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지원은 입을 열었다.“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수진이가 잠드는 바람에…”“아, 괜찮아요. 원래…”소이연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먼저 수진 씨를 침대에 눕히죠.”계지원은 더 묻지 않고 예수진을 소이연의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예수진은 잠에 들어서부터 지금까지 미동도 없었다.그녀를 내려놓은 계지원은 소이연의 방에서 나왔다.소이연은 그를 배웅해 주려고 따라나갔는데 객실에 나온 계지원은 그녀한테 아까 사놓은 연고를 건네주었다.소이연이 멈칫하자 계지원은 설명해 주었다.“현경이가 전해달래요.”소이연은 입술을 깨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늘 저녁에 장지원한테 감금당하는 바람에 목에 아주 큰 멍이 들었다.나는 그가 못 본 줄 알았는데…“고마워요.”소이연은 연고를 건네받았다.그녀는 계지원을 난처하게 만들기 싫었고 작은 일에 연연하기 싫었던 것이다.계지원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이 갔다.소이연 씨가 이토록 침착한 걸 보면 정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난 현경이가 다시 소이연 씨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장담 못 하겠어.“아, 참.”계지원은 말을 이었다.“그 안에 숙취에 도움 되는 약도 있어요. 내일 아침 수진이가 숙취 심하면 그 약 한 알 주면 돼요. 부탁할게요.”“알겠어요.”소이연은 대답하고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계 감독님, 만약 수진 씨를 행복하게 할 자신이 없다면 선은 지켜주세요.”계지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기대가 없다면 실망도 없겠죠.”소이연은 솔직하게 말했다.“네.”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소이연의 말 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그는 예의 있게 인사를 했다.“실례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아닙니다.”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두 사람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저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예수진과 얽힌 관계라서 그런 것 같았다.아니, 육현경과 얽힌 사람이라 그런가?계지원은 집을 나섰고 소이연은 방으로 돌아왔다.예
예수진은 전화기 너머로도 소이연이 얼마나 바쁜지 알 수 있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언니는 바삐 돌아야만 안 좋은 일을 잊어버릴 수 있나 봐.나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작은 배역으로부터 시작해서 늘 앞으로 달리기만 했어.소이연은 휴대폰을 놓고 회의실로 향했다.오전에는 경쟁입찰에 대해 토론을 하고 오후에는 새로운 브랜드 창립에 대해 연구해야 했다.한 기업이 계속해서 발전하려면 부단히 개발해야 한다.회의가 끝날 때는 이미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소이연은 계속해서 수십 개 지어는 수백 개의 OA 지시 요청을 검토했다.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소이연은 한눈 보고는 끊었지만 얼마 안 지나 전화벨이 또 울렸다.모르는 번호였기에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받았다.“여보세요.”“안녕하세요. 저는 남원 경찰서 민경인데요. 어제 장지원 씨와 문서인 씨 폭행 사건에 대한 조사 때문에 전화드렸어요. 소이연 씨께서 직접 오셔서 또 한 번 조사서를 작성하셔야 할 것 같아요.”“네. 지금요?”소이연은 재빨리 대답했다.“지금 오시면 더 좋고요.”“바로 갈게요.”소이연은 하던 일을 뒤로 미루고 사무실을 나섰다.장문기는 그녀가 퇴근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놀라워했다.“회장님.”“나 컴퓨터 안 껐어. 안에 OA 지시 요청 있는데 그것 좀 검토해 줘. 모르는 것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거나 문자 보내고.”“알겠습니다.”장문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소이연은 택시를 타고 경찰서로 갔다.그녀의 운전 실력이 좋지도 않거니와 어젯밤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기에 피로 운전을 할 수도 있어서 택시를 타고 출퇴근을 한 것이다.경찰서에 도착한 그녀는 문서인을 발견했다.문서인이 그녀한테 전화를 걸었을 때 상대하기 싫어서 받지도 않았던 것이다.그녀는 업무를 처리하느라고 어젯밤 장지원에 관한 일을 잊어버렸다.“소이연 씨, 문서인 씨. 저를 따라 사무실로 가시죠. 관건적인 디테일에 대해 다시 확인해 주셔야 해요.”민경은 두 사람한테 말했다.“네.”소이연은 조사에 임하
