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민은 입술을 삐죽삐죽 내밀었다.그는 심아윤의 노후를 책임지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윤 이모'라는 호칭도 그녀가 그에게 강요한 것이었다.소이연은 육민과 심아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육현경 역시 잠자코 있었다.대기 줄 사이에서 심아윤과 육민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심아윤이 육민이를 놀리기에 바빴고, 육민도 이에 어쩔 수 없이 호응해 주었다.한 시간 가까이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마침내 그들의 차례가 되었다."같이 탈까요?"심아윤은 매우 의욕이 넘쳤다.대관람차 내부는 족히 8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공간이 컸다.소이연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니요, 괜찮아요. 두 분 데이트에 방해되고 싶지 않아요."심아윤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괜찮아요, 데이트는 무슨!""지금 주변에 기자들이 너무 많아요. 혹시나 찍힐까 봐 그래요."소이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밟는 것을 그녀도 눈치챈 듯했다.심아윤은 육현경을 응시하면서 그의 의견을 구했다."그럼 따로 타지." 심아윤이 약간 당황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아... 민이랑 같이 타고 싶었는데..."심아윤의 얼굴에는 아쉬운 표정이 가득했다.소이연이 덤덤하게 말했다."그럼 민이랑 같이 타세요. 나는 혼자 타도 됩니다."하지만 육민이의 태도도 단호했다."싫어요. 난 엄마랑 같이 타고 싶어요."심아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육민을 바라보며 마지못해 말했다."이 배은망덕한 놈아, 이모가 얼마나 널 아꼈는데... 알았어, 알았어! 네 맘대로 해!"육민은 '배은망덕'이라는 말에 불만을 터뜨렸다.그는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었다.소이연은 육민을 이끌고 관람차 안으로 들어가 앉았고, 육현경과 심아윤은 그 뒤에 앉았다.대관람차가 서서히 올라가면서 장안시의 화려한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육민이가 유리바닥에 엎드려 경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엄마, 너무 예뻐요!"소이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
하지만 엄마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항상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을 받았다.분명히 잘못한 것은 아빠라고 육민은 생각했었다.육민은 저항하지 않고 소이연의 품에 안긴 채로 가만히 있었다.마치 길을 잃었다가 다시 마주친 것처럼 한시도 그녀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대관람차는 점점 더 높이,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그제야 소이연은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육민의 질문에 대답했다."너만 있다면 엄마는 전혀 슬프지 않아.""엄마..."육민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직 마르지 않은 소이연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소이연은 그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너무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조금씩 풀어낼 수 있었다.소이연이 조용하게 읊조렸다."민아, 네가 아직 내 옆에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야."육민이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아빠가 누구랑 결혼하든 나는 항상 엄마 곁에 있을 거예요.""그래!"소이연은 육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육민이가 콩알만 한 얼굴로 소이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사실... 아빠는 윤 이모를 좋아하지 않아요."소이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녀는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정말이에요. 예전에 우리가 외국에서 잠깐 살았을 때, 윤 이모가 종종 아빠 보러 오셨지만, 아빠는 윤 이모에게 항상 차갑고 냉정했어요. 아빠가 좋아하는 건 엄마예요. 할아버지 때문에 아빠가 어쩔 수 없이 윤 이모랑 같이 있는 거예요."육민은 조금 흥분한 듯 목소리까지 떨릴 정도였다."아빠는 절대 윤 이모랑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아빠가 그전에 나한테 결혼은...""민아..."소이연이 육민의 말을 끊었다.육민은 까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른들의 문제는 아이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소이연은 육민을 감당하지 말아야 할 시비에 육민이 휘둘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아빠와 엄마, 윤 이모까지 어떻게 되든 우리는 모두 너를 사랑한다는 것만
