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심아윤은 장안시를 떠났다.뉴스에는 온통 심아윤을 배웅하는 육현경의 모습만 담겼다. 두 사람이 공항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는 장면만 말이다.소이연은 요즘 장안시의 뉴스거리가 그렇게도 없는지 의문이었다. 그 흔한 연예계 스캔들도 없는지? 육현경과 심아윤은 일주일 내내 인기 검색어에 올랐고, 모든 SNS에 그들의 소식들로 가득했다.소이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은하패션 브랜딩 회의를 위해 VIP회의실로 향했다.그녀의 lovely 신분이 드러났기 때문에 은하와의 협력을 제안해 오는 업체들이 많았다. 소이연은 이를 비즈니스 기회라고 생각했고 은하그룹의 자금이 한정된 상황에 자금 조달을 통해 마케팅 스케일을 키우면 서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이제 핵심은 어떻게 베스트 협력업체를 찾느냐이다.소이연은 오전 내내 회의하며 경영진들과 논의 했다.핸드폰을 무음 상태로 해놓고 있어서 사무실에 돌아와서야 부재중 전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육현경과 문서인의 전화였다. 소이연은 그들의 부재중 전화를 그냥 무시하고 계속 일에 몰두했다.몰두하다 보니 어느덧 밤 아홉 시가 훌쩍 넘었다.결국 세 개의 괜찮은 협력업체를 선정했다. 최종적으로는 입찰을 통해 결정을 내릴 예정이었다.소이연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가방과 차 키를 들고 퇴근했다.늦은 시간이라 다들 이미 퇴근했다.주차장도 어둡고 주차된 차도 별로 없어서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빨리 차 키를 눌러 얼른 차에 올라타려고 한 순간 갑자기 어두운 곳에서 웬 검은 그림자가 돌진해 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입은 틀어막혔고, 몸으로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남자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제압당한 채로 낑낑댈 수밖에 없었다.남자는 소이연을 옆에 있는 밴 쪽으로 끌고 갔다.그때, 갑자기 또 다른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소이연을 끌고 가는 남자를 향해 사정없이 킥을 날렸다.소이연을 제압하고 있던 손이 풀렸다.소이연은 질린 채로 남자의 제압에서 풀려났다.순간 두 남자가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 것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소이연이 말했다.소이연은 직접운전하고, 문서인은 경찰차를 타고 왔다.그러니 당연히 소이연이 문서인을 데려다 줄 수 밖에 없다.“괜찮아. 많이 안 다쳤어. 며칠이면 금방 나아.”문서인이 이어서 말했다. “많이 늦었어. 얼른 집에 들어가.”“그래도 마음 놓이게 가서 검사해 봐.”소이연은 단호했다.조금이라도 빚 지기 싫었다.“... 고마워.”문서인도 알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같이 차에 올라탔다.소이연이 운전하고, 문서인은 조수석에 탔다.“네가 운전도 할 줄 몰랐어.”문서인이 말했다.“예전에는 운전 안 했잖아.”“예전엔 너무 바빴어.”소이연은 직설적으로 말했다.문서인은 죄책감을 느낀 듯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미안해 이연아. 내가 예전에...”“예전 얘기하고 싶지 않아.”소이연이 그의 말을 끊었다.문서인이 절대 변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그의 앞에서 괜찮은 척 연기 하는 것조차 싫었다.“오늘 나 무슨 일로 찾아왔어?”소이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문서인은 괜히 입술을 만지작거렸다.사실은 가장 솔직한 태도로 소이연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소이연이 얼마나 똑똑한 여자인지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를 속이긴 불가능하다.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도 알다시피 지금 문씨 그룹이 상황이 좀 그렇잖아.”소이연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얼마 전부터 문씨그룹은 미디어의 힘으로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려고 많은 돈을 들였다. 그런데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 회사 주식도 계속 하락세를 달렸고 투자자들도 투자금을 철회했다. 머지않아 파산될 직전이다.“너 한테 투자 부탁하러 온 건 아니야. 나도 알아 지금 너 한테 은하그룹만으로 벅차다는 거. 자금이 제한적이라는 것도.” “그냥 요즘 은하그룹이 다른 업체하고 협업한다는 얘기를 들었어. 문씨그룹도 오래된 패션기업이잖아. 너도 오랫동안 문씨그룹에 있었으니까 알잖아. 무엇보다 우리 그룹은 성숙한 경영관리 시스템
