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심아윤은 장안시를 떠났다.뉴스에는 온통 심아윤을 배웅하는 육현경의 모습만 담겼다. 두 사람이 공항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는 장면만 말이다.소이연은 요즘 장안시의 뉴스거리가 그렇게도 없는지 의문이었다. 그 흔한 연예계 스캔들도 없는지? 육현경과 심아윤은 일주일 내내 인기 검색어에 올랐고, 모든 SNS에 그들의 소식들로 가득했다.소이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은하패션 브랜딩 회의를 위해 VIP회의실로 향했다.그녀의 lovely 신분이 드러났기 때문에 은하와의 협력을 제안해 오는 업체들이 많았다. 소이연은 이를 비즈니스 기회라고 생각했고 은하그룹의 자금이 한정된 상황에 자금 조달을 통해 마케팅 스케일을 키우면 서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이제 핵심은 어떻게 베스트 협력업체를 찾느냐이다.소이연은 오전 내내 회의하며 경영진들과 논의 했다.핸드폰을 무음 상태로 해놓고 있어서 사무실에 돌아와서야 부재중 전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육현경과 문서인의 전화였다. 소이연은 그들의 부재중 전화를 그냥 무시하고 계속 일에 몰두했다.몰두하다 보니 어느덧 밤 아홉 시가 훌쩍 넘었다.결국 세 개의 괜찮은 협력업체를 선정했다. 최종적으로는 입찰을 통해 결정을 내릴 예정이었다.소이연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가방과 차 키를 들고 퇴근했다.늦은 시간이라 다들 이미 퇴근했다.주차장도 어둡고 주차된 차도 별로 없어서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빨리 차 키를 눌러 얼른 차에 올라타려고 한 순간 갑자기 어두운 곳에서 웬 검은 그림자가 돌진해 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입은 틀어막혔고, 몸으로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남자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제압당한 채로 낑낑댈 수밖에 없었다.남자는 소이연을 옆에 있는 밴 쪽으로 끌고 갔다.그때, 갑자기 또 다른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소이연을 끌고 가는 남자를 향해 사정없이 킥을 날렸다.소이연을 제압하고 있던 손이 풀렸다.소이연은 질린 채로 남자의 제압에서 풀려났다.순간 두 남자가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 것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소이연이 말했다.소이연은 직접운전하고, 문서인은 경찰차를 타고 왔다.그러니 당연히 소이연이 문서인을 데려다 줄 수 밖에 없다.“괜찮아. 많이 안 다쳤어. 며칠이면 금방 나아.”문서인이 이어서 말했다. “많이 늦었어. 얼른 집에 들어가.”“그래도 마음 놓이게 가서 검사해 봐.”소이연은 단호했다.조금이라도 빚 지기 싫었다.“... 고마워.”문서인도 알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같이 차에 올라탔다.소이연이 운전하고, 문서인은 조수석에 탔다.“네가 운전도 할 줄 몰랐어.”문서인이 말했다.“예전에는 운전 안 했잖아.”“예전엔 너무 바빴어.”소이연은 직설적으로 말했다.문서인은 죄책감을 느낀 듯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미안해 이연아. 내가 예전에...”“예전 얘기하고 싶지 않아.”소이연이 그의 말을 끊었다.문서인이 절대 변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그의 앞에서 괜찮은 척 연기 하는 것조차 싫었다.“오늘 나 무슨 일로 찾아왔어?”소이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문서인은 괜히 입술을 만지작거렸다.사실은 가장 솔직한 태도로 소이연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소이연이 얼마나 똑똑한 여자인지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를 속이긴 불가능하다.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도 알다시피 지금 문씨 그룹이 상황이 좀 그렇잖아.”소이연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얼마 전부터 문씨그룹은 미디어의 힘으로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려고 많은 돈을 들였다. 그런데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 회사 주식도 계속 하락세를 달렸고 투자자들도 투자금을 철회했다. 머지않아 파산될 직전이다.“너 한테 투자 부탁하러 온 건 아니야. 나도 알아 지금 너 한테 은하그룹만으로 벅차다는 거. 자금이 제한적이라는 것도.” “그냥 요즘 은하그룹이 다른 업체하고 협업한다는 얘기를 들었어. 문씨그룹도 오래된 패션기업이잖아. 너도 오랫동안 문씨그룹에 있었으니까 알잖아. 무엇보다 우리 그룹은 성숙한 경영관리 시스템