물론 그녀는 이런 것들을 육현경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그녀가 육현경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이번 갑작스러운 공식 결혼 발표에 대해서는 자기도 전혀 몰랐다는 것 뿐이었다.또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받아들여야 했고, 심지어 육현경과 협력하여 파혼할 의향도 있었다.결국에는 사랑도 사업과 마찬가지로 계획과 전략이 필요했다."현경 씨, 방금 나 이연 씨 카톡 추가했어."육현경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치 소이연의 이름을 언급해야만 육현경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심아윤이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내가 이연 씨에게 우리 관계에 대해 설명해 줘도 되?"육현경은 곧바로 거절했다."그럴 필요까지 없어.""아연 씨, 오해가 깊은 것 같던데...""그러니까 더더욱 조심해야지.”육현경이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녀는 마음이 왠지 모르게 불안했고, 그저 입술만 깨물었다.반년 만에 육현경의 마음이 이렇게 멀어질 줄은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소이연,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육 씨 그룹 기념일 축하 행사에서 소이연을 처음 만났을 때, 실물은 확실히 TV 나 사진에서 볼 때 보다 훨씬 더 예뻤다.그녀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소이연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러다 문득 육현경의 눈빛이 그녀를 탐닉하는 것을 발견했다.오늘에야 다시 만나 그녀를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너무 화려한 옷차림이 아니었고, 심지어 소이연은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순수한 생얼의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여신 뺨치는 미모였다.하지만 그녀는 육현경이 여자의 미모에 넘어가는 저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렇지 않으면, 그렇게나 많은 아름다운 여성들의 유혹에도 오랜 기간 솔로였던 육현경이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심아윤은 묵묵히 감정을 추스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어."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대관람차 종착점에 도착하고 보니, 소이연과 육민
“거봐!내가 말했잖아, 육현경은 널 못 마땅해 하는데 기어코 달라붙을게 뭐야! 지금 봐봐, 얼마나 창피 해......”소이연은 말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소씨 가문에 기대를 품는게 아니였다.끊자마자,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소이연은 받지 않았다.소승영이 다시 전화 주기전까지는....“소이연, 이게 할머니한테 대하는 태도야?” 소승영은 화가 많이 나있었다.소승영의 목소리를 보아 유백희가 그녀에게 일방적 전화거절을 당한 후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제가 그 사람한테 모욕을 당할 의무라도 있어요? 아빠 질책도 듣기 싫어요!”말하자마자 소이연은 또 전화를 바로 끊을려고 했는데,건너편에 유백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장지원이 그러던데 너 땜에 걔가 일자리를 잃었다며!”소이연을 욕해도 안 먹히자 그제서야 전화를 건 목적을 말하기 시작했다.“그건 걔 혼자만의 일이고 저랑 상관없어요.”“너랑 상관이 없다고?지원이는 너 때문에 육씨 가문한테 쫓겨 나갔다고 하던데!너, 걔가 회사에서 어떤 위치인줄은 알아? 임원이고 연봉 2억이야, 지금와서 짜른다면 다야? 너 내가 나중에 셋째 이모할머니한테 무슨 얼굴로 보라는 거야!”유백희는 말할 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며칠 전 소이연은 쭉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는 오늘 밤까지 안 받으면 소이연의 회사앞까지 찾아갈려고 했었다.“임원이라면서요,제가 뭐라고 임원급을 짤리게 만들어요?!” 소이연은 비꼬았다.“너 육현경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유백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육현경이 저를 못마땅해 한다고...”“소이연,나 지금 너한테 좋게좋게 말하는거야!”“글쎄요, 전 못 느꼈는데요.”소이연은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으면서 그녀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유백희는 너무 화가 나 몸을 떨고 있었다.언제부터인지, 이 계집애는 그녀의 말을 그렇게도 안 들었다. “이연아, 나 방금 마음이 급해서 말을 심하게 했는데, 너도 알잖니. 네 셋째