소이연은 눈앞에 나타난 육현경을 바라보았다.오늘 그가 수많은 전화와 메시지를 보냈지만 전화를 받거나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바쁘게 보내고 저녁에 퇴근하려 할 때 장지원이 나타나 복수하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답장하지 않으면 육현경이 내일까지 기다려줄 거라 생각했었다.그런데 새벽 3시에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여기에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육현경의 능력이라면 장안에서 어느 구멍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무조건 찾아낼 것이라 이상하지는 않았다.문서인도 육현경을 보고 많이 놀랐다.저 녀석 심아윤이랑 공식적으로 결혼 발표한 거 아니야?심아윤이 떠나자마자 육현경이 찾아오네, 하필이면 이 시간에?전에 소이연에게 연락했을 때 그녀는 육현경과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문서인이 아는 소이연은 자신을 애인으로 만들 여자가 아니었다.그가 이를 갈며 상황을 지켜봤다.육경현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문서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이연만 뚫어지게 쳐다봤다.“이젠 안 바빠?”“응.”소이연이 짧게 대답했다.“가자.”육현경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두 사람 사이는 아주 평화로웠다.소이연은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고 해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육현경도 그녀가 문서인과 같이 있다고 해서 화를 내지 않았다.마치 두 사람은 서로를 굳게 믿고 그 어떤 외부적인 요소가 방해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행동했다.문서인은 두 사람이 눈앞에 사라지는 것을 멀뚱히 쳐다봤다.완전히 개무시를 당했다.자존심이 상한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소이연, 그렇게 도도하고 고상한 척하더니 육현경의 세컨드가 되겠다?말할 수 없는 분노가 가슴에 꽉 막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문서인이 전화를 받았다. “나은아.”“어떻게 됐어? 전화가 없어서 걱정돼서 연락했어.”휴대폰 너머로 다급한 소나은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녀의 관심 어린 말투에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소
소나은이 이런 말도 했었다.소이연이 마침 육현경에 버림을 받고 한참 의기소침해 있을 때라서 문서인더러 적극적으로 다가가 위로한다면 예전의 받았던 상처를 잊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 씨 가문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니 소이연에게 다가가도 괜찮다면서 자신의 감정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왜냐면 소나은은 문서인과의 감정이 단단하고 믿었기 때문이다.문서인은 그렇게까지 말하는 소나은에게 감동을 받았다.자신을 이토록 사랑해 주는 여자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소이연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문서인이 대답하면서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소나은이 쓴웃음을 쳤다.그녀도 소이연을 잘 알고 있었다.문서인이 아무리 무릎을 꿇고 죽는 시늉을 해도 소이연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소나은은 문서인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길을 가게 상황을 유도했다.“시간문제야. 전에 오빠가 그렇게 언니한테 상처를 줬는데 당연히 경계하겠지.”소나은이 좋은 마음으로 위로했다.“근데 나한테 시간이 많지 않아. 소이연이 이번 주에 외부 투자 유치에 나선다고 들었어. 문 씨 그룹도 주식이 계속 떨어져서 융자를 조달하지 않으면 파산하게 될 거야.”문서인이 또 참지 못하고 욱했다.“그럼 어떡해.”소나은이 다급한 마음에 울먹거렸다.“무슨 방법이 없어? 언니가 무조건 문 씨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거 말이야.”“지금은 협박이 전혀 먹히지…”문서인이 말하다 멈추었다.소이연이 문 씨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방법?순간 그의 눈에 싸늘한 빛이 스쳤다.“나은아, 우리 감정을 믿지?”“당연하지. 안 믿었으면 전에 사귀었던 사이인 걸 알면서도 언니한테 찾아가라고 말하지도 않았어. 지금은 오빠와 문 씨가 무사할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아.”소나은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말이면 충분해.”문서인이 결단을 내렸다.“나도 약속할게. 어떤 일이 벌어져도 문 씨 안주인은 너야.”“알았어. 그날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소나은이 고분고분
차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육현경은 소이연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앞만 바라보며 운전에만 집중했다.소이연은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했다.“아침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 지금 늦은 시간이야.”“알아.”육현경이 짧게 대답했다.하지만 그녀가 한참을 기다려도 그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소이연이 입술을 깨물었다.결국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수석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어느새 노스타운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소이연은 안전벨트만 풀고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이젠 말해.”한마음을 두 곳에 쓰는 게 아니라고 육현경이 운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방해하지 않은 것이다.