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예수진이 집문 앞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거하게 취한 모양이다.소이연이 성큼성큼 걸어갔다.“수진 씨?”예수진이 눈을 거슴츠레 뜨고 소리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소이연을 알아보더니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글썽거렸다.“언니, 왜 이제 왔어요?”“왜 여기에 있어요? 많이 마셨네.”“오늘 촬영이 일찍 끝나서 친구들이랑 좀 마셨어요.”예수진이 술냄새를 풍기며 말했다.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하지수 씨랑 마셨어요?”“그 계집애는 너무 바빠요. 출장 갔거든요. 다른 친구들이랑… 딸꾹… 술 친구들이랑.”말을 하면서도 술 트림까지 했다.하지수는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아닌데,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소이연이 재빠르게 현관문을 열고 예수진을 부축해서 들어갔다.“안에 사람 없으면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요.”“연애하는 데 방해할까 봐. 아니면 오빠한테 죽어요.”예수진이 말하다 구역질을 해서 소이연이 재빨리 화장실로 끌고 들어갔다.변기 앞에 앉은 순간 와르르 토사물을 배출했다.소이연이 계속 등을 두드려주었다.얼마나 토했으면 쓰린 위를 감싸 안았다.“이제 괜찮아요? 물 좀 갖고 올게요.”“씻고 싶어요.”“혼자 할 수 있겠어요?”“네.”소이연이 목욕물을 받아 놓고 갈아입을 옷까지 챙겨다 주었다.예수진이 다 씻고 나왔을 때 소이연이 꿀물을 타서 건네주었다.침대에 비스듬하게 누워서 꿀물을 마시던 예수진이 해맑게 웃었다.“여기 오면 날 챙겨줄 줄 알았어요.”너무 토해서 얼굴이 창백하지만 그래도 웃었다.소이연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집에 하인들이 그리 많은데 수진 씨를 잘 챙겨주지 않아요?”“내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까요.”“부모님과 싸웠어요? 아니면 외할아버지와 말다툼이라도 했어요?”소이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아니요.”예수진이 부정했다. 말하고 싶지 않는지 이불을 머리 위로 푹 덮어썼다.“잘게요.”소이연도
기사 일면에서 커다랗게 쓴 제목이 눈에 띄었다.‘예수진 스캔들: 남친 계지원이 드디어 수면 위로 올라왔다!’그 제목을 본 순간 예수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이상함을 느낀 소이연이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뉴스를 검색해 보았다.기사 앞부분에 예수진의 지난 스캔들을 간략하게 서술했고 뒤에 두 사람의 관계가 사실이라는 것이 설명되어 있었다. 그리고 ‘풍화정집’의 여주 문서아를 하차시키고 예수진으로 교체한 것을 언급하면서 두 사람이 연애하는 사이가 확실하다고 발언했다.소이연이 기사에 뜬 사진 몇 장을 다시 보았다.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호화로운 별장 입구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멀리서 찍었지만 분명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싸한 분위기였다.그 모습이 찍혀서 골치 아프게 스캔들이 나버렸다.하지만 전부 언론을 탓할 수 없었다. 모자이크한 계지원의 얼굴을 다른 사진과 비교했더니 육현경의 윤곽과 엇비슷해서 원본 사진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오해할 만했다.“아씨!”예수진이 기사를 확인하고 뚜껑이 열렸는지 욕을 내뱉았다.휴대폰 너머로 다인의 목소리가 들렸다.“수진.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숨기지 말고 어떻게 입장 발표할 건지 계 감독님과 상의해 봐. 집까지 찍혔는데 확실하게 해명하지 않으면 다들 믿지 않을 거야. 근데 요즘 팬들도 연예인들이 연애를 한다고 해서 반감을 사는 눈치는 아니야. 두 사람 잘 어울리니까 내가 회사 측에 얘기해볼게. 아니면 공식적으로 발표할래? 마침 연애 관련 예능 프로그램 제안이 들어왔거든.”“나와 계지원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예수진이 이를 갈며 또박또박 말했다.“수진아.”“이따 다시 전화할게.”예수진이 바로 끊어버리더니 심호흡 한 번 하고 계지원에게 연락했다.“지금 당장 우리 둘이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발표해. 나도 우리는 협력 관계라는 걸 밝힐 테니까.”예수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너 때문에 내 연예인 인생 망치고 싶지 않아!”“알았어.”계지원이 짧게 대답하고는 이내 이성적으로 말했다.“그 전에 우리
