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시간은 많아. 지금 헤어진다고 해서 나중에 다시 사귀지 않는다는 법도 없으니깐. 헤어지라는 말에 동의한 건 나한테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고 난 그저 시간을 끌었을 뿐이야.난 절대로 계지원을 포기하지 않을거야!’차가 문씨 별장 대문 앞에서 멈췄다.문서아가 내리려 할 때 계지원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저… 부탁할 것이 있어요.”문서아는 의아했다.‘계지원이 나한테 부탁을?’‘“예수진의 신분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줘요.”문서아는 불쾌했다.그녀는 예수진에 대해 본능적으로 적대감을 느꼈고 예수진의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나빴다.“대외적으로 공개한다면, 서아 씨한테도 좋을 건 없을 거예요.”계지원은 솔직하게 말했다.“예수진 좋아해요?”문서아는 계지원을 지그시 쳐다보았다.여자는 연적 앞에서 아주 똑똑해진다는 말이 있다.“아니요.”“아닌데 왜 그 여자를 감싸고돌아요?”“다 육씨 가문 사람이니깐요.”“예수진은 지원 씨를 육씨 가문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같지 않던데요. 오늘 지원 씨를 어떻게 모욕했는지 잊었나요?”“어릴 적부터 솔직한 아이였어요.”계지원은 예수진의 편을 들었다.“계지원 씨, 어르신이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반대하니깐 지금 예수진을 좋아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거죠?”문서아는 이미 답을 알아버렸다.그녀는 처음부터 두 사람이 친척 사이라서 계지원과 예수진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여러 디테일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오늘 직접 육청수와 대면한 그녀는 육청수의 강압적인 태도에 눌렸었기에 그의 말에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계지원은 어르신의 상대가 아니야!“아니요. 그리고 더 이상의 추측은 이제 하지 말아 주세요.”계지원은 말을 아꼈다.“제가 아까 한 말만 기억하시고요.”말을 마친 계지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타고 떠났다.문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아무튼! 네가 예수진을 좋아하든 말든 난 절대 계지원 너를 뺏기지 않을 거야!……육씨 저택.
소이연은 커피를 마시면서 장안시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난 장안시를 떠날 수 없어.장안시는 큰 도시도 아니라 어디를 가든 만나게 되니깐 난 숨어있을 수도 없어.육현경이 날 만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날 찾는건 아주 쉬운 일이지.그러니 내가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야.’“저 그럼 오빠한테 알려주러 갈래요!”예수진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었다.소이연은 예수진의 성격을 아주 좋아했다.털털하고 활발해서 그녀와 지내면 소이연도 기분이 좋아지고 낙관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늦었으니 일찍 쉬어요.”소이연은 입을 열었다.“언니도요. 자꾸 야근해서 몸이 상하면 어떡해요! 저녁은 드신 거죠?”“먹었어요.”“몸 잘 챙겨요. 내일 언니한테 달려갈게요.”“그래요.”예수진은 기분 좋게 통화를 마치고는 곧바로 방 밖으로 나가 육현경의 방으로 향했다.그의 방문 앞에는 여러 명의 보안 요원들이 서있었는데 그녀를 발견하고서는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예수진은 못 본 척 하고 들어가려 했다.“아가씨.”한 보안 요원이 그녀를 갑자기 막아섰다.“오빠 만나러 왔어.”“도련님께서는 이미 주무십니다.”“깨우면 돼.”“어르신께서 아무도 사적으로 도련님을 만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아니, 이 봐…”예수진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특히 아가씨는 더더욱 안된다고 하셨어요.”“씨발!”예수진은 참지 못하고 욕을 했다.“아가씨, 저희도 난처한 입장이니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보안 요원은 허리를 숙였다.‘외할아버지는 진심으로 오빠와 심아윤의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것 같아.오빠한테 반항할 여지나 있을까? 어떡하지?’예수진은 입술을 깨물더니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돌아갔다.밤 12시가 지난 지금.예수진은 계지원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문서아가 여기서 자고 가지 않는다면, 밖에서 둘이 같이 잘 수도 있다.모순이 생겨서 다툰 남녀 사이에 최고의 화해 방법은 잠자리 아닌가?예수진은 계지원의 방문 앞에 서있다가 집에 돌아가려 했다.한 걸음을