자신의 목숨을 갖고 장난치고 싶지 않았으니까.“너무 늦었어. 먼저 올라가서 쉬어. 내일 다시 찾아올게.”육현경이 말했다.“난 우리가 계속 이렇게 만나는 게 싫어. 확실하게 말하고 끝내자. 회사 일만 해도 바빠 죽겠는데 당신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소이연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더는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언제나 확실하게 선을 긋는 게 좋았다.그때 문서인한테도 그랬었다.육현경이 운전대를 꽉 잡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오늘 저녁 순순히 따르는 것 같아도 그녀의 마음이 이미 멀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결혼은 할아버지가 갑자기 발표한 거라 난 모르고 있었어.”결국 입을 열었다.저녁에 그녀의 집 앞에서 계속 기다렸지만 새벽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그래서 모든 사람을 동원해 장안시를 뒤졌고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받고 바로 달려간 것이다.그녀가 멀쩡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지금은 쉬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그냥 집에 데려다주려고 했다.그런데 소이연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지 않았다.이해했다.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육현경이 계속 말했다.“며칠 동안 할아버지한테 휴대폰을 빼앗기고 감시를 당해서 찾아오지...”“알아, 수진한테서 들었어.”소이연이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원인과 결과가 어찌 됐든 그녀에게
”우리 감정은 이렇게 쉬운 거였어?”육현경이 물었다.“우리 사이에 따질 감정이 없어.”소이연은 여전히 차가웠다.“현경 씨도 기억할 텐데. 난 사귀어 보자고 해서 대답한 거야. 근데 순탄하지 않네.”“만약 내가 심아윤과의 결혼을 너와 연관시키지 않겠다면 날 기다려줄 수 있어?”“싫어.”소이연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내가 그렇게 미덥지 않아?”육현경이 눈시울을 붉히며 주먹을 꽉 쥐었다.“응.”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육현경이 실소했다.갑자기 분위기가 조용해지고 공기는 숨 막힐 듯 답답했다.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했다.그렇게 말을 끝내고 소이연이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육현경이 손목을 꽉 잡는 바람에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그래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무덤덤하게 그의 복수를 받아줬다.“내게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육현경이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를 쳐다봤다.“감정은 상호작용이야. 난 분명 느꼈어.”소이연이 입을 열기 전에 그가 계속 말했다.“당신이 순종하는 타입이라 생각하지 않아. 육 씨 혹은 심 씨가 핍박한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야.”“육현경, 난 사람이지 신이 아니야. 강력한 세력 앞에서 나도 무섭고 두렵고 그래.”“전에 혼자 힘으로 소 씨와 문 씨 가문과 싸웠잖아. 이리 쉽게 타협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난.”육현경이 따지고 들자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이 사람 앞에서 사생활이란 게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육현경이 겨우 진정하고 차분하게 물었다.소이연과 할아버지가 단둘이 만난 사실을 알았다는 뜻이다.머리가 똑똑하다면 미리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오는 것이 할아버지와 관련 있다고 추측했을 것이다.“내가 먼저 떠나라고 했어.”소이연은 숨기지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좋게 말하고 좋게 끝내려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편이 나으니까.아니면 쓸데없이 얽혀서 일이 더 복잡해진다.“그래서 떠나겠다고 했어?”“그래.”소이연이
소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가끔 침묵은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다.“당신이 18살 때 잠자리를 했던 남자가 나였다는 사실을 일부러 숨긴 게 아니야.”육현경이 인정했다.“내가 전에 그 사람을 미워하냐고 물었을 때 당신이 밉다고 했어. 그래서 우리 감정이 안정되고 더는 내 스킨십을 거부하지 않을 때 내 존재를 받아줄 거라 생각했거든.”소이연은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듣기만 했다.“그때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바에서 하경이랑 술을 마시다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당신을 발견했어. 어떤 남자가 질척대니까 당신이 반항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나서서 그 남자를 밀어냈는데 당신이 내 몸에 기대는 거야. 그때 당신 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웠어. 내가 호텔로 데려간 것도 인정해. 