소이연은 이렇게 쓰러질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어젯밤에 거의 자지 못하고 오늘 업무량도 많았지만 그녀는 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문서인 앞에서 그녀는 쓰러졌다.쓰러진 찰나,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예수진은 집에서 소이연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그녀는 오늘 모든 스케줄을 미루고 장안시에서 제일 유명한 셰프한테 영양식을 예약했다. 소이연이 요즘 살도 많이 빠지고 팔목도 가늘다 못해 건드리면 부러질까 봐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었던 것이다.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이연 언니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파.이연 언니는 분명 나보다 강하고 우수하고 예쁘고 어른스럽지만 꽤 많은 시련을 겪은 사람이야…아름답고 강하지만 많은 풍파를 겪은 사람.그녀는 저녁 7시 반까지 기다리다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아니, 이 언니는 어젯밤에 자지도 못하고 오늘 하루 종일 일했으면 됐지.또 새벽까지 야근하겠다는 거야, 뭐야?언니는 본인이 아이언맨인 줄 아나 봐.예수진은 씩씩거리면서 소이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거신 전화기는 꺼져…”언니 전화가 꺼졌다고? 그럴 리 없어.이연 언니는 늘 24시간 전화를 켜두고 다녔어. 배터리가 다 나가서 전화가 꺼질 리도 없고.언니는 누구보다도 세심하고 철저히 준비하는 사람이니까.예수진은 원래 급한 성격이라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이연의 차 키를 들고나갔고 곧장 은하 그룹으로 향했다.도착한 그녀는 소이연 사무실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그 바람에 장문기는 깜짝 놀랐다.그는 소이연을 대신해 OA 지시 요청을 검토하고 있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그녀에게 문자했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이번에는 전화를 걸려 했는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던 것이다.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본 그는 더더욱 놀랐다.이… 이 분은 내가 제일 좋아하던 연예인 예수진 씨잖아!실물을 영접한 것도 놀라운데 이렇게 가깝다니!나 환각이 생긴 건가?이때 그는 예수진이 급히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육 씨 그룹 대표 사무실.육현경은 전화를 끊은 뒤 다른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문서아한테 문서인 집에 있는지 물어봐 줘.”“무슨 일 있어?”“물어보고 문자 줘. 있는지 없는지만 알면 돼.”그는 말을 마친 뒤 바로 전화를 끊었고 다른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장안시에 모든 감시 카메라를 돌려서 소이연이 퇴근 후에 어디로 갔는지 알아봐. 그리고 장안시 안에서 소이연을 찾아내! 그리고 소이연에 관한 소식이 있으면 곧바로 나한테 전화하고. 섣불리 움직이지 마.”“네. 바로 출동하겠습니다.”전화 한편에서 공손하게 대답했다.전화를 끊으려던 육현경은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싶었다.“소이연 휴대폰 마지막 통화기록이 누구인지도 알아봐.”“네.”그는 전화를 끊었고 마침 계지원한테서 문자가 와있었다.“문서인 씨 집에 안 계신대.”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고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문서인, 제 무덤을 파다니…지난번에 그가 문 씨 그룹을 인수하지 않은 것은 계지원을 위해서였다.문서아와 계지원이 사귀고 있으니 그는 계지원의 체면을 지켜주려고 했다.하지만 지금은…육현경의 낯빛은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졌다.이명진은 곁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묻지도 못했다.하지만 육현경의 모습을 본 그는 큰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했다.대표님한테 큰일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사모님에 관한 일이겠지.이명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하고 완벽하신 대표님은 왜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실까.깨어난 소이연은 머리가 어지러웠다.저혈당으로 인해서 쓰러진 것이 분명했다.그녀는 그제야 온 하루 아무것도 먹지 않았단 사실을 알아차렸다.너무 피곤하면 입맛도 없다.“깼어?”귓가에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이연은 고개를 돌렸고 문서인과 눈이 마주쳤다.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위험 앞에서 본능적으로 긴장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아무리 아닌 척해도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침대에 묶
소이연은 추악한 문서인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차갑게 바라보면서 수치심을 느꼈다.문서인은 이런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그는 사악하게 웃었다.“네가 했던 일들에 대해 후회해? 내가 비굴하게 빌면서 합작할 기회를 달라고 했는데도 거절하더니. 이제야 좀 후회되기는 해?”“내가 유일하게 후회하는 건 오직 널 사랑했던 것뿐이야!”소이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문서인을 쏘아보았다.“지금 생각하면 구토 나올 정도야.”“소이연!”문서인은 소이연의 말에 분노했고 주먹을 꽉 쥐었다.그는 곧바로 소이연의 목을 졸랐다.소이연은 목에 통증을 느꼈고 질식할 것 같았다.만약 내가 죽는다면, 문서인의 손에서 죽는다면…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겠지.