”민이 어떻게 육씨 가문에 들어왔는지 궁금하죠?”소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줄 알았어요. 그 답답한 인간이 지 입으로 말할 리가 없지.”예수진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하지만 그녀도 물은 적이 없었다.“오빠가 21살 때에 민이를 데리고 왔어요. 그것도 외할아버지가 직접 데려왔죠. 그때 오빠는 민이의 존재를 모르는 눈치였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암튼 외할아버지는 세상에 모르는 일이 없어요.”예수진이 지난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외할아버지가 민이를 안고 왔을 때 오빠는 해외에 있었어요. 그때 민이의 친모가 아이를 낳자마자 병원에 버리고 도망가서 외할아버지가 데리고 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그 말에 소이연의 가슴이 조여오듯 아파왔다.전에 육현경이 육민의 친모가 자식을 버렸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그 장면을 떠올리자 숨이 막힐 정도로 슬펐다.갑자기 그 아이가 생각났다. 그렇게 원했던 아이었는데 뱃속에서 죽어버린 아이.소이연이 슬픔을 참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그 모습을 본 예수진이 당황했다.“언니 왜 울어요?”“모르겠어요.”소이연도 왜 갑자기 통제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지 몰랐다.“그냥 가슴이 너무 아파요.”“내가 처음 민이를 봤을 때도 그랬어요. 사람이 얼마나 지독해야 친자식을 매정하게 버릴 수 있는지. 만약 내가 오빠였다면 평생 그 여자를 용서하지 않았을 거예요!”예수진이 한마디 덧붙였다.“오빠도 용서하지 않겠지만.”소이연이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뭐가 내키지 않아서 오빠를 버리고 민이까지 버렸는지. 오빠 얼굴이 못 생겼어요 아니면 돈이 부족해요? 능력도 출중한데, 그 여자 장님 틀림없어요!”예수진이 격분했다.대체 어떤 여자가 육현경을 갖고 놀다가 소탈하게 돌아섰는지 소이연도 궁금했다.“한번은 나와 도경 오빠가 술을 마시면서 그 문제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어요. 아마 그 여자도 오빠의 능력을 모르고 만났을 거
”알았어요.”예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이연 언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오빠랑 만나서 너무 좋아요.”갑작스러운 고백에 소이연은 쑥스러웠다.자신도 육현경과 만나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민의 친모가 보는 눈이 없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이렇게 좋은 언니를 어떻게 만나겠어요.”예수진이 아부하는 티가 확 느껴졌다.“빨리 자요.”소이연이 재촉하고는 부랴부랴 욕실로 들어갔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예수진이 킥킥 웃으면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여자들이란 참, 먼저 쓰레기 같은 남자를 만나야 정신을 차리고 진짜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건가?소이연이 문서인 쓰레기를 만난 것처럼 자신도 불행하게 계지원과 만났다고 여겼다.…이튿날 아침 예수진이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눈을 떴다.휴대폰 액정을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다인, 계지원이 다 알아서 처리한다고 말했잖아. 우린 그냥 기다리면 되니까 날 귀찮게…”“계 감독님이 이미 발표했어.”갑자기 잠을 확 깬 예수진이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서 앉았다.커다란 인기척에 소이연도 깨어났다.침대에서 일어나 지나치게 흥분해 있는 예수진을 바라봤다.예수진이 휴대폰으로 뉴스를 확인했다. 일면에 계지원의 개인 성명이 올라와 있었다. 그와 예수진의 연애 관계를 확실하게 부정하고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일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문서아와 지금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불법 언론사에 사실과 어긋나는 말과 사진을 함부로 올리지 말라고 요구했다.소이연이 옆에서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계지원과 문서아가 사귄다고?문씨 가문에 편견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문서아는 좋은 사람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수진!”다인이 휴대폰 너머로 큰소리로 불렀다.“어.”예수진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조용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너 계 감독님과 정말 아무도 없었어?”다인은 믿기지 않았다.아무도 없었다면 왜 사진에 찍혔냐고? 그것도 야심한 밤에 육씨 저택에서.육씨 저택이 그렇게 쉽게 드나
예수진이 침묵했다.다인은 그녀가 불쾌해한다는 걸 눈치채고 한숨을 내쉬었다.계지원과 문서아의 재산을 따진다면 예수진이 빼앗겨도 할 말이 없다.예수진이 안쓰러워서 위로했다.“연예계에 좋은 남자가 널리고 널렸다. 남자가 계지원 하나뿐이겠어? 지금 계지원과 문서아가 서로 입장을 발표한 이상 우리 작업실에서도 축하해줄 생각인데 그래도 괜찮겠어?”그녀의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알아서 결정해.”“그럼 오늘 하루 쉬어, 내가 촬영팀에 말할게.”“알았어.”예수진이 전화를 끊고 문서아에 관한 뉴스를 보았다.문서아가 개인 SNS에도 글을 올렸다.‘저와 지원 씨는 오랫동안 연인 사이로 지냈어요. 우리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고 앞으로도 좋은 인연을 이어갈 거예요. 여러분의 지지와 축하에 감사드려요.’라는 글와 두 사람이 친밀하게 찍은 사진도 첨부해서 올렸다.