그렇게 온몸이 뜨거운 사람을 어디로 데리고 가야 할지 몰랐어. 집이 어디냐고 물어도 말도 하지 않았지.”“그 뒤로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당신이 나를 침대에 눕히고는…”육현경이 소이연을 바라봤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오랜 세월이 흘러 흐릿하던 기억들이 잊힐 법도 한데 점점 생생하게 떠올랐다.“당신은 말로는 건드리지 말라고 하면서 얼마나 다급하게 굴었는지 몰라. 이튿날 내가 잠든 사이에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내 몸에 얼마나 많은 상처들이 남아 있었는지 볼 수 있었을 거야.”소이연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죽도록 잊고 싶은 과거가 육현경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터져 나왔다.“찾아가려고 했는데 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잖아. 그땐 어리고 철이 없어서 당신과 잠자리를 한 후에 엄청 자존심이 상했거든. 꾹 참고 해외로 떠났다가 한 달도 못 버티고 다시 귀국했는데 그때 부모님이 차 사고로 돌아가셨어.”육현경이 마른침을 삼키고 잠시 말을 멈추다가 다시 천천히 말했다.“그땐 온 집안이 슬픔에 잠겼지. 할아버지는 상심한 끝에 병원에 실려가고 육 씨 가문의 모든 일을 내가 도맡아 하게 됐어. 그때부터 국내와 해외를 오가면서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까 당신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어. 나중에
”그 후에 갑작스럽게 불이 나서 당신이 불속에 갇혔어. 문서인이 당신은 버리고 소나은만 구하는 걸 보고 내가 불속에 뛰어들어서 구해낸 거야.”소이연이 깜짝 놀랐다.지금까지 소방관이 그녀를 구했다고 여겼다. 그 사람이 소방관 옷을 입은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내가 들어가기 전에 당신이 연기를 마시고 그 자리에서 죽을까 봐 옆에 있던 소방관의 헬멧을 빼앗아 쓴 거야.”육현경은 마치 그녀의 속을 꿰뚫어본 듯 그 부분을 설명했다.소이연이 눈을 감았다.순간 육현경을 처음 만났던 날, 손목에 붕대를 잔뜩 감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한참 뒤에 다시 눈을 뜨고 그를 싸늘하게 쳐다봤다.“많은 일이 있었네. 그래서 내게 잘해주는 이유가 뭐야? 우연히 만나서 당신한테 상처만 줬는데 왜 날 좋아한 거지?”그를 믿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을 믿지 못했다.“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하지 마. 육 도련님의 주변에는 예쁘고 능력 좋은 여자들이 많은데 하룻밤을 잤다고 나만 좋아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그날 저녁 좋은 경험을 했어.”육현경이 솔직하게 대답하더니 한마디 덧붙였다.“처음이었어.”“당신이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소이연이 반박했다.“보수적인 사람 맞아.”육현경이 똑바로 쳐다보자 소이연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그의 말은 계속됐다.“몇 년 전에…”“더는 설명 듣고 싶지 않아.”소이연이 그의 말을 잘랐다.“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할아버지가 결혼을 발표한 날부터 우린 끝났어. 그러니까 더는 말하지 마.”“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거야?”육현경이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그래. 소용없어.”관계를 질질 끌지 않고 한 번에 정리하려고 구구절절한 설명을 들어준 것이다.어쨌든 결말을 바뀌지 않을 테니까.“당신한테 내가 이기적으로 보이겠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당신과 심아윤 어릴 때부터 절친 사이고 지금은 순리대로 결혼까지 가게 된 거야. 그리고 나는 당신과 잠자리를 강요하고 아이까지 버린 무책임한 인간이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두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송승우는 평소답지 않게 나약해 보였다.그런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조금은 짐작이 갔던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오빠, 괜찮아요 이제.”“우리가 옆에 있을 거예요. 같이 치료해나갈 거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요. 의사 선생님도 수술 잘돼서 금방 나을 거라고 했어요.”“나아진다고?”미약한 목소리가 눈 속에 가득했던 슬픔과 함께 흘러나왔다.“오른쪽 다리가 없는데 어떻게 나아져? 난 이제 병신일 뿐이야.”“오빠가 왜 병신이에요? 오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연구원에서 일하는 과학자예요. 어떻게 본인을 그렇게 낮춰요?”“오빠의 머리는 국가 재산인 거 잊었어요? 이런 좌절 한 번 겪었다고 영영 주저앉을 거에요? 내 맘속의 오빠는 영원히 그 천재 송승우예요. 그건 앞으로도 안 변해요.”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승우는 그럼에도 자신이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는지 눈물을 쏟아냈다.“오빠, 힘내요 우리.”하지수는 그가 흘린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어머님 아버님 다 오빠 걱정뿐이에요, 계속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오빠가 계속 이렇게 절망한 채로 있으면 그분들은 또 어떻게 살겠어요? 