡고 도망치려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지금 보이는 남자마다 잡아야 하는 처지인데도 말이다.소이연은 다리를 세게 꼬집으면서 타협하지 않으려고 했다.이렇게 또 더럽혀지기 싫었다.하지만 그녀에게는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문서인의 힘 있는 두 손에서 도망치지 못했다.폐쇄적인 공간에 그녀를 구하러 올 사람도 없다
누구의 운명은 정말 비참했다.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데려온 여자의 딸은 매사에 시비를 걸어왔다.조금 큰 뒤엔 성적이 좋고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계모의 딸에게 모함당해서 미혼모가 되었다.그 소문이 온 동네에 파다하게 퍼져서 명문대에서 강제 퇴학을 맞고 아버지한테는 쫓겨났다. 그리고 낯선 외국에서 떠돌며 어렵게 살아왔다.그녀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모든 것을 바치려고 했지만 그 남자는 뒤에서 몰래 계모의 딸과 바람을 피웠다.그 뒤로 다시 진정한 사랑을 만나서 다시 자신에게 기회를 주려고 용기를 냈었지만 결국 또 속임수에 불과했다.그래도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살았다.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어머니가 임종 전에 했던 소원을 저버리지 않고 지키려고 했다.어머니가 그러셨다. “내가 떠나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아야 돼.”삶에 억눌려 숨이 올라오지 않을 때마다 어머니가 남긴 말을 떠올리며 버티고 버텼다.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소이연은 이번에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18살 때 겪었던 참사를 다시 한번 겪는 것을 운명의 조롱이라 여겼다.그러니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무감각해질지도 모른다.쾅!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소이연의 몸을 탐내던 문서인이 화들짝 놀랐다.그가 아직 반응하기 전에 엄청난 힘이 그를 끌어내려 바닥에 내팽개쳤다.딱딱한 바닥에 부딪친 곳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하지만 아픔도 잠시, 발과 주먹이 격하게 치고 들어와 살려달라고 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 때문에 눈앞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문서인은 온몸이 피투성이 됐을 거라는 생각에 기절해 버렸다.“대표님!”이명진이 육현경을 덥석 잡고 말렸다.“그만하세요. 이러다 죽겠어요.”육현경의 표정은 사람을 때려죽여야 직성이 풀릴 것처럼 너무 공포스러웠다. “대표님 손에 피를 묻힐 가치도 없는 인간입니다.”이명진이 통
한참을 얘기하던 의사가 상대방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그 말은 몸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뜻인가요?”육현경이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네.”의사가 확실한 답변을 주었다.“네, 알겠어요.”그가 말이 끝나기 바쁘게 통화를 끊어버렸다.육현경은 돌아버릴 것 같았지만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며 운전했다. 겨우 노스 타운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육현경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자 소이연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차에서 내린 육현경은 몇 초 동안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자신을 진정시켰다.그제야 소이연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재빨리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층수 버튼을 눌렀다.품에 안긴 소이연이 몸을 뒤척거리더니 손으로 그의 셔츠를 풀어헤쳐 탄탄한 가슴을 응시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한 뒤, 육현경은 집 앞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그녀를 안고 비밀번호를 누르기가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다.예수진이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녀도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다.소이연을 끌어안은 육현경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집에서 넋을 놓고 기다리다가 육현경에게 전화했었다.그런데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소이연을 구하러 갔을 거라 생각했다.그의 능력을 믿었어야 했는데 왠지 자꾸 불안했다.비로소 육현경이 소이연을 안고 온 것을 보고 불안한 가슴을 쓸어내렸다.그런데 소이연의 상태를 본 순간 예수진은 다시 긴장했다.지금까지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기억 속의 소이연은 항상 차갑고 도도해서 속세에 물들여지지 않을 것만 같은 타입이었다.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요정처럼 요염해도 얼굴은 여전히 순수하고 아름다웠다.그런데 이 정도로 섹시한 표정도 지을 줄 안다니 여자인 그녀가 봐도 당장 코피를 뿜을 것 같았다.육현경은 땀투성이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소이연을 안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녀의 유혹을 애써 참는 중이라고 생각했다.그 말은 소이연이 정말 모함을 당해서 약을 먹었다는 것을 의미
현실이다.하늘이 정한 자만이 만날 수 있는 행운이 그녀에게 올 리가 없다.왜냐면 그녀는 항상 불행했기 때문이다.옆에 누운 남자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그때처럼 죽은 듯이 잠만 잤다.소이연이 이불을 홱 젖히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전에는 어려서 도망쳤지만 이젠 어떤 일이 벌어져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솔직히 어제저녁에 발생했던 일들이 어렴풋이 기억났다.문서인에게 끌려 그와 소나은이 바람피우는 장소에 간 뒤에 매약을 먹었다.슬슬 몸에 반응이 일어나 절망한 순간에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몸을 눌렀던 묵직한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렴풋이 치고받는 소리가 들렸다.그 당시 그녀는 몸이 너무 괴로워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곧이어 누군가 자신을 안아 올리는 것 같았는데 그 뒤로 기억이 흐릿해졌다.