계지원과 문서아가 얼굴을 맞대고 웃는 모습이 정말 애틋하게 사랑하는 연인 사이처럼 보였다.하지만 댓글은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어제 예수진과 계지원의 스캔들이 나서 기뻤는데 오늘 눈을 뜨고 보니까 다른 여자로 바뀌었네. 능력 좋다!][딱 봐도 예수진이 계지원한테 놀아난 거네. 야심한 밤에 계지원 따라 집에 가서 뭘 했겠어? 지금 두 사람이 스캔들이 나오니까 계지원이 시치미를 떼를 것 좀 봐.][계지원 정말 무책임하다. 우리 수진이만 가엽게 속았네.]예수진이 덤덤하게 댓글을 읽었다.소이연도 옆에서 세 사람에 관한 뉴스들을 검색해 보았다.여론이 빠르게 한쪽 방향으로 쏠렸다. 모두 계지원이 무책임한 바람둥이라고 비난했지만 문서아는 오히려 멀쩡했다. 그래도 계지원과 연인 사이라고 발표한 이상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예수진은 온전히 피해자가 되었다.그래서 자신의 명의로 예수진의 미래를 바꾸는 게 계지원이 말한 처리 방식이란 말이야?뭔가 수상한데?소이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계지원이 예수진에게 최선을 다해 잘해주는 것 같았다.그런데 예수진은 왜 그렇게 싫어할까?아무런 이유 없이
싫어한다면 예수진을 위해서 왜 명의까지 잃어가며 혼자 책임을 졌을까?“두 사람 관계는 좀 복잡해. 계지원은 내 친구이지만 촌수로 따지면 삼촌 뻘이야. 내가 대신 비밀을 지켜주고 있어. 그러니까 두 사람은 될 수 없는 사이야.”육현경이 알려주지 않아서 소이연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말해줄 수도 있어.”그러다 육현경이 말을 바꿨다.“…”순순히 알려줄 리가 없지.육현경은 언제나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씨 가문의 사적인 문제라 외부인에게 말하기가 좀 그렇거든. 근데 나한테 시집을 온다면 자연스럽게 집안의 모든 일을 알게 될 거야.”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에 소이연은 어이가 없었다.어제 예수진이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늙은 여우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육씨 가문에 여우들만 모여서 사는 가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수진이 잠시 부탁할게. 걔가 살 집을 마련하면 그때 옮길 거야.”“알았어.”예수진이 오래 있어도 개의치 않았다.“혹시 여행가고 싶어?”육현경이 화제를 돌렸다.“…”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네?소이연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다.“안 돼. 나 바빠.”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려면 준비할 것이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얼마나?”상대방의 퉁명한 소리가 들렸다.“3개월 정도.”마지막 결승전까지 버틴다면 3개월은 바쁘게 보내야 한다.“3개월 뒤에 거절하지 마.”듣기엔 명령 같지만 세상 부드러운 목소리였다.소이연은 가슴이 설레었다.결국 마지못해 대답해서야 전화를 끊었다.…일주일 뒤.계지원에 관한 이슈가 사나흘 만에 관심도가 하락했다.육씨 가문에서 손을 쓴 것 같았다.계지원도 꽤 영리한 두뇌를 갖고 있다. 육씨 가문에서 예수진이 연예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해 관여하지 않지만 계지원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가 터지면 무조건 압박을 가해서라도 처리해주니 그것을 이용한 것 같았다.그렇다 해도 부정적인 뉴스 때문에 큰 타격은 받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계지원은 사람들 뒤에서 일하는 직업이라 아무
소나은이 입을 열기 전에 문서아가 몇몇 실장을 꼬리에 달고 다가와 지껄였다.“정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도 만난다더니 세상이 너무 좁지 않아요?”문서아까지 올 줄은 몰랐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번 프로그램에 초청한 연예인들 중에 인기 연예인은 없었다. 일부분은 한물간 배우이고 다른 한 부분은 2,3 선에서 배회하는 여자 연예인뿐이었다.일반인들끼리 파트너를 맺는 자리에 인기도 높은 연예인들이 올 자리는 아니었다.소이연은 두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돌아서 갔다.“이연 언니. 아무리 자신감이 넘쳐도 자만하지는 말아야죠. 전국 국민들 앞에서 정말 괜찮겠어요?”문서아가 비아냥거렸다.“서아, 너나 걱정해. 내가 그동안 계 감독님을 지켜봤는데 쓸데없이 말썽을 일으키는 여자는 싫어하는 것 같더라고.”소이연이 대꾸했다.문서아의 안색이 순간 싸늘해졌다.계지원을 내세워서 협박할 줄은 몰랐다.“참, 전에 현경 씨 생일 때, 내가 지원 씨 하고 술도 마셨어.”소이연이 일부러 신경을 긁었다.“다음에 또 모인다면 서아도 데리고 나왔으면 좋겠다.”소이연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 갔다.그 모습을 보던 문서아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소이연, 너 지금 나를 비꼬는 거야?아무리 뉴스에서 커플이라고 나불거려도 실은 진정한 연인 사이가 아니다, 이 거야?그날 저녁 계지원과 예수진이 팬들의 비난을 받고 있을 때 계지원이 새벽 3시에 문서아에게 연락했다. 자신과 사귄다면 날이 밝는 대로 대외에 발표하겠다고 말하면서 발표하는 즉시 자신의 평판이 바닥을 치는 것은 물론 그녀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거라고 솔직하게 말했다.문서아는 고민도 없이 단번에 대답했다.평판이 나빠지는 건 일시적일 뿐, 계지원이 먼저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승낙한 뒤, 두 사람이 다정한 자세를 취하고는 사진 몇 장을 찍기 위해서 계지원이 새벽 4시에 문서아의 별장에 왔었다.계지원이 입장을 발표를 한 뒤에 문서아더러 개인 SNS에 사진과 글을 올리라고 했다.그래서 두 사람