소이연은 이런 기사가 따분하게만 느껴졌다.그녀는 문 씨 아저씨한테 전화를 걸었다.“아저씨, 안녕하세요. 저 소이연이에요.”“네, 안녕하세요. 번호 저장해서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나요?”문씨 아저씨는 살갑게 인사했다.“오늘 주말인데 우리 민이 집에 있나 해서요.”“네, 있어요.”“제가 민이를 데려가서 저희 집에서 하룻밤만 재워도 될까요?”소이연은 그에게 물었다.예수진은 주말 동안 다른 도시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가하러 갔기에 집에 없었다.“소이연 씨, 잠시만요. 제가 한 번 물어보고요.”문 씨 아저씨는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육현경한테 물어보려고요? 그 사람 지금 전화 못 받을걸요.”소이연은 직설적으로 말했다.“아니요. 도련님께서는 소이연 씨께서 작은 도련님을 데리러 온다면, 언제든지 괜찮다고 하셨어요. 저는 작은 도련님의 의향을 물어보려는 겁니다. 지금 레고를 맞추고 있는데 작은 도련님께서는 집중하실 때 다른 사람이 방해하는 걸 싫어하셔서요.”“아,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소이연은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문 씨 아저씨 말 중의 일부분은 그녀가 일부러 못 들은 척 했다. 얼마 후.문 씨 아저씨는 그녀에게 말했다.“작은 도련님께서 소이연 씨를 기다리고 있겠다네요.”“저 30분 뒤면 도착합니다.”“네.”소이연은 전화를 끊고서 운전대를 잡고 육민이 거주하고 있는 사우스 타운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를 타면, 바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도착한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열어젖힌 문과 그 너머로 보이는 객실에 서있는 두 그림자…그녀는 심아윤과 마주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엘리베이터 소리를 들은 심아윤은 고개를 돌렸고 소이연을 발견했다.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서로 적대감은 없었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소이연은 육현경도 여기에 있는 줄 알았다.그녀는 입구 쪽에 서있었기에 객실의 일부분만 볼 수 있었다.“엄마!”소이연을 발견한 육민은 열정적으로 그녀를 불렀
소이연은 육현경을 일찌감치 만날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러한 상황에 만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그녀는 육현경이랑 심아윤이 요즘에 바빠서 육민을 데리고 놀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날을 선택해 육민을 데리고 가려 했다. 만약 알았더라면, 그녀는 엄청 오고 싶어 했겠지만 차마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그녀는 그저 육현경을 곁눈질하고는 더 오래 보지는 않았지만, 고의적으로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낯선 사람을 대하는 제일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를 대했다. “아빠, 나 엄마한테 가서 놀아도 돼?”육민은 간절하게 육현경을 보고 물었다.육현경은 목젖을 굴렀다.그제야 눈빛이 소이연의 몸에서 벗어났다.그는 말했다.“그래.”“아빠 고마워요.”육민은 아주 기뻐했다.그는 기뻐서 소이연의 손을 흔들흔들거리며 말했다.“엄마, 아빠가 허락했어. 이제 엄마랑 같이 집에 가서 놀아도 돼!”소이연도 육현경을 보고 웃고는 “감사해요.” 라고 말했다.육현경은 심아윤의 손가락을 꽉 잡고 말했다.“가요.”소이연도 멈추지 않고 육민의 손을 잡고 떠나려고 했다.“민이야.”심아윤은 갑자기 그를 불렀다.육민은 머리를 돌려 심아윤을 보았다.심아윤은 다시 몸을 웅크리고 가까이에 가서 말했다.“민이야, 윤이모는 며칠 뒤면 낙성시에 가게 될거야. 가기 전에 윤이모가 너랑 밥을 먹어도 돼?”“음....” 육민은 잠시 망설였다.“심 아가씨께서 시간을 정하시면, 제가 민이를 데리고 갈게요.”소이연이 말했다.“돼요?”심아윤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네.”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마땅히 해야 하는 거예요.”두 사람은 서로를 엄청 겸손하게 대했다. “민이야, 윤이모가 집에서 기다릴게.”심아윤은 육민이의 자그마한 볼에 뽀뽀를 했다.육민은 순식간에 불쾌하다 생각했고 바로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심아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아 했고 오히려 더욱 밝게 웃었다.“아직도 어릴 때처럼 다른 사람한테 뽀뽀를 당하는 걸 싫어하네! 나중에 여자친구가 생기면
그들은 행복에 빠져 뒤에 있는 육현경이랑 심아윤을 발견하지 못했고 주위에 있는 엄청 많은 까만색 보디가드들 또한 주의하지 못했다.오늘 그들의 일정은 놀이동산에 오는 것이었다.원래는 육민을 데리고 가는 것이었는데 육민이 잠시 소이연이 데리고 갔으니 두 사람도 일정대로 여기에 왔다. 하지만 우연히 소이연이랑 육민을 보게 되었다. 심아윤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육민은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이랑 친해지는 것을 싫어했다. 성격이 지금처럼 이렇게 활발한 적도 없었고 심지어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함도 있었다.하지만 소이연 앞에서는 완전히 달랐다.그녀는 시선을 돌려 육현경을 보았다. 육현경의 시선은 앞에 있는 사람에게 가 있었고 그렇게 사람들 속에 묻혀 안 보일 때까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가자.”육현경은 시선을 돌려 심아윤을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심아윤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육현경의 곁을 따라다녔다.주위에는 보디가드를 제외하고 고의적으로 안배한 기자들도 있었다.그들의 행방을 시시각각 보도하기 위해서이다.“뭐하고 놀고 싶어?”육현경은 심아윤한테 물었다.“난 다 돼.”“자극적인 거 탈래? 