오빠는 그분들의 자랑이잖아요, 마지막까지 자랑스러운 아들이 돼야죠.”“난 이제 부모님의 자랑이 아니야, 사지도 멀쩡하지 않은 내가 어떻게 자랑스럽겠어.”“부모님은 세상에서 오빠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에요. 한쪽 다리가 아니라 두 다리를 다 잃었다고 해도 부모님은 오빠를 자랑스러운 아들로 여기실 거에요. 오빠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오빠 대신해서 더 가슴 아파할 거라고요.”“넌 나 안 더러워? 다리도 없는 내가 너무 역겹잖아.”“누가 그런 말을 해요, 난 그냥 오빠를 보면 가슴이 아파요.”“오빠만 포기 안 하면 돼요, 다들 오빠 응원하고 있어요. 모든 걸 잃었다고 해도 우리가 있잖아요,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너도 내 옆에 있을 거야?”“당연하죠. 나도 오빠 곁을 지킬게요.”나지막이 묻는 송승
“죄송해요 어머님, 저도 좀 흥분한 것 같아요. 집안에 큰일이 일어나서 가족들 전부 감정이 격해졌을 거예요. 저도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쓸게요. 저 얼른 옷 갈아입고 승우 오빠한테 가볼게요.”허영지의 말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은 하지수는 그만 옷을 갈아입으러 가버렸고 허영지는 송기명을 바라보았다.제 아내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본 송기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수 말이 맞아요, 집안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니까 다들 감정 제어를 잘 못 했죠. 그렇다고 우리 감정을 다른 사람한테 푸는 건 잘못된 거예요. 그건 불공평하잖아요.”“나는 그냥...”“당신도 며칠 전에 문수 많이 변한 것 같다고 했었잖아요. 어릴 때부터 못 해준 게 너무 많다고 미안해하더니 왜 이젠 또 이렇게 불만이 많아진 거예요? 어젯밤도 문수가 밤새 승우 지키고 있었는데 걔도 잠은 자야죠. 그래야 우리랑 교대도 하죠. 우리 나이에 버티면 얼마나 버틴다고 그래요?”“하지만 승우한테 다리 절단했다는 걸 알려준 게 문수잖아요. 의사 선생님도 절대 비밀로 하라고 하셨는데 그랬잖아요! 그래요, 어릴 때 내가 잘 못 키운 건 맞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이런 저급한 실수를 할 정도는 아니잖아요.”“당신 입으로도 저급한 실수하고 하면서 왜 문수가 그런 실수를 했을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그렇다 쳐도 문수가 우리 회사 맡으면서부터 나랑 따로 얘기도 많이 했었어요. 우리 문수 할 말 못 할 말은 가리는 아이고 그런 시행착오는 한 번도 범한 적 없었어요.”“그래서 더 화가 난다고요, 괜찮아진 줄...”“승우가 스스로 눈치챘을 수도 있잖아요.”송기명은 계속 반박하는 허영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승우처럼 똑똑한 애가 문수가 말 안 한다고 눈치 못 챌 것 같아요? 승우 본인 몸은 본인이 가장 잘 알겠죠, 그냥 그 안에 있던 게 문수라 우리가 오해한 것뿐이에요.”처음에는 같이 화를 내던 송기명도 조금 진정하니 모든 게 명확해졌었다.사람이 화가 나면 판단력이 흐려진다는데 그래서 그만 송문수를 오
하지수의 전화를 받은 소이연은 그녀의 목소리만 듣고도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지수 씨, 무슨 일 있어요?”“문수 씨가 오늘 어머님이랑 좀 다퉜는데 핸드폰도 다 깨져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문수 씨가 걱정되는 데 아버님이 승우 오빠 먼저 설득해달라고 해서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이거든요.”“그래서 현경이랑 친구분들더러 문수 씨 찾아달라고 하라는 거죠? 혹시 문수 씨가 안 좋은 생각 할까 봐?”“네.”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맞히는 소이연이 제 친구라서 하지수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현경이한테 말할 테니까 지수 씨는 걱정 말고 승우 씨한테 가요. 찾으면 연락할게요.”“고마워요 언니.”“아니에요.”전화를 마친 하지수는 아무리 심호흡을 해봐도 답답한 가슴을 안고 병원에 들어섰다.바로 중환자실로 향한 그녀 눈에 보이는 건 복도에 앉아 쉴 틈 없이 울고 있는 허영지였다.하지수가 병원을 나설 때도 울고 있더니 아직까지도 진행 중인 것 같았다.저 눈물이 송승우를 위해 흘리는 건지 아니면 송문수와 다퉈서 흘리는 건지는 몰라도 하지수는 어떻게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몰랐다.솔직히 말하면 별로 위로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허영지가 송문수를 대하는 태도는 하지수마저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기 때문이다.“지수 왔구나”“네, 아버님.”“승우가 너 빼곤 아무도 보지 않겠대. 승우 아니었으면 너 이렇게 급하게 오라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네.”그들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위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사람이었으니 하지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옷 갈아입고 들어가 볼게요.”고개를 끄덕이는 송기명에 하지수가 몸을 돌리던 찰나, 허영지가 아직도 화난듯한 어투로 물었다.“송문수는 안 온대?”“모르겠어요.”“어디 갔어?”“그것도 몰라요.”“걔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 뻔히 알면서 뭐 하는 짓이야!”하지수는 눈물을 흘리며 발악하는 허영지를