소가네 별장에서.유백희는 소이연때문에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할머니,화 내지 마요”소나은은 옆에서 위로했다. “육현경의 옆에는 이미 약혼녀가 있으니 언니도 지금 상처 받아서 자기도 모르게 할머니한테 몇 마디 더 대꾸했을거예요.”“쌤통이야!”유백희는 욕설을 퍼부으면서,“지가 뭐라고 감히 육현경을 꼬시고 신분상승할려고 그래! 꿈도 잘 꾸시네!”“언니가 좀 자신감 넘쳐하는 면이 있긴 해요. 육씨 가문이 저희가 어찌 넘 볼수 있는 가문이겠어요!”소나은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하지만 이번 일을 겪고 나서 언니가 깨달은게 있었으면 좋겠어요.”말은 그렇게 해도 소나은의 심정은 언짢아 했다.소이연도 꼬실 수 있는 남자인데 자기도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기회만 되면, 소이연 곁에서 육현경을 빼앗아 갈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 남자의 곁엔 약혼녀가 새롭게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도 빽도 빵빵한데다가 감히 건드릴 엄두도 못 내는 존재였다. 다행히 그가 못 가지는 남자를 소이연도 얻지 못한다는 걸 생각하니 불평은 조금 사라지는 듯 했다.“소이연이 뭘하든 그건 그 계집애 일이고 18세 때부터 저는 이런 가족은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소승영은 손에 힘을 주면서 ,“저희가 지금 신경써야 할 곳은 문씨 가문이에요”“거긴 왜?”유백희는 다급한 듯 연달아 물어봤다. “혹시 문서인이 울 집 나은이가 싫다고 하든?”요즘 소이연이 갑자기 사람들의 화제거리가 됐으니 문서인이 후회라도 하나 싶었다.“그건 아니에요.”소승영은 고개를 흔들면서,“문덕수가 오늘 저한테 전화 했는데 투자를 좀 해달래요.그 의 얘기를 들어보니 요즘 문씨네에서 고급브랜드를 런칭하려고 하는데 자금이 모자란다나? 본금만 투자하면, 저한테 배를 준대요.”“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는거야?”유백희가 묻는다.“당연히 문제죠. 지금 문씨네 주식이 쭉 내려가고 있고 은하 그룹한테 시장도 뺴앗긴데다가 문서인이 이끌어 온 스폰서는 지금 비밀리에 자금을 빼돌리고 있다네요. 문씨가 말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제가 주소 찍어 보내드릴게요” 소이연은 바로 그녀에게 주소를 보내고 위치를전송했다.“고마워요,3 0분 있다 봐요”휴대폰을 놓고 나서 소파에 앉아 TV 보고 있는 육민을 바라보며 마음에는 깊은 아쉬움이 가득 찼다.하지만..시간은 많으니, 앞으로 만날 기회가 더 많을거야.육민한테 다가가면서 말했다. “민아야, 오늘 윤이모가 널 데리러 오신대” 육민은 기분이 좋아 TV 를 보다가 가야 한다는 말에 바로 입이 삐쭉해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윤이모가 내일 장안을 떠난 대. 그러니 가서 하루 밤만 같이 자는 게 어때? 이모가 떠나고 나면, 가능한 주말마다 널 데릴러 갈 게.”“네, 알겠어요!” 육민은 고개을 끄덕였다.내키지 않더라도 엄마가 난처해지는것은 싫었다.어린애 같지 않고 너무 성숙한 민이라 소이연은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30분도 안되서 심아윤이 나타났다. 소이연은 육민을 문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민이야!” 육민을 보자 심아윤은 필요 이상으로 열정적이였다.오자 마자 껴안았다. 육민은 입술을 깨물면서 저항을 하지 않았다.“고마워요.” 육민과 인사 나누고 나서 몸을 일으켜 소이연한테 말을 건넸다. “아니예요, 당연한 일인데요 뭘.”“그럼 저 민이 데리고 갈게요.”“조심히 가세요.”심아연은 육민의 손을 잡고 떠나려던 참에 멈추면서 뒤를 돌아보더니,“저랑 현경씨는 이연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마세요.”소이연은 미소만 띄우면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그런 사이든 아니든 심아연의 성격은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단지 착한 사람인척 하고 싶었을 것이 분명했다. 소이연은 이미 눈치를 차렸다. 억울하게 그녀의 조연이 될 의무는 없었다.심아연은 원하던 소이연의 반응을 못 보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육민을 데리고 차에 들어갔다.차안에서 심아연의 미소는 점점 사라졌다. ‘소이연 이 여자도 만만치 않네. 몇 번을 만났는데도 이 여자 마음이 잘 보이지가 않아.. 표정도