아니면, 자극적이지 않은 거로 탈래?”“자극적인 거.”심아윤은 말했다.“모처럼 바람을 쐴 수 있는 기회인데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응, 그러자”육현경은 대답했다.그리고 심아윤을 ‘아슬아슬한 탐험대’에 데리고 갔다.두 사람은 엄청 많은 놀이기구를 즐겼다. 롤러코스터, 자이로드롭, 바이킹...하지만 이런 놀이기구들은 육민은 아직 어려 놀지 못하기 때문에 그 들이 만날 교차점이 없었다.소이연은 육민을 데리고 아동 구역에서 놀았다. 때마침 호수에서 배를 띄우는 놀이기구를 즐기고 있었다. 그 순간 핸드폰 메시지가 갑자기 울렸다.소이연은 육민 혼자서 잘 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카카오톡으로 누군가가 친구 요청을 보내왔다.그녀는 친구 요청을 눌러보니 ‘안녕하세요, 저는 심아윤이요.’라는 문자가 와 있었다. 소이연은 손
노민은 입술을 삐죽삐죽 내밀었다.그는 심아윤의 노후를 책임지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윤 이모'라는 호칭도 그녀가 그에게 강요한 것이었다.소이연은 육민과 심아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육현경 역시 잠자코 있었다.대기 줄 사이에서 심아윤과 육민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심아윤이 육민이를 놀리기에 바빴고, 육민도 이에 어쩔 수 없이 호응해 주었다.한 시간 가까이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마침내 그들의 차례가 되었다."같이 탈까요?"심아윤은 매우 의욕이 넘쳤다.대관람차 내부는 족히 8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공간이 컸다.소이연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니요, 괜찮아요. 두 분 데이트에 방해되고 싶지 않아요."심아윤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괜찮아요, 데이트는 무슨!""지금 주변에 기자들이 너무 많아요. 혹시나 찍힐까 봐 그래요."소이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밟는 것을 그녀도 눈치챈 듯했다.심아윤은 육현경을 응시하면서 그의 의견을 구했다."그럼 따로 타지." 심아윤이 약간 당황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아... 민이랑 같이 타고 싶었는데..."심아윤의 얼굴에는 아쉬운 표정이 가득했다.소이연이 덤덤하게 말했다."그럼 민이랑 같이 타세요. 나는 혼자 타도 됩니다."하지만 육민이의 태도도 단호했다."싫어요. 난 엄마랑 같이 타고 싶어요."심아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육민을 바라보며 마지못해 말했다."이 배은망덕한 놈아, 이모가 얼마나 널 아꼈는데... 알았어, 알았어! 네 맘대로 해!"육민은 '배은망덕'이라는 말에 불만을 터뜨렸다.그는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었다.소이연은 육민을 이끌고 관람차 안으로 들어가 앉았고, 육현경과 심아윤은 그 뒤에 앉았다.대관람차가 서서히 올라가면서 장안시의 화려한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육민이가 유리바닥에 엎드려 경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엄마, 너무 예뻐요!"소이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
하지만 엄마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항상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을 받았다.분명히 잘못한 것은 아빠라고 육민은 생각했었다.육민은 저항하지 않고 소이연의 품에 안긴 채로 가만히 있었다.마치 길을 잃었다가 다시 마주친 것처럼 한시도 그녀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대관람차는 점점 더 높이,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그제야 소이연은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육민의 질문에 대답했다."너만 있다면 엄마는 전혀 슬프지 않아.""엄마..."육민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직 마르지 않은 소이연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소이연은 그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너무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조금씩 풀어낼 수 있었다.소이연이 조용하게 읊조렸다."민아, 네가 아직 내 옆에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야."육민이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아빠가 누구랑 결혼하든 나는 항상 엄마 곁에 있을 거예요.""그래!"소이연은 육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육민이가 콩알만 한 얼굴로 소이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사실... 아빠는 윤 이모를 좋아하지 않아요."소이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녀는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정말이에요. 예전에 우리가 외국에서 잠깐 살았을 때, 윤 이모가 종종 아빠 보러 오셨지만, 아빠는 윤 이모에게 항상 차갑고 냉정했어요. 아빠가 좋아하는 건 엄마예요. 할아버지 때문에 아빠가 어쩔 수 없이 윤 이모랑 같이 있는 거예요."육민은 조금 흥분한 듯 목소리까지 떨릴 정도였다."아빠는 절대 윤 이모랑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아빠가 그전에 나한테 결혼은...""민아..."소이연이 육민의 말을 끊었다.육민은 까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른들의 문제는 아이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소이연은 육민을 감당하지 말아야 할 시비에 육민이 휘둘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아빠와 엄마, 윤 이모까지 어떻게 되든 우리는 모두 너를 사랑한다는 것만