소이연은 눈앞에 나타난 육현경을 바라보았다.오늘 그가 수많은 전화와 메시지를 보냈지만 전화를 받거나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바쁘게 보내고 저녁에 퇴근하려 할 때 장지원이 나타나 복수하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답장하지 않으면 육현경이 내일까지 기다려줄 거라 생각했었다.그런데 새벽 3시에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여기에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육현경의 능력이라면 장안에서 어느 구멍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무조건 찾아낼 것이라 이상하지는 않았다.문서인도 육현경을 보고 많이 놀랐다.저 녀석 심아윤이랑 공식적으로 결혼 발표한 거 아니야?심아윤이 떠나자마자 육현경이 찾아오네, 하필이면 이 시간에?전에 소이연에게 연락했을 때 그녀는 육현경과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문서인이 아는 소이연은 자신을 애인으로 만들 여자가 아니었다.그가 이를 갈며 상황을 지켜봤다.육경현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문서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이연만 뚫어지게 쳐다봤다.“이젠 안 바빠?”“응.”소이연이 짧게 대답했다.“가자.”육현경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두 사람 사이는 아주 평화로웠다.소이연은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고 해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육현경도 그녀가 문서인과 같이 있다고 해서 화를 내지 않았다.마치 두 사람은 서로를 굳게 믿고 그 어떤 외부적인 요소가 방해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행동했다.문서인은 두 사람이 눈앞에 사라지는 것을 멀뚱히 쳐다봤다.완전히 개무시를 당했다.자존심이 상한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소이연, 그렇게 도도하고 고상한 척하더니 육현경의 세컨드가 되겠다?말할 수 없는 분노가 가슴에 꽉 막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문서인이 전화를 받았다. “나은아.”“어떻게 됐어? 전화가 없어서 걱정돼서 연락했어.”휴대폰 너머로 다급한 소나은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녀의 관심 어린 말투에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소
소나은이 이런 말도 했었다.소이연이 마침 육현경에 버림을 받고 한참 의기소침해 있을 때라서 문서인더러 적극적으로 다가가 위로한다면 예전의 받았던 상처를 잊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 씨 가문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니 소이연에게 다가가도 괜찮다면서 자신의 감정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왜냐면 소나은은 문서인과의 감정이 단단하고 믿었기 때문이다.문서인은 그렇게까지 말하는 소나은에게 감동을 받았다.자신을 이토록 사랑해 주는 여자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소이연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문서인이 대답하면서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소나은이 쓴웃음을 쳤다.그녀도 소이연을 잘 알고 있었다.문서인이 아무리 무릎을 꿇고 죽는 시늉을 해도 소이연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소나은은 문서인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길을 가게 상황을 유도했다.“시간문제야. 전에 오빠가 그렇게 언니한테 상처를 줬는데 당연히 경계하겠지.”소나은이 좋은 마음으로 위로했다.“근데 나한테 시간이 많지 않아. 소이연이 이번 주에 외부 투자 유치에 나선다고 들었어. 문 씨 그룹도 주식이 계속 떨어져서 융자를 조달하지 않으면 파산하게 될 거야.”문서인이 또 참지 못하고 욱했다.“그럼 어떡해.”소나은이 다급한 마음에 울먹거렸다.“무슨 방법이 없어? 언니가 무조건 문 씨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거 말이야.”“지금은 협박이 전혀 먹히지…”문서인이 말하다 멈추었다.소이연이 문 씨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방법?순간 그의 눈에 싸늘한 빛이 스쳤다.“나은아, 우리 감정을 믿지?”“당연하지. 안 믿었으면 전에 사귀었던 사이인 걸 알면서도 언니한테 찾아가라고 말하지도 않았어. 지금은 오빠와 문 씨가 무사할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아.”소나은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말이면 충분해.”문서인이 결단을 내렸다.“나도 약속할게. 어떤 일이 벌어져도 문 씨 안주인은 너야.”“알았어. 그날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소나은이 고분고분