소씨 가문만 의지해서는 안 되었다. 소씨 가문은 워낙 남존여비 사상이 강해 한두 개 원고를 사는 건 문제없지만 거액을 들인다면 틀림없이 반대해 나선다. 그러니 문씨 가문의 재력까지 이용한다면 쉽게 이름을 날릴 수 있다.먼저 문서인을 찾아가서 문씨 그룹의 수석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요구했다.문서인에게 손톱만큼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지만 승승장구하려면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다행히 문서인이 거절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줬다.무엇을 요구하면 한마디 잔소리도 없이 해줬다.만약 소나은이 빈털터리가 된다고 하면 문서인도 따라서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하지만 문씨 가문에서도 손해보는 건 없었다.이번 대회에서 문씨 가문 대표로 대상을 받게 되면 문씨 가문에서 영광을 얻게 되니까.소나은이 눈을 찔금 감았다.은하그룹에 있을 때 진정한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소이연이 압박을 가할 때마다 대충 하는 시늉만 냈었다.어쨌든 그녀를 위해 일하는 건 썩 내키지 않았다.그러니 이번 대회에 진지하게 임한다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참가자들이 녹화장에 들어가 감독의 안배에 따라 각자 자리에 앉았다.예고편을 찍을 때 현장에 참여한 관중들과 인사를 나누고 연예인들과 파트너를 정한다.소이연이 앞에 나서서 자기소개를 할 때 모두 경멸하는 시선을 보냈다.다들 은하그룹 수석 디자이너라는 직함도 스스로 안배해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수군거렸다.그렇게 되면 소이연과 소나은 두 자매가 맞서서 겨루는 상황이 되어버리니 이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사람이 어디 있을까?소이연이 자기소개를 마친 뒤에 어떤 연예인도 그녀를 택하지 않았다.필경 파트너와 업무는 서로 성질이 다르니, 첫 번째 대결에서 소이연 때문에 탈락하고 싶지 않았다. 프로그램 규칙은 디자이너가 탈락하면 파트너도 탈락하기에 서로 신중하게 파트너를 골라야 했다.소나은이 자기소개를 할 때 국제디자이너대회에서 글로벌 수상 5위, 아시아 수상 2위, 은하그룹 수석 디자이너 및 문씨 그룹 수석 디자니어 등등 수상
“송승우가 또 수술받으니까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냥 입 다물고 있은 거잖아. 그렇게라도 응어리 좀 풀라고.”“나 그 정도로 속 깊은 사람 아니야. 그냥 말하기 싫었을 뿐이지.”“난 못 속인다니까.”매번 거짓말을 할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송문수이기에 하지수는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다 알 수 있었다.“문수 씨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하지수는 송승우보다 송문수가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물론 송승우도 부모님을 아주 공경했지만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해온 그는 다 커서도 집안의 관심만 바랐지 집안에는 그 어떠한 공헌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늘 형에게 밀려나 찬밥신세이던 송문수는 항상 부모님 곁을 지키며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데 발 벗고 나서곤 했다.“나 이제 잘 거야.”그래서 대견스러워서 한 말인데 송문수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게 부끄러웠는지 귀가 빨개져서는 욕실로 도망가버렸다.그런 송문수의 뒷모습을 보던 하지수는 자신이 따라온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졌다.만약 송문수를 혼자 보냈다면 그는 지금까지도 가족들의 이해를 받지 못한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텐데 하지수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모든 사람의 시선은 송승우에게 집중되어있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 하지수도 포함이었다.그럼 송문수도 질투하고 부러워할 만도 할 텐데 하지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송문수가 송승우의 것을 탐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까 싶어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지금은 송승우도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시부모님도 아들을 지키겠다고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기에 하지수가 이런 슬픔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생각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걸 막고자 눈을 감았다 뜨며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온 다음에 송문수를 제대로 달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샤워를 마친 송문수는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자신이 정말 잘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눈만 감으