그녀는 살려달라고 비는 대신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문서인을 노려보았다.내가 죽는다면 이 더러운 면상을 꼭 기억할 거야.기억해서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백 배로 갚아줄 거라고!문서인은 소이연을 거칠게 뿌리쳤다.한이 서리고 굴복하지 않는 소이연의 눈동자를 보면 난 자꾸 화가 치밀어 오른다니까.하지만 난 사람을 죽일 용기는 없어. 소이연 때문에 날 망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그의 손에서 벗어난 소이연은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미친 듯이 기침을 했다.난 내가 죽을 줄 알았어.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문서인은 그럴 용기가 없거든.그는 보복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뿐이야.하지만 난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소이연, 내 손에 죽고 싶어?”문서인은 위협했지만 소이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와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문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약을 한 알 꺼내더니 그녀의 앞에 놓았다.소이연은 인상을 찌푸렸다.침착하려고 애썼지만 당황한 기색은 감출 수 없었다.“이제야 좀 무서워?”문서인은 피식 웃었다.“뭐 하려는 거야!”“기분 좋은 일을 하는 거지.”문서인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소이연, 우리가 사귄 지 3년이 되어서도 난 네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
무언가를 내세우기 위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소나은이 널 사랑한다고?”소이연은 그를 비웃었다.“소나은은 그저 내가 가진 물건을 사랑할 뿐이야. 내 것이라 하면 다 뺏으려고 했으니까.”“나랑 나은이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들지…”“아니라면 왜 문 씨 그룹이 큰 위기에 처했는데도 소 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겠어! 소나은이 널 그렇게 사랑한다면 소 씨 가문에서 왜 너한테 도움을 주지 않겠냐고!”소이연의 질문에 문서인은 반박했다.“네 아버지 소승영이 너무 현실적인 사람이라 그래. 나은이가 날 돕기 위해 소승영과 연을 끊었어. 오로지 투자를 받아내기 위해서 말이야!”“그래서? 뭐 달라진 건 있어?”소이연은 되물었다.“나은이는 소승영을 설득할 수 없어.”“문서인, 솔직히 말해줄까? 네가 소나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무너지지도 않았어!”“소이연!”문서인은 그녀의 풍자 섞인 말에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소승영처럼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너와 소나은 사이에 혼약이 오갈 때 곧바로 거절할 수 없었어. 문 씨 가문을 거절했단 소문이 돌면 그의 얼굴에 먹칠하는 셈이니까. 자고로 상인은 명예를 중요시하기에 신임을 잃으면 그 바닥에서 더 어떻게 벌어먹겠어?”소이연은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소나은이 진심으로 널 도우려고 했다면 소승영은 자금을 선뜻 빌려주었을 거야. 소나은이 널 도울 생각조차 없었고 이 계기를 빌미로 너와 헤어지려 한 것이라고!”“내가 너의 그딴 거짓말에 넘어갈 것 같아?”문서인은 차갑게 웃었다.“넌 그저 나와 나은이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우리가 사랑하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겠지? 소이연, 내가 뭐 하나 알려줄까? 소나은이 우리 가문이 이렇게 어려운 것도 알고 소승영이 자금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을 때 나보고 너를 찾아가라고 했어.”그는 말을 이었다.“나은이는 너한테 합작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으니 온갖 방법을 써서라도 너와 합작하라고 먼저 와서 알려주었지. 나은이는 우리가 사랑했었던 사이라는 것
소이연은 알약을 물고만 있었고 삼키지 않았다.문서인이 그녀한테 먹이는 약이라면 절대 좋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한참을 대치 상태에 있었다.문서인은 소이연의 코를 막았다.밀려오는 질식감 때문에 소이연은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고 문서인은 그 틈을 타 옆에 놓여있던 물을 그녀 입안에 콸콸 부었다.코가 막힌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살려고 물을 삼켰다.소이연은 결국 하얀 알약을 삼켜버렸다.문서인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그는 입을 열었다.“소이연, 네가 무슨 약을 먹었는지 맞춰 봐.”소이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고 한이 서려있었다.“나는 네가 죽어도 아무 느낌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네 그 표정을 보면 내가 얼마나 달아오르는지 알아? 너의 그 무표정, 이제는 지긋지긋해!”문서인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네가 먹은 건 최음제라고 하는 마약이야. 먹으면 몸이 꼬이고 뜨겁게 달아오르지.”소이연이 예상했던 것이었다.