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었다.남자가 자신의 침대에서 잠들지 않았더라면 마음이 편안하라고 상상한 장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 당시 누구도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 여겼다.소이연이 베개에 묻힌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봤다.육현경이다.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왔다.모두에게 짓밟혔다.사실 별로 차이는 없었다.그저 한 구덩이에서 다른 구덩이로 뛰어내렸을 뿐이다.소이연이 침대에서 내려왔다.발을 바닥에 댄 순간 깊게 잠들었던 남자에게 팔이 잡혔다.그녀가 입술을 오므렸다.방금까지도 죽은 듯이 자던 인간은 전에 그녀가 도망갔을 때도 일어나지 않았었다.“소이연…”육현경이 눈을 거슴츠레 뜨고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억지로 잠에서 깬 것 같았다.“깼어?”그가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정말 기운이 하나도 없고 정신마저 차릴 수 없었다.“이거 놔.”소이연의 싸늘한 말투에 그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지난번에 정신없이 자는 바람에 그녀를 잃어버렸다.만약 그때 깨어나서 책임을 졌더라면 두 사람 모두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그날 저녁, 소이연은 만족한 후 잠
깊이 잠든 후, 날이 밝았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자는 사이에 소이연이 도망갔다.솔직히 어제저녁에도 그랬다.소이연이 잠든 후, 온몸이 젖어서 감기라도 걸릴까 봐 씻겨줬다. 그리고 그도 씻었다.샤워를 했더니 이상하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그리고 지난번처럼 정신없이 자면 안 된다고 자신에게 경고했다.소이연이 다시 눈앞에서 사라지기 전에 일어나서 똑바로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할 생각이었다.다행히 그녀가 떠나기 전에 눈을 떴다.“나…”육현경이 해명하려고 할 때 소이연이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을 잘랐다.“어젯밤 일은 잊어. 이미 습관 됐어. 일어났으면 가.”“어젯밤에 우리…”“당신을 더 미워하고 싶지 않아.”소이연이 돌아서서 그를 바라봤다.육현경의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그가 침대에 앉을 때 이불이 흘러내려 벌거벗은 상반신이 노출됐다.하지만 벗은 상반신보다 흉하게 긁힌 상처가 눈에 더 띄었다.목은 더 처참했다.붉은색 이발 자국이 빼곡히 찍혀 있었다.소이연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전에 육현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그녀가 도망쳤을 때 한 번이라도 그를 봤었다면 온몸의 상처를 발견했을 거라고 했는데 거짓말이 아니었다.그녀가 시선을 돌리고 다시 싸늘하게 말했다.“어제 일에 대해 당신만 탓하지 않아. 내가 사람을 잘못 만나서 문서인에게 당한 건데 당신이 아니었다면 문서인과 잠자리를 했을 거야. 근데 문서인이 성공하지 못해서 다행이라 생각해. 날 구해준 건 고마워. 하지만 지금 내 심정이 너무 개 같아서, 나도 사람인지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들이 있어. 18살에 남았던 후유증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또다시 반복하니까 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육현경이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분명 미워 죽겠으면서 납득하려고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이기적이라고 생각해. 어젯밤 일은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고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냥 없었던 것처럼 나 자신을 속이고
어젯밤 누구도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를 것이다.그녀의 유혹에 죽을 지경인데 차마 건드릴 수 없었다.더군다나 떠날 수도 없어서 계속 옆에서 약발이 사라질 때까지 곁을 지켜줬다.그녀가 자신을 해칠까 봐 노심초사하고 또 자신이 그녀를 덮칠까 봐 중요 부위를 진정시켰다.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간신히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깨어나자마자 그녀에게 억울함을 당했다.하나님도 노할 판이다.그의 말을 듣던 소이연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왠지 믿어지지 않았다.몸이 구석구석 다 아픈 것이 꼭 지난번과 똑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육현경의 몸에 생긴 상처들을 봐도 그걸 했다고 증명해 주고 있었다.“못 믿겠으면 병원에 가서 검사해. 집에는 콘돔도 없고 네가 달려드는데 내가 나가서 콘돔 살 여유가 있었겠어?”육현경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그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그녀가 믿지 못해도 탓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상황은 아무리 봐도 섹스할 때 남긴 흔적들이다.소이연이 입술을 깨물었다.18살 때 잠자리를 한 남자가 본인이라는 사실을 숨겼지만 그동안 그의 인품과 자존심, 교양을 지켜본 결과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었다.게다가 그녀를 속인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먼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지금 소이연은 이런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몰랐다.어쩌면 더는 육현경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마음을 닫아버리고 가장 나쁜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어젯밤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그 이유는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고 그의 다정함을 아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마음을 닫아 버리기로 했다.“지금 당신 몸에 상처가 생기고 아픈 건 어젯밤에 너무 반항해서 내가 말리느라 힘 조절을 못해서 생긴 거야. 그리고 내 몸에 상처들은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당신이 복수한 흔적이야.”소이연이 입술을 오므렸다. 더는 들어줄 수 없었다.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이제 믿어?”육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