차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육현경은 소이연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앞만 바라보며 운전에만 집중했다.소이연은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했다.“아침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 지금 늦은 시간이야.”“알아.”육현경이 짧게 대답했다.하지만 그녀가 한참을 기다려도 그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소이연이 입술을 깨물었다.결국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수석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어느새 노스타운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소이연은 안전벨트만 풀고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이젠 말해.”한마음을 두 곳에 쓰는 게 아니라고 육현경이 운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방해하지 않은 것이다.자신의 목숨을 갖고 장난치고 싶지 않았으니까.“너무 늦었어. 먼저 올라가서 쉬어. 내일 다시 찾아올게.”육현경이 말했다.“난 우리가 계속 이렇게 만나는 게 싫어. 확실하게 말하고 끝내자. 회사 일만 해도 바빠 죽겠는데 당신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소이연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더는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언제나 확실하게 선을 긋는 게 좋았다.그때 문서인한테도 그랬었다.육현경이 운전대를 꽉 잡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오늘 저녁 순순히 따르는 것 같아도 그녀의 마음이 이미 멀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결혼은 할아버지가 갑자기 발표한 거라 난 모르고 있었어.”결국 입을 열었다.저녁에 그녀의 집 앞에서 계속 기다렸지만 새벽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그래서 모든 사람을 동원해 장안시를 뒤졌고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받고 바로 달려간 것이다.그녀가 멀쩡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지금은 쉬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그냥 집에 데려다주려고 했다.그런데 소이연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지 않았다.이해했다.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육현경이 계속 말했다.“며칠 동안 할아버지한테 휴대폰을 빼앗기고 감시를 당해서 찾아오지...”“알아, 수진한테서 들었어.”소이연이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원인과 결과가 어찌 됐든 그녀에게
”우리 감정은 이렇게 쉬운 거였어?”육현경이 물었다.“우리 사이에 따질 감정이 없어.”소이연은 여전히 차가웠다.“현경 씨도 기억할 텐데. 난 사귀어 보자고 해서 대답한 거야. 근데 순탄하지 않네.”“만약 내가 심아윤과의 결혼을 너와 연관시키지 않겠다면 날 기다려줄 수 있어?”“싫어.”소이연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내가 그렇게 미덥지 않아?”육현경이 눈시울을 붉히며 주먹을 꽉 쥐었다.“응.”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육현경이 실소했다.갑자기 분위기가 조용해지고 공기는 숨 막힐 듯 답답했다.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했다.그렇게 말을 끝내고 소이연이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육현경이 손목을 꽉 잡는 바람에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그래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무덤덤하게 그의 복수를 받아줬다.“내게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육현경이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를 쳐다봤다.“감정은 상호작용이야. 난 분명 느꼈어.”소이연이 입을 열기 전에 그가 계속 말했다.“당신이 순종하는 타입이라 생각하지 않아. 육 씨 혹은 심 씨가 핍박한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야.”“육현경, 난 사람이지 신이 아니야. 강력한 세력 앞에서 나도 무섭고 두렵고 그래.”“전에 혼자 힘으로 소 씨와 문 씨 가문과 싸웠잖아. 이리 쉽게 타협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난.”육현경이 따지고 들자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이 사람 앞에서 사생활이란 게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육현경이 겨우 진정하고 차분하게 물었다.소이연과 할아버지가 단둘이 만난 사실을 알았다는 뜻이다.머리가 똑똑하다면 미리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오는 것이 할아버지와 관련 있다고 추측했을 것이다.“내가 먼저 떠나라고 했어.”소이연은 숨기지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좋게 말하고 좋게 끝내려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편이 나으니까.아니면 쓸데없이 얽혀서 일이 더 복잡해진다.“그래서 떠나겠다고 했어?”“그래.”소이연이