문서인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다 예상했다.이런 방식으로 성관계 동영상을 찍은 후 그녀를 협박해서 합작하려는 속셈이었다.“소나은이 이렇게 해라고 가르쳤어?”소이연은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그에게 물었다.“아니! 나은이는 그 정도로 추악하지 않아!”문서인은 그녀를 사납게 노려보았다.“그래서 넌 추악하다고 인정하는 거네?”“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네가 날 도와서 문 씨 그룹과 합작한다면 나도 너한테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고! 네가 스스로 자초한 거야!”“문서인, 네가 이렇게 한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결과? 너와 합작하게 될 거야.”“내가 말하는데 너의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문 씨 그룹과 합작하지 않을 거야! 문 씨 가문을 돕는 건 영원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문서인, 나한테 협박 같은 건 통하지 않아.”“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동영상을 인터넷에 퍼뜨릴까 봐 두렵지도 않아? 온 국민이 너의 몸을 보게 되면… 육현경도 보게 되면 넌 그의 연인이 될 자격도 없어! 소이연, 인터
조금씩 빨개져갔다.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약효가 나타난 것이다.문서인은 소이연을 지그시 쳐다보았고 반응하는 몸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빠르긴 하네.”문서인은 말을 이었다.“정말 예민한 몸이라니까.”소이연은 눈앞이 흐릿해짐을 느꼈다.그녀가 정신을 차리려 해도 쓸모없었다.솟구쳐 오르는 성적 욕구는 그녀의 이성을 모조리 잡아먹었다.그녀는 18살 때의 일을 떠올렸다.놓아 달라고 죽도록 빌었지만 돌아오는 건 그녀의 여린 몸에 남겨진 자국뿐이었다.다시 겪고 싶지 않았는데…이러다가 죽을까 봐.“날 놓아줘…”소이연은 마지막 힘을 다해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문 씨 그룹과 합작할게.”“내가 믿을 것 같아?”“말 한대로 할게…”“그런데 이걸 어쩌지? 이제는 내가 싫어. 합작 계약서보다 너의 몸에 더 끌리거든. 소이연, 지금 네가 얼마나 섹시한지 알아? 남자라면 널 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어.”문서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그는 소이연이 딱딱하고 아무 매력도 없을 줄 알았다.그래서 소나은과 잠자리를 하고 나서는 소이연한테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그녀의 풀린 두 눈과 시선이 마주친 그는 온몸이 달아올랐다.더군다나 그녀의 몸매는 글래머였다.아, 아쉬워.왜 진작에 얘랑 관계를 갖지 않았을까?육현경이 나보다 먼저 맛 보다니.문서인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그는 소이연 몸에 감은 밧줄을 재빨리 풀었다.밧줄이 풀리자마자 소이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 쪽으로 달려갔다.방문이 열린 순간.“쾅!”열렸던 문이 그녀의 뒤에 따라붙은 문서인에 의해 닫겼다.그는 이 상황에서도 소이연이 정신줄을 붙잡고 도망치려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지금 보이는 남자마다 잡아야 하는 처지인데도 말이다.소이연은 다리를 세게 꼬집으면서 타협하지 않으려고 했다.이렇게 또 더럽혀지기 싫었다.하지만 그녀에게는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문서인의 힘 있는 두 손에서 도망치지 못했다.폐쇄적인 공간에 그녀를 구하러 올 사람도 없다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두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송승우는 평소답지 않게 나약해 보였다.그런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조금은 짐작이 갔던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오빠, 괜찮아요 이제.”“우리가 옆에 있을 거예요. 같이 치료해나갈 거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요. 의사 선생님도 수술 잘돼서 금방 나을 거라고 했어요.”“나아진다고?”미약한 목소리가 눈 속에 가득했던 슬픔과 함께 흘러나왔다.“오른쪽 다리가 없는데 어떻게 나아져? 난 이제 병신일 뿐이야.”“오빠가 왜 병신이에요? 오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연구원에서 일하는 과학자예요. 어떻게 본인을 그렇게 낮춰요?”“오빠의 머리는 국가 재산인 거 잊었어요? 이런 좌절 한 번 겪었다고 영영 주저앉을 거에요? 내 맘속의 오빠는 영원히 그 천재 송승우예요. 그건 앞으로도 안 변해요.”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승우는 그럼에도 자신이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는지 눈물을 쏟아냈다.“오빠, 힘내요 우리.”하지수는 그가 흘린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어머님 아버님 다 오빠 걱정뿐이에요, 계속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오빠가 계속 이렇게 절망한 채로 있으면 그분들은 또 어떻게 살겠어요? 오빠는 그분들의 자랑이잖아요, 마지막까지 자랑스러운 아들이 돼야죠.”“난 이제 부모님의 자랑이 아니야, 사지도 멀쩡하지 않은 내가 어떻게 자랑스럽겠어.”“부모님은 세상에서 오빠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에요. 한쪽 다리가 아니라 두 다리를 다 잃었다고 해도 부모님은 오빠를 자랑스러운 아들로 여기실 거에요. 오빠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오빠 대신해서 더 가슴 아파할 거라고요.”“넌 나 안 더러워? 다리도 없는 내가 너무 역겹잖아.”“누가 그런 말을 해요, 난 그냥 오빠를 보면 가슴이 아파요.”“오빠만 포기 안 하면 돼요, 다들 오빠 응원하고 있어요. 모든 걸 잃었다고 해도 우리가 있잖아요,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너도 내 옆에 있을 거야?”“당연하죠. 나도 오빠 곁을 지킬게요.”나지막이 묻는 송승