“무슨 일로 전화한 거냐니? 넌 동정심이라곤 없니? 네 형이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고!”하지만 계속해서 화를 내는 허영지에 송문수의 인내심도 결국 바닥나버렸다.“그럼 엄마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요? 형 병실 앞에서 매일 밤낮으로 지키길 바라세요? 아니면 사고 난 게 형이 아니라 나였으면 하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 집안의 쓰레기 같은 존재였잖아요, 그런 내가 죽으면 다들 아무렇지도 않았겠죠!”담아뒀던 서러움이 터지듯 말을 쏟아내는 송문수에 잠에서 깬 하지수가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문수 씨.”하지만 송문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한동안 조용하다가 입을 연 허영지는 목이 멘 채로 말했다.“송문수, 너까지 나 힘들게 할 거야? 내가 죽는 꼴이라도 봐야겠어?”“내가 엄마를 죽이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날 죽으라고 내몰았던 사람이 엄마 아빠예요.”말을 마치고 나서 바로 핸드폰을 내던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바닥에는 깨진 핸드폰이 나뒹굴고 있었고 송문수는 방문을 세게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어릴 때부터 참지 않던 송문수라도 그가 이렇게 화내는 건 처음 본 하지수는 다급히 뒤쫓아가려 했지만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때문에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네, 아버님.”“지수야, 너 지금 문수랑 같이 있어?”“아까까진 같이 있었는데 문수 씨 방금 나갔어요.”“문수 괜찮은 거야?”“모르겠어요. 어머님은 좀 어떠세요?”“화나서 계속 울지 뭐.”제 아내를 말릴 수도 없었던 송기명은 뒤늦게 허영지를 대신해 해명했다.“사실 이 사람도 문수한테 뭐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너무 슬퍼서 순간 아무 말이나 막 한 것 같아.”“알아요.”하지수도 허영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송문수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거라 마음이 안 좋았다.“지금 병원으로 좀 올래?”“문수 씨 핸드폰도 안 가지고 나가서 전 문수 씨 찾으러 가야겠어요.”“걘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걱정 마.”“왜 문수 씨는 아무
“송승우가 또 수술받으니까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냥 입 다물고 있은 거잖아. 그렇게라도 응어리 좀 풀라고.”“나 그 정도로 속 깊은 사람 아니야. 그냥 말하기 싫었을 뿐이지.”“난 못 속인다니까.”매번 거짓말을 할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송문수이기에 하지수는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다 알 수 있었다.“문수 씨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하지수는 송승우보다 송문수가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물론 송승우도 부모님을 아주 공경했지만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해온 그는 다 커서도 집안의 관심만 바랐지 집안에는 그 어떠한 공헌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늘 형에게 밀려나 찬밥신세이던 송문수는 항상 부모님 곁을 지키며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데 발 벗고 나서곤 했다.“나 이제 잘 거야.”그래서 대견스러워서 한 말인데 송문수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게 부끄러웠는지 귀가 빨개져서는 욕실로 도망가버렸다.그런 송문수의 뒷모습을 보던 하지수는 자신이 따라온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졌다.만약 송문수를 혼자 보냈다면 그는 지금까지도 가족들의 이해를 받지 못한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텐데 하지수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모든 사람의 시선은 송승우에게 집중되어있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 하지수도 포함이었다.그럼 송문수도 질투하고 부러워할 만도 할 텐데 하지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송문수가 송승우의 것을 탐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까 싶어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지금은 송승우도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시부모님도 아들을 지키겠다고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기에 하지수가 이런 슬픔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생각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걸 막고자 눈을 감았다 뜨며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온 다음에 송문수를 제대로 달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샤워를 마친 송문수는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자신이 정말 잘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눈만 감으