물론 그녀는 이런 것들을 육현경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그녀가 육현경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이번 갑작스러운 공식 결혼 발표에 대해서는 자기도 전혀 몰랐다는 것 뿐이었다.또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받아들여야 했고, 심지어 육현경과 협력하여 파혼할 의향도 있었다.결국에는 사랑도 사업과 마찬가지로 계획과 전략이 필요했다."현경 씨, 방금 나 이연 씨 카톡 추가했어."육현경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치 소이연의 이름을 언급해야만 육현경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심아윤이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내가 이연 씨에게 우리 관계에 대해 설명해 줘도 되?"육현경은 곧바로 거절했다."그럴 필요까지 없어.""아연 씨, 오해가 깊은 것 같던데...""그러니까 더더욱 조심해야지.”육현경이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녀는 마음이 왠지 모르게 불안했고, 그저 입술만 깨물었다.반년 만에 육현경의 마음이 이렇게 멀어질 줄은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소이연,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육 씨 그룹 기념일 축하 행사에서 소이연을 처음 만났을 때, 실물은 확실히 TV 나 사진에서 볼 때 보다 훨씬 더 예뻤다.그녀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소이연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러다 문득 육현경의 눈빛이 그녀를 탐닉하는 것을 발견했다.오늘에야 다시 만나 그녀를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너무 화려한 옷차림이 아니었고, 심지어 소이연은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순수한 생얼의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여신 뺨치는 미모였다.하지만 그녀는 육현경이 여자의 미모에 넘어가는 저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렇지 않으면, 그렇게나 많은 아름다운 여성들의 유혹에도 오랜 기간 솔로였던 육현경이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심아윤은 묵묵히 감정을 추스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어."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대관람차 종착점에 도착하고 보니, 소이연과 육민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두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송승우는 평소답지 않게 나약해 보였다.그런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조금은 짐작이 갔던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오빠, 괜찮아요 이제.”“우리가 옆에 있을 거예요. 같이 치료해나갈 거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요. 의사 선생님도 수술 잘돼서 금방 나을 거라고 했어요.”“나아진다고?”미약한 목소리가 눈 속에 가득했던 슬픔과 함께 흘러나왔다.“오른쪽 다리가 없는데 어떻게 나아져? 난 이제 병신일 뿐이야.”“오빠가 왜 병신이에요? 오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연구원에서 일하는 과학자예요. 어떻게 본인을 그렇게 낮춰요?”“오빠의 머리는 국가 재산인 거 잊었어요? 이런 좌절 한 번 겪었다고 영영 주저앉을 거에요? 내 맘속의 오빠는 영원히 그 천재 송승우예요. 그건 앞으로도 안 변해요.”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승우는 그럼에도 자신이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는지 눈물을 쏟아냈다.“오빠, 힘내요 우리.”하지수는 그가 흘린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어머님 아버님 다 오빠 걱정뿐이에요, 계속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오빠가 계속 이렇게 절망한 채로 있으면 그분들은 또 어떻게 살겠어요? 오빠는 그분들의 자랑이잖아요, 마지막까지 자랑스러운 아들이 돼야죠.”“난 이제 부모님의 자랑이 아니야, 사지도 멀쩡하지 않은 내가 어떻게 자랑스럽겠어.”“부모님은 세상에서 오빠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에요. 한쪽 다리가 아니라 두 다리를 다 잃었다고 해도 부모님은 오빠를 자랑스러운 아들로 여기실 거에요. 오빠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오빠 대신해서 더 가슴 아파할 거라고요.”“넌 나 안 더러워? 다리도 없는 내가 너무 역겹잖아.”“누가 그런 말을 해요, 난 그냥 오빠를 보면 가슴이 아파요.”“오빠만 포기 안 하면 돼요, 다들 오빠 응원하고 있어요. 모든 걸 잃었다고 해도 우리가 있잖아요,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너도 내 옆에 있을 거야?”“당연하죠. 나도 오빠 곁을 지킬게요.”나지막이 묻는 송승