“죄송해요 어머님, 저도 좀 흥분한 것 같아요. 집안에 큰일이 일어나서 가족들 전부 감정이 격해졌을 거예요. 저도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쓸게요. 저 얼른 옷 갈아입고 승우 오빠한테 가볼게요.”허영지의 말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은 하지수는 그만 옷을 갈아입으러 가버렸고 허영지는 송기명을 바라보았다.제 아내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본 송기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수 말이 맞아요, 집안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니까 다들 감정 제어를 잘 못 했죠. 그렇다고 우리 감정을 다른 사람한테 푸는 건 잘못된 거예요. 그건 불공평하잖아요.”“나는 그냥...”“당신도 며칠 전에 문수 많이 변한 것 같다고 했었잖아요. 어릴 때부터 못 해준 게 너무 많다고 미안해하더니 왜 이젠 또 이렇게 불만이 많아진 거예요? 어젯밤도 문수가 밤새 승우 지키고 있었는데 걔도 잠은 자야죠. 그래야 우리랑 교대도 하죠. 우리 나이에 버티면 얼마나 버틴다고 그래요?”“하지만 승우한테 다리 절단했다는 걸 알려준 게 문수잖아요. 의사 선생님도 절대 비밀로 하라고 하셨는데 그랬잖아요! 그래요, 어릴 때 내가 잘 못 키운 건 맞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이런 저급한 실수를 할 정도는 아니잖아요.”“당신 입으로도 저급한 실수하고 하면서 왜 문수가 그런 실수를 했을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그렇다 쳐도 문수가 우리 회사 맡으면서부터 나랑 따로 얘기도 많이 했었어요. 우리 문수 할 말 못 할 말은 가리는 아이고 그런 시행착오는 한 번도 범한 적 없었어요.”“그래서 더 화가 난다고요, 괜찮아진 줄...”“승우가 스스로 눈치챘을 수도 있잖아요.”송기명은 계속 반박하는 허영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승우처럼 똑똑한 애가 문수가 말 안 한다고 눈치 못 챌 것 같아요? 승우 본인 몸은 본인이 가장 잘 알겠죠, 그냥 그 안에 있던 게 문수라 우리가 오해한 것뿐이에요.”처음에는 같이 화를 내던 송기명도 조금 진정하니 모든 게 명확해졌었다.사람이 화가 나면 판단력이 흐려진다는데 그래서 그만 송문수를 오
하지수의 전화를 받은 소이연은 그녀의 목소리만 듣고도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지수 씨, 무슨 일 있어요?”“문수 씨가 오늘 어머님이랑 좀 다퉜는데 핸드폰도 다 깨져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문수 씨가 걱정되는 데 아버님이 승우 오빠 먼저 설득해달라고 해서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이거든요.”“그래서 현경이랑 친구분들더러 문수 씨 찾아달라고 하라는 거죠? 혹시 문수 씨가 안 좋은 생각 할까 봐?”“네.”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맞히는 소이연이 제 친구라서 하지수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현경이한테 말할 테니까 지수 씨는 걱정 말고 승우 씨한테 가요. 찾으면 연락할게요.”“고마워요 언니.”“아니에요.”전화를 마친 하지수는 아무리 심호흡을 해봐도 답답한 가슴을 안고 병원에 들어섰다.바로 중환자실로 향한 그녀 눈에 보이는 건 복도에 앉아 쉴 틈 없이 울고 있는 허영지였다.하지수가 병원을 나설 때도 울고 있더니 아직까지도 진행 중인 것 같았다.저 눈물이 송승우를 위해 흘리는 건지 아니면 송문수와 다퉈서 흘리는 건지는 몰라도 하지수는 어떻게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몰랐다.솔직히 말하면 별로 위로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허영지가 송문수를 대하는 태도는 하지수마저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기 때문이다.“지수 왔구나”“네, 아버님.”“승우가 너 빼곤 아무도 보지 않겠대. 승우 아니었으면 너 이렇게 급하게 오라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네.”그들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위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사람이었으니 하지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옷 갈아입고 들어가 볼게요.”고개를 끄덕이는 송기명에 하지수가 몸을 돌리던 찰나, 허영지가 아직도 화난듯한 어투로 물었다.“송문수는 안 온대?”“모르겠어요.”“어디 갔어?”“그것도 몰라요.”“걔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 뻔히 알면서 뭐 하는 짓이야!”하지수는 눈물을 흘리며 발악하는 허영지를