소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가끔 침묵은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다.“당신이 18살 때 잠자리를 했던 남자가 나였다는 사실을 일부러 숨긴 게 아니야.”육현경이 인정했다.“내가 전에 그 사람을 미워하냐고 물었을 때 당신이 밉다고 했어. 그래서 우리 감정이 안정되고 더는 내 스킨십을 거부하지 않을 때 내 존재를 받아줄 거라 생각했거든.”소이연은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듣기만 했다.“그때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바에서 하경이랑 술을 마시다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당신을 발견했어. 어떤 남자가 질척대니까 당신이 반항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나서서 그 남자를 밀어냈는데 당신이 내 몸에 기대는 거야. 그때 당신 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웠어. 내가 호텔로 데려간 것도 인정해. 그렇게 온몸이 뜨거운 사람을 어디로 데리고 가야 할지 몰랐어. 집이 어디냐고 물어도 말도 하지 않았지.”“그 뒤로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당신이 나를 침대에 눕히고는…”육현경이 소이연을 바라봤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오랜 세월이 흘러 흐릿하던 기억들이 잊힐 법도 한데 점점 생생하게 떠올랐다.“당신은 말로는 건드리지 말라고 하면서 얼마나 다급하게 굴었는지 몰라. 이튿날 내가 잠든 사이에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내 몸에 얼마나 많은 상처들이 남아 있었는지 볼 수 있었을 거야.”소이연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죽도록 잊고 싶은 과거가 육현경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터져 나왔다.“찾아가려고 했는데 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잖아. 그땐 어리고 철이 없어서 당신과 잠자리를 한 후에 엄청 자존심이 상했거든. 꾹 참고 해외로 떠났다가 한 달도 못 버티고 다시 귀국했는데 그때 부모님이 차 사고로 돌아가셨어.”육현경이 마른침을 삼키고 잠시 말을 멈추다가 다시 천천히 말했다.“그땐 온 집안이 슬픔에 잠겼지. 할아버지는 상심한 끝에 병원에 실려가고 육 씨 가문의 모든 일을 내가 도맡아 하게 됐어. 그때부터 국내와 해외를 오가면서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까 당신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어. 나중에
”그 후에 갑작스럽게 불이 나서 당신이 불속에 갇혔어. 문서인이 당신은 버리고 소나은만 구하는 걸 보고 내가 불속에 뛰어들어서 구해낸 거야.”소이연이 깜짝 놀랐다.지금까지 소방관이 그녀를 구했다고 여겼다. 그 사람이 소방관 옷을 입은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내가 들어가기 전에 당신이 연기를 마시고 그 자리에서 죽을까 봐 옆에 있던 소방관의 헬멧을 빼앗아 쓴 거야.”육현경은 마치 그녀의 속을 꿰뚫어본 듯 그 부분을 설명했다.소이연이 눈을 감았다.순간 육현경을 처음 만났던 날, 손목에 붕대를 잔뜩 감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한참 뒤에 다시 눈을 뜨고 그를 싸늘하게 쳐다봤다.“많은 일이 있었네. 그래서 내게 잘해주는 이유가 뭐야? 우연히 만나서 당신한테 상처만 줬는데 왜 날 좋아한 거지?”그를 믿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을 믿지 못했다.“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하지 마. 육 도련님의 주변에는 예쁘고 능력 좋은 여자들이 많은데 하룻밤을 잤다고 나만 좋아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그날 저녁 좋은 경험을 했어.”육현경이 솔직하게 대답하더니 한마디 덧붙였다.“처음이었어.”“당신이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소이연이 반박했다.“보수적인 사람 맞아.”육현경이 똑바로 쳐다보자 소이연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그의 말은 계속됐다.“몇 년 전에…”“더는 설명 듣고 싶지 않아.”소이연이 그의 말을 잘랐다.“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할아버지가 결혼을 발표한 날부터 우린 끝났어. 그러니까 더는 말하지 마.”“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거야?”육현경이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그래. 소용없어.”관계를 질질 끌지 않고 한 번에 정리하려고 구구절절한 설명을 들어준 것이다.어쨌든 결말을 바뀌지 않을 테니까.“당신한테 내가 이기적으로 보이겠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당신과 심아윤 어릴 때부터 절친 사이고 지금은 순리대로 결혼까지 가게 된 거야. 그리고 나는 당신과 잠자리를 강요하고 아이까지 버린 무책임한 인간이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