병원을 나선 송문수가 택시를 잡아타려고 할 때 하지수가 뛰어나오며 그를 불렀다.“문수 씨!”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차를 출발시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아주 다급해 보여서, 그녀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문을 연 채로 하지수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사실 하지수도 송문수가 저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버릴까 봐 걱정됐는데 여전히 멈춰있는 차에 안심하며 빠르게 올라탔다.기분이 나빠서 호텔이든 어디든 가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그러다가 연락이라도 안 되면 하지수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따라 나온 거였다.하지수가 차에 앉은 걸 확인한 송문수가 차를 출발시켰고 둘은 정적 속에서 호텔로 향했다.하지수는 몇 번이나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무심히 창밖만 내다보는 송문수에 차마 입을 뗄 용기가 생기지 않아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송문수에게도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그런데 호텔 방으로 들어오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하지수, 나 욕할 거면 빨리해. 참을 필요 없어. 욕 다 하면 나도 잘 거야.”“뭐?”예기치 못한 말에 하지수가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송문수가 말을 이었다.“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와중에 잠이나 자겠다는 내가 이해 안될 수도 있지만 나도 어제부터 못 자서 지금 좀 피곤해. 사람이 오랫동안 잠을 못 자도 심장마비로 죽거든.”“나 당신이랑 같이 자러 온 거야. 어제 나도 잘 못 잤어.”“당신이 마음 불편해서 못 잘까 봐 온 거라고. 나는 당신이 안 잔다고 버틸까 봐 그게 더 걱정됐어.”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하지수의 반응에 송문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나도 당신한테 화낼 줄 알았어?”“화내는 게 당연하잖아.”씁쓸한 투로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어차피 송승우도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어.”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역시나 하지수도 제가 송
“왜 이래? 왜 갑자기 안 보이는 거야?”눈도 깜빡이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던 허영지는 갑자기 내려진 커튼에 슬픈 눈을 하고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에게 물었다.“환자분 쉬셔야 하니까 일단은 다들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 내 아들 옆에 있을 거예요.”“환자분이 가족들 보는 걸 원치 않습니다.”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믿기지 않는 말에 허영지는 또 눈물을 터뜨렸다.“왜 우릴 안 보겠다는 거예요? 안에서 혼자 있으면 힘들 텐데...”“환자분한테도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까 일단은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허영지가 고집을 피우자 마찬가지로 송승우 옆에 있고 싶었던 송기명도 움직이지 않았다.“문수 넌 이제 그만 가.”“어젯밤도 샜으니 돌아가서 자.”쌀쌀맞은 엄마의 말투에서 저건 관심이 아니라 타박임을 눈치챈 송문수는 엄마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호텔에 가 있을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바로 올게요.”하지만 송문수의 말에도 허영지는 대답 없이 차가운 등을 보일 뿐이었다.그에 고개를 떨군 송문수는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줄곧 허영지의 곁을 지키며 한마디도 않고 있던 하지수를 쳐다보았다.