“무슨 일로 전화한 거냐니? 넌 동정심이라곤 없니? 네 형이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고!”하지만 계속해서 화를 내는 허영지에 송문수의 인내심도 결국 바닥나버렸다.“그럼 엄마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요? 형 병실 앞에서 매일 밤낮으로 지키길 바라세요? 아니면 사고 난 게 형이 아니라 나였으면 하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 집안의 쓰레기 같은 존재였잖아요, 그런 내가 죽으면 다들 아무렇지도 않았겠죠!”담아뒀던 서러움이 터지듯 말을 쏟아내는 송문수에 잠에서 깬 하지수가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문수 씨.”하지만 송문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한동안 조용하다가 입을 연 허영지는 목이 멘 채로 말했다.“송문수, 너까지 나 힘들게 할 거야? 내가 죽는 꼴이라도 봐야겠어?”“내가 엄마를 죽이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날 죽으라고 내몰았던 사람이 엄마 아빠예요.”말을 마치고 나서 바로 핸드폰을 내던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바닥에는 깨진 핸드폰이 나뒹굴고 있었고 송문수는 방문을 세게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어릴 때부터 참지 않던 송문수라도 그가 이렇게 화내는 건 처음 본 하지수는 다급히 뒤쫓아가려 했지만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때문에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네, 아버님.”“지수야, 너 지금 문수랑 같이 있어?”“아까까진 같이 있었는데 문수 씨 방금 나갔어요.”“문수 괜찮은 거야?”“모르겠어요. 어머님은 좀 어떠세요?”“화나서 계속 울지 뭐.”제 아내를 말릴 수도 없었던 송기명은 뒤늦게 허영지를 대신해 해명했다.“사실 이 사람도 문수한테 뭐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너무 슬퍼서 순간 아무 말이나 막 한 것 같아.”“알아요.”하지수도 허영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송문수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거라 마음이 안 좋았다.“지금 병원으로 좀 올래?”“문수 씨 핸드폰도 안 가지고 나가서 전 문수 씨 찾으러 가야겠어요.”“걘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걱정 마.”“왜 문수 씨는 아무
“송승우가 또 수술받으니까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냥 입 다물고 있은 거잖아. 그렇게라도 응어리 좀 풀라고.”“나 그 정도로 속 깊은 사람 아니야. 그냥 말하기 싫었을 뿐이지.”“난 못 속인다니까.”매번 거짓말을 할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송문수이기에 하지수는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다 알 수 있었다.“문수 씨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하지수는 송승우보다 송문수가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물론 송승우도 부모님을 아주 공경했지만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해온 그는 다 커서도 집안의 관심만 바랐지 집안에는 그 어떠한 공헌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늘 형에게 밀려나 찬밥신세이던 송문수는 항상 부모님 곁을 지키며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데 발 벗고 나서곤 했다.“나 이제 잘 거야.”그래서 대견스러워서 한 말인데 송문수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게 부끄러웠는지 귀가 빨개져서는 욕실로 도망가버렸다.그런 송문수의 뒷모습을 보던 하지수는 자신이 따라온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졌다.만약 송문수를 혼자 보냈다면 그는 지금까지도 가족들의 이해를 받지 못한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텐데 하지수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모든 사람의 시선은 송승우에게 집중되어있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 하지수도 포함이었다.그럼 송문수도 질투하고 부러워할 만도 할 텐데 하지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송문수가 송승우의 것을 탐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까 싶어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지금은 송승우도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시부모님도 아들을 지키겠다고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기에 하지수가 이런 슬픔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생각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걸 막고자 눈을 감았다 뜨며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온 다음에 송문수를 제대로 달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샤워를 마친 송문수는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자신이 정말 잘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눈만 감으