“죄송해요 어머님, 저도 좀 흥분한 것 같아요. 집안에 큰일이 일어나서 가족들 전부 감정이 격해졌을 거예요. 저도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쓸게요. 저 얼른 옷 갈아입고 승우 오빠한테 가볼게요.”허영지의 말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은 하지수는 그만 옷을 갈아입으러 가버렸고 허영지는 송기명을 바라보았다.제 아내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본 송기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수 말이 맞아요, 집안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니까 다들 감정 제어를 잘 못 했죠. 그렇다고 우리 감정을 다른 사람한테 푸는 건 잘못된 거예요. 그건 불공평하잖아요.”“나는 그냥...”“당신도 며칠 전에 문수 많이 변한 것 같다고 했었잖아요. 어릴 때부터 못 해준 게 너무 많다고 미안해하더니 왜 이젠 또 이렇게 불만이 많아진 거예요? 어젯밤도 문수가 밤새 승우 지키고 있었는데 걔도 잠은 자야죠. 그래야 우리랑 교대도 하죠. 우리 나이에 버티면 얼마나 버틴다고 그래요?”“하지만 승우한테 다리 절단했다는 걸 알려준 게 문수잖아요. 의사 선생님도 절대 비밀로 하라고 하셨는데 그랬잖아요! 그래요, 어릴 때 내가 잘 못 키운 건 맞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이런 저급한 실수를 할 정도는 아니잖아요.”“당신 입으로도 저급한 실수하고 하면서 왜 문수가 그런 실수를 했을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그렇다 쳐도 문수가 우리 회사 맡으면서부터 나랑 따로 얘기도 많이 했었어요. 우리 문수 할 말 못 할 말은 가리는 아이고 그런 시행착오는 한 번도 범한 적 없었어요.”“그래서 더 화가 난다고요, 괜찮아진 줄...”“승우가 스스로 눈치챘을 수도 있잖아요.”송기명은 계속 반박하는 허영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승우처럼 똑똑한 애가 문수가 말 안 한다고 눈치 못 챌 것 같아요? 승우 본인 몸은 본인이 가장 잘 알겠죠, 그냥 그 안에 있던 게 문수라 우리가 오해한 것뿐이에요.”처음에는 같이 화를 내던 송기명도 조금 진정하니 모든 게 명확해졌었다.사람이 화가 나면 판단력이 흐려진다는데 그래서 그만 송문수를 오
하지수의 전화를 받은 소이연은 그녀의 목소리만 듣고도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지수 씨, 무슨 일 있어요?”“문수 씨가 오늘 어머님이랑 좀 다퉜는데 핸드폰도 다 깨져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문수 씨가 걱정되는 데 아버님이 승우 오빠 먼저 설득해달라고 해서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이거든요.”“그래서 현경이랑 친구분들더러 문수 씨 찾아달라고 하라는 거죠? 혹시 문수 씨가 안 좋은 생각 할까 봐?”“네.”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맞히는 소이연이 제 친구라서 하지수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현경이한테 말할 테니까 지수 씨는 걱정 말고 승우 씨한테 가요. 찾으면 연락할게요.”“고마워요 언니.”“아니에요.”전화를 마친 하지수는 아무리 심호흡을 해봐도 답답한 가슴을 안고 병원에 들어섰다.바로 중환자실로 향한 그녀 눈에 보이는 건 복도에 앉아 쉴 틈 없이 울고 있는 허영지였다.하지수가 병원을 나설 때도 울고 있더니 아직까지도 진행 중인 것 같았다.저 눈물이 송승우를 위해 흘리는 건지 아니면 송문수와 다퉈서 흘리는 건지는 몰라도 하지수는 어떻게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몰랐다.솔직히 말하면 별로 위로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허영지가 송문수를 대하는 태도는 하지수마저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기 때문이다.“지수 왔구나”“네, 아버님.”“승우가 너 빼곤 아무도 보지 않겠대. 승우 아니었으면 너 이렇게 급하게 오라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네.”그들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위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사람이었으니 하지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옷 갈아입고 들어가 볼게요.”고개를 끄덕이는 송기명에 하지수가 몸을 돌리던 찰나, 허영지가 아직도 화난듯한 어투로 물었다.“송문수는 안 온대?”“모르겠어요.”“어디 갔어?”“그것도 몰라요.”“걔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 뻔히 알면서 뭐 하는 짓이야!”하지수는 눈물을 흘리며 발악하는 허영지를