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도 제가 송승우에게 사실을 말해버렸다고 원망하는 것 같아서 송문수는 결국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하지수는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송문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송문수가 먼저 다리를 잘라냈다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있던 하지수는 그가 해야 할 말을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것 같아 입술을 말아 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전의 송문수라면 모르겠지만 함께 일 하면서 봐왔던 송문수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만약 그가 정말 상황파악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큰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못했을 것이다.혹시라도 너무 속상해서 해명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봐 하지수는 용기를 내어 시부모님을 보며 말했다
의사의 질문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답했다.“오른쪽 다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아직은 회복도 채 안 됐고 그런 큰 충격을 받으면 회복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가족분들이 그 정도는 주의해주셔야죠.”의사의 말이 끝나자 허영지도 분노의 화살을 송문수에게로 돌려버렸다.“넌 어쩜 아직도 이러니? 승우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 나이 먹었으면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가려야지. 만약 승우가 너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허영지가 목놓아 울자 송기명도 미간을 찌푸린 채로 허영지를 다독이며 말했다.“오늘 일은 나도 실망이다 너한테. 서른 살 넘으면 뒤도 안 보고 일부터 저지르는 버릇은 좀 고칠 줄 알았는데.”가족들의 질타에 해명을 하려던 송문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어릴 때부터 송승우와 송문수가 싸울 때면 부모님은 늘 송승우의 편만 들어줬기에 송문수는 지금 이 상황에 송승우가 스스로 알아챘다고 한들 저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그래서 입 아프게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선생님, 그럼 이제 어떡해요?”“애가 제 몸 상태를 알았으니 죽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선생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이제 고작 서른 좀 넘은 앤데 미래가 창창한 애를 제가 먼저 보낼 순 없잖아요...”대성통곡을 하는 허영지를 향해 의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금은 별문제 없는데 계속 이렇게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이성을 잃으면 그땐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이미 환자분이 본인 몸 상태를 다 알게 됐으니 가족분들은 위로해주면서 환자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우리 아들 국내 최고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애예요,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애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텐데... 승우가 제 몸 상태를 알게 됐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만 생각하면 저도 죽을 것 같아요...”“차라리 그냥 내가 다치고 말지,
장기들은 다 있는 것 같은데 오른쪽 다리에만 느낌이 없는 게 아무래도 불길했다.“형, 진정하라니까.”“마취가 아직 안 풀려서 그런 거야. 마취만 풀리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니까 좀 기다려봐.”“아니야, 아무 느낌도 안 나잖아. 그냥 없어진 것 같아...”송문수의 위로에도 흥분하며 몸을 움직이던 송승우는 점차 제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지금 송승우는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생각에 송문수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환자의 강한 움직임에 여러 가지 중요한 수치가 변하자 중환자실에서부터 경보음이 울려고 빠르게 뛰어온 의사들은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들을 보더니 곧바로 송승우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송승우의 심장박동이 놀라울 정도로 느려진 걸 본 송문수는 깜짝 놀라며 재빨리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겼다.한편 하지수의 거듭되는 설득에 밥을 먹고는 송기명과 허영지는 아들 걱정에 일찌감치 병원으로 나왔는데 때마침 수술실로 뛰어가는 송문수와 침대에 누워있는 송승우를 보게 되었다.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더니 또 무슨 일로 수술실에 가는지 몰랐던 그들은 어두워진 의료진들의 안색을 살피며 놀란 심장을 부여잡았다.마음 약한 허영지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하자 송기명과 하지수가 그녀를 부축했고 하지수는 괜찮을 거라고 허영지를 다독이며 그녀와 함께 수술실 앞으로 다가갔다.