병원을 나선 송문수가 택시를 잡아타려고 할 때 하지수가 뛰어나오며 그를 불렀다.“문수 씨!”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차를 출발시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아주 다급해 보여서, 그녀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문을 연 채로 하지수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사실 하지수도 송문수가 저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버릴까 봐 걱정됐는데 여전히 멈춰있는 차에 안심하며 빠르게 올라탔다.기분이 나빠서 호텔이든 어디든 가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그러다가 연락이라도 안 되면 하지수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따라 나온 거였다.하지수가 차에 앉은 걸 확인한 송문수가 차를 출발시켰고 둘은 정적 속에서 호텔로 향했다.하지수는 몇 번이나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무심히 창밖만 내다보는 송문수에 차마 입을 뗄 용기가 생기지 않아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송문수에게도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그런데 호텔 방으로 들어오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하지수, 나 욕할 거면 빨리해. 참을 필요 없어. 욕 다 하면 나도 잘 거야.”“뭐?”예기치 못한 말에 하지수가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송문수가 말을 이었다.“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와중에 잠이나 자겠다는 내가 이해 안될 수도 있지만 나도 어제부터 못 자서 지금 좀 피곤해. 사람이 오랫동안 잠을 못 자도 심장마비로 죽거든.”“나 당신이랑 같이 자러 온 거야. 어제 나도 잘 못 잤어.”“당신이 마음 불편해서 못 잘까 봐 온 거라고. 나는 당신이 안 잔다고 버틸까 봐 그게 더 걱정됐어.”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하지수의 반응에 송문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나도 당신한테 화낼 줄 알았어?”“화내는 게 당연하잖아.”씁쓸한 투로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어차피 송승우도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어.”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역시나 하지수도 제가 송
“왜 이래? 왜 갑자기 안 보이는 거야?”눈도 깜빡이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던 허영지는 갑자기 내려진 커튼에 슬픈 눈을 하고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에게 물었다.“환자분 쉬셔야 하니까 일단은 다들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 내 아들 옆에 있을 거예요.”“환자분이 가족들 보는 걸 원치 않습니다.”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믿기지 않는 말에 허영지는 또 눈물을 터뜨렸다.“왜 우릴 안 보겠다는 거예요? 안에서 혼자 있으면 힘들 텐데...”“환자분한테도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까 일단은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허영지가 고집을 피우자 마찬가지로 송승우 옆에 있고 싶었던 송기명도 움직이지 않았다.“문수 넌 이제 그만 가.”“어젯밤도 샜으니 돌아가서 자.”쌀쌀맞은 엄마의 말투에서 저건 관심이 아니라 타박임을 눈치챈 송문수는 엄마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호텔에 가 있을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바로 올게요.”하지만 송문수의 말에도 허영지는 대답 없이 차가운 등을 보일 뿐이었다.그에 고개를 떨군 송문수는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줄곧 허영지의 곁을 지키며 한마디도 않고 있던 하지수를 쳐다보았다.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도 제가 송승우에게 사실을 말해버렸다고 원망하는 것 같아서 송문수는 결국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하지수는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송문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송문수가 먼저 다리를 잘라냈다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있던 하지수는 그가 해야 할 말을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것 같아 입술을 말아 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전의 송문수라면 모르겠지만 함께 일 하면서 봐왔던 송문수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만약 그가 정말 상황파악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큰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못했을 것이다.혹시라도 너무 속상해서 해명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봐 하지수는 용기를 내어 시부모님을 보며 말했다