“무슨 일로 전화한 거냐니? 넌 동정심이라곤 없니? 네 형이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고!”하지만 계속해서 화를 내는 허영지에 송문수의 인내심도 결국 바닥나버렸다.“그럼 엄마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요? 형 병실 앞에서 매일 밤낮으로 지키길 바라세요? 아니면 사고 난 게 형이 아니라 나였으면 하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 집안의 쓰레기 같은 존재였잖아요, 그런 내가 죽으면 다들 아무렇지도 않았겠죠!”담아뒀던 서러움이 터지듯 말을 쏟아내는 송문수에 잠에서 깬 하지수가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문수 씨.”하지만 송문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한동안 조용하다가 입을 연 허영지는 목이 멘 채로 말했다.“송문수, 너까지 나 힘들게 할 거야? 내가 죽는 꼴이라도 봐야겠어?”“내가 엄마를 죽이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날 죽으라고 내몰았던 사람이 엄마 아빠예요.”말을 마치고 나서 바로 핸드폰을 내던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바닥에는 깨진 핸드폰이 나뒹굴고 있었고 송문수는 방문을 세게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어릴 때부터 참지 않던 송문수라도 그가 이렇게 화내는 건 처음 본 하지수는 다급히 뒤쫓아가려 했지만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때문에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네, 아버님.”“지수야, 너 지금 문수랑 같이 있어?”“아까까진 같이 있었는데 문수 씨 방금 나갔어요.”“문수 괜찮은 거야?”“모르겠어요. 어머님은 좀 어떠세요?”“화나서 계속 울지 뭐.”제 아내를 말릴 수도 없었던 송기명은 뒤늦게 허영지를 대신해 해명했다.“사실 이 사람도 문수한테 뭐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너무 슬퍼서 순간 아무 말이나 막 한 것 같아.”“알아요.”하지수도 허영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송문수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거라 마음이 안 좋았다.“지금 병원으로 좀 올래?”“문수 씨 핸드폰도 안 가지고 나가서 전 문수 씨 찾으러 가야겠어요.”“걘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걱정 마.”“왜 문수 씨는 아무
“송승우가 또 수술받으니까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냥 입 다물고 있은 거잖아. 그렇게라도 응어리 좀 풀라고.”“나 그 정도로 속 깊은 사람 아니야. 그냥 말하기 싫었을 뿐이지.”“난 못 속인다니까.”매번 거짓말을 할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송문수이기에 하지수는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다 알 수 있었다.“문수 씨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하지수는 송승우보다 송문수가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물론 송승우도 부모님을 아주 공경했지만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해온 그는 다 커서도 집안의 관심만 바랐지 집안에는 그 어떠한 공헌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늘 형에게 밀려나 찬밥신세이던 송문수는 항상 부모님 곁을 지키며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데 발 벗고 나서곤 했다.“나 이제 잘 거야.”그래서 대견스러워서 한 말인데 송문수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게 부끄러웠는지 귀가 빨개져서는 욕실로 도망가버렸다.그런 송문수의 뒷모습을 보던 하지수는 자신이 따라온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졌다.만약 송문수를 혼자 보냈다면 그는 지금까지도 가족들의 이해를 받지 못한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텐데 하지수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모든 사람의 시선은 송승우에게 집중되어있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 하지수도 포함이었다.그럼 송문수도 질투하고 부러워할 만도 할 텐데 하지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송문수가 송승우의 것을 탐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까 싶어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지금은 송승우도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시부모님도 아들을 지키겠다고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기에 하지수가 이런 슬픔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생각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걸 막고자 눈을 감았다 뜨며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온 다음에 송문수를 제대로 달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샤워를 마친 송문수는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자신이 정말 잘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눈만 감으