병원을 나선 송문수가 택시를 잡아타려고 할 때 하지수가 뛰어나오며 그를 불렀다.“문수 씨!”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차를 출발시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아주 다급해 보여서, 그녀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문을 연 채로 하지수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사실 하지수도 송문수가 저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버릴까 봐 걱정됐는데 여전히 멈춰있는 차에 안심하며 빠르게 올라탔다.기분이 나빠서 호텔이든 어디든 가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그러다가 연락이라도 안 되면 하지수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따라 나온 거였다.하지수가 차에 앉은 걸 확인한 송문수가 차를 출발시켰고 둘은 정적 속에서 호텔로 향했다.하지수는 몇 번이나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무심히 창밖만 내다보는 송문수에 차마 입을 뗄 용기가 생기지 않아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송문수에게도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그런데 호텔 방으로 들어오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하지수, 나 욕할 거면 빨리해. 참을 필요 없어. 욕 다 하면 나도 잘 거야.”“뭐?”예기치 못한 말에 하지수가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송문수가 말을 이었다.“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와중에 잠이나 자겠다는 내가 이해 안될 수도 있지만 나도 어제부터 못 자서 지금 좀 피곤해. 사람이 오랫동안 잠을 못 자도 심장마비로 죽거든.”“나 당신이랑 같이 자러 온 거야. 어제 나도 잘 못 잤어.”“당신이 마음 불편해서 못 잘까 봐 온 거라고. 나는 당신이 안 잔다고 버틸까 봐 그게 더 걱정됐어.”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하지수의 반응에 송문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나도 당신한테 화낼 줄 알았어?”“화내는 게 당연하잖아.”씁쓸한 투로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어차피 송승우도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어.”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역시나 하지수도 제가 송
“왜 이래? 왜 갑자기 안 보이는 거야?”눈도 깜빡이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던 허영지는 갑자기 내려진 커튼에 슬픈 눈을 하고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에게 물었다.“환자분 쉬셔야 하니까 일단은 다들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 내 아들 옆에 있을 거예요.”“환자분이 가족들 보는 걸 원치 않습니다.”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믿기지 않는 말에 허영지는 또 눈물을 터뜨렸다.“왜 우릴 안 보겠다는 거예요? 안에서 혼자 있으면 힘들 텐데...”“환자분한테도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까 일단은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허영지가 고집을 피우자 마찬가지로 송승우 옆에 있고 싶었던 송기명도 움직이지 않았다.“문수 넌 이제 그만 가.”“어젯밤도 샜으니 돌아가서 자.”쌀쌀맞은 엄마의 말투에서 저건 관심이 아니라 타박임을 눈치챈 송문수는 엄마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호텔에 가 있을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바로 올게요.”하지만 송문수의 말에도 허영지는 대답 없이 차가운 등을 보일 뿐이었다.그에 고개를 떨군 송문수는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줄곧 허영지의 곁을 지키며 한마디도 않고 있던 하지수를 쳐다보았다.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도 제가 송승우에게 사실을 말해버렸다고 원망하는 것 같아서 송문수는 결국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하지수는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송문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송문수가 먼저 다리를 잘라냈다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있던 하지수는 그가 해야 할 말을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것 같아 입술을 말아 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전의 송문수라면 모르겠지만 함께 일 하면서 봐왔던 송문수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만약 그가 정말 상황파악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큰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못했을 것이다.혹시라도 너무 속상해서 해명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봐 하지수는 용기를 내어 시부모님을 보며 말했다