의사의 질문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답했다.“오른쪽 다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아직은 회복도 채 안 됐고 그런 큰 충격을 받으면 회복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가족분들이 그 정도는 주의해주셔야죠.”의사의 말이 끝나자 허영지도 분노의 화살을 송문수에게로 돌려버렸다.“넌 어쩜 아직도 이러니? 승우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 나이 먹었으면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가려야지. 만약 승우가 너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허영지가 목놓아 울자 송기명도 미간을 찌푸린 채로 허영지를 다독이며 말했다.“오늘 일은 나도 실망이다 너한테. 서른 살 넘으면 뒤도 안 보고 일부터 저지르는 버릇은 좀 고칠 줄 알았는데.”가족들의 질타에 해명을 하려던 송문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어릴 때부터 송승우와 송문수가 싸울 때면 부모님은 늘 송승우의 편만 들어줬기에 송문수는 지금 이 상황에 송승우가 스스로 알아챘다고 한들 저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그래서 입 아프게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선생님, 그럼 이제 어떡해요?”“애가 제 몸 상태를 알았으니 죽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선생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이제 고작 서른 좀 넘은 앤데 미래가 창창한 애를 제가 먼저 보낼 순 없잖아요...”대성통곡을 하는 허영지를 향해 의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금은 별문제 없는데 계속 이렇게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이성을 잃으면 그땐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이미 환자분이 본인 몸 상태를 다 알게 됐으니 가족분들은 위로해주면서 환자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우리 아들 국내 최고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애예요,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애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텐데... 승우가 제 몸 상태를 알게 됐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만 생각하면 저도 죽을 것 같아요...”“차라리 그냥 내가 다치고 말지,
장기들은 다 있는 것 같은데 오른쪽 다리에만 느낌이 없는 게 아무래도 불길했다.“형, 진정하라니까.”“마취가 아직 안 풀려서 그런 거야. 마취만 풀리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니까 좀 기다려봐.”“아니야, 아무 느낌도 안 나잖아. 그냥 없어진 것 같아...”송문수의 위로에도 흥분하며 몸을 움직이던 송승우는 점차 제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지금 송승우는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생각에 송문수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환자의 강한 움직임에 여러 가지 중요한 수치가 변하자 중환자실에서부터 경보음이 울려고 빠르게 뛰어온 의사들은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들을 보더니 곧바로 송승우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송승우의 심장박동이 놀라울 정도로 느려진 걸 본 송문수는 깜짝 놀라며 재빨리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겼다.한편 하지수의 거듭되는 설득에 밥을 먹고는 송기명과 허영지는 아들 걱정에 일찌감치 병원으로 나왔는데 때마침 수술실로 뛰어가는 송문수와 침대에 누워있는 송승우를 보게 되었다.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더니 또 무슨 일로 수술실에 가는지 몰랐던 그들은 어두워진 의료진들의 안색을 살피며 놀란 심장을 부여잡았다.마음 약한 허영지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하자 송기명과 하지수가 그녀를 부축했고 하지수는 괜찮을 거라고 허영지를 다독이며 그녀와 함께 수술실 앞으로 다가갔다.가족들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던 송문수를 하지수가 나지막하게 불렀다.“문수 씨.”그에 고개를 홱 돌린 송문수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아까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길 때 송승우의 손이 그의 손에 닿았는데 그게 사람의 손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워서 송문수는 아직도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왜 그래, 말 좀 해봐.”“승우, 우리 승우 괜찮은 거지?”하지수는 하얗게 질린 송문수가 걱정됐지만 허영지는 송문수의 안색은 신경 쓰지 못하고 송승우의 안부를 물었다.송문수는 가족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송승우가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