가족들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던 송문수를 하지수가 나지막하게 불렀다.“문수 씨.”그에 고개를 홱 돌린 송문수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아까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길 때 송승우의 손이 그의 손에 닿았는데 그게 사람의 손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워서 송문수는 아직도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왜 그래, 말 좀 해봐.”“승우, 우리 승우 괜찮은 거지?”하지수는 하얗게 질린 송문수가 걱정됐지만 허영지는 송문수의 안색은 신경 쓰지 못하고 송승우의 안부를 물었다.송문수는 가족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송승우가 본
“너 혼자야?”힘겹게 내뱉은 목소리였지만 그게 너무나도 미약해서 송문수는 송승우에게로 가까이 붙은 채 몸을 숙여야만 그가 뭐라고 하는지 그나마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엄마 아빠도 너 걱정했어.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면회 못한다고 해서 어제 호텔로 먼저 보냈어. 보고 싶으면 지금 바로 전화할게.”송문수의 말에 괜찮다며 고개를 젓던 송승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나 많이 다쳤어?”“생명엔 지장 없대, 그런데 교통사고가 워낙 크게 나서 장기들이 많이 손상됐대. 그래서 여기 당분간 있는 건데 최고로 좋은 의료진들만 붙였으니까 걱정 마, 곧 괜찮아질 거야.”“나 얼굴은 멀쩡해?”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얼굴이 붕대로 다 감겨있어서 안 보여.”“눈, 코, 입, 귀는 멀쩡한 것 같아.”“팔다리는 다 있어?”하지만 또다시 들려온 질문에는 곧바로 답을 하지 못하는 송문수였다.이렇게 빨리 저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지만 교통사고에서 깨어난 환자가 가장 궁금해할 게 본인의 목숨과 몸 상태일 테니 송문수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교통사고에서 가장 흔한 후유증이 얼굴 흉터와 장애라서 저런 질문을 하는 건 알겠지만 송문수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눈을 피하기만 했다.“송문수.”“다 있어.”결국 의사의 당부 때문에 송승우의 회복을 돕고자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송문수의 긴장한듯한 반응에서부터 송승우는 무언가 눈치를 챈 듯했다.그 힘든 와중에도 그는 흥분을 한 건지 언성을 살짝 높였다.“너 아까 망설였어.”“거짓말이지?”“아니야. 정말 다 멀쩡해.”“맹세해 그럼.”“맹세할게.”죄책감이 점점 켜졌지만 송승우의 감정변화를 느낀 송문수는 아직은 중환자라 큰 충격은 피해야 하는 송승우를 위해 일부러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게 거짓말이면 넌 평생 하지수랑 같이 못 있어.”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는 송승우에 송문수는 마른 침을 삼켜냈다.제 목숨을 담보로는 맹세할 수 있어도 하지수와의 감정을
예수진:[그럼 너랑 지수 다 서울에 있는 거야? 아직 병원이야?]예수진:[부모님은 좀 어떠셔? 충격이 크시지?]그들의 문자에 하나하나 답장을 하던 송문수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누구한테 일어나도 참혹한 비극인데 그 일이 제 형한테 일어났으니 송문수는 어떻게 송승우를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근심 속에서 밤이 깊어지자 하지수가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자?][아니.][병원에서 잘 수 있으면 어디서 눈이라도 좀 붙여. 문수 씨도 쉬어야지,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티시면 남은 건 당신뿐이야.][알아 나도. 넌 왜 아직 안 자? 시간 늦었는데.][당신이 걱정돼서.][뭐하러 날 걱정해, 난 괜찮아. 송승우가 문제지...]그의 문자에 어떤 말로 답을 해야 할지 몰랐던 하지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송문수도 그만 대화를 끝내려 했다.[늦었으니까 얼른 자.][응.][나 대신 부모님 좀 잘 챙겨줘, 엄마 아빠 쓰러질까 봐 나 너무 무서워.][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핸드폰을 내려놓은 송문수는 중환자실 앞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다.중환자실에서 나온 송승우가 바로 입원할 수 있게 병원에서 VIP 병실을 열어줬지만 송문수는 그 편한 곳도 마다하고 굳이 송승우 옆을 지키고 있었다.아무리 송승우라 해도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 봐.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아침까지도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던 송문수는 간호사의 친절한 부름에 서서히 눈을 떴다.“보호자분?”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몸을 일으킨 송문수는 의아한 눈으로 간호사를 바라보았다.“환자분이 보호자분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송승우 씨가요?”중환자실을 가리키며 당황한 듯 묻는 송문수를 향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송문수 씨가 중환자실로 와줬으면 하세요.”“면회 안된다면서요?”“좀 전에 선생님이 또 몸 상태 체크하셨는데 이젠 다 정상수치로 돌아와서 면회 가능하시대요. 대신 시간만 좀 주의해주세요. 아직 몸이 약하셔서 이럴 때는 저희도 환자분 부탁이라면 뭐든 다