의사의 질문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답했다.“오른쪽 다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아직은 회복도 채 안 됐고 그런 큰 충격을 받으면 회복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가족분들이 그 정도는 주의해주셔야죠.”의사의 말이 끝나자 허영지도 분노의 화살을 송문수에게로 돌려버렸다.“넌 어쩜 아직도 이러니? 승우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 나이 먹었으면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가려야지. 만약 승우가 너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허영지가 목놓아 울자 송기명도 미간을 찌푸린 채로 허영지를 다독이며 말했다.“오늘 일은 나도 실망이다 너한테. 서른 살 넘으면 뒤도 안 보고 일부터 저지르는 버릇은 좀 고칠 줄 알았는데.”가족들의 질타에 해명을 하려던 송문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어릴 때부터 송승우와 송문수가 싸울 때면 부모님은 늘 송승우의 편만 들어줬기에 송문수는 지금 이 상황에 송승우가 스스로 알아챘다고 한들 저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그래서 입 아프게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선생님, 그럼 이제 어떡해요?”“애가 제 몸 상태를 알았으니 죽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선생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이제 고작 서른 좀 넘은 앤데 미래가 창창한 애를 제가 먼저 보낼 순 없잖아요...”대성통곡을 하는 허영지를 향해 의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금은 별문제 없는데 계속 이렇게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이성을 잃으면 그땐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이미 환자분이 본인 몸 상태를 다 알게 됐으니 가족분들은 위로해주면서 환자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우리 아들 국내 최고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애예요,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애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텐데... 승우가 제 몸 상태를 알게 됐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만 생각하면 저도 죽을 것 같아요...”“차라리 그냥 내가 다치고 말지,
장기들은 다 있는 것 같은데 오른쪽 다리에만 느낌이 없는 게 아무래도 불길했다.“형, 진정하라니까.”“마취가 아직 안 풀려서 그런 거야. 마취만 풀리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니까 좀 기다려봐.”“아니야, 아무 느낌도 안 나잖아. 그냥 없어진 것 같아...”송문수의 위로에도 흥분하며 몸을 움직이던 송승우는 점차 제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지금 송승우는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생각에 송문수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환자의 강한 움직임에 여러 가지 중요한 수치가 변하자 중환자실에서부터 경보음이 울려고 빠르게 뛰어온 의사들은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들을 보더니 곧바로 송승우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송승우의 심장박동이 놀라울 정도로 느려진 걸 본 송문수는 깜짝 놀라며 재빨리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겼다.한편 하지수의 거듭되는 설득에 밥을 먹고는 송기명과 허영지는 아들 걱정에 일찌감치 병원으로 나왔는데 때마침 수술실로 뛰어가는 송문수와 침대에 누워있는 송승우를 보게 되었다.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더니 또 무슨 일로 수술실에 가는지 몰랐던 그들은 어두워진 의료진들의 안색을 살피며 놀란 심장을 부여잡았다.마음 약한 허영지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하자 송기명과 하지수가 그녀를 부축했고 하지수는 괜찮을 거라고 허영지를 다독이며 그녀와 함께 수술실 앞으로 다가갔다.가족들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던 송문수를 하지수가 나지막하게 불렀다.“문수 씨.”그에 고개를 홱 돌린 송문수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아까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길 때 송승우의 손이 그의 손에 닿았는데 그게 사람의 손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워서 송문수는 아직도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왜 그래, 말 좀 해봐.”“승우, 우리 승우 괜찮은 거지?”하지수는 하얗게 질린 송문수가 걱정됐지만 허영지는 송문수의 안색은 신경 쓰지 못하고 송승우의 안부를 물었다.송문수는 가족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송승우가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