병원을 나선 송문수가 택시를 잡아타려고 할 때 하지수가 뛰어나오며 그를 불렀다.“문수 씨!”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차를 출발시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아주 다급해 보여서, 그녀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문을 연 채로 하지수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사실 하지수도 송문수가 저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버릴까 봐 걱정됐는데 여전히 멈춰있는 차에 안심하며 빠르게 올라탔다.기분이 나빠서 호텔이든 어디든 가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그러다가 연락이라도 안 되면 하지수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따라 나온 거였다.하지수가 차에 앉은 걸 확인한 송문수가 차를 출발시켰고 둘은 정적 속에서 호텔로 향했다.하지수는 몇 번이나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무심히 창밖만 내다보는 송문수에 차마 입을 뗄 용기가 생기지 않아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송문수에게도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그런데 호텔 방으로 들어오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하지수, 나 욕할 거면 빨리해. 참을 필요 없어. 욕 다 하면 나도 잘 거야.”“뭐?”예기치 못한 말에 하지수가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송문수가 말을 이었다.“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와중에 잠이나 자겠다는 내가 이해 안될 수도 있지만 나도 어제부터 못 자서 지금 좀 피곤해. 사람이 오랫동안 잠을 못 자도 심장마비로 죽거든.”“나 당신이랑 같이 자러 온 거야. 어제 나도 잘 못 잤어.”“당신이 마음 불편해서 못 잘까 봐 온 거라고. 나는 당신이 안 잔다고 버틸까 봐 그게 더 걱정됐어.”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하지수의 반응에 송문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나도 당신한테 화낼 줄 알았어?”“화내는 게 당연하잖아.”씁쓸한 투로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어차피 송승우도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어.”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역시나 하지수도 제가 송
“왜 이래? 왜 갑자기 안 보이는 거야?”눈도 깜빡이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던 허영지는 갑자기 내려진 커튼에 슬픈 눈을 하고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에게 물었다.“환자분 쉬셔야 하니까 일단은 다들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 내 아들 옆에 있을 거예요.”“환자분이 가족들 보는 걸 원치 않습니다.”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믿기지 않는 말에 허영지는 또 눈물을 터뜨렸다.“왜 우릴 안 보겠다는 거예요? 안에서 혼자 있으면 힘들 텐데...”“환자분한테도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까 일단은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허영지가 고집을 피우자 마찬가지로 송승우 옆에 있고 싶었던 송기명도 움직이지 않았다.“문수 넌 이제 그만 가.”“어젯밤도 샜으니 돌아가서 자.”쌀쌀맞은 엄마의 말투에서 저건 관심이 아니라 타박임을 눈치챈 송문수는 엄마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호텔에 가 있을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바로 올게요.”하지만 송문수의 말에도 허영지는 대답 없이 차가운 등을 보일 뿐이었다.그에 고개를 떨군 송문수는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줄곧 허영지의 곁을 지키며 한마디도 않고 있던 하지수를 쳐다보았다.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도 제가 송승우에게 사실을 말해버렸다고 원망하는 것 같아서 송문수는 결국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하지수는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송문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송문수가 먼저 다리를 잘라냈다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있던 하지수는 그가 해야 할 말을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것 같아 입술을 말아 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전의 송문수라면 모르겠지만 함께 일 하면서 봐왔던 송문수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만약 그가 정말 상황파악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큰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못했을 것이다.혹시라도 너무 속상해서 해명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봐 하지수는 용기를 내어 시부모님을 보며 말했다