시부모님의 몸 상태를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던 하지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송기명은 더욱이 쓰러진 지 얼마 안 된 터라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다가는 정말 큰 일이 날 것 같았다.“아버님, 어머님, 여긴 문수 씨한테 맡기도 우린 먼저 호텔에 가 있어요.”하지수의 거듭되는 권유에 송기명과 허영지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고 송문수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알겠다니까요. 걱정 마시고 가세요. 제가 입구까지 모셔다드릴게요.”송기명과 허영지를 차에 태운 송문수는 조수석에 앉은 하지수를 바라보았다.모든 감정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녀도 송문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의 눈엔 미련이 가득했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그렇게 차가 출발하고 방향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송문수는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중환자실 복도에 앉은 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리고 핸드폰을 켜보았다.역시나 수많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그의 알림창을 꽉 채우고 있었다.다른 문자는 싹 다 무시한 송문수는 친구들과의 방, 그리고 소이연, 예수진이 함께 있는 단톡방, 이렇게 두 곳에만 답장을 했다.육현경:[대체 무슨 일이야?]계지원:[문수야, 너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아저씨 생신 파티는 왜 취소하는 거야?]하도경:[말 좀 해봐, 전화도 안 받고. 이러다가 다들 답답해 죽겠어,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또 다른 단톡방에 있던 소이연과 예수진 역시 걱정스러운 문자를 보내왔다.소이연:[문수 씨, 무슨 일 있는 거죠?]예수진:[송문수, 답장 안 해? 기사 보니까 아줌마 안색도 엄청 안 좋던데 무슨 일이 나긴 난 거지?]예수진:[말 좀 하라고 이 자식아!]소이연:[수진 씨 진정해요 일단. 문수 씨랑 지수 씨가 바빠서 답장을 못 하는 것 같은데 급한 일 다 보고 나면 우리한테도 알려줄 거에요.]예수진:[알겠어요, 기다려봐야죠 뭐.]자신의 화면을 가득 채운 문자를 보던 송문수는 손가락을 움직여
송문수가 사 온 물을 건네도 부모님은 고개만 저으며 손을 모으셨다.그래서 하지수에게 건네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물을 받아들었다.서울에 온 뒤 송씨 일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줄곧 자리를 지키며 송승우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송승우가 눈을 뜨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는 받아든 물이라 몇 모금 마시기는 했지만 물을 마시면서도 신경은 온통 송승우에게 쏠려있었다.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송승우의 몸을 보게 되었다.너무 아파서인지 아니면 힘이 없어서인지 몸은 미세한 떨림 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송승우의 눈이 서서히 떠지고 있어 하지수는 잔뜩 흥분한 채 외쳤다.“승우 오빠 일어났어요!”“문수, 문수야! 얼른 의사 불러와!”하지수의 말에 정신을 차린 부모님이 송문수에게 의사를 데려오라 했고 송문수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의사는 중환자실에서 각종 검사를 진행했다.방음효과가 워낙 좋은 중환자실이라 의사와 송승우의 대화를 듣지 못했던 가족들은 또다시 초조해 났다.한참이나 지나서 중환자실 빠져나오는 의사에 허영지가 다급히 달려가 물었다.“선생님, 저희 아들은 좀 어떤가요?”“방금 검사 진행했는데 생명엔 아무 지장 없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하지만 아직 회복이 덜 돼서 여기서 며칠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일반병실로 옮겼다가 세균감염이라도 되면 큰일이거든요.”“알겠습니다, 입원은 며칠 하든 상관없으니까 저희 애 잘만 치료해주세요. 그런데 저희가 들어가서 같이 있어 주는 건 괜찮을까요?”“아직은 들어가지 마세요. 환자분도 방금 깨어나셔서 머리가 어지러울 겁니다. 오늘은 그냥 쉬게 놔두시고 내일 상태 좀 나아지면 그때 들어가 보시게 도와드릴게요.”“감사합니다 선생님!”“아닙니다.”감격 어린 허영지의 말에 의사가 한마디 더 보탰다.“환자가 아직은 본인 몸 상태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면회하실 때도 다리 절단한 사실은 일단 말하지 마세요. 환자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