월요일, 심아윤은 장안시를 떠났다.뉴스에는 온통 심아윤을 배웅하는 육현경의 모습만 담겼다. 두 사람이 공항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는 장면만 말이다.소이연은 요즘 장안시의 뉴스거리가 그렇게도 없는지 의문이었다. 그 흔한 연예계 스캔들도 없는지? 육현경과 심아윤은 일주일 내내 인기 검색어에 올랐고, 모든 SNS에 그들의 소식들로 가득했다.소이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은하패션 브랜딩 회의를 위해 VIP회의실로 향했다.그녀의 lovely 신분이 드러났기 때문에 은하와의 협력을 제안해 오는 업체들이 많았다. 소이연은 이를 비즈니스 기회라고 생각했고 은하그룹의 자금이 한정된 상황에 자금 조달을 통해 마케팅 스케일을 키우면 서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이제 핵심은 어떻게 베스트 협력업체를 찾느냐이다.소이연은 오전 내내 회의하며 경영진들과 논의 했다.핸드폰을 무음 상태로 해놓고 있어서 사무실에 돌아와서야 부재중 전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육현경과 문서인의 전화였다. 소이연은 그들의 부재중 전화를 그냥 무시하고 계속 일에 몰두했다.몰두하다 보니 어느덧 밤 아홉 시가 훌쩍 넘었다.결국 세 개의 괜찮은 협력업체를 선정했다. 최종적으로는 입찰을 통해 결정을 내릴 예정이었다.소이연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가방과 차 키를 들고 퇴근했다.늦은 시간이라 다들 이미 퇴근했다.주차장도 어둡고 주차된 차도 별로 없어서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빨리 차 키를 눌러 얼른 차에 올라타려고 한 순간 갑자기 어두운 곳에서 웬 검은 그림자가 돌진해 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입은 틀어막혔고, 몸으로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남자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제압당한 채로 낑낑댈 수밖에 없었다.남자는 소이연을 옆에 있는 밴 쪽으로 끌고 갔다.그때, 갑자기 또 다른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소이연을 끌고 가는 남자를 향해 사정없이 킥을 날렸다.소이연을 제압하고 있던 손이 풀렸다.소이연은 질린 채로 남자의 제압에서 풀려났다.순간 두 남자가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 것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소이연이 말했다.소이연은 직접운전하고, 문서인은 경찰차를 타고 왔다.그러니 당연히 소이연이 문서인을 데려다 줄 수 밖에 없다.“괜찮아. 많이 안 다쳤어. 며칠이면 금방 나아.”문서인이 이어서 말했다. “많이 늦었어. 얼른 집에 들어가.”“그래도 마음 놓이게 가서 검사해 봐.”소이연은 단호했다.조금이라도 빚 지기 싫었다.“... 고마워.”문서인도 알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같이 차에 올라탔다.소이연이 운전하고, 문서인은 조수석에 탔다.“네가 운전도 할 줄 몰랐어.”문서인이 말했다.“예전에는 운전 안 했잖아.”“예전엔 너무 바빴어.”소이연은 직설적으로 말했다.문서인은 죄책감을 느낀 듯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미안해 이연아. 내가 예전에...”“예전 얘기하고 싶지 않아.”소이연이 그의 말을 끊었다.문서인이 절대 변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그의 앞에서 괜찮은 척 연기 하는 것조차 싫었다.“오늘 나 무슨 일로 찾아왔어?”소이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문서인은 괜히 입술을 만지작거렸다.사실은 가장 솔직한 태도로 소이연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소이연이 얼마나 똑똑한 여자인지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를 속이긴 불가능하다.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도 알다시피 지금 문씨 그룹이 상황이 좀 그렇잖아.”소이연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얼마 전부터 문씨그룹은 미디어의 힘으로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려고 많은 돈을 들였다. 그런데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 회사 주식도 계속 하락세를 달렸고 투자자들도 투자금을 철회했다. 머지않아 파산될 직전이다.“너 한테 투자 부탁하러 온 건 아니야. 나도 알아 지금 너 한테 은하그룹만으로 벅차다는 거. 자금이 제한적이라는 것도.” “그냥 요즘 은하그룹이 다른 업체하고 협업한다는 얘기를 들었어. 문씨그룹도 오래된 패션기업이잖아. 너도 오랫동안 문씨그룹에 있었으니까 알잖아. 무엇보다 우리 그룹은 성숙한 경영관리 시스템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