의사의 질문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답했다.“오른쪽 다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아직은 회복도 채 안 됐고 그런 큰 충격을 받으면 회복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가족분들이 그 정도는 주의해주셔야죠.”의사의 말이 끝나자 허영지도 분노의 화살을 송문수에게로 돌려버렸다.“넌 어쩜 아직도 이러니? 승우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 나이 먹었으면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가려야지. 만약 승우가 너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허영지가 목놓아 울자 송기명도 미간을 찌푸린 채로 허영지를 다독이며 말했다.“오늘 일은 나도 실망이다 너한테. 서른 살 넘으면 뒤도 안 보고 일부터 저지르는 버릇은 좀 고칠 줄 알았는데.”가족들의 질타에 해명을 하려던 송문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어릴 때부터 송승우와 송문수가 싸울 때면 부모님은 늘 송승우의 편만 들어줬기에 송문수는 지금 이 상황에 송승우가 스스로 알아챘다고 한들 저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그래서 입 아프게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선생님, 그럼 이제 어떡해요?”“애가 제 몸 상태를 알았으니 죽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선생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이제 고작 서른 좀 넘은 앤데 미래가 창창한 애를 제가 먼저 보낼 순 없잖아요...”대성통곡을 하는 허영지를 향해 의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금은 별문제 없는데 계속 이렇게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이성을 잃으면 그땐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이미 환자분이 본인 몸 상태를 다 알게 됐으니 가족분들은 위로해주면서 환자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우리 아들 국내 최고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애예요,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애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텐데... 승우가 제 몸 상태를 알게 됐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만 생각하면 저도 죽을 것 같아요...”“차라리 그냥 내가 다치고 말지,
장기들은 다 있는 것 같은데 오른쪽 다리에만 느낌이 없는 게 아무래도 불길했다.“형, 진정하라니까.”“마취가 아직 안 풀려서 그런 거야. 마취만 풀리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니까 좀 기다려봐.”“아니야, 아무 느낌도 안 나잖아. 그냥 없어진 것 같아...”송문수의 위로에도 흥분하며 몸을 움직이던 송승우는 점차 제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지금 송승우는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생각에 송문수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환자의 강한 움직임에 여러 가지 중요한 수치가 변하자 중환자실에서부터 경보음이 울려고 빠르게 뛰어온 의사들은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들을 보더니 곧바로 송승우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송승우의 심장박동이 놀라울 정도로 느려진 걸 본 송문수는 깜짝 놀라며 재빨리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겼다.한편 하지수의 거듭되는 설득에 밥을 먹고는 송기명과 허영지는 아들 걱정에 일찌감치 병원으로 나왔는데 때마침 수술실로 뛰어가는 송문수와 침대에 누워있는 송승우를 보게 되었다.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더니 또 무슨 일로 수술실에 가는지 몰랐던 그들은 어두워진 의료진들의 안색을 살피며 놀란 심장을 부여잡았다.마음 약한 허영지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하자 송기명과 하지수가 그녀를 부축했고 하지수는 괜찮을 거라고 허영지를 다독이며 그녀와 함께 수술실 앞으로 다가갔다.가족들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던 송문수를 하지수가 나지막하게 불렀다.“문수 씨.”그에 고개를 홱 돌린 송문수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아까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길 때 송승우의 손이 그의 손에 닿았는데 그게 사람의 손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워서 송문수는 아직도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왜 그래, 말 좀 해봐.”“승우, 우리 승우 괜찮은 거지?”하지수는 하얗게 질린 송문수가 걱정됐지만 허영지는 송문수의 안색은 신경 쓰지 못하고 송승우의 안부를 물었다.송문수는 가족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송승우가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